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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사상 크로스 〈8〉

한비자와 마키아벨리 3

인간이여, ‘운명의 女神’과 싸워라!

글 : 임건순  동양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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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韓非子, ‘상황과 조건’을 의미하는 ‘勢’ 개념 도입… ‘자연의 勢’와 ‘人爲의 勢’
⊙ 군주는 仁義나 王道정치보다는 賞罰을 독점해야
⊙ 마키아벨리의 비르투(Virtu)는 ‘人爲의 勢’, 포르투나는 ‘자연의 勢’에 해당
⊙ 한비자는 ‘人爲의 세’, 마키아벨리는 ‘비르투’를 강조… 정치적 행동주의 역설했다는 점에서 공통돼

임건순
1981년생. 서울시립대 행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수료 / 저서 《한비자, 법과 정치의 필연성에 대해서》 《제자백가 인간을 말하다》 《묵자: 공자를 딛고 일어선 천민 사상가》 《손자병법: 동양의 첫 번째 철학》 《생존과 승리의 제왕학 병법노자》 《제자백가 공동체를 말하다》 《순자: 절름발이 자라가 천 리를 간다》 등
포르투나는 흔히 ‘女神’의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성패(成敗)와 흥망(興亡)은 어디에서 갈릴까? 많은 이는 운(運)을 말하곤 한다. 실력과 노력, 집념과 의지보다는 운에서 갈린다고 하는데, 그래서일까?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고 한다. 운이 70%는 좌우하고 그 운이 노력을 압도한다고 하는데, 한비자(韓非子)와 마키아벨리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 운보다는 행위와 의지라고, 운칠기삼이 아니라 기칠운삼(技七運三)이라고.
 
  먼저 한비자는 주어진 상황과 조건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상황과 조건을 말하면서 인간의 노력과 의지를 말했다. 그는 ‘세(勢)’를 이야기하면서 인간 외부의 운과 인간 스스로의 노력을 논했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세’는 무엇일까? 한비자의 ‘세’ 이야기를 잘 들어보면 인간의 노력과 의지를 중시하는 것 같은데 말이다.
 
 
  ‘勢’란 무엇인가
 
  ‘색즉시공(色卽是空)이요,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고 말하는 불경(佛經) 《반야심경(般若心經)》은 ‘공(空)’이라는 글자 단 하나로 이야기할 수 있는데, 텍스트 《한비자》는 ‘세(勢)’라는 글자 하나로 압축할 수 있다. 즉 《한비자》는 철저히 시종 ‘세’를 위한 텍스트라는 것이다.
 
  ‘세’란 대체 무엇일까? ‘세’는 중요한 정치철학적 개념인데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왜냐? 우리 실생활에서 많이 쓰기 때문이다. 대세(大勢), 수세(守勢), 공세(攻勢), 기세(氣勢), 지세(地勢), 형세(形勢), 정세(情勢), 거세(去勢), 판세 등.
 
  특히 정치적 상황과 국면을 논할 때 등장하곤 한다. 스포츠에서 상황을 설명할 때 등장하고 전쟁사를 논할 때도 쓰이는데, 일단 ‘세’는 우선은 ‘상황과 조건’이다. 인간을 둘러싼 상황과 조건이고, 그 상황과 조건 안에 내재된 힘이 바로 ‘세’다. 그 상황과 조건에서 읽히는 유리함과 불리함이라는 의미 맥락도 있다. ‘세가 커졌다’ ‘세를 불린다’ ‘세를 얻었다’ 이런 말을 떠올리면 될 듯하다.
 
 
  戰場에서 宮中으로 옮겨온 ‘勢’ 개념
 
韓非子의 ‘勢’ 개념은 원래 孫子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세’는 본래 《손자병법(孫子兵法)》에서 기원한 것이다. 전쟁터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적과 싸울 때는 유리한 조건과 상황을 끼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상황과 조건을 활용해야 하고 갈수록 상황과 조건이 유리하게 만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늘 주도권을 쥐고 수세에 몰려선 안 되며 공세로 상대방을 밀어붙여야 한다. 세는 이렇게 전쟁터에서 기원한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법가(法家) 사상가들이 궁중사회로 가져왔다. 전쟁터의 말을 정치철학의 개념으로 만든 것이다.
 
