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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Q의 시 읽기 〈43〉 엘리엇의 ‘황무지’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추억과 욕정이 뒤섞고…”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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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엇의 시집 《황무지》… 고대 聖杯의 전설을 제재로 한 자유시
⊙ “백일홍은 봄날이라도 어둡고 艸의 구절은 마른번개처럼 울린다”(송재학 ‘얼음시3’ 中)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 노래한 시인 T.S.엘리엇.
  황무지
  T. S. 엘리엇(번역 황동규 시인)
 
  1. 죽은 자의 매장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이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 주었다.
  슈타른버거 호 너머로 소나기와 함께 갑자기 여름이 왔지요.
  우리는 주랑에 머물렀다가
  햇빛이 나자 호프가르텐 공원에 가서
  커피를 들며 한 시간 동안 얘기했어요.
  저는 러시아인이 아닙니다. 출생은 리투아니아이지만 진짜 독일인입니다.
  어려서 사촌 태공(太公)집에 머물렀을 때
  썰매를 태워 줬는데 겁이 났어요.
  그는 말했죠, 마리, 마리, 꼭 잡아.
  그리곤 쏜살같이 내려갔지요.
  산에 오면 자유로운 느낌이 드는군요.
  밤에는 대개 책을 읽고 겨울엔 남쪽에 갑니다.
 
  이 움켜잡는 뿌리는 무엇이며,
  이 자갈더미에서 무슨 가지가 자라 나오는가?
  인자여, 너는 말하기는커녕 짐작도 못 하리라.
  네가 아는 것은 파괴된 우상더미뿐
  그 곳엔 해가 쪼아대고 죽은 나무에는 쉼터도 없고
  귀뚜라미도 위안을 주지 않고
  메마른 돌엔 물소리도 없느니라.
  단지 이 붉은 바위 아래 그늘이 있을 뿐.
  (이 붉은 바위 그늘로 들어오너라)
  그러면 너에게 아침 네 뒤를 따르는 그림자나
  저녁에 너를 맞으러 일어서는 네 그림자와는 다른
  그 무엇을 보여 주리라.
  한줌의 먼지 속에서 공포를 보여 주리라.
  〈바람은 상쾌하게
  고향으로 불어요
  아일랜드의 님아
  어디서 날 기다려 주나?〉
  “일 년 전 당신이 저에게 처음으로 히아신스를 줬지요.
  다들 저를 히아신스 아가씨라 불렀어요.”
  -하지만 히아신스 정원에서 밤늦게
  한아름 꽃을 안고 머리칼 젖은 너와 함께 돌아왔을 때
  나는 말도 못하고 눈도 안 보여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었다.
  빛의 핵심인 정적을 들여다보며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황령하고 쓸쓸합니다, 바다는.〉
 
  - 엘리엇 ‘황무지’ 전체 5부 중 1부 전문
 
 
  THE WASTE LAND
  T. S. ELIOT
 
  1. The Burial of the Dead
 
  April is the cruellest month, breeding
  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Memory and desire, stirring
  Dull roots with spring rain
  Winter kept us warm, covering
  Earth in forgetful snow, feeding
  A little life with dried tubers.
  Summer suprised us, coming over the Starnbergersee
  With a shower of rain; we stopped in the colonnade,
  And went on in sunlight, into the Hofgarten,
  And drank coffee, and talked for an hour.
  Bin gar keine Russin, stamm’aus Litauen, echt deutsch.
  And when we were children, staying at the arch-duke's
  My cousin's, he took me out on a sled,
  And I was frightened. He said, Marie,
  Marie, hold on tight. And down we went.
  In the mountains, there you feel free.
  I read, much of the night, and go south in the winter.
 
