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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해 지금을 읽는 ‘新당의통략’ 〈5〉

東西 分黨의 표면화와 선조의 고민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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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道學집단(西人) 對 관료집단(東人) 구도로 이해해야 당쟁사 이해 가능
⊙ 이이, 붕당에 대한 선조의 질문에 “어찌 私的으로 서로 붕당을 만든 일이야 있겠습니까”라고 호도
⊙ 동서 분당의 단초 제공한 김효원과 심의겸, 지방으로 밀려난 후 서로 친하게 지내
⊙ 선조, 이이·정철 등 西人 총애하면서도 親王權的 ‘관료형 집단’인 東人 중용해 균형 모색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東人의 謀主’ 이산해.
  동서(東西) 분당(分黨)과 관련해 이건창(李建昌)은 《당의통략》에서 중요한 증언을 남겼다.
 
  “박순(朴淳)이 우의정이 됐을 때 대사간 허엽(許曄)이 조그마한 일로 박순을 추고(推考)하자 박순이 스스로 우의정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로부터 당론(黨論)이 드디어 나뉘었다.
 
  이때 김효원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김우옹(金宇顒), 유성룡(柳成龍), 허엽, 이산해(李山海), 이발(李潑), 정유길(鄭惟吉), 정지연(鄭芝衍) 등으로 이들을 동인(東人)이라고 불렀다. 김효원이 한양의 동쪽인 건천동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의겸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박순, 김계휘(金繼輝), 정철(鄭澈), 윤두수(尹斗壽), 구사맹(具思孟), 홍성민(洪聖民), 신응시(辛應時) 등으로 이들을 서인(西人)이라고 불렀다. 심의겸이 한양의 서쪽인 정릉방(貞陵坊)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인들은 명예와 절개 숭상하기를 즐겼고 서인들은 경력이 많아 몸가짐을 신중히 했다.”
 
  그러나 당론은 이때 나뉘었다기보다 ‘표면화됐다’고 하는 것이 실상에 가깝다. 그리고 맨 마지막 문장은 두 당의 ‘성격’에 대한 개략적인 진단이라는 점에서 좀 더 보충할 필요가 있다. 실록에 따르면 이 같은 분당 이전에 이미 전배(前輩·선배)와 후배(後輩)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선배 사류(士類)는 선조 즉위 이후 구체제 잔재 척결 문제에 있어 온건한 입장을 보였다. 후배 사류는 좀 더 강경한 입장에서 전배들을 비판했다. 구체제 잔재란 다름 아닌 심의겸·심충겸 형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와 직결된 것이었다. 그래서 전배가 자연스럽게 서인이 됐고 후배가 동인이 됐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차이가 그 후 300년 동안 계속 이어진 당쟁과 분당을 규정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과연 동인과 서인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道學 집단 vs 관료 집단
 
  위잉스(余英時)는 《주희의 역사세계》(글항아리・이원석 옮김)에서 송나라 당쟁(黨爭)의 성격을 분석하면서 ‘도학(道學) 집단’과 ‘관료 집단’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도학 집단이란 주희의 반(反)왕권론에 더 충실한 집단이라면, 관료 집단은 상대적으로 임금의 존재를 인정한 가운데 자신들의 역할을 ‘보좌’에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개념은 조선 300년 붕당 분석에도 그대로 유효하다. 서인이 도학 집단이라면 동인은 관료 집단에 가까웠다. 이렇게 되면 그 후 특정 붕당의 집권과 실권(失權)의 역학관계를 분석하는데도 매우 유리하다.
 
  그러면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임금이라면 당연히 자신을 반대하는 도학 집단보다는 관료 집단을 선호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어떻게 조선에서 서인-노론(老論)-벽파(僻派)로 이어지는 초강경 도학 집단이 계속 집권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정치적 형세 때문이다. 서인-노론-벽파 쪽에는 훨씬 많은 인재가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실록을 정독해보면 설사 서인-노론-벽파 쪽에 휘둘린 임금이라도 끊임없이 자기 세력을 끌어들이려 했다. 그 과정에서 서인 안에서 소론(少論)이 나왔고, 다시 노론 안에서 시파(時派)가 나왔던 것이다.
 
  다만 동인의 경우 정여립(鄭汝立)의 난으로 풍비박산이 나고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갈렸는데, 북인의 경우 광해군 때 집권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철저하게 몰락해 사실상 조정 근처에는 발도 못 붙였고 남인이 끈질기게 남아 정국 상황에 따라 소론, 시파와 연합하는 형식으로 명맥을 이어갔다. 이것이 조선 300년 붕당 정치를 보는 큰 맥이라 할 수 있다.
 
