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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Q의 시 읽기 〈52〉 허향숙·신미나·최진영·최지은의 新作

삼색나물 같은 슴슴한 문장을 먹고 난 날은…(허향숙)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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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 위에 연꽃을 올려주세요/ 귓불에 두 개의 달을 걸어주세요’(신미나)
⊙ ‘사과를 씹으면서/ 식물은 망가질 때 가장 식물다운 소리를 냈다’(최지은)
‘삼색나물 같은 슴슴한 문장을 먹고 난 날은 내 영혼의 무게가 가벼워진다’. 사진=조선DB
  지난 6월 7일 펴낸 허향숙(許香淑) 시인의 첫 시집 《그리움의 총량》(천년의시작 刊)은 삼색나물 같은 슴슴한 문장이 많아 읽는 맛이 쏠쏠했다.
 

  나그네 같은 독자들은 시인이 빚어내는 문장을 처음에는 쭈뼛해하며 읽다가 점점 빠져든다. 빠져들다가 어느 순간 영혼의 무게가 가벼워짐을 느낀다. ‘그리움의 총량’이 많을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영혼의 무게는 가벼워지나 보다. ‘허공을 가로질러 맞닿는 마음’(시 ‘그냥’ 중에서)처럼.
 
허향숙 시인
  꼭두새벽부터 식탁에 앉아 문장을 먹는다
  어떤 문장은 국수처럼 후루룩 단숨에 들이켜고
  어떤 문장은 오징어처럼 질겅질겅 곱씹고
  또 어떤 문장은 질긴 갈빗살 뜯듯 물어뜯는다
  어떤 문장은 비위에 거슬려 게워 내고
  어떤 문장은 너무 맵거나 짜 눈살 찌푸리고
  또 어떤 문장은 더 깊이 발효시키기 위해 저장한다
  음식처럼 양념을 많이 친 문장은
  소화가 안 되고 머릿속도 더부룩해진다
  삼색나물 같은 슴슴한 문장을 먹고 난 날은
  내 영혼의 무게가 가벼워진다
  -허향숙의 ‘문장을 먹는다’ 전문
 
  한 번을 써도 백 마디 말보다 긴 여운의
  아무리 써도 물리지 않는
  슴슴한 음식 같은
  말, 그냥
 
  -허향숙의 ‘그냥’ 일부

 
허향숙 시인의 첫 시집 《그리움의 총량》.
  경험을, 어떤 기억을, 몹시 그리운 아픔을, ‘한 장의 묵화’ 같은 기쁨을 불러내어 글로 혹은 시로 표현하는 일이 바로 ‘문장을 먹는다’이다.
 
  문장을 먹을수록 ‘멀리 떠나간 너의 둥근 얼굴이 가차이 환하고’(시 ‘허기’ 중에서), ‘연초록의 광휘!’(‘노동자들’ 중에서)와 만나며, ‘금 간 유리창에 낀 하늘 한 조각’(‘근황’ 중에서), 혹은 ‘신발장 맨 위 칸 꾸부정하게 앉아 있는 검정 구두 한 켤레’(‘아버지의 구두’ 중에서)에게 말을 건넬 수 있다. 그리고 감히, 몸으로 깨닫게 된 살아가는 방법을 독자에게 시로 귀띔할 수 있다.
 
  봄을 피워 여름이 오면
  여름을 피워 가을이 오면
  가을을 피워 겨울이 오면
  봄이 다시 피어나지
 
  피운다는 건 경계를 지운다는 것
  생을 피워 죽음으로
  죽음을 피워 생으로
 
  피운다는 것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팎 구분 없이
  나를 피워 너로 번지고
  너를 피워 나로 번지는 것
 
  - 허향숙의 ‘피우다’ 전문

 
 
  生의 이면을 포착한 ‘얼굴만 아는 사이’
 
신미나 시인
  살아가며 가끔은 ‘밀당’을 하고 싶은 이가 있다. 그(그녀)를 향하여 마음껏 상상을 하다가 아무 일 없다는 듯 시침 뚝 떼는.
 
  ‘얼굴만 아는 사이’지만 그 너머까지 꿰뚫고 있는…. 신미나(申美奈) 시인의 ‘얼굴만 아는 사이’는 참 재미있는 시다. 뭐 생(生)에 대해 심각할 것 없는 듯하나, 그 이면을 포착하는 시선이 날카롭고 따스하다. 지난 3월 26일 펴낸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창비 刊)는 곁에 두고 싶은 시집이다.
 
