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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사상 크로스 〈11〉

한비자와 애덤 스미스

인간의 이익과 욕망을 긍정하다

글 : 임건순  동양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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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道家·墨家·儒家 모두 이익 추구에 대해 적대적… 法家는 사유재산권 비롯해 인간의 이기심 인정
⊙ 애덤 스미스의 ‘self love’와 한비자의 ‘自爲’는 비슷한 개념
⊙ 한비자 등 법가가 강조한 국가의 상벌기능은 시장에서의 경쟁 및 소비자 선택과 상통
⊙ 法家, 인간의 욕망과 경쟁 인정→생산력 증대→富國强兵 주장

임건순
1981년생. 서울시립대 행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수료 / 저서 《한비자, 법과 정치의 필연성에 대해서》 《제자백가 인간을 말하다》 《묵자: 공자를 딛고 일어선 천민 사상가》 《손자병법: 동양의 첫 번째 철학》 《생존과 승리의 제왕학 병법노자》 《제자백가 공동체를 말하다》 《순자: 절름발이 자라가 천 리를 간다》 등
애덤 스미스(왼쪽)와 한비자는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의 마음을 긍정했다.
  사서(四書) 중 하나인 《맹자(孟子)》는 맹자의 유세 장면으로 시작한다. 맹자가 위(魏)나라의 수도 대량(大梁)에 가서 혜왕(惠王)을 만나 면접을 보는데 위나라 혜왕은 맹자를 보자마자 반기면서 한마디를 한다.
 
  “노선생께서 천 리를 멀다 않고 오셨으니, 역시 장차 내 나라를 이롭게 함이 있겠습니다?”
 
  천 리를 멀다 하지 않고 우리 위나라에 오셨는데, 선생께서 우리 위나라를 이롭게 할 방도와 정책을 말해주면 좋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이에 맹자는 바로 정색하며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는다.
 
  “왕께서는 하필 이익(利)을 말씀하십니까?”
 
  ‘왜 이익 따위를 말하느냐’면서 초면에 군주에게 면박을 준 뒤 맹자는 말을 이어간다.
 
  “단지 인의(仁義)가 있을 뿐입니다. 왕께서 ‘어떻게 내 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을까’라고 하신다면 대부들도 ‘어떻게 하면 내 집안을 이롭게 할 수 있을까’라고 할 것이며, 사(士)나 서인(庶人)들도 ‘어떻게 하면 내 몸을 이롭게 할 수 있을까’라고 할 것입니다. 위아래가 서로 이익을 다투게 되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만승(萬乘)의 나라 천자국에서 그 임금을 죽이는 자는 반드시 천승(千乘)의 가문 수장인 공경(公卿)이요, 천승의 나라에서 그 임금을 죽이는 자는 반드시 백승(百乘)의 가문 수장인 대부(大夫)입니다. 만에서 천을 가지고, 천에서 백을 가지는 것이 적은 것이 아니지만 만약 의(義)를 뒤로 미루고 이(利)를 앞세우면 모두가 빼앗지 않고는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익을 앞세우면 무한투쟁(無限鬪爭)이 벌어진다고 하는 맹자. 이익에 대한 그의 관점과 생각이 잘 보인다. 정치공동체 구성원들이 이익을 생각하면 큰일이 난다는 것이다. 각자가 이익을 탐하면 정치적 위계질서(位階秩序)가 무너지고 서로 죽이고 살리는 살벌한 투쟁이 나라 안에서 벌어질 것이다. 그러니 이익을 멀리하며 인의만 말해야 한다. 도덕과 윤리를 추구해야 한다. 《맹자》는 이익에 대한 경계 내지 이익 추구에 대한 경고를 말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맹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유가(儒家)사상가들의 입장도 대부분 이러했다. 유가 진영 학자들 거의가 이익과 욕망을 보는 관점이 맹자와 유사했다. 유가의 종사(宗師) 공자(孔子)도 《논어(論語)》에서 이익 추구의 위험성을 거듭 말했다.
 
