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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6·25전쟁이 남긴 것들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취임식 참석한 국군포로들

“北에 남아 있는 국군포로 데려와 달라”

글 : 이경훈  월간조선 기자  libert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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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대통령 취임식 참석”(유영복·94)
⊙ “몸은 안 좋지만 마음은 靑春… 다음 대통령 취임식도 참석하고파”(김성태·91)
⊙ “윤석열 대통령이 통일 대통령이 되길”(이규일·90)
⊙ 國軍, 6·25전쟁 실종·포로 8만2318명 발생… 귀환 용사는 80명, 생존 15명. 거동 가능한 국군포로는 3명
⊙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 이후 脫北 국군포로 늘어
⊙ 국군포로의 끝나지 않은 싸움, 경문협 상대로 손해배상 상고심 준비 中
북송되는 국군포로.
  5월 10일 국회에서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이 열렸다. 이날 취임식에는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탈북(脫北) 귀환 용사들이 ‘국군포로’ 자격으로 초대됐다. 초청받은 이들은 유영복(94), 김성태(91), 이규일(90)씨.
 
 
  自力으로 귀환한 국군포로
 
  유영복씨는 1929년(주민등록상 1930년 출생)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공산당이 득세하자 억압을 피해 월남(越南)했다. 마포 숭문중학교에 다니던 유씨는 전쟁이 난 후 북한 인민군에 붙잡혀 강제 징집됐다. 인민의용군(人民義勇軍)이 돼 남하(南下)하던 유씨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다’는 전단을 본 후 의용군 대열에서 이탈했다. 이후 국군에 잡혀 포로가 돼 포로수용소에서 2년을 지냈다. 1952년 6월 석방된 유씨는 북송(北送) 심사에서 남한을 택했다.
 
  유씨의 아버지는 그에게 “의용군 딱지를 떼기 위해 국군에 입대해 공훈을 세워야 한다”며 입대를 권했다. 1952년 8월 26일 국군에 입대한 유씨는 육군 5사단 27연대에 배치됐다. 6·25전쟁이 끝나갈 무렵 당시 27연대는 김화지구(강원 철원)에서 인민군·중공군과 고지전(戰)을 벌이고 있었다. 유씨는 휴전을 47일 앞둔 1953년 6월 10일 중공군의 포로가 됐다. 47년 동안 북한에 억류됐다가 2000년 8월 대한민국에 자력으로 귀환한 뒤 5사단에서 전역 신고를 했다.
 
  김성태씨는 1932년 경기 포천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7세이던 1948년 소작농인 부모의 부담을 덜고자 나이를 속여 남조선국방경비대(오늘날 육군의 전신)에 입대했다. 육군 7사단 1연대 3대대(경기 동두천)에 배치된 김씨는 대대장 연락병으로 지내다가 1950년 3월에는 이등중사(하사)가 됐다.
 

  개전 5일 뒤 김씨는 경기도 양주에서 다친 중대장을 업고 달리다 북한군에게 잡혀 포로가 됐다. 포로수용소에서 지내던 김씨는 정전(停戰)을 9일 남겨둔 1953년 7월 18일 탈출을 시도했다가 발각돼 이후 13년간 교화소에 수감됐다. 교화소 복역 후에는 군마 훈련소, 탄광 등에서 27년간 강제노역을 했다. 김씨는 북한으로 끌려간 지 51년 만인 2001년 6월 대한민국으로 돌아왔고 그해 8월 수도기계화보병사단에서 전역 신고를 했다.
 
  18세이던 이규일씨는 1950년 12월 자원입대했다. 육군 3사단에 배속됐지만 두 달 만에 포로가 됐다. 북송된 후 57년 만인 2008년 11월 귀환했다. 현재 북한에는 그의 가족들이 남아 있다.
 
  대통령 취임식에 국군포로 자격으로는 처음으로 참석한 3인을 지난 5월 10일 오후 (사)물망초 사무국(서울 영등포구)에서 만났다. 혈색이 모두 좋아 일흔 중후반쯤 된 평범한 동네 할아버지들처럼 보였다.
 
  이들은 평소에도 아침잠이 없어 일찍 일어나는데 오늘은 오전 4시 반에 일어나 다섯 시에 준비를 다 마쳤다고 했다. 유씨는 경기 이천, 김씨는 경기 남양주, 이씨는 서울 양천구에 살고 있다. 물망초 직원 3명이 국군포로 3인의 취임식 참석을 처음부터 끝까지 도왔다.
 
