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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사상 크로스 〈3〉

묵자와 홉스

“인간은 利己的… 계산하는 존재”

글 : 임건순  동양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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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자, 인간은 利를 추구한다는 점 인정… 홉스, 인간은 情念과 理性의 존재
⊙ 홉스, 인간이 싸우는 원인으로 경쟁심, 자기 확신의 결핍, 헛된 영광에 대한 욕망(권력에 대한 욕망) 꼽아
⊙ 묵자와 홉스 모두 인간은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평등’의 논리 이끌어내

임건순
1981년생. 서울시립대 행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수료 / 저서 《제자백가 인간을 말하다》 《묵자: 공자를 딛고 일어선 천민 사상가》 《손자병법: 동양의 첫 번째 철학》 《생존과 승리의 제왕학 병법노자: 생존의 기술, 승리의 조건, 변화의 전술》 《제자백가 공동체를 말하다》 《순자: 절름발이 자라가 천 리를 간다》 《세, 동아시아 사상의 거의 모든 것》 등
묵자(왼쪽)와 홉스는 인간을 이기적이고 ‘계산하는 존재’로 보았다.
  모든 사상은 인간관(人間觀)이다. 맹자(孟子)가 되었든 순자(荀子)가 되었든 장자(莊子)가 되었든 서양의 플라톤이 되었든 애덤 스미스가 되었든, 모든 사상가는 자신만의 인간관을 가지고 있다. 그들 각자의 인간관은 자기 사상의 핵심과 직결된다. 묵자(墨子)와 홉스도 마찬가지다. 홉스가 말했다.
 
  “인간의 지혜는 책을 읽어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 인간을 이해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홉스의 책 《리바이어던(Leviathan)》 서문(序文)에서 한 말이다. 현실 정치를 논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인간이란 존재, 인간의 조건을 명확히 인식해야 고담준론(高談峻論),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담론(談論)이 아니라 현실에서 통하고 힘을 쓰는 정치철학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홉스다. 그래서 인간에 대해 아는 것을 중시했다. 묵자도 제자백가(諸子百家) 사상가 중에서 처음으로 인성론(人性論)을 말한 사람이고 리얼리즘에 입각한 인간 이야기가 돋보이는 인물이다. 여러 가지로 닮은 그들은 인간관마저 흡사하다. 욕망, 이성, 평등, 원자화(原子化)된 개인, 인간을 말할 때 과학의 영향을 받은 흔적 등이 매우 유사하다.
 
  인간관에서 도출해내는 국가관까지 비슷한데, 묵자의 인간관부터 다루어보자. 우선 그는 성악론자(性惡論者)임을 말해두고 싶다. 홉스와 비슷한 인간 이야기를 한 묵자의 인간관은 《묵자》 소염(所染)편과 상동(尙同)편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인간은 왜 싸우는가
 
  〈옛날에 백성이 처음 생김에 아직 형벌과 정치가 있지 아니할 때에, 대개 ‘사람이 의로움을 달리했다’고 한다. 이런 까닭으로 한 사람이면 곧 하나의 의로움이 있고, 두 사람이면 두 개의 의로움이 있고, 열 사람이면 열 개의 의로움이 있었다. 이런 까닭으로 사람들은 그 의로움을 옳다 하고, 남의 의로움은 그르다고 한다. 그러므로 서로 서로 비난한다. 이로써 안으로는 아버지와 자식, 형과 아우가 원망과 미워함을 짓고, 흩어져서 서로 화합할 수 없었다. 천하의 백성이 모두 물과 불, 독과 약으로써 서로 헐뜯고 해쳤다.〉 -상동 상(上)
 
  〈옛날 백성이 처음 살아서 아직 정치의 우두머리가 있지 아니할 때로 돌아가보자. 천하의 사람들이 의로움을 달리했다. 이로써 한 사람이면 하나의 의로움, 열 사람이면 열 의로움, 백 사람이면 백 의로움이 있었다. 그 사람 수가 더욱 많아지면, 그 의롭다고 이르는 바의 것이 또한 더욱 많아진다. 이로써 사람들은 자기 의로움을 옳다 하고, 남의 의로움을 그르다 한다. 그러므로 서로 서로 그르다 한다. 안으로 가서, 어버이와 자식, 형과 아우가 원한을 맺고, 모두 떨어져 흩어질 마음을 가져서 서로 조화롭게 합해질 수 없었다. 짐승이 그러함 같음에 이르러서, 임금과 신하, 위와 아래, 어른과 어린애의 마디도 없고, 아비와 자식, 형과 아우의 예도 없었다. 이로써 천하가 혼란했다.〉 -상동 중(中)
 
