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陰地의 戰士들

엄상익 변호사가 경험한 정보기관 〈9〉 88년 청문회와 나 (3)

新군부 실세 이학봉의 증언 “전두환, 미국 몰래 핵무기 완성 고민했다”

글 : 엄상익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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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법관 인사도 청와대가 다 했다”
⊙ “5·18 당시 北 관련 징후 발견하지 못했다”
⊙ “反骨 기질 대법관 필요하다고 판단해 이회창 집어넣어”
⊙ 학원안정법 입안한 某씨, 전두환에게 ‘그 법 만들지 않아 이렇게 당한다’

嚴相益
1954년생. 경기고·고려대 법대 졸업 / 사법고시 24회, 사법연수원 15기 수료 / 국가안전기획부 정책연구관, 법무법인 ‘정현’ 변호사 역임 / 現 엄상익법률사무소 변호사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참모들. (왼쪽부터) 이학봉 수사국장, 허화평 비서실장, 장도영 보안처장, 전두환 사령관, 권정달 정보처장, 허삼수 인사처장. 사진=조선DB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수사와 재판에 관여한 사람들이 육군본부 법무감실에 모였다. 청문회 답변 준비를 위해서였다. 보안사령부 장교 출신인 이학봉(2014년 사망)은 5공 정권에서 청와대 민정수석을 거쳐 1988년 청문회 때는 민정당 국회의원이었다. 다른 보안사 장교들은 장군이 되어 있었다.
 
  군 검찰관 정 중령은 장군이 되어 법무감을 지내고 전역했다가 청문회 준비팀의 팀장이 되었다. 당시 수사에 관여했던 법무장교들은 대개 제대를 하고 중견 검사가 되어 있었다. 그들이 느꼈던 시대적 인식은 재야(在野)와는 달랐다. 보안사령부에서 나온 장교가 그때 시국 상황을 이렇게 요약해 말했다.
 
 
  보안사 장교가 말하는 1980년 김대중의 행적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서울대 학생들의 시위. 당시 軍이나 정보 당국은 상황을 ‘민중혁명’ 상황으로 보았다고 한다. 사진=조선DB
  “1980년 봄이 되면서 긴급조치 위반이나 시국사건으로 투옥되거나 제적당했던 운동권 학생들이 돌아와 전국 대학을 장악했습니다. 그들이 김대중의 정치 조직인 국민연합과 연계가 됐습니다. 1980년 5월 14일 정오 서울 시내 대학생 7만명이 일시에 교문을 뛰쳐나왔고, 5월 15일 서울역 광장 앞에는 10만명의 학생이 모였습니다. 시위대에 의해 경찰차가 불타고 시위는 야간까지 계속 가열됐습니다. 부산·대구·광주·인천 등 지방 대도시에서도 시위가 격화되고 있었습니다. 전국적으로 노사분규가 터져 나왔습니다. 강원도의 사북탄광에서 폭동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대중과 김영삼, 김종필은 대권주자로서 극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김대중은 제도권에서 이미 우위(優位)를 선점하고 있던 김영삼과의 대결에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학생과 재야세력을 동원하여 장외투쟁에 나섰습니다. 재야 강경세력과 김대중씨가 이끌고 있던 국민연합은 극단적인 반정부 투쟁을 배후에서 선동했습니다. 국민연합이 역점을 둔 것은 ‘대학생의 조직화’였습니다. 복학생들을 국민연합의 핵심 요직에 임명함으로써 전국 대학 내 그들의 거점을 형성했습니다. 국민연합은 최규하 정부를 ‘유신세력의 잔당’이라고 몰아붙이고 당장 물러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국민연합의 목표는 학원 소요를 배후조종해서 최규하 정부를 전복시키고 정권을 획득하는 ‘민중혁명’이라고 우리는 보았습니다.”
 
 
  “김대중의 국민연합, 反정부 봉기 노골적 선동”
 
  보안사령부 장교가 미리 준비한 김대중의 언행(言行)을 기록한 자료를 모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말을 계속했다.
 