  한비자가 말했다. 임금과 신하는 하루에 100번 싸운다고. 서로 전쟁(戰爭)을 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전쟁이니 당연히 이겨야 할 것이다. 신하에게 끌려다니면 안 된다. 신하가 가지지 못한 힘을 갖고 있어야 하고 신하와 기(氣)싸움과 신경전에서 져서는 안 된다. 군주에게는 늘 신하와 구분되는 독자적 위치와 유리함이 있어야 한다. 전쟁터에서 아군은 늘 적군에 비해 우월한 경제력, 우월한 지형적 조건, 우월한 정신적 조건을 가져야 하듯이 군주 역시 신하에 비해 늘 우월한 조건, 우월한 힘과 권위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세’이다. 임금을 둘러싼 정치적 조건과 조건에서 나오는 힘, 특히 신하가 임금을 두려워하게 하고 임금의 말이 관철되게 하는 그 힘이 ‘세’이다.
 
  한비자는 계속해서 논한다. 그 임금의 힘이라는 ‘세’에 대해서. ‘세’란 무엇이고, 왜 필요하고, 어떻게 해야 키우고 강해지고 유지할 수 있는지, 또 어떤 경우에 잃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현명한 자가 어리석은 자에게 몸을 굽히는 것은 세가 가볍고 지위가 낮기 때문이고, 어리석은 자가 현명한 자를 굴복시키는 것은 그 어리석은 자라도 가지고 있는 세가 무겁고 지위가 높기 때문이다. 요(堯) 임금도 신분이 낮은 보통 사람이었다면 아마 가족도 다스릴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라의 폭군 걸(桀)도 천자(天子)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천하를 마음대로 통치하여 어지럽힌 것 아닌가. 그러니 세력과 자신의 지위는 믿을 수 있어도 그 개인의 재능과 지혜는 부러워할 게 못 된다. 활의 힘이 약해도 화살이 높이 올라가는 것은 바람의 힘을 탔기 때문이고, 어리석지만 그 명령이 잘 시행되는 것은 그 왕이란 지위 때문이다. 요 임금이 노비의 지위에 있었다면 아무리 가르치려 해도 백성들은 그 가르침을 듣지 않았을 것이다.〉 (《한비자》 난세편)
 
  상황과 조건이 유리하면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데 그게 바로 세이다. 인간은 늘 유리한 상황과 조건을 끼고 있어야 한다. 특히 군주라면 궁중사회에서 늘 정치적 상황과 조건을 유리하게 가져갈 수 있게끔 해야 한다. 한비자는 세를 갖는 것이 바로 군주의 의무라고 규정했다. 그런데 한비자는 그 세가 주어진 것인지 만들어낸 것인지를 기준으로 양분(兩分)해 말하기도 했다.
 
 
  ‘자연의 勢’와 ‘인위의 勢’
 
  보통 상황과 조건은 인간에게 주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 상황과 조건에 인간은 적응해나가려고 애쓴다. 때론 적응과 극복을 포기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하는데, 상황과 조건에 인간이 놓이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가끔은 사람이 단순히 적응을 넘어서 상황과 조건 자체를 바꾸어나가기도 한다. 인간이 만들어낸 상황과 조건이 있을 수도 있다. 단순히 주어진 조건과 상황으로서의 세가 있고, 인간의 인위적(人爲的) 노력으로 만들어진 세가 있다는 것인데 한비자는 둘 다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후자(後者)에 방점(傍點)을 찍었다.
 
