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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해 지금을 읽는 ‘新당의통략’ 〈3〉

조광조의 등장과 실패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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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성리학자들,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道統 주장
⊙ 남효온 등 ‘소학계’ 만들어 초보적 도덕 교과서인 《소학》에 입각한 정치 주장… 김굉필 거쳐 조광조에게 이어져
⊙ 조광조 일파, 서로를 ‘四聖十哲’이라 치켜세워… 운동권의 행태와 흡사
⊙ 이이, ‘조광조는 자질은 좋았으나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 전에 정계에 나서 구세력에게 당했다’고 평가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정암 조광조.
  조선 중기 호남을 대표하는 학자이자 정치가 기대승(奇大升·1527~1572년)은 직접 《주자대전(朱子大全)》에서 글을 발췌해 3권으로 된 《주자문록(朱子文錄)》을 펴낼 만큼 철저한 주자학자였다. 이때가 31세 때인데 같은 해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섰다. 시대는 폭정(暴政)의 시대인 명종(明宗) 때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집인 《정암집(靜庵集)》 부록에 실린 글에서 기대승은 조선의 도학(道學)에 대해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학문은 기자(箕子) 시대의 일은 서적이 없어서 고증하기 어렵고 삼국시대에는 천성이 빼어난 사람이 더러 있었지만 학문의 공이 없었고, 고려시대에는 비록 학문을 했다 해도 다만 문장을 주로 하였다. 고려 말에 이르러 우탁(禹倬)·정몽주(鄭夢周)가 나온 뒤에야 비로소 성리(性理)의 학(學)이 있음을 알았다. 우리 세종조에 이르러 예악과 문물이 찬란히 일신하였다. 우리나라의 학문에 대하여 서로 전해진 순서를 따지자면 정몽주를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삼아 마땅하다. 길재(吉再)는 몽주에게 배웠고 김숙자(金叔滋)는 길재에게 배웠고 김종직(金宗直)은 숙자에게 배웠고 김굉필(金宏弼)은 종직에게 배웠고 조광조는 굉필에게 배웠으니 이로부터 원류(原流)가 있는 것이다.〉
 

  이는 요순(堯舜)-우탕(禹湯)-문무(文武·주나라 문왕과 무왕)-주공(周公)-공자(孔子)로 도통이 이어지고 공자 이후로는 안자(子·안회)-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로 이어지고 이어 송나라에 이르러 주돈이(周敦)-이정(二程·정명도와 정이천)-주희(朱熹)로 이어지는 도통(道統)을 조선에서는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의 문제와 직결되는 문제다.
 
 
  이이, “道學은 조광조로부터 일어난 것”
 
‘理學의 시조’ 정몽주.
  공자는 이런 도통론이라는 것 자체를 아예 생각지도 않았다. 송(宋)나라에 이르러 생겨난 성리학 정통론 혹은 주자학 정통론에 입각한 일종의 교조(敎條)에 불과했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그 끝자락의 도통론을 이어보려는 시도가 많은 사람에 의해 이뤄졌고 기대승의 이런 이야기도 그중 하나였다.
 
  물론 조선 초에도 초보적 수준의 도통론이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세종 24년(1442년) 6월 22일에 성균관 생원 김인량(金寅亮) 등이 올린 소(疏)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영특 총명한 자질로 도통(道統)의 전함을 계승하셨습니다.”
 
  그러나 김인량 등의 이 같은 인식은 정통 주자학자들이 보기에는 주자학의 본질을 망각한 ‘나이브한’ 인식일 뿐이었다. 이들에게는 현실 속의 군주가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인정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오히려 태종이나 세종처럼 영명하거나 성군(聖君)에 가까울수록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진다고 여겼을 뿐이다. 실제로는 암군(暗君)이나 유암(幽暗)한 임금일수록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어 정치적으로는 유리하다고 보았다.
 
  정재훈 교수의 《조선시대의 학파와 사상》(신구문화사)에는 이이(李珥)가 도통에 대해 논한 대목이 실려 있다.
 
  “포은 정몽주를 이학(理學)의 시조라고 여기는데 내가 보기에는 사직(社稷)을 안정시킨 신하이지 참된 유자(儒者)는 아니다. 그렇다면 도학(道學)은 정암 조광조로부터 비로소 일어난 것이다. 퇴계 선생에 이르러서 유자(儒者)의 모양은 이루어졌다. 그러나 퇴계는 성현(聖賢)의 말씀을 그대로 실행한 분이지 자신의 주장을 보이지는 못했다.”
 
