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陰地의 戰士들

엄상익 변호사가 경험한 정보기관 〈8〉 88년 청문회와 나 (2)

수도군단 법무장교가 목격한 12·12사태

글 : 엄상익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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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단장(차규현) 사라져 발동동… 알고 보니 신군부 가담
⊙ 12·12사태 당시 자기 차 뒷좌석에 숨어 있던 육군 법무감
⊙ YWCA 위장 결혼식 사건 연루된 친구 위해 ‘실세’ 합수부 수사국장과 통화

嚴相益
1954년생. 경기고·고려대 법대 졸업 / 사법고시 24회, 사법연수원 15기 수료 / 국가안전기획부 정책연구관, 법무법인 ‘정현’변호사 역임. 現 엄상익법률사무소 변호사
1979년 12월 13일 새벽 중앙청에 진주한 신군부 측 병력. 엄상익 변호사는 수도군단 법무관으로 이 사태를 지켜보았다. 사진=조선DB
  육군본부 법무감실에서 청문회 답변을 위한 관계자 회의를 열었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을 수사한 당시 보안사령부 장교들과 군 법무장교, 안전기획부 수사관이 멤버였다. 12·12사태 당시 합동수사본부 수사국장이었던 이학봉씨도 그 자리에 참석했다. 이학봉씨는 12·12사태 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과 안기부 2차장을 지냈고, 당시는 국회의원이었다.
 
  김대중 재판에 관여했던 장교 중 일부는 장군으로 승진했고, 일부는 전역한 뒤 정부 고위직에 있는 사람도 있었다. 법무장교 중에는 군 복무를 마치고 검사로 근무하던 사람들이 불려와 청문회 답변팀에서 일하게 됐다. 부담스러웠다. 법무장교 시절 내 상관이 대부분이었다.
 

  청문회 답변팀의 형식적 대표는 법무감 출신의 정 모 장군이었다. 그와는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과 12·12사태를 같은 부대에서 상관(上官)과 부하로 있으면서 겪었다. 육군 중령이었던 그는 장교가 된 나의 최초 상관이었다.
 
 
  장군 되고 싶어
  점쟁이에 무속인까지 불러

 
1979년 8월 11일 서울 신민당사에서 철야농성 중인 봉제합섬 제조업체 YH무역 소속 여성 근로자들. 박정희 정권은 이들을 강제 해산시켰고, 그 과정에서 김경숙양이 숨져 정국에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사진=조선DB
  그 시절 그는 유난히 장군이 되고 싶은 야망이 강한 것 같았다. 그는 계룡산의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가기도 하고 무속인을 불러 그가 장군이 될 운명인지를 묻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과 계엄령, 그리고 전두환 정권하의 군법회의는 그의 소망을 이루어준 것 같았다.
 
  그는 육군본부로 옮겨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책임 검찰관으로 공(功)을 세웠다. 그리고 장군이 됐다. 법무감으로 군을 마친 그에게 청문회는 다시 비상할 수 있는 기회였다.
 
  내 기억 저쪽에서 그와 같이했던 1979년의 상황들이 떠올랐다. 그해는 정국이 혼란스러웠다. YH무역의 여성 노동자들이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하고 경찰이 당사(黨舍)에 들어가 의원과 노동자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가했다.
 
  여공(女工)인 김경숙이 4층에서 떨어져서 사망했다. 신문에 얼굴이 뭉개진 신민당 대변인의 얼굴이 나왔다. 법원은 신민당 총재 김영삼에 대해 직무정지 가처분 판결을 내렸다. 출세하고 싶은 판사의 돌출된 판결 같았다. 김영삼 의원이 국회에서 제명됐다.
 
  거기에 자극받은 부산대 학생들이 거리로 뛰어나왔다. 퇴근길의 직장인과 시민들이 대거 합세(合勢)하면서 부산은 거대한 시위장이 되어버렸다. 부산에 계엄이 선포되고 공수특전단 병력이 투입됐다. 시위는 수그러들지 않고 마산으로 불꽃이 튀었다. 창원의 보병 39사단이 투입되고 제5공수여단이 마산에 들어갔다.
 
