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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Q의 시 읽기 〈38〉 로버트 번스의 ‘올드 랭 사인’과 韓黑鷗

옛 친구와 지낸 날은 기억조차 스러졌는가!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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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국가의 곡조로 쓰인 ‘올드 랭 사인’, 민족시인 한흑구가 完譯
⊙ 우리나라 최초로 흑인의 시를 번역… 일본 식민통치의 아픈 상처를 그려
스코틀랜드의 민족시인 로버트 번스.
  옛날
  로버트 번스(번역 한흑구)
 
  옛날의 친구들이여 이제는 잊어
  기억조차 없어졌는가
  옛날의 친구와 지낸 날은
  기억조차 스러졌는가!
  친구! 옛날을 기념하자!
  그 옛날을 기념해—
  반가운 잔을 다시 들어
  그 옛날을 기념하자 (—합창—)
  그리고 너는 네 잔을 마시어라.
  나는 또한 내 잔을—
  우리는 반가운 잔을 다시 들어
  그 옛날을 기념하자!
  오랜 그 옛날을—
  옛날에 우리는 메 위에 올라
  들꽃을 꺾으며 놀았건만
  괴로운 살림은 지금까지
  얼마나 우리를 시달리었나!
  아! 옛날이여—
  옛날에 우리는 냇가에서
  아침저녁 놀뛰었건만
  지금은 넓은 바다가
  우리의 새를 막았구나!
  아! 옛날이여 —
  그러면 힘 있는 네 손은 내 손에
  내 손은 또 네 손 위에
  옛날을 위해 힘 있게 마주 잡고
  다시 한 번 이 잔을 들어라!
  아! 옛날이여— (1796)
 
 
  Auld Lang Syne
  Robert Burns
 
  Should auld acquaintance be forgot,
  And never brought to mind?
  Should auld acquaintance be forgot,
  And auld lang syne!
 
  For auld lang syne, my dear,
  For auld lang syne,
  We’ll tak a cup o’kindness yet,
  For auld lang syne.
 
  And surely ye’ll be your pint stowp!
  And surely I’ll be mine!
  And we’ll tak a cup o’kindness yet,
  For auld lang syne.
 
  We twa hae run about the braes,
  And pou’d the gowan fine;
  But we’ve wander’d mony a weary fit,
  Sin’ auld lang syne.
 
  We twa hae paidl’d in the burn,
  Frae morning sun till dine;
  But seas between us braid hae roar’d
  Sin’ auld lang syne.
 
  Chorus
 
  And there’s a hand, my trusty fiere!
  And gie’s a hand o’ thine!
  And we’ll tak a right gude-willie waught,
  For auld lang syne.
 
 
로버트 테일러와 비비안 리가 출연한 영화 〈애수〉의 주제곡으로 ‘올드 랭 사인’이 쓰였다.
  스코틀랜드 민족시인 로버트 번스(Robert Burns·1759~1796)가 쓴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은 스코트어로 ‘오랜 옛날부터’(영어 old long since)라는 뜻이다. 영미권에서는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며 부르는 축가로 불렸다. 한국에서는 ‘옛날’ ‘석별’이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1900년대 초 애국가를 이 이별 곡조에 붙여 민중이 불렀다. 3·1운동 때도 ‘올드 랭 사인’ 멜로디로 애국가를 불렀다고 한다. 1948년 대통령령(令)에 따라 안익태가 작곡한 ‘한국환상곡’이 애국가 멜로디로 정해지기 전까지는 ‘올드 랭 사인’이 애국가의 멜로디로 사용되었다.
 
  1953년 무렵 영화 〈애수〉가 상영되면서 이 노래가 다시 소개되었고, 이후 졸업식 환송곡으로 많이 불렸다.
 
  비공식 기록이지만 ‘올드 랭 사인’을 최초 완역(完譯)한 이가 한흑구(韓黑鷗)다. 그는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단 한 편의 친일(親日) 문장도 남기지 않은 영광된 작가”를 넘어 “시 한 줄에도 나라를 생각했던 시인”이었다. 올해 들어 시단(詩壇)에서 민족시인으로 재조명하고 있다. 문학평론가 한명수씨는 최근 그의 시 정신을 기리기 위해 《한흑구전집 1: 시전집》(마중문학사 刊)을 펴냈다.
 
 
  검은 갈매기, 1929년 2월 미국으로 떠나다
 
문학평론가 한명수씨가 최근 펴낸 《한흑구전집 1: 시전집》(마중문학사 刊).
  흑구(黑鷗) 한세광(韓世光·1909~1979)은 1909년 6월 19일 평안남도 평양시 하수구리(下水口里) 96번지에서 아버지 한승곤(韓承坤)과 어머니 박승복(朴承福) 사이 1남3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유년 시절부터 아버지 한승곤 목사가 담임하던 평양 산정현교회의 종교적 삶 속에서 성장한 그는, 조만식(曺晩植·1882~?) 선생의 문하에서 평양 숭덕학교와 숭인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 보성전문학교 수학 중 1929년 2월 미국 유학을 떠났다. 노스파크대학 영문과 졸업 후 템플대학에서 신문학을 공부하였다.
 