  〈대저 세란 것은 명칭은 하나이지만 그 변화는 수없는 것이다. 세가 반드시 자연에 대한 것만이라면 세에 대하여 논할 말이 없다. 내가 논하는 세는 사람이 설정한 것을 말한다. 지금 말하기를 “요와 순이 세를 얻어 다스리고, 걸과 주가 세를 얻어 어지럽혔다”고 한다. 나도 요나 걸이 그렇지 않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세는 사람이 설정해낸 것이 아니다.〉 (《한비자》 난세편)
 
  한비자는 ‘자연의 세’와 ‘인위의 세’ 둘 다 이야기했고, 특히 후자의 세를 강조했다. 적극적인 인간의 노력으로 정치적 상황과 조건을 개선시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어진 세만 가지고 논해서 무엇하겠는가? 그저 상황과 조건에 인간이 종속·제약되어 세가 좋지 못하다고 비관해야 하나? 아니다. 충분히 자신의 행위와 노력으로 자신을 둘러싼 상황과 조건을 변하게 할 수 있다.
 
  한비자는 강이나 산 같은 지형·지물로 주어진 세를 많이 말했다. 험난한 고개, 황하(黃河)와 장강(長江) 같은 강을 가지고 이야기를 했는데, 자 사람들이 너무 깊은 나머지 자주 빠져 죽는 강이 있다. 거기에 또 사람이 빠졌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한비자는 《한비자》 난세(難勢)편에서 말했다. 월(越)나라 사람을 불러와서 구해야겠느냐고?
 
  무슨 말일까? 난데없이 남쪽의 월나라 사람이라니? 사람이 익사(溺死)하게 생긴 상황에서 저 멀리 있는 월나라 사람을 불러서 사람을 구하려다 보면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다. 월나라 사람이 아무리 강과 호수가 흔해 어릴 때부터 수영에 능하다지만 말이다. 이때 월나라 사람을 찾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장대나 밧줄이라도 던져야 한다. 상습 익사구역이면 입수금지 팻말을 만들어서 눈에 분명히 보이게 하고, 장대와 밧줄을 준비해두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과 행위가 ‘인위의 세’다. 강이라는 ‘자연의 세’에 팻말과 장대, 밧줄 같은 ‘인위의 세’로 인간이 맞선 것이라 할 수 있다.
 
 
  法術과 賞罰
 
  깊은 강, 험한 길, 먼 거리는 ‘자연의 세’이다. 주어진 세이다. 하지만 인간이 견고한 수레를 만들어내고 우수한 말을 준비하고 안전한 배를 만들고 노를 준비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강을 건널 수 있고 먼 길을 안전하게 갈 수 있다. 내가 직접 상황과 조건을 만들어가면 될 뿐이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대외적 상황이 좋지 않고 대내적 상황이 어지러워도 만들어가고 개선해나가면 된다. 군주의 권력이 반드시 안정적으로 펼쳐지도록 상황을 만들어가면 되는 일인데, 배와 수레, 노 같은 도구를 준비해야 한다. 그게 바로 상(賞)과 벌(罰)로 대변되는 법일 것이다. 그러면 세를 만들어서 군주를 중심으로 나라의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 법술(法術)과 상벌(賞罰)을 갖춘다는 것은 마치 육지를 갈 경우 견고한 수레나 우수한 양마(良馬)가 있으며 물을 건너갈 경우 경쾌한 배와 편리한 노가 있는 것과 같다. 이것을 타고 가면 도달할 수 있으며 이것을 손에 쥐면 공을 이룰 수 있다.〉 (《한비자》 ‘간겁시신’편)
 
  먼 길을 떠나는 이에게 양마와 수레가 반드시 있어야 하고 강을 건너려는 사람에게 배와 노가 반드시 있어야 하듯이 나라를 다스리려는 군주에게는 상과 벌이 있어야 한다. 상과 벌이 있어야 세가 생긴다. 그래야 군주는 강한 권위를 가지고 질서를 잡아 나가고 신하들이 제대로 일하게 할 수 있는데, 얼마든지 군주의 노력과 의지로 그러하게 바꿔갈 수 있다.
 
  세는 만들어갈 수 있고 만들어진 세를 활용해 정치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다는 것이 한비자의 생각이다. 약한 나라가 강해지고 빈곤한 나라가 부유해지고 어지러운 나라에 질서가 잡히게 된다. 법으로 만들어낸 세를 통해서 말이다.
 