  같은 해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가 쏜 총에 맞아 서거했다. 내가 근무하던 수도군단 사령부에 비상이 걸렸다.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명령서가 수시로 부대에 떨어졌다. 주한미군과 한국군에 ‘데프콘3’가 발령되었다. 북한의 남침(南侵) 우려가 있을 때 발령되는 군의 방어 준비 태세였다. 미국은 신예(新銳) 공중경보 통제기를 한국에 급파(急派)하고 미(美) 제7함대 항공모함과 순양함 등 전투함들이 부산과 진해에 들어왔다.
 
 
  권력의 말 잘 듣는 개
 
  사회가 꽁꽁 얼어붙었다. 저녁 8시가 되면 통행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경찰과 검찰, 법원이 군의 통제 아래 있게 됐다. 상당수의 재야 인사들이 수도군단 군법회의로 송치되어 오고 있었다. 수사지휘를 받으러 온 한 고참 형사는 자신이 신민당사를 공격한 경찰부대를 지휘했다고 한다. 그는 벽돌로 국회의원의 얼굴을 뭉개놓았다고 자랑한다. 나는 그가 권력의 말을 잘 듣는 개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세상은 나도 그렇게 볼지도 모를 일이었다.
 
  수은주가 영하 10도 아래로 떨어지던 어느 날 밤이었다. 계엄사 법무장교인 나는 안양경찰서 유치장을 감찰하기 위해 갔다. 동물 우리 같은 철창 안에 잡범(雜犯)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그 맨 끝의 감방 철창 안에 혼자 앉아 있는 20대 여성을 보았다. 얇고 닳아빠진 담요로 무릎을 감싸고 희미한 알전구 아래서 책을 읽고 있었다. 철창 앞의 나무 표찰(標札)에는 ‘국가보안법 위반’이라고 적혀 있었다.
 
  영등포의 껌 공장 여공으로 그곳의 노조지부장이라고 했다. 꼿꼿하게 앉아 책을 보는 그녀의 모습은 순교자같이 의연해 보였다. 총명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좋은 환경이었다면 좋은 학교를 나와 엘리트 그룹에 끼었을지도 모른다. 여공인 그녀를 보면서 내가 살아온 시대의 환경이 떠올랐다.
 
  1950~1960년대는 거지가 들끓는 난민촌 같은 사회였다. 그리고 산업화 과정은 거대한 병영사회였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우리는 군인이었다. 군복 같은 교련복을 입고 장교들의 지휘 아래 총검술과 행군(行軍)을 했다. 그런 속에서 우리는 상속(相續)과 교육으로 인해 또다시 사회적인 계급이 나뉘었다. 부잣집 아들이거나 명문대학 합격증이 있으면 양지 쪽에 설 수 있었다. 조직적·기계적으로 독재의 명령에 순종하게 길들어야 편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거기에 끼지 못한 나머지 대부분은 노동자로 가난을 대물림했다. 그와는 달리 독재의 담벼락을 허물려는 소수의 다른 부류가 있었다. 운동권에 들어간 친구들이었다. 그리고 노동자로 있으면서 몸으로 체험하면서 각성한 존재들이었다.
 
  차디찬 마룻바닥에 앉아 책을 읽는 여공을 보면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 하고 살펴보았다. 장교복을 입고 번들거리는 군화(軍靴)를 신고 허리에는 권총을 차고 있었다. 감옥 안 복도를 걷는 나의 군화 소리가 얼룩진 벽에 부딪혀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철창 안의 여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춥지 않아요?”
 
  내가 물었다. 진심이었다.
 
  “견딜 만합니다.”
 
  그녀의 대답이었다. 어떤 호의나 동정도 기대하지 않는 담담한 어조였다.
 
  “책을 보는 데 너무 어둡지 않아요?”
 
  “괜찮습니다.”
 
  그녀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불기소 처분 내리기 위해 독단적인 결정
 
  나는 경찰서 마당에 세워둔 군용(軍用) 지프를 타고 부대 사무실로 돌아왔다. 산업화 시대의 삶이 어떤 것인지 대충은 알고 있었다. 청계천 봉제공장을 가본 적이 있었다. 허공에 가득 찬 뿌연 섬유 먼지와 베니어판 위에서 여공들이 밥을 먹고 잠을 잤다. 가축 사육장 같은 느낌이었다. 삼청각이나 대원각 같은 요정을 만들어 수백 명의 여성을 고용하고 일본의 하류 인생들에게 몸을 팔게 했다. 그렇게 달러를 벌어들였다. 그 여성들은 모두 그 누구의 귀여운 딸이었다.
 
