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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사상 크로스 〈7〉

한비자와 마키아벨리 2

역사를 통해 ‘권력의 기술’ 가르쳐

글 : 임건순  동양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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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비자, ‘宋襄之仁’ 이야기 등을 통해 君主에게 정치와 도덕은 별개임을 보여줘
⊙ 마키아벨리, “군주는 반드시 역사서를 읽어야 한다”
⊙ 한비자 글에서는 위기에 처한 韓나라를 걱정하는 志士的 절박함 느껴져

임건순
1981년생. 서울시립대 행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수료 / 저서 《한비자, 법과 정치의 필연성에 대해서》 《제자백가 인간을 말하다》 《묵자: 공자를 딛고 일어선 천민 사상가》 《손자병법: 동양의 첫 번째 철학》 《생존과 승리의 제왕학 병법노자》 《제자백가 공동체를 말하다》 《순자: 절름발이 자라가 천 리를 간다》 등
이탈리아 피렌체의 우피치박물관 외벽에 있는 마키아벨리像.
  노자(老子)는 역사학자다. 그가 역사학자라는 것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잘 드러나 있다. 주(周)나라 왕실의 도서관장을 맡던 나이 많은 어르신이라고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에 쓰여 있다.
 
  그런데 주 왕실의 도서관이 단순한 도서관일까? 아니다. 고급 기밀문서가 많이 쌓여 있는 국가 기록 보관소 같은 곳이었다. 그 기관에서 근무하는 그 기관의 장이었다고 하는데, 도서관 총책임자였다는 사마천의 서술은 노자가 역사학자라는 말이다.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서도 노자 사상의 연원을 사관(史官)이라고 했다. 그 역사학자는 흥망성쇠(興亡盛衰)를 중심으로 여러 나라 역사를 공부했다. 흥망성쇠의 중심적 원인이 된 정치투쟁·군사투쟁에 주목해 역사를 살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 《노자》를 병법서(兵法書)로 보기도 한다.
 
  역사를 통해 배운 것을 가지고 성쇠와 흥망의 법칙을 말한 사람이 노자 혼자였던 것은 아니다. 한비자(韓非子)도 그러했다. 그도 역사학자다. 역사에서 발견된 무수한 사례를 가지고 흥망성쇠에 대해 논했다.
 
 
  최초의 노자 주석자, 한비자
 
  텍스트 《한비자》에 따로 ‘유로(喩老)’와 ‘해로(解老)’편이 있다. 《노자 도덕경》에 나온 문구들을 가지고 이야기한 것이다. 한비자는 《노자》를 인용하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도 했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실 최초의 노자 주석자(註釋者)는 한비자다. ‘무위(無爲)’를 말한 노자와 강력한 ‘법치(法治)’를 말한 한비자가 잘 안 어울릴 것 같지만, 《도덕경》을 제대로 읽어보고 《한비자》를 정독해보면 둘은 제법 잘 어울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큰 틀에서 문제의식이 같고, 자의식(自意識)도 비슷한 면이 많기에 둘의 거리가 아주 가까움을 느낄 수 있다.
 
  《한비자》 텍스트를 보면 사례가 무수히 나온다. 만들어낸 이야기, 정치우화(政治寓話)도 많지만 실제 역사적 사실로 확인되는 학자에게 역사적 팩트로 인정되는 사례들이 많이 나온다. 자신의 주장에 근거로 활용하든지 아니면 그 역사 이야기를 인용한 후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역사광 한비자는 흥한 사례를 이야기한다. 나라를 강하게 하고 신하들을 제어하고 법치를 통해 질서를 잡은 사례를 열거한다. 반대로 망한 사례도 이야기한다. 나라를 약하게 하고 신하들에게 휘둘리고 법을 외면해 질서를 스스로 무너뜨린 군주들의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하면 흥한다, 저렇게 하면 망한다’ 그러는데 흥망의 법칙을 알려준다고나 할까.
 