  What are the roots that clutch, what branches grow
  Out of this stony rubbish? Son of man,
  You cannot say, or guess, for you know only
  A heap of broken images, where the sun beats,
  And the dead tree gives no shelter, the cricket no relief,
  And the dry stone no sound of water. only
  There is shadow under this red rock,
  (Come in under the shadow of this red rock),
  And I will show you something different from either
  Your shadow at morning striding behind you
  Or your shadow at evening rising to meet you;
  I will show you fear in a handful of dust.
  〈Frisch weht der wind
  Der Heimat zu
  Mein Irisch Kind,
  Wo weilest du?〉
  “You gave me hyacinths first a year ago
  “They called me the hyacinth girl.”
  ‐Yet when we came back, late, from the Hyacinth garden,
  Your arms full, and your hair wet, I could not
  Speak, and my eyes failed, I was neither
  Living nor dead, and I knew nothing,
  Looking into the heart of light, the silence.
  〈Oed’ und leer das Meer.〉
 
 
죽은 땅의 모습인 황무지.
  현대시의 고전 ‘황무지’는 고대 성배(聖杯)의 전설을 제재로 한 자유시다. 엘리엇의 시집 《황무지》(1922)에 실렸다. 성배의 전설은 이렇다. 어부 왕(‘사람 낚는’ 어부인 예수를 상징)이 저주를 받아 성(性) 불구자가 된다. 그가 다스리는 나라에 기근이 들고 강은 메말라갔다. 저주를 풀기 위해선 마음이 순결한 기사(騎士)가 황무지 한복판에 있는 성당으로 가서 위험을 무릅쓰고 성배(최후의 만찬 때 쓰였고, 후에 예수가 십자가에서 창에 찔렸을 때 흘린 피를 받았다는)를 찾아야 한다.
 
엘리엇의 시집 《황무지》(1922).
  만일 성배를 찾게 되면, 어부 왕은 건강을 되찾고 황무지는 다시 풍요로워진다는 전설이다. 엘리엇은 민간의 신화적·종교적 맥락을 창작에 활용해 근현대 사회가 겪고 있는 허기와 갈망, 외로움, 무분별한 성(性)적 남용을 고대 황무지에 빗대어 그려냈다. 《월간조선》이 소개한 ‘황무지’는 전체 5부 중 제1부다. 1부는 죽음과 재생에 의미를 담은 장(章)이다.
 
  그런데 만물이 소생하는 봄의 계절인 4월이 ‘잔인한’ 이유는 뭘까.
 
  겨울 언 땅을 뚫어야 어린싹이 꽃을 피울 수 있기 때문이다.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어쩌면 추억이나 욕망이 거세된 한겨울이 오히려 따뜻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인은 행복했던 과거의 독일 생활을 회상한다. 내용은 리투아니아 출신 여인이 일방적으로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행복했던 시간도 잠시, 시인의 의식은 다시 황무지로 이어지고 황무지의 구체적 이미지가 제시된다.
 
  여기에서 시인은 구약(舊約)성경 ‘에스겔’의 구절, “인자(人者)여, 너는 말하기는커녕 짐작도 못 하리라”를 인용, 나라 잃은 유대인이 겪었을 고난을 시 읽는 독자에게 상기시킨다. 이후 행에서 시인의 명상은 행복한 사랑의 노래로 이어지고, 사랑이 생의 절정 순간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황량하고 쓸쓸합니다, 바다는’이라는 절망적인 마무리로 이를 대조시키고 있다. 이것은 바그너의 가곡 ‘트란스탄과 이졸데’의 3막 24절을 인용한 것이다. 황량한 바다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들어, 잠시나마 느꼈던 사랑의 꿈이 깨어지고 다시 황무지의 현실로 돌아오는 절망감을 안긴다.
 
 
  암흑의 오지와 황무지
 
조지프 콘래드가 쓴 장편소설 《암흑의 핵심(Heart of Darkness)》.
  시 ‘황무지’를 읽자니 문득 조지프 콘래드(Joseph Conrad·1857~1924)가 쓴 장편소설 〈암흑의 핵심(Heart of Darkness)〉이 떠오른다. ‘황무지’와 상관 없는 소설이지만 절망적인 현대인의 현실 인식과 닮아 있다. 이 소설은 인간이 어느 정도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에 관한 주제를 다룬다.
 
