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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해 지금을 읽는 ‘新당의통략’ 〈9〉

임진왜란과 黨爭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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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직후 東人 축출, 西人 정권 복귀… 이후 南人(유성룡)-西人(윤두수) 공동정권으로
⊙ 南人, 임진왜란 중에도 ‘정여립의 난’ 때 죽은 최영경을 문제제기 하며 黨爭 불붙여
⊙ 대체로 이순신은 南人, 원균은 西人이 옹호
⊙ 선조, 전쟁 말기로 가면서 對日 강경론자인 北人으로 기울어… 전쟁 끝나자마자 유성룡 탄핵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충무공 이순신
  1592년 4월 13일 일본이 바다를 건너 조선을 침략했다. 당시 서인(西人)들은 대부분 유배를 가 있었다. 조정의 실권(實權)은 동인(東人)이 쥐고 있었다. 영의정 이산해(李山海), 좌의정 유성룡(柳成龍), 우의정 이양원(李陽元)이 3정승이었는데 동인 중에서 뒤에 북인(北人)이 되는 이산해, 남인(南人)이 되는 유성룡이 주축이었다. 이양원도 이황(李滉)의 문인이니 유성룡과 가까웠다.
 
  일본군이 보름도 안 돼 한양까지 밀고 올라오자 선조는 궁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몽진(蒙塵)에 나섰다. 같은 해 5월 2일 개경에 도착했을 때 백성들이 길을 막고서 ‘정철(鄭澈)을 불러들이라’고 소리 질렀고, 신하들은 ‘이산해가 나라를 망쳤다’고 지목했다. 이에 신하들과의 격론 끝에 이산해는 유배형에 처하고, 유성룡은 그나마 좌의정에서 내쫓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다시 서인의 시대가 열렸다. 바로 다음 날 최홍원이 좌의정, 귀양 갔던 윤두수(尹斗壽)가 우의정에 제수되었다가, 곧바로 두 사람은 각각 영의정과 좌의정에 제수된다. 더불어 함경도 강계로 유배 갔던 정철도 불러올린다. 임진왜란이 서인의 시대를 열어준 것이다.
 
  이렇게 된 데는 전쟁 발발 가능성을 두고서 동인과 서인이 각기 다른 입장을 보였는데, 결과적으로 서인 황윤길의 진단이 옳았다는 것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실록에는 그가 정승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1591년에 일본이 우리나라에 명(明)나라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고 했을 때 윤두수가 가장 먼저 중국에 그것을 고할 것을 청했다. 이 때문에 임진년의 난리가 일어났을 때 중국이 끝내 우리나라를 의심하지 않았다. 상(上)이 이 일로 그를 인재로 여겨 드디어 재상의 지위에 이르렀다.”
 
 
  南人-西人 공동정권
 
  같은 서인이지만 윤두수는 정철처럼 날이 서 있지 않았고 성품도 온화해 남인과도 크게 대립하지 않았다. 또 큰일에 임해서는 직언을 아끼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유성룡이 영의정으로 복귀해, 남인 영의정에 서인 좌의정의 공동정권이 만들어졌다.
 
  전쟁 발발 1년 반이 지난 1593년 10월 1일 선조는 한양으로 돌아왔다. 이때는 명나라가 일본과 추진하는 강화(講和)협상이 조정의 뜨거운 감자였다. 그런데 이 문제에 관한 한 유성룡과 윤두수는 같은 입장이었다. 즉 두 사람은 중국의 경우 언제나 주변 국가들에 대해 직접 통제보다는 간접 통제를 선호한다며 ‘기미론(羈縻論)’, 즉 강화를 주장했다. 그러나 선조는 초지일관 강화를 반대하며 일본에 대한 철저한 응징을 내세웠다.
 