 
  임금도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다
 
韓非子.
  그런데 법이 아니라 인의(仁義)를 말하는 이들이 있었다. 법으로 세를 만들어나가 상황을 돌파해가야 하는데 군주가 도덕과 윤리로 정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신하도 따르고 백성은 절로 교화되며 다른 천하의 국가들도 존중할 것이라고 하는 자들이 존재했다. 도덕과 윤리로 정치의 공효(功效)와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한비자는 단호히 말했다. 인의로써 세를 만들어갈 수는 없다고.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도덕과 윤리로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수 없으며 정치의 장에서 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한비자가 말했다. 공자는 천하의 성인으로서, 행실과 덕을 닦고 군자로 이름 날리며 온 천하를 주유(周遊)했다. 천하가 공자의 어짊을 좋아하고 그 의로움을 찬미하였으나 그의 제자가 된 자는 일흔 명뿐이었다. 한비자 생각에 인간은 힘에 고개를 숙이지, 인(仁)·의(義)·덕(德)에 고개를 숙이는 존재가 아니다.
 
  한비자는 한탄했다. 당시 학자들이 군주를 설득하면서 “세에 의존하지 말라. 인의만을 힘써 행하면 왕 노릇을 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는데, 한비자는 그런 지식인들의 말에 기가 막혔나 보다. 요설(妖舌)처럼 느껴졌던 거 같다.
 
  ‘인의를 힘써 행하라, 왕도(王道)정치하라? 군주가 공자 같은 사람이 되어서 어짊으로써 신하들을 대하라고? 지식인들은 군주가 공자처럼 성인이 되기를 바라나 본데 가능성 없는 일이다.’
 
  한비자가 보기에 임금도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는데 성인이 되라니 현실성 있는 일인가? 그리고 설사 군주가 공자 같은 성인이 된다고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이 공자의 제자가 스승 공자에게 고개를 숙이듯이 군주의 말을 따를 것인가? 군주가 덕의 화신(化身)이 되는 것도 현실에서 있을 수 없고, 설사 군주가 덕의 화신이 된다고 해도 모든 백성과 신하가 인정하는 강력한 권위를 군주가 가지는 일은 현실에서 있을 수 없다. 덕과 선함을 통해 군주가 세를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착한 마음만으로는 안 된다
 
  정답은 상과 벌이다. 상과 벌이 있어야, ‘신상필벌(信賞必罰)’이 명확해야 군주는 힘을 가진다. 세를 가진다. 상과 벌이라는 인위적 행동만이 세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매나 채찍의 위협과 재갈 물리는 준비가 없으면 비록 조보(造父)라 할지라도 능히 말을 달리게 할 수 없다. 규구(規矩)나 승묵(繩墨)의 규준이 없으면 비록 왕이(王爾)라 할지라도 능히 네모나 둥근 원을 그려낼 수 없다. 상벌의 법으로 만들어진 강력한 힘이 비록 요와 순이라 할지라도 능히 세상을 잘 다스릴 수 없다.〉 (《한비자》 ‘간겁시신’편)
 
  아무리 명마라도 채찍과 재갈이 있어야 다룰 수 있다. 아무리 전설의 장인이라도 컴퍼스와 자가 있어야 물건을 제조할 수 있다. 단순히 착한 마음과 도덕과 인의로는 안 된다. 법이 있어야 세를 만들고 군주를 축으로 해서 국가의 중심을 잡을 수 있다. 그래야 전국시대(戰國時代) 같은 환경에서 작은 한(韓)나라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한비자는 생각했다.
 
  〈조보(造父)가 제왕의 수레 끄는 곁말 구종이 되어 말에게 물을 안 먹이고 길들여냈다고 한다. 농장 안에서 수레 끄는 시험을 하였다. 목마른 말이 연못을 발견하자 수레를 버리고 연못으로 달려가 수레 끄는 일이 실패하였다. 왕어기(王於期)가 조 간자(趙 簡子)의 길잡이가 되어 1000리 밖까지 다투어 달려갔다. 출발할 때 돼지가 도랑 속에 엎드려 있었다. 왕어기가 한꺼번에 고삐를 잡고 채찍질을 하며 나아가는데 돼지가 갑자기 도랑 속에서 뛰어나와 말이 놀라 수레를 끄는 일이 실패하고 말았다.〉
 
