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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사상 크로스 〈5〉 묵자와 홉스

거짓이 횡행하는 한국, 계약·신뢰 강조한 묵자에게 배워야

글 : 임건순  동양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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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스승·王이 아니라 하늘에서 통치 기준 구해야… 唯一神인 하늘과 인간 간의 계약관계 상정
⊙ 묵가가 工人·傭兵 집단이라는 점도 계약적 思考에 영향… 上同과 兼愛라는 사회계약사상으로 발전
⊙ 종래 묵자를 민중의 입장에서 사회민주주의적으로 해석… 계약·신뢰를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자본주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어

임건순
1981년생. 서울시립대 행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수료 / 저서 《제자백가 인간을 말하다》 《묵자: 공자를 딛고 일어선 천민 사상가》 《손자병법: 동양의 첫 번째 철학》 《생존과 승리의 제왕학 병법노자: 생존의 기술, 승리의 조건, 변화의 전술》 《제자백가 공동체를 말하다》 《순자: 절름발이 자라가 천 리를 간다》 《세, 동아시아 사상의 거의 모든 것》 등
묵자는 계약과 신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사진=셔터스톡
  〈천하고 강하고 약한 나라 막론하고 모두 하늘의 도시(지역)이며, 나이가 많고 적고 귀하고 천하고를 막론하고 모두 하늘의 신하이다.(今天下無大小國,皆天之邑也. 人無幼長貴賤,皆天之臣也)〉
 
  하늘, 하느님을 말한 사상집단이 있었다. 바로 묵자(墨子)다. 묵자는 하느님을 말했고, 묵자를 따르는 묵가 집단 구성원들은 하느님을 믿었다. 어쩌다가 하느님을 말하고 믿게 되었을까? 동양에서는 안 그래도 유일신(唯一神)의 전통이 없는데 말이다.
 
  매일같이 벌어지는 참혹한 전쟁, 부지런히 일하지만 일한 것들을 모조리 빼앗기기만 하는 현실. 육형(肉刑)이 일상화되고 늘 억울하지만 어디에 하소연할 곳도 없던 그들은 산에 올라 하느님을 울부짖은 게 아닐지. “하느님, 하느님, 어디 계시나이까” 하면서 말이다. 힘없는 사람들, 늘 고통받던 사람들이 하느님을 만들어낸 듯하다. 너무 참혹했던 당대 민중의 피눈물과 피울음이 그렇게 형상화(形象化)된 것 같다.
 
  그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동등한 존재로 환원된다. 모든 나라가 똑같이 하느님의 도시고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신하이기에 힘이 약하고 세고, 나이가 많고 적고, 신분이 귀하고 높고 이런 차이는 모두 지워지며 상대화된다. 분명히 묵자는 하느님을 말한 유일신론자다. 동양에서 유일한 유일신 사상가다.
 
  유일신 하면 우선 기독교를 떠올리는 분이 많을 텐데, 여러 가지로 기독교 신앙과 묵자 철학이 닮은 구석이 많은 게 사실이다. 계약(契約)을 말하고, 인간의 자유의지(自由意志)와 인간과 신 사이의 단절을 말하고, 개인주의의 성립에 준 영향 등 기독교와 비슷한 면이 많은 게 사실이다.
 
 
  儒家의 天命사상
 
  묵자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말도 했다. 범신론의 유교와 여러 가지로 맞서고 상극(相剋)인 사상가로서 그들이 말하는 하느님, 하느님의 뜻인 천지도 유가사상에 반(反)한 안티테제적 성격이 강하다. 유가(儒家)의 주례(周禮), 주례 뒤에 있는 천명(天命). 주례와 천명으로 대변되는 질서를 공격하기 위해, 혹은 주례와 천명으로 대변되는 질서를 대체하기 위해 묵자는 하느님을 말했다.
 
  제경공(齊景公)이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孔子)는 이렇게 답했다.
 
  〈임금은 임금다운 노릇을 하며, 신하는 신하다운 노릇을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다운 노릇을 하고, 아들은 아들다운 노릇을 한다.(君君臣臣父父子子)〉 《논어》 안연편
 
  각자가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처신하고 행동하면 된다. 그렇게 주례에 규정되어 있다. 이름[名]으로 대변되는 역할, 신분에 맞게 각자가 해야 할 일과 보여야 할 몸가짐이 있고 권리와 의무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렇게 따르기만 하면 된다.
 