  “김대중은 인하대 강연에서 ‘혁명은 혁명을 낳고 우리 모두가 혁명가다’라고 했습니다. 서울대 강연에서 김재규를 충신이라고 했습니다. 동국대 강연에서는 끈질기게 저항하면 10·26과 같은 또 다른 사태가 올 수 있다고 했습니다. 김대중이 이끄는 국민연합은 ‘혁명’이라는 용어들을 쓰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내란 상황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십만명의 시위대가 밤에 불을 지르고 민간인 차량들을 빼앗아 몰고 다녔습니다. 서울 시내 중심가는 시위대에 장악되고 지방 대도시에서도 수만명의 학생들이 시가지를 누비며 폭력시위를 벌였습니다.
 
  김대중의 국민연합은 노동자와 학생들의 반(反)정부 봉기를 노골적으로 선동했습니다. 당시 국민연합이 발표한 선언문을 보면 민족적 결단, 민족통일을 말하면서 그들의 목표가 유신체제를 청산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민족통일을 위한 ‘민족사의 결전’을 벌이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민족사의 결전은 민중혁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안사령부에서 본 당시의 시국상황입니다. 그러면 군은 어떤 판단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해야 했을까요. 그냥 물러나야 할까요? 헌법은 군이 국가의 안전과 질서를 책임지도록 의무를 부과하고 있습니다. 헌법의 민주체제를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내란을 주도한 자들을 수사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1980년 당시 북한의 동정
 
  국가안전기획부 수사관이 바통을 이어받아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당시 북한 동향에 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시자, 다음 날 북한은 전군에 ‘폭풍5호’를 발령했습니다. 동구권을 방문 중이던 북한의 오극렬 총참모장 일행은 방문 일정을 중단하고 급히 귀국해 군 수뇌부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군은 통일에 대비해 정치·사상적 무장을 강화하라는 지시가 떨어지고 전쟁물자의 전시 수송 대비훈련이 대대적으로 실시되고, 곡산·세포 지역에서는 차량 1000대를 동원한 군단급 훈련이 실시됐습니다.
 
  비무장지대 공동경비구역에서는 북한군과 미군 간의 총격전이 있었습니다. 서울 북방 9사단 지역 한강 하구로 침투하던 무장공비가 아군에게 발각되었고, 무장간첩선이 포항만으로 침투했습니다. 또한 일본의 내각조사실이 북한이 남침을 결정했다는 첩보를 전했습니다. 일본 고위 관리가 중국 방문 중에 북경 당국으로부터 들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일본 당국은 그 첩보를 우리 정부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공식적으로 통보해주었습니다. 저희 안전기획부는 김일성이 소련을 비밀리에 방문한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김일성은 소련 브레즈네프 서기장과의 비밀회동에서 ‘남반부 인민의 영웅적 투쟁에 의해 금년 내 반드시 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했습니다. 김일성은 남조선에서 시민들이 봉기할 경우 지원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1980년 3월20일자 《워싱턴포스트》 칼럼은 소련은 세계전략의 하나로 북한이 한국을 공격하게 함으로써 중국과 미국의 관계 와해를 노리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수사의 밑그림 그린 수사관
 
1980년 3월 1일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사면 복권된 김대중씨의 동교동 자택을 방문했다. 사진=조선DB
  안전기획부 수사관이 잠시 말을 쉬었다 계속했다.
 
  “당시 우리는 신현확 총리와 최규하 대통령에게 이런 정보들을 보고했습니다. 신현확 총리는 김종필 공화당 총재와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게도 북한의 남침위협 첩보를 알려주었습니다.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초당적 협조를 당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김영삼 총재는 남침위협을 ‘조작’이라고 일축해버렸습니다. 첩보를 보내준 일본의 내각조사실은 거대한 조직을 가진 일본의 정보기관입니다. 당시 북한에 관한 정보는 공산 진영을 제외하고는 일본의 내각조사실 정보가 가장 신속하고 정확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습니다. 일본이 미국과 우리 정부에 보낸 날짜까지 명시된 정보를 한국의 야당 총재가 조작이라고 해버린 겁니다. 군부가 정치적 이용을 위해 그런 정보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저희 안전기획부에서는 학원 소요(騷擾)와 배후세력의 연결고리를 끊지 않고는 파국을 막을 수 없다고 분석했습니다. 김대중에 대해 강력한 조치를 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저는 김대중을 직접 수사한 사람입니다. 여러 날 동안 함께 지냈습니다. 저는 광주사태의 기폭제가 된 조선대의 시위 주동자와 김대중의 관계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김대중과 대학시위를 주도하는 복학생들이 만나고 자금을 지원받고 폭력시위를 의논했다면 내란음모로 볼 수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김대중을 만나 파악한 사실을 상부에 보고했고, 상부에서는 저의 의견을 받아들였습니다. 제가 수사의 밑그림을 그렸던 장본인인 셈입니다.”
 