 
  붕당에 대한 선조의 태도
 
  선조 8년 김효원과 심의겸의 충돌로 당쟁의 조짐이 표면화됐으나 당장은 조정 전체를 흔들 만큼 본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다만 소소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동인과 서인은 입장을 달리하며 대립했다. 사실 이 단계에서 선조는 중대한 조치를 취해야 했지만 후궁 손자로서 왕위에 올라 왕실의 지원조차 받을 수 없었기에 사태를 관망하며 대증(對症)요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태종 때 이 같은 붕당의 움직임이 있었다면 누구라도 족주(族誅)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사실 태종이 처남 형제들을 몰살한 것도 왕권을 농락할 수 있는 붕당을 이루려는 조짐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붕당을 지은 게 아니라 붕당의 조짐만으로 처남들을 다 죽여버린 것이다.
 
  선조는 그래서 두 당파에 대해서도 당보다는 개개 인물의 현부(賢否)를 통해 사람을 쓰겠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6대 4 내지 7대 3 정도로 동인이 우세한 상황이었다. 이때 동인을 대표하는 인물은 허엽, 서인을 대표하는 인물은 이이(李珥)였다.
 
  허엽(1517~1580)은 덕망이 높은 사림 김안국(金安國)에게서 어릴 때부터 글을 배웠고, 서경덕(徐敬德)에게 본격적으로 학문을 전수한 전형적인 사림이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홍길동전》의 허균(許筠)과 허난설헌(許蘭雪軒)이 바로 허엽의 자식들이다. 명종 원년(1546)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 등을 지냈고 한때 불온한 무리와 어울리다가 큰 위험에 처했으나, 그를 좋게 보았던 문정왕후의 변호로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다.
 
  허엽은 선조 초기 민심 수습의 방편으로 향약(鄕約)의 전면 실시를 주장했으나 민생의 곤궁함을 이유로 이이가 반대하는 바람에 좌절되자 이이와 적대적 관계에 서게 되었다. 그 후에도 ‘동인의 영수(領袖)’를 자처한 허엽은 동서 화해론을 내세운 이이와 사사건건 대립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이이는 자신의 《석담일기》에서 허엽을 ‘망령된 선비’라고 불렀고, 이황(李滉)도 “허엽이 학문을 하지 않았으면 참으로 착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고 비평했다.
 
 
  김효원과 심의겸의 화해
 
  허엽은 실은 선조에게서도 그리 좋은 평은 듣지 못했다. 선조 8년 6월 1일 선조는 우의정 노수신(盧守愼)에게 “왜 선비를 천거하지 않느냐”고 다그쳤다. 당시 선조는 새로운 인재를 얻기 위해 신하들에게 자유로운 천거를 명해놓은 터였다. 이에 노수신은 “이이와 허엽을 쓸 만한 인재라고 여깁니다”고 답했다. 그러자 선조는 직설적으로 반응했다.
 
  “이이는 내가 크게 쓸 만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다만 그의 언론(言論)에 과격한 점이 많으니, 이는 나이가 젊기 때문에 그러할 것이다. 하나 허엽은 오활한 사람이다. 어찌 쓸 만한 인재이겠는가.”
 
  오활하다는 말은 우활(迂闊)에서 온 것으로 세심하지 못하고 부주의하며 덜렁거려 일을 믿고 맡길 수 없다는 뜻이다. 옛날에 인물됨을 평가할 때 자주 사용되던 말이다. 이 말을 할 때 선조 나이 25세였다.
 
  노수신이 두 살 위이긴 했지만 노수신과 허엽은 친구였다. 이 무렵 노수신이 허엽에게 “요즘 누가 정승이 될 만한가”라고 물었다. 아마 선조의 천거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가까운 허엽에게 물어본 것 같다. 그러자 허엽은 “지금 정승이야 누군들 못 되겠는가? 아무나 될 수 있다”고 답해 노수신은 잠자코 듣고만 있어야 했다. 허엽은 선조 즉위 후 줄곧 젊은 선비들의 존대를 받는 자신이 3품에 머물러 있는 데 대해 큰 불만을 갖고 있었다. 하긴 동문에 자기보다 6년 아래인 박순이 좌의정이었으니 허엽으로서는 그런 불만을 가질 만했다.
 
