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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원의 대중문화 속으로

大選用 영화와 ‘영화 정치’

영화 통해 正體性 확인… 大選 영향은 적어

글 :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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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에 전태일 다룬 애니메이션 〈태일이〉, 金大中의 1971년 대선 다룬 〈킹메이커〉 개봉
⊙ 2007년 〈화려한 휴가〉, 2012년 〈남영동〉 〈26년〉… 2017년 〈택시운전사〉 〈1987〉은 탄핵으로 꼬여버렸지만 흥행에는 성공
⊙ 미국에서는 보수 측도 〈2016: 오바마의 미국〉 〈힐러리의 미국: 민주당의 비밀 역사〉 등 만들어
⊙ 우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영향 미치는 대중문화에 무관심

이문원
《뉴시스이코노미》 편집장, 《미디어워치》 편집장, 국회 한류연구회 자문위원, KBS 시청자위원, KBS2 TV 〈연예가중계〉 자문위원, 제35회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역임 / 저서 《언론의 저주를 깨다》(공저), 《기업가정신》(공저), 《억지와 위선》(공저) 등
2021년 12월에 개봉한 〈태일이〉와 〈킹메이커〉. ‘대선용 영화’ 논란이 나오고 있다.
  2021년 12월 1일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 〈태일이〉가 전국 극장가에서 개봉했다. 제목에서 어느 정도 유추(類推)할 수 있듯, 봉제노동자이자 노동운동가였던 실존 인물 전태일의 삶을 다룬 영화다. 이런 소재를 실사(實寫) 극영화나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태일이〉는 흥미로운 제작 배경을 갖고 있다. 실제 제작을 맡은 명필름, 스튜디오 루머와 함께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질라라비와 전태일재단이 공동 제작에 나섰다. 제작 단계부터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1만 명 넘는 시민들로부터 2억원에 가까운 모금을 달성했고, ‘태일이와 친구들’ 참여운동으로 전국에서 1970명의 제작위원을 모아 후원을 받기도 했다. 대기업 자금을 받지 않겠다는 취지에서다. 하지만 공적(公的) 개념의 지원은 받았다. 〈태일이〉는 서울특별시청 산하 서울산업진흥원의 2017년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지원 사업과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영화진흥위원회의 2018년 애니메이션 영화 장편 제작지원 사업에 각각 선정돼 양쪽으로부터 자금 등의 지원을 받았다. 이은 명필름 대표이사는 《노동과 세계》 2021년 11월 11일 자 인터뷰 기사 ‘〈태일이〉, 110만 민주노총에서 시작할 우리 스스로의 영화’에서 “코로나19 시대니까, 이렇게 정리해보겠다. 신(新)자유주의라는 바이러스에 대항하기 위해 전태일 백신을 맞자. 노동자 정신을 지키는 백신으로 〈태일이〉는 기능할 것”이라고 했다.
 

  한편 12월에 개봉할 또 다른 한국 영화도 눈에 띈다. 1970년 신민당 대통령 경선 이후 김대중(金大中)과 그를 도왔던 ‘선거의 귀재(鬼才)’ 엄창록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킹메이커〉다. 영화에서는 김운범과 서창대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등장하지만, 이미 제작 단계부터 1960~1970년대의 김대중 일화라는 점을 스스로 널리 알렸다. 110억원이라는 거대 제작비가 투여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CJ ENM에서 투자와 배급을 맡으려다 포기하고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12월 말로 개봉이 예정돼 있다.
 
 
  大選용 영화?
 
  두 영화 모두 개봉이 한참 밀린 경우다. 〈킹메이커〉는 2019년 7월에 촬영을 마쳐 2020년 개봉 예정이었고, 〈태일이〉도 전태일 50주기인 2020년에 맞춰 개봉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극장가가 얼어붙으며 개봉이 한 해씩 미뤄졌다.
 
