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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사상 크로스 〈14〉

상앙과 애덤 스미스 1

‘경박한 사람’과 小人이 발전의 원동력

글 : 임건순  동양철학자·《조선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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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덤 스미스에 의하면 인간은 타인의 同感을 구하는 존재… 판단 기준은 ‘內面의 공정한 관찰자’
⊙ ‘내면의 판관’에 따라 행동하는 ‘현명한 사람’, 타인의 평가에 따라 움직이는 ‘경박한 사람’
⊙ 상앙, 好利之性 강조… 인간은 모두 小人
⊙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 본성 부정하는 데서부터 僞善 싹터

임건순
1981년생. 서울시립대 행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수료. 《조선일보》 ‘밀레니얼 톡’ 칼럼니스트 / 저서 《한비자, 법과 정치의 필연성에 대해서》 《제자백가 인간을 말하다》 《묵자: 공자를 딛고 일어선 천민 사상가》 《손자병법: 동양의 첫 번째 철학》 《생존과 승리의 제왕학 병법노자》 《제자백가 공동체를 말하다》 《순자: 절름발이 자라가 천 리를 간다》 등
19세기 영국 사회를 벌집에 비유해 그린 그림. 맨 밑바닥에서부터 최고위층에 이르기까지 각자가 자신의 역할을 다함으로써 사회가 유지된다는 것을 은유했다.
  애덤 스미스는 자유방임(自由放任)을 주장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애덤 스미스 하면 떠오르는 말이 ‘이기주의(利己主義)’ ‘보이지 않는 손’일 것이다.
 
  ‘정부가 규제로 개입하지 마라. 국가가 이런저런 간섭을 하지 말 것이며 각자가 알아서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행동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고 나라가 부유해진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손이 있기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에 대해 대략 이렇게 아는 사람이 많다. 타인(他人)과 다른 경제주체들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각자 자신만을 생각해 일을 하고 이익을 추구하면 사회 전체 부(富)의 총량이 늘어날 것이다. 그러니 개인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행동하는 것이 최선이고 다른 사람의 사정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무엇보다 개인의 자유로운 행동을 제한하는 규제나 정부 활동은 경제의 장애물이자 폐해일 뿐이다. 애덤 스미스 경제학에 대한 상식적 혹은 통설적인 생각이 이러하다.
 
 
  自愛心과 윤리
 
  정말 애덤 스미스가 시장만능주의자이고 이기주의를 옹호한 사람일까? 개인들이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면 절로 세상이 좋아진다고 한 사람이고? 이렇게 그가 윤리가 결여된 경제사상, 경쟁과 이기주의 만능론을 주장한 사람이라는 오해가 있기도 하다. 스미스가 ‘각자 자신의 이익을 탐하는 마음과 행동이 사회 전체의 이익으로 이어진다’라든지, ‘자유로운 시장 거래가 최선이다’라고 주장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전제조건이 있다. 우리는 그 전제조건에 주목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국부론(國富論)》을 읽기 전에 먼저 읽어야 할 책이 있다. 바로 《도덕감정론(道德感情論)》이다. 《도덕감정론》을 읽으면 그의 경제사상이 전제하는 바를 알 수 있다. 애덤 스미스가 말한 경제사상에 이 전제를 더하면 전혀 다른 그의 모습이 보일 것이다. 《도덕감정론》을 읽어야만 왜 스미스가 ‘자유로운 경제활동’과 ‘보이지 않는 손’의 조정·조율 작용에 믿음을 두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애덤 스미스가 절대 ‘윤리가 결여된 시장원리주의자’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주지(周知)하는 바와 같이 애덤 스미스는 이기심을 부정하지 않았다. 사회가 발전하고 공동체가 더욱 잘살기 위해서는 이기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인 자애심(自愛心), 자신의 생활을 개선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부정하지 않고 긍정한 것이다. 하지만 애덤 스미스는 이기심과 자애심은 정의와 윤리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디까지나 기본적 도덕과 규범을 지킨다는 것을 전제로 자유경쟁을 주장한 것이다. 그렇기에 지난 호에서 애덤 스미스의 자유주의를 질서자유주의(秩序自由主義)라고 한 것이다. 질서와 규범에 대한 존중, 그것을 전제한 상태에서 하는 자유경쟁이 애덤 스미스의 경제 이론 근저에 있는 사상이다. 《도덕감정론》에 그런 스미스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는데, 이 책을 보면 그가 말하는 질서와 도덕적 규준(規準)에 대해 알 수 있다.
 