  흥미로운 것은 외직으로 쫓겨난 이후 김효원과 심의겸은 서로 지난 일을 반성하며 잘 지냈다는 사실이다. 김효원이 평안도 현령으로 있는 아버지를 만나러 갈 때면 심의겸이 반드시 개성을 방문토록 하여 기쁜 마음으로 잔치를 베풀어주었다. 김효원도 심의겸이 세상을 떠났을 때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고 한다. 자신들 때문에 조정이 계속 시끄러워지자 두 사람은 자숙(自肅)의 날을 보내야 했다. 특히 김효원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가족을 포함한 누구에게도 시사(時事)의 일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고 한다.
 
 
  붕당을 호도한 이이
 
‘西人의 핵심’ 이이.
  하지만 불길의 속성이 무엇인가? 잡티만 한 불씨라도 휘발성 강한 물질에 튀는 순간 집채까지 거뜬히 삼킨다. 이미 당쟁의 불길은 두 사람의 손을 떠나 무섭게 번져가고 있었다.
 
  김효원과 심의겸의 충돌로 생겨난 동서 분당의 파문은 서서히 지방에까지 파급되기 시작했다. 5년 후인 선조 13년 윤 4월 20일 현재의 충청북도 음성 부근의 음죽에 사는 한 진사가 선조에게 글을 올렸다. 전욱이라는 이름의 이 진사는 조정이 불협화음을 내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조정 신하들이 사혐(私嫌)을 품고 무고한 사람을 탄핵하며 근거 없는 말을 선동하여 시골로 추방하는 등 위로는 성상의 총명을 속이고 아래로는 말 못 할 울분을 끼치고 있다”고 개탄했다. 이에 대해 선조는 일단 “신하로서 붕당을 조직해 서로 대립하는 것은 그 죄가 이미 크다”면서 “게다가 사혐을 품고서 군주를 속이기까지 한다면 그것은 놀랄 일”이라며 진상조사를 명했다.
 
  대략 이 무렵부터 선조는 이이를 중용하기 시작했다. 선조 14년(1581) 6월 선조는 이이를 대사헌으로 임명했다. 그해 7월 대사헌 이이, 장령 정인홍은 심의겸을 탄핵해 파직시켰다. 지난 6~7년간 조정을 어지럽게 한 당쟁을 야기시킨 책임을 물은 것이다. 이에 대해 선조는 “그대들도 또한 스스로 자신의 일을 살펴서 신하가 붕당을 지으면 종말에는 반드시 주멸(誅滅)된다는 것을 경계하라”고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같은 해 10월 천재(天災)가 이어지자 정승·판서와 대사헌 등을 들라고 한 후 대책을 논의하다가 또다시 붕당의 문제가 제기됐다. 선조는 “요즘 조정이 불화하다고 말하는 자들이 많다. 조정이 불화하면 어찌 천재를 부르지 않겠느냐”고 호통을 친다. 특히 영의정 박순을 쳐다보면서 “이는 대신의 책임이다. 신하가 감히 붕당을 짓는다면 멀리 귀양을 보내도 괜찮다. 누가 감히 붕당을 만든다는 말인가?” 한다.
 
  이에 대한 호조판서 이이의 언급은 실망스럽다.
 
  “선비는 동류(同類)끼리 상종함을 면치 못하는 것인데 가끔 식견의 차이로 서로 의심하고 저지함을 면치 못하는 자가 있기는 합니다만 어찌 사적(私的)으로 서로 붕당을 만드는 일이야 있겠습니까. 급작스레 벌을 줄 수는 없습니다.”
 
  이이는 선조의 눈과 귀를 가리려 하고 있었다.
 
  실은 머리 좋은 선조가 신하들끼리 맺고 있던 붕당의 실상을 몰랐을 리 없다. 선조가 선조 15년(1582) 1월 이이를 이조판서로 임명한 것은 동서인 양측의 신망과 불신을 동시에 받고 있는 중립적 인사를 통해 붕당의 완화를 의도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직을 이이가 성공적으로 수행했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예를 들어 이이는 자기 문하에 있던 정여립을 높게 평가해 관직에 등용하려고 애썼지만 선조는 정여립을 부정적으로 보았다. 결국 정여립은 훗날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한 해 동안 이이는 8월에 형조판서, 12월에 병조판서를 역임할 만큼 선조의 두터운 총애를 받았다. 사실 이준경(李浚慶), 노수신, 이이 등을 중용하며 이끌어온 이때까지의 정치는 선조가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대목이다.
 