  주례에 규정된 대로 자신의 이름에 걸맞은 역할수행과 행동규범을 지키면 되는데, 공자는 주례만이 아니라 천(天)과 천명(天命)도 말했다. 천과 천명은 주례의 토대이자 근본이다.
 
  내 안의 선한 본성 혹은 선한 본성대로 사는 것이 바로 하늘의 명(命)이다. 하늘의 명을 따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주례로 대변되는 질서와 관습을 지키면 된다. 인간 안에 내재된 도덕심을 주례라는 틀과 형식으로 발산하면 되는데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면 세상은 위대한 조화를 이룰 수 있다. 그렇게 살라고 하늘은 명을 내렸다. 그렇기에 천명인 것이다.
 
 
  묵자, 天志를 말하다
 
  문제는 그 하늘의 명으로 뒷받침되는 주례는 평등과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수직적 신분질서다. 이런 수직적·차별적인 면만이 문제가 아니다. 시간이 갈수록 현실에서 지배력을 상실한 것이 진짜 문제였다. 춘추(春秋)시대에서 전국(戰國)시대로 가면서 주(周) 왕실의 권위는 점점 무력(無力)해지고 모두가 부국강병(富國强兵)을 꿈꾸는 상황에서 더 이상 현실에서는 통하지 않는 규범이 된 것이다. 현실에서 규정성이 없었고, 백성들을 보호해줄 수 없었다.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억압적 질서를 정당화하기도 하는 기만적 수사로나 통하게 된 게 바로 주례와 주례 뒤 천명이라는 것이었다.
 
  묵자는 천명은 구(舊)시대의 관념이고 차별적 질서일 뿐이며 지금 현실에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리고 천명을 내세우는 것은 인간의 무기력(無氣力)과 비윤리(非倫理)를 옹호하거나 조장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묵자가 천명 대신 찾은 대안(代案)이 천지(天志)다.
 
  공자가 말하고 유가가 내세운 주례와 천명을 보면, 신(神)과 종교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던 중세적(中世的) 질서를 정당화하고 그 질서에 의문을 품지 못하게 한 유럽 중세의 자연법(自然法)과 유사한 게 사실이다. 홉스는 신이 아니라 인간 이성(理性)에 의해 만들어지는 법으로서 새로운 자연법을 제시하며 중세적 질서를 무너뜨렸다. 그와 유사하게 묵자도 고대(古代) 동아시아의 자연법인 주례와 천명을 천지로써 부수며 새로운 질서를 기획한 것이다.
 
  앞에서 묵자는 본래 공인집단(工人集團) 출신이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묵자는 정확한 기준과 표준을 강조한다. 정확한 측량기구와 도구로 물건을 만들어내야 좋은 장인(匠人)이라고 할 수 있듯이, 국가를 운영하고 설계해서 이끌어가야 하는 사람은 정확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틀림없는 컴퍼스와 잣대, 직각자와 저울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 기준을 어디에서 가져와야 할까?
 
 
  부모·스승·王을 본받지 마라
 
  〈무엇을 천하와 나라를 다스리는 법도로 삼으면 좋을까? 만약 모두가 자신의 부모님만 본받는다면 어떻게 될까? 천하에 부모 노릇을 하는 자는 많지만 어진 자는 적다. 만약 저마다 자신의 부모를 본받는다면 이것은 어질지 않음을 본받는 것이다. 어질지 않음을 본받는 것은 법도로 삼을 수 없다.〉 《묵자》 법의(法儀)편
 
  이것은 단순히 부모 중에 시원치 않은 인간이 많으니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모는 정확히 부모라기보다는 친족집단(親族集團)을 상징하는 것이다. 친족·씨족(氏族) 내부에서 배우고 키워 갖는 감정, 유가가 말하는 효제(孝悌)와 효제에서 기인한 인(仁) 등 이러한 규범들을 부정한 것이다. 그것들이 친족집단 내부에서는 몰라도 전체 사회를 다스려가는 기준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묵자는 부모만이 아니라 스승을 배울 생각도 하지 말라고 했다.
 
  〈만약에 모두가 자신의 스승만을 본받는다면 어떻게 될까? 천하에 스승 노릇 하는 사람은 많지만 어진 사람은 드물다. 만약 모두가 자신의 스승을 본받는다면 이것은 어질지 않음을 본받게 되는 것이다. 어질지 않음을 본받는 것은 법도로 삼을 수 없다.〉 《묵자》 법의편
 
  단순히 선생에게서 배우지 말자고 하는 것이 아니다. 스승으로 대변되는 구(舊)문화, 관습 등 전통으로 이어져온 것들이 그저 기존의 것이라고, 과거의 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옳다구나 긍정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특히 그것을 지금 통치의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되며, 세상을 다스릴 규범으로 생각해 맹목적으로 준수하지 말자는 것이다. 묵자는 부모, 스승에 그치지 않고 왕(王)도 이야기를 한다.
 