 
  인간, 동감을 얻기 위해 행동하는 생물
 
애덤 스미스를 알려면 《도덕감정론》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
  《국부론》보다 무려 17년이나 일찍 세상에 나온 《도덕감정론》은 ‘어떤 인간 본성(本性)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게 하고 인간의 질서를 지키게 하는가?’를 집중적으로 해명하는 책이다. 《국부론》보다 《도덕감정론》이 훨씬 먼저 세상에 나온 것만 봐도 애덤 스미스가 경제보다 사회질서를, 사회질서의 핵심이 되는 도덕과 규준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애덤 스미스가 경제 발전에 앞서 ‘사회를 유지하는 요소와 인간이 지녀야 할 도덕관에 대해 생각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스미스는 우선 인간 내면을 보려고 했다. 그러고 나서 그 안에서 동감(同感)을 원하는 인간의 본성을 발견해냈다. 그 본성이 있기에 인간이 질서를 수용하고 규범을 지킨다고 했다. 즉 사회의 질서가 유지되는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인 존재라 하더라도 그 천성에는 분명히 이와 상반되는 몇 가지가 존재한다. 이 천성으로 인해 인간은 다른 사람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단지 그것을 바라보는 즐거움밖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행복을 필요로 한다.” -《도덕감정론》
 
  인간은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고 항상 무덤덤하게 지나치지 않는다.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고 그 사람이 느낄 감정에 스스로를 이입(移入)시켜 본다. 그렇게 다른 사람이 한 행동, 겪은 일과 품고 있는 감정을 마치 자신이 직접 겪은 일처럼 생각한다. 그런 다음 그 사람의 행동이나 감정의 ‘정당성’을 평가해본다. 그러고 나서 옳고 그름을 생각해보고 동감할지 동감하지 않을지 따져본다. 나 아닌 타인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역시 내 행동을 보고 판단한다. 애덤 스미스는 “인간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고 자신도 똑같은 행동을 할지 혹은 똑같은 것을 느낄지에 대해 생각해본다”고 말했다. 내가 다른 사람의 행동을 평가하고 있다는 것은 타인 역시 내 행동을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밖으로 드러나는 내 행동은 언제나 사회 전체로부터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인간은 본능적으로 타인에게 나쁜 평가를 받고 싶어하지 않고, 좋은 평가를 받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이게 인간 본성이다. 인간은 항상 동감을 얻기 위해 행동하는 생물이다. 이게 바로 애덤 스미스가 보는 인간이다.
 
  “동감의 원인이 무엇이건 간에 또는 그것이 어떻게 생겨나건 간에 다른 사람도 마음속으로 우리 마음속의 감정에 동류의식을 느끼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 이상으로 즐거운 것은 없다. 또한 다른 사람이 마음속으로 우리와는 반대로 느끼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만큼 충격적인 일도 없다.” -《도덕감정론》
 
  우리는 동감받고, 동조받을 수 있는 행위를 하려고 한다. 칭찬받거나 인정받을 수 있는 행동을 하려고 한다. 최소한 손가락질받을 행위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늘 그렇게 타인을 의식한 채 동감을 생각하며 행동하려고 애쓰는 존재다. 스미스의 인간관이 이러한데, 이것이 그의 도덕관, 더 나아가 경제사상을 이해하는 데 기본적으로 생각해야 할 전제이며 원칙이다.
 