  선조 16년 6월 11일 병조판서 이이의 사소한 실수가 조정에서 큰 문제가 된다. 격무에 시달리던 이이가 이날 대궐에 들어왔다가 현기증이 생겨 선조를 알현하지 않고 병조에만 잠깐 들렀다가 집에 돌아간 것이 반대파들에게 탄핵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임금을 업신여긴다는 이유였다. 즉 무군(無君)의 죄를 범했다는 말이다. 무군은 불충(不忠) 불경(不敬) 중에서도 가장 큰 죄이니 처벌은 사형에 해당됐다. 사헌부·사간원의 탄핵이 있었고 홍문관까지 나섰다.
 
 
  東人의 공세
 
  이에 대한 선조의 반박은 논리정연했다. 6월 20일 선조는 대신들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내렸다. 우선 사소한 일을 확대해서 문제 삼는 양사(사헌부·사간원)와 옥당(玉堂·홍문관)을 비판하면서 정말 이이가 임금을 업신여긴 대죄(大罪)를 지었다면 파직 정도의 처벌을 제시한 양사나 옥당도 잘못이라고 거꾸로 몰아세웠다. 그것은 결국 당파적 이유에서 이이를 내쫓으려는 시도 아니냐는 다그침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경들이 만약 이이를 일러 나라를 그르친 소인(小人)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죄를 분명히 밝혀 그를 물리쳐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그를 공격하는 자가 소인이다. 임금이 소인을 등용하고서 나라가 잘 다스려지는 이치가 어디에 있는가. 오늘이야말로 숙특(淑慝)을 가려낼 수 있는 때가 아니겠는가. 경들로서는 확실히 가려내지 않고 어물어물해서는 안 된다. 조정이 각기 유파끼리 분당되어 나랏일이 날로 글러가고 있는데도 대신들이 그것을 밝혀내지 못한다면 나랏일이 장차 어떻게 되겠는가.”
 

  이날 당장 홍문관 관리 전원이 자신들이 붕당으로 몰렸다며 사직을 청했으나 선조는 이를 반려했다. 정승들도 이이에게 문제가 없지만 병조판서의 자리가 너무 중하니 일단 병조판서를 교체할 것을 청했다. 선조도 결국 이들의 청을 받아들인다.
 
  여기서 보듯 당쟁에 대한 선조의 대응은 미온적이고 수세적이다. 대안(代案)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민은 깊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이의 사퇴는 조정에 더 심각한 당파싸움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을 예고하고 있었고 선조도 그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대사간 송응개를 정점으로 한 홍문관 전한(典翰) 허봉, 승지 박근원 등이 주도한 이이 탄핵은 동인의 입장에서는 일단 성공을 거둔 듯했다. 늘 이이의 중재역에 대해 의심의 눈길을 보내던 동인 세력이 승리를 거두는 듯했다.
 
 
  성혼, 이이를 변호하다
 
‘이이의 변호인’ 성혼.
  그러나 이이의 탄핵은 실은 선조 자신에 대한 탄핵이나 다름없었다. 격화돼가는 동서 당쟁을 이이를 앞장세워 중재하려던 자신의 기본 구상이 탄핵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괘씸했다. 다만 당장 선조가 쓸 수 있는 카드가 마땅치 않았다.
 
  이때 율곡의 평생지기인 성혼(成渾)이 나선다. 문과에 급제하진 못했지만 학식이 뛰어나다는 이이의 추천으로 바로 이 무렵 이조참의에 있을 때였다. 아마도 송익필(宋翼弼)과도 협의했을 것이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글을 올립니다”며 장문의 상소를 시작했다. 이이의 개인적인 장단점을 솔직하게 이야기한 다음, 그가 나라와 임금을 대하는 태도에는 추호도 부도한 마음이 개입돼 있지 않음을 소상하게 설명했다. 그런데도 당파를 지어 이이를 매도하는 것은 결국 나라와 임금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는 논리였다.
 
  선조가 성혼의 상소를 읽은 다음 “그대의 상소를 보니 충분(忠憤)이 격렬하여 만약 간사한 무리들이 듣게 한다면 충분히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것이다. 군자(君子)의 말 한마디가 나라를 위해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참으로 알겠다”라는 반응을 보인 데서 그의 상소가 얼마나 사태를 적중하고 있었는지를 쉽게 가늠할 수 있다. 이미 여기서 선조는 송응개 등을 ‘간사한 무리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선조는 당장 영의정 박순, 좌의정 김귀영을 불러들였다. 우의정 정지연은 병을 이유로 들지 않았다. 사실 성혼의 상소도 선조가 먼저 불러서 이야기를 듣고자 한 것이기 때문에 동인에 대한 반격은 실은 선조가 미리 구상하고 밀어붙인 것으로 봐야 한다. 선조는 두 정승에게 호통을 친다.
 
