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옛 자료로 읽는 인물 근대사 〈2〉 홍명희(洪命熹)

“〈임꺽정〉, 조선에서 옥중작의 첫 기록”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스무 살 청년이 될 수 있다면… 변호사가 될까, 허생원이 될까”
⊙ “‘2508’의 번호를 붙이고 종시 미소를 머금고 앉은 홍명희를 봄에…”
⊙ “〈임꺽정〉의 연애장면을 땀을 빼다시피 하고 이리 궁리 저리 궁리 해서 쓰는데…”
  《월간조선》은 지난 3월호를 통해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을 소개했다. 육당과 함께 가장 많이 떠오르는 인물이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1888~1968)와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1892~?)다. 이번 호에는 홍명희를 소개한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월북(越北)으로 지워진 인물이 벽초다. 《조선일보》에 연재된 〈임꺽정〉은 기억해도 홍명희란 이름은 금기시했던 분단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1910년 나라 잃은 비분 끝에 자결 순국한 홍범식(洪範植·1871~1910)과 소설 〈임꺽정〉 작가인 아들 홍명희, 그리고 민족운동가이자 국학자로 이름을 알린 손자 홍기문(洪起文·1903~ 1992) 등 풍산 홍씨(豊山 洪氏) 3대(代)의 생애는 한반도가 겪은 수난과 다르지 않다.
 
  벽초는 1888년 7월 2일 충북 괴산에서 태어났다. 부친 홍범식의 고향도 괴산이다. 조상 대대로 서울 북촌에서 살던 임금의 외척 가문이었다. 다섯 살 때 천자문을, 여덟 살 때 소학을 배웠다. 열세 살 되던 1900년 참판 민영만의 딸 민순영과 결혼했다.
 
  서울 중교의숙(中橋義塾)을 거쳐 도쿄에 유학해 1906년(19세) 도요상업학교 예과 2학년에 입학, 이듬해 다이세이(大成)중학교 3학년에 다시 들어가 졸업했다. 학업성적은 늘 1~2등이었다. 학창 시절 벽초는 《서유기》 《수호지》《금병매》를 ‘밥 먹을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읽고 또 읽었다. 아버지 홍범식은 홍명희가 중학교를 마치고 대학에서 법률을 전공하기 바랐는데, 본인은 ‘미지의 세계를 연구하는’ 자연과학을 공부하고 싶어 했다.
 
  류시현이 쓴 《동경삼재(東京三才)》(산처럼 刊)에 따르면, 홍명희가 읽은 책 대부분이 문예 관련이었다. 문학작품은 자연주의 계열에서 점차 낭만주의 계열로 옮겨갔다고 한다. 침통하고 사색적인 러시아 작품을 즐겨 읽었는데 도스토옙스키 작품과 크로포트킨의 《빵의 약탈》, 프랑스 극작가인 몰리에르의 작품 등을 읽었다.
 
 
  홍범식·홍명희·홍기문 3代의 榮辱
 
벽초 홍명희가 살던 충북 괴산읍 제월리 古家의 모습이다. 사진=뉴시스
  1910년 금산 군수던 아버지 홍범식이 병탄조약에 울분을 참지 못해 객사에서 목을 매고 말았다. 아들 홍명희는 큰 충격에 빠지게 되었고 한동안 은둔하며 지내야 했다. 이후 중국과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지를 돌며 독립운동의 물적 기반을 마련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고, 집안의 몰락 소식을 듣고 식민지 조선을 떠난 지 6년 만인 1918년 7월 귀국했다.
 
  1919년 3·1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수감되었고, 집안 가세가 완전히 기울어 서울로 올라와 셋집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언론사와의 인연은 1924년부터인데 첫 직장인 《동아일보》에서 주필 겸 편집국장이 되었다. 이듬해 《시대일보》 편집국장으로 자리를 옮겨 부사장과 사장을 역임했다. 《시대일보》는 도쿄 유학 시절 알고 지낸 최남선이 발행한 신문이다.
 
  그러다 신문사 경영이 어려워져 폐간됐고 홍명희는 1926년 10월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그의 나이 39세 때였다.
 
  그는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교장직을 사임하고 상경해 1927년 2월 15일 출범한 신간회 총무간사로 활동했다. 당시 신간회는 《조선일보》가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일보》와 새롭게 인연을 맺게 되었다. 동생과 아들도 머잖아 《조선일보》 식구가 되었다.
 