 
  ‘공정한 관찰자’라는 判官
 
  우리는 늘 타인에게 동감받고 싶어 하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인간의 마음에 드는 행위를 할 수 없다. 100명이 있다면 100명 모두에게 지지를 받는 행동을 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누군가에게 칭찬받는 행위가 누군가에게는 동감받기는커녕 미움을 사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인간은 행위할 때 대체 누구를 준거(準據)로 삼아야 하는가? 어떤 특정인의 기준에 맞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애덤 스미스의 도덕관, 사회철학에서 아주 중요한 지점이다.
 
  이에 대해 애덤 스미스는 말했다.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내면에 기준을 만들라”고. 내면에 재판관을 만들고 그 재판관을 의식한 채 행동하라고 한다. 변덕스러운 존재에게, 편파적인 존재에게 동감을 구할 수는 없다. 치우치지 않고 늘 공평무사(公平無私)한 존재에게 판정을 받는 것이 좋다. ‘절대 흔들리지 않는 평가자’가 필요한데, 그 선악(善惡)의 판관(判官)을 내면에 만들고 우리는 그 판관을 의식하며 살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공감받을 수 있고, 공감받으려 하는 본능적인 감정과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다. 자신의 내면에 판관을 두고 그 판관의 눈치를 보자. 그러면서 따져본다. 자신의 행동이나 언사(言辭)가 옳은지, 그른지를…. 애덤 스미스는 이 판관을 ‘공정(公正)한 관찰자’라고 불렀다. 이 ‘공정한 관찰자’의 눈으로 내 행동을 살펴서 하고 따지는 것이다.
 
  우리는 내면의 ‘공정한 관찰자’의 판단을 따른다. ‘내면의 판관’이 허여(許與)한 행동을 하려고 하고, 그가 그르다고 여기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기에 인간은 규범을 지킬 수 있고 사회는 유지된다. 더 나아가 각자가 자신의 이익을 자유롭게 추구해도 사회는 발전하고 번영할 수 있는 것이다. 국가의 개입과 간섭 없는 자유시장, 그 안에서 각자가 알아서 자신의 이익을 적극 추구하고 그러면서 사회의 번영이 시작된다는 《국부론》의 경제사상은 《도덕감정론》이 강조하는 규범을 지키는 인간을 전제로 한 것이다.
 
  ‘공정한 관찰자’를 내면에 두지 않은 채 질서를 무시하고, 타인의 영역을 함부로 침해하고, 그런 상황에서 자유로운 경제활동과 이익추구가 번영을 가져다 주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규칙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에서 각자의 이익추구는 사회 붕괴만 초래할 뿐이다. 어디까지나 동감을 본능적으로 구하는 인간이 규범을 존중한 채 경제활동을 영위하기에 부와 번영이 시작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만 세상이 조화를 이룬 채 저절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동감을 받으려 하는 인간이란 존재는 ‘공정한 관찰자’의 말을 들으려 하고 규범을 존중한다. 그 결과 각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해도 사회가 붕괴되기는커녕 발전한다는 것이다.
 
 
  현명한 사람, 경박한 사람
 
  하지만 ‘공정한 관찰’의 판단을 따라도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다. 애덤 스미스도 이런 모순(矛盾)과 불일치(不一致)의 문제를 말했다. ‘내면의 재판관’이 늘 본질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만 세상으로부터는 표면적인 평가나 잘못된 평가를 받을 때도 있다는 것이다. ‘내면의 판관’에 따라 옳은 행동을 했지만 당혹스럽게도 세상은 지지를 보내지 않는 경우도 있고, 역(逆)으로 내면의 판관에 따르지 않았지만 세상으로부터는 당장 칭찬을 받을 수도 있다.
 
  우리는 이때 누구의 판단을 따라야 하는가? 양쪽에서 다른 판단을 내리는데 ‘내면의 판관’을 말을 들어야 하는가, 아니면 세상의 평가에 따라야 하는가? 애덤 스미스는 말했다. 어느 쪽의 평가를 중시할지에 따라서 ‘올바른 사람’과 ‘그릇된 사람’이 결정된다고….
 