 
  이이의 조광조 비판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이가 정몽주와 이황을 같은 이유로, 즉 자신의 학문으로서 도학(道學)은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도통에 포함시켜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에 “도학(道學)은 정암 조광조로부터 비로소 일어난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이이는 자신의 책 《동호문답(東湖問答)》에서 “조광조가 성리학(性理學)으로 군주의 각별한 사랑과 예우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조심스러운 분석이 필요하다. 여기서 성리학이란 곧 주자학인데 반(反)왕권 이론으로 성격을 분명히 한 성리학을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군주의 사랑을 이끌어냈기에 이처럼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말은 이이 스스로 자신의 정치 지향을 밝힌 대목이기도 하다. 이 점은 그가 조광조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는 데서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조광조는 출세가 너무 일러 치용(致用)의 학문이 미처 대성하지 못한 상태였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 중에 충성스럽고 뛰어난 이들이 많았던 만큼이나 유명세만을 좋아하는 자도 많았지요. 게다가 그의 주장이 너무 과격한데다가 점진적이지 못하여 격군(格君)을 기본으로 삼기보다는 헛되이 형식만을 앞세우는 면이 있었소. 그것 때문에 간사한 무리들이 이를 갈며 기회만 엿보고 있었는데도 이를 미처 모르다가 한밤중에 신무문(神武門·경복궁의 북문)이 열리자 현인들이 한꺼번에 그물 하나에 모두 걸려들었소.”
 
  방향은 옳았으나 실행 면에서 문제를 드러냈고 또한 격군(格君), 즉 신하가 임금을 바로잡는다는 의미에서의 정군(正君)을 급진적으로 행하려는 바람에 일망타진(一網打盡)됐다는 비판이다. 여기서도 이이 그 자신의 정치 지향이 드러난다.
 
 
  조선 초기의 도학 논의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도학(道學)’ 두 글자에 담긴 비밀을 밝히는 데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그냥 도학이 있고, ‘신권(臣權) 이론으로서의 주자학에 대한 별칭’으로서의 도학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태종 4년(1404년) 11월 28일에 권근(權近)이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을 짓기 위해 사직할 것을 청하자 그것을 윤허하지 않으며 태종은 이렇게 말했다.
 
  “당(唐·요임금)·우(虞·순임금) 삼대(三代)의 군신(君臣)은 도학을 밝혀 치도(治道)를 내지 아니함이 없었다. 후세(後世)의 사람으로서 도학을 밝히고자 하는 자는 육경(六經)을 내버려 두고서 무엇으로 하였겠는가? 내가 즉위하면서부터 명유(名儒)를 얻어 좌우에 두고 경학(經學)을 강론(講論)하여 치도(治道)의 근원을 끌어내기를 생각했다.”
 
  이것은 그저 유학으로서의 도학을 지칭할 뿐이다. 세종 15년(1433년) 2월 9일에는 성균사예 김반(金泮)이 글을 올렸다.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언급이 들어 있다. 이때에는 이미 주희식의 도통론이 조선에도 들어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앞서 보았던 기대승이나 이이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조선의 도통을 설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무릇 성도(聖道)에 공로가 있는 이는 제사하는데, 종사(從祀)하는 법은 한(漢)나라 영평(永平) 15년에 시작하여 선성(先聖)을 제사하고 72제자를 종사하였고, 당(唐)나라 정관(貞觀) 20년에 이르러 조서(詔書)로써 역대의 명유(名儒)들을 아울러 배향(配享)하게 했으며, 송(宋)나라 이종조(理宗朝)에는 정호(程顥)·정이(程)·장재(張載)·주희(朱熹) 등을 더하여 종사에 들게 했습니다.
 