  한비자는 사례를 통해 ‘도덕과 윤리를 너무 좋아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정치란 도덕적 가치, 신(神)의 섭리(攝理), 종교적 이상(理想) 등과는 상관없는 영역임을 보여준다. 어디까지나, ‘정치란 권력을 추구하는 자들이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서로 다툼을 벌이는 장’임을 역사적 사례를 들어 명확히 주지시키는데, ‘도덕과 윤리는 정치적 상황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끌고 타개하는 데 어떤 필연성도 없다’고 말한다. ‘외려 권력에 누수(漏水)가 생기게 하는 경우가 많다’고 계속해서 경고했다.
 
 
  군주가 인자하면 나라를 빼앗긴다
 
  〈성환(成驩)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가 제(齊)나라 군주에게 말했다.
 
  “군주께서는 너무 인자하시고 지나치게 남을 동정하십니다.”
 
  제나라 군주가 이렇게 답했다.
 
  “인자하고 남을 동정하면 좋지 않은가?”
 
  성환이 다시 아뢰었다.
 
  “신하가 그렇게 하면 선하다고 할 수 있지만 군주가 그래선 안 됩니다. 신하로서는 선한 것이지만 군주가 행할 바는 아닙니다. 대저 신하란 어질지 못하면 함께 일을 꾀할 수 없고, 측은지심이 없으면 가까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군주는 다릅니다.”
 
  그러자 제나라 군주가 물었다.
 
  “그렇다면 나의 어느 점이 너무 인자하고 어느 점이 지나치게 남을 동정한다는 것인가?”
 
  그러자 성환이 이렇게 답했다.
 
  “군주께서는 설공[薛公·맹상군의 아버지 전영(田嬰)]에게 너무 인자하고 전씨 일족을 지나치게 동정합니다. 설공에게 너무 인자하면 다른 대신의 권위가 사라지고, 전씨 일족을 지나치게 동정하면 그 일족이 법을 범하게 됩니다. 다른 신하의 권위가 사라지고 사기가 떨어지면 외적과 싸울 군대가 약해지고, 특정 일가 사람이 법을 범하면 국내 정치가 어지러워집니다. 이는 나라가 망하는 근본입니다.”〉
 
  《한비자》 ‘내저설(內儲說) 좌상(左上)’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실제 제나라는 전씨 집안의 발호(跋扈)를 막지 못해 나라를 빼앗겼다. ‘외저설(外儲說) 좌하(左下)’편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관중(管仲)이 포박되어 노(魯)나라에서 제나라로 가는 도중에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 국경을 지키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구걸하였다. 그러자 그가 무릎을 꿇고 관중에게 매우 정중하게 먹이며 대접하였다. 그러고 나서 몰래 관중에게 물었다.
 
  “만일 다행스럽게 죽지 않고 제나라에 도착해 등용된다면, 장차 무엇으로 저에게 보답하겠습니까?”
 
  관중은 이렇게 답했다.
 
  “당신 말처럼 된다면 저는 앞으로 현자(賢者)를 등용하고 유능한 자에게 일을 시키며 공로 있는 자에게 상 줄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무엇으로 당신에게 보답하겠습니까?”
 
  그러자 국경을 지키는 사람이 관중을 원망하였다고 한다.〉
 
 
  韓非子와 老子
 
《도덕경》을 지은 노자.
  한비자는 관중의 사례를 가지고 ‘공사(公私)의 구분에 엄격해야 한다’ ‘정치하는 자들은 사적인 은혜와 감정 따위를 가져선 안 된다’는 것을 말했다. 관중은 제나라를 아주 강하게 만들어 주군 환공(桓公)을 패자(覇者)의 지위에 올린 사람이다.
 