  그럼에도 둘 다 ‘12월’로 개봉이 집중된 점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의견이 많다. 12월은 이미 할리우드 대히트작 속편들로 개봉 일정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고스트버스터즈〉 〈스파이더맨〉 〈킹스맨〉 〈매트릭스〉의 속편들 개봉이 한꺼번에 12월로 몰려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본래 학생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시즌은 어지간한 규모 한국 영화라도 살아남기 힘든 시기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두 영화가 굳이 이 시기에 출사표(出師表)를 내던진 이유는 다소 간명할 수 있다. 이른바 2022년 3월 9일로 예정된 대선(大選)을 앞둔 ‘대선용 영화’로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선용 영화’는 대선이 있는 해 또는 그 근방의 시기에 쟁점(爭點)이 될 수 있는 정치적 소재의 영화를 내놓아 한창 달아오른 대중의 정치 열기에 편승해 관심을 모으고 그를 통해 흥행 성공을 꾀하는 영화들을 가리킨다. 두 영화 모두 시기상 기획 단계부터 ‘대선용’으로 만들어졌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최소한 개봉 일정을 잡는 과정에서는 분명 이 같은 점을 감안했으리라는 예상이다.
 
  ‘대선용 영화’는 영화계 내부에서도 종종 쓰이는 말이다. 필자도 ‘대선용 영화’ 또는 ‘선거용 영화’라는 표현을 영화계 관계자들로부터 그간 종종 들어왔다. 이런 영화들은 보통 기획 단계부터 대선이 있는 해의 어느 시점에 개봉할지까지 사전(事前)에 결정한 뒤 만들어진다는 후문이다. 이번 대선의 경우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개봉이 밀리거나 제작이 불투명해진 영화들이 많아 그렇게 시계태엽처럼 정교하게 작동한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2007년 대선 앞두고 개봉한 〈화려한 휴가〉
 
2012년 대선을 앞두고 개봉한 〈남영동1985〉와 〈26년〉.
  한국에서 이 ‘대선용 영화’의 획을 그은 사례로는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여름에 개봉한 〈화려한 휴가〉가 주로 꼽히곤 한다. 1980년의 광주(光州) 5·18을 소재로 90억원이 넘는 제작비를 들여 만들어낸 블록버스터로서, 개봉 당시 73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는 대성공을 거뒀다.
 
  그렇게 한 번 성공 사례가 만들어지니 이후로도 비슷한 발상의 기획들이 연이어 등장했다. 바로 다음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선 대선을 코앞에 둔 11월 22일에 정치인 김근태(金槿泰)씨가 1985년 민청련 사건으로 구속돼 남영동 대공분실(對共分室)에서 고문당한 사건을 그린 〈남영동1985〉가, 일주일 뒤인 11월 29일에는 그보다 큰 규모로 제작된 영화 〈26년〉이 개봉했다.
 
  인기 웹툰 원작으로 두 영화 중 보다 상업성이 강했던 〈26년〉은 〈화려한 휴가〉처럼 5·18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좀 더 과격한 내용이다. 1980년 5월의 광주와 연관된 조직폭력배, 국가대표 사격 선수, 현직 경찰, 대기업 총수, 사설 경호업체 실장 등이 그로부터 26년 뒤에 모여 5·18의 주범인 ‘그 사람’을 처단하기 위해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와도 같은 연희동 저택으로 침투하려 하는 내용이다. 소셜 펀딩을 통해 1만5000여 명으로부터 7억여원의 모금을 거둬 제작에 들어간 것으로 유명하다. 정치적 소재를 담은 장편 상업영화로서 크라우드 펀딩의 시초가 됐다고도 볼 수 있다. 〈26년〉은 대선 직전인 12월 16일까지 250만 관객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하다 같은 달 12월 19일 대선 이후 특수(特需)가 다한 탓에 296만 관객으로 흥행을 마감했다. 그래도 물론 상업적으로 대성공이었다.
 