  본조(本朝)에서도 최치원(崔致遠)·설총(薛聰)·안향(安珦) 등을 종사에 추가한 뒤 우리 동방의 교화가 숭상됐습니다. 최치원·설총·안향의 뒤에, 오직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이 도학을 창명(唱鳴)하였고,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실로 그 정통(正統)을 전하였는데, 신의 스승 양촌 권근이 홀로 그 종지(宗旨)를 얻었습니다. 근의 학문의 연원(淵源)은 색에게서 나왔고, 색의 학문의 정통은 제현에게서 나왔으니, 세 분의 학문은 다른 예사 선유(先儒)들에 비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이제현-이색-권근을 도통으로 정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성리학과는 다소 구별되는 주자학자들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도통, 혹은 학통이라 할 수 있다. 세종도 인정하지 않는 주자학자들로서는 태조·태종·세종에게 출사한 이색이나 권근은 설사 학식이 출중하고 고려 말, 조선 초에 성리학을 소개한 공로가 있다 하더라도 자신들이 생각하는 주자학적 ‘도학’의 범위에는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효온과 ‘소학계’
 
《소학》을 편찬한 주희.
  세조 때는 ‘주자학적 도학’을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고, 마침내 성종 때에 와서 김종직(金宗直) 등이 중심이 돼 주자학적 도학을 본격적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물론 속내를 다 드러내지는 않은 채로 말이다.
 
  주자학적 도학은 공자의 유학 일반이 아니라 바로 《소학(小學)》으로서 도학을 말한다. 주희가 편찬한 《소학》은 쇄소응대(灑掃應對), 즉 물 뿌리고 청소하고 어른이 부르면 반드시 대답하는 등의 초보적인 도덕 교과서다.
 
  그런데 이런 책이 어떻게 정치술로 비화될 수 있었을까? 이는 한마디로 임금이라도 이런 도덕에 기초해야 하며 신하란 같은 도덕적 기반에서 군주의 비도덕적 행위를 비판하는 것이 바로 도리가 된다는 논리를 구축해주기 때문이다. 훗날 서인(西人) 세력이 광해군을 불효(不孝)를 명분으로 축출할 수 있었던 것도 효(孝)라는 도덕이 충(忠)이라는 정치보다 근본적이라는 생각에 입각했기 때문이다.
 
  도학이 이중적 의미를 가졌듯이 《소학》이란 책도 마찬가지의 이중성을 갖고 있었다. 이 점을 명백하게 구분하지 못하면 조선 역사를 바라보는 눈은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소학》이 일종의 국정교과서가 된 것은 이미 태종 7년(1407년) 3월 24일 권근이 올린 글을 계기로 해서다. 이리하여 《소학》은 이때부터 서울과 지방의 학교에서 필수과목이 됐고, 생원시에 응시하려면 필독해야 하는 책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윤인숙의 《조선전기의 사림과 소학》(역사비평사)에 따르면 “(조선 초에는) 《소학》은 평소에 유치한 것으로 여겨 읽지 않다가 시험과 같은 제도적 강제에 의해 마지못해 읽는 책으로 인식되고 있다”고 한다. 어쩌면 이것이 상식적인 것인지 모른다.
 
  그런데 성종 때에 이르러 김종직의 제자인 남효온(南孝溫·1454~1492년)이 중심이 돼 강응정(姜應貞 ?~?), 박연 등과 함께 ‘소학계(小學契)’를 만든다. 기록에 따라 ‘효자계’라고도 했다. 요즘식으로 하면 초보 단계 운동권의 ‘독서모임’이었다. 남효온은 ‘조광조의 전신(前身)’이라 할 수 있다. 남효온은 사육신을 높인 《육신전(六臣傳)》을 짓기도 했다.
 
 
  《소학》의 정치학
 
  남효온은 특히 종친인 이심원(李深源)과 깊은 교결을 맺고 당을 맺어 소학에 입각한 정치행동에 나섰다. 성종 9년 4월 유생이던 남효온은 내수사(內需司) 혁파를 비롯한 8가지 정치문제의 ‘개혁’을 요구하는 소를 올리는데 그중 핵심은 내수사 혁파였다. 그 전날에는 이심원도 비슷한 내용의 소를 올렸다. 내수사란 임금의 사(私)금고로 이는 주희 때부터 일관된 비판 대상이었다. 임금은 천하가 집이니 사사로이 금고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주자학적 정치강령의 핵심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미 조정 안에는 소학당의 무리가 보여주는 행태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었다. 동부승지 이경동(李瓊同)은 이렇게 말했다.
 