  정치 권력, 국가 공권력(公權力)이 없는 상황의 모습이라고 하면서 사유(思惟) 실험을 가장한 채 하는 말이지만, 사실상 묵자가 살던 시대에 대한 묘사이고 묵자가 바라보는 인간의 모습이다. 대체 왜 저렇게 싸우는 것일까?
 
 
  義는 利다
 
  묵자는 의(義)로움 때문에 싸운다고 한다. 그 ‘의’를 각자 주장하다 보니 싸운다고 한다. 왜 의라는 것 때문에 저렇게까지 싸울까? 의를 당위(當爲)나 이념(理念)으로 본다면 어쩌면 저렇게 살벌하게 싸우는 게 당연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념 때문에 벌이는 극단적 투쟁은 우리 역사에서 보던 것이고 지금도 거기서 자유롭지 않으니 말이다. 그런데 의는 이념과 주장, 대의(大義), 구호(口號) 그런 게 아니다. 이익, 이익 주장, 자기 이익에 대한 권리 주장이다.
 
  안 그래도 묵자가 말했다.
 
  “의는 이(利)로움이다(義利也).” -경상(經上)편
 
  의를 말한다는 것은 자기 이익을 주장하는 것이고, 사람 수에 비례해 의로움이 늘어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각자 자신의 이익을 물러서지 않은 채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 이익 주장이 서로 다르기에, 즉 충돌되기에 서로 싸우는 게 세상이다. 그것이 묵자가 보는 세상이고 묵자가 보는 인간의 모습이다.
 
  인간은 왜 이익을 내세우고 주장하며 싸울까. 한비자(韓非子), 순자, 상앙(商鞅), 노자(老子), 장자 등 다른 성악론자들처럼 묵자는 인간의 욕망을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공맹(孔孟)처럼 ‘욕망을 자제하자’는 소리는 하지 않는다. 욕망은 절대 현실에서 없앨 수 없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조화롭게 충돌 없이 욕망을 추구하게끔 해볼까 고민해봐야 한다. 묵자의 생각이 그러했다. 일단 인간은 욕망을 가진 존재, 그로 인해 쟁투하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자는 것이 묵자가 바라보는 인간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7환(七患)과 3환(三患). 묵자는 당시 국가에는 7가지 환란(患亂)이 있고, 백성들에게는 3가지 환란이 있다고 진단했다. 국가가 가진 7환은 국방과 국정 부문의 난맥상들로 구성되어 있다. 백성들에게 있는 3가지 재앙이란 무엇인가.
 
  “배고픈 자 먹지 못하고, 추운 자 입지 못하고, 힘든 자 쉬지 못한다. 3가지가 백성들의 커다란 재앙이라 할 수 있다.(民有三患, 飢者不得食, 寒者不得衣,勞者不得息, 三者民之巨患也)” -비악(非樂)
 
  묵자는 3환을 말하면서 의식주(衣食住)로 대변되는 인간의 기본적 욕망을 말한 것이다. 그 욕망을 어떻게든 충족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고, 그 기본적 욕망이 충족되어야 백성들 삶이 보호받는다는 것이다. 그게 겸애(兼愛)다.
 
  겸애란 사실 어려운 게 아니다. 관념적인 것도 아니고. 최대 다수에게 의식주로 대변되는 기본적 욕망을 보장해주자는 것이다. 일단 겸애로써 기본적 욕망이 충족되면서 각자의 삶이 보호받는다면, 극단적 쟁투(爭鬪) 상황은 벌어지지 않고 충돌과 균열 없는 세상으로 가는 큰길을 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저울질하는 인간
 
  인간은 욕망 때문에 싸운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욕망 그 자체는 절대 불온시하지 않은 사람이 바로 묵자다. 그런데 묵자는 욕망만이 아니라 다른 창(窓)으로 인간을 보기도 했다. ‘이성(理性)’이란 것이다. ‘서구적 이성’ ‘근대적 이성’이라고까지 하는 것은 무리일지 모르겠는데, 정확히 말하면 ‘계산할 줄 아는 능력’이라고나 할까.
 