  레마르크가 쓴 〈사랑할 때와 죽을 때〉라는 소설의 한 장면이 뇌리에 떠올랐다. 작품 속 주인공은 독일군이었다. 히틀러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사살(射殺)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주인공의 내면(內面)은 혼란스러웠다. 그는 죽여야 할 포로들을 풀어준다. 그러고 자신이 총에 맞아 죽는다.
 

  나도 그 작품 속의 주인공같이 용기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녀를 살리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중위라는 계급은 가벼웠다. 온정(溫情)을 베풀려면 상관에게 보고하고 당시 권력의 핵심인 보안사령부에 상신(上申)해서 허락을 얻어야 했다. 그들은 노동운동하는 사람을 적으로 보고 있었다. 장군이 되고 싶은 상관도 펄쩍 뛸 게 분명했다.
 
  다시 생각해보았다. 사법적 권한은 법적으로 군 검찰장교에게 있었다. 상부에 보고해야 하는 것은 내부 규정에 불과했다. 나는 그녀에 대해 불기소처분 결정을 하고 바로 경찰서로 석방 지휘서를 내려보냈다. 독단적인 행동이었다. 처벌을 달게 받을 각오였다. 그걸로 운동권의 그늘진 길이 아닌 양지를 걸어온 데 대한 마음의 빚을 어느 정도 갚은 것 같았다.
 
  그 며칠 후 사령부 위병소로 석방된 그녀가 면회 왔다는 연락이 왔다. 만날 수는 없었다. 그녀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작은 선물을 남기고 갔다.
 
 
  고교 선배 수경사 검찰관의 당돌한 전화
 
  그 무렵이었다. 친한 친구의 형이 다급한 얼굴로 나를 찾아왔다.
 
  “동생이 명동의 YWCA에서 열린 결혼식을 위장한 시국집회에 참석했는데 거기서 보안사령부 합동수사부로 끌려갔어. 내 동생 좀 살려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콩나물부터 시작해서 안 해본 장사가 없이 고생하면서 귀하게 키운 동생이야. 우리 형제 중에서도 유난히 머리가 좋아 경기고등학교를 나오고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지. 집을 팔아서라도 돈을 댈 테니 동생을 살려주게. 지금쯤 심하게 고문받고 있을지도 몰라.”
 
  1979년 11월 24일 YWCA 위장 결혼식 사건이 있었다. 토요일인 이날 명동성당 앞 YWCA 1층 강당에서는 학생과 재야(在野) 인사들이 계엄 당국의 눈을 피해 결혼식으로 위장한 집회가 열렸다. 가짜 청첩장을 받고 온 하객은 500명이었다. 그 집회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추진하는 ‘대통령 보궐선거를 저지하기 위한 국민선언문’이 낭독되었다.
 
  유인물이 배포되자 계엄군이 출동해 96명이 연행되어 갔다. 10·26으로 계엄이 선포된 이후 재야의 첫 번째 도전이었다. 보안사령부는 그 집회를 김대중 진영에서 재야와 학생을 동원해 정권타도를 시도한 집회로 보고 있었다. 고교 시절부터 나와 친했던 그 친구는 대학에 입학한 후 운동권 조직의 언더서클에서 간부가 된 것 같았다. 합동수사부의 수사기록이 송치되는 곳은 당시 필동에 있는 수경사 검찰부였다. 나는 고교 선배인 수경사 검찰관을 찾아가 사정을 말했지만, 선배는 회의적이었다.
 
  “지금 국가의 모든 권력은 합동수사본부에서 잡고 있고, 그중 실세가 이학봉 중령이야. 운동권으로 호랑이 아가리인 합동수사부에 잡혀갔으면 살아나오기 힘들걸?”
 