 
  “취임사 듣고 든든했다”
 
취임식장 단상에 오른 국군포로 3인. 왼쪽부터 김성태·이규일·유영복씨. 사진=태영호 의원실 제공
  — 오늘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소감은 어떻습니까.
 
  유영복(이하 유): 감사할 따름입니다. 윤석열 후보가 당선됐기에 취임식에도 초청받은 것 아닙니까. 성공한 대통령이 되길 바랍니다.
 
  김성태(이하 김): 기분이 너무 좋습니다. 오늘 윤 대통령이 밝힌 취임사를 듣고 든든했습니다. 그동안 북한이 핵실험을 하고 미사일을 쏴도 우리 정부는 제대로 된 말 한마디 못 하지 않았습니까.
 
  이규일(이하 이): 최고. 최곱니다.
 
  이들은 새로 출범한 정부가 국군포로를 예우했다는 생각에 들뜬 감정을 드러냈다. 윤 대통령을 직접 본 소감을 물으니 김성태씨는 “북한에 할 말은 할 것 같아 듬직해 보였다”고 했다.
 
  — 윤석열 대통령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
 
  유: 탈북 국군포로가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는 것은 처음인데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새 정부는 국군포로에 대한 관심을 끝까지 가져주셨으면 합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북한에 국군포로가 얼마나 생존해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송환이 힘들다면 북한에 사과라도 받아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군포로가 남아 있지 않더라도 후손, 가족들은 북한에 남아 있습니다. 이들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 다음 대통령 취임식에도 참석하고 싶으십니까.
 
  김: 아 그럼요. 당연하죠.
 
  유: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죠.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도 대한민국에 왔기에 덤으로 살아 있는 거예요.
 
  유씨는 “좀 더 일찍 탈북했으면 대한민국에 도움이 되는 일을 했을 텐데 너무 늦게 와 안타깝다”면서도 “북한에 남아 있는 억울한 전우들을 대변하기 위해 국군포로의 실상을 알리는 데 열심히 노력했다”고 했다. 유씨는 2013년 만들어진 귀환국군용사회 초대 회장을 지냈다. 각종 증언회와 청문회 등에 참석해 국군포로 문제를 앞장서 제기해왔다.
 
 
  6·15공동선언 직후 脫北 결심
 
1호 귀환 국군포로 조창호 중위. 사진=조선DB
  유씨는 2000년 6월 평양에서 열린 김대중-김정일 회담(6·15남북공동선언)을 본 후 탈북을 결심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에 온 모습을 북한에서 텔레비전으로 봤습니다. 남조선에서 대통령이 왔으니 국군포로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실 줄 알았습니다. 주변의 많은 국군포로도 그런 기대를 했습니다. 다들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에 고무됐지만 정작 김대중 대통령은 아무런 말이 없었죠. 국군포로들은 고향에 간다는 생각에 새 옷도 준비해두고 희망에 부푼 상태였습니다.”
 
  옆에 있던 김성태씨는 “비전향 장기수는 북으로 다 보내주면서 국군포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며 불만을 드러냈다.
 
  당초 유씨는 북한에 있는 가족(어머니, 여동생)을 위해 북한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자 노력했다. 북한에서 훈장도 6개를 받았다. 하지만 적대 계층에 속하는 유씨 가족은 북한에서 불이익을 받으며 살아가야 했다. 그러던 참에 평양을 찾은 조국의 대통령이 자신들의 존재를 외면하자 큰 실망을 했다.
 
  6·15공동선언 한 달 뒤 유씨는 더는 대한민국 정부에 기대할 수 없다는 생각에 탈북했다. 탈북을 결심하게 된 계기 중에는 탈북을 전문적으로 돕는 이른바 ‘브로커’의 접근도 있었다. 브로커는 유씨에게 남한에 있는 가족의 존재를 알렸다. 유씨의 이복동생은 유씨를 돕기 위해 중국으로 날아갔다. 유씨는 7월 20일 보따리상을 따라 두만강을 건넌 뒤 중국으로 갔다. 여권 문제로 중국에서 한 달을 보낸 유씨는 이복동생과 브로커의 도움으로 선양(瀋陽)에서 비행기를 타고 대한민국으로 왔다.
 