  이렇게 한비자는 늘 역사적 사례를 통해 권력의 기술을 알려준다. 왕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나 왕이 지켜야 할 도덕과 윤리, 그런 것 따위를 한비자는 말하지 않는다. 그저 그는 권력투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꼭 지켜야 할 법칙·보편성·필연성을 역설할 뿐이다. 권력을 둘러싼 투쟁에서 실제로 벌어진 역사적 사례들을 관찰·분석해서 내린 결론을 가지고 조언하고 때론 경고한다. 사실 경고의 사례가 훨씬 많은데, 어떤 행동과 지시가 권력을 쟁취하고 유지하는 데 유리하고 어떤 행동과 지시가 권력의 쟁취와 유지에 불리한가? 이런 질문에 답하며 권력의 객관적 규칙에 대해서 알려준다. 장기판과 바둑판에서 승리 확률을 높여주는 말의 운용 기술, 행마(行馬)의 기술을 알려준다고 할까? 한비자가 말하는 법(法)·술(術)·세(勢)는 모두 역사를 통해 이끌어낸 권력에 대한 결론인데, 한비자는 역사학자이자 정치학자라 할 수 있다.
 
  노자와 한비자 둘 다 역사학자라고 했다. 둘 다 권력에 대해 말하고 궁중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지켜야 할 바들을 이야기하는 점에서 똑같다 할 수 있다. 역사적 사례에서 배운 것들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도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둘이 완전히 같은 사상가라고 볼 수는 없다. 공맹(孔孟)처럼 가깝지는 않다. 다른 점과 차이점이 분명히 있고, 둘 사이에 거리가 있다. 노자는 역사학자지만 역사적 사례를 직접 열거하지 않는다. 《도덕경》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짧은 경구(警句)들의 모음집이다. 장황하게 논하는 부분이 아예 없다. 역사의 장에서 깨달은 것을 아주 짧게 시적인 비유를 통해서, 운문(韻文)의 언어와 상징(象徵)으로 말해준다. 담담하게 냉정하게 극도로 정제된 어조(語調)로 이야기한다. 노회(老獪)한 역사학자가 담담하고 짧게 말해줄 뿐이다.
 
  반면 한비자 글은 아주 길다. 역사적 사례를 거듭해서 자세히 열거하니 길어질 수밖에 없다. 운문인 노자와 그 점이 다르다. 그리고 어조에서도 차이가 많이 난다. 냉철하지만 격정적인 어조로 말해줄 때도 많다. 노자는 이름 그대로 어르신의 냄새가 나고, 한비자는 조국을 사랑하는 피 끓는 애국 청년의 분노와 패기가 보인다.
 
  그리고 한비자에게는 절박함도 있다. 노자에게는 절박함이 없다. 한비자는 초조한 모습이 글에서 보인다. 멸망의 그림자가 드리운 조국 한(韓)의 운명을 생각하는 지사(志士) 한비자는 글에 초조함과 절박함의 냄새가 진하다. 그리고 그가 조언하는 말들은 수용하지 않아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가 생각하기에 군주가 수용해야 하는 말이다. 하지만 노자는 그저 초연(超然)할 뿐이다. ‘내가 말해주는 교훈을 수용하면 좋겠지만, 받아들이고 아니고는 너의 선택일 뿐이다’라는 뉘앙스가 많이 보인다. ‘수용하지 않아도 할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래서일까, 노자는 결국 함곡관을 벗어나 세상을 떠난다. ‘취하고 안 취하고는 너의 몫일 뿐이다.’ 노자 선생, 정말 쿨하고 냉정하다.
 
 
  宋襄之仁
 
  흥망과 성쇠를 통해 역사를 보는 한비자는 늘 대조적으로 역사적 사례를 열거하기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망한 사례, 망국과 멸망의 사례를 더 많이 보여준다.
 
