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陰地의 戰士들

엄상익 변호사가 경험한 정보기관 〈1〉‘서소문 양산박’에 모인 변호사들

글 : 엄상익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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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박종철 사건’ 무렵 서소문 신기남 변호사 사무실에서 문학수업으로 소일
⊙ 신기남, “남자 직업 중에서 가장 멋있는 건 국회의원”
⊙ 박원순, “시민단체, 7년만 활동하면 뭔가 손에 잡힐 것 같아”
⊙ 문학수업 위해 첩보소설 많이 읽어… “우리나라 정치의 핵심은 정보기관, 정보기관에 들어가 몇 년간 취재하면 유익할 것”이라는 신기남의 말에 정보기관에 관심

嚴相益
1954년생. 경기고, 고려대 법대 졸업 / 사법고시 24회, 사법연수원 15기 수료 / 국가안전기획부 정책연구관, 법무법인 ‘정현’변호사 역임. 現 엄상익법률사무소 변호사
국가정보원 청사 전경. 국가정보원의 前身은 국가안전기획부로, 과거 서울 남산에 위치해 있었다.
  연재를 시작하며
 
  33년 전 변호사이던 나는 비밀정보조직을 소재로 한 소설에 푹 빠져 있었다. 문학적 호기심은 돈키호테처럼 정보기관의 문을 두드리게 만들었다. 절벽 위에 지어진 산성(山城) 같은 그곳의 내부는 어떤지 궁금했다. 권력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정보기관의 내부를 한 번쯤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높은 담 아래 닫혀 있던 쪽문이 우연히 열렸다.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가게 됐다. 그곳에는 ‘우리는 음지(陰地)에서 일하고 양지(陽地)를 지향한다’는 구호가 붙어 있었다.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배의 안전한 항해를 위해 보이지 않는 전쟁과 희생이 전개되고 있었다. 신분을 위장한 첩보원들이 목숨 걸고 평양으로 가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고독 그 자체인 무인도에서 몇 명의 요원이 북에서 오가는 통신을 감청하기도 했다.
 
  신분을 숨긴 정보관들이 세계 각국으로 퍼져 대한민국을 위한 공작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국가에 고철회사를 차려 그 속에 미국의 무기를 숨겨 들여왔다. 그걸 분해해 자동소총도 만들고, 장갑차와 탱크까지 만들었다. 군(軍)은 평화 시에 수동적인 입장이지만 정보조직은 항상 총성 없는 전쟁 상태였다.
 
  북한의 민간 저항조직을 배후에서 지원해 독재자를 제거하려는 공작 임무가 수행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요원들의 죽음이 뒤따르기도 했다. 정보기관은 국내에서는 병균(病菌)을 잡아먹는 백혈구(白血球) 역할을 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곳곳에는 자유민주주의보다는 사회주의를 원하는 존재들이 있다. 공산주의 시각에서 그들은 혁명가이지만 민주사회에서 그들은 법치주의와 체제를 부인하는 파괴자들이다. 그들에게 소리 없이 따라 붙어 세상에 먼지를 날리지 못하게 하는 정화(淨化) 기능을 수행하는 게 정보조직의 역할이기도 했다.
 
  세계의 어느 나라나 정보조직은 집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연장처럼 절대적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정보부는 태생부터 ‘기형아’인 측면이 있다. 양날의 칼 같은 위험성을 가진 정보조직은 철저한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박정희 전 대통령은 혁명정권을 유지하고 국가 발전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중앙정보부(정보부)를 정치에 악용(惡用)했다. 대통령의 눈과 귀에 그쳐야 할 정보조직이 대통령의 주먹과 몽둥이 역할까지 했다. 국민의 피와 땀인 세금을 따로 정보부 내에 빼돌려 정치인과 관료를 부패시키기도 했다.
 