  남한에 있는 가족들은 그가 전사한 줄 알고 매년 현충일이면 참배했다. 47년 만에 아들을 만난 유씨의 아버지(당시 93세)는 그가 귀환한 후 6개월 뒤 세상을 떠났다.
 
  북한은 지금도 “국군포로가 없다”고 주장한다. 6·25전쟁이 끝난 뒤 국군포로를 모두 ‘내무성 건설대’에 편입해 ‘전향’시켰기에 ‘명목상의 국군포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1994년 조창호 소위(1932~2006 년, 귀환 후 중위 진급)가 생환하기 전까지 국군포로의 존재는 잊혀왔다. 정부는 ‘비전향 장기수를 북송하라’는 북한의 요구를 수용했으나 단 한 명의 국군포로도 돌려받지 못했다.
 
 
  2010년 이후 억류 중인 국군포로 수 파악 못 해
 
물망초 사무국에서 만난 유영복씨.
  휴전 이후 지금까지 대한민국으로 돌아온 국군포로는 2022년 5월 12일 기준 80명이다. 이 중 15명이 생존해 있다. 2010년도 이후 생환한 국군포로는 없다. 현재 북한에는 100~200명의 국군포로가 생존해 있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국방부는 2010년을 기준으로 약 500명이 생존해 있다고 밝혔다. 이 역시 탈북 국군포로의 증언에 기반한 수치일 뿐 정부 차원의 공식 조사는 진행된 바 없다.
 
  유영복씨의 주장대로 2000년 6·15공동선언 이후 국군포로의 귀환이 늘었다.
 
  2020년 국방백서에 따르면 연도별 귀환 국군포로의 수는 ▲1994년 1명 ▲1997년 1명 ▲1998년 4명 ▲1999년 2명 ▲2000년 9명 ▲2001년 6명 ▲2002년 6명 ▲2003년 5명 ▲2004년 14명 ▲2005년 11명 ▲2006년 7명 ▲2007년 4명 ▲2008년 6명 ▲2009년 3명 ▲2010년 1명이다.
 
  대한민국으로 귀환한 국군용사 80인은 모두 남북 간의 공식 송환 절차가 아닌 자력 귀환 형식으로 돌아왔다. 일부는 국정원·국방부 등의 비공식적인 도움을 받기도 했으나 국군포로 귀환에는 남한에 거주하는 가족이나 이른바 브로커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브로커들은 국군포로들이 귀환하면 받는 정착지원금 중 일부를 받거나 남한에 거주하는 국군포로 가족에게 돈을 받는 방식으로 국군포로를 남한으로 돌려보냈다.
 
  2001년 귀환한 김성태씨는 탈북한 뒤 중국 지린성 투먼(圖們), 선양(瀋陽), 다롄(大連)을 거쳐 배를 타고 대한민국 땅을 밟았다. 다롄항에서 인천항까지는 29시간이 걸렸다. 김씨는 귀환 당시 허재석·허태석 형제의 도움을 받았다.
 
  국군포로인 고(故) 허재석(1932~ 2021년, 2000년 귀환)씨는 1997년 귀환한 ‘2호’ 탈북 국군포로 고 양순용(1932~2001년)씨의 도움으로 한국에 올 수 있었다. 귀환한 양씨가 아오지탄광에서 함께 지낸 국군포로 100여 명의 명단을 공개했는데 이 명단을 보고 허태석씨가 형을 구하기 위해 나섰기 때문이다.
 
  동생의 도움으로 귀환한 허재석씨는 “함경북도 지역 탄광에만 500여 명의 국군포로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는 2000년도부터 시작된 국군포로 귀환 행렬에 큰 역할을 했다.
 
  김성태씨는 대한민국을 지상낙원이라고 표현했다. 복지관에서 영어와 일본어를 공부하고 컴퓨터 사용법을 익혔다. 덕분에 컴퓨터로 음악을 듣고 이메일도 보낼 수 있다. 스마트폰도 사용한다. 김씨는 “남한 교도소가 북한의 일반 사회보다 낫다”며 이렇게 말했다.
 
  “하루는 남한 교도소에 견학을 갔어요. 너무나 신사적이었어요. 교도소 관계자에게 ‘교도소에서 지내는 사람은 고통이 좀 있어야 하는데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사상 개조가 되겠습니까’라고 말하기도 했죠. 북한 교도소는 서너 달만 있으면 사람이 버티질 못합니다. 제 청춘을 교화소, 탄광에서 보낸 걸 생각하면 골수까지 원한이 사무칩니다.”
 