  동생 홍성희는 1930년대 초반 신문사 판매부장을, 장남 홍기문은 조사부장·학예부장·논설위원 등을 거쳐 1940년 폐간 때까지 재직했다. 홍기문은 1946년 《서울신문》 편집국장으로 재직하며 《조선문화총화》(1946), 《정음발달사》(1947), 《조선문법연구》(1947) 등 국어학 관련 전문서적을 펴내기도 했다.
 
  홍기문은 1903년 9월 23일 홍명희와 민순영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벽초가 1912년 중국으로 떠나자 홍기문은 증조부에게 한학을 배웠다. 뛰어난 한문 실력을 지닌 국학자로 성장하는 데 든든한 기초가 되었다. 신식교육을 받은 아버지 벽초와 달리 홍기문은 정식으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다. 아버지를 비롯한 일가 친척의 3·1운동과 투옥을 지켜본 홍기문은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국어 연구에 뛰어들었다. 훗날 신라 향가 연구의 최고 권위자가 되었으며 월북 후 김일성대학 교수, 북한 사회과학원 원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임꺽정〉은 한국 근대소설의 기념비적 작품
 
1949년 3월 모스크바에 도착한 북한 수상 김일성(왼쪽 두 번째),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세 번째), 부수상 홍명희(네 번째)가 스탈린을 방문하기 위해 크렘린궁에 들어가고 있다.
  홍명희가 《조선일보》에 〈임거정전(林巨正傳)〉(이하 〈임꺽정〉)을 연재하기 시작한 것은 1928년 11월 21일이다. 연재 직후 장안의 화제가 되었고,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임꺽정〉은 동양문학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서양 근대문학의 성과를 섭취했다. 〈수호지〉나 〈홍길동전〉 같은 의적(義賊)소설의 계보를 이으면서 독립된 여러 이야기가 모여 대하 장편을 이루는 구성방식이 〈수호지〉와 유사했다. 민간의 야담과 야사에서 소재를 취했으며, 이야기투의 문체를 구사했으나 서술적 설명이 아니라 장면 중심의 객관적 세부 묘사를 추구한 점은 서구 리얼리즘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임꺽정〉은 봉건제도에 저항하는 백정 출신의 도적 임꺽정의 활약을 통해 조선 민중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재현한 점에서 식민지 시절의 대표적 역사소설이자 한국 근현대 소설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된다.
 
  〈임꺽정〉은 홍명희가 1929년 12월 신간회 사건으로 투옥돼 연재가 중단되고 말았다. 당시 ‘봉단편’ ‘피장편’ ‘양반편’이 연재를 마친 상태였다. 독자의 아우성은 빗발쳤고 조선총독부는 마지못해 유치장에서 계속 연재하게 했다. 하지만 연재가 어려웠던지 그해 12월 26일 302호를 마지막으로 연재가 중단되고 말았다.
 
  1932년 1월 출옥한 홍명희는 그해 12월 1일 번호를 1회부터 다시 매겨 541회까지 연재를 이어갔다. 그러나 1934년 9월 4일 두 번째 중단하고 말았다. 열흘 뒤인 그해 9월 15일 다시 연재를 시작했고, 이번에는 와병으로 1935년 12월 24일 또 중단되었다. 다시 2년 뒤인 1937년 12월 ‘화적편(송악산)’부터 연재를 재개했지만, 1939년 7월 4일 중단되었다. 이때 《조선일보》 출판부에서 《임꺽정》 1~4권이 간행됐다.
 
 
  “〈임꺽정〉, 먹기 위해 매일 쓴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
 
《조선일보》 1928년 11월21일자에 실린 홍명희의 〈임꺽정〉 연재 1회분. 삽화는 학예부 기자 안석주가 그렸다.
  일제 탄압으로 《조선일보》가 폐간(1940년 8월)되자 1940년 10월 자매지인 《조광》에 연재를 재개했으나 단 1회 게재 후 연재는 영구히 중단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광복 전 신문 연재소설로는 최장기 기록이었다. 소설에 대한 찬사도 끊이지 않았다. “조선어와 생명을 같이할 천하의 대기서”(이광수), “조선문학의 대유산”(이기영), “미증유의 대걸작”(박영희), “조선어의 일대 어해”(이효석) 등 극찬이 쏟아졌다.
 