  보안사령부 장교나 안전기획부 수사관이나 나름대로 강한 프라이드가 있었다. 군이 아니면 당시 사회질서를 잡을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신군부 실세 이학봉의 전두환 評, “눈치가 100단쯤 되는 분”
 
  나는 청문회 답변 준비팀에서 이학봉 의원을 만났다. 그에게 부탁해 운동권에 있던 친구를 살린 인연이 있었다. 그 신세를 갚는 입장에서 나중 수지킴 사건 때 나는 그의 변호인이 되기도 한다. 어느 날 이학봉 의원과 자그마한 음식점에서 만났다. 그의 내밀한 얘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 전두환 대통령은 어떤 사람입니까?
 
  내가 물었다. 백담사에서 분을 삭이지 못한다는 기사가 언론에 나고 있었다.
 
  “눈치가 100단쯤은 되는 분이죠. 부하들이 20~30명 앞에 앉아 있어도 누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귀신같이 알아챈다니까요. 그리고 자신의 부족한 점도 잘 알고 있어요. 인재들을 불러서 쓸 때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무식한 내가 욕은 다 먹을 테니까 나라를 위한 경륜은 여러분이 마음껏 펴시라’고 했죠. 그렇게 해서 훌륭한 인재들을 많이 모았죠. 당 태종의 제왕학이 《정관정요(貞觀政要)》인데 우리가 육사를 다닐 때 읽었어요. 전두환 대통령이 그걸 읽으셨으면 훨씬 더 좋은 대통령이 됐을 거예요.”
 

  ― 이순자 여사는 어떤 성격이었습니까?
 
  “시중에서 여러 소리가 있지만 남편을 대통령으로 만든 분이에요. 전두환 대통령이 영관 장교 시절이었어요. 부하들이 그 집을 찾아갔는데 벽에 새 점퍼가 걸려 있었어요. 그들은 내심 가지고 싶어 했고 이순자 여사는 두말하지 않고 그걸 주었죠. 다른 부하들이 또 부러워하면 또 주고 그렇게 열 몇 벌인가를 준 적도 있다고 해요. 부하들의 마음을 이순자 여사가 자연스럽게 잡은 거죠.”
 
  ―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고 총을 쏜 김재규를 처음 수사했었죠? 그때 처음 상황이 어땠습니까?
 
  “새벽 2시경 나는 보안사 서빙고 수사분실에서 잡혀 온 김재규를 봤어요. 쿠데타일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했어요.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시해했다면 단순한 상황이 아니니까요. 더구나 현장에 참모총장이 있었으니까요. 김재규는 제가 보안사령관으로 모시던 분이기도 했습니다. 김재규는 저를 보고 ‘이미 상황이 끝났다’고 하면서 20사단이 가락동까지 와 있을 거라고 했어요. 그러면서 ‘이 중령, 너는 이런 순간 행동을 똑똑히 해야 해’라고 나에게 경고했죠. 나는 그 순간 수사해야 하는 건지 무릎 꿇고 복종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불안했어요. 김재규는 제게 ‘빨리 가서 전두환이를 데리고 오라’고 큰소리쳤죠.”
 
 
  김재규, 얻어맞더니 금세 변해
 
10·26사태 후 보안사의 수사를 받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사진=조선DB
  ― 그래서 어떻게 했죠?
 
  “저는 사실 속으로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죠. 박정희 대통령은 전두환 선배나 저 같은 일단의 육사 졸업생을 따로 발탁해 특별히 키워줬어요. 박정희 대통령은 저희 그룹에는 아버지 같은 존재였죠. 박정희 대통령은 독특한 용병술을 폈어요. 혁명을 한 분이라 그런지 참모총장 같은 병력을 다루는 요직에는 너무 똑똑한 인물을 앉히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런지 저희 그룹은 계급이 낮아도 참모총장을 그렇게 대단하게 보지 않았어요. 박정희 대통령이 저희 그룹의 간 덩어리를 붓게 한 거죠.
 