  “나는 과매(寡昧)하여 아는 것이 없고, 어둡고 불민하여 충(忠)과 사(邪)도 알지 못하고, 시(是)와 비(非)도 구별 못 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번 경들에게 물었던 것인데 경들은 감히 우물우물 넘기고 말았다. 내 그때 이미 경들의 마음을 훤히 알았지만 뒤에 형편에 따라 처리할 것이라는 뜻으로 경들에게 하유(下諭)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성혼의 상소문을 보니 대신(大臣)으로서 임금을 섬기는 도리가 과연 그러해도 된다는 말인가?”
 
 
  “경은 마천령을 넘고 싶은가?”
 
  이이의 사퇴공방 때 적극적으로 이이를 방어하지 않은 데 대한 문책성 발언이었다. 그 다음 날 대사간 송응개가 선조를 찾아와 성혼, 이이, 심지어 영의정 박순까지 몰아세우는 반론을 펼쳤다. 그들은 모두 심의겸을 비롯한 서인의 한통속이라는 것이었다.
 
  이미 선조의 마음은 정해졌다. 송응개의 발언이 끝나자 선조는 “네 말이 설사 전부 옳다고 하더라도 진작 이야기하지 않고 지금에야 말하는 것은 불충(不忠)이다. 대사간에서 물러나라”고 면박을 주었다. 본인에게 면전에서 파직을 명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만큼 선조는 동인들이 이이를 탄핵한 것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다. 이날 바로 송응개는 장흥부사로, 허봉은 창원부사로 좌천되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사헌부·사간원에 포진해 있던 동인 세력들의 일대 반격이 시작됐다. 이이의 불교 관련설, 이이의 형이 연루된 불미스러운 소문 등이 모두 까발려졌다. 또 박순, 이이, 성혼은 모두 심의겸의 문객이라고 몰아세웠고, 박순과 이이는 성혼을 ‘산림고사(山林高士)’라고 치켜세우고 반대로 성혼은 박순과 이이를 일러 ‘일대현신(一代賢臣)’이라고 찬사를 보내는 등 서로 노는 꼴이 볼 만하다고 인신공격성 공세를 강화했다. 선조는 단호했다.
 
  “지금 너희 삼사가 일찍부터 그들에 대해 분노한 뜻을 품고서 근거 없는 말을 날조하여 못 하는 소리 없이 멋대로 헐뜯고 있는데 그러한 그대들을 천하 후세의 사람들이 어떠한 사람들이라고 하겠는가. 비록 10년을 두고 논한다고 하더라도 내 어찌 따를 이치가 있겠는가. 속히 그만두는 것만 못 할 것이다.”
 
  점잖게 표현해서 그렇지 한마디로 “입 닥치고 가만있으라!”는 소리였다. 결국 외직으로 나가 있던 송응개와 허봉은 각각 관직에서 쫓겨나 회령, 갑산으로 유배를 갔고 도승지로 있으면서 이들을 방어하려 했던 박근원도 쫓겨나 강계로 유배를 가야 했다. 이들의 유배에는 조정으로 돌아온 이이의 친구이자 송익필의 ‘행동대장’ 형조판서 정철의 건의도 크게 작용했다. 모두 ‘마천령 너머’ 함경도로 갔다는 것은 그만큼 선조의 노여움이 크고 깊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선조는 신하들이 극간(極諫)을 하면 이를 저지하면서 종종 “경은 마천령을 넘고 싶은가?”라고 경고를 주곤 했다. 결국 이이는 9월 이조판서로 조정에 돌아온다.
 
 
  서인의 ‘행동대장’ 정철
 
‘西人의 행동대장’ 정철.
  서인의 이이는 동인의 유성룡과 사사건건 충돌했다. 이준경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이이가 자신들이 붕당을 꾸몄다고 했다며 노발대발하며 이준경의 관작을 추탈(追奪)해야 한다고 했고, 유성룡은 이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또 이이가 선조의 지시를 받아 ‘10만 양병(養兵)’ 계책을 올리자 유성룡은 당장 10만 군대를 만들면 외적이 쳐들어오기도 전에 나라가 망한다며 좌절시켰다.
 