  기미론은 특히 전쟁 후반기로 갈수록 선조의 미움 대상이 되면서 정권의 축(軸)이 서인과 남인 모두를 떠나 의병(義兵) 참여가 많았던 북인 쪽으로 옮겨가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전쟁이 일어난 지 2년이 지난 1594년에 이르면 권세를 회복한 남인들이 다시 ‘정여립(鄭汝立)의 난’ 때 죽은 최영경(崔永慶) 문제를 들고나온다. 사실 이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전쟁 중에도 당쟁(黨爭)이라니! 이건창(李建昌)은 《당의통략(黨議通略)》에서 이렇게 통탄한다.
 
  〈이때는 종묘나 사직의 터에 풀만 나고 여러 가지 일들이 처음 시작하는 것과 같아 어수선한데 대사헌 김우옹(金宇顒)의 무리가 제일 먼저 정철의 죄를 논의하며 말했다.
 
  “최영경이 원통하게 죽은 것이 병화(兵禍)를 부른 것이다.”
 
  또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서는 정엽(鄭曄)과 신흠(申欽)이 (같은 서인인) 정철을 두둔하고 김우옹을 배척했는데 선조는 이에 정엽의 무리를 파면시켰다. 김우옹은 비록 정인홍(鄭仁弘)과 정여립을 좋아했으나 유성룡을 더욱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마침내 남인이 됐다.〉
 
 
  윤두수 탄핵
 
  군주의 필수 덕목인 강명(剛明) 중에서 한결같음[剛]은 모자라고 눈 밝음[明]은 뛰어난 편인 선조는 마음이 점점 서인을 떠나 남인 쪽으로, 그리고 다시 북인 쪽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같은 해인 1594년 10월 20일 마침내 사헌부에서는 좌의정 윤두수를 향해 포문을 열었다.
 
  “좌의정 윤두수는 본래 성품이 음흉한데다가 탐욕스럽고 교활하여 간신(奸臣)이 국사를 담당하고 있을 때에 그의 사주를 받아 선사(善士)를 해쳐 (정여립의 난 당시 두수는 대사헌으로 최영경을 논핵했다) 옥중에서 굶주림과 추위에 죽게 하였고, 죽은 뒤에는 자진(自盡)하였다는 말을 지어내 무고한 사람으로 하여금 구천(九泉)에서 원통함을 품게 하였으니, 그의 마음씀이 매우 음흉하고 참혹합니다.
 
  그리고 변란이 일어난 초기에 파천(播遷)할 적에는 조정에 들어와 법을 한 손에 쥐고 전권(專權)을 자행하면서 국가의 위급함은 생각지 않고 오직 재물을 모아 자신을 살찌우는 것만 일삼아 아첨하는 무리를 열읍(列邑)에다 배치시켜 놓음으로써 뇌물이 모여들고 채단(彩段)이 무더기로 쌓여 사방에서 못된 짓을 본받아 탐욕스러움이 풍습을 이루었습니다.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만이 침 뱉고 욕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장수도 비루하게 여겼습니다. 또한 뛰어난 이를 질투하고 공 있는 이를 시기하며 언로(言路)를 막음으로써 인심이 흩어지고 국사가 날로 잘못되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조야(朝野)의 모든 사람이 누군들 분통스럽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3도의 체찰사(體察使)가 됨에 있어서는 맡은 책임이 매우 중한데도 탐욕스럽고 비루한 습관을 고치지 못하여 뇌물이 문전에 운집(雲集)하고 짐바리가 도로에 끊이질 않았습니다.”
 
  요약하면 두 가지인데, 하나는 최영경 죽음에 관련됐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막연히 권세를 휘두르며 뇌물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선조의 반응이 미지근하다.
 
  “좌의정이 어찌 그러했겠는가? 이러한 때에 중임을 맡은 대신을 어찌 논하겠는가?”
 
  이는 사실상 상소의 내용은 인정하되,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반응이다. 그냥 있는 남인들이 아니다. 이때부터 사헌부와 사간원이 경쟁이라도 하듯 매일 한 건씩 윤두수의 체직(遞職)을 청하는 소(疏)를 올렸고, 결국 11월 1일 윤두수는 중추부 판사로 물러나게 된다. 일단 2선으로 물린 것이다. 전란 초기 2년 동안 국난 수습에 큰 공을 세운 정승에 대한 예우라 할 수 없다. 당쟁의 시대였다. 윤두수가 물러난 좌의정 자리는 유성룡, 김응남(金應南), 정탁(鄭琢)이 번갈아 맡게 된다.
 
