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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일성 사저 호위병 출신의 증언

김정일도 김일성 사저 들어올 땐 초소에서 검문

글 : 정광성  월간조선 기자  jgws89@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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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평일이 김정일보다 김일성 사저를 더 자주 드나들었다
⊙ 설날이면 전 부대원이 김일성 대문 앞에서 세배
⊙ 김일성 사저 근처에 로열패밀리를 위한 모든 시설 있어…
⊙ “김정일과 김평일 1차선 도로에서 기 싸움… 김정일이 먼저 물러나”
⊙ “함께 복무하던 사람 포도 한 송이 때문에 가족의 모든 직위 박탈”
김일성과 김정일의 시신이 있는 북한의 금수산태양궁전이다. 사진=조선중앙통신 캡처
  김일성 사망 26년째. 그동안 여러 탈북자를 통해 김일성 관련 일화가 공개됐다. 하지만 김일성 사저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의 증언은 좀처럼 접하기 힘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일성 인근에서 그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다.
 
  2004년 탈북한 김순일(가명)씨는 젊은 시절 963군부 직속 1대대에서 군 복무를 했다. 김씨가 복무한 1대대는 평양 금수산 지구의 김일성 관저와 그 딸인 김경진의 사저를 지키는 경비대대다. 한마디로 김일성의 호위부대다. 당시 963부대 1대대장은 이감용이었다.
 

  김씨의 부대는 김일성 사저인 51호와 김경진 사저인 53호, 김경진의 자녀들이 공부하는 54호, 흥부초대소, 주암산초대소, 합장강 낚시터가 주된 근무지였다. 김씨는 “1개 대대는 7개 중대, 1개 중대는 4개 소대, 1개 소대는 4개 분대로 구성된다”고 했다. 이들은 3개월은 보초를 서고 3개월은 훈련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입대 첫날 김일성이 근처에 있다고 하니 잠도 못 자”
 
지난 1월 14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는 조선노동당 제8차 대회 기념 열병식이 열렸다. 사진=뉴시스
  김씨는 고등중학교 4학년 때 ‘중앙당 5과’ 대상에 발탁됐다. 북한의 5과는 특수기관에서 활동할 인원을 선발하는 조직이다. 5과에 선발된 이들에게 주어지는 직업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젊은 청년 중 일부는 호위사령부 내부에서 김씨 일가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위하는 ‘친위대’에 보낸다. 남한이나 다른 나라에 파견하여 간첩활동을 하는 대상도 5과에서 선발한다.
 
  특권을 누리다 저세상으로 갈 인물들의 뒷시중을 평생 드는 이들도 5과에서 선발한다. 중앙당 비서급 고위 간부들의 안마사나 개인 비서, 식모, 담당 간호사다. 김씨 일가의 초대소나 별장에서 근무하는 인원도 모두 5과에서 선발했다.
 
  1990년대 이전까지 북한은 5과에서 뽑혀온 사람들을 외부 세계와 철저히 단절시켰다. 내부 비밀이 새어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실수로 내부 비밀을 발설한 사람은 조용히 ‘제거’를 했다. 그 가족에겐 전사자로 통보하고 훈장과 선물을 줬다.
 
  과거엔 5과 대상에 선발되면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했다. 북한 최고의 존엄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영광을 받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들어 5과의 진실이 드러나고, 5과에 뽑혀 올라간 여성들의 비참한 사연 등이 알려지며 딸 가진 부모들은 5과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김순일씨의 누나도 5과 대상으로 뽑혀, 평양 백화원초대소에서 일했다. 백화원초대소는 남한에도 이름이 알려져 있다.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이 방북 당시 백화원초대소에 머물렀다.
 
  김씨는 18세던 1986년 4월 군에 입대했다. 그는 당시 부대에서의 첫날을 이렇게 회고했다.
 
  “18세 어린 나이에 군에 입대하니 모든 것이 새로웠다. 그것도 김일성이 사는 근처에서 군 복무를 하게 됐다는 게 무한한 영광이었다. 얼마나 떨리든지 입대해서 첫날 밤은 잠을 잘 수 없었다.”
 
  ― 북한에서 5과로 선택되기가 어렵다던데.
 