  핵무장을 한 북한과 치열한 정보전을 전개해야 하는 상황에서 무력화(無力化)된 정보기관은 존재 의미가 없다. 정보부가 아니라 ‘정치부’ 역할을 해온 그동안의 원죄(原罪) 탓에 정보기관의 필요성조차 제대로 항변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나는 33년 전 국가안전기획부 정책연구관으로 근무하면서 ‘바람직한 정보기관’이라는 프로젝트를 받아 연구했다. 정보조직의 문제점들을 광범위하게 파악하고, 일본의 내각정보조사실과 미국의 CIA, FBI를 방문하기도 했다. 정보기관은 새로운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기관으로 다시 태어나 보이지 않는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 세상을 보는 눈이 없으면 아무리 강건한 육체라도 무기력하다.
 
  정보조직은 국가의 눈이다. 다른 국가의 정보기관과 비교해 경쟁력 있는 조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여기 연재하는 글들은 내가 그 내부에서 보고 듣고 체험한 사실 중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에세이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당시 정보조직이나 기밀 자료 같은 것은 비밀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사람 이름이나 직책도 그들을 위해 극히 예외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밝히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인터뷰하거나 많은 대화를 나눈 정보조직의 책임자나 정치인도 밝히지 않았다.
 
  다만 신빙성을 위해 밝힌 경우가 있다. 반면 정보부의 정치공작이나 선거에 관여한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아는 대로 공개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한 ‘고발의 의미’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문재인 정권의 적폐청산 과정에서 구속 기소된 전직 국정원장의 변호를 맡은 적이 있다. 전직 국가안전기획부장이나 국정원장을 만나 여러 시간 얘기를 듣기도 했다. 그들의 회고록을 교열도 해주었다. 국가 안전을 위해 존재하는 정보기관과 그 기관을 움직이던 사람들의 비리는 분리되어야 한다. 평생을 감옥에 있는 사람만 변호하다가 이번에는 정보기관을 변호하게 됐다. 동시에 ‘정치 관여나 공작의 죄(罪)’에 대해서는 엄중하게 지적하게 됐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인다. 그곳 문을 두드릴 때 동기를 묻는 담당자에게 나는 “정보조직을 구경하고 싶어서”라고 분명히 말했다.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보았을 때 책임자에게 말했다. “공작하지 마세요. 제가 기억할 겁니다.” 마지막 정보조직을 나올 때 비밀선서를 담당하는 이에게 “먼 훗날 그곳에 있던 기억이 떠오를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30년이 흘렀다. 나는 이 글을 양심이 시키는 대로 쓴다.
 
 
  인권변호사
 
필자의 고교(경기고) 선배이자 사시(司試) 동기인 신기남 전 열린우리당 의장.
  1987년 2월 5일 오전 10시경이었다. 며칠 전 내린 눈이 녹으면서 서소문 거리는 질척거렸다. 거리 한구석에는 먼지 섞인 눈덩이가 보였다.
 
  나는 무거운 걸음으로 신기남(辛基南·전 열린우리당 의장) 변호사 사무실로 가고 있었다. 이틀 전 문득 고시 동기인 신기남 변호사가 떠올랐다. 그는 고등학교 선배이기도 했다. 언젠가 그와 함께 먼지가 날리는 예비군 훈련장에서 총을 어깨에 걸치고 나란히 앉아 쉬고 있을 때,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사법연수원을 뒤늦게 가니까 말이야 판·검사 출신 교수들이 한심해 못 봐주겠어. 자기 틀 속에 갇혀 살아오면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그게 최고의 성공인 줄 아는 거야. 철학도 없고 사회의식이나 국가관도 없어.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인데 검은색 법복(法服)보다는 무지개처럼 여러 빛깔로 사는 것도 괜찮지 않겠어?”
 
  그는 고지식하고 단순한 내게 다른 삶을 사는 방법을 암시(暗示)해주었다. 그는 뜻이 맞는 두 명의 연수원 동기생과 함께 은행 빚을 얻어 법률사무소를 차렸다. 전관예우(前官禮遇)나 뇌물로 오염된 법조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인권변호사의 기치를 내건 사무실이었다.
 