  〈송양공(宋襄公)이 초(楚)의 군사와 탁곡 강가에서 싸웠다. 송의 군사는 이미 전열을 갖추었으나 초군은 아직 다 물을 건너오지 못하였다. 우장군 구강이 종종걸음으로 나와서 간하여 말하기를 “초군은 많고 송군은 적다. 청하건대 초군은 반만 건너오게 하여 전열을 갖추기 전에 공격하면 반드시 무찌를 것이다”라고 하였다. 양공이 “내가 듣기로는 군자가 말하기를 ‘부상자를 두 번 다치게 하지 말고 반백자(半白者)를 포로로 붙잡지 말며, 사람을 험한 곳까지 밀어붙이지 말고 또 궁지로 사람을 몰아넣지 말며, 전열을 갖추지 못한 적을 공격하지 말라’고 하였다. 지금 초가 아직 물을 건너오지 않았는데 이를 공격하면 의를 해치게 된다. 초군을 모두 건너오게 하여 진지를 만들게 한 다음에 북을 쳐서 군사를 진격시키겠다”고 말했다.
 
  우장군이 다시 말하기를 “군주는 송의 백성들을 아끼지 않고 군사의 안전을 생각하지 않으며, 다만 의(義)를 이루려 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양공이 노하여 말하기를 “전열로 돌아가지 않으면 군법에 걸 것”이라고 하였다. 우장군이 전열로 되돌아갔다. 초군은 이미 전열을 갖추고 진지를 구축하였다. 양공이 이윽고 진격 북을 쳤다. 송군은 크게 패하고 양공은 허벅다리에 상처를 입어 3일 만에 죽었다.〉
 
  《한비자》 ‘외저설 좌상’에 이른바 ‘송양지인(宋襄之仁)’의 일화가 실렸다. 송양지인, 쓸데없는 인정을 베풀거나 불필요한 동정이나 배려를 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일컫는 말이고, 무모한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이르는 말이다. 송양공은 그저 자신이 고집하는 멋과 도덕 때문에 군사들을 죽였고 자신도 망했다. 값싼 도덕과 인의(仁義)를 경계하는 한비자의 시각이 잘 드러나는데 이렇게 망한 사례로 경고하는 것이다.
 
 
  공포 마케팅의 대가, 한비자
 
한비자.
  한비자는 ‘공포 마케팅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권력을 잃고 나라를 빼앗기고 신하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그런 사례를 열거하면서 반드시 지켜야 할 정치의 수칙과 기술을 역설한다. 공포심을 불러일으켜서 반드시 왕이 자신의 조언과 경고를 듣게 하려는 전략인데, 심지어 “문둥병자가 군주를 불쌍하게 본다”는 명언을 말하기도 했다.
 
  실제 당대의 현실이 그러했다. 불손한 말이지만 역사적 사례나 당시 상황을 보면 과언이라 할 수 없다. 춘추전국시대에 협박당하거나 시해(弑害)되어 목숨을 잃은 군주가 아주 많다. 한비자는 그런 사례를 계속 열거한다. 수조(豎刁)와 역아(易牙)에게 농락당한 제나라 환공, 자지(子之)에게 군주의 자리를 빼앗긴 연(燕)나라 자쾌(子噲), 전상(田常)에게 나라를 빼앗긴 제나라 간공(簡公) 등.
 
  한비자는 권력투쟁에서 신하에게 패해 비참한 최후를 맞은 군주 이야기를 많이 다뤘다. 경계하기 위함이다. 인의로 일컬어지는 도덕. ‘당신의 사적 감정으로 정치를 하면 안 된다. 법치만이 살길이다. 반드시 알아야 할, 지켜야 할 정치의 필연성을 깨달아라. 그러지 않으면 저들처럼 당신도 권력을 뺏기고 저들처럼 죽임을 당할 것이다.’ 이렇게 군주를 설득하려고 그러한 예를 거듭 들었다. 정말로 한비자는 절박했던 것일까. 자신의 조언과 경고를 듣지 않으면 망한다고 계속 말하는데, 단순히 당신의 나라가 망하는 게 아니라 나의 조국 한나라가 망할까 봐 그랬던 것이 아닐까 싶다.
 