 
  이순신
 
  이순신(李舜臣)은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던 1545년 을사년 3월 8일 한양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가정살림이 어려워 어머니 변씨의 친정이 있는 충청도 아산으로 이사를 갔다. 이순신은 어린 시절을 아산에서 보냈다. 어려서는 두 형을 따라 학문을 익히며 문신(文臣)의 길을 꿈꿨으나 어느 시점에 무인(武人)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이와 관련해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의 장인 방진(方震)이다. 이순신은 20세 무렵 방진의 딸과 결혼했다. 이순신이 무신의 길을 택한 데는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의 권유와 지도가 절대적이었던 것 같다. 아산 현충사 경내에 있는 방진의 비문에는 이순신의 결혼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기록돼 있다. 당시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이 방진에게 이순신과 딸을 결혼시킬 것을 권유했다는 것이다.
 
  22세 때 이순신은 본격적으로 무예를 배우기 시작해 28세 때 처음으로 훈련원 별과에 응시했지만 말을 타다가 떨어져 왼쪽 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낙방했다. 그러고 나서 4년 후인 선조 9년(1576년) 무과에 급제해 함경도 최전방의 권관(權官·임시관리)으로 나간다. 오늘날의 초급장교인 셈이었다.
 
  이후 이순신은 훈련원 봉사, 충청도절도사 군관, 함경도절도사 군관 등을 지내며 사복시 주부에 올랐다. 이후 이순신은 선조 19년(1586년) 북방의 오랑캐들이 난리를 일으키자 조산보 병마만호가 되어 최전방으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8월에는 두만강 내 녹둔도 둔전관을 겸하게 되는데 사정을 돌아본 병마만호 이순신은 이 섬의 위치가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군사를 증원해줄 것을 함경도절도사 이일(李鎰)에게 요청하지만 거절당했다. 이후 실제로 오랑캐가 급습하는 바람에 큰 피해를 입었고 절도사 이일은 그 책임을 이순신과 이경록에게 덮어씌웠다. 그 바람에 두 사람은 파직(罷職)당하고 백의종군(白衣從軍)을 명 받았다. 이일은 그 후에도 계속 이순신의 앞길을 견제했다.
 
 
  不次採用
 
  실록을 보면 선조는 임진왜란이 터지기 몇 해 전부터 왜란의 조짐을 경계하고 있었다. 선조가 1589년(선조 22년) 1월 21일 비변사(備邊司)에 ‘불차채용(不次採用)’의 특명(特命)을 내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것은 서열에 관계없이 능력이 있는 장수들을 뽑아 올리라는 것이었다. 이에 비변사의 3정승과 병조판서 등이 각자 대여섯명씩 후보를 써냈다. 이때 영의정 이산해와 우의정 정언신(鄭彦信)이 각각 이순신을 추천했다. 중복 추천을 받은 것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정언신의 추천이다. 정언신은 이미 이순신을 직접 겪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언신은 명종 21년(1566년) 유성룡과 함께 문과에 급제했고 사헌부 장령, 동부승지 등을 거쳐 함경도 병사로 나가 녹둔도에 둔전을 설치하고 군량미를 비축했다. 이 무렵 이순신과 첫 만남이 있었을 것이다. 이후 한양으로 돌아와 대사헌, 부제학 등을 지냈고 선조 16년(1582년) 오랑캐 니탕개가 침입하자 함경도순찰사로 임명되어 이순신·신립·김시민·이억기 등을 거느리고 격퇴하였다. 이후 함경도관찰사로 임명되어 변경의 방비를 강화해 그 공으로 병조판서에 올랐고, 이때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이순신을 천거한 것이었다.
 