  나는 어느새 중앙일보사 건너편에 있는 우중충한 낡은 빌딩 앞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갔다. 개인 법률사무소들의 이름이 붙어 있는 안내판이 보였다. 박원순(朴元淳·현 서울시장) 변호사 사무실의 아크릴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고등학교 후배였다. 박원순 변호사는 길 건너편 명지빌딩에 사무실을 낸 조영래(趙英來) 변호사와 함께 부천경찰서 성(性)고문 사건 등을 처리하면서 인권변호사 길을 걷고 있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필자의 고교 후배로 한때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서 내렸다. 형광등이 희미하게 비치는 어두침침한 복도에 회청색 페인트를 두껍게 칠한 철문이 보였다. 철문 중앙에는 ‘신기남 주수창 이원영 합동법률사무소’란 작은 간판이 붙어 있었다. 사무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소박한 나무책상이 보이고 여직원의 타이프 치는 소리가 허공에서 점으로 흩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책상 위에 그날 조간(朝刊) 신문이 펼쳐져 있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추도식 전면봉쇄’
 
  큼지막한 머리기사였다. 박종철이란 대학생이 물고문을 당하다 죽어 여론이 들끓고 있었다. 고교 선배인 신기남 변호사 방에 들어가 탁자에 마주 앉았다.
 
  “어디 일자리나 사무실을 구해야겠는데 잠시 신세 좀 집시다.”
 
  “이원영(李源榮·17대 국회의원) 변호사가 쓰던 방이 있는데 그 방을 쓰시오.”
 
  그가 선선히 허락했다.
 
  “왜 이원영 변호사 방이 비었죠?”
 
  이원영 변호사는 연수원 동기면서 고교 1년 선배이기도 했다.
 
  “도서관에 다니면서 좀 더 책을 읽고 내공을 쌓겠다며 잠시 변호사 일을 그만뒀어. 변호사를 하는 것보다 대림동 쪽 공단 노동자가 많은 곳에 사무실을 내서 노동운동을 하고 싶다네.”
 
 
  “국회의원 배지는 로마로 통하는 길”
 
  나는 지난 1년간 국회의원 사무실에서 일했다. 단번에 법률사무소를 하기보다는 좀 더 실무를 경험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였다. 당시 그 국회의원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강원도 깡촌놈이야. 서울에 와서 대학을 졸업하고 고시공부에 전념했지. 합격하고 판사가 됐어. 그렇지만 내 목표는 대법관이 아니야. 그보다 더 높은 거야. 나는 정치를 꿈꾸었어. 그래서 일부러 고향의 판사로 지원했지. 고향에서 선거민들을 도우면서 때를 기다렸지.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고 새로 들어선 정권은 정당을 만들고 참신한 인물들을 끌어들였지. 그게 내게는 기회였던 거야. 내가 벌써 2선 의원이고 내무위원회의 간사가 됐어.
 
  엊그제 대통령 각하를 뵈었는데 나보고 지역구에서 아예 아성(牙城)을 쌓으라는 거야. 내가 각하께 지역구의 숙원사업을 얘기했지. 그걸 해결해줘야 표가 나오는 거잖아? 그랬더니 각하께서 그 자리에서 메모 한 장을 써주시더라고. 보니까 ‘70억원을 지급할 것’이라고 썼어. 정말 화끈한 대통령이시지.”
 
  “정치인이란 건 뭔가요?”
 
  내가 물었다.
 
  “국회의원이란 건 말이야. 스타나 탤런트와 비슷한 점이 있어. 인기를 먹고 사는 거야. 겉으로는 권력을 가지고 강한 것 같지만 아주 조심해야 해. 남과 싸우면 오히려 손해 나는 경우가 많아. 그리고 탤런트들이 텔레비전이나 신문에 조금이라도 더 나오기를 바라듯이 우리 정치인도 정치부 기자들과 그런 공생(共生)관계를 가지게 되지. 나쁘게 나와도 정치인은 알려져야 해.
 