  〈만약 모두가 자신의 왕만을 본받는다면 어떻게 될까? 천하에 왕 노릇 하는 자는 많지만 어진 사람은 적다. 만일 모두가 그의 왕을 본받는다면 이는 어질지 않음을 본받는 것이다. 어질지 않음을 본받는 것은 법도로 삼을 수 없다. 그러므로 부모와 스승과 왕은 나라를 다스리는 법도로 삼을 수 없다.〉 《묵자》 법의편
 
  왕도 본받지 말자고 한다. 왕도 부모나 스승처럼 어질지 못한 인간이 많기에 왕이라고 그저 떠받들거나 그들의 언행을 통치의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人治를 부인
 
  앞서 묵자는 성악설자(性惡說者)라고 했다. 위 펼쳐진 주장들에서도 묵자는 현실의 인간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그렇다. 법의편에서 묵자는 단순히 유가식의 군사부일체 논리를 부정하고 반대하는 게 아니라 유가식의 인치(人治)를 통째로 부정하는 것이다. “인치, 즉 사람이 다스려선 안 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의 감정과 정서는 통치에서 철저히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언제든 변하고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인간 내부의 것들이 통치 기준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나라를 다스리는 법도로 삼아야 하는가? 내가 생각하기에 하늘을 법도로 삼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하늘의 운행은 광대하면서도 사사로움이 없고, 그 베푸는 은혜는 두터우면서도 공덕으로 내세우지 않으며, 그 밝음은 오래 가면서도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왕(聖王)께서는 이것을 법도로 삼았던 것이다.〉 《묵자》 법의편
 
  유가는 철저히 인치를 고집한다. 성선론(性善論)의 유가는 인간 내부의 선한 감정, 도덕, 이성에서 연역되는 것으로 세상을 다스리자고 했지만, 묵자는 반대했다.
 
  묵자만이 아니라 법가(法家)와 도가(道家) 같은 성악설 진영 전부가 인치를 반대했다. 인간 마음은 늘 위태롭다. 변덕을 부린다. 이중성과 모순, 위선(僞善)으로 발전되기 쉽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국가를 경영하고 세상을 다스리자고? 안 된다. 인간 밖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법가는 법을, 도가는 자연의 질서에서 보이거나 통찰 가능한 도(道)로, 묵가는 하느님의 뜻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오직 하느님의 뜻이 사람과 정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 정사가 옳은지 그른지 사람들의 행위가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늘의 뜻에 순(順)하는지 반(反)하는지 그걸 보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그 하늘의 뜻이란 게 대체 뭘까.
 
 
  묵자의 義政
 
  유가의 하늘은 사람들 하나하나에 담겨 있고 구체적 의사와 호오(好惡)의 감정이 없다. 하지만 묵가의 하느님, 저 위에 홀로 계시는 그분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명확하고 감정도 있다.
 
  〈그렇다면 하늘은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싫어하는가? 하늘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며 서로 이롭게 하는 것을 원하지,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며 해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묵자》 천지상 (天志上)편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침략하거나, 큰 집안이 작은 집안을 빼앗거나, 강자로서 약자를 괴롭히거나, 수가 많은 편이 적은 편에게 난폭한 짓을 하거나, 또 교활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속이거나 하는 일 이것이 바로 하늘이 싫어하는 일이다. 하늘이 좋아하는 것은 힘 있는 사람은 서로 도와주고, 도(道)가 있는 사람은 서로 교화하고, 재물이 있는 사람들은 재물을 서로 나누어 주는 것이다.〉 《묵자》 천지편
 
  《묵자》 텍스트를 읽다 보면 의(義)로움, 특히 하느님이 원하는 의로움이 많이 나온다. 그래서 기독교와 유사하다는 느낌이 더욱 강하게 든다.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공격하지 않고, 큰 집안이 작은 집안을 빼앗지 아니하며, 강한 자는 약한 자의 것을 강탈하지 않고, 귀한 자는 천한 자에게 오만하지 않으며, 지략이 많은 자는 어리석은 자를 속이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반드시 위로는 하늘에 이롭고, 가운데로는 귀신에 이롭고, 아래로는 사람들에게 이로울 것이다. 이 세 가지가 다 이롭게 되면 이롭지 않은 것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을 가져다 그들에게 붙여 성왕이라 부르는 것이다.〉 《묵자》 천지상편
 