 
  ‘대선 뒤풀이 영화’가 된 〈택시운전사〉와 〈1987〉
 
당초 2017년 대선을 겨냥하고 만들어진 〈택시운전사〉와 〈1987〉은 문재인 정권 출범 후 개봉됐으나, 흥행에는 성공했다.
  2017년 대선은 이들 ‘대선용 영화’에 있어 ‘상황이 꼬인’ 대선으로 일컬어진다. 애초 대선은 12월에 치러졌어야 했지만, 3월 10일 헌법재판소가 재판관 전원 일치로 박근혜(朴槿惠)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인용, 대통령 궐위(闕位) 시 60일 이내에 조기(早期) 선거를 치러야 한다는 규정에 따라 5월 9일 대선이 치러졌기 때문이다. 이해의 ‘대선용 영화’로는 〈화려한 휴가〉 〈26년〉과 동일하게 5·18을 다룬 〈택시운전사〉가 여름 개봉,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을 다룬 〈1987〉이 가을과 겨울 개봉으로 잡혀 있었다. 대선 정국의 분위기를 타고 흥행을 노리던 영화들이 갑자기 ‘대선 뒤풀이 영화’가 돼버렸다는 허탈함과 불안감을 필자도 당시 극장 관계자들로부터 들은 바 있지만, 두 영화는 모두 흥행에 성공했다.
 
  8월에 개봉한 〈택시운전사〉는 무려 1219만 관객을 동원하는 대히트작이 됐다. 12월에 개봉한 〈1987〉도 그 시절을 추억하는 586세대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 예상을 뛰어넘는 723만 관객 동원에 성공했다.
 
  이 두 영화의 성공은 어떤 의미에서 ‘대선용 영화’의 존재가치를 의심케 하는 광경이 됐다. 대선 정국이든 아니든 정치적 소재 영화는 분위기만 잘 타면 된다는 인상을 심어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결국은 대통령 탄핵부터 조기 대선까지 유례없는 정치적 광풍(狂風)을 겪으며 쉽사리 흥분이 가시지 않은 대중의 관성(慣性)적 열기에 기인했다는 입장 또한 존재한다.
 
 
  영화 통해 正體性 확인
 
  어찌 됐건 그렇게 2022년 대선을 앞둔 지금이다. 과연 한국 영화산업에서 2017년을 겪으며 ‘대선 특수’를 더 이상 생각지 않게 된 것인지, 아니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많은 가능성이 사라지고 영화 제작 자체가 어려워지며 ‘대선용 영화’를 준비하고 싶어도 못 하게 된 것인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팬데믹으로 밀린 몇몇 영화들 개봉을 가능한 한 대선에 가까운 시점으로 옮겨놓는 정도 외에는 할 수 있는 일 자체도 딱히 없던 터이니까.
 
  가끔씩 영화 기자들과의 만남 자리에서도 이들 ‘대선용 영화’에 대해 얘기를 꺼내면 이를 부정하는 입장도 적지 않다. 한국처럼 정치 과잉(過剩)인 환경에서 정치인이나 정치 상황 소재, 또는 직접적으로 관계없더라도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영화들은 1년 내내 사시사철 안 나오는 때가 없는데 굳이 그런 개념이 필요하냐는 입장들이다.
 

  물론 그도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니다. 예컨대 노골적인 정치영화로서 등장한 〈변호인〉이 1138만 관객을 모은 때도 대선과는 아무 상관 없는 2013년 겨울이었고, 10·26사건을 다룬 〈남산의 부장들〉 역시 대선과는 상관없는 2020년 1월 개봉해 475만 관객을 동원했다. 우파(右派)적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볼 수 있는 〈국제시장〉도 2014년 겨울, 〈인천상륙작전〉도 2016년 여름이다. 한국은 원래 이렇다. 정치가 사회는 물론 문화 부문에서도 늘 존재감을 잃지 않고 그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대선용 영화’는 좀 성격이 다르다. 어디까지나 개개인의 이데올로기적 정체성(正體性) 확인을 위한 영화다. 그리고 그를 통해 세(勢) 결집 기분을 맛보게 해주는 영화다. 그러려면 그 해석과 입장에 있어 각 이데올로기 진영 간 차이가 크게 벌어지는 유명 사건들을 소재로 삼아야 한다. 대선 시즌 개봉되는 정치영화들 대부분이 5·18 소재인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뜨겁게 의견 차가 벌어지는 사건이니만큼 이를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는지부터가 이미 이데올로기적 정체성이 되고, 하나의 세를 이루게 된다는 것. 그러면서 가장 관심이 모이는 대선 후보 중 누가 그 영화를 관람했고 누구는 관람하지 않았는지가 언론보도 소재가 돼 추가 홍보요소로서 작용하게 된다.
 
