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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事理分別 〈17〉 곧음[直]은 亂世를 잘 살아내는 일의 이치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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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화도회군 당시 告變했던 최유경, 곧은 성품과 능력 인정받아 조선조에서도 중용
⊙ 이세민을 죽이려 했던 위징, 당 태종 시기에 諫臣으로 활약
⊙ “곧음이 없는 삶은 요행히 죽음을 면한 것에 불과”(《논어》)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전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唐 太宗에게 直諫을 서슴지 않은 魏徵.
  여말선초(麗末鮮初)와 같은 격동기의 역사를 보면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비명횡사한 사람들을 많이 목격하게 된다. 우리 역사에서는 구한말(舊韓末), 광복 직후에도 이런 일이 많았다. 실은 대한민국이 세워지고도 정권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고 있다. 민주화 이후에는 생물학적 목숨은 잃지 않더라도 사회적·정치적 생명을 하루아침에 빼앗기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다. 또한 변신·변절을 통해 구차스럽게 생물학적 혹은 사회·정치적 목숨을 이어가는 군상(群像)들 또한 목도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여말선초를 잘 살아낸 최유경(崔有慶・1343~1413)은 깊이 탐구할 만한 인물이다. 최유경의 할아버지는 고려 선부전서(選部典書) 상호군 최득평(崔得枰)이고, 아버지는 감찰대부(監察大夫) 최재(崔宰)다. 집안은 나쁜 편은 아니었다. 지금도 충청북도 진천에 그의 효자비가 전하는 것으로 볼 때 효심이 깊은 인물인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이름이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위화도회군과 관련해서다. 1388년 4월 18일, 고려 우왕 말년 고려는 요동정벌 계획에 따라 최영(崔瑩)을 최고지휘관인 팔도도통사로 하고 조민수(曺敏修)를 좌군도통사, 이성계(李成桂)를 우군도통사로 하는 10만 병사를 평양에서 출발시켰다. 그러나 최영은 우왕의 요청으로 개경에 남고, 조민수와 이성계가 정벌군의 지휘를 맡았다. 압록강을 건너기 직전인 5월 7일 지금의 신의주와 의주 사이 압록강 가운데 있는 가장 큰 하중도(河中島)인 위화도에 주둔한 조민수와 이성계는 다섯 가지 이유를 들어 군대를 남쪽으로 돌리겠다는 회군 의사를 우왕에게 주청했다.
 
  그러나 사실상 실권을 쥐고 있던 최영은 이성계의 거듭된 요청을 모두 거부했다. 이성계는 장수들을 불러모아 “상국(上國・명나라)을 범하면 종사(宗社)와 만백성에게 큰 화(禍)가 닥쳐올 것”이라며 요동정벌 포기 의사를 밝혔고, 장수들은 모두 이성계를 따르겠다고 맹세했다. 결국 위화도에 진영을 설치한 지 2주 만인 5월 22일 이성계는 “돌아가 임금 곁에 있는 악한 자들을 제거하여 세상을 편안케 하리라”고 다짐하며 군사들을 돌렸다.
 
 
  위화도회군을 고변한 최유경
 
  이때 조전사(漕轉使)로 정벌군에 참가했던 최유경이 말을 달려 회군 소식을 평양 동북쪽 성주(成州・성천)에 나가 있던 우왕에게 급보했다. 그리고 우왕을 보필해 개경으로 돌아왔다. 사실 이것만 보자면, 그 후에 회군이 성공해 이성계가 최영을 처단할 때 최유경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실록은 뜻밖의 기록을 담고 있다.
 
  〈태조가 집정(執政)해 최영(崔瑩)을 물리치고 유경을 발탁해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삼았다.〉
 