  홍명희는 신탁통치 파동을 겪고 난 후 중간파 정당 활동을 통한 민족통일정부 수립 운동에 투신했다. 1947년 10월 노동자당도 자본가당도 아닌 중립당을 표방한 민주독립당을 창당해 당대표가 되었다. 그해 12월 중간파 정치세력을 망라한 민족자주연맹(주석 김규식)이 결성되었을 때는 정치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연석회의에 김구, 김규식과 함께 방북했다가 북한에 그대로 눌러앉았다. 북한에서 내각 부수상,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으며 1968년 사망했다.(전 10권으로 기획된 김정형의 《20세기 이야기: 1920년대》 참고·인용)
 
  《월간조선》은 홍명희라는 인물을 알 수 있는 4편의 짧은 글을 소개한다.
 
  1편은 《동광(東光)》 1926년 12월호에 실린 글로, 홍명희가 오산학교 교장 시절에 쓴 글이다. ‘스무 살 청년이 될 수 있다면’을 주제로 당대 명사의 글을 실었는데, 벽초는 “조선이 가장 크게 요구하는 청년이 되려고 노력하겠다”고 했다.
 
  2편은 《조선일보》 1928년 9월22일자 2면에 실린 소설 〈임꺽정〉 사고(社告)다. 행간을 볼 때 당시 《조선일보》도 소설 흥행을 의심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임꺽정〉이 알렉산더 뒤마의 〈몬테크리스토 백작〉보다 더 장대하다”고 강조한다.
 
  3편은 《삼천리(三千里)》 1931년 5월호에 실린 홍명희 재판의 방청기다. 홍명희는 신간회 민중대회를 주도한 혐의로 법정 구속된 상태였다. 이 방청기에선 흥미로운 사실이 확인된다. 글쓴이 ‘창랑객(滄浪客)’은 “‘사탁(社託)을 받고’ 조선총독부 간부를 찾아가 투옥 중 홍명희의 〈임꺽정〉 집필 허가를 직접 교섭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때 ‘사탁’은 다름 아닌 《조선일보》 측으로 보인다. 결국 총독부는 옥중 연재를 허락한다. 다음은 방청기 중 일부다.
 
  〈…겨우 신문소설만은 허락되어 나는 만년필과 원고지를 차입하였고 그리고 그 익조(翌朝)에 그야말로 일기가성(一氣呵成)으로 일야(一夜) 중에 다 된 5회분의 〈임꺽정〉 상편 결미원고를 찾아다가 신문에 실은 일이 있었다. 이것이 조선에서 옥중작의 첫 기록이리라.…〉
 
  4편은 《동아일보》 1928년 12월22일자 3면에 실린 홍명희 인터뷰다. 부인(婦人)기자의 ‘~습니다’ 체의 부드러운 문장에 눈길이 간다. 벽초는 인터뷰에서 “〈임꺽정〉도 내 취미와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쓴다는 것보다는 먹기 위해 매일 쓴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라고 토로했다. 일부 문자와 단어를 이해하기 쉽게 현대어 표기에 맞게 고쳤다.
 

  만일 내가 다시 스무 살의 청년이 될 수 있다 하면
  조선이 요구하는 청년
  정주(定州) 오산고등보통학교장 홍명희(洪命熹)
 
《동광(東光)》 1926년 12월호에 실린 홍명희의 ‘만일 내가 다시 스무 살의 청년이 될 수 있다 하면’.
  변호사 될 준비를 차리어 볼까요? 소(小) ‘피트’가 될라고. 영국 재상도 귀치 않으니 묵적동(墨積洞) 허생원처럼 글이나 읽을까? 8000인 자제(子弟)를 모아볼까요? 항우가 될라고. 서초오패왕도 귀치 않으니 남이(南怡) 장군처럼 시나 읊을까? 이것저것 다 그만두고 《파우스트》처럼 마가렛의 뒤를 쫓아다닐까?
 
  20세란 말에 홀리어서 당치 않은 전례를 많이 들었습니다. 간단하고 명료치 않은 대답일지 모르나 어느 모로든지 조선이 가장 크게 요구하는 청년이 되려고 노력할 것이지요.
 