 
  《로마사논고》와 《군주론》
 
  마키아벨리 하면 《군주론》이지만, 그는 《군주론》뿐만 아니라 《로마사논고(論告)》도 써냈다. 애덤 스미스를 이해하려면 《국부론(國富論)》뿐만 아니라 《도덕감정론(道德感情論)》도 보아야 하듯이 마키아벨리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군주론》과 《로마사논고》 모두 읽어야 한다.
 
  〈정신적 훈련과 관련해 군주는 반드시 역사서를 읽어야 한다. 역사서 속에서 탁월한 인물들의 행적을 잘 살펴야 한다. 전시에 그들이 어떻게 처신했는지를 살피고 그들이 승리하고 패배한 원인을 검토해, 전자는 모방하고 후자는 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문서보다도 군주는 탁월한 인물들이 과거에 행한 바대로 행동하려고 해야 한다. 이들도 그 이전 시대에 칭송과 찬양을 받던 누군가를 모방했고, 항상 자신의 처신과 행동을 그들에 가깝게 하려고 노력했다. 이미 언급했듯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아킬레우스를,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로스를, 스키피오는 키루스를 모방했다. 크세노폰이 쓴 키루스의 전기를 읽은 사람은 누구든지 바로 스키피오의 생애에서 그런 모방이 얼마나 큰 영광을 가져다주었는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고결함, 친근성, 인간미, 관대함 등의 면에서 스키피오가 얼마나 키루스를 똑같이 따라 했는지를 알게 된다.〉 (《군주론》 3장)
 
  마키아벨리도 역사학자다. 무수한 역사적 사례를 분석·정리하고 거기서 깨달은 내용을 핵심으로 해서 논의를 전개한다는 점에서 한비자와 똑같다. 그리고 그 내용을 위에서 보는 것처럼 왕에게 수용시키려 애썼다.
 
  마키아벨리는 기본적으로 사건과 상황, 사람의 선택이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마키아벨리 생각에 동일한 사건과 행동, 선택은 다시 반복해서 일어난다. 인간의 욕망과 본성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늘 정치에서 통할 수 있는 일반적 진리, 일반적 규칙을 찾고자 하였다. 과거에 있었던 정치적 사건의 인과(因果)·득실(得失)을 잘 검토하면, 반복되는 동일하고 유사한 사건과 상황에 취해야 할 조치와 행동을 알게 된다고 보았다. 그 점은 한비자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정치의 장에서 사건은 반복되고 동일한 상황은 늘 다시 찾아온다. 역사를 통해서 배운 필연적 교훈을 통해 상황을 타개해가면서 군주는 권력을 지키고 키울 수 있다고 본 점에서 둘은 같다고 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도 네거티브형 사례를 열거하고 상기시키는데 계속 경고·경계하게 한다. 오점(汚點)을 남긴 역사적 인물처럼 행동하는 것을 피해야만이 그의 나라 피렌체가 살아남고 강해질 수 있으리라 본 것이다.
 
 
  귀차르디니, 마키아벨리의 친구
 
《통치자의 지혜》를 지은 귀차르디니.
  마키아벨리의 절친한 친구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Francesco Guicciardini)가 있다. 귀차르디니는 마키아벨리처럼 사상가다. 귀차르디니도 책을 남겼다. 마키아벨리에 비해 차분한 어조로 짧게 말했다. 글을 보면 마키아벨리보다 여유가 보이는데 마키아벨리와 친구였지만 신분이 마키아벨리보다 높았다. 피렌체의 저명한 귀족가문에서 태어나서 피렌체 최고 집행부 위원으로, 교황청의 고위관리로 활약하기도 했다. 마키아벨리와 달리 굴곡 없이 비교적 승승장구하며 평온한 삶과 편안한 노년을 보냈다. 그래서일까? 글에 차분함이 보이고, ‘수용을 하든 말든 네 자신의 몫일 뿐’이라는 뉘앙스가 문장에서 보인다.
 