  이 국회의원 배지가 뭘 의미하는지 아나? 자네는 뭘 모르겠지만 이건 로마로 통하는 길이야. 언젠가는 로마로 가는….”
 
  그는 대통령을 희망하는 것 같았다. 그 후로 그는 승승장구했다. 당대표를 거쳐 대통령 후보까지 갔다.
 
 
  ‘병아리’ 변호사의 문학수업
 
  신기남 변호사의 사무실 구석방으로 옮긴 나는 매일 아침 출근하면 소설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병아리’ 변호사에게 사건을 의뢰하러 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세일즈맨처럼 영업을 뛴다고 사건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다. 강가에서 낚시를 드리운 사람같이 인내하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변호사를 하다가 정치 쪽으로 가는 수가 많았다.
 
  나는 조용한 방에 앉아서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시장에 가서 식재료를 사는 것같이 문학의 준비 단계였다. 책을 읽으며 좋은 문장은 노트에 베껴놓으면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건 사온 채소를 다듬어 냉장고에 보관해두는 것과 흡사하다고 할까. 그런 느낌이었다. 변호사라는 자격증을 생존도구로 해서 목구멍에 풀칠을 하고, 문학은 세속의 때를 묻히지 않고 신성하게 문학의 제단에 바쳤으면 했다.
 
  그 무렵 ‘정보기관’을 소재로 하는 추리소설도 많이 읽었다. 그 속에는 또 다른 다이내믹한 세상이 존재했다. 제도와 법을 떠난 힘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어느 날 신기남 변호사가 방문을 열어보더니 한마디 했다.
 
  “어떻게 여유 있게 문학책을 볼 수 있어? 난 한 달 한 달을 넘기가 힘든데….”
 
  그는 식구뿐 아니라 형제들까지 도와주어야 하는 것 같았다. 나 역시 형편이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어머니와 고등학교 다니는 여동생 그리고 아내와 아들딸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이었다. 그렇지만 어려서부터 가난에 젖어온 내게는 가난이 없었다.
 
 
  조영래 변호사
 
고(故) 조영래 변호사는 인권변호사의 대부(代父)로 민주화의 상징과 같은 인물이었다. 사진은 1988년 1월 30일 성명서를 낭독하는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 피해자 권인숙씨와 이를 지켜보는 조영래 변호사(오른쪽).
  그 동네 변호사들은 점심시간이면 식당에서 저절로 얼굴이 마주치는 경우가 많았다. 같은 빌딩의 바로 위층에는 박원순 변호사가 있었고, 길 건너편에는 당시 우리 같은 젊은 변호사들의 우상(偶像)인 조영래 변호사가 있었다. 민주화 투쟁을 하던 조영래 변호사는 오랫동안 수배를 받고 도피생활을 하다가 뒤늦게 법률사무소를 열었다. 양산박(梁山泊) 같은 그의 사무실에는 여러 후배가 모여들었다. 김앤장을 그만둔 천정배(千正培·전 법무부 장관) 변호사도 와 있었다. 천정배 변호사는 군대 동기로 나와 같이 보초를 서기도 했다.
 
  나는 조영래 변호사에게 혼이 난 적이 있다. 동부검찰청에서 검사직무대리를 할 때였다. 당시 내가 맡은 사건에 그가 선처를 부탁하러 왔다. 나는 사건 처리 기준을 말하며 곤란하다고 했다. 철없이 조금 건방진 태도를 보였다.
 
  “큰 권세를 가지셨구먼….”
 
  그가 직설적으로 한마디 했다. 그러고 나서 내게 이런 말을 덧붙였다.
 
  “나도 말이야 뒤늦게 검사직무대리란 실무교육 과정을 거쳐봤어. 매일 아침이면 빨간 딱지가 붙은 기록과 함께 수갑과 포승에 묶인 피의자들이 앞에 오지. 그들에게 수갑과 포승을 풀어주고 담배 한 개비나 종이컵에 커피 한 잔 주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우리는 먼저 그런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 순간 자각 증세 같은 어떤 울림이 왔다.
 