  선조의 불차채용 덕에 이순신은 복직하여 전라도순찰사 이광의 아래에 있다가 정읍현감을 지낸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광은 전라도관찰사로 충청도관찰사 윤선각, 경상도관찰사 김수 등과 함께 관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한양수복 계획을 추진했다. 이때 막료인 권율 등이 곧바로 한양으로 진격할 것을 건의했으나, 이광은 용인에 진치고 있는 왜적을 먼저 공격하기로 했다가 기습을 받아 참패했다. 이때의 문제로 이광은 결국 많은 전공이 있었음에도 파직되어 백의종군하다가 유배를 가게 된다.
 
 
  ‘해군 이순신’ 만든 주역은 선조
 
  한편 선조 24년(1591년) 2월 이순신은 진도군수로 임명되었다가 곧바로 전라좌수사로 특진한다. “이천·이억기·양응지·이순신을 남해의 요충지로 보내 공을 세우게 하라”는 선조의 특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육군 이순신을 해군 이순신으로 변모시킨 주역은 선조다. 물론 거기에는 유성룡의 천거가 있었다.
 
  이순신을 특진(特進)시켜 전라좌수사로 임명하자 대간에서는 반발했다. 아무리 인재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지나친 인사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순신이라는 인물 자체를 선조가 당시에 알았을 리 없지만 서둘러 인재들을 뽑아 전면배치하라고 한 것은 선조였다. 선조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주변 정세의 움직임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 이어진 대간들의 이순신 반대 상소에 대한 선조의 답변에서 그 같은 절박감을 읽어낼 수 있다.
 
  “지금은 상규(常規)에 구애될 수 없다. 인재가 모자라 그렇게 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관작의 고하(高下)를 따질 필요가 없다. 다시 논하여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마라.”
 
  적어도 이순신을 있게 하는 데 선조의 이 같은 결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지워버려서는 안 된다. 선조가 이때 내린 결정의 진가는 1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마자 극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1597년 1월 22일 전라도병마사 원균(元均)은 글을 올려 자신에게 바다를 맡겨줄 것을 청했다. 이에 선조는 닷새 후에 원균을 경상도우수사로 발령을 내렸다. 바로 이날 수군 강화와 관련해 전란 내내 양대 축이라 할 수 있는 영의정 유성룡과 중추부판사 윤두수가 이순신 문제로 충돌한다. 먼저 윤두수가 말했다.
 
  “이순신은 조정의 명령을 듣지 않고 전쟁에 나가는 것을 싫어해 한산도에 물러나 지키고 있어서 이번 대계(大計)를 시행하지 못했으니, 대소 인신(人臣)이 누군들 통분해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마치 이순신이 유성룡의 기미론을 뒷받침하려고 의도적으로 싸우지 않는다는 뉘앙스다. 이에 선조는 적극적으로 화답한다.
 
  “이순신이 어떠한 사람인지 모르겠다. 계미년(癸未年·1583년) 이래 사람들이 모두 거짓되다고 하였다. 이번에 비변사가 ‘제장(諸將)과 수령들이 호령을 듣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비변사가 그들을 옹호해주기 때문이다. 중국 장수들이 못 하는 짓이 없이 조정을 속이고 있는데, 이런 습성을 우리나라 사람들도 모두 답습하고 있다. 이순신이 부산 왜영(倭營)을 불태웠다고 조정에 속여 보고하였는데, 영상(領相·유성룡)이 이 자리에 있지만 반드시 그랬을 이치가 없다. 지금 비록 그의 손으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목을 베어 오더라도 결코 그 죄는 용서해줄 수 없다.”
 
  이에 놀라기도 하고 이미 선조의 마음이 원균을 향하고 있음을 간파한 유성룡은 차츰 말을 바꿔간다. 이날 선조와 유성룡의 대화를 보자.
 
 
  이순신을 버린 선조와 유성룡
 
유성룡
  〈유성룡이 아뢰어 말했다.
 
  “이순신은 한동네 사람이어서 신이 어려서부터 아는데, 직무를 잘 수행할 자라 여겼습니다. 그는 평일에 대장(大將)이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상이 말했다.
 
  “그를 잘 아는가?”
 
  유성룡이 아뢰었다.
 
