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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Q의 시 읽기 〈44〉 로버트 스티븐슨의 ‘방랑자’

여행은 인내하는 자를 위해 마련한 선물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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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국은 항해자, 바다가 고향’(스티븐슨의 묘비명)
⊙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람의 마음의 오지’(정호승)
시인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방랑자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내가 사랑하는 삶만을 나에게 주고,
  나머지는 스쳐 가기를.
  상쾌한 하늘과 샛길로 이어지는 밤을 주기를.
  별이 바라보이는 숲 속의 침상,
  강물에 적시는 빵—
  나와 같은 사람을 위한 삶,
  영원히 그런 삶이 있는 곳.
 
  조만간 바람이 불어와
  나를 스쳐 가도록.
  내 앞에 대지와 길이 펼쳐지기를.
  부유함도, 희망도, 사랑도, 내가 찾는 건 아니지.
  나를 아는 친구를 찾는 것도 아니고.
  내가 찾는 전부는 머리 위 하늘, 발아래 길일 뿐.
 
 
  The Vagabond
  Robert Louis Stevenson
 
  Give to me the life I love,
  Let the lave go by me,
  Give the jolly heaven above
  And the byway night me.
  Bed in the bush with stars to see,
  Bread I dip in the river—
  There’s the life for a man like me,
  There’s the life for ever.
 
  Let the blow fall soon or late,
  Let what will be o’er me;
  Give the face of earth around
  And the road before me.
  Wealth I seek not, hope nor love,
  Nor a friend to know me;
  All I seek, the heaven above
  And the road below me.
 
 
태평양 사모아 섬에 있는 로버트 스티븐슨의 묘비.
  시 ‘방랑자’는 《보물섬》의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1850~1894)의 작품이다. 스티븐슨의 대표작으로 인간 내면의 선과 악을 그린 《지킬박사와 하이드》가 있다. 그의 일생에 대해서는 국내에 알려진 바가 없다. 태평양 사모아 섬에서 사망했는데 묘비에는 자작시 ‘레퀴엠’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한 구절을 소개한다.
 
  여기 그가 애타게 기다려온 곳에 잠들다.
  본국은 항해자, 바다가 고향,
  그리고 사냥꾼, 언덕이 고향.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쓴 《보물섬》.
  시 ‘방랑자’는 일종의 자연 시다. 여행에 대한, 인생에 대한 아름다운 탐색이 담겨 있다. 화자는 사랑하는 삶만을 ‘나’에게 주고 나머지는 스쳐 지나기를 바라는 소박한 마음이다. 받고 싶은 ‘사랑하는 삶’은 어떤 것일까. 상쾌한 하늘, 샛길로 이어진 밤, 별이 보이는 숲속의 침상, 강물에 적신 빵, (길에서 만나는) ‘나’와 닮은 방랑자들이다. 이런 바람을 아름답게 꿈꿀 수 있는 양식이 바로 시다.
 
  2연에서 화자는 지친 여행길에 바람이 불어와 ‘나’를 스쳐 가기를 바란다. 그리고 발끝에 대지와 길이 펼쳐지기를 희망한다. 여행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부유함도, 희망도, 사랑도, 친구도 아니다. ‘내’가 찾는 전부는 머리 위 하늘, 발아래 길뿐이다. 자연과 하나 되길 원할 뿐이다.
 
  ‘방랑자’를 읽자니 가수 김동률의 노래 ‘출발’이 생각난다.
 
  아주 멀리까지 가 보고 싶어
  그곳에선 누구를 만날 수가 있을지
  아주 높이까지 오르고 싶어
  얼마나 더 먼 곳을 바라볼 수 있을지
 
  작은 물병 하나, 먼지 낀 카메라,
  때 묻은 지도 가방 안에 넣고서
 
  언덕을 넘어 숲길을 헤치고
  가벼운 발걸음 닿는 대로
  끝없이 이어진 길을 천천히 걸어가네
 
  멍하니 앉아서 쉬기도 하고
  가끔 길을 잃어도 서두르지 않는 법
  언젠가는 나도 알게 되겠지
  이 길이 곧 나에게 가르쳐 줄 테니까
 
  촉촉한 땅바닥, 앞서 간 발자국,
  처음 보는 하늘, 그래도 낯익은 길
 
  언덕을 넘어 숲길을 헤치고
  가벼운 발걸음 닿는 대로
  끝없이 이어진 길을 천천히 걸어가네
 
  -김동률의 노래 ‘출발’ 중에서

 
가수 김동률.
  김동률의 ‘출발’ 1절은 방랑자의 노래, 길 떠난 자의 노래다. 멍하니 앉아 쉬기도 하고 가끔 길을 잃는다. 그러나 서둘지 않는다. 이 길을 걷다 보면 언젠가는 바른길을 찾게 될 테니까.
 