  모두 하늘의 나라이고 하늘의 백성들인데 서로 괴롭히고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원리만이 관철되어서야 되겠는가? 안 된다. 의로움을 행해야 한다. 의로움을 행하면 사람에게 이롭고, 하느님에게도 이롭고, 하느님의 뜻을 대행하는 귀신에게도 이로울 거라고 하는데, 이런 의로움을 정치로써 행하는 것을 의정(義政)이라고 했다. 의정을 행하는 이는 성인군주라 했다. 하지만 현실은 불의를 행하는 위정자들이 많았나 보다. 묵자는 그들을 천적(天賊)이라고 했다. 하느님이 싫어하는 바를 일삼는 ‘하느님의 적’이라는 것이다.
 
 
  묵자, 계약을 말하다
 
유대의 하느님은 하늘의 뭇별을 보여주며 아브라함에게 후손들이 창성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도 일종의 계약 관계이다.
  묵자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야 한다(順天)”고 말했다. 순천의 주체는 국가다. 통치권력, 행정력이다. 정치와 행정이 하늘의 뜻에 기반하는 것, 즉 의정·겸애(兼愛)가 바로 순천이다. 순천을 하면 군주와 사람은 상을 받는다. 하지만 순천이 아니라 반천(反天)을 하면 벌을 받는다.
 
  〈하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모두를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이롭게 해주어 반드시 하늘의 상을 받을 것이다. 하늘의 뜻에 반하는 자는 사람을 차별하여 서로 미워하며 서로 해치기에 반드시 하늘의 벌을 받을 것이다.〉 《묵자》 천지상편
 
  하늘은 왜 상을 내리고 벌을 내리는 것일까? 그냥 옳은 일을 했으니 상을 주는 것이고, 나쁜 일 했으니 벌을 내리는 것일까? 정의와 응보(應報)의 관념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계약(契約)의 맥락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하늘과 인간이 계약을 맺은 것이다. 약속을 했는데 약속을 지키면 약속한 대로 상을, 약속을 어기면 약속한 대로 벌을 내리는 것이다.
 
  그런데 왜 계약일까? 기독교를 떠올리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유일신을 믿는 종교는 사실 계약 아닌가? 계약의 종교, 약속의 종교 아닌가? 구약(舊約), 신약(新約), 모세의 십계명(十誡命)도 계약 아닌가? 기독교도, 이슬람교도, 유대교도 모두 약속의 종교다.
 
  묵자도 마찬가지다. 약속이고 계약이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인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를 어떻게 부릴 수 있을까? 결론은 계약이다. 기독교가 그런 것처럼 묵자도 계약을 말한다.
 
  묵자 사상을 보면 선택지와 옵션을 두고 ‘골라봐라’ 식으로 이야기하는 부분이 많다. 이 역시 계약적 사고와 직결되는 것이다. 계약이 뭔가? 더 좋은 조건, 더 좋은 옵션으로 성사시키기 위한 게임이고 씨름 아닌가. 거래를 위해 계약을 하는 것이고 거래 당사자는 당연히 더 좋은 조건의 계약을 위해 전력(全力)을 다한다. 자유의지, 선택지를 두고 고민하는 존재, 계산하는 이성, 유일신… 묵자는 계약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사상 요소들이 많다.
 
  반면에 유가는 ‘자식 된 도리’ ‘부모 된 도리’, 이런 식으로 당위(當爲)로 말한다. 기본적으로 유가는 거래 관념이 없는 사상이다. 그러니 당연히 계약 관념이 있을 수 없다. 당위 관념을 전제로 하고 백성을 적자(赤子), 즉 어린아이로 보는 유가는 계약 관념을 가질 수 없다. 백성을 판단능력과 계산능력을 가진 주체로 보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유가는 누구의 아들, 누구의 신하, 누구의 아버지, 이렇게 인간을 단독 개체로 보는 게 아니라 철저히 관계적(關係的) 존재로만 보기에 계약 관념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한국인이 거래 관념과 계약 관념이 취약한 것 뒤에는 유교의 책임이 상당하다고 본다.
 