  ▲출처=《동광(東光)》 1926년 12월호, 9쪽
 

  조선(朝鮮)서 처음인 신강담(新講談)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씨 작(作) 〈임꺽정〉
  안석영(安夕影) 화(畵)

 
  조선에 있어서 새로운 시험으로 신강담(新講談) 〈임꺽정〉을 싣게 되었습니다. 작자(作者)는 조선 문학계의 권위(權威)요 사학계(史學界)의 으뜸 벽초 홍명희 선생이니 이 강담이 얼마나 조선문단에 큰 파문을 줄런지 추측되는 바이며 아울러 안석영씨의 새로운 필치로 그릴 삽화(插畵)는 독자 제씨에게 나날이 경이(驚異)를 드릴 것이올시다.
 
  ◇임꺽정은 360여 년 전 명종(明宗) 때 사람이니 그는 황해도(黃海道) 태생으로 조선(祖先)의 업(業)을 계승하야 백정(白丁)이 되었습니다. 그 백정으로 있는 사이에 대대로 나려오는 기반(羈絆) 밑에서 분연히 일어나 세상을 뒤흔들게 되었으니 그때부터 그는 강도(强盜)로 자처하고 한칼에 몇 사람의 목을 베는 반면에 일개 섬약한 여자와 사랑의 꿈도 맺으며 또한 귀신같이 옥을 깨치고 나오는 등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많은 사적(事蹟)의 주인공입니다.
 
  ◇이 강담의 내용은 일찍이 조선에도 소개된 세계적 명작 ‘알렉싼더-마(알렉산더 뒤마-편집자)’의 암굴왕(巖窟王·몬테크리스토 백작-편집자)보다도 더욱 그 구도(構圖)가 크거니와 홍명희 선생의 필치(筆致)는 오히려 ‘마(뒤마-편집자)’ 유(類)의 것보다도 훨씬 장대(壯大)할 것을 미리 말씀합니다.
 
  ◇근일(近日) 중에 연재(連載)
 
  ▲출처=《조선일보》 1928년 9월22일자 2면
 
[편집자 주]
  신간회(新幹會)는 일제강점기인 1927~1931년에 활동한 사회운동단체다.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한국 현대사상 처음으로 결합한 ‘좌우합작 독립운동단체’로 평가된다.
  순회 강연단을 조직, 총파업을 지원하고 수재민 구호 활동을 펼쳤으며 외곽 조직인 근우회를 통해 여성 차별에 반대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진상조사단을 꾸리고 일제를 규탄하는 민중대회를 개최하려 했다. 준비 과정에서 허헌, 홍명희, 이관용, 조병옥 등 90여 명이 구속되는 사건이 바로 민중대회 사건이다. 당시 홍명희는 신간회 주최 제1차 민중대회 사건의 주모자로 잡혀 옥고를 치렀다.
  이 글을 쓴 ‘창랑객’은 바로 파인(巴人) 김동환(金東煥·1901~?)이다. 파인은 우리나라 근대 시문학사상 최초의 장편 서사시인 ‘국경의 밤’을 쓴 시인이자 언론인이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기자를 지냈으며, 1929년 종합잡지 《삼천리》를 간행했다. 그 역시 1930년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법정에 선 許憲, 洪命熹
  민중대회 공판 광경을 보고
  창랑객(滄浪客)
 
잡지 《삼천리(三千里)》 1931년 5월호에 실린 〈법정에 선 허헌, 홍명희〉 기사다. 최초의 장편 서사시인 ‘국경의 밤’을 쓴 파인 김동환이 썼다.
  허헌(許憲)과 홍명희와 이관용(李灌鎔), 조병옥(趙炳玉) 등 여섯 사람에 대한 민중대회 사건의 제1회 공판은 4월 6일과 7일과 23일의 사흘 동안에 경성 지방법원 제5호 법정에서 개정(開廷)되었다.
 