  “잠시 두 가지 예, 두 명의 선비를 놓고 설명해보자.”
 
  “잠시 두 가지 예, 두 왕을 설정해놓고 설명해보자.”
 
  《묵자》 텍스트를 보면 반복되는 장면이 있다. 이런 상황이 있다 가정(假定)하자고 해놓고 선택지(選擇肢)를 던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묵자는 사람이 자신에게 득(得)이 되는 선택지를 고를 것이라고 낙관한다.
 
  욕망하는 존재라서 그런 것일까. 묵자가 보는 인간은 ‘계산하는 존재’다. 계산하면서 고른다. 무엇이 내게 더 이로울지 득이 될지, 내 욕망을 충족시켜줄 것인지 저울질한다.
 
  묵자는 인간을 ‘계산하는 이성’, 더 나아가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로 보는 것이다. 그렇기에 묵자는 공자나 맹자처럼 ‘이것이 옳으니까 따르려무나’ ’이것이 옳으니까 지켜야 한다’ 식의 레토릭을 구사하지 않는다.
 
  자식 된 사람이니 자식 된 도리로서, 부모 된 사람이니 부모된 도리로서, 신하인 사람이니 신하 된 도리로서 절대 어떤 상황에서도 따지지 말고 따라야 할 길이 있다? 그건 유가(儒家)의 논리일 뿐이다. 그런 식으로 당위나 의무가 있다고 말하면서 타이르거나 가르치려는 유가와 달리 묵자는 이것이 옳기도 하지만 장단기적(長短期的)으로 네게 득이 되고 네 삶을 보호해주고 그러니까 잘 생각해서 선택하라고 말한다. 조건을 달지 않는 유가와 다르다.
 
  묵가는 ‘삼표법(三表法)’도 말했다. ‘더 나은 조건의 선택지 고르는 법’을 제시한 것이다. 묵자는 지난 호에서 언급한 대로 동양철학에서는 예외적으로 계약론적(契約論的) 사고(思考)를 한다. 모든 것은 거래로 이루어진다고 본다. 나의 의무는 상대의 권리, 상대의 의무는 나의 권리다.
 
  묵자가 요구하는 겸애는 국가 권력이 행해야 할 것이고 국가 백성들에게 주어야 할 것이지만, 백성들이 거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백성들이 국가에 주어야 할 것도 있다. 백성은 겸애를 받는 조건으로 국가의 통치에 순응해야 한다. 겸애도 그렇게 거래와 교환의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겸애란 것은 국가와 백성 쌍방(雙方) 간에 거래를 약속한 계약에 기초해 있고, 그 계약이란 것은 철저히 인간의 계산하는 능력과 자유 의지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묵자가 생각하는 인간, 계산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설명은 이쯤 해두고 홉스로 가보자.
 
 
  萬人의 萬人에 대한 투쟁
 
  전편에서 본 바와 같이 홉스도 ‘자연상태(自然常態)’에서 끊임없이 투쟁하면서 살아가는 인간 모습을 말하고 있다. 묵자나 홉스나 통치 권력이 없는 자연상태를 말하면서 인간의 본성(本姓)을 논하는 게 똑같다. 홉스의 생각은 이러하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고, 자기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도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으며, 때때로 공격적이고 파과적인 행위도 서슴지 않는 반(反)사회적인 성격을 지니고 태어난 존재이다.’
 
  홉스는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bellum omnium contra omnes)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인간은 이기적 존재이기에 쟁투하는데, 이기적이라는 것은 자기 욕망만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홉스는 인간의 본래적 모습을 말하면서 단순히 욕망, 욕구라고 뭉뚱그려서 말하지는 않았다. 허영심, 비교 감정, 자기 확신의 결핍, 동일한 사물에 대한 소유욕, 영광 즉 명예의 추구, 여러 가지로 욕망을 나누어서 설명하면서, 결국 이런 욕망 때문에 극단적으로 경쟁한다고 했다. 그런 것들이 인간의 경쟁심을 심하게 부추기는데, 첫째 그 경쟁심 때문에 서로 싸운다고 한다.
 