  세상의 평가가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내면의 공정한 관찰자’의 판단과 어긋날 때도 있다. 세상은 때로는 변덕스럽고 본질적이지 않은 평가를 하기에 그러하다. 인간이 아무리 공감, 동감을 원한다고 해도 그런 세상의 변덕에 끌려가선 안 된다. ‘내면의 공정한 관찰자’의 말을 들어야 한다.
 
  애덤 스미스는 모든 인간이 그런 존재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올바른 사람만이 항상 내면의 판관 말을 듣는다고 했다. 그런 사람을 애덤 스미스는 ‘현명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반면 ‘경박한 사람’도 있다. 그는 당장의 외부 평가에 끌려가는 존재다. ‘내면의 판관’은 불가(不可)하다고 말했지만 당장 주변에서 가(可)하다고 하면 추구한다는 것이다. ‘경박한 인간’이 그러하다.
 
  당장 세상은 아니라고 하지만 ‘내면의 판관’에게는 인정을 받았다. 그럴 때 만족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현명한 사람’이다. 애덤 스미스는 세상의 표면적인 평가를 중시하는 사람을 ‘경박한 사람’이라며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근거 없는 칭찬에 기뻐하는 것은 가장 천박한 경솔함과 나약함의 증거이다. 그것은 허영이라고 불리기에 적절한 것이며 가장 어리석고 경멸한 만한 여러 악덕, 즉 허식과 일상적인 위선의 기초가 된다.” -《도덕감정론》
 
 
  ‘경박한 사람’이 있기에 경제가 발전
 
애덤 스미스
  애덤 스미스는 ‘내면의 판관’이 아니라 당장 주변의 평가에 휩쓸리는 사람이 가진 나약함과 경박함을 악덕(惡德)의 근원이라고까지 표현했다. 이것은 처벌해야 마땅한 악행(惡行)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법적 처벌의 대상이 아니라 도덕적 인간이 가져야 할 자세와 모순, 상반되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래서 악덕의 근원이라고까지 표현하며 비판한 것이다.
 
  ‘경박한 사람’은 올바른 도덕관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다. ‘공정한 관찰자’가 내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판관의 말을 듣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의 평가를 중시하는 사람은 ‘내면의 재판관’이 틀렸다고 판단해도 ‘남들이 괜찮다’고 하니, 혹은 ‘들키지 않았으니 괜찮다’고 넘긴다. 표면적인 칭찬에 좋아할 뿐이고 본인이 나쁜 일을 범해도 남의 이목에 포착되지 않으면 문제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살면 바람직한 윤리관과 도덕관을 형성할 수 없다. 애덤 스미스가 ‘경박한 사람’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다.
 
  ‘내면의 판관’을 따르지 않는 ‘경박한 사람’을 한사코 애덤 스미스가 비판하거나 미워한 것은 아니다. 외려 그들의 필요성과 긍정적인 순기능(順機能)에 대해서 인정하기도 했다. 애덤 스미스는 그들이 있기에 경제가 발전한다고 말했다.
 
  《국부론》에서 애덤 스미스는 국가의 부(富)를 재정의(再定義)했다. 그리고 국가의 부를 늘리는 방법 역시 기존 통념(通念)과 다르게 말했다. 금과 은, 화폐의 총량이 국부(國富)가 아니라 생산력과 생산량을 국부라고 정의했다. 얼마나 필수품과 편익품을 생산하는지가 국가의 부를 결정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생산량과 생산력을 늘리기 위해서 애덤 스미스는 분업(分業)과 자본축적(資本蓄積)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분업과 자본축적이 더욱 원활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선 자유를 주어야 한다고 했다. 각자가 자유롭게 이익을 추구하고 경제활동을 할 수 있도록 간섭과 유착, 규제를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애덤 스미스 경제학의 큰 틀이 이러하다.
 