 
  利에 대한 道家와 墨家의 태도
 
묵자.
  사실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 즉 제자백가(諸子百家) 시절에 유가만이 이익과 거리 두기를 말하고 욕망의 자제를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많은 사상가가 욕망과 이익 추구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특히 도가(道家)가 그러했다. 욕망을 추구하는 사회와 문화의 위험성을 노자(老子)와 장자(莊子)는 거듭 강조했다. 욕망을 추구하면서 타고난 인간의 순선(順善)한 자연적 본성(本性)을 상실한다고 말했다. 이념의 깃발을 통해 이익을 꾀하는 사람들이 등장해서 위선(僞善)이 횡행한다고 지적했다. 한정된 사회적 재화(財貨)를 두고 과열된 경쟁이 일어나면서 문명과 문화 전체가 타락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비워라’ ‘버려라’ ‘소거하라’고 말했고, 문명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가라고 이야기했다.
 
  묵가(墨家)도 욕망과 이익을 부정적으로 말한 경우가 많았다.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자신만의 이익을 꾀하는 쪽으로 귀결되기 쉽다고 했다. 특히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강자(强者)가 약자(弱者)를 겁탈하고,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하고 겁박하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질서를 부추긴다고 했다. 유가는 귀족계급, 이른바 대인(大人)계급을, 묵가는 소인(小人)계급, 즉 피지배계층을 대변한다는 점에서는 대립했지만 욕망과 이익에 부정적이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졌다. 그러나 욕망과 이익 문제에 대안(代案)을 생각하는 데 있어 접근법은 같지 않았다. 묵가는 평등주의적 방법으로 나아갔고, 유가는 차별주의적 방법으로 나아갔다.
 
  《묵자》의 ‘절용(節用)’ ‘절장(節葬)’ ‘비악(非樂)’ 편을 보면 묵자는 계속해서 지배계층의 사치를 비판한다. 그들이 이익을 독점하면서 생기는 폐해, 그들이 지나치게 욕망을 추구하면서 파생되는 국가 사회적 문제와 백성들의 고통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묵가는 귀족과 평민, 모두 똑같은 사람이니 이익·욕망의 추구와 소비에서 평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욕망의 충족과 소비를 평등하게 만들기 위해서 우선 귀족계층들이 사치와 낭비를 자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점에서 묵가는 적지 않게 사회주의와 흡사한 주장을 하는 게 사실이다.
 
 
  儒家, “분수를 알라”
 
  하지만 유가는 묵가와 달랐다. 이익과 욕망 추구로 인한 문제를 이야기했지만 평등주의적 해법으로 달려가지 않았다. 반대로 차별주의적 해법을 내세웠다. 신분제를 옹호했고, 신분제의 고수를 대안으로 말했다. 예(禮)로 대변되는 신분제와 차별적 질서, 수직적 질서를 옹호했다. 각자의 신분에 맞게 욕망을 추구하고 이익을 누리자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 분수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체로 양편이 모두 귀한 사람이면 서로 섬길 수가 없고 양편이 모두 천하면 서로 부릴 수가 없는데 이것은 하늘의 섭리이다. 세력과 지위가 같으면서 바라는 것과 싫어하는 것도 같으면 물건이 충분할 수가 없을 것이므로 반드시 다투게 된다. 다투면 반드시 어지러워지고 어지러워지면 반드시 궁해질 것이다. 옛 임금들은 그러한 혼란을 싫어했기 때문에 예의 제도로써 이들을 구별해주어 가난하고 부하고 귀하고 천한 등급이 있게 하여 서로 아울러 다스리기 편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천하의 백성들을 기르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순자》 왕제(王制)편
 
  유가에서도 기득권층의 절약과 절용을 말하기는 한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분수를 모른 채 욕심을 부리고 이익을 탐하는 것이다. 아랫사람이면서도 윗사람과 같은 것을 누리고 소비하려는 게 문제라고 생각했다. 신분에 따라 누려야 할 재화와 문화소비의 정도와 한도가 달라야 한다. 그것은 예로써 명확히 규정된 것이다. 그런 종적(縱的) 질서를 무시한 채 욕망을 누리려 하니 문제인 것이다. 욕망이 불러오는 사회적 혼란과 파괴에 대해 묵가와 달리 유가는 지배계층의 욕심보다 하위계층의 욕심을 문제 삼는다.
 