 
  자기 확신의 결핍
 
  홉스는 두 번째로 자기 확신의 결핍(diffidence)이란 문제 때문에 싸운다고 한다. 늘 인간은 불안하다는 것이다. 늘 불안감에 휩싸인 채 사는 존재가 인간인데, 불안한 나머지 스스로 자기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공격하게 된다. 자기도 못 믿겠고 타인(他人)도 못 믿는다. 양쪽 모두에 가진 불신 때문에 늘 불안한데, 타인의 공격이 무섭고 스스로 방어할 확신이 없으니 과잉방어하면서 남을 해치고 때론 선수 치자는 식으로 타인을 공격한다.
 
  자신이 없는 사람이 더 폭력적인 경우는 너무 많다.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분명 자기 자신부터 믿지 못하는 사람인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확신이 없을 때 불신하게 되고, 불신은 언제라도 타자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제거하자는 명분을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이런 불안을 안고 사는 존재가 홉스가 보는 인간인데, 역시나 싸우는 존재다.
 
  홉스는 경쟁심과 불안 다음으로 영광 또는 헛된 영광(vain-glory)에 대한 욕망 때문에 싸우기도 한다고 했다. 영광이란 무엇인가. 명예욕(名譽慾)이다. 권력에 대한 욕심이다. 명예와 권력이라는 한정된 사회적 자원을 얻기 위해 타인에게 폭력을 가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명성을 추구하는 욕망, 이름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과 벌이는 인정투쟁(認定鬪爭)이 인간을 싸우게 한다고 보는데, 이런 인정투쟁은 선의(善意)의 경쟁보다는 폭력적이고 불공정한 경쟁으로 흐르기 쉽다.
 
  경쟁심, 자기 확신의 결핍, 그리고 헛된 영광에 대한 욕망으로 압축되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 폭력적 행위의 본성적·심리적 근원(根源)이다. 이러한 욕망이 통제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앞서 말한 그대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 모든 인간이 서로에게 늑대인 상태인 전쟁상태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홉스, “인간은 理性 더하기 情念”
 
홉스의 《리바이어던》.
  나도 남을 해칠 수 있고 남도 나를 해칠 수 있고, 더 빼앗고 더 가지기 위해 때론 과잉 방어하다 보니 서로 죽고 죽이고 뺏고 빼앗는다. 그러다 보니 인간은 특히 폭력적인 죽음에 대한 공포(fear of violent death)를 지속적으로 안고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다. ‘인간은 인간에 대해 늑대와 같다(homo homini lupus).’
 
  홉스는 그 때문에 인간은 공포의 감정을 이고 살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는 공포를 정념(情念)의 하나로서 말했다. 정념 이야기를 해보자. 홉스가 말했다. “인간은 이성 더하기 정념”이라고. 홉스는 인간 본성이 신체와 정신의 힘으로 이루어진다고 봤다. 정신은 다시 경험·이성·정념(passion), 이렇게 세 가지로 구성된다고 말했다. 이 중 이성과 정념이 홉스의 인간론에서 강조되는 개념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영원한 정신적 평정 같은 것은 없다. 왜냐하면 삶 자체는 다만 운동일 뿐이며, 감각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욕구나 공포 없이도 결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리바이어던》 6장
 
  정념이라는 말은 얼핏 잘 안 들어오는 말일 수도 있다. 쉽게 말하면 ‘감정에 따라 일어나는, 억누르기 어려운 생각, 특히 욕구나 공포 같은 이성적 판단을 압도하는 강렬한 감정’을 뜻한다.
 
  홉스는 정념 중에 특히 욕망과 공포가 인간을 지배하기 쉽다고 보는 것이다. 묵자도 전쟁과 기아, 폭정, 폭력에 떠는 인간의 모습을 말하면서 그런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치적 대안을 말하고 모색하는 경우가 많다. 공포까지도 묵자와 홉스가 공유(共有)하는 인간의 모습이고, 인간의 본성이다.
 