  “성품이 강의(强毅)하여 남에게 굽힐 줄을 모르는데, 신이 수사(水使)로 천거하여 임진년에 공을 세워 정헌(正憲·정2품)까지 이르렀으니 매우 극단적입니다. 무릇 장수는 뜻이 차고 기가 펴지면 반드시 교만하고 게을러집니다.”
 
  상이 말했다.
 
  “이순신은 용서할 수가 없다. 무장(武將)으로서 어찌 조정을 경멸하는 마음을 갖는가. 우상(右相·이원익)이 내려갈 때에 말하기를 ‘평일에는 원균을 장수로 삼아서는 안 되고, 전시(戰時)에는 써야 한다’고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었다.
 
  “원균은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깊습니다. 상당산성(上黨山城)을 쌓을 때, 원균은 토실(土室)을 만들어 놓고 몸소 성 쌓는 것을 감독하였다 합니다.”
 
  상이 말했다.
 
  “수군의 선봉을 삼고자 한다.”
 
  이순신을 천거한 바 있는 이산해는 한술 더 떠 이렇게 말했다.
 
  “임진년 수전(水戰)할 때 원균과 이순신이 서서히 장계(狀啓)하기로 약속하였다 합니다. 그런데 이순신이 밤에 몰래 혼자서 장계를 올려 자기의 공으로 삼았기 때문에 원균이 원망을 품었습니다.”〉
 
  우리가 알던 상식이 무너져 내리는 장면이다. 유성룡은 적어도 이순신의 한결같은 보호자는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순신은 선조가 뽑아 쓰고 선조가 버렸다.
 
  정유재란(丁酉再亂)이 끝나가고 있었다. 1598년(선조 31년) 11월 19일 자정 남해 노량에서 해전이 시작됐다. 새벽 2시경 직접 북을 두드리며 독전하던 이순신이 적탄에 맞아 사망했다. 한편 11월 23일 좌의정 이덕형(李德馨)은 “11월 19일 왜적이 모두 철수해 바다를 건넜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이순신의 죽음은 11월 24일에 조정에 보고됐다.
 
 
  終戰과 유성룡 탄핵
 
  이덕형이 임진·정유왜란의 종전(終戰)을 고하던 11월 23일 사헌부와 사간원은 공동으로 영의정에서 물러나 있던 유성룡을 삭탈관작(削奪官爵)해야 한다고 아뢰었다. 이에 선조는 “이미 파직시켰다. 어찌 삭탈관작까지 해야겠는가? 그것은 너무 심하다”며 거부했다. 파직과 삭탈관작은 천지 차이였다. 파직이야 다시 복직하면 그만이지만 삭탈관작은 아예 벼슬아치의 명부에서 이름을 지워버리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삭탈관작은 다시 말해 고신(告身)을 빼앗는다는 것으로 사실상 유배를 보내기 직전의 처벌에 준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징비록(懲毖錄)》으로도 유명한 서애(西厓) 유성룡. 그는 선조와 이이가 추진했던 ‘10만 양병’을 반대하고 전쟁 발발의 가능성을 낮춰본 ‘죄’를 입어 임진왜란 초기에는 영의정에서 면직되었다가 다시 선조의 부름을 받아 전쟁 기간 내내 민심 수습과 군비 강화 등에 힘쓴 인물이자, 무엇보다 이순신을 적극 천거하여 남해를 지켜내게 해준 일등공신이다. 그는 왜 임진왜란이 끝난 바로 그날에도 양사의 탄핵을 받고 있는 것일까?
 
  기미(羈縻), ‘굴레’라는 뜻으로 적과 직접 대적하기보다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적을 통제하는 방법을 말한다. 당시 유성룡은 명나라 심유경(沈惟敬)의 대일(對日) 협상론을 지지했다. 그것은 대일 강경론을 고수했던 선조의 뜻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유성룡의 반대파, 즉 북인은 바로 이 점을 물고 늘어졌다. 그러나 유성룡의 능력을 중시했던 선조는 영의정에서 물러난 유성룡에 대한 더 이상의 처벌을 원치 않았다. 《당의통략》은 유성룡에 대해 “비록 강직한 절개는 모자라지만 그 재주와 식견은 중흥공신(中興功臣)의 으뜸”이라고 적고 있다.
 