  아프리카의 벨기에령(領) 콩고의 어느 선장인 말로는 커츠라는 오지 출장소장을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는다. 커츠를 데려오기 위해서는 콩고강 상류의 오지로 배를 몰고 가야 한다. 말로는 가는 곳마다 커츠에 대한 칭송을 듣는다. 말로는 커츠라는 인물에 환상을 품는다. 그러나 그가 직접 만나본 커츠는 전혀 다른 인간이었다. 회사에서는 가장 능률적인, 그러나 아프리카 원주민에게는 가장 잔혹한 상아(象牙) 수집상에 불과했다.
 
  커츠는 한때 ‘연민과 과학과 진보의 사자(使者)’임을 자처하며 모종의 도덕적 이념을 내면에 간직한 자였다. 그러나 식민지 수탈에 몰두하면서 정신적 타락을 겪게 된 것이다. 커츠는 말로에게 ‘야만인들의 씨를 말려라’고 써 있는 문서를 건넨다.
 
  커츠는 귀항 선상에서 “정말 끔찍하다, 끔찍해!”라는 말을 남기고 열병으로 숨진다. 고(故) 장영희 영문학자에 따르면, “정말 끔찍하다, 끔찍해!” 이 말이야말로 영미(英美) 문학에서 가장 잘 알려진 유언(遺言)이다.
 
  문명의 가면을 벗은 인간의 악마성과 19세기 제국주의, 인종차별의 광기는 불모의 공간인 ‘황무지’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시 ‘황무지’는 삶의 의미를 잃게 만드는 외로움, 공허함 등을 생생하게 그리지만, 역설적이게도 부활에 대한 기대 의식도 함께 담겨 있다. ‘황무지’와 같은 메마른 인물인 커츠가 죽음의 순간에서야 통렬한 자기 반성에 다다른 것도 희망을, 복원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4월의 가로수와 봄 유배지에서의 茶山
 
김광규(金光圭) 시인의 시집 《아니다 그렇지 않다》(1983년).
  김광규(金光圭) 시인의 시집 《아니다 그렇지 않다》(1983)에 실린 시 ‘4월의 가로수’는 머리와 팔, 다리가 잘려 토르소처럼 몸통만 남은 가로수를 그리고 있다. 어쩌면 팔과 다리가 잘린 가로수야말로 ‘잔인한 4월’의 상징이 아닐까. 토르소는 이탈리아어로 ‘몸통’을 뜻한다. 토르소는 순수한 인체의 미를 극적으로 부각시켜 드러내기 위한 장치다. ‘몸통’만 남은 가로수는 거세된 이미지를 극단적으로 상징한다.
 
  머리는 이미 오래전에 잘렸다
  전기 줄에 닿지 않도록
  올해는 팔다리까지 잘려
  봄바람 불어도 움직일 수 없고
  토르소처럼 몸통만 남아
  숨막히게 답답하다
  라일락 향기 짙어지면 지금도
  그날의 기억 되살아나는데
  늘어진 가지들 모두 잘린 채
  줄지어 늘어서 있는
  길가의 수양버들
  새잎조차 피어날 수 없어
  안타깝게 몸부림치다가
  울음조차 터뜨릴 수 없어
  몸통으로 잎이 돋는다
 
  -김광규 ‘4월의 가로수’ 전문

 
송재학 시인의 첫 시집 《얼음시집》(1988).
  송재학 시인의 첫 시집 《얼음시집》(1988)에는 기억할 만한 좋은 시가 많다. 기자는 ‘얼음시3: 다산생각’을 좋아한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7~1836)의 유배지에서 겪은 시절을 떠올리며, 봄이 왔으나 아직 마음은 겨울을 벗어나지 못한 현실을 노래한다.
 
  봄이 왔으나 현실은 ‘늑골까지 얼음이 깔리는’ 고통스러운 나날이다. ‘백일홍은 봄날이라도 어둡고/ 풀의 구절은 마른번개처럼 울린다’. 다산의 이야기지만 우리가 겪는 현실의 고통으로 인식되는 것은 바로 은유의 힘 때문이리라.
 