  선조 16년(1583) 9월 8일 이이가 이조판서로 조정에 복귀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날 이후 양사의 비판이 이이보다는 정철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정철은 이이보다도 서인 성향이 훨씬 강했기 때문에 동인을 몰아세우는 데 조정의 사령탑 역할을 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정철(鄭澈·1536~1593)의 어린 시절은 남부러울 게 없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벼슬길에 나가지 못했지만 큰 누님이 인종의 후궁이 되고 막내 누님도 성종과 숙의 하씨 사이에서 난 계성군의 아들 계림군 이유와 결혼했다. 왕실과 이중의 혼맥(婚脈)을 형성했던 것이다. 그 바람에 정철은 어려서부터 궁궐을 출입하며 훗날 명종이 되는 경원대군과 가깝게 지냈다. 인종의 요절로 명종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화(禍)는 엉뚱한 곳에서 찾아왔다.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매형인 계림군 이유가 윤원형 일파의 표적이 된 것이다. 계림군은 함경도 안변으로 도피를 했고 그사이에 장인인 정철의 아버지와 처남인 큰형 정자가 붙잡혀가서 고문을 당하는 등 고초를 치러야 했다. 계림군은 결국 처형을 당했지만 아버지와 큰형은 목숨은 구했다. 대신 머나먼 유배길에 오르게 된다. 을사사화가 일어난 지 2년 후에 다시 윤원형은 윤임의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소위 ‘양재역 벽서(壁書) 사건’을 조작했다. 이로 인해 전라도 광양에 유배 중이던 큰형은 다시 함경도 두만강가의 경원으로 옮겨지던 도중 32세 나이에 고문의 후유증인 장독(杖毒)으로 사망했다. 이때 정철의 나이 12세 때였다. 훗날 정철이 반(反)왕권론인 주자학에 빠져든 것은 이 같은 불행한 개인사와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정철과 이이
 
  명종 집안과의 악연 때문인지 명종 시대에 그의 벼슬길은 순탄치 못했다. 오히려 선조가 즉위하고서야 제대로 된 기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33세 때인 선조 1년(1568) 요직이라는 이조좌랑을 지냈지만, 선조 3년 부친상을 당하여 2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이후 이조정랑, 사간원과 사헌부, 홍문관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승승장구하던 정철은 선조 8년 동서 분당이 본격화되자 환멸과 염증을 느껴 낙향(樂鄕)을 선택한다. 정철이 조정으로 돌아온 것은 선조 11년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어서다.
 
  호불호(好不好)가 분명하고 직설적인 성격 탓에 정철은 늘 동인들의 집중공격 대상이었다. 결국 다음 해 정철은 두 번째 낙향을 선택한다. 자신을 스스로 유배 보내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선조 14년 다시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 관직에 복귀했지만 또다시 동인들의 탄핵을 받자 세 번째 낙향을 결행한다.
 
  당시 선조는 이이 못지않게 정철의 재주를 높이 평가해 늘 가까이에 두려고 했다. 선조 15년 조정으로 돌아와 도승지로 임명되고 바로 다음 해 3월 예조판서에 오른다. 48세 때였다. 종종 호주(好酒)가 문제가 되었지만 선조는 한사코 정철을 지켜주었다. 송응개 등을 유배 보낼 때 정철은 형조판서였다. 동인의 공세가 그치지 않자 선조는 일단 예조판서로 자리를 바꿔 예봉을 피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다. 어쩌면 이조판서 이이, 예조판서 정철이 양대 산맥을 형성했던 선조 16년 후반기가 서인의 첫 번째 절정기였는지 모른다.
 
 
  이이, 정여립을 천거하다
 
  한편 또다시 이조판서가 되어 조정으로 돌아온 이이를 누구보다 반긴 사람은 선조였다. 10월 22일 선조가 이이를 위로하기 위해 따로 불렀다. 이 자리에서의 대화야말로 당시 선조의 붕당 정국에 대한 인식과 이이에 대한 총애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다소 미안한 마음에서 던진 말이겠지만 선조의 첫마디는 대단히 인상적이다.
 
  “내가 마치 한 원제(漢元帝)가 임금 노릇 할 때와 같이 소인배를 멀리 물리치지 못하여 나라가 거의 망해가고 있다.”
 
  국망(國亡)을 언급했다는 것은 당파싸움에 대한 선조의 인식이 그만큼 절박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이가 조정에 복귀하자 선조는 기뻐하며 “이제 경이 있으니 내 마땅히 모든 것을 맡기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말이 끝나자마자 이이는 정여립을 천거한다. 정여립은 원래 동인이었다가 동인이 몰락하자 서인에게 줄을 대려 하고 있었다. 이이는 정여립이 남을 업신여기는 병통이 있기는 하지만 많이 배웠고 재주가 있다며 천거를 했다. 이에 선조는 “정여립은 칭찬하는 사람도 있지만 헐뜯는 사람도 많으니 어디 쓸 만한 자라고 하겠는가”라고 그 자리에서 부정적 의사를 밝혔다. 선조 18년 5월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다시 정여립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대목이 나오는데 역시 그대로였다. 그때는 이미 이이는 세상을 떠난 후였다.
 