  저는 당시 아버지 같은 대통령을 김재규가 쏴 죽였다는 사실에 격분했었죠. 육군 중령에 40대 초반이었던 저는 아직 몸보신이나 정치적 계산을 할 때는 아니었습니다. 김재규가 저더러 자꾸만 전두환 사령관을 불러오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전두환 사령관이 와서 김재규의 얘기를 들으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어요.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김재규를 손보게 했죠. 김재규가 얻어맞더니 금세 변하는 거예요. 비굴하게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하는 겁니다.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을 했던 사람의 초라한 모습이었어요.”
 
  서슴없이 털어놓는 그의 얘기는 진정성이 있어 보였다. 내가 다시 물었다.
 
  ― 그러면 12·12는 어떻게 된 겁니까?
 
  “김재규가 대통령에게 총을 쏠 때 참모총장이 근처에 있었어요. 또 김재규와 함께 차를 타고 육군본부 벙커까지 갔어요. 정승화는 거기 모인 국무위원들한테 한마디도 얘기하지 않았죠. 계엄사령관이 된 후에도 수상했죠. 자신의 휘하에 있는 군법회의에 압력을 넣어 김재규를 옹호하고 구명하려는 움직임이 보였어요. 게다가 김재규의 인맥이었던 수경사령관, 특전사령관, 육본 작전참모부장, 3군사령관, 수도기계화사단장, 26사단장, 30사단장들을 모두 그대로 두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군법회의에서 김재규는 점점 민주화의 영웅이 되어가고 있었어요. 자신의 범행이 유신통치를 끝내고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고 했죠. 시민단체들은 김재규를 독재자를 제거한 영웅으로 만들고 박정희 대통령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될 존재로 만들어갔죠.”
 
 
  “12·12 이후, 장군이나 기관장들이 고개 숙이더라”
 
  이학봉은 당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이어갔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계엄사령관이 된 이후에는 그 직만 충실히 수행하면 되는데 정치에 개입하고 있었어요.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은 대통령감이 아니라는 ‘3김 비토’ 발언이었죠. 저는 정승화를 잡아넣자고 전두환 사령관에게 건의했죠. 그뿐만 아니라 대통령이 죽는 자리에 함께 있던 김계원 비서실장도 공범(共犯)으로 처단해야 한다고 했어요.”
 
  ― 그걸 전두환 사령관이 허락하던가요? 군대 조직에서 상관을 체포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맞아요. 그런데 지금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 건 전두환 사령관이 그걸 허락했다는 거죠. 전두환 사령관은 당시 우리보다 열 살은 위였죠. 우리의 그런 경거망동을 말려야 할 입장인데 그걸 허락한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승화 참모총장을 떠받치고 있는 수도경비사령관이나 특전사령관, 헌병감 등 서울 지역을 지키는 부대의 사령관들이었어요. 그 사람들이 방해를 하면 안 되니까요.
 
  저는 전두환 사령관에게 그 사람들도 모두 잡아넣어야 한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전두환 사령관이 그건 말렸어요. 차라리 거사(擧事) 시각에 그 사람들을 술집이나 요정에 유인해놓고 하면 된다는 거였죠. 그래서 그렇게 한 겁니다.”
 
 
  이학봉 “5·18 당시 北이 움직인다는 징후 발견 못 해”
 
이학봉 전 합동수사본부 수사국장.
  ― 권력이 바뀌는 순간인데 그렇게 단순했단 말입니까?
 
  “세상에서는 우리가 치밀한 계획하에 벌인 일이라고 하는데 그건 자기들 잣대로 평가하는 시각이고, 정승화 참모총장을 체포하는 시점까지는 우리는 단순한 감정적 반발이 컸어요. 그리고 수사 체계상 국방부 장관이나 대통령의 결재가 있었으니까 사법적 체포행위이지 군사반란이나 혁명은 아니라는 생각이었어요. 하여튼 그걸 계기로 군 내부에서 대립하고 갈등해온 두 세력이 충돌하게 된 거죠. 군의 장성들이 그 두 편 중 어느 쪽에 서느냐로 되어버린 겁니다. 그날 이후 블랙홀같이 권력이 우리한테 쏠린 것 같았어요. 모든 장군이나 기관장들이 앞에 와서 고개를 숙이더라고요. 그 순간부터 솔직히 마음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말이죠.”
 