 
  北人의 대두
 
이산해
  종전을 한 달여 앞둔 선조 31년 10월 8일 선조는 3정승 개편을 단행했다. 영의정을 유성룡에서 이원익으로, 좌의정을 이원익에서 이덕형으로, 우의정을 이덕형에서 이항복(李恒福)으로 교체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약간의 분석을 요한다.
 
  당초 동서붕당이라고 할 때 동인 쪽에는 이황과 조식(曺植)의 문인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고, 서인 쪽에는 이이·정철·성혼의 문인들이 포진해 있었다. 이후 세자 건저의(建儲議) 사건을 계기로 서인에 대한 일대 숙청이 이뤄져 사실상 서인들은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일으킬 때까지는 권력 중심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었다. 동인 서인에 대한 치죄(治罪)의 정도를 놓고는 온건파와 강경파가 분열하게 되었다. 이황 계통의 사람들은 온건파인 남인을 형성했고, 조식 계통의 사람들은 강경파인 북인을 형성했다. 임진왜란 때도 유성룡이 이끄는 남인은 화친을 주장했고, 이산해가 이끄는 북인은 주전론(主戰論)을 내세웠다.
 
  당시 남인에는 유성룡·우성전·이원익·이덕형·이수광·윤승훈·이광정·한백겸 등이 포진해 있었다. 북인에는 이산해를 비롯해 유영경·기자헌·박승종·유몽인·박홍구·홍여순·임국로·이이첨·정인홍 등이 포함돼 있었다.
 
  당시 3정승만 놓고 본다면 마치 남인이 북인에 대해 압도적 우위를 가진 듯이 보인다. 그러나 요직은 북인이 대거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의 유성룡 탄핵은 결국 남인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의 신호탄인 셈이었다. 결국 이들은 유성룡을 ‘나라를 잘못 이끈 소인배’라는 뜻의 ‘오국소인(誤國小人)’이라는 낙인을 찍어 삭탈관작시키는 데 성공한다. 유성룡의 책 《징비록》에는 후손들이 이런 오명을 이어가지 않기 바라는 마음이 글 구석구석에 깔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유성룡의 퇴장은 사실상 북인의 득세를 뜻했다. 유성룡 탄핵 이후 1년여가 지난 선조 33년(1600년) 1월 21일 마침내 이산해는 영의정으로 복귀하게 된다.
 
 
  박충간의 상소
 
  이산해가 영의정에 복귀한 이틀 후인 1월 23일 상산군(商山君) 박충간(朴忠侃)이 붕당의 심화를 우려하는 상소를 올렸다. 특히 그는 당시 정국 상황에 대해 아주 적나라하게 진단했다.
 
  “유성룡이 패퇴하자 신진(新進) 남이공(南以恭)의 무리가 붕류(朋類)를 불러들여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자는 축출하고 동조하는 자는 끌어들여 어지러이 박격(搏擊)하였으므로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였는데 누구도 감히 어쩌지 못하였습니다. 대북(大北)·소북(小北)의 설(說)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다시 골북(骨北)·육북(肉北)·피북(皮北)으로 나뉘어 듣는 사람들을 경악하게 하였습니다. 신은 차마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조는 박충간의 상소를 그 뜻은 칭찬하면서도 저잣거리의 소문을 정리한 수준이라며 내용은 폄하해버렸다. 선조에게 여간한 총애를 받지 않고서는 당쟁의 한복판에서 당쟁의 폐해를 직설적으로 간한다는 것은 사실 정치 생명을 스스로 내던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만큼 박충간은 깊은 총애를 받고 있던 인물이다. 또 그는 특별한 당파에 소속돼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당당하게 할 수 있었다.
 