  욕심 때문에 다투는 것을 막기 위해 묵가가 평등주의를, 유가가 신분제를 각각 옹호한 데 반해, 법가(法家)는 재산권 확립을 강조했다.
 
 
  이익 추구를 인정한 法家
 
《상군서》를 지은 상앙.
  “한 마리의 토끼가 달려가는데 백 사람이 뒤를 쫓는 것은 토끼를 나누어서 백 사람 몫으로 만들 수 있어서가 아니라 누구의 것이라는 명분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릇 토끼 파는 사람들이 시장에 가득 차 있는데도 도적이 감히 그것을 훔치지 못하는 것은, 토끼가 누구의 것이라는 명분이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반드시 법령을 위해서 법관을 두었고 관리를 두어 천하의 스승이 되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명분을 확정 짓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명분이 확정되면 큰 사기꾼들도 곧아지고 믿음을 지키며 백성들은 누구나 성실해져서 저마다 자기 자신을 다스리게 됩니다.” -《상군서(商君書)》 정분(定分)편
 
  법가는 사유재산(私有財産)을 인정했다. 사유재산을 법으로 분명하게 지켜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욕망과 이익으로 인한 투쟁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이렇게 해법에서 유가·묵가와 달랐는데, 사실 대안이 다른 것 이전에 욕망을 보는 관점 자체가 달랐다. 법가는 욕망을 애초에 부정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제자백가에서 예외자(例外者)이다. 욕망 자체가 문제라고 보기는커녕 긍정하고 적극 인정하며, 더 나아가 활용하자는 말도 했다는 점에서 그들은 더욱 예외자다.
 
  “이익이 있는 곳에 백성이 모여들고 명예가 있는 곳에 선비들이 목숨을 건다.” -《한비자(韓非子)》 외저설 좌상(外儲說 左上)
 
  한비자가 한 말이다. 그는 호리지성(好利之性) 그리고 호명지성(好名之性)이 인간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라고 보았다. 특히 호리지성으로 인간을 말할 때가 많았다. 한비자 생각에 인간은 이익이나 욕망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그는 이익을 유가, 묵가, 도가와 달리 가치중립적인 것으로 본다.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절대 불온시하지 않는다. 그는 《한비자》 텍스트에서 계속 인간이란 존재를 이익과 결부시켜 말한다.
 
  “장어는 뱀을 닮았고 누에는 큰 벌레를 닮았다. 사람은 뱀을 보면 깜짝 놀라고 큰 벌레를 보면 소름이 돋는다. 그렇지만 아낙네가 누에를 손으로 줍고 어부가 장어를 움켜쥔다. 이득이 있는 곳에서는 싫어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모두 맹분(孟賁)이나 전저(專諸)처럼 용감해진다.” -《한비자》 내저설 상(內儲說 上)
 
  이익 앞에서는 징그러운 것도 만지고 용감해진다. 그게 인간 본성이다. 억누를 수 없는 인간의 실정이라고 한다. 그것이 절대 바꿀 수 없는 현실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욕망을 추구하지 마라’ ‘이익을 탐하지 마라’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아무리 도덕과 윤리를 가지고 욕망을 억제하고 이익을 탐하지 말라고 훈계해도 공염불에 불과하다.
 
  한비자는 부모 자식 간에도 이익과 손해를 따진다고 보았다. 하물며 군신(君臣) 관계는 더 말할 것이 없다. 한비자를 비롯한 법가는 철저히 여기서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인간은 이익과 손해를 저울질하는 존재며 죽을 때까지 그럴 수밖에 없다. 어쩌면 지극히 현대의 사회과학 같은 인간관(人間觀), 특히 경제학적 인간관과 유사한 인간 이해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근대 경제학의 인간관과 유사한 인간 이해를 가진 법가는 마침 경제학의 아버지와 비슷한 말을 했다.
 