  밀직사란 왕명(王命)의 출납, 궁중의 숙위(宿衛), 군기(軍機)의 정사를 맡아보던 관서로 요직 중의 요직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이성계가 이미 그를 눈여겨보았다고 봐야 한다. 위화도회군 이전까지 관리로서 최유경의 행적을 실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홍무(洪武) 임자년(壬子年・1372)에 판도좌랑[版圖佐郞・고려가 원(元)의 지배하에 들어갔을 때 호부좌랑(戶部佐郞)을 고친 이름]에 임명됐는데 그때 각 도 의염(義鹽)의 소금가마[鹽盆]가 모두 힘센 토호들에게 점령당했으므로 최유경이 갖춰 글을 올려 아뢰어 모두 염창(鹽倉)에 속(屬)하게 했다. 환관(宦官) 윤충좌(尹忠佐)가 임금의 총애(寵愛)를 믿고 교만 방종해 많은 불법을 행하니 헌사에서 이를 묻고자 했으나 능히 실행하지 못했다. 최유경이 장령(掌令)으로 옮겨서 일을 보던 초기에 즉시 이를 탄핵했다. 을묘년(乙卯年・1375) 여름에 전법총랑(典法摠郞)으로 옮겼는데, 이사충(李思忠)의 가노(家奴)가 그 주인을 찔러 죽이려다 죽이지 못하자 사충(思忠)이 이를 고소해 고문(拷問)하기를 여러 차례 했으나, 그 실정(實情)을 얻지 못했다. 유경이 사정을 들어서 차근히 물으니 가노가 스스로 자복해 실토했다. 정사년(丁巳年・1377)에 아비의 상(喪)을 당해 여묘(廬墓)살이 하면서 3년의 상제(喪制)를 마쳤다. 무진년(戊辰年・1388) 정월에 국가에서 권신(權臣) 임견미(林堅味) 등을 주살(誅殺)할 때 최유경을 양광도안렴사(楊廣道按廉使)로 삼아 전민(田民・농민)을 추고(推考)해 바로잡게 했다.〉
 
  여기서 우리는 최유경이 곧았을 뿐만 아니라 일 처리에 능했고, 유교의 이념에도 투철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최유경의 행실은 이미 조정에 널리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 이성계는 이 점을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비록 위화도회군 당시 주군(主君)을 위해 그 사실을 말로 내달려 알렸지만 그 후부터는 이성계 노선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조선 건국과 함께 원종공신(原從攻臣) 명단에 이름이 올랐다. 물론 이때에도 반대가 있었다. 실록의 기록이다.
 
 
  “布置하는 재주가 있다”
 
  〈임신년(壬申年·1392)에 우리 태조께서 즉위해 원종공신으로 삼으니 좌우(左右)에서 무진년(1388)의 일을 가지고 반대하는 자들이 있었으나 태조가 그 충의(忠義)를 칭찬했다.〉
 
  개국에 실질적 기여는 없었지만 태조 이성계가 필요하다고 보아 공신의 작호를 내려준 것이다. 최유경은 태조 3년에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4월 중추원지사 겸 중군동지절제사가 돼 중앙정치로 복귀하게 되는데, 태조는 우정승 김사형에게 최유경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경상도 도관찰사 최유경이 무진년에 비록 우리를 배반했으나 자신의 임금을 위한 것이요, 또 포치(布置)하는 재주가 있다.”
 
  자신의 임금을 위했다는 것은 그의 곧음[直]을 평가한 것이고, 포치가 뛰어나다 함은 일을 풀어가는 이재(吏才)가 뛰어남을 인정한 것이다. 실제로 그 후에 최유경은 사헌부 대사헌에도 오르고 호조의 업무나 관찰사 등을 역임하며 이 두 가지 능력을 고루 선보였다. 특히 그의 곧은 성품을 보여주는 일화가 실록에 나온다.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기 직전인 무인년(戊寅年・1398) 봄에 태조가 평주(平州) 온정(溫井)에 행차하려 유후사(留後司・개경)에 어가(御駕)를 머물렀다가 정령(政令)이 해이한 것을 보고 즉시 최유경을 뽑아 유후(留後)로 삼으니 최유경이 나아가 말했다.
 
  “신(臣)이 일찍이 제릉(齊陵・신의왕후 한씨의 능이다)에 봉향(奉香)했는데, 수릉인(守陵人)과 제기(祭器)가 모두 미비했습니다. 제릉이 선적(先嫡・본부인)인데 어찌 홀로 정릉(貞陵・신덕왕후 강씨의 능)에만 후하게 하십니까?”
 
  태조가 말했다.
 