  조그만 찻잔의 손잡이 같지
  팔을 뻗어 만져보고 싶네
  만두를 세운 것같이 귀여운 귀
  그녀는 내가 등 뒤에 있는 줄 모르고
  어깨의 눈을 털고 보리차를 따르고
  파마 로드를 바삐 말던 손을 밥뚜껑 위에 올리고
  휴지로 땀을 찍으며 뜨겁고 매운 순두부를 뜨고
 
  초식동물처럼 분주히 움직이는 턱뼈
  나는 오목한 숟가락에 들어앉아
  아, 하고 벌린 입
  그녀의 목구멍
  분홍의 무저갱으로 들어가네
  식도를 타고 구불구불하게 미끄러지는 액체의 몽상
 
  그녀를 따라 다박다박 걷다가 여기까지 왔네
  발자국을 포개고 보니 어쩌다 국밥집 앞
  그녀는 나를 보고 보리차를 엎지를 뻔하고
  엉거주춤 일어서며
  어, 안녕하세요
 
  -신미나의 ‘얼굴만 아는 사이’ 전문

 
‘조그만 찻잔의 손잡이 같지. 팔을 뻗어 만져보고 싶네’.
  시인의 시선을 따라가면 많은 단어와 만날 수 있다. 찻잔의 손잡이→만두의 귀→어깨의 눈→보리차→파마 로드→밥뚜껑→휴지→순두부→턱뼈→오목한 숟가락→입(아, 하고 벌린)→목구멍→무저갱→식도→국밥집→보리차에 이르기까지 순간 이동하는 상상력이 놀랍다. 마지막 문장, “어, 안녕하세요” 하고 건네는 가벼운 인사 속에 많은 사연을 담고 있다.
 
  시인의 시 ‘옛터’도 이미지의 울림이 따스하다. 산사(山寺)에서 만나는 불상이 어느 날 풍경소리를 내며 객(客)에게 말을 건다. 불상처럼 말없이 견뎌온 세월을 아주 잠시 떠올리기만 해도 우리 생이 외롭지만은 않다.
 
신미나 시인의 시집 《당신은 나의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
  기다란 그림자가
  귀에 스며들었습니다
 
  뱀의 배가 스친 자리에
  휘었던 풀이 다시 서듯이
 
  환상은 흔적 없는 이별
  자취 없는 기쁨이 되었습니다
  무릎 꿇고
  두 손을 모으니
  머리 위에 연꽃을 올려주세요
  귓불에 두 개의 달을 걸어주세요
 
  창호지로 눈을 가리고
  바람으로 천개(天蓋)를 열어
  불붙은 솜으로 귀를 막겠습니다
 
  -신미나의 ‘옛터-강릉 신복사지 석조보살좌상’ 일부

 
  살아가며 고통스러운 순간을, 저 말없는 불상을 보며 견뎌낼 수 있다면 좋겠다. 혹 지나가던 어느 객이 우리를 위하여 짧은 화살기도를 해줄지 누가 알랴. 시인의 바람처럼 ‘머리 위에 연꽃을 올리고 귓불에 두 개의 달을 걸어줄지’ 누가 알랴.
 
 
  소리 내 울지 않는 법 배우셨다는 것을…
 
최진영 시인
  지난 8월 5일에 나온 최진영(崔珍暎) 시인의 첫 시집 《모든 삶은 PK로 이루어져 있지》(스타북스 刊)를 읽었다. 시인이 말하는 ‘PK’가 뭔지는 시집을 읽어보면 알게 된다. 1990년생인 젊은 시인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자신만의 생을 ‘이겨내고’ 있다. 생을 대하는 자세가 가볍지 않다. 일부러 무게를 불리지도 않는다. 그저 그답다고 해야 할까.
 
  시 ‘구직 사이트’만 해도 그렇다. 시인은 한쪽만 바라보지 않는다. 현상과 이면을 모두 본다. 사실적이다. 굳이 가리키려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구직란-
  뭐든지 다 하겠습니다!
  식혀만 주십시오! 제 열정을…..
  제발 뽑아주세요!!!!!!
  일하고 싶습니다…
  용접 자격증 있습니다! 위험해도 괜찮습니다!
  부사관 출신 일자리 구합니다
  어떠한 일이든 맡겨만 주십시오!
  힘들다고 중간에 그만두지 않겠습니다!
  주휴수당 안 주셔도 됩니다!
 