 
  ‘경박한 사람’과 평판
 
  이것이 끝이 아니다. 경제를 말하면서 스미스는 분업과 자본축적의 중요성만 말하거나 자유만 말하지 않았다. 생산력의 발전을 이끌어가는 힘, 원동력(原動力)에 대해서도 말했다. 경제발전과 부의 신장을 어떤 사람들이 견인해가고 이끌어가는지에 대해 말했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경박한 사람’이다. ‘내면의 판관’보다 당장의 세상 평가에 집착하는 이가 생산력 신장의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경박한 사람’은 ‘내면의 공정한 관찰자’의 판단에 따르고 본질적 정의를 추구하지 않는다. 당장 타인의 이목(耳目)을 의식한다. 그래서 그릇된 판단을 할 수도 있고 더 나아가 도덕과 거리를 둘 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를 마냥 나무랄 수 없다. 지나치게 타인의 눈을 의식하다 보니 필사적으로 부를 가지려고 하기에 경제 전체를 발전시키는 데 큰 동력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동감을 원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인간은 타인의 인정을 욕망하는 존재이다. 늘 인간은 타인을 평가하고, 타인 역시 나를 평가한다. 그런데 인간은 경제적 상황과 조건도 평가한다. 얼마나 부유한지 관심을 가지고 그걸 통해 평판(評判)을 만든다. 그런 경제적 조건이 만든 타인의 평판과 인정에 특히나 ‘경박한 사람’은 민감하다.
 
  “공로가 같은 경우, 부자와 권세를 가진 사람을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보다 더 존경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후자(後者)의 진실하고 확실한 공로보다도 전자(前者)의 오만과 허영에 훨씬 더 감탄한다. …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이 거의 언제나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왔다는 사실을, 따라서 그것들은 어떤 점에서는 존경과 자연적 대상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도덕감정론》
 
  세인(世人)들은 ‘부’와 ‘풍요로운 사람’을 높게 평가하고 인정한다. 때론 존경한다. ‘빈곤’과 ‘가난한 사람’을 인정하지 않고 때론 무시하기까지도 한다. 그렇기에 타인의 동감, 인정을 욕망하는 인간은 부유함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경박한 사람’이 부를 기준으로 한 타인의 평가를 중시하고, 부유함을 통해 타인의 존경을 추구한다.
 
 
  ‘현명한 사람’은 한계를 안다
 
  ‘현명한 사람’은 ‘경박한 사람’과 다르다. 부유함을 보는 인식이 다르다. 그는 부의 본질을 본다. 아주 냉정하게 꿰뚫어보는데 경제적 조건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 조건이 열악(劣惡)하면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부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행복하려면 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명한 사람’에게는 그 상한선에 대한 감각이 있다. 필요 이상의 부가 있다고 해서 더 행복해지고 삶이 더욱 존엄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경박한 사람’은 필요 이상의 부를 추구하고 부를 계속 축적해야 더욱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현명한 사람’은 다르다. ‘현명한 사람’은 필요 이상으로 부를 축적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렇게 ‘현명한 사람’과 ‘경박한 사람’은 부를 보는 관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중요한 건 ‘현명한 사람’은 경제발전의 원동력으로 기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끝없이 부를 탐하고, 부를 통한 타인의 인정과 존경을 평생 추구하는 ‘경박한 사람’들이 경제발전의 큰 힘이 된다고 애덤 스미스는 생각했다. 《국부론》이 아니라 《도덕감정론》에서도 애덤 스미스는 인간의 욕망과 이익을 탐하는 마음을 긍정한 셈인데 역시나 그다운 일이다.
 
 
  好利之性
 
상앙
  “백성의 본성이란 굶주리면 먹을 것을 구하고, 수고로우면 편안함을 구하며, 괴로우면 쾌락을 찾고, 욕을 당하면 영예를 추구하니, 이것이 백성들의 심정이다.” -《상군서(商君書)》 산지(算地)편
 
  “명예와 이익이 모이는 곳이면 백성들은 그곳으로 절로 모인다.” -《상군서》 산지편
 
  “백성들의 성향이란 길이를 재 보아 긴 것을 취하고 무게를 달아 보아 무거운 것을 가지려 하며 저울로 달아 보아 이익이 되는 것을 찾는다.” -《상군서》 산지편
 