 
  ‘공짜는 없다’
 
  묵자는 유일신 관념을 깔고 있다. 본래 공인(工人)들이다. 주문을 받고 주문받은 대로 상품을 만들어 건네며 먹고사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만든 물건을 시장에서 거래도 했을 것이다. 이처럼 묵자가 공인집단이란 특성도 계약 관념, 거래 관념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묵자가 용병(傭兵) 집단으로서 활약했다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용병이라고? 본인들이 천군(天軍)이라고 해서 의로운 무사, 의로운 군대를 자임하며 약소국들에 들어가서 강대국의 침략전쟁과 맞서 싸운 게 아닌가? 그렇다.
 
  하지만 대가(代價) 없이 싸운 것일까? 목숨을 걸고 싸우고 죽거나 크게 다치는데 아무런 조건 없이 싸웠을까? 아니다. 대가는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대가를 받았다고 해서 그들의 의로움과 천군으로서 보여준 그들의 기백, 헌신이 빛이 바랄 수는 없는 일이다. 당시 묵자 무리가 아니면 누가 약소국들에 가서 싸우면서 민중을 지켰을까? 필자는 묵자 집단에 용병 집단 성격이 있는 게 계약 관념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사실 이것은 서구(西歐)도 마찬가지다. 서구는 지력(地力)이 약한 밀 문화권이기에 늘 밖에서 교역을 해야 했다. 유대·기독교로 인한 유일신 관념도 있었다. 그 두 요소가 계약 관념의 발전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여기에 더해 동양과 달리 용병의 역사가 유구했던 것도 계약 관념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용병은 철저히 계약이다. 대가를 어떻게 얼마나 주기로 사전에 약속한다. 중세 유럽을 보면 용병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묵자도 사실상의 용병 집단이다. 묵가(墨家) 텍스트를 보면, 다소 속된 말로 맨입에는 움직이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의 텍스트에 ‘공짜는 없다’라는 관념이 잘 보이고 구체적 일화까지 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전투에서 대가 없이 움직일 리 있을까?
 
  무엇보다 용병 집단도 하나의 집단과 단체, 사회다. 그 단체가 계속 유지·운영되려면 어디까지나 돈과 재화가 필요하다. 당연히 일을 치를 때 대가를 약속받고 움직일 수밖에 없다.
 
 
  上同과 兼愛
 
  홉스와 같은 사회계약론을 묵자가 괜히 말한 것이 아니다. 계약론적 사고(思考)를 하고 거래 관념이 있으니 국가와 백성을 서로 거래하는 관계로 본 것이다. 계약 관념에 투철한 사람들이니 국가는 계약을 통해 성립하고, 국가와 백성 둘 사이 약속을 통해 통치의 정당성(正當性)이 만들어진다는 사고를 한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은 거래다. 계약을 통해 일이 이루어져야 하고 계약을 통해 거래가 성사될 수 있다. 묵자의 사고가 그러했다. 그래서 묵자는 믿음[信]을 많이 강조했다. 약속하면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거자 맹승(孟勝)의 일화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묵가 집단은 신뢰에 살고 신뢰에 죽었다. 약속의 사상, 계약의 사상이라 그런 것이다.
 
  국가도 계약을 통해 만들어지고, 백성은 국가와 계약을 맺은 거래 당사자다. 앞서 말했듯이 《묵자》 상동(上同) 편에 보면 홉스의 《리바이어던》과 아주 흡사한 이야기가 나온다. 통치권력이 없는 상태에서 무질서가 횡행한다. 불의(不義)가 일상이 되고, 인간 생존은 위협받고 약자들은 늘 죽어 나간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여서 국가를 만들어내고 국가에 자신들의 권리를 양도(讓渡)한다. 그러면서 통치권력이란 것이 만들어지는데 그 계약서에 백성들은 도장을 찍는다. 우리의 권리를 위임하고 통치에 순응·복종하겠다고.
 
  그런데 계약은 거래고 교환이다. 권리를 양도하고 통치에 순응하는 것을 주는 대신에 그들도 받는 것이 있다. 주기만 하는 게 아니라 받는 게 있는데, 바로 겸애다. 질서다. 생존의 보장이다. 그것을 국가는 우리에게 주어야 한다. 우리가 의무를 준수하는 한 반드시 그것을 받아야 한다.
 
  백성들이 통치에 순응하고 권리를 국가에 양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상동이다. 위[上]와 같이[同]하는 것이다. 위를 따르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의무다. 그리고 계약 한쪽 당사자의 의무는 바로 상대방의 권리다. 즉 백성의 의무인 상동은 국가의 권리인데, 국가도 의무를 가진다. 바로 겸애다. 그것은 백성의 권리가 된다.
 