  “내가 박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유사(有司)에서 청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인은 태조·태종의 총애를, 자식들은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태종 3년에 대사헌에 오른 것으로 보아 태종 또한 최유경을 중하게 여겼다. 그런데 좀 더 중요한 것은 다른 신하들 또한 최유경의 행실과 업무 능력을 높게 평가했다는 점이다. 병술년(丙戌年・1406)에 태종이 각사로 하여금 노성(老成)한 자로서 의정부를 맡을 만한 자를 추천하라고 하니, 육조(六曹)와 대간(臺諫)에서 모두 최유경을 천거하므로 의정부 참찬사로 삼았다.
 
  그는 벼슬에서 물러나 7년 만인 1413년 세상을 떠났다.
 
 
  최유경의 아들들
 
  그의 이 같은 처신은 자식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졌고, 조선 왕실로부터 대대로 깊은 총애를 받게 만들었다. 그에게는 유복자를 포함해 모두 여섯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장남 최사위(崔士威)는 세종 때 한성판윤에 올랐다. 둘째 최사의(崔士儀)는 한성부윤을 지냈으며, 청백리로 선정됐다. 특히 넷째 최사강(崔士康)에 이르면 장녀가 태종의 아들 함녕군(咸寧君)과 혼인했고, 본인은 병조판서에까지 올랐다. 1434년 1월에는 최사강의 장남인 봉례랑(奉禮郎) 최승녕(崔承寧)의 딸이 세종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臨瀛大君)에게 출가했고, 1437년 2월에는 둘째 딸이 세종의 여섯째 금성대군(錦城大君)과 혼인했다. 실록은 최사강에 대해서도 극찬을 하고 있다.
 
  〈왕실과 연혼하면서 갑자기 현귀해졌으나 분수를 지킨 까닭에 세종의 은총이 떠나지 않았고, 이를 배경으로 의정부·육조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세종 성세의 일익을 담당했다.〉
 
  다시 최유경에 대한 실록의 평가다.
 
  〈시호를 평도(平度)라고 했다. 척당[倜儻・기개가 있어서 남에게 구애받지 않는다는 뜻. 척당불기(倜儻不羈)라고도 함]해 용감히 말하고 남에게 굽히거나 아첨함이 없는 것을 이른 것이다. 중외에 두루 이름을 드날려서[歷敭] 사람들이 깨끗하고 곧다[淸直]고 칭송했다.〉
 
 
  唐 태종과 魏徵
 
唐 太宗 이세민.
  643년 위징(魏徵)이 죽었을 때 당(唐) 태종(太宗)은 이렇게 말했다.
 
  “무릇 구리로 거울을 만들면 의관을 단정히 할 수 있고, 옛날로 거울을 삼으면 흥망을 알 수 있으며, 사람으로 거울을 삼으면 득실을 밝힐 수 있다. 짐은 일찍이 이 세 가지를 가져 내 허물을 막을 수 있었다. 지금 위징이 세상을 떠나니 거울 하나를 잃어버렸도다!”
 
  당 태종 이세민의 태평성대에 일조한 일등공신 위징도 그러나 한때는 반대편에서 이세민을 죽이려던 인물이었다. 수(隋)나라 말 혼란기에 무양군승(武陽郡丞) 원보장(元寶藏)의 전서기(典書記)가 되었다가 원보장을 따라 이밀(李密)에게 귀순했다. 다시 이밀을 따라 당 고조(高祖)에게 귀순하여 고조의 장자 이건성(李建成)의 측근이 되었다. 비서승(秘書丞)이 돼 여양(黎陽)에서 이적(李勣) 등에게 항복을 권했다. 두건덕(竇建德)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두건덕이 패한 뒤 당나라로 돌아와 태자세마(太子洗馬)가 됐다. 《신당서(新唐書)》가 전하는 당 태종과 위징의 첫 만남이다.
 
  〈은(隱) 태자가 그를 끌어들여 세마(洗馬)로 삼았다. 위징은 진왕(秦王・즉위 이전 당 태종)의 공로가 크다는 것을 보고서 몰래 태자에게 일찍 계책을 써서 진왕을 처치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태자가 패퇴하자 진왕이 그를 불러 꾸짖었다.
 
  “네가 어찌 우리 형제를 이간질했느냐?”
 
  위징이 대답했다.
 