 
  심사숙고하는 인간
 
법가사상가 상앙.
  자, 정리 좀 해보자. 홉스나 묵자나 둘 다 자연상태를 가정하고 인간 모습을 말하면서 인간 본성을 이야기한다. 욕망 때문에 쟁투하는 모습을 들어 인간의 자연적 모습이라고 했다. 그리고 둘 다 공포라고 하는 인간의 실존(實存)도 말한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다. 홉스도 인간의 이성을 강조했다. 그가 말하는 인간의 이성을 봐도 역시나 둘이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욕망이 있고 정념에 휩싸인 채 살지만 인간이 아무렇게 행동한다? 본능대로만 행동한다? 홉스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무엇보다 홉스는 인간의 자발적 행위는 심사숙고(深思熟考)의 과정을 거쳐 결정된다고 보았다. 따지고 또 따져본 다음에 결정하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리바이어던》 6장에서 심사숙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인간은 왜 따지고 심사숙고할까. 욕망, 욕구, 그리고 공포 때문이다. 행동을 통해, 결단을 통해 내 욕망·욕구를 충족시켜야 하는데, 내 행동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어떤 결단이 내게 유리하게 작용할지 계산한다는 것이다. 어떤 행동을 택해야 내가 공포에 조금이라도 떨지 않을 상황이 오게 될지 절로 따져본다는 것이다. 이성을 가지고 무엇이 내 욕망을 더 충족시켜주고 내게 보호와 평안을 가져다주는지 숙고하고 따져보는 게 인간이다. 홉스는 그 이성을 계산이라고 말했다. 쉽게 말해 묵자처럼 저울질한다는 거다.
 
  묵자와 홉스는 ‘평등’을 키워드로 인간을 이해한 것도 비슷하다. 앞서 말한 대로 묵자는 한 사람이 있으면 한 사람의 의로움이, 열 사람이 있으면 열 사람의 의로움이 있다고 말하면서 각자가 자기 이익을 주장하는 존재라고 했다. 자기 이익을 주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모두가 평등하다. 그리고 겸애는 그 평등한 주체들이 공평하게 자기 이익을 추구하게 돕는 것이다. 더 나아가 묵자는 ‘천지(天志), 천지’ 하면서 하느님의 존재와 하느님의 뜻을 말한다. 묵자는 유일신(唯一神)을 자주 언급한다. 자신의 뜻과 생각이 하느님의 생각이자 바람이라고까지 한다. 그 신(神) 앞에서 묵자가 보는 인간은 모두가 동등한 존재로 환원(還元)된다. 그래서 묵자는 ‘동(同)’을 굉장히 강조했다. 차별을 폐지하라고 했다. 신분이 아니라 능력이란 기준으로 신분은 늘 재배치되어야 한다고 했다. 모두에게 같은 법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묵자의 동 노선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사람이 바로 상앙이다. 통일제국 진(秦)의 아버지, 법가(法家) 사상가 상앙은 ‘일(壹)’의 노선을 추구했다. 일교(壹敎), 일상(壹賞), 일형(壹刑)으로서 즉 ‘모두에게 같은 정치를, 모두에게 똑같은 상벌을 내려야 한다’ ‘법 앞에 모두를 동등한 존재로 환원시켜 일원화된 행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묵자의 평등주의가 법가에 수용된 것인데 평등이란 측면에서 인간을 말한 것도 묵자와 홉스가 서로 비슷하다.
 
 
  ‘욕망 평등주의자’ 홉스
 
  홉스는 자연상태의 논리에서 인간의 평등을 이끌어냈다. 자연이 인간을 신체와 정신의 능력에 있어 평등하게 창조함을 분명히 했다. 그러면서 사람들 사이에 두드러진 차이는 없고, 있다 해도 무의미하다고 했다.
 
  “자연은 인간을 육체적·정신적으로 평등하게 창조했다. 비록 때때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신체적으로 더 강인하다거나 정신적으로 더 기민하다 할지라도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볼 때 인간들 사이의 차이점은 그다지 크지 않다. 왜냐하면 신체의 강인함이란 면에서 볼 때 가장 약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음모를 꾸미거나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다른 사람과 연대(連帶)하면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자를 죽이기에 충분한 힘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내가 보기에 정신적 능력의 경우 육체의 힘보다 더 평등하다. 분별력이란 것은 경험과 다를 바 없고 경험은 모두 다 똑같이 집중한다면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부여되기 때문이다.” - 《리바이어던》 13장
 
  약자(弱者)라도 강자(强者)를 공격하고 죽일 수 있다는 점에서 똑같다. 서로가 서로에게 위험하고 무서운 존재, 나를 해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라는 점에서 똑같은데, 그 때문에 인간은 평등하다고 한다. 그리고 능력의 평등에서 홉스는 희망의 평등까지 말했다. ‘누군 입이고 누군 주둥이가 아니다. 동일한 욕망의 주체다’라는 것이다. 똑같은 욕망의 주체인지라 싸우는 것이지만 어쨌든 모두의 욕망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홉스는 ‘욕망 평등주의자’다.
 