  -Q&A-
  근로계약서를 안 썼는데요
  급여를 부당하게 받는 것 같습니다
  CCTV로 감시당하는데요
  퇴직금은 못 받고 있습니다
  사장이 튀었는데 월급 받을 방법 있나요?
  이거 부당 해고 아닌가요? 너무하네요
  휴게시간 30분을 무급 처리해요
  갑자기 나오지 말래요
  임금체불 당하고 있습니다
 
  - 최진영의 ‘구직 사이트’ 전문

 
‘무릎 꿇고 두 손을 모으니 머리 위에 연꽃을 올려주세요’.
  구직 사이트의 ‘구직란’을 보여주면서도 ‘Q&A’에 올라온 아우성을 보여준다. 직장만 구하면 세상을 다 가진 듯 보이지만, 막상 들어간 그 직장에서 지옥을 만난 사연이 즐비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어딜 가든 그 지옥을 피할 수 없다. 혹시 지옥 속에 천국이 있을지도….
 

  시 ‘적막한 밤에’는 아름다운 시다. 시 속 ‘그대’는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내 안의 나(自我)’일 수도 있겠다. 여러 번 읽을수록 ‘그대’는 ‘나’로 읽힌다.
 
최진영 시인의 시집 《모든 삶은 PK로 이루어져 있지》.
  당신을 처음 보았습니다
  그대가 아닌 그대로를
 
  어쩌면 나는 그날 밤
  처음 봤는지도 모릅니다
 
  나의 밤은 늘 길었고
  그대의 밤은 늘 짧아서
 
  아직도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이거 하나는 알겠습니다
 
  당신도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눈물 흘리는 법 잊은 게 아니라
  소리 내 울지 않는 법 배우셨다는 것을
 
  -최진영의 ‘적막한 밤에’ 일부

 
 
  ‘내가 사라진 것 같은 오후’
 
‘그때 나는 사과를 씹으면서 식물은 망가질 때 가장 식물다운 소리를 냈다’.
  2017년 창비문학상을 수상한 최지은(崔智恩) 시인의 첫 시집 《봄밤은 끝나가요, 때마침 시는 너무 짧고요》를 읽었다. 시집은 지난 5월 25일 간행되었다. 많은 문장이, 많은 기억이, 젊은 시인의 연필 끝에서 마구 길어 올려진 시집이다. 만선(滿船)의 언어들…, 그 언어를 따라가면 긴 사연과 만나게 된다. 시집 한 권을 읽으면 시인의 생애를 장편소설로 읽는 착각에 빠진다. 장편보다 더한 깊이와 만나게 되지만 그렇다고 눈물겨운 사연은 없다.
 
최지은 시인
  그해 전학 간 그 마을
 
  조퇴한 오후
  혼자 집에 있을 때면
 
  뒷산에서 들려오던 개 돼지 닭 염소를 잡는 소리
  그때 나는 사과를 씹으면서
 
  식물은 망가질 때 가장 식물다운 소리를 냈다
 
  또 한번 사과를 씹으면서
 
  사람이 망가질 땐 어떤 소리를 낼까
  시를 썼다
 
  ‌첫 번째 고백은 새엄마가 책갈피 속에 숨겨둔 자목련 꽃잎을 조금씩 찢어버린 일
  그걸 망가뜨리려고 책장 앞에서 놀다가 졸다가 읽다가
  찢고 덮고 다시 찢고 덮고
  오래하기 위해 조금씩만 했던 일
 
최지은 시인의 시집 《봄밤이 끝나가요, 때마침 시는 너무 짧고요》.
  사과를 씹으면서
 
  집은 더 조용해지고
  이제 거의 투명해져서
 
  다시 사과를 씹으면서
 
  소리 없는 오후
 
  내가 사라진 것 같은 오후
 
  -최지은의 ‘열다섯’ 일부

 
  시작(詩作)에 대해 말하는 시인에게 실제로 ‘새엄마’가 있었는지 알 수 없다. 그 엄마가 ‘책갈피 속에 숨겨둔’ 꽃잎이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은유하는, 비유하는 감각의 실체는 어렴풋하게 그려볼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시적 화자는 줄곧 기면 상태에 있는 것 같다. 실현 가능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꿈속의 생각을 이어간다는 점에서 시인은 훌륭한 몽상가 같다.
 
  어디부터가 몽상의 시작이었을까. 사랑을 잃은 건 언제 적 일일까. 이 밤길은 왜 이렇게 길고 어두울까. 왜 아무도 보이지 않는 걸까. 얼마나 더 걸어야 집에 닿을까. 몽상의 끝에 나의 집 있을까.
 
  - 최지은의 ‘이 꿈에도 달의 뒷면 같은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있을까’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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