  “태자가 일찍 이 위징의 말을 따랐더라면 죽어서 오늘과 같은 화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진왕은 그의 곧음을 높이 평가해 더 이상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황제에 오르자 그를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임명했다.〉
 
  간언(諫言)을 맡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다름 아닌 곧음이다. 위징의 곧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한번은 태종이 낙양을 순시하러 가던 길에 소인궁(昭仁宮)에 머물렀는데, 음식 대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크게 화를 냈다. 그것을 본 위징은 면전에서 태종에게 직언을 했다.
 
  “수(隋) 양제가 유람할 때 백성들이 바치는 음식이 좋지 않다며 화를 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늘 허덕였으며, 이로 인해 수나라가 망했습니다. 폐하께서는 이를 교훈으로 삼으셔야 합니다. 오늘의 이 같은 음식에도 만족하셔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욕심대로 하신다면 이보다 만 배나 좋은 진수성찬을 차린다 해도 만족하시지 못할 겁니다.”
 
  이 말을 듣고 태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경의 말이 일리가 있네. 경이 깨우쳐주지 않았다면 큰일을 그르칠 뻔했네.”
 
  최유경이나 위징의 일화는 모두 이성계나 당 태종처럼 그릇이 큰 사람을 만났기에 가능한 일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명군(明君)과 양신(良臣)의 만남이었기에 있을 수 있는 일화다.
 
 
  《논어》 속의 곧음[直]
 
  《논어(論語)》에는 곧음의 문제가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도 있지만, 문장이나 문맥의 배후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도 많다. 그것들을 충분히 이해할 때라야 비로소 곧음이 바로 일의 이치[事理]임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냥 정직이나 직언(直言)이라고 할 때의 곧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리의 측면에서 곧음을 말하는 구절은 세 가지다. 먼저 ‘공야장(公冶長)’편이다.
 
  〈공자가 말했다. “누가 미생고(微生高)를 곧다고 하는가? 어떤 사람이 식초를 빌리려 하자 그의 이웃집에서 빌려다가 주는구나.”〉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 하며, 있으면 있다 하고 없으면 없다고 하는 것이 곧음이다. 그런데 노나라 사람 미생고는 굳이 옆집에까지 가서 빌려다 주었다. 남의 평판을 의식하고서 한 행동이기 때문에 공자는 가차 없이 곧지 못하다고 지적한 것이다. 이번엔 ‘자로(子路)’편이다.
 
  〈섭공(葉公)이 공자에게 말했다. “우리 당에 곧게 행동하는 궁이라는 사람이 있으니 그의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그는 아버지가 훔쳤다는 것을 증언했습니다.”
 
  이에 공자가 말했다. “우리 당의 정직한 자는 이와는 다릅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숨겨주고 자식은 아버지를 위해 숨겨주니 곧음이란 바로 이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공자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이렇게 하는 것이 사리(事理), 곧 일의 이치라는 말이다. 효(孝)가 곧음의 하나가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윗사람에 대한 충(忠) 또한 당연히 곧음이다. 이렇게 돼야 ‘옹야(雍也)’편에서 공자가 말한 곧음이 확 다가온다.
 
  〈사람을 사람이게 해주는 것은 곧음이다. 곧음이 없는 삶은 요행히 죽음을 면한 것에 불과하다.〉
 
 
  곧음은 곧 위선을 물리치는 것
 
  이런 곧음은 곧 위선(僞善)을 물리치는 것이다. 위선은 결국 남을 의식해서 하는 것이지 본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헌문(憲問)’편의 대화는 사리에서 행동의 지침으로까지 나아간다.
 
  〈어떤 이가 물었다. “덕으로 원한을 갚는 것은 어떻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그러면 덕은 무엇으로 갚을 텐가? 원한은 곧음으로 갚고 덕은 덕으로 갚아야 한다.”〉
 
  그것은 곧 남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스스로의 원칙에 입각해 덕(德)을 기르고 마땅함[義]에 따라 행동하는 문제와 연결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논어》의 첫머리에 ‘학이시습(學而時習),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와 더불어 다음의 유명한 구절이 3대 강령의 하나로 나란히 배치돼 있는 것이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속으로조차 조금도) 서운해하지 않는다면 정말로 군자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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