  이렇게 상동과 겸애가 교환되는데, 이는 약속하는 것이다. ‘백성인 우리는 철저히 상동할 테니 국가 너는 겸애를 줘야 한다.’ 국가는 일방적으로 착취하거나 희생을 강요하고 순종을 요구할 수 없다. 국가 자신이 의무를 다하는 한에서만 국민들에게 의무를 다하라고 말할 수 있다. 백성들도 국가를 상대로 일방적으로 떼를 쓸 수 없다. 계약서에 써 있는 의무를 엄수하는 한에서 상대의 계약이행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유일신을 섬긴 것도 그렇고, 국가와 백성을 철저히 계약관계로 대등한 약속 관계자로 설정한 사고도 그렇고, 참 개성 강하고 재미있는 사상가가 묵자다. 이래저래 묵자는 동양사상 전통에서 너무 이질적인 사상가 집단인데, 그것이 그들의 매력이다.
 
 
  묵자의 자본주의적 재해석
 
묵자는 사회민주주의적으로뿐 아니라 자본주의적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과거에는 묵자를 사회주의 내지 사회민주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신영복·기세춘·문익환·홍근수 등이 그랬다. 필자도 한때 그러한 해석을 시도했다. 서구 학자들도 묵자를 사회민주주의적 맥락으로 해석했다. 복지국가(福祉國家)를 꿈꾼 사상가, 북유럽식 체제를 바란 사상가로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묵자에 대해 자본주의적 해석도 해보는 게 옳지 않을까. 묵자의 사상을 보면 노동자의 자의식(自意識)이 담겼고, 힘들게 사는 민중의 한(恨)과 눈물이 담겨 있기에 얼마든지 사회주의적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약속과 계약의 정신, 속이지 않음, 신뢰에 목숨을 거는 덕목 등을 보면 얼마든지 자본주의적 해석도 가능하다고 본다. 한국 사회에 부족한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 시장경제의 융성에 있어서 피와 같다는 그 사회적 자본의 형성에 묵자 사상이 활용될 수 있다는 얘기다. 사실 다들 강조하지 않는가? “시장경제·자본주의는 신뢰와 신용을 먹고 자란다”고. “서양과 동양의 차이는 계약과 보험, 신뢰에서 갈렸다”고. 서양은 계약과 보험, 신뢰를 통해 위험을 분산하고 더욱 효율이 향상되는 협력체계를 만들어왔는데, 동양은 그런 것들이 없었기에 서양에 역전당해 한참을 뒤처졌다고 한다.
 
  문제는 지금 대한민국이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저신뢰(低信賴) 사회다. 그렇기에 낭비되는 사회적 자원과 에너지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우리는 어떻게 사회의 신뢰자원을 쌓을 것인가? 국가에 신뢰자원 형성을 막는 것들이 무엇인가? 묵자에 대한 자본주의적 해석을 통해 나름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신뢰사회를 위하여
 
  묵자를 사회민주주의적으로 해석한다고 해도 이 부분은 중요하다. 우리 사회에서 많은 사람이 대안적 체제로 모색하는 사회민주주의는 정직과 신뢰, 신용, 타협과 약속에 대한 철저한 준수, 이런 것들이 없으면 절대 할 수 없는 체제다. 가짜로 보조금 타내고 문서 위조해서 복지 혜택 누리려 들고, 일상에서도 약속한 이후 딴소리하고 거짓말을 쉽게 알고, 진영논리에 따라 거짓말을 서슴지 않고 옹호하는 그런 사회와 문화에서 제대로 된 사회민주주의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한국에서 시장경제가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 또 성숙한 복지국가가 이 땅에 뿌리 내리기 위해서라도 이제 신뢰와 신용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인식하고 교육해야 한다. 약속을 귀중히 여기고 말의 무게를 아는 사회, 아니면 말고가 아니라 거짓말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회, 신뢰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가르치는 사회, 룰(rule)과 합의를 진영과 당파를 떠나 존중할 줄 아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석유 한 방울 안 나고 천연자원 없는 것이 무엇이 부끄러운가? 신뢰라는 자원을 만들어내지 못한 게 진심 부끄러운 일 아닌가? 신뢰라는 자원을 이제라도 만들어서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어떨까?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아니다. 신의예지인(信義禮智仁)이다. 그것이 사회의 상식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묵자에게 관심 가져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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