  조보란 사람이 애써 말을 길들였건만 말이 수레를 버리고 연못으로 달려갔다. 목이 말라서 주인이고 수레고 돌보지 않고 달려간 것이다. 또 왕어기란 사람이 말을 몰 때는 이런 적이 있었다. 말을 몰아 길을 재촉해서 가는데 돼지가 나타나니 말이 놀라 채찍으로도 다룰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조보란 사람이 말을 몰 때 연못이 없었더라면 도망갈 일이 없었을 것이고, 돼지가 나타나 겁을 주지 않았더라면 제어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賞罰을 독점하라
 
  이 일화는 상벌을 군주가 장악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한비자가 말한 것이다. 상과 벌은 모두 군주 손에서만 놀아야 한다. 상도 군주만이 줄 수 있어야 하고 벌도 군주만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세가 생긴다. 만일 임금이 아닌 다른 사람도 벌을 줄 수 있고 상을 내릴 수 있다면 세는 사라진다. 군주가 가지는 독점적인 정치적 권력과 힘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상과 벌을 반드시 임금이 쥐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한비자가 만들어낸 이야기인데, 《한비자》 텍스트에 따로 ‘이병(二柄)’편이 있다. 이병은 두 개의 권병(權柄)이라는 뜻이다. 두 개의 권력의 무기가 바로 이병인데 해당 편에서 특히 상과 벌을 늘 독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 또 하나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사성자한(司城子罕)의 이야기다.
 
  〈송(宋)나라에서 있었던 일이다. 사성자한이란 중신이 송나라 군주에게 제안을 했다.
 
  “상 주는 일은 민(民)이 좋아하는 것이니 군주께서 행하십시오. 죽이거나 처벌하는 일은 민이 싫어하는 것이니 제가 그것을 담당하고 싶습니다.”
 
  이 제안에 송나라 군주는 넘어가 버렸다. 그만 “상은 내가 내릴 것이니 벌은 사성자한 자네가 주게”라고 허락해버린 것이다. 상 주는 일은 내가 할 테니 악역(惡役)은 사성자한이 맡으라 한 것이었다. 그래서 서민(庶民)을 죽이거나 대신(大臣)들을 처형할 경우에는 자한과 그것을 의논하라며 나라에 공포(公布)했다.
 
  일 년 지나 그들을 죽이거나 살리는 명령이 자한에게서 결정된다는 것을 온 나라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그러자 모든 사람이 자한 쪽으로 몰리게 되었다. 사성자한이 실세(實勢)가 된 것이다. 결국 사성자한은 송의 임금을 위협하여 정권을 빼앗아버렸다. 송나라 군주는 저항조차 못 했다고 하는데, 권병 중 하나를 뺏겨버렸으니 군주 자신의 세는 사라진 것이고 신하에게 잡아먹힌 것이다.〉
 
 
  백성들의 지지
 
마키아벨리.
  군주는 무조건 상벌을 장악해 늘 직접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신하들이 군주를 두려워하고 권위가 생긴다. 주권자가 무서운 줄 알게 되는데 세를 만드는 기본은 상벌의 장악이다. 절대 놓아선 안 된다. 그리고 그 상벌을 공정하고 엄격하게 적용하며 신상필벌을 늘 단단히 해야 세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한비자는 그것만이 세를 만들고 강화하는 데 전부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한비자는 백성들의 지지(支持)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자정(兹鄭)이란 사람이 손수레를 끌고 높은 다리 위로 오르려고 하였으나 버틸 수 없었다. 자정이 멍에에 걸터앉아 노래를 부르자 앞에 가던 자가 멈추고 뒤에 오던 자가 달려와 수레가 이내 올라갔다. 만일 자정에게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재주가 없었다면 자신이 비록 힘을 다하여 죽게 되더라도 손수레는 올라가지 못하였을 것이다. 지금 자신은 수고를 하는 데 이르지 않고서도 손수레를 올라가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을 끌어 모으는 재주를 가졌기 때문이다.〉 (《한비자》 ‘외저설 우하’편)
 