 
  국군포로 주제로 한 영화에 출연한 김성태씨
 
물망초 사무국에서 만난 김성태씨.
  기자와 마주 앉은 김성태씨는 재주가 많고 농담을 좋아하는 할아버지 같았다. 정치에도 관심이 많았다. 최근 화제가 된 ‘검수완박’부터 한일 관계 정상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촛불 시위, 한덕수 국무총리 인준 동의 문제 등에 관심을 보였다. 기자가 ‘정치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다’고 하니 크게 웃었다.
 
  김씨는 최근 우크라이나 국제의용군에 참가해 논란이 된 해군특수전여단(UDT) 출신 이근 전 해군 대위와 함께 국군포로 구출 작전을 주제로 한 단편 영화 〈POW(Prisoners Of War·전쟁 포로, 2021년 작)〉에도 출연했다. 김씨는 여기서 국군포로 정영신 역을 맡았다.
 
  — 건강은 괜찮으십니까.
 
  유: 나이가 있으니까…. 노쇠하고 노환이 왔죠. 탄광에서 오랫동안 일하는 바람에 폐에 돌가루가 많이 껴 있어요. 아까 말했듯이 대한민국 땅을 밟은 덕분에 덤으로 사는 거예요.
 
  김: 허리가 조금 아파요. 마음은 청춘인데…. 그래도 (보행용) 유모차를 밀고 다니면서 몸을 풀면 좀 나아져요.
 
  김성태씨와 이규일씨는 지팡이가 필요하지만 유영복씨는 아무런 도움 없이 자유롭게 거동할 수 있었다.
 
  — 소원은 없으십니까.
 
  김: ‘빨리 통일이 됐으면…’ 하는 것 말고는 없어요. 나는 항상 행복해요. 북한에 있었으면 벌써 내가 죽었지…. 북한에선 환갑을 맞지 못하고 죽을까 봐 환갑을 앞당겨요. 57세, 58세…. 한국에선 요새 환갑잔치를 안 하잖아요. 여기가 지상낙원이라니까요.
 
  이: 윤석열 대통령이 통일 대통령이 됐으면 좋겠어요.
 
  유영복씨는 “남북이 통일되면 좋겠지만 사실상 힘들지 않겠느냐”며 “남북 교류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솔직히 말해야 해요. 북한에 쌀도 주고 돈도 주고 비전향 장기수도 다 보내줬는데 국군포로는 하나도 데려오지 못한 이유를 말이에요. 이런 나라를 보고 유사시에 젊은이들에게 ‘돌격 앞으로’라고 할 수 있습니까. 북한을 ‘나쁜 나라’라고는 하지만 장기수랑 인민군 포로는 다 데려갔잖아요.
 
  저승이라는 게 있는지는 몰라도 저승에 가면 전우들이 ‘왜 우리 실태를 똑똑히 증언하고 대변하지 않았느냐’라고 하면 뭐라 할 말이 없지 않습니까. 죽을 때까지 국군포로를 알리기 위해 힘닿는 데까지 노력할 겁니다.”
 
  국군포로 3인이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기까지는 많은 이의 수고가 있었다. 국민의힘 태영호 의원부터 박선영 물망초 이사장, 정수한 물망초 국군포로송환위원회 위원장(울산대 교수, 예비역 육군 준장), 전환기정의워킹그룹(TJWG) 신희석 법률분석관 등이 힘썼다. 여기에 물망초 국군포로송환위원회 담당 간사인 이재준 연구과장과 물망초 직원 2명이 국군포로의 취임식 참석을 곁에서 도왔다.
 
 
  윤석열 정부 국정과제에 포함된 국군포로 문제
 
귀환 국군포로. 사진=조선DB
  정수한 위원장은 국군포로가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간 보수·진보 정권을 가리지 않고 국군포로를 방치해왔습니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죠. 이분들을 국가적 차원에서 예우해야 합니다. 물망초에서는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 송환과 귀환 국군포로 처우 개선을 위해 문제 제기를 꾸준히 해왔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신분일 때부터 여러 경로를 통해 국군포로와 관련된 정책을 건의했습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인수위)가 꾸려진 후에도 지속해서 의견을 냈고요. 덕분에 국군포로 세 분이 초청식에 참석할 수 있게 돼 정말 기쁩니다. 윤석열 정부의 국정과제에 국군포로 문제도 포함돼 있습니다.”
 