  “정여립의 사람됨에 관해서는 내가 누차 만나서 그 사람됨을 살펴보니, 기질이 매우 강한 자인 듯하나 실로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 모르겠다.”
 
  훗날 드러나는 일이지만 선조의 통찰은 그대로 적중한다. 이때 이이가 정여립을 추천한 일은 두고두고 논란의 불씨가 된다. 정승 노수신도 정여립을 추천한 문제로 말년에 고초를 겪어야 했다.
 
  한편 조정에 복귀한 이이가 1년도 안 돼 병으로 쓰러졌다. 이이는 결국 선조 17년 1월 49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의 이조판서 후임은 이산해(李山海·1539~1609)였다. 이산해는 동인이었다. 서인으로 마음이 기울어진 선조였지만 여전히 한쪽에 모든 힘을 실어주지는 않았다. 정철로서는 동지인 이이와 함께하던 정국(政局)을 정적(政敵)과 함께해야 하는 어려운 형국을 맞게 되었다. 이이가 없어진 때문인지 정철에 대한 선조의 총애는 더욱 깊어졌다. 선조 17년 2월 대사헌에 제수되었고 12월에는 의정부 우찬성으로 특진을 하게 된다. 이 무렵 상황에 대해 이건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이의 문객(門客) 중에 송익필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익필이 시골의 선비들을 모아 날마다 소를 올려 동인들의 나쁜 점을 들춰냈다. 이이가 그것을 금지하지 않으니 동인들의 원망이 더욱 뼈에 사무쳤다. 얼마 있다가 이이가 죽었다.”
 
  이 중에 바로잡아야 할 사실 하나는 송익필이 ‘이이의 문객’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송익필은 서인의 모주(謀主) 내지 이론가였다면 이이는 그에 입각한 조정의 대리인이었다고 하는 것이 실상에 가까울 것이다. 모두 주희의 맹렬한 지지자라는 공통점도 있다.
 
 
  東人의 謀主 이산해
 
  우찬성으로 있다가 이이에 이어 이조판서에 오른 이산해는 정철로서는 힘겨운 상대라 할 수 있었다. 원래 이이·정철·이산해는 어려서 가까운 사이였다가 동서 붕당이 생기면서 서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정철이나 이산해 모두 당쟁의 화신(化身)이라 할 만했다. 차이가 있다면 정철은 서인의 모주 송익필의 ‘행동대장’인 반면 이산해는 모주와 행동대장을 겸하고 있다. 이때 행동대장이란 조정에서 자신의 당파의 이익을 관철시키는 지휘자라는 뜻이다. 선조는 이이가 없어지자 동인과 서인에서 각각 파워가 비슷한 두 인물을 경쟁시킴으로써 권력의 안정을 꾀하려 하고 있었다.
 
  이산해는 만만치 않은 배경과 탁월한 학식, 그리고 적어도 이때까지는 깨끗한 처신으로 선조의 총애를 받기에 좋은 조건을 갖고 있었다. 어려서 신동으로 불렸고 문장이 뛰어났다.
 
  우리에게는 《토정비결》로 유명한 이지함이 그의 작은아버지이자 스승이다. 이이나 정철보다 3세 아래인 이산해는 정철보다 1년 빠른 1561년 23세 때 문과에 급제했다. 명종 때 홍문관, 병조좌랑, 이조좌랑, 사헌부집의 등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친 그는 선조 2년 홍문관 직제학에 올라 늘 지제교(知製敎)를 겸했다. 지제교란 국왕의 공식문서를 짓는 일을 하는 직책으로 장래가 촉망되는 문장가였음을 뜻한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학문 성향이나 집안 연고 등으로 볼 때 이산해는 영남사림보다는 기호사림에 가까웠고, 이지함도 서경덕과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에 이이나 정철과 가까이 어울렸다. 훗날 영의정에 오르는 이덕형(李德馨)은 그의 사위이기도 하다.
 