  “쉬운 일은 아닙니다. 나는 누나가 먼저 5과로 선택됐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간 편입니다.”
 
  북한 당국은 5과 선발과정에서 인물, 신체, 나이는 물론, 가족에 대한 신원조회도 철저히 한다. 만약 가족 중에 한 명이라도 김씨 가문의 뜻에 어긋난 선택을 한 경우는 5과 대상에서 제외된다.
 
 
  “저 김정일입니다”
 
  김씨는 입대 후 2년간은 주로 김일성 사저 주변 경계 근무를 섰다. 입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병들은 51호 주변의 경계 근무를 선다고 한다. 김씨의 말이다.
 
  “호위사령부에 입대하면 신병들은 51호나 53호, 54호 주변이나 울타리 경계를 섭니다. 물론 초대소 경비를 설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사저를 보호합니다. 계급이 올라가면 51호 정문 보초를 시작으로 조금씩 사저에 가까워집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보통 주변 경계 임무는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바른 자세로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51호 정문 보초를 서면 힘들긴 하지만 오가는 사람들을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가끔 김정일이나 김평일 등 김씨 일가들을 볼 수도 있고요.”
 
  당시 김정일은 51호에 자주 오지 않았지만, 김정일의 이복동생인 김평일은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김정일은 항상 216 벤츠를 타고 왔어요. 51호는 김일성과 김성애 외 방문하는 모든 차량을 검문검색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김정일도 예외는 아닙니다. 하루는 김정일이 216 벤츠를 타고 오는데 정문 보초병이 차를 세웠어요. 그러자 김정일이 창문을 열고 ‘저 김정일입니다’라고 했지요. 김정일은 아버지 집을 방문할 때마다 항상 긴장한 모습이었어요. 반면 김평일은 제집 드나들 듯 51호를 자주 오갔습니다.”
 
  북한의 216 벤츠는 당시 고위 간부라도 아무나 탈 수 없는 자가용 차였다. 216 벤츠는 김일성이 선물하는 차다. 당시엔 김일성과 항일투쟁을 함께한 전우들과 김정일 정도만 탈 수 있는 차였다. 216은 김정일의 생일인 2월 16일을 상징한다.
 
 
  김정일과 김평일의 기 싸움
 
김일성이 생전 김정일과 함께 서해갑문 건설 현장을 지도하는 모습. 사진=조선중앙통신 캡처
  남한에도 알려졌듯 김정일과 김평일은 한때 김일성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였다. 김일성이 장자인 김정일을 후계자로 지명하며 김평일은 권력구도에서 밀려났다. 그렇다 보니 둘 사이는 좋지 않았다고 다수의 고위 탈북자들이 말했다.
 
  ― 김정일과 김평일에 관련된 일화가 있다면.
 
  “둘 사이는 아시는 것처럼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김정일이 후계자로 결정되고 김평일은 곁가지로 분리된 상황이지만 그래도 김성애가 살아 있다 보니 힘이 있었지요.”
 
  김씨는 말을 이어나갔다.
 
  “한번은 김정일이 51호를 방문하기 위해 들어가는 길이었고, 김평일은 사저에서 나오는 길이었습니다. 51호로 들어가는 길은 시멘트로 포장된 1차선 도로여서 오가다 만나게 되면 누구 하나는 길을 비켜줘야 합니다. 그런데 김정일과 김평일이 중간에서 마주치게 되어 둘이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서로 비켜주지 않으려고 한 것이지요.”
 
  상황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원래는 김평일이 길을 비켜줘야 하는 상황이지만 당시 김평일은 피하지 않았어요. 이런 상황이 3~4분간 벌어졌고, 결국 김정일이 차를 잔디밭으로 틀어 김평일의 차를 피했죠. 당시에는 김정일이 운전을 잘해서 먼저 피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김정일이 문제를 만들지 않기 위해 먼저 자리를 피한 것 같아요.”
 
