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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事理分別 〈18〉 도리로 임금을 섬긴 周亞夫와 黃喜의 明暗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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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漢나라 周亞夫, 文帝에게 인정받아 중용됐으나 景帝에게 배척당해 죽음 맞아
⊙ “문제는 자신을 거스르는 것을 가지고 거역한다고 여기지 않았으나, 경제는 자신에게 맞추는 것만 기쁨으로 여겨”(진덕수)
⊙ 태종, 황희가 양녕대군을 廢世子 하는 데 반대하자 유배 보냈으나, 세종에게 추천, 세종도 중용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전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태종과 세종 2대에 걸쳐 중용된 황희 정승.
  《논어(論語)》 위정(爲政)편에서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군자는 두루 친밀하되 세력을 이루지 않으며[周而不比] 소인은 세력을 이루되 두루 친밀히 하지 않는다[比而不周].”
 
  이는 군자는 공심(公心)이 강하기 때문에 두루 어울리며 자신의 사사로운 호불호(好不好)에 따라 사람을 대하지 않는 반면에 소인은 사심이 강해 그와 반대라는 것이다. 자로(子路)편에서 공자는 이를 좀 더 알기 쉽게 풀어서 말한다.
 
  “군자(다운 임금)는 섬기기는 쉬워도 기쁘게 하기는 어려우니, 기쁘게 하기를 도리로써 하지 않으면 기뻐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부리면서도 그 그릇에 맞게 부린다[器之]. 소인(같은 임금)은 섬기기는 어려워도 기쁘게 하기는 쉬우니, 기쁘게 하기를 비록 도리로써 하지 않아도 기뻐하고, 사람을 부리면서도 (한 사람에게 모든) 능력이 갖춰져 있기를 요구한다[求備].”
 
  공자는 자식의 다움[德]이 효도라면 임금의 임금다움은 관(寬)이라고 했다. 이때의 관(寬)은 성품으로서의 너그러움보다는 일을 함에 있어 신하들을 그 능력에 맞게 부린다[無求備於一人]는 뜻이다. 그래서 소인 같은 임금은 반대로 구비(求備), 즉 한 사람에게 제반 능력이 다 갖춰져 있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를 한 글자로는 인(吝)이라고 한다.
 
  공자가 볼 때 제대로 된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길은 하나다. 선진(先進)편에 나오는 대화다.
 
  계자연(季子然)이 공자에게 물었다. “자로와 염유는 대신(大臣)이라고 이를 만합니까?”
 
  공자가 말했다. “이른바 대신이란 것은 도리로써 군주를 섬기다가 더 이상 도리로써 섬기는 것이 불가능해지면 그만두는 것이다. 지금 자로와 염유는 숫자나 채우는 신하[具臣]라고 이를 만하다.”
 
 
  漢 文帝가 알아본 周亞夫
 
漢 文帝가 인정했던 周亞夫.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죽은 후 국정을 농단하던 여씨(呂氏) 일족의 전횡을 막고 다시 유씨(劉氏)의 황실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주발(周勃)의 둘째 아들 주아부(周亞夫)는 장수로 이름을 날렸다. 문제(文帝) 후원(後元) 6년(기원전 158)에 흉노가 변경을 대규모로 침입했다. 이에 하내태수 아부를 장군으로 삼아 세류(細柳)에 주둔시켜 흉노에 대비했다.
 
  문제가 직접 군대를 위무하기 위해 패상에 도착해 극문에 있는 군영(軍營)에 이르러 곧장 말을 달려 들어가니 장군 이하의 관리들이 말을 탄 채로 영접하러 나왔다. 이윽고 세류에 있는 군영으로 가니 군대의 사졸(士卒)과 장교들이 갑옷 무장에 각종 무기와 칼 등을 날카롭게 하고 궁노(弓弩)에 화살을 메겨 잔뜩 당기고 있었다. 천자의 선봉대가 그곳에 도착했지만 군영으로 들어갈 수가 없자 소리쳐 말했다.
 
  “천자께서 도착하실 것이다.”
 
  군문도위(軍門都尉)가 말했다.
 
  “군중(軍中)에서는 장군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지 천자의 조서(詔書)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 후에 문제가 도착했으나 역시 문제도 들어갈 수 없었다. 이에 문제는 마침내 사자로 하여금 지절(持節)로써 장군에게 조서를 내리도록 했다.
 
  “내가 군영으로 들어가 군대를 위무하고자 한다.”
 
  아부는 그때야 명령을 전해 성벽의 문을 열게 했다. 성벽의 문을 지키는 관리들이 (황제의) 거기병의 속관에게 청해 말했다.
 
  “장군의 규약에는 군영에서는 말을 달릴 수가 없습니다.”
 