 
  “지혜는 인간을 읽으면서 얻어지는 것”
 
  평등은 어디까지나 근대의 논리다. 특히 욕망에서의 평등이 근대 논리라 할 수 있다. 위계질서, 수직적 질서와 차별, 그런 질서에 차별에 대한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 전(前)근대이고 특정 계급의 욕망만을 인정하는 것이 전근대라면, 그런 질서에 대한 도전과 균열이 바로 근대로 가는 길이다. 특히 폐쇄된 욕망이 개방되는 것이 근대로 가는 데 있어 반드시 있어야 할 과정인데, 홉스는 그걸 선언한 것이다. 사람들 모두가 욕망의 주체이고 그런 점에서 평등하다고 말이다. 인간 모두를 똑같은 이익의 주체로서 봐야 한다. 그런 식의 관점이 홉스에게서 보인다.
 
  일단 이런 이야기를 해보면서 정리를 좀 해보고 싶다. 홉스는 말했다. “지혜는 책을 읽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읽으면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소크라테스도 인간에 대한 탐구를 강조했다. 그 유명한 말 있지 않은가? “너 자신을 알라.”
 
  홉스도 소크라테스와 같은 뜻으로 한 주장일까? 그는 정치를 논하려면, 대안적 체제를 생각하려면 정치적 현실의 기초이자 기본적 상황인 인간에 대해 알아야 하기에 인간에 대해 탐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인간에 대한 탐구는 개별적 인간인 ‘너 자신’에 대한 직접적 관찰과 그로부터의 반추(反芻), 추론(推論)을 통해 가능하고 또 그렇게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 자신을 알라고 한 것이다. 너 자신을 보면서 알아야 한다. 사람의 감정과 생각, 정념은 서로 유사하다는 것을. 그것을 지각하고 깨달아야 한다. 다른 사람의 마음, 생각, 정념 등을 알기 위해서는 바로 자기 자신의 생각과 감정, 정념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면서 관찰하는 것이 가장 쉽고 정확한 방법이다. 특히 이익 주체로서 내가 타인과 서로 맞서고 있을 때, 그때 나 자신을 보아야 한다. 그러면서 정확히 나 자신을 알 수 있고 인간 일반의 본성을 알 수 있다.
 
  홉스는 그렇게 자신에 대한 경험적 관찰을 통해 보편적 인간의 본성에 대한 탐구가 가능하리라 보았다. 그렇게 나 자신을 알면서 ‘사람이란 게 다 똑같구나’ 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는 거고, 또 그렇게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나 남이나 똑같이 욕망으로 사는 존재구나, 정념에 휩싸인 채 사는 동물이구나’를 나를 관찰하면서 지각해야 하는데,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해보고 싶다.
 
 
  君子와 小人
 
  근대는 어떤 세상일까? 군자(君子) 따로 있고 소인(小人) 따로 있는 세상일까? 아니면 모두가 소인인 세상일까? 선한 사람 따로 있고 모리배(謀利輩) 따로 있는 세상일까, 아니면 모두가 모리배인 세상일까? 당신만 소인, 남만 모리배가 아니라 나도 소인이고 나도 모리배임을 인정하고 모두가 소인이자 모리배라고 선언하고 인식하는 게 근대 아닐까? 그리고 그렇게 생각해야 사람이 단순히 사람이 아니라 근대사회의 구성요소라 할 수 있는 개인으로 거듭날 수 있다.
 
  홉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한 것은 그런 의미인 것 같다. 너 자신을 관찰하면서 인간 일반의 본성에 대해 알 수 있다.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자 쉬우면서도 정확한 길이다. 그러면서 인간은 다 똑같다는 것, 욕망을 추구하고 너절해지고 쉽고, 이익에 눈이 멀어 싸우고 쉽고, 그러면서 늘 공포와 불안을 안고 사는 작고 작은 존재라는 것을 제대로 인지해봐라.
 
  묵자 역시 그런 생각을 했는데, 그래서일까 묵자의 사상도 참 근대적인 구석이 있다. 그런 모습이 있기에 현대사회에 소환시켜 활용할 구석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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