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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자의 인문학 〈10〉

보티첼리와 르네상스를 낳은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歷程

“주제가 종교적인 것이라면 그림 한 점으로 설교 한 편을 전할 수 있어야 하며, 주제가 고전신화라면 그림 한 점으로 한 시대의 정신 전체를 우리 눈앞에 재현시킬 수 있어야 한다”

글·사진 : 문갑식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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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자체가 거의 알려지지 않아… 애주가로서 보티첼리는 ‘작은 술통’이라는 뜻
⊙ 100년 사이에 보티첼리–레오나르도 다 빈치–미켈란젤로–라파엘로 태어난 것은 세계사적 미스터리
⊙ 메디치 가문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화풍이 모두 네 번 바뀌어
⊙ 그림 속에 상징 풍부, 대충 봐서는 사상의 깊이 알 수 없어
⊙ 〈동방박사의 경배〉에는 메디치 가문의 일원이 모두 포함돼
⊙ 〈비너스의 탄생〉은 마상대회를 시로 쓴 폴리치아노에게서 영감받은 명작
⊙ 보티첼리의 작품 자체,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처럼 흥미진진
조토의 탑에서 본 피렌체 전경이다.
  이탈리아 피렌체는 두 단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르네상스(문예부흥·文藝復興)’와 그 터전을 만들고 지원한 ‘메디치(the Medici)’ 가문이다. 메디치 가문의 역사는 약 350년 동안 계속되다가 단절된다. 기이하게도 이 가문에 관한 저술은 1910년 미국의 군인 출신 역사저술가 G.F. 영이 《메디치 가문 이야기》를 내기 전까지는 서양에서도 홀대받았다.
 
  서기 1400~1500년의 100년간은 세계사에서도 매우 미스터리한 시기다. 다른 분야는 차치하고라도 미술 분야에서 한 세기에 한 명 태어날까 말까 한 대(大)천재들이 준비라도 한 듯 한꺼번에 쏟아져나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피렌체의 르네상스를 화려하게 꽃피웠으며, 르네상스를 다른 도시로 이식시켜 유럽 전반의 문화 수준을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확 끌어올렸다.
 
  그들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하겠다.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1445~1510), 레오나르도 디 세르 피에로 다 빈치(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1452~1519), 미켈란젤로 디 로도비코 부오나로티 시모니(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1475~1564), 라파엘로 산치오 다 우르비노(Raffaello Sanzio da Urbino・1483~1520)이다.
 
‘피렌체의 국부’로 불린 코시모 메디치다.
  〈모나리자〉로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다비드 상(像)〉으로 널리 알려진 미술과 조각의 귀재 미켈란젤로나 〈아테네 학당〉으로 명성을 떨친 라파엘로를 놔두고 보티첼리를 이번 호(號)에 다루는 이유가 있다. 보티첼리야말로 피렌체와 분리해서는 생각할 수 없는 르네상스와 메디치 가문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번 호 주인공은 보티첼리와 메디치가인 것이다.
 
  보티첼리가 1445년에 태어났다고 하지만 이것은 추정일 뿐이다. 태어난 연도부터 부정확하다는 것은 그가 거의 알려진 것이 없는 수수께끼 같은 삶을 살았다는 뜻이다. 그림 역시 여러 상징으로 가득 차 있어 최근에야 그 뜻이 해독(解讀)됐다. 보티첼리의 삶과 작품 속 의미를 추적해가는 것은 미국 팩션(팩트와 픽션의 합성어) 소설가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줄 것이다.
 
  먼저 그의 이름, 즉 본명은 알레산드로 디 마리아노 필리페피(Alessandro di Mariano Fillipepi)다. 그런데 보티첼리로 불린 것은 그가 술을 워낙 좋아해서라고 한다. 보티첼리는 이탈리아어로 ‘작은 술통’이라는 뜻이다. 보티첼리는 어린 시절에 초기 르네상스 대가 프라 필리포 리피(Fra Filippo Lippi)의 제자가 됐다. 스승은 과도하게 치장하고 형상을 힘찬 선으로 표현하기를 즐겨 했다.
 
‘위대한 자’로 불린 로렌초 메디치다.
  그 때문에 많은 초기 작품에 리피의 독특한 양식이 드러난다. 수수께끼 같은 작가 보티첼리의 삶을 나는 G.F. 영의 분류에 따라 네 단계로 살펴보려 한다. ▲메디치가의 피에로 일 고토소가 피렌체를 다스린 시기(1464~1469) ▲‘위대한 자’ 로렌초 데 메디치가 다스린 시기(1469~1492) ▲괴짜 수도사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다스린 시기(1494~1498) ▲사보나롤라 사후(1498~1510)부터 보티첼리 사망까지다.
 