 
  시민단체 꿈꾼 박원순
 
서울대 법대를 나오고 법무부 장관을 지낸 천정배 대안신당 의원은 필자의 군대 동기이다.
  점심시간 냉면집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구석 자리에 박원순 변호사가 먼저 와 있어 우리가 함께 앉았다. 신기남 변호사가 입을 열었다.
 
  “나, 가사를 써왔어. 해방 후 나온 노랫말들을 공부했지. 얼마 전에 가사를 써서 유명 작곡가 최종혁씨에게 곡을 만들어달라고 맡겼어. 그 노래를 방송국의 〈가요 톱10〉에 들어가게 하려고 작업하고 있어. 그리고 〈여의도 법정〉이라는 시사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기로 했어. 사회문제에 대해 패널들이 토론하는 데 사회자 노릇을 하는 거야. 괜찮을 것 같은데….”
 
  신 변호사는 끼와 에너지가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우리 아버지는 지리산 공비를 토벌한 경찰사령관이었어. 아버지는 인근 지역의 작전에 참여한 박정희보다 더 실질적인 힘이 있었지. 한번은 마을에서 개를 잡아 아버지가 사령관인 부대에 바친 일이 있었어. 술과 고기를 좋아하는 박정희가 그 보급품을 자기 부대에 나누어주지 않자 심술이 나서 아버지 부대에 총을 쏘기도 했대. 그때 아버지 계급이 경무관이었어. 이승만 대통령의 경호실장(경무대경찰서장)인 곽영주도 경무관이었지. 그렇지만 나는 남자 직업 중에 가장 멋있는 건 국회의원인 것 같아.”
 
  그의 지향점인 것 같았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주 변호사가 끼어들었다.
 
  “법원 주변에 사건 브로커가 있듯이 국회의원도 지역마다 브로커가 있잖아? 선거를 여러 번 치르면서 지역 조직을 장악하고 있지. 그럴듯한 인물만 나오면 자기네가 선거운동은 도맡을 테니까 공천만 받아오라는 거야. 결국 공천도 선거운동도 돈인데 우리는 아직 그럴 자금이 없잖아.”
 
  “그러면 우리 젊은 변호사끼리 당을 하나 만들어야겠네. 가칭 정의당이라고 하면 어떨까.”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박원순 변호사가 말했다.
 
  “형님들, 저는 말이죠, 그동안 《역사비평》이라는 잡지도 만들어보고 나름대로 여러 활동을 해왔잖아요? 그런데 요새 생각하는 건 시민운동을 한번 해보면 어떨까 해요. 아직 변호사라는 직업이 지성과 돈을 상징하는 직업이라 괜찮은 편이지만, 그런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최소생계비 정도로 버티면서 7년만 활동하면 뭔가 손에 잡힐 것 같아요.”
 
  박원순 변호사는 다른 길을 모색한 것 같았다. 신기남 변호사가 뜬금없이 나를 보면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인권운동이다 뭐다 하는데, 사실 우리나라 정치의 핵심은 정보기관이야. 여당보다 힘이 센 또 다른 정치세력이지. 정보기관을 알면 많은 걸 깨달을 거야. 참, 엄 변호사 보니까 첩보소설을 많이 읽던데 정보기관에 들어가 몇 년간 취재하면 아주 유익한 경험이 되지 않을까? 많은 걸 얻을 수 있을 거야.”
 
  그들은 둔한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그 후 신기남 변호사는 국회의원이 되고 노무현 대통령 때는 여당의 대표가 됐다. 박원순 변호사는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를 하다가 서울시장이 됐다. 사무실에서 구로공단으로 옮긴 이원영 변호사 역시 금배지를 달았다. 그 무렵 나는 문학변호사가 되기 위한 첫 체험 영역으로 정보기관의 내부로 들어갈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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