  귀차르디니의 저서 《이탈리아 역사》는 침략전쟁과 격변의 시기인 16세기 초 이탈리아에 관한 가장 중요한 역사책으로 손꼽힌다. 귀차르디니를 대표하는 책은 《통치자의 지혜》라는 책이다. 그가 18년에 걸쳐서 저술하고 수정을 거듭해온 교훈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강력한 군주를 중심으로 한 통일 국가 건설을 꿈꿨다면, 귀차르디니는 강력한 군주나 공화정(共和政)이 아니라 이상적인 귀족정치를 바탕으로 통일이 되기 원했으며 과두제적(寡頭制的) 질서를 지지했다.
 
  저서 《통치자의 지혜》와 《이탈리아 역사》는 모두 도덕적·윤리적 판단을 배제한 정치와 역사 연구를 지향한 점이 눈에 띈다. 그 점에서 마키아벨리와 유사하다.
 
  마키아벨리와 귀차르디니의 거리와 관계를 보면 노자와 한비자가 연상된다. 한비자에게 노자가 있었듯이 마키아벨리에게도 귀차르디니가 있었다고나 할까?
 
  〈평화롭고 조용한 생활을 사랑하기 때문에 권력과 지위를 자진해서 버렸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말을 절대로 믿지 마라. 사람은 경솔하거나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권력과 지위를 결코 버리지 않는다. 이것의 예외란 참으로 찾아보기 힘들다.〉 (《통치자의 지혜》 17)
 
  〈음모란 여러 사람이 모여서 도모하지 않으면 성립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음모는 매우 위험한 짓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어리석거나 사악한데 그런 사람들과 손을 잡고 하는 일에는 엄청난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다.〉 (《통치자의 지혜》 19)
 
  〈남에게서 받은 혜택은 다른 그 무엇보다도 더 쉽게 잊어버리게 마련이다. 따라서 당신이 과거에 혜택을 베풀어주었던 사람들에게 의존하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어쩔 수 없는 여건 때문에 당신을 결코 배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의존하라.〉 (《통치자의 지혜》 24)
 
  노자처럼 역시나 세상을 권력을 둘러싼 투쟁의 장으로 보고 있고, 인간에 대한 비관적 관점이 보인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또 어떻게 하면 오래가는 강자,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인지에 대해 논한다는 점에서 문제의식과 주제가 《노자 도덕경》과 똑같다. 《도덕경》처럼 시적인 언어와 운문은 아니지만 그의 책을 보면 마키아벨리에 비해 훨씬 간결해 명언 모음집이라는 느낌이 들며,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독파가 가능하다.
 
  노자가 한비자에 비해 격정적인 어조가 보이지 않고 문장을 쓰는 온도가 다른 것처럼, 귀차르디니의 《통치자의 지혜》 역시 《군주론》과 글쓰기의 형식만이 아니라 온도 자체가 다르다. 큰 틀에서 문제의식은 비슷하지만, 그리고 역사학자라는 자의식은 같지만 서 있는 위치와 누리던 것들이 달라서였을까? 고전(古典) 대 고전으로서 《한비자》와 《도덕경》의 관계와 《군주론》과 《통치자의 지혜》의 관계는 정말 흡사하다.
 
 
  체사레 보르자, 《군주론》의 실제 모델
 
《군주론》의 모델이 된 체사레 보르자.
  과거 사례만이 역사가 아니다. 자신이 살던 시대의 모습, 체험한 사례 역시도 역사일 것이다. 늘 역사에서 흥망의 모델을 찾아보려고 한 마키아벨리에게 가장 강력한 역사적 모델은 바로 체사레 보르자(Cesare Borgia·1475~1507)라는 인물이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사생아로 태어나 16세기 초 교황군의 총사령관으로 이탈리아 중북부를 정복한 시대의 영걸(英傑)이자 강타자(强打者)다. 뛰어난 외모의 소유자로 두려움과 증오, 부러움을 동시에 받은 인물인데, 각종 살해사건과 납치사건, 독살사건, 성직 매매, 추문과 스캔들 등의 배후자로 지목되기도 한 악마적 인물로 아이콘화된 사람이다. 당대 최고의 문제적 인물이자 논쟁적 인물인데, 마키아벨리에게는 영웅이자 이상적 모델로 보였나 보다.
 