  이에 천자는 말고삐를 당겨 잡고서 천천히 나아갔고 군영에 이르자 아부가 무기를 소지한 채로 읍(揖)하면서 말했다.
 
  “갑옷을 입은 병사는 절을 하지 않습니다. 청하옵건대 군례(軍禮・갑옷을 입은 병사가 절을 하지 않는 것이 군례다)로써 알현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천자는 감동을 받아 용모를 고치고서 수레의 가로막대를 잡은 채 답례를 하고 사람을 시켜서 미안하다는 뜻을 전하게 했다.
 
  “황제인 내가 삼가 장군을 위로하는 것이오.”
 
  예를 마치자 군영을 떠나면서 문제가 말했다.
 
  “아! 이 사람이 진정한 장군이도다. 이전에 보았던 패상과 극문의 군영은 마치 아이들의 놀이터 같았는데, 그 장군들은 진짜로 습격을 받는다면 포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아부가 있는 곳에 이르러서 과연 범할 수 있겠는가?”
 
 
  주아부의 直諫
 
  훌륭하다는 (황제의) 칭찬은 오래갔다. 한 달여가 지나서 (흉노가 요새에서 멀어지니) 세 군영을 모두 철수시켰다. 마침내 아부를 제배(除拜)해 중위(中尉)로 삼았다.
 
  문제는 장차 붕(崩)하기에 앞서 태자에게 타일러 말했다.
 
  “급한 일이 있으면 주아부가 진실로 장병을 맡을 만하다.”
 
  문제가 붕하자 아부는 거기장군(車騎將軍)이 됐다.
 
  문제에 이어 황위에 오른 경제(景帝)는 여러 왕의 권세를 약화시켜야 한다는 급암(汲黯)의 건의를 받아들였다가 오초(吳楚) 7국의 난을 불러왔다. 이에 경제는 주아부를 태위(太尉)로 임명해 36명의 장군을 이끌고 가서 오와 초를 공격하게 하니 총 3개월 만에 모두 격파해 궤멸시켰다.
 
  5년 뒤인 중원(中元) 3년(기원전 147)에 승진해 승상이 됐고 경제는 그를 더욱 중하게 여겼다. 그러나 경제가 율태자(栗太子)를 폐위시키자 주아부는 결연하게 간쟁을 했고 이 일로 인해 경제는 그를 멀리했다.
 
  문제의 황후였던 어머니 두(竇)태후가 말했다.
 
  “황후의 오빠 왕신(王信)은 후(侯)로 봉할 만합니다.”
 
  이에 경제는 승상 주아부에게 의견을 물었다. 주아부가 말했다.
 
  “고제께서 맹약하시길 ‘유씨(劉氏)가 아니면 왕이 될 수 없고 공로가 없으면 후가 될 수 없다. 맹약대로 하지 않으면 천하가 모두 그를 공격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신(信)이 비록 황후의 오빠이긴 해도 아무런 공로가 없으니 그를 후로 삼는 것은 맹약을 어기는 것입니다.”
 
 
  충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 景帝
 
주아부를 내친 漢 景帝.
  그 후에 흉노 왕 서로(徐盧) 등 다섯 사람이 한나라에 항복해 오자 경제는 이들을 제후로 삼아 이후에 오게 될 사람들을 고무하려고 했다. 주아부가 말했다.
 
  “저들은 자신의 군주를 배반하고 폐하께 항복했는데 폐하께서 저들을 후로 삼는다면 절의(節義)를 지키지 않는 신하들을 무슨 수로 나무랄 수 있겠습니까?”
 
  상이 말했다.
 
  “승상의 의견은 받아들일 수 없다.”
 
  경제는 서로 등을 모두 봉해 열후(列侯)로 삼았다. 아부는 병을 구실로 승상에서 물러났다.
 
  얼마 후 상이 궁중에서 아부를 불러 음식을 내려주었다. 그의 자리에는 크게 썬 고깃덩어리 하나만 있을 뿐 잘게 썬 고기나 젓가락은 놓여 있지 않았다. 아부는 마음이 못마땅해 고개를 돌려 술자리를 주관하는 상석(尙席)에게 젓가락을 가져오게 했다. 경제가 이를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이 자리가 마음에 차지 않는 모양이오?”
 
  아부는 모자를 벗고 사죄했다. 상이 “일어납시다”라고 말하자 주아부도 잰걸음으로 나가버렸다. 상은 눈으로 전송하며[目送] 말했다.
 
  “저렇게 불만이 많은 자[鞅鞅]는 (나처럼) 어린 군주의 신하가 될 수 없도다!”
 