  나는 선배에게 그런 말을 들었음에도, 다시 그에게 집요하게 부탁했다. 그가 마지 못해 책상 위에 있는 군용 비상전화를 통해 합동수사본부를 불렀다. 상대방이 나온 것 같았다.
 
  “수도경비사령부 검찰관입니다. 합동수사본부에서 수사하는 사건들이 송치되는 데 법적 기한을 지키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적법절차를 지켜주시죠.”
 
  그가 당당하게 말을 꺼냈다. 일단 전화한 명분을 잡으려는 모습이었다. 그가 덧붙였다.
 
  “거기 YWCA 위장 결혼식 시국집회로 체포되어 간 경제학과 출신 복학생이 한 사람 있죠?”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합동수사본부에서 연행된 인물들의 명단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
 
  “아, 있다고요? 가급적이면 그 사람은 그대로 내보내주셨으면 합니다.”
 
 
  전화받은 사람은 실세인 ‘합수부 수사국장’
 
1979년 10월 28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수사결과에 관해 중간발표를 하는 전두환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10·26사태 이후 전두환이 이끄는 합수부는 권력의 核으로 부상했다. 사진=조선DB
  저쪽에서 뭐라고 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순간 검찰장교인 선배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면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아닙니다. 저는 국장님인지 몰랐습니다. 담당 준위 정도로 알고 쉽게 말한 겁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선배는 당황해서 허공을 향해 허리를 연방 굽혔다. 그가 당황한 채로 말을 계속했다.
 
  “이건 제가 부탁하는 게 아닙니다. 후배인 수도군단 법무장교가 찾아와 하도 조르는 바람에 전화를 올리게 된 겁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손바닥으로 송수화기를 막고 나에게 말했다.
 
  “전화받은 사람이 합수부 수사국장이야. 지금 이 사람이 권력의 실세로 모든 걸 잡고 있어. 우리, 잘못했다고 빌고 전화를 끊자. 이걸 어떻게 하면 좋냐?”
 
  그는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얼마 안 남은 군 복무 기간을 마치면 검사로 임관해서 승승장구할 사람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친구의 절규를 외면할 수 없었다. 내가 송수화기를 들고 있는 선배에게 말했다.
 
  “제 어린 시절부터 친구라고 해주세요. 그래서 다시 한 번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분명히 전해주세요.”
 
  내 말을 듣고 그가 다시 전화기에 대고 중계했다.
 
  “꼭 부탁을 드리고 싶다는데요.”
 
  전화 저쪽에서 다시 희미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선배가 다시 내게 그쪽의 말을 중계했다.
 
  “저쪽에서는 그 친구의 뒤를 봐주면 앞으로 신상에 지장이 많을 거라고 하는데? 우리, 중단하고 여기서 전화를 끊는 게 어떨까?”
 
  수경사 검찰관인 선배는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내 어깨에 달린 현실의 중위 계급장을 보았다. 바른 일을 하다가 고난을 당하면 달게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장군이 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앞날에 지장이 있어도 각오한다고 전해주세요. 그리고 지금은 내가 힘이 없지만 이번에 봐주시면 언젠가 신세를 갚겠다고 전해주세요.”
 
  그날 오후 친구는 바로 석방됐다. 나는 석방된 친구를 우리 집에 숨겨주었다. 한 달가량 내 방에서 그와 함께 지냈다. 그는 당시 운동권 내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대학에 들어와 처음에는 순수한 마음으로 운동권에 들어갔어. 시위에 가담하고 페인트 통을 들고 교내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자유’나 ‘투쟁’이라는 글씨를 쓰고 다녔지. 그런데 이 운동권 내부에 들어와 보니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앞서나가는 거야. 아예 마르크스·레닌주의 공산혁명으로 가자는 거지. 나는 아직까지 공산주의자는 아니야. 그런데 이미 운동권 내부의 많은 사람이 직업 혁명가 대열에 섰어.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야.”
 
  그는 내 방에서 얼마간 묵다가 지리산 쪽으로 들어간다고 하고 나갔다.
 
 
  “어느 틈에 도망갔는지 법무감이 보이지 않더라고”
 
  그해 12월 12일 저녁이었다. 군단사령부의 작전장교가 비상대기 중인 장교들을 모아놓고 얼굴이 하얗게 되어 이렇게 상황을 알렸다.
 