  이날은 우박(雨雹)과 같은 함박눈이 뿌리고 살을 에는 이른 봄, 찬바람이 방청(傍聽)으로 달려온 신간회 중요인물, 그 가족, 학생급 사회운동자들의 피부를 찔렀다. 이 눈개비 속에 옷을 젖히어가며 필자도 법정에 흡입되어 용수를 벗는 1년 3개월만의 피고들을 볼 수 있었다.(이하 21행 삭제. 검열에 의해 삭제된 것으로 보임-편집자)
 
  ×
 
  생각건대 나는 이 사건이 비합법의 또 광범위의 대중적 데모의 특질을 띠고서 행동화하려 하다가 경기도 특별 고등경찰망에 검거되려 하던 3년 전 추운 겨울에는 시각으로 전변(轉變)되던 그때 국면에 대한 충실한 보도에 의한 책임자로서 경찰부에 분주(奔走)히 드나들던 신문기자였다. 경복궁 뒤에서와 혜화문(惠化門) 큰 거리에서 시위하던 다수의 학생을 체포 착래(捉來) 경찰의 자동차가 수 없이 적연와(赤煉瓦)의 이 고등경찰청 구내(構內)에 몰려오는 것을 바라보던 우리 눈앞에는 과연 이양(異樣)의 인물 하나가 시야를 전광같이 스쳐가는 것을 붙잡었다.
 
  그것은 신간회 중앙위원장 허헌이 체포되어 바로 유치장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낭하에 몰려 섰던 다수한 신문기자들은 포리(捕吏)의 뒤를 쫓았다. 그때 허헌의 얼굴빛은 흥분되었던 듯 다소 붉었었다. 그는 혼잣말같이
 
  “사전 발각!” “사전 발각!”
 
  하는 두 마디를 혼란, 복잡한 낭하의 일우(一隅·한쪽 구석-편집자)에 던지고 몸을 끌리어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는 사건이 이미 결정적 단계에 들어간 것을 직각(直覺)하고 또한 여러 가지의 신문기자적 육감이 돌던 제 양상이 급각도로 상향 혹은 하향선을 돌주(突走)하고 있음을 깨닫고 본사에 급보하는 전화간(簡)을 잡으려 할 때에 계속하여 홍명희, 권동진(權東鎭), 한용운(韓龍雲), 이종린(李鍾麟), 오화영(吳華英), 박희도(朴熙道), 이관용, 조병옥 등 다수인이 허헌과 같은 궤도를 밟은 광경을 보았다.
 
  그러자 곧 대중의 동향을 경계하기 위한 경관대의 시중행렬이 유리창 너머로 바라볼 수 있었다.
 
  오늘 이 법정에선 허헌은 검거 당시 낭하에서 보던 그 건강이 없어보였다. 그는 옥중에서 신경쇠약과 비종(臂腫·팔 부스럼-편집자)과 위병으로 고생하였다는 소식과 같이 안색이 창백미를 띠었고 광대뼈의 돌출조차 알아볼 만치 살이 빠졌었다. 검은 두루마기에 싼 육체도 전일의 비대가 없었다. ‘1504’번이라는 수만 명 피고가 그리하였던 모양으로 그의 이 ‘세계에’ 국한된 대명사였다. (중략)
 
  홍명희는 그때 《조선일보》에 유명한 〈임꺽정〉을 집필하고 있었다. 임꺽정은 ‘데모’로써 기성 권위에 반항하려던 이조(李朝) 중세기 시대의 야사 속 두각을 나타낸 흥미의 인물이었다. 그때 《동아일보》에서는 춘원 이광수씨를 움직이어 김종서 등 사육신(死六臣)의 충의로 일관되던 저 단종유제(端宗幼帝)의 애사(哀史)를 집필케 하여 독자에 대한 최대의 선물로 선전에 열중하던 때이므로 《조선일보》 또한 역사에 정통하고 그 다독(多讀)과작(寡作)으로 지식사회에 일흥이 크던 벽초 홍명희를 움직이어 〈임꺽정〉을 쓰도록 하여 경쟁의 총(總) 존재로 하였던 것이다.
 
  필자도 가끔 〈임꺽정〉의 경개(梗槪·줄거리-편집자)와 집필의 의도를 홍명희로부터 들었다. 바로 검거되기 전날에도 상편의 결미가 가까워졌던 그 전(傳) 주인공의 인물 창조의 단면을 들었다. 그의 의도는 어디에 있었던지 알 수 없었으나 나는 이 작(作)이 독일 실러의 〈윌리엄 텔〉이 되지 않는가 하는 예감을 받았다.
 