  여기서 박충간이 비판의 핵심인물로 거론한 남이공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남이공은 선조 23년(1590년) 문과에 장원급제해 사헌부와 사간원, 홍문관 등의 요직을 거쳤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1598년 영의정 유성룡을 축출할 때 이발·정인홍 등 북인이 이끄는 당쟁에 적극 가담해 신진그룹의 지도적 인물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듬해인 1599년 북인이 대북과 소북으로 분열할 때 유영경과 함께 소북의 영수가 되었지만 왕위계승 문제로 유영경과 같이 파직당했다.
 
 
  선조에게 직격탄 날린 곽재우
 
  이틀 후 대사헌 정창연을 비롯한 사헌부 관리들이 박충간을 탄핵하고 나섰다. 같은 날 대사간 이유중을 비롯한 사간원 관리들도 적극 탄핵에 나섰다. 이유는 같았다. 저잣거리의 쓸데없는 이야기를 주워 모아 성상(聖上)의 판단을 흐리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은 자신들의 당파를 비판한 데 대한 반격이었다. 그러나 선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박충간의 상소는 뜻있는 선비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조정의 한 줌도 안 되는 정승 대신들만이 당쟁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 점은 한 달 후인 2월 20일 의병의 화신이자 당시 경상병사를 맡고 있던 곽재우(郭再祐)의 사직상소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여기서 곽재우는 당쟁의 원인이 선조에게서 비롯되고 있다고 노골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신이 듣기로는 조정에 동서남북의 붕당(朋黨)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전하께서는 어느 당이 군자이고, 어느 당이 소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느 당이 군자가 많고 소인이 적으며 어느 당이 소인이 많고 군자가 적다고 여기십니까? 가까이 신임하여 의심하지 않을 현인은 누구이며 의심 없이 멀리 제거해버릴 간인(奸人)은 누구입니까? 전하께서 어찌 현인(賢人)을 가까이하려고 하지 않으시겠습니까마는 그가 어질다는 것을 알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며, 전하께서 어찌 간인을 멀리 하려고 하지 않으시겠습니까마는 그가 간사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대소 군신(群臣)이 붕당으로 분립되어 자기 당으로 들어오는 자는 등용시키고 나가는 자는 배척합니다. 각기 당여(黨與)를 위한 사심(私心)으로 서로 시비를 하면서 날마다 비방하고 공격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깁니다. 그리하여 국세(國勢)의 위급함과 생민의 이해와 사직의 존망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조차 않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전하의 나라를 반드시 위망(危亡)하는 지경에 이르게 한 뒤에야 말 작정인 것이니, 아, 통곡하고 눈물 흘리고 장탄식할 만한 일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날 선조는 정승에 대한 인사를 단행했다. 영의정은 이산해가 그대로 맡았고 좌의정에 정탁, 우의정에 이항복을 임명했다. 정탁은 이산해의 사람이었고 이항복은 당파와는 거리를 두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선조 33년(1600년) 3월 30일 아주 주목할 만한 기사가 실록에 실려 있다.
 
  “아침에 왕세자가 문안하였다. 상이 세자에게 대하는 것이 매우 엄하여 인접(引接)하는 적이 드물었다. 이에 문안할 적마다 외문(外門)에 이르렀다가 물러갔다.”
 
  그 이전까지는 늘 따뜻하게 맞아주던 선조가 왜 이날 갑자기 세자에게 냉랭한 반응을 보인 것일까? 이때 명나라는 조선에 주둔시켰던 병력들의 철수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것은 굳이 세자 문제와 관련해 명나라의 눈치를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정확지는 않지만 이런 이유에 더해 장성한 세자를 중심으로 별도의 세력이 형성되고 있는 데 대한 견제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전쟁 기간 때 선위(禪位) 의사를 수도 없이 밝히던 때의 선조는 아니었다.
 
 
  “臺諫들이 일시에 조정 대신들 배격하여…”
 
이원익
  4월 5일 선조는 사직을 요청한 좌의정 정탁을 물러나게 하고 다시 이원익을 그 자리에 임명했다. 그러나 홍문관 부제학 황우한을 필두로 “이원익은 유성룡의 사람”이라며 좌의정 임명을 취소할 것을 상소했다. 사실 이원익은 두루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고, 남인이라 하더라도 당파성이 그리 강하지 않았다. 이례적으로 선조는 황우한 등의 청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한다.
 