 
  ‘영화정치’
 
2007년 9월 〈화려한 휴가〉 시사회에 참석한 정치인들. (오른쪽부터) 손학규, 한명숙, 정동영, 천정배. 사진=조선DB
  ‘대선용 영화’의 포문을 열었다는 〈화려한 휴가〉만 해도 그렇다. 당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물론 열린우리당 대선 주자들 전체가 앞 다퉈 영화를 관람했다. 이를 두고 언론에서는 ‘관람경쟁’이라는 표현까지 썼었다. 한나라당에서도 박근혜 경선 후보가 8월 4일 광주에서 〈화려한 휴가〉를 관람한 뒤 “광주의 희생에 보답하겠다”는 소감을 밝혔고, 이명박(李明博) 후보도 같은 날 광주에서 영화를 관람하려다 박 후보와 일정이 겹친 것을 알고 뒤늦게 취소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각 후보가 ‘5·18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대변해주는 이른바 ‘영화정치’ ‘문화정치’의 진면목이 바로 ‘대선용 영화’에서 정점(頂點)에 이르게 되는 셈이다.
 
  이러니 평소 대중문화에 별 관심 없는, 정치와 사회 문제 등에 주로 관심 있는 중장년 남성층이라도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극장 나들이를 이들 대선 주자들이 본 정치영화로 정하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렇게 흥행 성공으로의 길도 쉽게 열린다.
 
  그런데 많은 이가 궁금해할 만한 부분, 즉 이들 ‘대선용 영화’가 현실 정치, 그중에서도 선거 그 자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결론이 나온다. 단적으로 말해, 영향은 극히 적다고 볼 수 있다. 언급했듯, 이들 영화는 각자의 이데올로기적 정체성 확인을 위한 영화이며, 그를 통해 세 결집에 가담하는 동질감(同質感)을 주는 역할에 가깝기 때문이다. 쉽게, 애초 어느 한쪽을 지지해 그리로 투표를 할 사람들이 그에 맞는 ‘대선용 영화’를 보는 식이다.
 
  예컨대 〈화려한 휴가〉 때만 해도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의 불안감은 어마어마했다. 영화를 보고 감명받은 관객들이 일제히 열린우리당에 표를 주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여당 열린우리당 측에서는 기대감이 팽배(澎湃)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당시 여당 내부에선 “〈화려한 휴가〉가 500만 관객을 넘어서면 여당의 승리”라는 장밋빛 전망까지 나돌았다고 당시 언론들은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다들 알다시피, 정작 실제 대선은 꾸준히 이명박 후보의 압도적인 우세 속에 진행되다 결국 변수 없이 이 후보의 압승(壓勝)으로 끝났다. 〈화려한 휴가〉의 개봉 이후 행해진 갖가지 여론조사에서도 이렇다 할 영향을 준 흔적은 내내 보이지 않았다.
 
  2012년 대선도 마찬가지다. ‘대선용 영화’라 보기는 어렵지만 9월에 〈광해, 왕이 된 남자〉가 개봉해 개혁적이고 진보적이며 소탈한 지도자상을 보여주며 1232만 관객을 동원했지만, 이때 역시 대선은 박근혜 후보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그리고 2017년에는 그런 영화가 실제로 기능할 틈조차 없었다.
 
  결국 ‘대선용 영화’란 그야말로 영화산업 내부에서만 일종의 흥행 툴(tool)로서 기능하는 형태일 뿐, 정치권에서 이렇다 하게 의식하며 긴장해야 할 위협요소라 보기는 참 어렵다는 얘기다. 그렇게 역할 해본 적도 없고, 애초에 영화 한 편 보고 표심(票心)을 바꿀 만큼 격정적이고 즉흥적인 성인 유권자도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투표에 딱히 열의가 없던 사람이 굳이 투표하러 나가게끔 하는 계기는 될 수 있지 않으냐는 의견도 존재하지만, 한국처럼 애초에 대선투표 참여율이 극도로 높은 분위기에선 나올 만한 얘기가 아니다.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
 
마이클 무어 감독의 〈화씨9/11〉.
  ‘대선용 영화’는 당연히 한국에만 있는 개념은 아니다. 예컨대 세계 대중문화의 메카 미국에도 똑같은 성격의 ‘대선용 영화’들이 존재한다. 보통 그 시초를 2004년 미국 대선을 끼고 등장했던 마이클 무어 감독의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화씨 9/11〉로 본다. 〈화씨 9/11〉은 극도로 집요하고 노골적으로 당시 재선을 노리던 조지 W. 부시 정권을 공격하며 9·11 테러 이후 부시 정권이 어떤 식으로 국민들을 우롱하며 정신적으로 지배했는지 숱한 과장과 조롱을 섞어 123분 동안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 마무리에선 “한 번 더 속으면 바보”라는, 사실상 선거운동 격 내레이션으로 끝내기까지 한다.
 