  한비자(韓非子)만이 아니라 같은 법가(法家) 사상가인 상앙(商鞅) 역시 인간을 이익이라는 관점으로 보았다. 이익을 저울질하여 이익이 큰 것을 선택하는 것을 사람의 본성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이익을 좋아하는 본성’을 가리켜 ‘호리지성(好利之性)’이라고 한다. 호리지성은 절대 없애거나 바꿀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다. 상앙은 인간에게 이런 본성이 있기에 상벌(賞罰)을 바탕으로 한 법과 제도를 통해 국력(國力)을 신장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상앙과 한비자가 보기에 백성만이 호리지성을 가진 게 아니다. 군주 역시 마찬가지다. 임금도 역시 이익을 좋아하고 손해를 싫어하는 존재일 뿐이다.
 
  임금은 천명(天命)을 받은 존재로서 왕도정치(王道政治)라는 의무를 가진 존재일까? 선왕(先王)들의 전적(前績)을 늘 모범으로 삼아 도덕정치를 행해야 하고, 그런 당위(當爲)에 구속되는 존재일까? 그리고 도덕정치라는 당위의 추구에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가지는 게 임금의 삶일까?
 
  이런 생각들은 어디까지나 유가(儒家)의 주장일 뿐이다. 법가가 보기에 군주는 백성과 똑같은 인간일 뿐이다. 그도 자신의 이익을 찾아가는 존재일 뿐이다. 그 점에서는 보통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그도 역시 장삼이사(張三李四)처럼 이익을 추구하고 손해를 피하려고 한다. 다만, 군주에게 이익은 강한 국력과 국가 위상의 제고(提高)이고, 손해는 나라의 패망(敗亡)과 권력의 상실이라는 점에서 백성들과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인간은 모두 小人이다
 
  상앙과 한비자는 백성들이 이익을 추구하기에 상과 벌로 통제와 통솔이 가능하고 국력의 신장을 낙관할 수 있다고 보았는데, 임금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임금에게 계속 이야기했다.
 
  “당신이 국력의 신장, 천하를 호령하는 것을 상으로 받고 싶으면 법을 따르라. 법치를 행하라. 법을 따르지 않고 법치를 행하지 않으면 당신에게 벌이 주어진다. 패망과 군주 권력의 상실이라는 벌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일반인에게만 상과 벌을 운운하며 법과 법치를 따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해서 군주에게도 상과 벌을 논한다. 쉽게 말해 “군주도 법을 따르라. 그럼 네가 좋아하는 이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공자(孔子)는 말했다. “의(義)에 밝은 이가 군자(君子)요, 이(利)에 밝은 이가 소인(小人)”이라고. 군자와 소인의 이분법 혹은 군자와 소인 프레임, 의(義)와 이(利)의 이분법과 프레임은 유가들의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인데 법가는 그런 이분법의 틀을 부셔버렸다.
 
  그저 인간 모두를 소인으로 보았다. 모두가 이익을 탐하는 존재라고 보았다. 그런 인간 본성이 나쁠 것이 없다고 보았다. 부국강병(富國强兵)과 법치를 가능하게 하는 것인데 무엇이 나쁘다는 말인가?
 
  한비자와 상앙은 만인소인설(萬人小人說)을 말한 사람, ‘소인의 사상’을 편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백성에게 군자가 되라고 강권하고, 임금에게 성군이 되라고 강요할 필요가 없다고 본 사람들이다. 군자가 되라고 강요하는 것이 비현실적이기도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질서가 잡히고 생산력이 신장되고 전쟁에서 용감하게 싸우는 일이 벌어지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외려 힘써 일하지 않고 목숨 걸고 싸우지 않게 된다고 했다. 그들은 이익을 탐하는 소인의 마음을 인정하다 못해 적극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진정으로 건강한 정신과 사회
 