  한 고위 탈북자도 이에 대해 “김정일이 후계자로 결정되긴 했지만 완전하지가 않았다. 아버지 김일성이 살아 있고, 김성애와 김평일을 지지하는 세력들도 남아 있는 상황에서 문제를 만들지 않기 위해 먼저 핸들을 돌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포도 한 송이 때문에 생활제대… 가족이 몰락
 
  김씨보다 2년 늦게 입대한 후배 A씨가 있었다. A씨는 양강도 출신에 엘리트 집안의 자녀였다. 그의 아버지는 양강도 보위부장이었다. A씨는 입대 후 부대 인근에 있는 김일성의 시험농장에서 경계 근무를 섰다. 그곳은 김일성을 위해 전국에서 올린 농산물 종자들을 심어 가꾸는 일종의 시험농장이었다. 이름은 원리마사업소.
 
  A씨는 가을 어느 날 원리마사업소 포도밭 인근에서 근무를 서게 됐다. 포도나무에 달린 포도가 너무 탐스러워 몰래 한 알을 따서 먹었다. 포도맛을 본 A씨는 그날 이후로 사람들의 눈을 피해 포도를 몰래 따 먹기 시작했다.
 
  김씨의 설명이다.
 
  “그곳의 과일이나 채소들은 보통 시중에서 판매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시험농장이라곤 하지만 최고의 토양과 좋은 비료를 쓰며 최상으로 관리하다 보니 열매가 좋을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A가 한 알씩 따 먹다 보니 거의 한 송이를 다 먹은 거예요. 과일 나무에 열매가 열리게 되면 땅에 떨어지지 말라고 밑에 바구니 같은 것을 놓아둡니다. 그런데 수확하려고 보니 바구니는 있는데 포도가 없으니 비상이 걸렸지요.”
 

  대대에서 간부들이 내려와 근무자들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결국 A씨는 자신이 한 일을 실토했다.
 
  “포도 한 송이를 먹었다는 이유로 A씨는 곧바로 군사재판에 넘겨졌어요. 다행히 생활제대로 마무리됐지만, 양강도에서 보위부장을 하던 그의 아버지는 직위를 박탈당했습니다.”
 
  ‘생활제대’는 북한군 내에서 쓰는 용어다. 군 복무 중 규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군 복무 중간에 집으로 보내는 것이다. 이는 북한에선 불명예나 마찬가지다. 심지어 A씨처럼 김일성의 친위부대인 호위사령부에서 생활제대를 당할 경우 앞으로 당 간부뿐만 아니라 대학에도 갈 수 없다.
 
  김순일씨는 5년간 군 복무 하는 동안 김일성 사저를 한 번밖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것도 김일성 전용 수영장에 날아든 파리를 잡기 위해서였다. 그의 말이다.
 
  “하루는 근무를 마치고 부대에 복귀했는데 김일성의 부관이 찾아와 저와 몇 명을 불러 함께 가자는 겁니다. 그를 따라간 곳은 51호에 있는 실내수영장이었어요. 부관은 우리에게 파리 한 마리가 있다며 잡으라고 지시했죠. 수영장은 그야말로 웅장했어요. 그 안에서 파리 한 마리를 찾아 3시간을 보냈습니다.”
 
  ― 파리는 잡았나요.
 
  “결국 잡긴 했지만 3시간 동안 거의 전투였습니다. 파리 한 마리 잡겠다고 온 수영장을 이 잡듯이 다녔어요. 지금 생각하면 당시 우리는 노예였습니다.”
 
  ― 김일성 전용 수영장은 어떻게 생겼나요.
 
  “일단 수영장 너비가 10m이고, 길이는 40m 정도 됩니다. 수영장 옆에 방이 하나 있어요. 그곳에는 김일성의 부관과 의사, 간호사가 앉을 수 있는 책상과 침대 하나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수영장에서 면봉을 처음 봤어요. 어린 마음에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는 틈을 이용해 하나를 챙겼습니다.”
 
  ― 면봉은 왜 챙겼나요.
 
  “당시에는 그게 엄청난 물건으로 느껴졌습니다. 생각해봐요. 북한 최고의 존엄이 쓰는 물건을 아무나 가질 수 없으니 그런 것을 하나 정도 가지고 있으면 큰 영광이라고 생각했지요.”
 
  김씨는 당시 수영장에서 챙긴 면봉을 보이지 않는 책 사이에 숨겨놓고 틈틈이 보면서 자긍심을 얻었다고 한다.
 
  ― 김일성을 실제로 본 적이 있나요.
 