  조선사 속에는 특출한 성격과 행동을 가진 극적 인물이 많았다. 고려 신종 원년에 노예이던 만적(萬積)이 북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같은 학대의 추적(推積)에 묶여 지내던 동료를 만나서 결국 흥국사 절간의 밀의(密議)까지 있었던 뒤 계급투쟁의 첫 반기를 들었다가 그만 사전 검거가 되어 예성강에 침사(沈死)의 형을 당하던 일이라든지 최제우(崔濟愚), 전봉준(全琫準), 이인좌(李麟佐) 등 모든 그네의 행위는 전기로나 희곡으로나 벌써 구성되어 있어야 옳았을 것이다. 그런데 〈임꺽정〉은 이 여러 소재 중에서도 사건의 흥미와 인물의 특별로 출중한 것이었다.
 
  조선 사회가 과(課)하여준 일(一)의무로 알았음이든가. 용이(容易)히 붓을 잡지 않은 그는 이 소설만에는 전심력을 들이는 모양으로 아침마다 신문사 급사를 문전에 세워두고 탈고하는 각고정려(刻苦精勵·몹시 애를 쓰고 정성을 들임-편집자)를 보이었다.
 
  당시 그의 계속 집필은 둘이었다. 이 〈임꺽정〉 외에 또한 《삼천리(三千里)》에 자서전을 연재하여 2회에 마쳤다. 제1편은 명문의 전통적 공기를 바수어버리고 서울로 동경으로 신문명 섭취로 나섰던 유소년 시대 기록이고, 제2편은 때마침 극동(極東)을 싸고도는 풍운을 타고서 해외에 고영(孤影)을 이끌던 기록이었다.
 
  그리고 그는 장차 상해(上海), 해삼위(海參威·블라디보스토크-편집자), 남양(南洋) 등지로 경세의 포부(抱負)를 펴려 전변(轉變) 생활하던 실제(實際)를 기(記)하야 제3편을 짓겠다고 나에게 굳게 약속하였다.
 
  그가 이 자서전을 쓰게 된 의도 또한 어디 있던가. 그는
 
  “루소의 참회록을 본받아 과거를 적나라(赤裸裸)하게 고백할까? 심판에 증거로 제공할 것은 꿈에도 생각지 않은 일이지만은 루소의 적나라도 철저하지 못하다거니, ‘루소’만 한 결심도 없는 위인이 섣불리 붓질하다가는 남의 웃음거리만 될 뿐이고 ‘니체’의 ‘에케 호모’(Ecce Homo·니체의 예수를 다룬 책 제목-편집자)를 흉내 내어 철인(哲人)적 기염(氣焰)을 토할까. 알프스 고봉에서 고봉으로 뛰엄질 할 주체가 아니니 황씨 각 씨의 실례 하나를 더할 뿐이다.
 
  나는 크로포트킨의 〈혁명가의 지낸 생각〉을 보았고 트로츠키의 〈탈출기〉를 보았고 편삼잠(片山潜)의 〈자서전〉을 보았고 또 계대삼(堺大杉) 등 인물의 〈자서전〉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중략) 오늘날 나의 몸이 50여 년간에 이럭저럭 수다(數多)한 해피(解皮)에 머물렀으니 그 해피들 중에 크게 보이는 것만을 주워 보라고 한다”
 
  라고 하여 과거 40년간 역사의 과정과 같이 그 사건결과의 한 중요한 인자로 자신이 왕래하던 모든 기록을 붓에 올릴 것을 암시하였다.
 
 
  ‘경찰부 수뇌자를 訪하야 신문소설 집필을 허락’
 
  그러던 것이 이번 돌연한 검거로 〈임꺽정〉과 자서전이 모두 중단하게 되었다. 나는 사탁(社託)을 받고 검거 익일(翌日) 경찰부 수뇌자를 방(訪)하야 검거 중 집필의 허가를 교섭하였다. 그 결과 겨우 신문소설만은 허락되어 나는 만년필과 원고지를 차입하였고 그리고 그 익조(翌朝·다음 날 아침-편집자)에 그야말로 일기가성(一氣呵成·한 기분으로 웃다-편집자)으로 일야(一夜) 중에 다 된 5회분의 〈임꺽정〉 상편 결미원고를 찾아다가 신문에 실은 일이 있었다.
 
  이것이 조선에서 옥중작의 첫 기록이리라.
 