  ― 그런데 김대중은 왜 구속하셨죠?
 
  “시위가 폭동 상태를 넘어 내란 상태로 갔어요. 엄연히 합법적인 최규하 정부가 있었어요. 유사시 군대는 국가의 질서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냥 재야에 정권을 넘길 수는 없죠. 그래서 내가 폭동의 주모자인 김대중을 구속하자고 건의했었죠.”
 
  ― 당시 광주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대중 구속 후 광주에서 시위가 격화되고 폭동으로 번지면서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갔어요. 광주의 분위기가 서울에 불붙으면 어떻겠어요? 우리가 가장 두려워한 건 그거죠.
 
  전두환 사령관도 겁을 먹은 것 같았어요. 사흘이나 출근을 안 하고 서소문에 있는 보안사 안가의 방에 누워 있었어요. 가보니까 면도를 하지 않아 수염이 꺼멓게 자랐어요. 그 옆에 이순자 여사가 있었죠. 전두환 사령관은 광주를 보고 겁먹고 주춤했어요. 이순자 여사와 제가 여기까지 왔는데 지금 발을 빼면 우리 전부 죽는다고 했죠.”
 
  ― 5·18 당시 북한이 배후에서 책동했었나요?
 
  “제가 여러 차례 광주에 내려갔어요. 저는 당시 북한이 뒤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징후는 발견하지 못했어요.
 
  그것보다는 후일 이 문제가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 되겠구나 예상했죠. 그래서 가급적이면 구속자를 줄이라고 했어요. 그걸 늘리면 나중에 그만큼 반정부 세력이 커지는 것 아니겠어요? 그리고 저는 광주사태에서 죽은 사람들을 모아 한곳에 묘지를 만드는 것도 반대했어요. 그런 묘지가 생기면 반정부 세력의 발화점이 될 걸로 본 거죠.”
 
 
  김재규 최후의 모습
 
  ― 김재규 재판에 대해서는 어떻게 관여하셨습니까?
 
  “김재규 재판 때 내가 군법회의에 가봤더니 법무장교들이 재판에 능숙하지 않았어요. 날고 기는 재야 변호사들이 이의(異意) 신청도 하고 법적인 의견도 제시하는데, 군 판사라는 법무장교가 절절매고 있더군요. 알아보니까 고시에 합격하지 않은 자격 미달자가 그 자리에 있더라고요. 그래서 뛰어난 판검사들을 차출해서 군법회의를 지원하게 했어요. 아무리 그래도 법적인 형식과 절차가 있는데 판검사들이 직접 군법회의에서 재판하게 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뒤에서 모니터로 보면서 재판 진행절차에 관한 의견이 담긴 쪽지를 전달하게 했죠. 어차피 김재규는 사형이 정해져 있었고, 절차상의 문제였죠.”
 
  ― 당시 의외로 김재규가 빨리 사형에 처해졌어요. 왜 그랬죠?
 
  “시위와 폭동이 내란 상태로 갔고 김재규를 의인(義人)으로 만들려는 분위기 때문에 솔직히 저희도 불안했어요. 그래서 서둘러 군법회의 재판을 끝내게 하고 사건을 대법원으로 보냈어요. 그런데 대법원이 법리 논쟁을 하면서 또 시간을 끌더라고요. 세상은 더 어수선해지는데 말이죠. 그래서 제가 주심 대법관을 찾아갔습니다. 사건을 빨리 끝내주면 나중에 보답하겠다고 했죠.”
 
  그 무렵 김재규의 사형집행을 지휘한 선배 법무장교 이 소령이 한 말이 기억에 떠올랐다.
 