  “남효온은 주계부정 이심원이 천거한 서생 강응정의 무리인데 효온의 무리가 일찍이 성균관에 있을 때 스스로 서로 추존(推尊)하여 강응정을 부자(夫子·극존칭)라고 일컫고 박연을 안연(淵·공자의 수제자)이라고 일컫기까지 하며 그 나머지를 차례로 지목하여 괴이한 행동을 빚어내고 있다고 합니다.”
 

  이이가 말했던 “헛되이 형식만을 앞세우는 면”이란 바로 이것이다. 특이하게도 서로 헛되이 높이는 행태는 《소학》 숭배자들에게는 일관되게 나타나는 모습이다. 오늘날의 운동권들이 서로를 헛되이 높이는 행태의 뿌리는 어쩌면 이때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왕당파 유자광
 
  《연산군일기》 4년(1498년) 8월16일자에는 무오사화(戊午士禍)가 한창인 가운데 유자광(柳子光)의 남효온・김굉필이 함께 조직했다는 ‘죽림칠현(竹林七賢)’에 대한 비밀보고가 실려 있다. 즉 유자광은 왕당파(王黨派)로서 반(反)왕당파인 사림과 맞서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유자광의 이런 입장은 세조·예종·성종·연산군·중종 때까지 일관된 입장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유자광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그의 인격적 문제와는 별개로 주자학 무리에 반대한 자로서 받아야 했던 비판의 결과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즉 주자학 비판과 더불어 유자광의 실제 모습에 대한 입체적 복원의 필요성이 제기된다는 말이다. 그의 보고를 들어보자.
 
  “(남효온·안응세·홍유손·김굉필·이윤종) 이상의 사람들이 결탁하여 당원(黨援)이 되어 고담(高淡)·궤설(詭說)을 일삼아 선비의 기풍을 손상하고 있습니다. 유손(裕孫·홍유손)의 헌명(軒名)은 헌헌헌(軒軒軒)이온데, 반드시 헌(軒)의 이름을 지어준 자가 있을 것이오며, 또 유손이 그 동지들을 허여하여 죽림칠현(竹林七賢·중국 진나라 때의 노장사상 무리)이라 이름하였으니, 대개 진(晉)나라 완함(阮咸) 등의 일을 사모한 것입니다. 쇠세(衰世)의 일을 본받아서 다시 성명(聖明)의 세상에 행하려 드니, 청컨대 국문(鞠問)하여 그 죄를 징계하소서. 또 강응정(姜應貞)이란 자가 있어 그 무리를 허여하여 십철(十哲)이라 부르고, 그 무리들은 응정을 추앙하여 부자(夫子)라고 부르고 있사오니, 청컨대 아울러 국문하소서.”
 
  보기에도 민망한 수준의 허장성세가 만연하고 있었다. 이미 ‘소학당’의 원조라 할 수 있는 김종직에 대해 《성종실록》 15년 8월자에는 매우 신랄한 사관의 평이 나온다.
 
  “김종직은 경상도 사람이며, 박문(博文·널리 배움)하고, 문장을 잘 지으며 가르치기를 즐겼는데, 전후에 그에게서 수업(受業)한 자 중에 과거(科擧)에 급제한 사람이 많았다. 그러므로 경상도의 선비로서 조정(朝廷)에서 벼슬 사는 자들이 종장(宗匠)으로 추존(推尊)하여, 스승은 제 제자를 칭찬하고, 제자는 제 스승을 칭찬하는 것이 사실보다 지나쳤는데, 조정 안의 신진(新進)의 무리도 그 그른 것을 깨닫지 못하고, 따라서 붙좇는 자가 많았다. 그때 사람들이 이것을 비평하여 ‘경상도 선배의 무리[慶尙先輩黨]’라고 하였다.”
 
  이제 이 절을 시작하며 던졌던 질문에 답해야 할 차례다. 연산군 때의 무오사화 실상은 바로 이런 김종직당을 일망타진하려던 연산군과 유자광의 합작품이었다. 이후 도학을 내세운다는 것은 불가능해졌고, 중종반정이 일어났지만 여전히 공신들의 세상이기에 도학 운운할 상황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종은 공신들로부터 독립을 열망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신진세력과 손을 잡아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물론 그 신진세력이란 하필이면 반(反)왕권 주자학 세력이었으니 장차 왕권강화를 추구하는 중종과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즉 중종과 조광조가 이끄는 도학 세력의 ‘연합’은 그 속성상 이미 잠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미숙한 조광조는 이 점을 간과했다가 횡액을 당하고 만다. 이 점에 대해서는 같은 주자학도인 이이조차 비판적이었음을 염두에 두고 조광조를 만나러 가보자.
 