  미국으로 향하는 배에 ‘검은 갈매기’ 한 마리가 따라오는 것을 보고 “새 대륙을 찾아 대양을 건너는 검은 갈매기 한 마리, 어딘가 나의 신세와 같다”는 생각에 자신의 필명을 ‘흑구’로 정하였다.
 
  1926년 《진생(眞生)》에 시를, 1928년 《동아일보》에 수필을 발표하고, 1929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창간된 교민단체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에 잃어버린 조국과 고향에 대한 비감을 그린 시 ‘그러한 봄은 또 왔는가’, 미국 독립기념일을 맞아 조국의 주권 상실에 대한 아픔을 그린 시 ‘7월 4일’, 삶에 관한 성찰을 담은 시 ‘후매’ 등을 발표하며 문단에 이름을 올렸다.
 
  우리나라 최초로 흑인의 시를 번역·소개하고, 인종차별의 비인간적 행태에 민족적 현실을 대비하기도 했다. 또 언론 매체를 통해 우리나라의 일본 식민통치의 아픈 상처를 그려냈다.
 
  꽝 꽝 꽝 꽝—
  나는 오늘 이 나라 거리에서
  그들의 즐기는 노래를 듣네—
  아침부터 밤 깊도록
  그들의 ‘독립절’의 노래를—
 
  ‘자유를 달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입술이 말라 터지도록 부르짖던 그 노래를!
  한 세기가 넘은 오늘의 이 땅은
  웃음과 노래에 밤 깊는 줄도 모르네!
 
  7월 4일! 누구나 맞는 오늘이지만
  이 땅의 사람들은 왜 그리 기뻐하누—
  나는 혼자 이 땅의 거리 위에서
  가슴을 안고 숨차게 돌아 단기네—
 
  부러움과 부끄러움 속에
  거리 모퉁이에 우두커니 혼자 섰네—
  그러나 내 가슴 끓는 소리
  내 다시 주먹을 불끈 쥐고 이 거리를 달음질치네—
 
  -한흑구 ‘7월 4일’ 전문

 
문학평론가 한명수.
  1930년 3월 11일, 그는 고학의 어려운 생활 중에도 아버지 한승곤[독립유공자·흥사단 의사장(議事長) 역임])이 몸담은 흥사단에 가입(제258단우)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서약하고 헌신하면서 미주 청년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1933년 12월 31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24회 흥사단 대회’ 위원으로 참가한 후 어머니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1934년 귀국한 그는 미국 흥사단 활동의 연장선으로 평양에서 동우회 활동을 하며, 같은 해 11월에는 전영택(田榮澤·1894~1968)과 함께 종합지 《대평양(大平壤)》을 창간하고 편집주간을 맡았다. 영미문학을 국내에 소개하면서 시, 소설, 수필, 평론 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미국이 노래함을 듣는다, 그 여러 노래를 나는 듣는다,
  직공(職工)들의 그 쾌활하고 힘찬 노래를, 저마다 부르는 그 노래를,
  기둥과 판재(板材) 말리며 부르는 목공들의 노래를,
  일하러 오며, 담아주며 돌아가는 석공들의 노래를,
  배 안에서 부르는 선부(船夫)의 노래와, 갑판 위에서 저마다 부르는 선공(船工)들의 노래를,
  일터에 앉아서 부르는 화공(靴工)의 노래와, 일어서서 부르는 모자공(帽子工)의 노래를,
  제재공(製材工)의 노래와, 아침, 점심, 저녁으로 일터를 바꾸어 돌아가며 부르는, 농동(農童)의 노래를,
  그 부드러운 어머니의 노래나, 일하며 부르는 젊은 아내의 노래나, 바느질도 빨래도 하며 부르는 처녀의 노래를,
  그들은 다 그들에게 속한 노래를, 그리고 다못 그들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낮에는 낮에 속한 노래를— 밤에는 젊은이들이 한곳에 모이어,
  정다웁게도 입을 같이 벌리며 굳세게 부르는 그들의 고운 노래를 나는 듣는다.
 