  피에로 일 고토소(1416~1469)는 ‘국부(國父)’라 불리며 메디치가를 일으켜 세운 코시모(1389~1464)의 큰아들로, 역사에서 그리 주목받지는 못했다. 그런 그가 약관(弱冠)의 화가 보티첼리의 재능에 주목해 고용했는데, 그것은 그의 아내 루크레치아 토르나부오니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래서 보티첼리의 초기 그림에는 루크레치아의 영향력이 뚜렷이 묻어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이다.
 
  보티첼리는 필리포 리피의 제자라고 하지만 사실 조수에 지나지 않았다. 열여섯 살인 1460년까지 필리포 밑에서 도제로 일했다. 1464년 리피가 프라토(Prato)로 가서 대성당의 프레스코화를 완성할 때까지 필리포를 따라다녔다. 1465년 피렌체로 돌아온 보티첼리는 피에로 일 고토소에게 고용돼 그의 집에서 후한 대접을 받았고, 피에로 일 고토소가 죽던 1469년까지 그를 위해 일했다.
 
  화법상 보티첼리가 칭송을 받는 것은 아름다운 선(線) 처리에 있다. 그는 삶과 춤 동작, 물결치듯 흔들리는 옷감을 매우 사랑했다. 평론가 러스킨은 “많은 공부로 몸에 밴 세련된 매너, 학문에 바탕을 둔 조리 있는 말이 그 시대정신의 일부였으며, 그는 시대정신에 영향을 받은 듯하다”고 했다.
 
  보티첼리에게는 그림 기법보다 더 뛰어난 재능이 있었는데, 그것은 조각가 도나텔로(1386~1466)의 정신이었다. 〈가타멜라타〉 〈다윗〉 등을 만든 도나텔로는 예술의 궁극적 목적이자 영광을 이렇게 규정했다.
 
  “주제가 종교적인 것이라면 그림 한 점으로 설교 한 편을 전할 수 있어야 하며, 주제가 고전신화라면 그림 한 점으로 한 시대의 정신 전체를 우리 눈앞에 재현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자연히 보티첼리는 알레고리적 기법을 좋아했고, 비교적 세세한 것을 가지고 맥락 전체를 암시하기 좋아했다. 따라서 시흥(詩興)이 넘치는 보티첼리의 상상력, 인간적 공감, 신심(信心), 아름다운 기법은 누구에게나 감흥을 일으키지만, 그의 그림을 대충 봐선 그림에 담긴 사상의 깊이를 읽을 수 없다. 또한 시대의 역사에 대한 충분한 지식 없이는 그림을 이해할 수도 없다.
 
보티첼리作 〈동방박사의 경배〉, 1475년경, 목판에 템페라, 134×111cm, 우피치 미술관 소장.
  보티첼리가 피에로 일 고토소를 위해 그린 그림 가운데 현재 피렌체에 남아 있는 것은 〈유딧〉 〈마리아 찬가의 성모〉 〈동방박사의 경배〉 〈견인〉으로서 모두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유딧〉은 구약성서의 외경(外經)이며, 아기와 성모가 모두 왼손으로 타락의 상징인 석류를 가리키는 〈마리아 찬가의 성모〉를 두고는 라파엘로도 도달하지 못한 신적 자애를 담았다는 평가가 있다.
 
  〈동방박사의 경배〉는 제목만으로 봐선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앞둔 이야기를 다룬 그림처럼 오해하지만 실상은 메디치 가문 구성원을 묘사하기 위해 종교적 주제를 선택했을 뿐이다. 이 그림은 1467년 피에로 일 고토소가 루가 피티가 주도했던 암살 시도로 가문이 몰락할 위기를 간신히 모면하자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 봉헌하기 위해 보티첼리에게 의뢰한 것이다.
 
  그림에는 장자(長子) 위주로 이어져온 세 세대가 등장하며 마르실리오 피치노, 크리스토포로 란디노, 풀치 형제 등 그들이 지원한 문인들도 등장한다. 그림 왼쪽에는 이미 사망한 국부 코시모, 왼쪽 밑에는 로렌초, 가운데 등을 관람자 쪽으로 돌린 옷을 입고 무릎을 꿇은 이는 피에로 일 고토소, 오른쪽 밑 희고 금빛 옷을 입은 채 무릎을 꿇은 이는 피에로의 차남(次男) 줄리아노다.
 