  “야단났어요. 지금 무장한 공수부대가 우리 경비 지역인 경부고속도로 톨게이트를 통과하려고 합니다. 그 부대를 통과시키면 우리는 반란군이 될 수 있고, 우리 헌병이 저지하면 공수부대와 교전을 벌여야 하는 상황입니다. 지금 현장의 헌병들이 어쩔 줄 모르고 군단장님의 명령을 요청하는데 군단장님이 증발해서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어요.”
 
  모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군부대 지휘관의 소재를 모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군단사령부 장교들 사이에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한강대교가 군인들한테 통제되어 건널 수 없는데 무슨 일이냐고 묻는 전화가 사무실로 오고 있었다. 서울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 쪽에서 교전(交戰)이 벌어졌다는 보고 또한 올라오고 있었다. 사령부 장교들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군단사령부 예하 33사단의 연대 병력이 여의도에 있는 방송국을 목표로 출동한다는 보고가 올라오고 있었다. 부대가 반란군 쪽에 선 것 같았다. 노태우 사단장의 9사단 병력과 박희도·최세창이 지휘하는 공수부대가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점령하고, 총격전 끝에 참모총장을 체포했다고 했다. 다음 날 육군본부 법무감실에서 근무하는 장교 동기생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다.
 
  “어제 육군본부 상황이 어땠어?”
 
  “나도 뭐가 뭔지 모르지. 공수부대 하사관 몇 명이 법무감실 문으로 들어오더니 당직 장교인 나를 보고 총을 들이대면서 ‘손 드세요’ 하는 거야. 그래서 손을 들었지. 아무래도 궁금하더라고. 그래서 공수부대 하사관들한테 ‘무슨 일인가’ 하고 물었더니 ‘우리도 몰라요. 하여튼 이렇게 하래요’ 하면서 ‘법무감님 어디 있어요? 잡아오래요’ 하더라고. 어느 틈에 도망갔는지 법무감 신 장군이 보이지 않더라고. 한참 찾았지. 그랬더니 자기 차 뒷좌석 틈에 머리를 박고 숨어 있더라고.”
 
 
  “장군들의 목소리 들어보니 공포 그 자체”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연행 사실을 알린 《조선일보》 1979년 12월14일자 1면. 당시 계엄 당국이 언론을 검열하고 있어 이 사실은 이틀 뒤에야 보도될 수 있었다.
  그게 내가 군 내부에서 본 신군부의 군사반란 상황이었다. 2~3일이 지나자 사령부는 승전(勝戰) 분위기였다. 그날 차규헌 군단장이 경복궁 옆에 있는 30경비단에 모여 거사를 주도한 주체세력에 속한다는 것이었다. 군단장이 권력의 실세가 된 것이다. 상관인 정 중령이 참모회의에 갔다 오더니 감탄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 군단장님은 정말 훌륭한 분이야. 위에서 중앙정보부장을 하라고 하는데 그걸 사양하셨다는 거야. 그러면서 하는 말씀이 권력에 너무 가까이하면 화상을 입을 우려가 있고 또 너무 멀면 추우니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거지. 그 말을 들으면서 참 지혜가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어.”
 
  신군부가 권력을 잡고 이희성 장군이 계엄사령관이 됐다. 나는 수도 군단사령부의 법무장교로 계엄 업무를 보고 있었다. 왜 12·12사태가 벌어졌는지 궁금했다. 그날 밤 전군(全軍)의 부대가 전두환 보안사령관 편이냐 아니면 장태완 수경사령관 편이냐로 나뉘었다고 한다. 전두환 보안사령관 측근에 장교로 있는 친구가 있었다. 그를 만나 그날 밤 그곳에서 벌어진 상황을 들어보았다.
 
  “한밤중에 전국의 장군 명단을 가져다 놓고 한 명 한 명 전화를 걸었지. ‘이쪽이냐 저쪽이냐 중간은 없어’라고 하면서 선택하라고 한 거야. 거기서 전두환 사령관이 이긴 거야. 선택을 강요받은 장군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니 공포 그 자체더라고.”
 