 
  한비자와 애덤 스미스
 
  “주인이 머슴에게 가산을 축내가면서 좋은 음식을 먹이고 많은 품삯을 주는 것은, 밖에서 데려온 머슴을 사랑해서가 아니다. 그렇게 해야 머슴이 밭을 깊이 갈고 김을 알뜰하게 매기 때문이다. 머슴이 힘을 다해 열심히 김을 매고 공을 들여 고르게 밭갈이하는 것은 주인을 사랑해서가 아니다. 그렇게 해야 좋은 음식을 대접받고 넉넉한 품삯을 받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로 공을 들임이 부자 사이와 같으니 두루 이와 같이 하는 것은 각자 자신을 위하는 마음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세상일을 함에 있어서 이롭게 하려는 마음을 가지면 멀리 월(越)나라 사람과도 쉽게 친해질 수 있고, 해롭게 하려는 마음을 가지면 부자 사이도 멀어지고 원망하게 된다.”
 
  고용주는 피고용인이 예쁘고 사랑스러워 임금을 주는 것이 아니다. 고용인 역시 고용주가 존경스러워서 열심히 일하는 게 아니다. 각자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임금을 주고 일을 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익을 추구하고 이익을 매개로 만나는데, 각자가 자기 이익을 위해 싸우기도 하지만 이익을 탐하는 마음 덕분에 거래가 일어나고 협력이 일어나고 생산이 활성화되고 경제가 발전한다고 보았다. 이익을 탐하는 인간 본성 때문에 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고 본 것인데, 역시나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다. 바로 애덤 스미스가 한 말이다.
 
  “우리가 우리의 정찬을 기대하는 것은 푸줏간 주인, 양조업자, 빵 굽는 사람의 자비로부터가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이익에 대해 기울이는 관심으로부터이다. 우리는 그들의 박애(博愛)가 아니라 그들의 자애(自愛)에 말을 걸고, 그들에게 우리 자신의 필요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고 그들 이득에 관해 이야기한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國富論)》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이다. 이것이야말로 근대(近代)를 연 위대한 서문(序文)이 아닐까. 그는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종교적 논리나 중세적(中世的) 질서로 억눌러야 할 것이 아니며, 사회 발전과 번영의 동력이라고 역설했다. 한비자도 그와 같은 말을 한 것이다. 《한비자》 텍스트들을 읽다 보면 ‘이거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한 말을 베낀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유사한 이야기를 많이 볼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부분이 바로 언급한 대로 인간의 이기심의 긍정과 욕망의 긍정이다.
 
 
  왕이 인민을 사랑하는 이유
 
  “왕량(王良)이 말을 사랑하고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인민을 사랑한 것은 그들을 전쟁에 내몰고 말을 빨리 달리게 하기 위해서였다. 의원이 다른 사람의 종기를 빨거나 그 나쁜 피를 입에 머금는 것은 골육 간의 친애하는 정(情) 때문이 아니라 이득을 얻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마 만드는 사람은 가마를 만들면서 사람들이 요절해 죽기를 바란다. 가마 만드는 삶이 어질고 관(棺) 짜는 사람이 잔혹해서가 아니다. 사람이 귀해지지 않으면 가마가 팔리지 않고 사람이 죽지 않으면 관이 안 팔린다. 정말 사람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죽는 데서 이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비자》 비내(備內)편
 
  말을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것은 말 자체를 사랑해서가 아니다. 말을 잘 사육해서 이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위정자(爲政者)가 좋은 정치를 행해 백성을 잘 먹이고 잘살게 하는 것은 백성을 사랑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국력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다. 모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 관을 만드는 사람은 사람들이 일찍 죽기 바란다. 반면 가마 만드는 사람은 사람들이 귀해지기 바란다. 관을 만드는 사람이 성정(性情)이 못돼 먹어서일까? 그리고 반대로 가마를 만드는 사람은 착하고 성정 자체가 올바른 사람이라 그런 것일까? 아니다. 관을 만드는 사람은 요절하는 사람이 많아야 자신이 이익을 더 누릴 수 있고, 가마 만드는 사람은 사람들이 잘살고 신분이 귀해져야 자신이 이익을 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직업에는 貴賤이 있다?
 