  마키아벨리는 체사레 보르자를 2년(1502~1503) 동안 직접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러면서 그에게서 새로운 군주의 모델을 발견하였다. 이것이 후에 《군주론》에서 구체화(具體化)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사자의 용기와 여우의 간지(奸智)’도 체사레 보르자에게서 보고 배운 게 아닌가 싶다.
 
  〈이 군주는 참으로 훌륭하고 위대한 비르투(Virtu)를 가진 인물이다. 싸울 때는 용맹하고 아무리 어려운 일도 그의 손에서는 하찮은 문제가 된다. 영광과 정복을 위해서는 쉴 줄도 모르고 고통과 위험도 마다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가 어떤 곳에서 떠난 것을 눈치채기도 전에 그는 벌써 다른 곳에 가 있다. 가장 훌륭한 이탈리아인들을 신하로 두었고, 그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더욱이 그가 견실하게 이뤄낸 무서운 승리는 완벽할 만큼 운명의 힘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1502년 6월 우르비노에서 처음 체사레 보르자를 만났고, 그를 만난 후 피렌체에 보낸 보고서이다. 인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평가를 한다. 그는 체사레 보르자를 유능하면서도 냉혹하고 추진력과 결단성을 갖춘 군주의 모델로 제시하기도 했는데, 《군주론》 7장에서 체사레 보르자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체사레 보르자의 전체적인 행적을 살펴보면 그가 미래 권력을 위해서 강력한 토대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음을 알 수 있다. 신생군주에게 제공할 만한 모범적인 지침으로 그의 활동을 예시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그렇기에 그의 행적을 논의하는 것이 무의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비록 그가 수립한 새 질서가 결실을 맺지 못했지만, 이는 그의 잘못이 아니라 예외적이고 악의적인 운명으로부터 비롯된 일이기도 했다.〉 (《군주론》 7장)
 
  말뿐인 사람 말고 실행력과 과단성을 갖춘 사람을 마키아벨리는 원했다. 피렌체가 살아남고 강해지고 이탈리아가 통일되기를 원했기에 마키아벨리는 행동력을 원했다. 그런 마키아벨리의 눈에는 체사레 보르자만 한 모범적 모델이 없었나 보다.
 
 
  왜 역사를 공부하나
 
  마지막으로 우리가 왜 역사를 공부하고 배우는지에 대해 말하고 싶다. 흔히 교훈을 얻기 위해서 역사를 배운다고 한다. 그렇다. 한비자도 마키아벨리도 역사를 통해 교훈을 말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할까? 쉽게 말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아닐까? 교훈을 배운다는 것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어리석은 인간이나 집단이 되지 않기 위함이고,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에서 분노를 배운다면 우리는 절대 교훈을 얻을 수 없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집단,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철저히 분노를 배제해야 한다. 특히 교육현장에서는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교육현장에서 역사를 가르칠 때 분노를 배제하는가? 외려 주입(注入)하는가?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는다’는 말을 우리는 무섭게 생각해야 한다.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된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기 위해 늘 어떤 자세를 견지해야 하는가’ ‘역사 교육은 어떻게 행해져야 하는가’, 이런 질문을 이고 살면서 심각히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고민은 없고 역사를 통해 분노를 주입하고 일방적 피아관계(彼我關係)를 설정하도록 강요당하고 극단적 인식만을 배운다면, 역사 공부는 안 하느니만 못 할 것이다. 차라리 역사 수업이 사라지는 것이 나을 것이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사람들이 학교에서 아이에게 역사를 어떻게 가르치는지 궁금하다. 극단적 인식과 유연하지 못한 피아관계 규정, 이런 의식을 가진 젊은이들의 모습에서 그들이 자유로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한비자와 마키아벨리처럼 우리 역사에서 교훈만 배우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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