  〈화씨 9/11〉은 그해 5월의 칸국제영화제에서 반미적(反美的)인 유럽 비평계의 열화와 같은 찬사를 받으며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그렇게 홍보 발판을 마련해 북미(北美)에서 6월에 개봉, 불과 600만 달러의 제작비로 개봉 첫 주말에만 무려 2400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총 1억1900만 달러 수익을 거둬들이면서 다큐멘터리 영화 사상 최고 흥행기록을 세웠다. 이 기록은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깨지질 않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흥행 열기와 관계없이, 모두들 알다시피, 그해 미국 대선은 조지 W. 부시의 승리로 끝났다. 그것도 2000년 첫 당선 당시보다 훨씬 압도적인 지지를 통해서 말이다. 한국에서의 ‘대선용 영화’ 본질과 다른 점이 없다. 정치에,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사전 선거운동 무기가 아니라 그저 대선 분위기에 편승하는 일종의 시즌 상품에 불과하다는 점 말이다.
 
 
  트럼프 저격에 실패한 〈더 퍼지: 심판의 날〉
 
〈더 퍼지: 심판의 날〉.
  한편 극영화(劇映畫) 쪽에서도 이런 것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공포영화 시리즈 〈더 퍼지〉 3편이 아예 제목에도 〈더 퍼지: 심판의 날(원제: 선거의 해・Election Year)〉이라고 달고 2016년 미국 대선을 4개월여 앞둔 7월에 개봉한 사례를 들 수 있다.
 
  〈더 퍼지〉는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라 불리는 보수(保守) 정치 집단이 권력을 잡고 1년 중 하루, 12시간 동안 살인 등 모든 범죄를 용납해주는 ‘퍼지’ 정책을 내놓아 미국 문화 속에 자리 잡도록 한다는 설정이다. 그 와중에도 부유층은 안전시설을 완비해놓아 아무 문제 없지만 빈곤층은 서로서로 죽어 나가고, 그렇게 정부는 빈곤층에 대한 복지비용을 줄이려 한다는 설정의 끔찍한 우파 혐오 시리즈다. 2016년 미국 대선을 맞아 내놓은 그 3편은 이 ‘퍼지’에 반기를 든 진보(進步) 세력이 ‘건국의 아버지들’과 대선에서 맞붙는다는 설정으로, 영화 포스터에 아예 당시 공화당 대선 후보였던 도널드 트럼프의 선거 캐치프레이즈, ‘다시 미국을 위대하게(Let’s Make America Great Again)’를 대놓고 적어서 홍보했다. 도널드 트럼프의 공화당이 곧 영화 속에서 빈곤층을 학살하는 ‘건국의 아버지들’과 같은 이들이라는 선동을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담았다. 흥행 전략상으로도 정확히 민주당 지지층만을 고조시켜 관객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계산이었던 셈이다.
 
  〈더 퍼지: 심판의 날〉은 그렇게 흥행에 성공해 북미 지역에서만 7900만 달러를 벌어들였고, 시리즈 사상 최고 흥행기록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해의 대선은 영화의 흥행과 관계없이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의 승리로 끝났다.
 