맹자.
  자, 여기서 질문을 해볼 수 있다. 관 만드는 사람이 있고 가마 만드는 사람이 있는데, 가마 만드는 사람의 직업이 관을 제작하는 사람보다 우월하고 귀한 것일까? 더 나아가 가마 만드는 사람은 사람이 일찍 죽기를 원하기도 하니 그런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없어야 할까? 여기서 맹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화살 만드는 사람이 어찌 갑옷 만드는 사람보다 어질지 못할까마는 화살 만드는 사람은 오직 사람을 다치지 못하게 할까 두려워하고 갑옷 만드는 사람은 오직 사람을 다치게 할까 두려워한다. 무당과 관 짜는 사람 또한 그러하다. 그러므로 직업을 택하는 데에는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 上)
 
  화살 만드는 사람은 화살의 살상 기능이 높아지기 바란다. 그가 나쁜 사람이라 그런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이익 때문이다. 갑옷 만드는 사람은 갑옷의 방어 기능이 개선되기 바란다. 그가 착하고 군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갑옷이 튼튼해질수록 자신의 이익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맹자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화살 만드는 이보다 갑옷 만드는 이가 우월하고 귀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맹자는 무당과 관 짜는 사람을 천한 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보는데 이상한 일이다. 갑옷 만드는 사람이 있어야 하듯이 화살 만드는 이가 있어야 한다. 이런 방위산업은 국가 생존에 꼭 필요한 일이 아닌가.
 
  무당과 관을 제작하는 이도 마찬가지다. 당시 무당은 의사라 볼 수도 있고, 관 만드는 이와 더불어 상조업(喪弔業)에 종사하는 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에 상조업과 의사가 없어야 할까? 그렇지 않다. 각자가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을 가지고 분업(分業) 형태로 일을 하고 그러면서 사회가 돌아가야 한다. 그것이 정상적인 사회다. 타인의 이익에 침해하거나 거래에서 속이거나 기망하지 않는 이상 각자의 업(業)은 존중받아야 하고 그렇게 많은 직업이 생겨나 사회가 유지되어야 한다.
 
 
  법가,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다
 
  유가와 달리 법가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본 셈이다. ‘모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일한다. 이익 추구가 본성인데 각자의 소질과 적성·재능이 다르다 보니 절로 종사하는 일이 달라지고 사회가 분업을 이룬 채 돌아가며, 유기적인 재화 공급과 교환의 생태계가 만들어진다’는 것이 법가의 생각이다. 인간의 욕망 덕분이다. 법가는 인간 욕망의 찬양자다. 더 크게 보면 법가는 크게 세 가지 맥락에서 인간의 이익과 욕망을 긍정했다.
 
  첫째, 현실적으로 절대 없앨 수 없다. 둘째, 유기적인 사회적 분업을 가능케 한다.
 
  셋째, 국력 신장에 크게 이용할 수 있다.
 
  인간이 욕심을 내고 욕망을 추구하고 전력을 다해 이익을 찾는 데에서 경제 발전과 국력 신장, 부국강병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상앙(商鞅)이 특히 그 점을 강조했다. 이렇게 욕망과 이익을 긍정한 점에서 법가사상은 제자백가사상에서 그리고 전체 동양사상에서 유별난 점이 있으며 독특한 개성과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흔히 우리는 이렇게 알고 있다. 우리가 빵을 구해 먹을 수 있는 것은 빵집 주인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이기심 때문이고,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의 이기심 덕분이라고. 하지만 앞서 인용한 문장을 다시 보자.
 
  “우리가 우리의 정찬을 기대하는 것은 푸줏간 주인, 양조업자, 빵 굽는 사람의 자비로부터가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이익에 대해 기울이는 관심으로부터이다.”
 
 
  ‘self love’와 自爲
 
  ‘이기심’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이익에 기울이는 관심’이다. 애덤 스미스가 정말 인간의 이기심을 극찬했는가? 위 원문에서 말하는 자신의 이익에 기울이는 마음이 원래 ‘selfishness’라고 되어 있을까? 아니다. 경제학의 아버지 스미스가 쓴 말은 ‘self love’라는 말이었다. 스미스는 경제주체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오늘도 내가 굶지 않고 밥술을 뜰 수 있다고 말했다. ‘self love’는 ‘이기적인 마음’이라기보다는 ‘자신을 위하고 사익(私益)’을 추구하는 마음일 뿐이다. 그런데 한비자는 ‘자위(自爲)’를 말했다. 말 그대로 자신을 위하는 마음인데 이것이 정확히 애덤 스미스의 ‘self love’에 대응한다고 본다. 같은 맥락, 같은 뜻으로 쓴 것이다.
 