  “김재규의 사형집행 지휘를 군 검찰관이 가서 해야 하는데 서로 가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마지막에 내가 걸려버렸어. 그래서 할 수 없이 가서 죽는 장면을 봤는데 마지막이 되니까 버들버들 떨면서 혼이 빠져 있더라고. 사람이 공포로 그렇게 떠는 걸 처음 봤어.”
 
  그는 진저리를 쳤다. 육군본부 법무감실의 복도에는 김재규의 집에서 압수해온 물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보석이 박힌 텔레비전이 있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핵개발 둘러싼 고민
 
전두환 대통령은 1981년 10월 미국을 방문, 레이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사진=조선DB
  ― 그 후에 국가보위입법회의를 만들어 국회 기능을 대신하도록 했는데 그 배경을 좀 알려주시죠.
 
  “우리는 법조인들을 파견 받아서 헌법을 만들었어요. 대통령이 대법원장과 대법관, 판사를 임명하는 것으로 만들었어요. 그동안 판사를 대법원장이 임명했었죠.
 
  제가 김재규 재판 때 우리가 신세를 졌던 대법관을 대법원장 임명하자고 대통령에게 건의했죠. 실질적으로는 대법관 인사를 우리(청와대)가 다 한 셈이죠. 이회창과 오성환을 대법관 후보 명단에 넣었어요. 반골(反骨) 기질도 더러 섞여야 한다는 의도였죠. 새로 된 대법원장이 대법관에 다른 사람 하나를 넣어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기존 명단에서 오성환을 빼고 그 사람을 집어넣었죠.”
 
  다음에는 미국과의 관계를 알아보고 싶어 물었다.
 
  ― 레이건이 미국 대통령이 된 후 전두환 대통령을 제일 먼저 불렀는데 왜 그랬습니까?
 
  “핵과 김대중 때문이죠. 레이건은 전두환 대통령을 자기 방으로 불러 심플하게 두 가지를 요구했어요. 하나는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했던 핵개발을 중단하고, 두 번째는 김대중을 죽이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면 전두환 정권을 인정해주겠다고 했어요.
 
  돌아와서 전두환 대통령이 우리와 의논했어요. 문제는 핵이죠. 우린 ‘몰래라도 핵무기를 완성시킬 수 없을까’ 고민했죠. 깊은 산골에 연구소 명칭을 달고 비밀리에 개발하는 방안도 생각해봤어요.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핵과 장거리미사일을 꼭 가져야 한다고 했죠. 아무래도 미국의 눈을 피하기 불가능하다는 결론이었어요. 전두환 대통령은 미국의 감시 때문에 핵개발이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경제발전에 주력하자고 했죠.”
 
 
  학원안정법
 
  잠시 침묵했다가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학원안정법을 만들려고 하다가 그만뒀어요. 그거 중요한 겁니다. 그 배경을 알아요?”
 
  이학봉 의원이 대뜸 말을 꺼냈다. 나는 “말씀해주시죠”라며 이야기를 유도했다.
 
  “그건 사실 엄청나게 무서운 법이었어요. 운동권 출신들을 모두 철저히 청소해버리려는 법이었으니까요. 서구의 경우를 보면 공산주의자들을 무자비하게 없앴어요. 미국의 경우도 매카시 선풍 때 공산주의자를 철저히 눌러버렸잖아요? 일본의 경우도 적군파(赤軍派)를 산속 아지트까지 급습해서 다 죽여버렸어요. 그런 외국의 사례를 따라서 우리도 학원안정법을 만들려고 했던 거죠.
 
  제가 보기에 그 법은 독재로 가는 길이었어요. 정치적 반대자를 없애버릴 수 있는 법이었으니까요. 그래도 전두환 대통령은 괜찮은 사람입니다. 주위에서 반대하는 의견을 내놓자 법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운동권 출신들이 살아나고 번성하게 된 거죠. 학원안정법을 만들어 반대자들을 없애버렸다면 전두환 대통령이 백담사에 귀양갈 일도, 5공 청산의 멍에를 질 일도 없었을지도 모르죠. 얼마 전 그 법을 입안(立案)했던 모(某)씨가 술병을 가지고 백담사를 찾아갔다고 들었어요. 밤새 술을 마시면서 그 법을 만들지 않아서 이렇게 당하신다고 했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보이지 않던 실체가 명확히 보이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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