  그 후 어떤 일을 계기로 주아부는 법리(法吏)에게 넘겨졌는데 법리가 주아부를 반역죄로 무고하자 주아부는 단식을 하다가 옥에서 죽었다. 대를 이은 충성의 결과는 참담했다. 이에 대해 진덕수(眞德秀)는 《대학연의(大學衍義)》에서 이렇게 촌평했다.
 
  〈문제는 자신을 거스르는 것을 가지고 거역한다고 여기지 않았으나, 경제는 자신에게 맞추는 것만 기쁨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박석명, 黃喜를 천거하다
 
  황희(黃喜·1363~1452)에 대해서는 《세종실록》에 실려 있는 그의 졸기(卒記)를 따라가며 정밀한 분석을 해볼 필요가 있다.
 
  〈황희는 (전라도) 장수현(長水縣) 사람인데 자(字)는 구부(懼夫)이며 판강릉부사(判江陵府事) 황군서(黃君瑞)의 아들이다. 출생 이후 신기(神氣)가 보통 아이와 달랐는데, 고려(高麗) 말기에 과거(科擧)에 급제해 성균관학관(成均館學官)에 보직(補職)되었다. 우리 태조(太祖)께서 개국(開國)하시매 선발되어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무하고, 조금 후에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을 맡았다가 사헌감찰(司憲監察)과 우습유(右拾遺)에 전직(轉職)되었는데 어떤 일로써 경원교수관(慶源敎授官)으로 폄직(貶職)되었다. 태종(太宗)이 사직(社稷)을 안정시킨 후 다시 습유(拾遺)의 벼슬로써 불러 돌아왔는데, 어떤 일을 말하였다 파면되었다가, 조금 후에 우보궐(右補闕)에 임명되었으나 또 말로써 임금의 뜻에 거슬려서 파면되었다. 형조(刑曹), 예조(禮曹), 병조(兵曹), 이조(吏曹) 등 여러 조(曹)의 정랑(正郞)을 역임(歷任)했다. 이때 박석명(朴錫命)이 지신사(知申事・후일의 도승지. 오늘날의 대통령비서실장)로서 오랫동안 기밀(機密)을 관장(管掌)하고 있었는데 여러 번 사면(辭免)하기를 청하니 태종이 말했다.
 
  “경(卿)이 경과 같은 사람을 천거해야만 그제야 대체(代遞)할 수 있을 것이다.”
 
  박석명이 황희를 천거하여 갑자기 도평의사경력(都評議司經歷)과 병조의랑(兵曹議郞)으로 천직(遷職)되었다.〉
 
  그가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관직 생활을 했다는 것은 일찍부터 엘리트 코스를 걸었음을 뜻한다. 그런데 여기서만 벌써 두 차례나 ‘어떤 일을 말하였다가 파면되었는데’ ‘또 말로써 임금의 뜻에 거슬려서 파면되었다’라는 대목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직언(直言)을 피하지 않는 성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박석명은 태종이 가장 신뢰했던 신하다. 그의 천거로 황희는 태종의 가장 가까운 심복이 됐다. 박석명의 천거는 정확했다.
 
 
  태종의 총애
 
  〈그가 아버지 상사(喪事)를 만나니, 태종은 승추부(承樞府)가 군무(軍務)를 관장하고, 또 국가에 사고가 많은 이유로써 무관(武官)의 백일(百日)에 기복출사(起復出仕)시키는 제도를 권도(權道)로 따르게 하여 대호군(大護軍)에 임명하고, 승추부경력(承樞府經歷)을 겸무하게 하였다.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로 승진되었다가 얼마 안 있어 좌부대언(左副代言)에 발탁되고 마침내 박석명을 대신하여 지신사에 임명되었다. 후하게 대우함이 비할 데가 없어서 기밀 사무를 오로지 다하고 있으니, 비록 하루 이틀이라도 임금을 뵙지 않는다면 반드시 불러서 뵙도록 하였다. 태종이 일찍이 말했다.
 
  “이 일은 나와 경만이 알고 있으니, 만약 누설된다면 경 아니면 곧 내가 한 짓이다.”
 
  훈구대신(勳舊大臣)들이 좋아하지 아니하여 혹은 그 간사함을 말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였다.〉
 
  황희는 공신이 아님에도 태종의 무한한 총애를 받았다. 그의 ‘간사함’을 말한 훈구대신이란 바로 하륜(河崙)을 가리키는 것이다. 황희는 무엇보다 민씨(閔氏) 세력을 제거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때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 등의 권세(權勢)가 크게 성하여 종지(宗支, 효령・충녕대군)를 모해(謀害)하니 황희는 이숙번(李叔蕃), 이응(李膺), 조영무(趙英茂), 유량(柳亮) 등과 더불어 밀지(密旨)를 받아 이들을 제거했다. 여러 민씨(閔氏)는 마침내 몰락했다.〉
 
  그러나 세자가 계속 음란을 일삼자 태종은 폐세자를 결심하는데 이때 황희는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이는 태종의 의심을 사는 계기가 됐다.
 