  “서로 남을 위한다고 여기면 책망을 하게 되나 자신을 위한다고 생각하면 일이 잘 되어간다. 그러므로 부자간에도 혹 원망하고 꾸짖으며 사람을 사서 농사짓는 자는 맛있는 국을 내놓게 된다.” - 《한비자》 외저설 좌상(外儲說 左上)
 
  상위즉책망(相爲則責望),자위즉사행(自爲則事行), 즉 ‘서로를 위하는 마음으로 일하면 결국 원망하게 되지만 각자를 위해서 일하면 일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타심(利他心)으로 살고 일하는 것보다 내 이익을 위해 일하면 서로가 행복해지고 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이렇게 간명하게 표현한 것이다. 그것이 한비자의 경제관이고 한비자의 사회관이다. 이 말을 애덤 스미스가 보았다면 정말 ‘옳거니’ 했을 것이다. 이런 인간의 마음을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며 세상을 진보하게 하는 힘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둘은 정확히 포개진다. 같은 법가사상가 상앙은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을 아예 부국강병의 원천으로 보았다.
 
 
  법가사상과 시장경제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호오(好惡)를 가지고 있으므로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니 군주는 그러한 호오를 잘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호오를 가지고 상벌의 근본으로 삼아야 하는데 무릇 사람들의 정서란 작록(爵祿)은 좋아하고 형벌은 싫어하게 마련이니 군주는 이 두 가지를 설정하여 백성의 뜻을 제어하고 그들이 하고자 하는 바를 세워주어야 한다. 대체로 백성들이 자신의 힘을 다 바쳤으면 작위가 그 뒤를 따라야 하고 공이 세워졌으면 포상이 그 뒤를 따라야 한다. 임금으로서 능히 그 백성들로 하여금 이를 마치 해나 달처럼 믿도록 한다면 군대는 대적할 자가 없게 될 것이다.” -《상군서》 조법(助法)편
 
  백성들이 좋아하는 바가 있고 싫어하는 바가 있다. 그걸 가지고 인센티브 체계를 국가가 만들어낼 수 있다. 욕망하는바, 이익으로 여기는 바를 가지고 백성의 힘을 짜내고 동원하는 체제를 만들어낼 수도 있는데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하는 작업이다. 이익을 찾아가는 인간 본성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사력(死力)이란 민(民)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실정이란 사력을 내어서 바라는 것을 얻기를 그만두지 못한다. 그러나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위가 제어하는 것이다. 민은 이득 되는 녹(祿)을 좋아하고 형벌을 싫어한다. 위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장악함으로써 민의 역량을 활용한다.” -《한비자》 제분(制分)편
 
  사력, ‘죽을힘’이란 게 있다고 한다. 이익을 추구하고 손해를 싫어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특히 부(富)와 귀(貴) 같은 욕망하는 바를 얻기 위해서 만들어내는 힘인데, 법가는 국가를 향해 말했다. 철저히 독점(獨占)하라고. 백성이 원하는 것을 국가만이 줄 수 있어야 한다. 부귀와 작위 등 백성들이 이로움으로 생각하는 것을 국가만이 줄 수 있어야 하고, 빈천(貧賤)과 벌같이 싫어하는 것 역시 국가만이 줄 수 있어야 한다며 상벌권한의 독점을 이야기했다. 그런 수여의 통로를 장악할 수 있으면 국력을 최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어쩌면 시장경제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시장도 상벌기능이 있다. 그리고 공공(公共)부문이 비대하지 않을 경우 그 기능이 꽤나 독점적이다. 시장은 참여자들에게 상을 주기도 하고 벌을 내리기도 한다. 생산성을 내고 수요에 맞는 상품과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이에게는 상을 주지만 생산성이 떨어지고 수요와 어긋난 참여자들에게는 벌을 내리기도 한다. 시장 역시 상벌을 가지고 돌아가는 체계이다. 꽤나 독점적으로 그것을 행사하며, 그 독점권을 존중해준다. 이것이 어쩌면 시장경제고 자본주의라고 볼 수 있는데, 여러 가지로 법가사상이 경제학과 비슷한 게 사실이다.
 