  -월트 휘트먼(한흑구 譯) ‘미국이 노래함을 듣는다’ 전문

 
 
  마지막 시, ‘눈을 감지 않은 나의 冬眠’
 
시단에서 민족시인으로 재조명되고 있는 시인 한흑구.
  어머니 선종 후 한흑구는 아버지 한승곤과 함께 평양 동우회 활동을 통하여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1937년 5월 재경성기독교청년면려회에서 금주운동 계획을 세우고 〈멸망에 함(陷)한 민족을 구출하는 기독교인의 역할〉 등의 내용을 담은 인쇄물을 국내 35개 지부에 발송했다. 그러나 일제가 동우회 관련자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른바 ‘수양동우회사건’에 연루된 그는 안창호·조만식 등과 함께 치안유지법 위반 피의자 신분이 되었다. 할 수 없이 일제 탄압을 피해 평양을 떠나 평안남도 강서군 성대면 연곡리로 이주하였다. 그는 자택에 ‘성대장(星臺莊)’이라 이름을 붙이고, 손수 주변의 넓은 밭과 과수원을 일구며 일제의 압력과 굴욕을 이겨냈다.
 
  1940년 발표한 그의 마지막 시 ‘동면(冬眠)’에서 ‘눈을 감지 않은 나의 동면’으로 암흑 시기 자신의 심정을 대변하였다. 봄이 오기를 바라며 지낸 ‘동면’은 잠 속에서도 이어지는 생명의 삶이었다.
 
  실내의 동면 더구나
  온돌(溫突) 위에 동면은 부질없다.
  나는 아직 독사와 함께
  혈내(穴內)의 동면을 해본 일은 없다.
 
  눈을 감지 않은 나의 동면은
  천장 위에 사막을 온 겨울 그리어 보았다.
  나는 사막을 건너보던 일은 있었으나
  준태(駿駄)를 한 마리도 본 기억은 없다.
 
  온 겨울 하늘을 내어다보지 않았다.
  그러나 거기 바람 소리만은 늘 들었다.
  한한(閒閒)히 우뢰(雨雷) 소리를 들었으나
  겨울에 용(龍)이 떠오를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봄이 오기를 바라며
  머구리와 같이 동면을 계속한다.
  다못 앞 동리(洞里)의 연못이 썩지나 않았나
  앞 겨울 보금자리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흑구 ‘동면’ 전문

 
 
  ‘나팔과 북의 소리를 나에게 달라!’
 
한흑구가 생전 거닐었던 포항 호미곶 주변의 청보리밭 모습이다. 사진=안성용 제공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미(美) 군정 산하 서울시 행정 관계 통역관을 맡았으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1948년 경북 포항으로 내려갔다. 문학의 불모지 포항에서 신진 문인들과 함께 지역 문학의 터전을 개척하였다.
 
  자신만의 문학세계를 일구며 고고한 은둔의 사색가로 살면서 발표한 그의 수필 중 〈닭울음〉 〈나무〉 〈보리〉 등은 중·고교 국정교과서에 오랫동안 실렸다.
 
  1954년부터 포항수산초급대학(현 포항대) 교수로 문학과 영어를 가르치면서 학생들에게 자신의 일제강점기 경험을 바탕으로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강의를 하였고, 대학의 학보를 창간하는 등 청년문화 창달에 헌신하기도 하였다.
 
  1974년 퇴직 후 창작에 열중하다 1979년 11월 7일, 70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그가 엮은 저(역)서로 《미국의 대학제도》(1948), 《현대미국시선》(1949), 《세계위인출세비화록》(1952), 《동해산문》(1971), 《인생산문》(1974) 등이 있다.
 
포항 북구 호미곶에 위치한 한흑구 문학관 전경이다. 이전 논의가 한창이다.
  병사들이 행진하는 ‘브로드웨이’를 나에게 달라! 나팔과 북의 소리를 나에게 달라!
  (중대 혹은 연대의 병사들, 어떤 이들은 용감하게 출발하고, 또 어떤 이들은 돌아올 때가 되어서.
  대(隊)를 지여서 돌아오는 젊은이들, 또는 매우 늙은이들도, 피곤한 것도 아무것도 생각지 않고 행진하고 있는)
  —검은 배들이 짐을 가득히 싣고 드나드는 해안과 항구를 나에게 달라!
  오오 나를 위한 이런 것들이여! 오오 열렬한 생명이여! 변화와 충만이여!
  극장과 술집과, 큰 호텔의 삶을 나에게 달라!
  기선(汽船)의 객실도, 떼 지어 함께 선유(船遊)하는 것도, 그리고 횃불의 행렬도 다 나에게 달라!
  전쟁으로 몰리어 가는 병사들의 대오(隊伍), 무기를 가득히 싣고 쫓는 군용마차의 떼.
  몰리어 단기는 민중의 힘찬 소리와, 정열과 이 모든 광경들이여!
 
  -월트 휘트먼(한흑구 譯) ‘광휘 있는 침묵의 태양을 나에게 달라’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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