  이산해는 선조 8년 부친상을 당해 사직했다가 조정에 복귀해 도승지, 대사헌, 대제학, 대사간 등을 두루 지냈고 선조 13년 마침내 형조판서에 올랐다. 실은 이듬해 이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모친상을 당해 정계를 떠나 있었다. 문제의 선조 16년에 우찬성으로 기용됐다가 이때 다시 이이의 뒤를 이어 이조판서를 맡은 것이다. 이산해는 워낙 계략에도 뛰어난 인물이었기에 어찌 보면 이이와 정철이 힘을 모아 함께 맞서도 쉽지 않은 상대였다. 그런데 정철이 혼자서 대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정철의 실각
 
  당초 이산해와 이이는 각각 홍문관 직제학과 교리로 있을 때 《명종실록》 편찬에 함께 참여했다. 선조 14년 7월 이이가 대사헌으로 있을 때 선조와 이이가 이산해를 놓고 인물평을 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이가 “이산해는 그동안 벼슬살이를 할 때는 특별한 재주를 보이지 않았는데 이조판서가 되어서는 사람을 선발하는 데 한결같이 공론을 따르고 청탁을 배격해 그의 집 앞이 가난한 선비의 집과 같습니다”고 말하자 선조는 “이산해는 재기(才氣)가 있으면서도 과장하려는 생각이 없으므로 내가 일찍이 덕이 있는 사람이라고 보았다”고 답했다. 선조가 이산해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랬다.
 
  그러나 정철 등은 이산해를 걸림돌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산해는 점차 정철과도 적대적 관계를 형성했다.
 
  선조 18년 5월을 넘기면서 동인의 서인 탄핵은 가히 파상공세에 가까웠다. 동인의 대사헌 이식이 서인의 이귀(李貴)를 몰아세웠고, 서인의 핵심 인물이었던 심의겸은 파직당했다. 3월 실권이 없는 돈녕부 판사로 물러나 있던 정철도 계속 공박을 받다가 결국 8월에 파당의 우두머리로 지목돼 벼슬에서 물러나게 된다. 당시 정철과 가까웠던 다수의 인물도 벼슬을 잃었다. 그만큼 이산해의 정치력은 막강했다.
 
 
  이발과 정철의 ‘술판 사건’
 
  뒤에 다루게 될 기축옥사(己丑獄事), 즉 정여립의 난이 일어나게 된 연유를 깊이 살피려면 동인의 청년 ‘행동대장’ 이발(李潑・1544~1589)을 미리 언급해두지 않을 수 없다. 이발은 이이나 정철보다 8세 아래고 선조 6년(1573) 문과에 급제해 주로 홍문관에서 경력을 쌓았으며 젊은 나이에 동인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이발은 이이와는 어느 정도 말이 통하는 사이였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대략 이 무렵 이이는 정철에게 “공이 이발과 화합하여 논의를 조정해간다면 사림은 거의 무사하리라”고 당부하였다. 이발과 정철 사이에 소위 ‘핫 라인’을 만들어 동서 붕당을 조정하려는 이이의 구상에 따른 것이었다.
 
  두 사람 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서로에게 가까운 이이의 청이라 어쩔 수 없이 자리를 하게 되었다. 처음에야 그런대로 분위기가 좋았겠지만 술이 한 잔 두 잔 들어가자 이야기는 다시 시국문제로 향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목소리도 높아졌다. 도발은 정철이 먼저 했다. 이발의 얼굴에 침을 뱉어버린 것이다. 정철의 성격에 나이도 어린 녀석이 너무도 당당하게 맞서는 꼴이 볼썽사나워 그랬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붕당의 시대였다. 이발이 방자한 태도를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정철이 침을 뱉자 이발은 정철의 수염을 당겨 뽑아버렸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정철과 이발의 ‘술판 사건’은 이이의 사후(死後)에 일어난 일일 수도 있다. 동인의 세력이 크지 않고서는 이발의 이 같은 ‘오만방자’는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의통략》에는 이발이 올렸다는 소(疏)가 실려 있는데, 동인의 정치적 입장을 확인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대목이 담겨 있다.
 
  “신은 일찍부터 경세(經世)에서는 이이를 인정했고 도학에서는 성혼을 추앙해 평소에 두텁게 사귀었으나, 지금은 공론이 중요하고 사사로운 감정은 가벼운 것입니다. 옛 친구도 생각해야 하지만 나라를 저버릴 수 없습니다.”
 
  이때의 ‘나라’란 곧 임금을 뜻한다. 즉 비록 주자학을 공부했지만 자신은 왕권(王權)존중론자임을 밝힌 것이다. 이에 선조도 이를 인정했다. 이산해와 이발이 다시 동인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관료형 집단인 동인의 호소가 먹혀들어 반(反)왕권론의 강경한 주자학 신봉자들인 서인을 꺾은 때문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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