 
  미국에서는 右派 大選用 영화도 흥행 성공
 
〈2016: 오바마의 미국〉.
  미국의 ‘대선용 영화’들 또한 정확히 시즌을 노린 전략과 위협적인 흥행, 그리고 흥행 결과와 아무 상관 없는 허탈한 실제 대선 결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한국의 ‘대선용 영화’와 다를 것이 없지만, 한 가지 크게 다른 점이 있다. 미국에서는 민주당 편향, 그러니까 좌파(左派) 편향의 영화뿐 아니라 우파 편향의 ‘대선용 영화’도 함께 등장해 정확히 같은 맥락에서 흥행에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2012년 미국 대선 당시 등장했던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2016: 오바마의 미국〉이 있다. 2012년 대선 정국에서 7월에 개봉해 화제를 모으며, 비록 〈화씨 9/11〉 정도의 열풍까지는 못 미쳤지만, 250만 달러의 적은 제작비로 무려 3300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히트를 기록했다.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해 그의 좌파 정책대로 계속 간다면 다음 선거의 해인 2016년에 미국은 이런 악몽 같은 현실을 살고 있을 것이라 위협하는 내용이다. 엄밀히 〈화씨 9/11〉과 크게 다르지도 않은 태도다. 그리고 물론, 그렇게 유의미한 흥행 성적을 보였음에도 그해 말 대선은 오바마 대통령의 승리로 돌아갔다.
 
  어찌 됐건 흥행상으로는 대성공을 거둔 〈2016: 오바마의 미국〉의 두 감독, 디네시 디수자와 브루스 스쿨리는 2016년, 이번에는 도널드 트럼프 후보와 맞선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겨냥해 〈힐러리의 미국: 민주당의 비밀 역사〉를 내놓고 민주당의 위선적인 역사와 클린턴 부부의 행적들을 고발했다. 〈힐러리의 미국: 민주당의 비밀 역사〉 역시 500만 달러 제작비로 1300만 달러의 흥행수익을 거두는 데 성공한다. 이번에는 감독들이 원하는 대로 공화당이 승리했지만, 흥행수익은 오히려 2012년 당시보다 절반 이하로 뚝 떨어진 셈이다.
 
 
  문화생태계
 
〈노무현입니다〉.
  어찌 됐건 이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치적 영향력과 관계없이, 그저 대선 정국에서 뜨겁게 달아오른 특정 이데올로기 진영의 세를 이용해 영화를 보게 한다는 목적하에서도 미국은 좌파 진영만큼이나 우파 진영도 같은 전략으로 상업적 성공을 거두며 하나의 독립된 문화 생태계(生態系)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 말이다. 그에 반해 한국에선 이렇다 할 우파적 ‘대선용 영화’라는 게 제대로 나오지도 못하는 실정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먼저 보수적인 태도를 지닌 우파 지지자들은 애초 대중문화 소비가 상대적으로 적다는 인식이 존재하고, 이는 딱히 틀린 얘기도 아니다. 한국만 그런 것도 아니라 미국도 마찬가지여서, 위 〈화씨 9/11〉과 〈2016: 오바마의 미국〉 사이 4배 가까운 흥행수익 차이로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만큼 흥행에 대한 불안요소가 많아 쉽게 투자가 이뤄지지 못한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사실 좌파적 ‘대선용 영화’라 해서 온전히 흥행 기대치만으로 투자가 이뤄지는 건 또 아니다. 그럴 때 좌파적 영화들은, 서두의 〈태일이〉 사례처럼, 공적 개념의 지원이 상대적으로 쉽게 이뤄지는 경향이 강하다. 예시는 〈태일이〉 외에도 많다. 2017년 조기 대선이 끝난 뒤에 개봉한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노무현입니다〉가 한 예다. 2016년 6월 제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지만 제작비 마련에 어려움을 겪다가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인 민주당 김승수 전주시장이 제작 지원 프로그램 ‘전주시네마프로젝트’ 작품으로 〈노무현입니다〉를 선정해 총 제작비 3억원 중 1억원을 지원한 게 종잣돈이 됐다. 이후 펀딩을 통해 제작비를 추가로 마련, 조기 대선 이후 개봉한 〈노무현입니다〉는 불과 개봉 3일 만에 손익분기점인 관객 20만을 돌파하고 최종적으로 185만 관객을 동원해 제작비 대비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우파적 영화는 이런 식으로 공적 개념으로부터 지원을 받거나 ‘그럴 것 같다’는 분위기만 돌아도 그간 공적 개념에 기대 성립돼온 기존 문화계 카르텔로부터 어마어마한 반발과 각종 시위, 언론 플레이 등에 휩싸이기 일쑤다. 그리고 그래서 포기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최소 지난 10여 년에 걸쳐 수없이 반복돼온 사연이다. 그렇게 ‘대선용 영화’의 현실도 미국과 한국 사이에 큰 차이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
 