  한밤중에 깨어났다 꿈을 꾸다가, 기침을 하면 늑골까지 얼음이 깔리고 耳鳴의 귀에 바람이 흩어진다 結氷音은 내가 읽는 요즘의 책에도 있는데 밤의 내륙 땅에서 강진의 앞바다를 떠올린다 백일홍은 봄날이라도 어둡고 艸의 구절은 마른번개처럼 울린다 돌아보면 그의 땅에는 버린 노래들만 가득한데 청솔가지 流配地의 꿈을 되풀이 꾼다 이월 봄밤, 자전을 펴들고 짚어가는 飢民詩는 먼 곳으로 띄우는 편지처럼 적막하다 강진의 땅은 누군가 기다리는 것으로도 쓸쓸하고 물소리 울리며 강은 늘 그곳까지 흐른다 내 방의 고요도 내 그리움의 이름들도 차가운 노래로 남녘 말까지 흐른다 지금 내 몸은 새벽 추위에 있고 撰의 말들은 이 땅의 역참마다 아침이슬이나 풀씨로 머물러 있음을 본다 먼 바다 이월 해일은 그믐이면 해변 다복솔을 덮칠 것이고 흰 파도 검은 바위는 뒤엉켜 있으리라
 
  -송재학 ‘얼음시3: 다산생각’ 전문

 
 
  그래도 봄날은 간다
 
엄원태 시인의 시집 《침엽수림에서》(1991).
  그러나 4월은 신록이 새로 움트는 봄날이다. 새 생명을 꽃피우는 달이다. 엄원태 시인의 시집 《침엽수림에서》(1991)에 실린 ‘봄날은 간다’를 보자.
 
  봄이 지나서도 피지 않은 꽃에 따스한 봄바람(‘미지근한 바람’)이 분다. ‘철 지나 맺힌 꽃’을 피우려 한다. ‘따스한 봄날도 잔인하게 죽이고/ 세월은 나 돌아 돌아간다’ 해도 4월이 오면, ‘끝내 닿지 못할’ 그곳에 ‘꽃잎구름’이 머무른다.
 
  미지근한 바람이 끈끈하게 몰아쳐
  철 지나 맺힌 꽃 피우려 하네
  따스한 봄날도 잔인하게 죽이고
  세월은 나 돌아 돌아간다 하네
  가서 끝내는 닿지 못할 거기
  거기다 꽃잎구름 피우려 하네
 
  -엄원태 ‘봄날은 간다’ 전문

 
  김순애 작곡, 박목월 작시인 가곡 ‘4월의 노래’만큼 유명한 봄노래가 또 있을까. ‘4월의 노래’는 6·25전쟁이 막바지로 접어들던 1953년 봄 《학생계》(당시 잡지 주간은 朴斗鎭)가 창간 4월호를 낼 때 학생들을 위한 새 노래를 싣자는 동기에서 박목월에게 작시를, 김순애에게 작곡을 위촉하면서 탄생했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노라’는 학창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노랫말이다. 당시 6·25의 비극이 끝나지 않았지만 어린 소년·소녀를 통해 절망을 딛고 평화(봄)를 노래하려는 간절함을 담았다.
 
‘4월의 노래’를 작시한 시인 박목월.
  박목월 선생은 한 인터뷰에서 작시할 당시를 이렇게 떠올렸다.
 
  “이 노래를 만들 때 6·25 전 이화여고 재직 시 후관 앞 목련꽃 나무 밑 잔디에서 책을 읽는 여학생들의 인상적인 모습과 그들의 정서, 그리고 지루했던 피란살이와 구질스런 생활에서 해방되어 여행을 훌쩍 떠나고 싶은 유혹 등을 연상했다.”(《경향신문》 1976년 4월3일자)
 
  박목월은 ‘4월의 노래’에서 ‘돌아온 4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고 표현했다. 엘리엇의 ‘황무지’ 역시 부활에 대한 기대가 담겨 있음을 감안하면, 그래도 4월은 희망과 설렘의 계절이 아닐 수 없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4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목련꽃 그늘 아래서
  긴 사연의 편질 쓰노라
 
  클로버 피는 언덕에서
  휘파람을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깊은 산골 나무 아래서
  별을 보노라
 
  돌아온 4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박목월 ‘4월의 노래’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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