  나는 지금 허헌보다 2심이 상승(上昇)인 ‘2508’의 번호를 붙이고 종시 미소를 머금고 앉은 홍명희를 봄에 그때 일이 머리를 스치는 것을 깨달았다. 〈임꺽정〉은 홍명희가 썼거니와 홍명희전은 누가 쓸 것인가. 실천이 즉 기록이 되어 시대가 쓰려 함인가?
 
  그의 안색도 창백하였다. 그의 자부 심은숙(沈恩淑)씨나 장자 홍기문(洪起文)씨, 사제(舍第) 홍성희(洪性喜)씨 등 법정 일우에 돌려앉은 친족의 얼굴에는 애약(哀弱)에 불안해하는 빛이 보임이 당연하였다.
 
  그도 비종으로 고생하더란 말을 들었다.
 
  우리는 법관이 두발봉봉의 이관용더러
 
  “피고는 형벌을 받은 일이 있는가.”
 
  “없소.”
 
  “피고의 생활상태는 어떠한가.”
 
  “과히 군색하지 않소.”
 
  “피고는 일찍 동경 제4중학에서 수업하였는가.”
 
  “그렇소.”
 
  “피고는 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지.”
 
  “그렇소.”
 
  “피고는 영국 우진(牛津·옥스퍼드-편집자)대학에서 역사를 연구하였다지.”
 
  “그렇소.”
 
  “피고는 서서(瑞西·스위스-편집자) ‘취리히’대학에서 심리학을 연구하고 독일 백림(白林·베를린-편집자)대학에서 수학하였다지.”
 
  “그렇소.”
 
  “조선에 돌아와서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있었다지.”
 
  “그렇소.”
 
  “피고는 《현대평론》 잡지와 《조선일보》 기자로 있었다지.”
 
  “그렇소.”
 
  “피고는 신간회…”
 
  하다가 치안방해로 우리들 방청인이 법정 외에 몰리어 나올 때까지 홍명희는 늘 미소로 시종하였었다. 여기까지 이르매 홍명희에 대한 이 기술은 더 나가지 못함이 전항(前項) 허헌과 같다.
 
  민중대회 사건, 그는 근래에 가장 강렬한 ○파를 남긴, 기억되는 사건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다만 허헌, 홍명희, 기타 이관용, 조병옥 등 여러 사람이 신미년 4월 9일에 경성 지방법정 제4호 법정에 섰더란 사실을 보도함에 그쳐두기로 하자.
 
  ▲출처=《삼천리(三千里)》 1931년 5월호, 14~16쪽
 

  서재인 방문기 (12) 벽초 홍명희
  심각한 학자생활
  제일 주창이 검박과 겸손

  婦人기자 崔義順
 
《동아일보》 1928년 12월22일자 3면에 실린 〈서재인 방문기 (12)〉 벽초 홍명희 기사다. 婦人기자가 썼다.
  시계가 열두 시를 바라볼 쯤이었습니다. 항상 복작복작 하는 종로 4정목(四丁目) 네거리 근처에서도 더욱이 빽빽이 들어선 상점들 틈에 있는 듯 없는 듯이 끼여 있는 좁은 골목 안에서 기자는 홍명희(洪命熹)씨 집을 찾았습니다. 씨가 누구에게든지 “군자님”이라는 별호를 받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기자는 문안에 들어서자 눈에 띄는 모든 것마다에 뜻 있는 해석을 아니 붙일 수 없었습니다. 몇 대(代)째 전해 내려온 듯이 보이는 서적만으로 모여진 듯한 마루에 우뚝 서 있는 책탁자, 아주 고물(古物)로 보이는 방에 놓인 문갑, 많지 않은 세간 틈틈이 자리를 잔득 차지한 후락한 책들, 어느 것 치고 값나가 보이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옛 학자의 살림살이 모형을 고대로 그리지 않고 있는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씨의 겸손한 태도와 부드러운 듯하고도 엄한 기운이 도는 음성에는 옆에 있는 자로서 많은 느낌을 일으키는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서재 사람이 무엇입니까. 아무 값없는 사람으로서 날마다 되는대로 생활을 계속하고 있을 뿐이니 어디 사는 의미가 있으며 서재인의 자격이 무엇에 있겠습니까. 이 무서운 추위에 멀리 찾아오신 손의 대접은 아닙니다마는 나는 서재인 방문기 틈에 끼지 마십시오. 과연 부끄럽습니다”
 
  하는 씨의 진정에서 우러난 듯한 첫 말이 기자에게는 더 한층 보배롭게 고상하게 감촉되었습니다. 이때에 기자는 다만 “선생께서 그렇게 사양하신다면 사실 어떤 분을 찾아뵈어야 옳습니까. 한마디 선생님과 이야기하고 가면 만족하겠습니다” 할 뿐.
 