 
  김굉필과 조광조
 
율곡 이이.
  조광조(趙光祖)는 1482년(성종 13년)에 한양에서 태어났다. 13세던 1494년 연산군의 시대가 열렸다. 그나마 아버지 조원강의 벼슬이 미관말직에 머물렀기에 조정에서 일어나는 피바람에서 비켜날 수 있었다. 조광조는 17세 무렵 아버지의 임지인 평안도 어천으로 따라간다. 아버지의 벼슬은 역마를 관리하는 찰방(察訪)이었다.
 
  비슷한 시기인 연산군 4년(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종직의 제자던 김굉필(金宏弼)도 어천에서 가까운 희천으로 유배를 당했다. 2년 후 김굉필이 전라도 순천으로 이배(移配)될 때까지 2년 정도 그에게 소학을 배운 것이 사제관계의 전부다. 김굉필은 그 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결국 사형에 처해졌다.
 
  10대 후반의 조광조가 ‘소학동자’ 김굉필로부터 받은 지적·정신적 충격은 참으로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광조가 어떤 공부를 했는지 모르지만 대체로 개성 인근에 있는 천마산·성거산 등을 옮겨다니며 독서에만 전념했다는 이야기 정도가 전해진다. 뒤의 행적을 볼 때 이때 그는 소학뿐만 아니라 신권이론으로서의 주자학 전반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갖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마침내 주희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그 학문을 ‘도학(道學)’이라고 불렀다. 군주제 아래서 왕권비판 이론의 성리학을 정립했다는 뜻이다. 이이가 “도학은 정암 조광조로부터 비로소 일어난 것”이라고 한 것도 바로 이 점을 높이 평가한 때문이다. 이이는 도학이란 말에 담긴 비밀코드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조광조는 문과에 급제도 하기 전인 생원 시절에 이미 ‘사림의 영수(領袖)’가 된다. 이때 그는 불과 29세였다. 중종 5년(1510년) 10월과 11월 실록에 나오는 두 개의 사관의 평은 이를 입증해준다.
 
 
  스스로 ‘四聖十哲’이라 일컬어
 
  “이때 생원 김식(金湜)·조광조 등이 김굉필의 학문을 전수(傳受)하여, 함부로 말하지 않고 관대(冠帶)를 벗지 않으며, 종일토록 단정하게 앉아서 빈객을 대하는 것처럼 하였는데, 그것을 본받는 자가 있어서 말이 자못 궤이(詭異)했다. 성균관이 ‘그들이 스스로 사성십철(四聖十哲)이라 일컫는다’고 하여 예문관·승문원·교서관과 통모(通謀)하여 그들을 죄에 몰아넣으려고 하다가 이루지 못했다.”(10월)
 
  “국가가 무오사화를 겪은 뒤부터 사람이 다 죽어 없어지고 경학(經學)이 씻은 듯이 없어지더니, 반정 뒤에 학자들이 차츰 일어나게 되었다. 조광조는 소시에 김굉필에게 수학하여 성리(性理)를 깊이 연구하고 사문(斯文)을 진기시키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으니, 학자들이 추대하여 사림의 영수가 되었다.”
 
  여기서도 서로를 높여 사성십철(四聖十哲)이라고 부르고 있다. 소학당의 폐습이라 할 수 있다. 5년 후인 중종 10년 8월 마침내 조광조는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들어선다. 이제 재위 10년을 맞은 중종은 공신으로부터 독립을 추구하고 있었고, 주자학은 원래 재상은 말할 것도 없고 공신들에 대해 극도로 비판적이었다. 주로 언관(言官)이라 해서 사간원을 중하게 여겼다.
 
  실제로 조광조도 사간원 정언(正言)이 돼 누구보다 앞장서 공신 비판에 나섰다. 홍문관으로 옮겨서도 수찬을 맞아 언관으로서 목소리를 크게 높이며 중종의 총애를 받았다. 늘 경연에 검토관·시독관으로 참여해 경전과 시사를 논해 중종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불과 2년도 되지 않아 조정 대신들도 조광조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중종 12년(1517년) 윤 12월 26일에 실린 사관의 평은 이를 잘 보여준다.
 