  2절에서 화자는 길을 걷다 넘어져도 내 길을 가겠다고 말한다. 가방에는 작은 물병, 먼지 낀 카메라, 때 묻은 지도뿐이다. 돈이나 토지대장, 은행잔고, 졸업장 같은 게 들어 있지 않다. 가벼운 가방을 메고 언덕을 넘어 숲길을 헤쳐, 끝없이 이어진 길을 천천히 걷는다.
 
 
  그는 무겁지 않아요. 그는 나의 형제니까
 
영국 밴드 홀리스의 싱글 〈He ain’t Heavy, He’s my brother〉.
  1960년대 인기 밴드 홀리스(The Hollies)가 부른 ‘He Ain’t Heavy He’s My Brother’는 노랫말이 참 좋은 팝송이다. 길 떠난 이의 감성이 가득 배어 있다. 화자인 ‘나’는 길을 걷고 있다. 이 길은 꾸불꾸불 굴곡이 많은 먼 길이다. 이 길은 우리를 어디로 이끌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를 안고 갈 만큼 충분히 건강하다. ‘그’는 무겁지 않다. ‘그’는 ‘나’의 형제니까.
 
  그 길은 꾸불꾸불한 굴곡이 많은 먼 길이에요.
  그 길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지 누가 알까요?
  하지만 난 그와 함께 갈 만큼 충분히 강해요.
  그는 무겁지 않아요. 그는 나의 형제니까요.(He ain’t heavy, he’s my brother)
 
  그렇게 계속 우리는 (함께) 가야 해서, 그의 행복은 나의 관심거리입니다.
  그는 부담을 주는 짐이 아닙니다. 우리는 (함께) 그곳에 닿을 거예요.
  난 그가 나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 것을 알기에
  그는 무겁지 않아요. 그는 나의 형제니까요.
  내가 아주 괴로워하고 있다면, 내가 슬픔에 괴로워하고 있다면
  그것은 모두의 가슴에 서로를 위한 사랑의 기쁨이 채워지지 않아서입니다.
 
  그 길은 되돌아갈 수 없는 멀고 먼 길입니다.
  우리가 함께 그곳에 가는 동안 왜 우리는 (서로) 나누지 않을까요.
  그 길은 조금도 나에게 부담이 되지 않습니다.
  그는 무겁지 않고, 그는 나의 형제니까요.
 
  -홀리스의 ‘He Ain’t Heavy He’s My Brother’ 중에서

 
  길 떠난 여행에서 늘 좋은 일만 생기지는 않는다. 갑자기 사람을 해치는 곰과 만날 수도 있다. 위험한 일이 생길 때는 슬기롭게 대처하되 나머지는 운에 맡길 수밖에 없다.
 
빌 브라이슨이 쓴 미국 애팔래치아산맥 종주기 《나를 부르는 숲》.
  빌 브라이슨이 쓴 《나를 부르는 숲》이란 여행기가 있다. 국내 번역된 이 책은 미국 북동부 조지아주(州)에서 메인주까지 3360km에 이르는 애팔래치아산맥의 능선을 따라 걷는 종주기다. 애팔래치아 트레일은 고요한 숲과 반짝이는 호수의 놀라운 경치가 인상적이라고 한다.
 
  저자는 숲길을 걷다가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를 듣는다. 15m 떨어진 덤불에서 나는 소리다. 소란스럽게 서걱거리는 소리에 두려움을 느낀다. 곰일 수도, 맹수일 수도 있다. 그때 상당히 크고 잘 보이지 않는 뭔가가 움직였다.
 
  〈…나는 모든 걸—움직이는 것과 숨 쉬는 것, 그리고 생각하는 것—멈추고 발꿈치를 들어 나뭇잎에서 그늘진 안쪽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뭔지 모르지만 내게로 오고 있다! 소리가 안 나게, 하지만 심각하게 흐느껴 울면서 나는 100미터가량을 줄달음쳤다. 배낭은 철렁거리고 안경도 들썩였다. 그런 뒤 멈추고, 심장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사슴 한 마리, 큰 수사슴 한 마리가 늠름하게 길을 걸으면서 전혀 긴장하는 기색도 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산책을 계속했다. 숨을 가다듬고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심하게 낙담했다.…〉
 
  -《나를 부르는 숲》 중에서, 274~275쪽

 
  이처럼 여행은 우여곡절을 겪는다는 것, 사소한 경험도 가슴 철렁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경험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절감한다. 자신을 알아가는 것, 여행이 선사하는 내면의 기쁨이다.
 