  “왜 그런 일이 벌어진 것 같아?”
 
  내가 물었다.
 
  “그거야 나 같은 하급 장교는 알 수가 없지. 그렇지만 정승화 참모총장이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옷을 벗기거나 아니면 강원도의 부대로 좌천시킨다는 소리가 있었어. 전두환 사령관의 군대생활이 막다른 골목에 몰린 면도 있는 것 같아. 쥐도 몰리면 나중에 물잖아?”
 
  내가 아는 전방지역의 보안부대장은 이런 말을 했다.
 
  “사령부에서 우리 지역의 부대 지휘관이 병력을 이끌고 출동하지 못하게 막으라고 하더라고. 앞이 깜깜했지. 사실 지역보안부대가 병력이 있나, 무기가 제대로 있나? 전투부대와 부닥치면 바로 전멸이지. 나는 권총을 들고 사단장실을 지키면서 여차하면 같이 죽으려고 했어.”
 
 
  육본 작전참모부장은 신군부 측이 쏜 총에 맞고…
 
12·12사태 당시 신군부 측의 흉탄에 맞았던 고(故) 하소곤 전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12월 12일 밤 11시30분경 수도경비사령부와 경복궁 내의 30경비단에 모여 있는 합동수사부 측 군인들은 첨예한 대립을 하고 있었다.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서울 퇴계로의 아스토리아 호텔 부근에 전차 중대를 배치해놓고 30경비단을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그때 신 중령의 직속 상관인 헌병단의 조홍 대령에게서 연락이 왔다. 조홍 대령은 합수부 측 군인들이 모여 있는 30경비단에 있다고 하면서 신 중령에게 수경사령관을 체포하고 다른 장군들을 무장 해제하라고 명령했다. 새벽 2시경이었다. 신 중령은 헌병대 60명가량을 동원해 수도경비사령부 본청(本廳)으로 향했다. 수경사령관이 있는 본청 건물은 본부대 병력 수십 명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이제부터 본청 경계근무를 헌병단에서 맡기로 했다.”
 
  본청을 지키던 장교가 그의 말을 믿고 물러섰다. 천만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거기서부터 총격전이 벌어질 뻔했다. 신 중령은 병력을 20명씩 나누어 사령관이 있는 본청 건물의 출입문 복도와 계단을 장악했다. 수경사령관의 방에는 육군본부에서 온 여러 명의 장군이 긴장한 상태로 경복궁 쪽의 30경비단에 모여 있는 장군들과 대립하고 있었다. 사령관실 문 앞에는 장군들을 수행하고 온 부관과 보좌관들이 권총을 찬 채 서성이고 있었다. 그들을 따돌릴 필요가 있었다. 신 중령은 부하장교 세 명과 하사관 다섯 명을 데리고 그들 앞으로 가서 말했다.
 
  “여러분 내 지시를 따라주십시오. 부관과 보좌관들은 전부 사령관실 옆의 방에 집결해주십시오.”
 
  신 중령이 데리고 간 헌병 하사관 5명이 그들을 방으로 몰아넣고 그들을 감시했다. 사령관실에 모인 장군들은 모두 리볼버 권총과 실탄을 휴대하고 있었다. 총격전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2명의 대위가 실탄을 장전한 권총을 들고 먼저 사령관실의 문을 박차고 들어가면서 소리쳤다.
 
  “전부 손 들어”
 
  그 방에는 수경사령관, 육군참모차장,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수경사 참모장 등이 있었다. 작전참모부장인 하소곤 소장이 2명의 대위를 보고선 “이놈들 봐라?” 하며 옆구리의 권총 쪽으로 손이 갔다. 그 순간 다른 장군들도 권총 쪽으로 손이 갔다. 그 순간 총성이 울려 퍼졌다.
 
  “신 중령, 총 쏘지 마라.”
 
  수경사 참모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항복 선언이었다. 그곳에 있던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하소곤 소장이 대위들이 쏜 총에 맞고 허리를 구부리고 있었다. 신 중령은 장군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수경사령관을 체포했다. 그리고 그들을 바로 전두환 합수부의 이학봉 수사국장에게 인계했다. 세상이 바뀌었다.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이 군권(軍權)과 정권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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