 
  법가와 자유주의 경제
 
  욕망과 이익을 보는 시각 말고도 법가와 애덤 스미스는 공유(共有)하는 부분이 많다. 역사를 보는 관점, 노동의 가치를 양분해서 보는 시각, 독점의 폐해에 대한 지적과 이신론적(理神論的) 세계관, 애덤 스미스의 공평한 관객과 관찰자의 논리는 상앙과의 접점이 많다. 정말이지 법가와 애덤 스미스는 공유하는 부분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많다.
 
  더 나아가 법가는 애덤 스미스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경제학과 많은 부분 비슷한 문제의식들을 공유한다. ‘공짜 점심은 없다’는 밀턴 프리드먼과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사상과도 유사한 부분이 많다. 사실 이제까지 한비자와 법가는 마키아벨리와 비교되어 같이 이야기되었지만 앞으로는 애덤 스미스 그리고 자유주의 경제학과 함께 이야기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마키아벨리가 정치를 종교와 도덕에서 구해내 독자적 영역을 만들어내 근대정치학의 성립을 일궈냈다면, 애덤 스미스는 경제를 종교와 도덕에서 분리해내서 경제학의 독자적 영역을 만들어 근대경제학을 만들어낸 사람이다.
 
  이 두 가지 측면이 한비자에게서는 모두 발견된다. 그간 우리는 권력만이 아닌 경제에 대한 한비자의 통찰을 잘 눈여겨보지 않았다. 흔히 법가 하면 ‘부국강병’ 측면만 강조한다. 사실 강병(强兵)보다 부국(富國)이 우선이다. 부국이 선행(先行)되어야 강병이 가능한 일이다. 부국, 생산력의 발전과 재화의 생산량을 생각한다면 사람들을 경제주체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의 욕망에 대한 정확한 직시와 통찰이 있어야 한다. 경쟁과 교환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법가사상은 경제를 보는 눈이 있다. 더욱 직설적으로 말하면 한비자와 법가 사상에는 경제적 혹은 근대경제학적 통찰이 있다. 그래서 최윤재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한비자의 법가의 경제적 통찰을 높이 사 《한비자가 나라를 살린다》 《좀도둑과 큰 손의 경제학》이라는 책을 통해 법가사상을 경제학적 맥락으로 풀어냈다. 하지만 아쉽게도 동양학 연구자 사이에서 의미 있는 반응과 응답이 되는 연구 성과가 나오지 못했다. 경제·경영학자들 사이에서도 후속작업이 나오지 못해 흐름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렇지만 언제든 ‘경제학과 한비자’ ‘자유주의 경제학과 한비자’는 다뤄질 수 있는 주제라고 생각한다. 지금이야말로 한국 사회에서 이런 문제가 다루어져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우파의 리뉴얼을 위하여
 
  지나친 정부 규제와 간섭, 상벌기능이 작동하지 않는 시장, 방만한 공공부문이 우리 발목을 잡고 있다. 많은 경제주체들에게 억지로 공공성(公共性)을 강제하다 보니 진정한 ‘공공(public)’의 영역이 사라져버렸다. ‘결과의 평등’까지 강제하기 바라는 국민의 감성과 그런 대중의 감성을 추수(追隨)하는 포퓰리즘 정책들이 갈수록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한비자와 자유주의 사상가 간의 접점(接點)과 공통점을 이야기하고 거기서 한국 사회 문제의 해법을 찾고 시사점과 교훈을 찾아보려는 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특히 우파의 리뉴얼(renewal)과 우파 진영의 사상적 담금질이 절실한 상황이기에 더욱 필요한 작업이다. 우파가 애덤 스미스적 가치로 돌아가고 재무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당연히 한비자와 상앙도 같이 공부하면 좋겠다.
 
  다음 호에는 이신론(理神論)과 자연조화설, 특히 작은 정부와 정부 실패에 대한 우려 등 법가·한비자와 애덤 스미스 간의 공통점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다뤄볼 것이다. 연속되는 논의를 통해 단순히 법가사상이 전제군주를 위한 이론적 시녀(侍女)라는 오해에서 벗어나면 좋겠다. 부국강병을 위한 각박한 정책을 강제한 사람들이라는 시각도 좀 교정이 되면 좋겠다. 더 나아가 우파의 사상적·이론적 재무장에 어떤 자극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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