  “특히 조광조는 임금의 총애를 받아 정3품의 직(職)에 초수(超授·특진)되자 경연관이 ‘너무 지나치다’고 했는데 (이조판서) 남곤은 왕의 뜻을 엿보고서 계청(啓請)한 것이다. 비록 주의는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은연중에 표시한 것이니 이는 대개 조광조를 두려워해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조광조 일파의 득세
 
  욱일승천(旭日昇天), 조광조와 그를 따르는 사림들을 막을 세력은 없어 보였다. 중종 14년(1519년) 새해를 조광조는 종2품 대사헌으로서 맞았다. 국왕의 총애를 받는 대사헌이란 자리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
 
  같은 해 4월 1년 이상 끌어오던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게 되었다. 모두 120명이 천거되어 28명이 급제했다. 그중에는 이미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했다가 다시 응시한 사람도 여러 명이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훗날 조광조의 눈치를 살폈다 하여 비판을 받게 된다. 이때 현량과에서 장원은 사헌부 장령을 지낸 바 있는 김식이었다. 조광조와 김식은 이때 38세 동갑이었다. 김식이 조광조와 아주 가까운 데서 알 수 있듯이 28명 중 상당수가 ‘조광조 사람’이었다.
 
  이로써 조정 내 사림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못할 것이 없어 보였다. 실제로 중종은 김식을 종3품인 성균관 사성으로 임명했다가 열흘 후 정3품인 홍문관 직제학으로 승진시켰다. 장령이 정4품인 것을 감안한다면 불과 보름 만에 2계급 특진이었다. 그런데도 사림들은 중종을 압박해 김식을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 정도 되면 중종 아니라 세종대왕이라도 기분이 상할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거듭 김식의 성균관 대사성 임명을 청하는 이조판서 신상의 요청에 대해 중종은 “부제학의 적임자를 기다린 후에 대사성에 임명하면 어떻겠는가?”라고 나름의 중재안을 내놓았지만 기세가 오른 사림들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중종은 김식을 대사성으로 임명한다.
 
 
  僞勳 삭제
 
  이것은 중종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었다. 중종이 원한 것은 왕권강화지 또 다른 신권(臣權) 세상을 노리는 사림의 집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광조는 브레이크가 망가진 기관차였다. 마침내 같은 해 10월 대사헌 조광조가 칼을 뽑았다. 대사간 이성동과 함께 위훈(僞勳) 삭제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반정(反正) 3훈(박원종·성희안·유순종)’은 세상을 떠났지만 정국공신(靖國功臣) 명단에 오른 가짜 공신들이 중앙권력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게다가 정국공신 1등에 올랐던 홍경주는 살아 있었다.
 
  중종은 훈구(勳舊)와 사림의 상호견제와 균형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 했는지 모른다. 조광조는 이 점을 과소평가했다. 내친김에 훈구의 뿌리를 통째로 뽑아버리려 했다. 훈구의 격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조광조는 11월 일곱 차례의 주청을 통해 위훈 삭제를 관철했다. 2등, 3등 공신 일부와 4등 공신 전원이 훈작(勳爵)을 삭탈당했다. 전체의 4분의 3에 달하는 76인의 훈작이 날아갔다. 당위(當爲)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반동(反動)을 부르기에 충분했다.
 
  훈구의 전횡도 싫었지만 사림의 독선에도 중종은 넌덜머리를 내기 시작했다. 위훈 삭제가 이뤄진 지 불과 4일 만에 훈구파는 대대적인 반격에 나선다. 중종의 생각이 반(反)사림으로 돌고 있음을 간파한 두 사람이 있었다. 남곤과 심정이다.
 
  남곤은 묘하게도 김종직의 문인으로서 그 뿌리로 보자면 사림파였다. 심정은 정국공신 3등에 녹훈되었다가 위훈 삭제를 당해 훈작과 토지, 노비를 하루아침에 빼앗긴 주인공이었다. 두 사람은 중종의 후궁인 희빈 홍씨의 아버지이기도 한 정국공신 1등 홍경주를 찾아갔고 홍경주도 두 사람의 사림제거론에 쉽게 동의했다.
 