  이 그림 전체에서 스토리의 열쇠는 왼쪽 밑부분 로렌초가 들고 있는 칼이다. 보티첼리는 이 그림에서 로렌초가 어떻게 용기와 기지를 발휘해서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고, 궁극적으로 가문 전체를 파멸의 위기에서 건졌는지 암시하고 싶어했다. 이 그림에서 칼을 쥔 사람은 로렌초뿐인데, 그 칼은 두 손으로 쥐어야 할 만큼 큰 것으로 로렌초는 여차하면 휘두를 태세로 칼을 앞에 두고 있다.
 
보티첼리作 〈비너스의 탄생〉, 1485년경, 캔버스에 템페라, 180×280cm, 우피치 미술관 소장.
  ‘위대한 자’ 로렌초가 다스리던 1469~1492년까지, 즉 보티첼리 2기의 대표작은 〈비너스의 탄생〉 〈마르스와 비너스〉 〈봄의 귀환〉 〈팔라스와 켄타우로스〉다. 메디치가는 성장한 청년과 숙녀가 참여하는 마상대회를 1469년과 1475년에 열었다. 그것을 젊은 시인 폴리치아노가 ‘로렌초 데 메디치의 마상대회’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마상대회’라는 유명한 시로 읊었다.
 
  당시 청춘 남녀가 입던 의상은 얼마나 화려했는지 다음과 같은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청년들은 모두 진초록 옷에 넓적다리까지 올라오는 새끼 염소 가죽 부츠를 신었고, 젊은 여성들은 목까지 길게 올라오는 화려한 옷을 입고 보석과 진주로 치장했다.”
 
  특히 당시 22세던 줄리아노가 입던 갑옷은 천문학적인 액수가 들었고, 그의 투구와 문장기(紋章旗)는 베로키오가 디자인했다.
 
보티첼리作 〈봄의 귀환〉, 1478년경, 패널에 템페라, 203×314cm, 우피치 미술관 소장.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마르스와 비너스〉 〈봄의 귀환〉은 모두 폴리치아노의 시(詩)를 바탕으로 그린 것이다. 〈비너스의 탄생〉에 대해서는 이런 평이 있다.
 
  “그림의 구도는 명백히 폴리치아노의 시 ‘조스트라’에서 따온 것이다. 호메로스의 한 찬미(讚美)를 개작한 단락에서 시인은, 새로 태어난 아프로디테(비너스)가 에게해 파도의 포말(泡沫)을 타고 해안으로 불어온 제피로스(서풍·西風)의 감미로운 숨결에 감싸이는 것을 말한다. 계절의 여신 ‘호라이’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그녀를 영접하면서 별로 짠 겉옷으로 그녀의 흰 사지를 감싸주는 동안 그녀의 발이 밟을 풀밭에서는 무수한 꽃들이 자라난다.
 
  이 아름다운 이미지가 보티첼리의 그림에 충실하게 재현된다. 한 손은 눈같이 흰 가슴에 얹고 다른 한 손은 길게 늘어뜨린 금발에 대고 있는데, 이것은 처녀의 아름다움과 순결을 묘사하는 형태이다. 금빛 조개에 올라서서 잔잔한 파도 위를 미끄러져 가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한편 배경에는 조용한 바다 저 멀리 이른 새벽의 차갑고 잿빛 여명 아래 잠들어 있는 아스라한 곶이 눈에 들어온다.”

 
  〈마르스와 비너스〉에 나오는 마르스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동방박사의 경배〉에 등장하는 줄리아노임을 알 수 있다. 마상대회가 끝난 뒤 줄리아노는 피곤한 몸을 눕힌다. 이 장면을 폴리치아노는 자기 시에서 마상대회의 우승자 줄리아노에 관해 암시하면서 군신(軍神) 마르스와 비너스의 이야기를 했다. 비너스가 금으로 수놓은 옷을 입고 풀밭에 잠들어 있는 마르스를 보고 있고, 그러는 동안 염소 발을 가진 작은 사티로스(반인반수·半人半獸)가 그의 갑옷을 가지고 놀고 있는 모습을 묘사했다. 앞서 말한 두 작품 외에 〈봄의 귀환〉은 보티첼리의 그림 가운데 가장 칭송받는 것이다. 보티첼리는 ‘봄의 귀환’을 상징하는 낙천적이고 젊음과 기쁨이 넘치는 배경과 로렌초가 토스카나에 흘러넘치는 5월의 기쁨을 노래한 시의 정신을 그림 속에 담았다.
 