  “앞에선 보지 못했습니다. 밤 10시경 근무를 서고 있는데 뒤에서 말소리가 들렸어요. 처음엔 거리가 멀어 누군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말소리가 점점 가까이 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김일성과 김성애가 산책을 나온 듯했어요. 그들을 보고 싶었지만 우리는 근무 서는 중에는 말소리가 나도 움직이면 안 돼요. 그냥 등 뒤로 지나가는 소리만 들었습니다. 그날 얼마나 설레던지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수령님, 새해에도 만수무강하십시오”
 
  북한도 설이면 아이들이나 아랫사람들이 집안 어른들을 찾아 세배를 한다. 특히 평양은 설날 아침이면 가장 먼저 꽃다발을 들고 김일성·김정일 동상에 찾아가 참배해야 된다. 북한에선 이들이 가장 큰 어른이라는 뜻이다.
 
  북한 군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이들은 군부대 안에 있는 김일성 동상이나 사진에 참배를 해야만 한다. 김씨는 군 시절 조금 특별한 설 인사를 했다고 한다. 김씨의 말이다.
 
  “설이면 누구나 세배를 하게 됩니다. 우리 부대는 김일성을 호위하는 부대이다 보니 당연히 김일성에게 세배를 합니다. 설날 아침이면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진풍경이 펼쳐지지요. 아침 일찍 몸단장을 하고 1개 대대가 김일성 사저를 향해 갑니다. 우리 부대에서 51호까지 1km 정도 됩니다.”
 
  ― 대대가 아침 일찍 김일성에게 세배하러 가는 건가요.
 
  “네, 세배하러 가는 건 맞는데 김일성에게 직접 하는 것은 아닙니다.”
 
  ― 그럼 누구에게 대신 하나요.
 
  “그런 셈이죠. 우리 대대는 구보로 김일성 사저 대문 앞까지 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정리·정돈을 한 뒤 큰 소리로 김일성 사저 대문을 향해 ‘수령님, 새해에도 만수무강하십시오’라고 큰 소리로 세배를 합니다.”
 
  ― 김일성이나 다른 사람이 나와 보지 않나요.
 
  “네, 아무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대문을 향해 넙죽 큰절을 드리고 다시 부대로 복귀합니다.”
 
 
  아버지의 죽음… 제대 후 중국으로 탈출
 
  김씨의 아버지는 그가 입대한 지 5년이 지난 1990년 1월에 세상을 떠났다. 김씨는 홀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군을 나와야 했다. 당시 북한 호위사령부에서는 젊은 인재를 키운다는 이유로 모범적인 군인들을 선발해 원하는 대학에 입학시켜주는 제도가 있었다. 이들은 5년 군 복무를 마치고 대학 교육을 받으면 졸업 후 좋은 직업을 갖게 된다.
 
  하지만 이 제도가 변질하여 당 간부 자녀나 뒷배가 있는 군인들이 선발되어 대학으로 보내졌다. 김씨는 백화원초대소에서 일하는 누나의 도움으로 입대 후 5년이 지난 뒤 군을 나오게 됐다. 김씨의 말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나는 어쩔 수 없이 제대해야 했습니다. 다행히 누나가 호위사령부에 친분이 있는 사람을 통해 나를 대학교에 보낸다는 이유로 제대시켰어요. 대학교에 갈 수도 있었지만, 집안 형편이 좋지 못해 포기했습니다.”
 
  김씨는 이후 돈을 벌기 위해 중국을 오가며 밀무역을 했다. 그러다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북송 위기에 놓였다. 북한은 주민이 탈북하면 강도 높은 처벌을 하지만, 김씨같이 호위사령부나 이와 비슷한 기관에서 일하던 사람이 적발되면 심할 경우 공개처형까지 시킨다.
 
  이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은 김씨 본인이었다.
 
  “북송되면 어떻게 되는지 뻔히 알고 있는데 순순히 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동 중에 탈출했는데 당시 보위성이 나를 잡겠다고 혈안이 되었어요. 북한으로 다시 들어가 자수해서 누나의 도움으로 처벌은 받지 않았습니다.”
 
  김씨는 북한에서 얼마간 머무르다 다시 탈북했다. 그는 현재 남한 생활 16년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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