 
  우파, 대중문화의 힘에 대해 무관심
 
  큰 차원에서 〈태일이〉나 〈킹메이커〉 같은 ‘대선용 영화’, 아니 어느 시기건 등장하는 각종 좌파적 메시지를 담은 영화들에 대한 우파 진영의 불안과 공포, 알레르기 반응은 상당 부분 대중문화 자체에 대한 무관심에서 온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 본질과 실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거나 관찰해본 적이 없으니 더더욱 그렇고, 반대로 좌파 진영에선 그를 매우 심각하게 여기고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으니 불안과 공포는 더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실 본질은 언제나 ‘대선용 영화’와 크게 다를 게 없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수많은 정보가 쏟아져 나오는 시점에 영화나 드라마 한 편, 노래 한두 곡 듣고 갑자기 정치적 성향이 바뀌어버린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기 힘들다. 진정한 문제는 여기까지 확신을 하고 난 다음의 일이다. 막상 눈앞에 보이는 선거, 코앞으로 닥친 정치·사회적 사안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점을 납득하고 나면, 바로 원위치로 돌아가 대중문화 분야에 대해 관심을 꺼버리는 게 우파 진영의 태도다.
 
  대중의 의식 형성에 문화적 영향이란 ‘아예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표 한 장 왔다 갔다 하는 차원이 아닐 뿐이다. 어떤 의미에선 그보다 훨씬 뿌리 깊은 영향을 미친다고도 볼 수 있다. 바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영향을 준다. 사고(思考)가 이데올로기라는 이름으로 구체화되기 이전 단계, 즉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며 이해하는 자세, 타인에 대한 선망과 질투, 애정, 증오 등 다양한 인간 감정들을 대하는 태도 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게 문화다. 그런 점에서 기존의 좌파적 문화 콘텐츠와는 다른 생각과 감성을 보여주는 콘텐츠, 그런 콘텐츠 전반을 제공할 독립된 문화예술 생태계의 구축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결국 콘텐츠의 선택은 대중 각자의 몫이니 그런 콘텐츠가 실제로 선택될지의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당장 시장에서 만날 수 있는 것과 아예 있지도 않은 것의 차이는 크다.
 
 
  뉴미디어로 이동하는 大選用 콘텐츠
 
  끝으로, 이번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선용 영화’ 수혜를 입을지 모를 콘텐츠는 사실 〈킹메이커〉나 〈태일이〉 같은 극장용 영화가 아닐 수도 있다. 둘 다 액면 그대로 ‘개봉이 밀린’ 정치영화들일 뿐 이런저런 ‘대선용 영화’ 요건에 잘 들어맞는다고 보긴 힘들다.
 
  그런 점에서 진정한 수혜자는, 12월 18일부터 내년 2월 6일까지 종합편성채널 JTBC와 OTT 디즈니플러스에서 공개될 드라마 〈설강화〉가 될 가능성이 높다.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로서, 이미 시놉시스가 공개된 지난 3월 극중 주인공이 민주화운동을 하는 대학생이자 북한에서 보낸 남파간첩이기도 하다는 설정 탓에 엄청난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이에 JTBC 측은 “미완성 시놉시스의 일부가 온라인에 유출되면서 특정 문장을 토대로 각종 비난이 이어졌는데 이는 억측에 불과하다”는 입장을 내놓았지만, 어찌 됐건 대선 바로 전달까지 계속될 방영시기와 맞물려 상당한 노이즈 마케팅 효과를 볼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고 보면 미국에서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등장한 가장 노골적인 반(反)트럼프 문화예술 콘텐츠는 영화가 아니라 케이블 채널 FX와 OTT 넷플릭스를 통해 공급된 2017년 드라마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시즌7이었다는 얘기도 나온다. 역시 미디어 다양화 시대, 각종 ‘대선용’ 문화 콘텐츠의 출구도 점차 올드미디어에서 뉴미디어로 이동되는 듯싶다. 시야를 넓혀 관심을 기울여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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