  오렌지나무숲을 방패 삼아 거친 바람과 따가운 햇살을 피한 채 항상 서 있는 월계수에 등을 기댄 여왕 비너스가 토스카나에 봄이 돌아오는 것을 서서 관장하고 있다. 첨언하면 고대 그리스 로마 시인들은 항상 비너스를 봄과 연결시켰다. 미(美)의 세 여신이 비너스 앞에서 춤을 춘다. 그녀 옆의 월계수나무에서는 봄의 달인 3월, 4월, 5월의 갖가지 꽃이 피어난다. 헤르메스(줄리아노)는 육중한 겨울 구름을 흩어버린다. 그 위에서 눈먼 작은 사랑의 신이 앞뒤를 가리지 않고 아무 데나 화살을 쏘아대고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비너스의 탄생〉에 등장하는 여인이 바로 마상대회에서 실시된 미(美)의 여왕 선발대회 우승자 시모네타 데 베스추치라는 것이다. 폴리치아노가 시를 완성하기 전, 보티첼리가 그림을 그리기도 전에 시모네타는 사망했다.
 
  폴리치아노는 그녀에 대해 “너무 곱고 매력이 넘쳐서 뭇 남성에게 칭송을 받고, 어떤 여성에게도 욕을 먹지 않을 여성”이라고 했다. 로렌초는 자기 주치의까지 보내 치료한 시모네타가 몇 주 동안 병을 앓은 뒤 급성 폐렴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흥분해서 이렇게 소리쳤다고 전해진다. “저 별 좀 보게나. 지금 점잖은 아가씨의 영혼이 새 별이 되었거나 그 별에 안착했을 거야.”
 
  ‘위대한 자’ 로렌초가 사망한 후 피렌체 통치권은 세 아들 중 장남인 피에트로(1471~1503)에게 계승됐으나 피에트로에게 ‘불행자’라는 호칭이 붙은 것처럼 메디치가에는 불운이 잇따랐다.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나폴리 왕국을 치기 위해 이탈리아로 침공한 것이다. 샤를 왕의 나폴리 왕국 침략 루트에 있던 피렌체로 인해, 피에트로는 샤를 8세와 ‘피렌체를 공격하지 말아달라’는 협상에 들어갔다.
 
  피에트로는 그 대가로 피사와 사르차나, 사르차넬로, 리파프라타, 피에트라산타 등 요새(要塞)를 내주기로 했다. 피렌체를 지키고 돌아온 피에트로를 기다리는 것은 시민들의 분노였다. 피렌체 시민들은 의회를 열어 메디치가를 피렌체에서 영원히 추방한다는 법률을 가결시켰다. 1494년 9월의 일이다. 메디치가 사람들은 일제히 도망쳤고, 값비싼 예술품들은 약탈의 대상이 됐다.
 
우피치 미술관에 전시된 메디치 가문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메디치가가 피렌체에서 추방됐다가 복귀한 시기(1494~1512)를 이탈리아 역사에서는 대공위(大空位) 시대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메디치가를 대신해 피렌체를 장악한 것이 사보나롤라라는 괴상한 수도승이었다. 사보나롤라는 너무 청렴한 나머지 누더기나 다름없는 옷을 입고 다녔으며, ‘헛된 것들을 없애는 행사’를 자주 열었다. 그 일례를 기록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시뇨리아 광장 맞은편에 피라미드형 건조물이 들어섰다. 맨 밑에는 가발, 가짜 수염, 가장 무도회용 의복, 화장품 단지, 카드와 주사위, 거울과 향수, 구슬과 장신구가 놓였다. 그 윗단에는 책과 그림, 흉상과 피렌체 미인들 초상화가 놓였다. 불경스러운 도둑들을 막기 위해 경비병들이 서 있었다. 불길이 치솟자 성가(聖歌)가 터져나왔고 군중은 찬송가를 불렀다.”
 
  문제는 현대로 치면 ‘이슬람 원리주의자’같이 뻣뻣한 성격의 사보나롤라가 교황에게도 대항했다는 점이었다. 사보나롤라는 교황청의 죄악을 비판하고 교회 개혁을 위해 총공의회를 소집하라고 촉구했다. 처음에 알렉산데르 6세는 그를 회유해 입을 다물게 하고 밑에 두려고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마침내 교황은 사보나롤라를 처단하려 했고, 마침내 그 시도는 성공하고 말았다.
 