  여행이라는 여정을 통해 자신도 알지만 타인도 알게 된다. 여행TV 채널의 박정호 PD가 펴낸 《떠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나무수 刊)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순례 길에서 가장 많이 보았던 것은 십자가도 이정표도 아닌 타인의 등이다. 지치고 외롭고 힘들어 굽고 무너져 가는 앞선 이의 등. 길은 타인의 등을 보라 조용히 이른다.’ 멋진 문장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은 자신의 등은 안을 수 없지만 타인의 등은 어루만지고 감쌀 수 있다.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서정시인 정호승의 ‘여행’은 읽을수록 맛이 나는 시다. 사람들은 어딘가로 분주히 발걸음을 옮기며 살아가지만, 늘 허전하다. 때로 타인의 인정을 얻기 위해 몸부림치며 남들 이목 때문에 삶을 희생하며 살아간다. 남을 안다고 말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모를 때가 많다. ‘나’를 미워하며 두려움을 견디도록 방치한다. 시인은 말한다.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의 오지’ ‘사람의 마음의 설산’뿐이라고.
 
  사람이 여행하는 곳은 마음뿐이다
  아직도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의 오지뿐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여 떠나라
  떠나서 돌아오지 마라
  설산의 창공을 나는 독수리들이
  유유히 나의 심장을 쪼아 먹을 때까지
  쪼아 먹힌 나의 심장이 먼지가 되어
  바람에 흩날릴 때까지
  돌아오지 마라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람의 마음의 설산뿐이다
 
  -정호승의 ‘여행’ 전문

 
영성가 안셀름 그륀이 쓴 《삶의 기술》.
  걸음만큼 정직한 것이 없다. 여행은 인내하는 자를 위해 마련한 선물이다. 눈앞에 보이는 언덕도 걷지 않으면 갈 수가 없다. 남이 대신 ‘나’를 걷게 하고 산정(山頂)으로 데려다 줄 수 없다. 자신이 직접 두 발로 한걸음 한걸음 걸어야 한다. 그러나 재촉하며 걷기보다 때로 느리게 걷는 즐거움도 필요하다.
 
  영성가 안셀름 그륀(Anselm Grun) 신부는 ‘속도를 줄여라’고 권한다. 세상 모든 분야에서 점점 속도가 빨라지고 있지만 인간에게는 자신의 삶에 맞는 리듬이 있다. 식물이 내적 리듬에 따라 성장하듯 인간도 마찬가지다. 리듬이 점점 빨라지면 영혼은 혼란을 겪게 된다. 모든 것을 더 빨리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 불안에 쫓기게 된다.
 
  〈…불안은 가속의 태엽이다. 불안한 자는 멈추지 못한다. 그는 기다리지도 못하고, 바라보지도 못한다. 그는 모든 것을 손에 넣어야 하고 자신이 직접 하지 않으면 그 무엇도 믿지 못한다. 그래서 일이 잠시만 중단되어도 불안해한다. 일이 중단되면 자기 자신과 대면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안셀름 그륀의 《삶의 기술》 중에서, 64~65쪽

 
  중국 당(唐)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772~846)가 쓴 ‘태행로’는 태행산(太行山)에 오르며 삶을 이야기하는 시다. 태행산은 중국 허난성(河南省)과 산시성(山西省)에 걸쳐 있는 산이다.
 
  예부터 태행산 가는 길은 몹시 험하여 수레가 부서질 정도다. 태행산에서 내려오는 무산협(巫山峽)의 급류는 배를 뒤집을 만큼 거칠다.
 
  하지만 산이 아무리 험준해도, 물살이 아무리 거세도 ‘그대’ 마음에 비하면 평탄하고 조용하다. 여기서 말하는 그대는 ‘임금’을 의미한다. 다음은 ‘태행로’의 일부다.
 
중국 당나라 시절의 시인 백거이.

  行路難, 難重陳 (가는 길 어렵도다, 거듭 말하기조차 어렵도다.)
  人生莫作婦人身 (사람으로 나서 부인의 신세 되지 말지니)
  百年苦樂由他人 (백년고락이 타인에게 달렸느니라.)
  行路難, 難於山險於水 (가는 길 어렵도다, 산보다 어렵고 물보다 험하도다.)
  不獨人間夫與妻 (이것이 인간세상의 남편과 아내 사이뿐이랴.)
  近代君臣亦如此 (오늘의 군신도 또한 이와 같도다.)
  君不見, 左納言右納史* (그대는 보지 않았는가, 좌납언 우납사가)
  朝承恩暮賜死 (아침에 은총을 입었다가 저녁에 죽음을 받는 것을.)
  行路難, 不在水 不在山 (가는 길 어렵도다, 산길 물길 어려움이 아니라)
  只在人情反覆間 (다만 인정의 변덕스러움이 어려우니라.)
 
  -백낙천의 ‘태행로’ 중 일부
  (*좌납언, 우납사는 벼슬 이름을 뜻한다.)

 
  시인은 태행산의 험한 길을 부부간의 금실, 군신의 관계와 비교한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지닌 신하도 군주가 몰라주면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 군주의 마음이 바뀌면 어제까지 사랑하던 이도 멀리한다. 인정의 변덕스러움이 한스러울 뿐이다. 4월 15일 국회의원 선거를 치렀다. 낙선자들도 같은 마음이리라. 백거이의 시를 읊으며 마음을 달래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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