  홍경주는 딸 희빈 홍씨를, 심정은 자신과 가까운 경빈 박씨를 통해 중종의 마음을 흔들어놓기 시작했다. 백성이 모두 임금보다 조광조를 더 좋아한다는 식이었다. 심지어 희빈 홍씨는 아버지의 밀명에 따라 비원의 나뭇잎에 ‘走肖爲王(주초위왕)’이라고 꿀로 써놓은 다음 벌레가 갉아먹은 것을 중종에게 갖다 바치기도 했다. 조(趙)씨, 즉 조광조가 곧 왕이 된다는 뜻이었다. 물론 이것을 중종이 진심으로 믿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계속되는 두 후궁의 참소에 불안감은 더해갔을 것이다.
 
 
  기묘사화
 
  결국 중종은 당파를 형성하려 했다는 이유를 들어 조광조 일파를 잡아들인다. 처음에는 국문도 않고 죽이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일단 조광조·김정·김구·김식·윤자임 등을 옥에 가두었다. 그후 조광조와 김정·김구·김식 등은 사형시키기로 했으나 영의정 정광필이 눈물로 호소하여 일단 능주로 유배되는 선에서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러나 훈구파의 김전·남곤·이유청이 각각 영의정·좌의정·우의정에 올라 유배 가 있던 조광조 일파에게 사약(賜藥)을 내리도록 중종을 설득했다. 결국 한 달 후인 12월 20일 조광조에게 사약이 내려왔다.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시작이었다.
 
  논란 끝에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던 김식은 선산에 유배되었다가 다음해 사약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거창으로 숨어 들어갔다가 목을 매 자살했다. 훗날 영의정에 오르게 되는 김육이 그의 증손자다. 담양부사 박상과 함께 폐비 신씨 복위 논쟁을 유발했다가 고초를 겪은 후 조광조의 집권 후 관직에 나와 형조판서에까지 오른 37세의 김정은 제주도로 안치되었다가 1521년 사약을 받았다. 아산으로 귀양을 갔던 기준은 김정과 같은 무렵 사약을 받고 29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그의 조카가 선조 때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기대승이고 아들은 기대항이었다.
 
  이때 일어난 기묘사화의 피바람으로 조선의 사림은 다시 깨어나기 힘든 깊은 잠에 빠져들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 휴화산(休火山)은 오랜 세월이 흘러 선조 8년에 다시 지표(地表)를 뚫고 화염을 뿜어내게 된다.
 
 
  조광조에 대한 이황과 이이의 평가
 
퇴계 이황.
  퇴계 이황은 조광조를 이렇게 평했다.
 
  “정암(靜庵·조광조의 호)은 타고난 성질이 신실하고 아름다우나 학문이 충실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정치에서) 시행한 것이 사리에 지나쳐 합당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러므로 마침내 일이 실패하는 데 이르고 말았다. 만약에 학문이 충실하고 덕성과 재능이 성취된 뒤에 나아가서 정사를 담당하였더라면 어디까지 나아갔을지 쉽게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퇴계보다는 젊은 세대인 율곡 이이는 《석담일기》에서 이렇게 평했다.
 
  “그는 뛰어나고 밝은 자질과 나라 다스릴 재주를 타고났음에도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도 전에 정계에 나선 결과 위로는 왕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아래로는 구세력의 바람도 막지 못하였다. 그는 도학을 실천하려고 왕에게 왕도를 이행하도록 간청하였으나 그를 비방하는 입이 너무 많아 비방의 입이 한 번 열리자 결국 몸이 죽고 나라를 어지럽게 하였으니 후세 사람들이 그의 행적을 경계로 삼는다.”
 
  두 사람의 평가는 비슷해 보이지만 실은 큰 차이가 있다. 자질은 좋았으나 학문이 충실하지 못했고 그래서 일을 그르쳤다는 것이 퇴계의 평이라면, 자질은 좋았으나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 전에 정계에 나서 왕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했고 구세력에게 당했다는 것이 율곡의 평이다. 즉 이이는 도학을 실천하려는 단계에까지 이른 점을 평가하는 데 반해, 이황은 이 점조차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패망의 이유 또한 퇴계는 조광조 자신에게서 찾는 반면 율곡은 비방하는 자들에게 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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