 
  귀양
 
  〈병신년(丙申年・1416)에 세자(世子) 이제(李)가 덕망을 잃어서, 태종이 황희와 이원(李原)을 불러 세자의 무례(無禮)한 실상을 말하니, 황희는 생각하기를 세자는 경솔히 바꿀 수 없다고 여겨 이에 아뢰었다.
 
  “세자가 나이가 어려서 그렇게 된 것이니, 큰 과실은 아닙니다.”
 
  태종은 황희가 일찍이 여러 민씨를 제거할 의논을 주장하였으므로 세자에게 붙어서 민씨의 원한을 풀어주고 후일의 터전을 삼으려 한다는 이유로써 크게 성내어 점점 멀리하여서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임명하였다가 다음 해에는 평안도도순문사(平安道都巡問使)로 내보내었다. 무술년(戊戌年・1418)에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불러서 돌아왔으나, 세자가 폐위(廢位)되니 황희도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교하(交河)에 폄출(貶黜)시키고는 모자(母子)를 함께 거처하도록 허가하였다. 대신(大臣)과 대간(臺諫)들이 죄주기를 청하여 그치지 않으니 태종이 황희의 생질(甥姪) 오치선(吳致善)을 폄소(貶所)에 보내어 말했다.
 
  “경은 비록 공신이 아니지마는 나는 공신으로 대우하므로, 하루 이틀 동안이라도 보이지 않으면 반드시 불러 보아서 하루라도 나의 좌우에서 떠나 있지 못하게 하려고 하는데, 지금 대신과 대간들이 경에게 죄주기를 청하여 양경(兩京・한양과 개경) 사이에는 거처시킬 수 없다고 한다. 그런 까닭으로 경을 경의 향관(鄕貫)인 남원(南原)에 옮겨두니, 경은 어미와 더불어 편리할 대로 함께 가라.”〉
 
  태종은 수시로 사람을 보내 황희의 동태를 살폈다. 그때마다 신하들이 와서 이렇게 보고했다.
 
  “황희가 말하기를 ‘살가죽과 뼈는 부모(父母)가 이를 낳으셨지마는, 의식(衣食)과 복종(僕從)은 모두 성상의 은덕이니, 신(臣)이 어찌 감히 은덕을 배반하겠는가? 실상 다른 마음은 없었다’라고 하면서 마침내 울면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마침내 세종4년(1422) 상왕(上王)으로 있던 태종은 황희를 불러 올렸다. 그러나 세종으로서는 황희가 달가울 리가 없었다. 일단은 한직(閑職)에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런데 얼마 후 강원도에 큰 가뭄이 들었다.
 
  〈강원도(江原道)에서 기근(饑饉)이 있었는데, 관찰사(觀察使) 이명덕(李明德)이 구황(救荒)의 계책을 잘못 썼으므로 황희로써 이를 대체(代遞)시켰더니, 황희가 마음을 다하여 진휼(賑恤)하였다. 세종(世宗)이 이를 가상(嘉尙)히 여겨 숭정대부(崇政大夫)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에 승진 임명하고 그대로 관찰사(觀察使)로 삼았다.〉
 
 
  세종의 고백
 
  그리고 승진에 승진을 거듭해 마침내 좌의정에 오르는데 이때 세종은 아버지 태종이 했던 이야기를 처음으로 털어놓는다.
 
  〈경이 폄소에 있을 적에 태종께서 일찍이 나에게 이르시기를 ‘황희는 곧 한(漢)나라의 사단(史丹)과 같은 사람이니, 무슨 죄가 있겠는가?’ 하셨다.〉
 
  사단은 중국 한나라 원제(元帝) 때에 시중(侍中)으로 있던 명신(名臣)이다. 원제가 가장 사랑하는 후궁 부소의(傅昭儀)의 소생 공왕(恭王)이 총명하고 재주가 있어 세자를 폐하고 공왕으로 후사를 삼고자 하니 사단이 극력 간(諫)하여 마침내 폐하지 않았다. 태종은 결국 황희가 폐세자를 반대한 것은 사심(私心)이 아니라 곧은 마음[直心]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았고 세종 또한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당부를 공심으로 받아들였기에 명정승 황희는 탄생할 수 있었다. 주아부의 처참한 최후와는 확연한 대조를 이룬다. 그것은 세종이 실은 한나라 문제와 같은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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