  “좌상(左相)은 나랏일에 마음을 쏟는 어진 정승이다. 옛날에도 그만한 이가 드물었고 현재도 더 나은 사람이 없다. 이런 사람을 버리고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만약 그의 견해에 치우친 면이 없지 않다고 한다면 그것은 불가할 게 없다. 이는 아마도 그의 견해가 그러한 것이지, 처음부터 마음에 두고 사사(私邪)로운 마음에서 그렇게 현란(眩亂)하게 유성룡 등을 비호할 계획을 꾸민 것은 아니다.”
 
  4월 16일 황우한은 이번에는 병조판서 홍여순(洪汝諄)을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홍여순의 사람됨을 전하께서는 쓸 만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화가 요원의 불길 같다고 여기지 않습니까? 오늘날 박멸할 책임이 전하께 있지 않습니까? 홍여순의 평소의 용심과 행동을 신들의 입에 올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라 사람들이 함께 노여워하고 사류(士類)들이 함께 분해하고 있으니, 전하께서 비록 깊숙이 구중궁궐에 계시더라도 틀림없이 통찰하시어 분명히 아실 것입니다. 홍여순을 탐포하다고 하면 탐포한 점이 진실로 있을 것이고, 홍여순을 심술궂고 음험하다고 한다면 심술궂고 음험한 점도 진실로 있을 것입니다. 홍여순 같은 자는 탐욕은 이미 사방의 이익을 독점했고 횡포는 이미 온 나라의 인심이 떠났으며, 그의 심술은 이미 정론(正論)을 질시하였고 음험함은 이미 사림(士林)들을 무함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선조의 답변은 이원익 때와는 조금 달랐다. 물론 황우한의 청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다만 “대간(臺諫)들이 일시에 조정 대신들을 배격하여 나라를 비울 작정을 하니 어쩌자는 것이냐”고 답한다.
 
  홍여순은 선조 1년(1568년) 문과에 급제한 후 두루 관직을 지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였던 그는 병조(兵曹)의 치무(治務)가 소홀하고 군사들의 원망이 많다 하여 파직당했다. 임란이 발발하자 평소 그의 부정한 축재(蓄財)에 대해 원성을 가진 백성들이 그의 집에 불을 질렀다. 또 그는 북인, 대북, 골북의 당에 속하거나 주도하며 결국 황우한의 탄핵을 계기로 복직됐던 병조판서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후 광해군 즉위년(1608년)에 전라도 진도(珍島)에 유배되어 거기서 죽는다.
 
 
  北人의 분열
 
  박충간의 탄핵을 받은 남이공이나 황우한의 탄핵을 받은 홍여순은 원래 둘 다 북인에 속했다. 그러나 정치 상황이 변하면서 북인의 수장 격인 이산해와 소장파인 남이공이 대립하게 되었다. 홍여순은 이산해와 함께 대북(大北)이었고, 유영경과 남이공은 소북(小北)이었다. 그런데 1599년 왕위계승 문제로 소북이 몰락할 때 같은 대북이던 이산해와 홍여순은 또다시 대립했다. 그래서 이산해의 당을 육북(肉北), 홍여순의 당을 골북(骨北)이라고 했다. 그리고 위의 박충간의 글 중에 나오는 피북(皮北) 혹은 중북은 유몽인이 당수였다. 세자에 대한 갑작스런 선조의 태도 변화는 바로 이 같은 육북·골북·피북의 말 그대로 목숨을 건 정쟁과 무관치 않던 것이었다. 후계 문제가 점차 부각되면서 선정(善政)을 향한 선조의 의지도 흐려지고 있었고 그에 비례해 당쟁은 격화되어갔다. 그런 점에서 광해군 시대의 조정권력 분포뿐만 아니라 결국 광해군을 권좌에서 쫓겨나게 만든 데는 선조의 이 같은 북인정권 수립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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