  이 시기, 즉 메디치가가 국외로 추방되고 원리주의자 수도사가 피렌체 정치를 장악한 사이 보티첼리 그림에서는 기쁜 모습의 성모(聖母)보다는 슬픈 모습의 성모가 등장한다. 대표적인 작품이 〈석류의 성모〉다. 그림 속에서 아기 그리스도는 왼손에 한 입 베어 먹은 석류를 들고 있고 자기를 쳐다보는 이를 슬픈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오른손을 들고 복(福)을 빌고 있다.
 
  석류는 교회의 상징이지만 쓴 석류는 인간 타락의 상징이다. 쉬타인이란 평론가는 이에 대해 “이 그림에서 아기와 성모 모두 인류의 모든 슬픔을 져야 할 일을 어느 작품에서보다 깊이 의식한다”면서 〈석류의 성모〉야말로 보티첼리의 최고 걸작이라고 평가한다. 이 그림은 우피치 미술관에 〈마리아 찬가의 성모〉와 마주 보고 걸려 있다. 두 그림 사이에는 30년이란 격차가 있다.
 
보티첼리의 작품들이 소장된 우피치 미술관의 천장이다.
  30년 전 그린 〈마리아 찬가의 성모〉의 기조가 겸손(謙遜)이었다면 〈석류의 성모〉는 슬픈 예감이 기조다. 이런 경향은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에 소장된 〈성모와 아기〉에서도 볼 수 있다. 그림 속 아기가 성모의 무릎에 앉아 거친 가시관과 못 3개를 가지고 놀면서 어머니의 슬픈 표정을 의아한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다. 런던 국립미술관이 소장한 〈성모와 아기〉도 비슷한 분위기의 작품이다.
 
  성모는 자기 무릎에 서 있는 아기를 끌어안고 있다. 아기는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왜 그렇게 슬퍼하는지 궁금해하고 있고, 어머니의 얼굴과 태도는 깊은 자애를 나타내는데 다른 그림과 마찬가지로 깊은 슬픔이 배어 있다. 〈성 바나바의 성모〉는 성 바나바 수도원을 위해 그린 그림으로 현재 피렌체 아카데미아 델레 벨레 아르치에 보관돼 있다. 이 그림은 심하게 훼손된 흔적이 많다.
 
  하지만 보티첼리 작품 중 대단한 찬사를 받는 작품이다. 아기 그리스도의 얼굴을 지우고 복원을 시도하다가 크게 훼손됐는데, 나머지는 아름답다. 그림 속에는 두 천사가 성모와 아기 양편에 서 있다. 한 천사는 가시 면류관을, 다른 천사는 3개의 못을 들고 서 있다. 다른 두 천사는 3개의 못을 들고 서 있으며 다른 두 천사는 보좌의 휘장을 열어젖히고 있다.
 
우피치 미술관 내부에서 관객들이 예술품을 감상하고 있다.
  성모는 부드럽고 슬픈 표정으로 정면을 보고 있다. 여섯 성인이 보좌 곁에 서 있는데 성 미카엘은 남성다운 힘과 아름다움을, 성 세례 요한은 금욕주의를, 성 암브로시우스는 강하고 실천적인 주교(主敎)를,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학 지식을, 성 바나바는 가련하고 억눌린 자를 위로하는 데 바친 헌신을, 성 카테리나는 여성다운 정서를 상징한다고 한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계략은 피렌체를 지배하던 수도사 사보나롤라의 몰락을 가져왔다.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신의 대리인》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사보나롤라의 마지막을 그렸다.
 
  그날 사보나롤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교황은 이렇게 말했다. “성실했지만 미숙했던 자의 생애가 끝났군.”
 
  “마지막으로 사보나롤라가 교수대에 매달릴 차례였다.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마지막 기회였다. 무언가 한 말씀 있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사보나롤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에게 용서를 비는 말조차, 왜 자기를 버렸느냐고 신에게 하소연하는 말조차도 하지 않았다. 사보나롤라는 나직이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교수대에 매달렸다. 그것이 (그동안 사보나롤라를 지지했던) 많은 사람을 실망시켰고, 그들의 마음에서 그에 대한 믿음을 지워버렸다.
 