  “글쎄요. 참 망단한 생각만 납니다. 평시에 너무 어지러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요사이는 더욱이 그렇습니다. 유행하는 말로 ‘타락’했다고 할런지요. 도무지가 여의치가 못해서 순전히 돈 한 가지에, 즉 생활난에 오로지 정신을 뺏기고 있으니 기가 막힙니다. 전일과 같이 규율 있게 독서도 못할 뿐 아니라 오랫동안 내 품에 두었던 좋은 책들도 무수히 팔아먹었습니다. 겨우 선조어른들의 필적이나 인(印) 베낀 것쯤 남겨두고 앉었지요. 요사이 신문에 기재되는 〈임꺽정〉도 내 취미와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쓴다는 것보다는 먹기 위해서 매일 쓴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입니다. 과연 한심한 세태를 만났지요. 너나할 것 없이….”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더 한층 푹 숙이는 씨의 감개무량한 표정! 씨는 현 조선인 학자의 설움을 철저히 맛보고 있는 것같이 살펴졌습니다.
 
  “그러나 소위 예술가, 즉 문학가 그리고 착한 자들의 생활은 예로부터 물질적으로 궁하지 않습니다” 하고 기자는 이야기를 감히 돌리자 씨는 “과거 역사가 증명하는 것과 같이 공부하는 자가 물질에 빈궁한 것은 필연적 사실이라 하는 것도 과히 망말은 아니겠지요” 하며 다시 침묵상태에 잠기는 듯 여기서 기자는 목소리를 변하고 어조를 바꾸어 “선생님, 소설 써 나가시는 데 대한 감상을…” 하고 안타깝게 조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때에 씨도 더욱이 침울한 기분에서 빠져난 듯 “감상이랄 것은 별로 없습니다마는 매우 우스운 일이 하나 있습니다. 소설을 세상에 내놓으면 왜 흔히 연애서찰이 여기저기서 들어옵니다. 혹은 그 소설모델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로 독자들이 서로 떠든다고 하지요. 그런데 나로 말하면 아름다운 글에 솜씨 익은 젊은 소설가와 다름으로 그러한 재미는 못 봅니다마는 그 대신 집에서 은근히 웃음을 참지 못할 지경에 있습니다. 소시 때에 당해 보도 못하던 연애장면을 땀을 빼다시피 하고 이리 궁리 저리 궁리해서 쓰는 것인데 그것이 집안사람들은 물론 일가에서도 일종의 웃음거리가 됩니다 그려! 아 어느 날인가 내가 이 방에서 듣자니까 우리 집 작은 아들놈이 하는 말이 ‘어머니, 아버님이 집에서는 대범하시기 짝이 없으시지만 밖에서는 실없는 일을 많이 하시는 모양이지요!’ 합니다 그려. 그때에 내 아내는 급히 나온다는 대답이 걸작입니다. ‘아, 참 그렇더라. 아마 다른 여자와 그렇게 해 보신 일이 있게 그럴 듯하게 잘 쓰시는 것이지?’ 하는 것이 매우 의심 쌓인 말투이었어요. 내가 밖에 나간 줄들만 알고 크게 맘 놓고 떠들다가 고만 내 기침소리에 혼들이 났지요” 하며 씨가 점잖게 웃을 때 기자 역시 말보다 솟치는 웃음이 먼저 앞을 섰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눈물겹도록 심각하고 재미있게 어우러져 가던 씨와의 대화가 별안간 “신문사에서 원고 가지러 왔습니다”하는 거친 아(兒)녀석 목소리에 무참히 깨어지며 기자는 씨의 공순한 거동과 유한 목소리를 뒤에 남기고 돌아서게 될 때 “아… 남을 높이고 자기를 낮추시는 분! 어디까지 서재인 타입! 참 학자의 집!” 이렇게 가만히 혼자 중얼거릴 뿐이었습니다. (끝) (사진은 서재의 홍명희씨)
 
  ▲출처=《동아일보》 1928년 12월22일자 3면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02104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2020년4월부록
정기구독 이벤트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