  위 예는 ‘세’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 있어 백성들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더 정확히 말해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것이 세의 유지·강화에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든 사례다. 상을 내려 유인하고 벌을 내려 통제하고, 특히 신하들을 그렇게 단속하고 동기 부여하고 통제해야만이 군주의 세가 완성되고 항상 안정되게 유지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다. 한비자 생각은 그렇지 않다. 세를 만드는 데 더욱 필요한 것이 있는데, 한비자는 백성의 지지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좋은 정치 베풀고, 전쟁과 분쟁에서 백성을 보호하고, 경제력을 신장시켜 백성의 삶을 개선시켜줘야 하고, 이른바 살맛이 나게 해야 한다. 그리하면 ‘우리 왕이 정치 잘하는구나. 우리를 생각해주고 있고, 귀족들의 편이 아니라 우리 백성들의 편이구나’라는 인식이 생기게 되는데, 이렇게 군주가 좋은 정치로서 백성들에게 선물을 준다. 그러면 백성들도 군주 편이 되어주면서 군주에게 지지라는 선물을 준다. 백성들이 군주 편이 될수록 군주의 세는 공고해진다. 신하들이 더욱 왕을 무시하지 못하게 되고 왕의 권위에 복종하게 된다.
 
  뭇 백성이 투표권도 없고 정치적 의견을 낼 수도 없었던 시절이라고 해서 그들의 목소리와 민심을 그저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원성(怨聲)이 자자하면 왕의 권위에도 균열이 가고, 칭송이 자자하면 왕의 권위도 살아난다. 백성의 여론과 성 밖의 분위기는 분명히 커다란 압력이자 공기임을 한비자는 말한 것이다. 군주의 세를 위해선 백성들의 지지까지 이끌어내야 한다고.
 
  상과 벌에 백성들의 지지로 이렇게 ‘세’는 만들어진다. 그러면 한나라처럼 국력이 약해도 힘을 만들어갈 수 있다. 체급이 작은 나라로 사방이 강대국들로 둘러싸인 상황과 조건에 던져진 상태였지만, 얼마든지 상황을 타개해나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나라 체급이 작다고 해서 약소국으로 살며 직간접적 지배에 신음하고 결국 패망(敗亡)해야 하는 것이 운명인가? 그렇지 않다. 행동으로 바꿔갈 수 있다. 운명은 움직이는 것이다. 그것이 한비자의 생각이다. 마키아벨리도 마찬가지다. 운명은 바뀔 수 있다. 그리고 운명의 주인공은 나 자신이다.
 
 
  비르투와 포르투나
 
  〈나는 운명의 여신을 이러저러한 사나운 강들 가운데 하나에 비유한다.… 운명의 힘은 자신에게 대항할 비르투(virtu·능력)가 조직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 위력을 과시한다. 자신을 제지하기 위한 제방(堤防)과 수로(水路)가 준비되어 있지 않은 곳을 알아채고는 자신의 물길을 그리로 돌리는 것이다. 당신께서 이탈리아를 돌아보신다면, 다시 말해 격변의 중심지와 동시에 그런 격변에 원인을 제공하고 있는 이탈리아를 돌아보신다면 이곳이야말로 아무런 제방도 수로도 갖추고 있지 못한 형세라는 것을 아시게 될 것이다.〉
 
  만약 이탈리아가 독일, 에스파냐, 그리고 프랑스처럼 충분한 비르투로써 방비되었다면, 홍수처럼 지금까지 만들어낸 큰 격변을 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런 홍수가 아예 이탈리아에서 일어났다 해도 인간들이 제방을 쌓고 강변을 정리해 순치(馴致)시킬 수 있다. 인간 삶을 위협하는 강이 아니라 인간 삶에 유용하게 쓰이는 생명수를 주는 강으로 바꿀 수도 있다.
 
  사나운 강, 자연 그대로 강은 ‘포르투나(fortuna·운명)’다. 하지만 그 강을 인간의 노력과 의지로 바꿔간다면 거기에 비르투가 개입된 것이다.
 