  교수대 밑에 깔아놓은 장작더미에 불이 붙었다. 거기에는 미리 화약을 묻어두고 기름을 뿌렸기 때문에 불이 붙자마자 기세 좋게 타올랐다. 불길은 혀를 날름거리며 순식간에 통나무 기둥을 기어올라가 죽은 수도사들을 핥기 시작했다. 사지가 아래로 흘러내렸다. 남은 몸뚱이마저 떨어뜨리려고 군중이 돌을 던졌다. 모두 환성을 질렀다. 떨어진 몸뚱이도 철저히 태워졌다. 신봉자들 손에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보티첼리가 예술혼을 꽃피웠던 피렌체의 전경이다.
  사보나롤라가 죽은 뒤 보티첼리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를 보티첼리의 4기로 본다. 예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보티첼리의 화풍(畵風)은 이번에도 변했다. 메디치가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던 보티첼리는 이상하게도 사보나롤라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이 때문에 사보나롤라의 몰락에 크게 낙담했다. 그 시기 단테의 시를 스케치한 두 점을 제외하면 보티첼리의 두 그림은 모두 걸작이다.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중상(重傷)〉은 원래 그리스 화가 아펠레스의 그림에 대한 루키아노스의 해설을 모티브로 삼은 것이기에 흔히 〈아펠레스의 중상〉이라고 불린다. 〈아펠레스의 중상〉에 대해서는 이런 묘사가 유명하다.
 
  “무대는 고전 양식의 국가 법정으로서, 모든 종류의 예술기법을 동원하여 장식했다. 높은 아치들 틈새로 저 멀리 잠잠한 바다가 보인다. 법정 기둥들의 벽감들에는 실물 크기의 대리석 인물상들이 서 있고 모든 빈 공간마다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그곳은 웅장한 르네상스 건축물로서 지혜와 공의(公義)만 존재할 것 같은 곳이고, 시인과 사상가들이 바닷가의 이 웅장한 행각을 거닐면서 새로운 지적 업적을 준비할 것만 같은 곳이다. 그런데 그 대신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두려운 폭력행위이다….”
 
  1500년 말에 그린 〈탄생〉은 현재 런던 국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이 그림은 사보나롤라와 그의 사후 피렌체의 정황을 보여준다.
 
  “나 알레산드로(보티첼리)는 이 그림을 1500년 말에 이탈리아가 혼란에 빠져 있을 때, 그러니까 요한계시록 11장의 성취로 둘째 재장이 임하여 마귀가 3년 반 동안 풀려나 한창 활동하고 있는 시기에 그렸다. 요한계시록 12장에 따르면 그는 머잖아 결박될 것이고 우리는 이 그림에서처럼 그가 짓밟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림 〈탄생〉의 왼쪽과 오른쪽에는 동방박사들과 목자들이 그들에게 그 기적을 가리키는 천사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있다. 옥상 위와 공중에서는 천사들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이란 찬송을 부르면서 손을 잡고 춤을 추고 기쁨에 겨워 올리브나무 가지와 면류관을 흔든다. 맨 앞에는 마귀가 숨기 위해 바위 틈으로 기어 들어가고 있는 반면에 기뻐하는 천사들이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말씀을 증거한 증인들’인 사보나롤라와 두 친구 위에 임한다. 이 그림은 보티첼리의 마음에 사보나롤라의 기억이 얼마나 깊이 박혀 있는지를 보여준다.
 
보티첼리의 뒤를 이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다.
  이 시기를 지난 뒤 보티첼리는 그림을 더 이상 그릴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졌다. 그는 1510년 예순넷에 죽어 오니산티에 있는 아버지의 소교구 성당에 있는 묘지에 묻혔다. 비슷한 시기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제2의 밀라노 시대(1506~1513)를 보내며 프랑스 왕 루이 12세의 궁정화가로 활약하다가 1516년 프랑수와 1세의 초청을 받아 프랑스 앙부와즈로 옮겼다.
 
천재 조각가 미켈란젤로의 상이다.
  비슷한 시기 미켈란젤로는 1505년 교황 율리오 2세의 초대로 로마로 가서 성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벽화를 그렸다. 그는 4년 동안 발판 위에 누워 그림을 그리느라 관절염과 근육경련에 시달렸으며, 천장에서 물감이 흘러내리는 통에 눈병까지 얻었다. 비슷한 시기던 1508년 라파엘로는 교황의 초청을 받아 주 무대 피렌체를 떠나 로마로 가서 수많은 걸작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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