버나드 맨더빌
  ‘경박한 사람’이 경제발전을 이끈다는 애덤 스미스나, 임금이나 백성이나 모두 호리지성의 존재이고 호리지성 때문에 부국강병을 일굴 수 있다는 상앙과 한비자나 사실 똑같은 주장을 한 것이 아닌가 싶다. ‘경박한 사람’과 소인은 거의 같은 존재 아닐까. 그리고 소인 덕분에 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고 긍정했다는 점에서 법가와 애덤 스미스는 일치하지 않나 싶다.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해보고 싶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다. 자신의 이익을 찾아가고 추구하는 존재일 뿐이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드러내놓고 말할 수 있어야 하며 거기에 기반해서 규범과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그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느니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느니, ‘사람 사는 세상’이라느니 하는 얘기들은 모두 유가적 성선설(性善說)에 바탕을 둔 쉰 소리, 헛소리에 불과할 뿐이다.
 
  인간의 이기심과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을 부정하고, 고상한 윤리·이상·가치로써 인간을 포장하거나 윤색하려고 하면 현실적으로 부국강병에도 문제가 생기고 사회 전체의 생산성에도 큰 문제가 생긴다.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이익을 추구하고 욕망을 탐하는 본성을 숨기고 그 위에 회칠을 해대면 거대한 악과 위선(僞善)이 싹튼다. 결과적으로 인간의 심성 자체가 왜곡되고 비틀어진다. 그게 가장 큰 문제이다. 그리고 그 문제에 서 우리는 여전히 자유롭지 않은 듯싶다. 아직도 유교의 찌든 때가 우리를 적잖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 정부와 여당을 보면 도덕과 정의를 파는 이들이 권력을 장악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위선과 인간성의 왜곡이라는 문제는 심해지는 게 아닌가 싶다.
 
  솔직하게 인간의 이기심을 인정하고, 일정한 선 안에서 추구하는 것이라면 적극적으로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 “너의 사익(私益) 추구가 공공선(公共善)과 국력 신장과 직결될 수 있다”면서 격려도 해야 한다. 그래야 현실적으로 사회가 발전한다,
 
  눈에 보이는 발전과 번영 이전에 보이지 않는 인간 정신을 위해서라도 이기심과 욕망의 긍정이 필요하다. 인간 이기심, 인간이 부를 추구하는 마음을 인정하는 것만큼 인간 정신을 해방시키고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것이 있을까?
 
  “내가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누군가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이기심 때문”이라는 애덤 스미스, “사치가 100만 개의 일자리를 주고 누군가의 허영심이 재화의 생산과 회전을 빠르게 한다”는 버나드 맨더빌(Bernard Mandeville), 그리고 호리지성을 역설한 상앙과 한비자. 그런 생각과 사상이 사회의 주류가 되어야 부강함을 일굴 수 있고, 무엇보다 건강한 정신을 가진 인간과 사회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소인으로 살면 어때?”
 
  가끔 부처·예수·공자·소크라테스, ‘인류 4대 성인(聖人)’이라는 이들보다 맨더빌과 애덤 스미스, 상앙과 한비자가 훨씬 인간 영성(靈性)과 인간성에 이롭고 은혜로운 존재가 아닌가 생각을 한다. ‘교회와 절, 사원에 예수와 부처의 형상을 치우고 애덤 스미스와 맨더빌, 그리고 한비자와 상앙을 모시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상상도 해본다.
 
  우리, 더 건강한 사회에서 더 건강한 정신으로 살아보는 것 어떨까? 인간의 욕망과 이익을 탐하는 마음과 이기심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사회, 인간성의 왜곡과 타락이 최소화된 세상에서 당당하게 ‘경박한 사람’으로, 소인으로 살아보자는 것이다. “경박한 사람이면 어때?” “소인으로 살면 어때?”라고 우리가 말할 때 우리는 더 행복하고 정신적으로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군자와 소인의 이분법, 군자와 소인의 프레임에 찌든 사회, 거짓 군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국가를 퇴행(退行)시키는 사회에 이제는 안녕을 고했으면 한다. 정말이지 유교의 때를 이제는 벗어던지자. 늘 소망하는 바이다. 우리도 이제 정신적으로도 건강하게 살아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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