  마키아벨리에게는 포르투나가 있다. 그것은 ‘운명의 여신’이라고 한다. 행복과 운명을 뜻하는 그리스 신화의 티케(Tyeche)와 같다고 하는데, ‘운명’에 로마 후기에 이르러 ‘변덕’ ‘예측 불가능’의 의미가 추가되었다고 한다.
 
  포르투나는 한비자가 말한 주어진 상황과 조건으로서 ‘자연의 세’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위에서도 포르투나를 길들지 않은 제방과 인위적 손길이 닿지 않은 강에 비유하는데, 그렇다. 인간에게 주어진 외부적 환경 때론 가혹함을 강제하는 환경이 포르투나이다.
 
  하지만 마냥 그런 환경에 우리가 굴복해야 하는가? 한비자가 인간의 인위적 노력을 강조하면서 인위적인 세를 말했듯이 마키아벨리 역시 인간의 노력과 분투를 말했다. 그것이 마키아벨리에게는 바로 비르투이다. 포르투나는 ‘자연의 세’, 비르투는 정확히 ‘인위의 세’를 뜻한다.
 
 
  정치적 결과는 늘 열려 있다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비르투’란 주체적(主體的) 의지와 역량(力量), 힘을 가리킨다. 특히 특정 상황에서 통치자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과업을 과감하고 적극적으로 해내는 강한 힘과 의지를 말한다. 위험하더라도 도덕적 비난의 여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주어진 운명을 거스르는 일이라 하더라도 군주 자신의 생존, 국가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그 자신만이 해야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해내려고 하는 의지와 행동, 적극적 자세이자 액션이다. 비르투는 남자 혹은 남자다움을 뜻하는 라틴어 ‘vir’를 어원으로 하는데, 포르투나가 여신(女神)의 이미지로 상징되는 것과 대조가 된다. 포르투나가 여신이라면 비르투는 ‘사나이’ ‘영웅’ ‘호걸(豪傑)’, 요새 말로 ‘상남자의 기운’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마키아벨리는 그 비르투로 운명의 여신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했다.
 
  마키아벨리는 “운명의 여신은 우리 행동의 절반에 대해서만 결정권자(決定權者)의 역할을 하며 나머지 절반 혹은 거의 그 정도는 우리가 통제하도록 사실상 허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군주론》 25장)
 
  쉽게 말하면 이 말은 정치적 결과는 늘 열려 있다는 것이다. 가역적(可逆的)이란 말이다. 바뀔 수 있다는 것이며 더 풀어 말하면 ‘현실 정치는 인간들이 행위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전부를 인간이 통제하고 바꿔갈 수는 없지만, 군주 행위와 집단행동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것인데, 운명 그까짓게 우리를 전부 지배할 수는 없다.
 
  우리가 그저 주어진 상황에, 나를 둘러싼 조건에 굴복해야 하는가? 기껏해야 적응하는 정도에 그쳐야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바꿔갈 수 있다. 내가 얼마나 비르투를 가지고 싸우느냐에 달린 것이다. 운명은 절반 이상 사태를 지배하지 못한다. 나머지는 인간이 하기 나름, 특히 군주가 하기 나름이다. 행위자가 얼마나 비르투를 갖느냐에 달려 있다. 중요한 것은 포르투나가 설사 불리하더라도 끝내는 자기가 의도한 방향으로 환경 자체를 제압해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겁먹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결단하면 된다. 행동하면 된다.
 
  정치적 결단주의와 행동주의! 한비자와 마키아벨리가 공유(共有)하는 부분이다. 상황과 조건 얼마든지 바꿔갈 수 있다고 보았기에 결단을 내리고 행하면 된다고 본다. 정치의 성공과 실패는 결국 내 의지와 행위가 결과를 만드는 것이니 망설일 이유가 없다.
 
 
  군주가 악덕을 행해야 할 때
 
‘불가피함’을 의미하는 네체시타도 여신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마키아벨리는 포르투나와 비르투 외에 네체시타(necessita`)도 말했다. ‘불가피함’이다. 불가피한 행동을 취하게 하는 문제가 바로 네체시타다. 이는 《군주론》 18장에서 잘 드러나는데, “군주는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선하지 않은 행동도 해야 한다”고 했다. 군주라면 때로는 불가피하게 행해야 하는 악덕(惡德)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런 이유로 18장은 악명(惡名)이 높다.
 