  윤석열 정부는 ‘110대 국정과제’를 공개했다. ‘95. 남북 간 인도적 문제 해결 도모(통일부)’ 과제에서는 “남북회담 국제협력을 통해 국군포로·납북자 문제 해결에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이후 지금까지 국군포로 80명이 귀환했고 이 중 15명이 생존해 있다. 취임식에는 왜 15명이 아닌 3명만 초대됐을까.
 
  정 위원장은 “사실상 거동이 가능한 국군포로가 3명 정도였다”며 “열악한 환경에서 40년 이상을 지낸 후유증 때문에 나머지 귀환 국군포로들은 입원해 있거나 거동에 제약이 있다”고 밝혔다.
 
  정수한 위원장은 “앞으로도 현충일이나 6·25전쟁 기념행사에 국군포로들을 모셔서 이분들에게 지속적인 관심과 예우를 표해야 한다”고 했다.
 
 
  조태용·태영호 의원 등 노력
 
정수한 물망초 국군포로송환위원장과 이재준 물망초 연구과장. 사진=정수한·이재준 제공
  인수위에서는 외교·안보 분과에서 실무위원으로 활동한 국민의힘 조태용 의원실 장영일 보좌관이 국군포로 초청을 위한 실무를 맡았다. 당초 좌석 배정 문제로 국군포로 3인과 이를 보조할 물망초 직원 1명 등 4명만을 초대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물망초가 “국군포로 3인을 각각 부축하고 모셔야 한다”며 참여 인원을 늘려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장 보좌관이 취임식 준비 부서와 협의해 국군포로 3인을 포함해 총 6명이 행사에 참석할 수 있도록 조율했다.
 
  태영호 의원은 국군포로 3인이 귀빈들이 앉는 ‘단상’에 앉을 수 있도록 인수위 측에 의견을 냈다.
 
  유영복씨를 모시고 취임식 행사를 다녀온 이재준(34) 연구과장은 “국군포로 어르신들이 취임식에 초청받았다는 소식을 듣곤 국군포로 어르신의 존재를 국민에게 알리고 국가적 차원에서 감사의 마음을 전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정말 기뻤다”며 “국군포로에 관심을 표명한 윤석열 정부에 감사한 마음”이라고 했다.
 
  2018년부터 물망초에서 근무한 이재준 과장은 지난 4년간 국군포로송환위원회를 담당하면서 탈북 국군포로의 복지와 명예 회복을 위해 힘써왔다. 2018년에는 당시 생존 탈북 국군포로 30명 중 17명을 직접 만나 증언집을 만들었다. 이 과장은 “국군포로의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앞으로도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국군포로 송환을 위한 노력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먼저 시작됐다. 2004년 재미(在美) 정용봉 박사가 국군포로송환위원회를 설립해 포로 송환 노력을 펼쳤다. 2013년 5월에는 물망초에도 국군포로신고센터(센터장 김현 변호사·법무법인 세창)가 개설됐다. 정용봉 박사가 고령으로 활동이 힘들어지자 국군포로신고센터가 미국 국군포로송환위원회를 인수했고 그해 9월 24일 (사)물망초 국군포로송환위원회로 확대 출범했다. 초대 위원장은 김현(전 대한변협 회장) 변호사가 맡았다.
 
 
  유엔에도 국군포로 문제 제기
 
  취임식에 참석한 국군포로 3인은 지난 2월 19일 토마스 오헤아 퀸타나(Tomás Ojea Quintana) 유엔 북한인권 특별보고관을 만나 국군포로 문제에 대한 관심을 요청했다.
 
  귀환 국군포로들은 2020년 6·25 전쟁 70주년을 맞아 다른 유엔 특별보고관들에게 국군포로 및 납북자 송환을 촉구하는 서한을 발송한 바 있다.
 

  국군포로들은 토마스 오헤아 퀸타나 유엔 북한인권 특별보고관에게 “▲우리 정부에 과거 전시 민간인 납북자 문제와 마찬가지로 정부 차원의 조사위원회에서 진상조사와 국제법 위반 분석 보고서를 발간하고 ▲현재 국방부 군비통제과(arms control division)에서 담당하는 국군포로 업무를 전담할 부서를 새로 만들며 ▲국정원과 국방정보본부 등 대북 관련 정부 기관의 공식 업무에 국군포로·납북억류자 및 탈북자 구출을 위한 정보 수집과 송환 지원을 명시하도록 권고해달라”고 요청했다.
 