  〈나의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의, 자비심, 인간적임과 종교적 경건함에 반하는 행동을 취할 필요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할 수만 있다면 착하게 사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아야 하지만 필요할 경우 어떻게 악해질 수 있는지도 알아야만 한다.〉
 
  이렇게 악한 짓도 때로는 제한적이나마 해야 하는데 네체시타란 것 때문이다.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국가를 유지하고 지키기 위해 군주에게는 피해선 안 되는 일들이 강제될 때가 있다. 불가피하게 네체시타가 닥쳤을 때 군주는 악덕을 무릅써야 한다. 네체시타적인 맥락에서는 반(反)도덕적·비(非)도덕적 행동이라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비르투의 발휘다. 강행하면서 돌파할 수 있어야 진짜 비르투를 가진 사람이고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인간이다. 네체시타에서 악덕의 행위도 강행하는 것이 비르투를 제대로 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네 운명의 주인공이 돼라’
 
  한비자는 ‘자연의 세’와 ‘인위의 세’를 말했고, 마키아벨리는 ‘비르투’와 ‘포르투나’를 말했다. 한비자와 마키아벨리가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은 혹시 이것이 아닐까? 바로 ‘우리 상식을 바꾸라’는 것. 능력 혹은 노력, 그리고 운 사이에서 사람들 대부분은 운이 더 중요하다고 하고 또 그것을 상식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한비자와 마키아벨리는 그 ‘상식’을 버리라고 말한다. 사람의 행위와 의지가 운명을 결정한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운이 아니라 의지와 역량이다. 의지와 역량이 있으면 운명의 여신, 주어진 상황과 조건도 이겨낼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우리에게 힘주어 이야기한다. 운칠기삼(運七氣三)이 아니라 기칠운삼(運七運三)이라고! 이것은 조금 달리 말하자면 우리에게 운명의 주인공이 되라는 것이다. 단순히 ‘싸워라’ ‘행동하라’가 아니라 ‘너는 반드시 네 운명의 주인공이 돼라’는 명령이다.
 
  〈광포한 침략에 맞서 비르투는 무기를 부여잡을 것이다.〉 (《군주론》 26장)
 
  〈새로운 체제를 건설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위험은 늘 따라다니게 마련이고 최선의 해결책은 자기 자신의 비르투로 극복하는 것이다.〉 (《군주론》 6장)
 
 
  “당신 자신에게 의존하라”
 
  이쯤 되면 비르투는 단순히 인간의 의지와 인위적 행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도움이나 운명의 힘에 수동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스스로의 의지’를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눈치챌 법하다. 마키아벨리는 재차 힘주어 말한다.
 
  〈당신은 다른 누군가가 손잡아줄 것을 기대하고 넘어져서는 안 된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겠지만, 설령 넘어지는 당신을 누군가가 붙잡아준다 해도 그것이 당신의 안전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이런 방어책은 당신 자신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기에 비겁한 일이다. 바람직하고 확실하고 영구적일 수 있는 유일한 방어책은 당신 자신과 당신의 비르투에 의존하는 것이다.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군주론》 24장)
 
  마키아벨리가 근대적 인물인 것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지만, 바로 포르투나에 대한 비르투의 우위(優位)를 주장한 것이 강력한 증거가 아닐까. 한비자도 마찬가지다. 인간 스스로가, 혹은 집단 스스로가 자신의 운명 전체를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주장했기에 둘 다 근대적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키아벨리는 조언한다. “과감하게 자신에게 다가오는 운명의 여신을 공략하라”고. 한비자도 조언한다. “세는 내가 만들어갈 수 있다”고.
 
  두 사람의 조언을 수용한다면 어쩌면 우리에게는 다음과 같은 일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내 운명을 예측하는 것, 그리고 운명을 예측할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운명의 부침(浮沈)에 대응하는 것이 모두 가능해질 수 있지 않을까. 새해 모두 자신의 비르투로 운명의 여신과 맞서 싸우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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