  국군포로 한만택 사건을 조속히 처리해달라고도 요청했다. 한씨는 2004년 12월 탈북 후 2005년 1월 중국이 북한에 강제 송환한 뒤 정치범수용소로 이감됐다. 이후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한만택씨는 현재 유엔 강제실종 실무그룹(WGEID) 및 자의적 구금 실무그룹(WGAD)에 진정이 계류 중이다.
 
 
  북한·김정은·경문협 상대로 소송전 벌인 국군포로
 
2019년 6월 21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물망초 국군포로송환위원회 인사들과 탈북 국군포로가 북한 당국과 김정은에게 손해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사진 뉴시스
  국군포로들은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2016년 10월 물망초 국군포로송환위원회는 귀환 국군포로인 노사홍(93)·한재복(88)씨의 북한과 김정은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을 위해 소송을 시작했다. 북한에서 고생한 국군포로의 명예를 회복하고 북한과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독재자들의 불법행위를 역사에 남기려는 취지였다.
 
  1366일간 벌어진 소송전 끝에 2020년 7월 7일 서울중앙지법 민사47단독 김영아 판사는 노사홍·한재복씨가 북한과 김정은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사건번호 2016가단 5235506)에서 “피고(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김정은)는 원고들에게 각각 2100만원을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당시 국군포로를 대리한 변호인단은 민법상 ‘상속의 원리’를 동원해 김일성-김정일의 불법행위가 김정은에게 상속된다는 법리(法理)를 만들었고 법원도 이를 인정했다.
 
  문제는 북한 당국과 김정은에게 손해배상금을 받아낼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에 서울중앙지법은 국군포로 2명을 채권자, 북한과 김정은을 채무자, 경문협을 제3채무자로 하는 ‘채권압류 및 추심명령’을 내렸다.
 
  경문협은 이른바 ‘남북 저작권 교류 사업’이란 명목 아래 북한 단체들과 맺은 협약에 따라 북한 저작물 사용료를 국내 업체에서 거둬들여 북한에 송금하는 일을 해왔다.
 
  2006년 경문협은 저작권료를 수금하기 위해 ‘남북저작권센터’를 신설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문을 작성한 신동호 청와대 연설비서관이 남북저작권센터의 초대 대표를 지냈다. 신 비서관은 NL 계열의 운동권 조직인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문화국장 출신이다.
 
  경문협은 문재인 정부에서 초대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낸 임종석 외교안보특별보좌관이 2004년 1월 남북 민간교류 협력을 명목으로 세운 법인이다. 여기에는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서울시장 후보, 민주당 우상호 의원과 2018년부터 해외 도피 중인 옵티머스자산운용 설립자 이혁진 전 대표 등이 참여했다. 각각 부이사장, 등기이사, 이사로 이름을 올렸다. 임종석 이사장의 지역구(서울 중구성동구갑)를 물려받은 홍익표 의원도 경문협 이사 출신이다.
 
  경문협은 ‘저작권료’ 명목으로 수취한 자금 중 7억9000만원을 북한에 송금(2005~2008년)했다. 2008년 당시 북한의 금강산 관광객 사살 이후 대북송금이 금지되자 지금까지 23억원(2009년~)을 법원에 공탁했다. 법원 공탁금은 청구권자가 돈을 가져갈 수 있는 날로부터 10년 안에 찾아가지 않으면 국고로 귀속된다.
 
  경문협이 법원에 공탁한 자금 중 2009년도분 2266만원, 2010년도분 2억790만원은 각각 2019년과 2020년에 환수돼야 했지만, 경문협은 국고 귀속일이 다가오자 ‘회수 후 재(再)공탁’ 수법을 써서 ‘북한 저작권료’를 보호했다.
 
  국군포로 측은 경문협이 현재 보관 중인 북한 저작권료 23억원에서 4200만원을 배상하라는 별도의 소송을 서울동부지법에 냈으나 지난 1월 14일 동부지법은 국군포로의 청구를 기각했다. 저작권료가 북한 당국과 김정은이 아닌 저작자 개인들에게 지급된다는 게 그 이유였다.
 
  당초 국군포로에게 승소 판결을 한 서울중앙지법은 경문협이 수취한 북한 저작권료가 사실상 북한 당국 소유라고 보았다. 물망초는 현재 경문협을 상대로 2심 재판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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