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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파키스탄-북한’의 核 협력 미스터리

중국이 北核의 배후세력!

글 : 조갑제  조갑제닷컴·조갑제TV 대표

글 : 김영남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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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벡톨 前 DIA 분석관, “중국 없었다면 파키스탄 핵무기는 없고, 파키스탄 없었다면 북한의 우라늄 프로그램은 없다”
⊙ 1998년 파키스탄 6차 핵실험의 미스터리… 北 핵무기 대리실험 의혹의 진실은?
⊙ 1993년 金日成-부토 총리의 비밀 거래… “노동미사일과 우라늄 농축 기술을 맞바꿨다”
⊙ 올브라이트 ISIS 소장, “영변에서 파키스탄식 원심분리기 설계 직접 확인”
⊙ 하이노넨 前 IAEA 사무차장, “파키스탄-북한 기술 이전은 확실… 진실은 북한만 알고 있다”
  존 볼턴은 회고록 《그것이 일어난 방: 백악관 회고록》에서 2018년 6월 싱가포르 회담 이후 트럼프의 희망이 산산조각 나는 과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기고만장했던 트럼프도 “북한과 신뢰를 구축한다는 것은 말똥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 볼턴은 이 말이 “북한문제에 대한 대통령의 가장 현명한 발언”이었다고 비아냥댔다. 이 무렵 트럼프는 볼턴에게 “시진핑(習近平)이 김정은에게 어떤 조언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볼턴은 즉시 한 페이지짜리 보고서를 올렸는데 형식은 시진핑이 김정은에게 말함직한 충고를 상상하여 쓴 것이었다.
 
  〈보세요, 김정은 동지! 트럼프가 얼마나 많은 ‘나이스 레터’를 쓰든 그를 믿으면 안 됩니다. 동지는 나와 떨어지면 안 됩니다. 핵무기 프로그램을 빼앗기지 않으면서 금전적 원조를 얻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중국과의 협력이) 유일한 방도입니다. 만약 미국을 상대로 협상하는 길을 선택한다면 동지는 머지않아 평양에 있는 나무에 매달리게 될 거요, 틀림없이. 그러니 나에게 붙어 있어요. 핵무기·미사일·생산시설을 숨기기만 하면 됩니다. 지난 20년간 그랬던 것처럼 이란의 우리 친구들은 북한 미사일을 계속해서 시험해줄 거예요. 동지는, 숨겨놓은 지하공장에서 이란을 위해서 핵폭탄을 만들어줄 수 있잖아요. 미국의 제재를 무력화시키기 위하여 우리는 이란 석유를 더 많이 사줄 것이고, 자본투자도 늘릴 겁니다. 이란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할 겁니다. 김정은 동지, 장기적으로 생각해요. 역사의 승자(勝者) 편에 서고 싶으면 해답은 중국입니다. 미국인들은 우리의 친구가 아닙니다.〉
 
  볼턴은 북핵(北核)의 후원자는 중국이라고 본다. 이는 1980년대 중국이 파키스탄·북한·이란의 핵개발을 지원하는 것은 중국의 국익(國益)에 이롭다는 전략적(戰略的) 판단을 내렸다고 보는 미국 내의 일부 시각을 반영한다. 북한의 핵 및 미사일은 중국·파키스탄·이란과 밀접한 관련 속에서 발전되어왔다. 중국은 파키스탄의 핵개발을 돕고 파키스탄은 북한의 미사일 기술을 얻는 대신 그들의 핵개발을 지원하며, 북한은 이란의 미사일 개발을 돕는 대신에 핵기술을 지원하는 구도에서 배후의 빅브라더(큰형·大兄)는 중국이다.
 
 
 
  《핵특급》
 
토머스 C. 리드-대니 B. 스틸만 著 《핵특급》.
  북한의 핵개발을 둘러싼 가장 큰 궁금증 중 하나는 누가 이를 도왔냐는 것이다. 북한은 ‘자력(自力) 개발’을 운운하지만 여러 국가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 다수설이다.
 
  1급 전문가 토머스 C 리드와 대니 B 스틸만은 2008년에 쓴 《핵특급(核特級·The Nuclear Express)》이란 책에서 중국-파키스탄-북한 사이의 삼각(三角) 핵협력 관계를 자세히 다뤘다. 파키스탄은 중국의 도움을 받아 핵개발에 성공했고, 그런 파키스탄은 북한의 핵개발을 도왔으며, 중국은 이를 묵인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북한의 핵개발을 도왔다는 내용이다. 이 책은 여러 이유로 큰 반향을 불렀다. 리드는 로렌스 리브모어 국립연구소에서 핵폭탄 설계에 종사했고, 포드·카터 행정부 시절엔 공군장관을 지냈으며, 레이건 대통령의 안보 특보였다. 스틸만은 미국 최초의 핵폭탄을 만들어낸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에서 핵폭탄 설계 등에 종사했고, 13년간 핵 관련 기술정보국을 이끌었다. 그는 10년간 중국의 핵 관련 시설을 방문조사하기도 했다.
 
  스틸만은 덩샤오핑(鄧小平)이 권력을 잡게 되는 1980년대 초부터 중국이 핵과 탄도미사일 기술을 이슬람 국가와 공산국가에 확산(擴散)했다고 한다. 또 중국은 라이벌인 인도의 숙적(宿敵) 파키스탄이 핵무기 개발에 나서자 기술자들을 초빙해 교육을 하고 ‘CHIC-4’라고 불리는 단순구조의 원자폭탄 설계 정보를 건넸다고 한다. 핵물질과 핵심 부품이 전달됐다고도 한다.
 
  스틸만은 1990년 5월 26일 중국이 파키스탄을 대리해서 핵실험을 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중국 신장(新疆) 위구르 자치구 롭 누르 실험장에서 진행됐다.
 
 
  중국이 파키스탄 핵폭탄 代理실험?
 
  《핵특급》의 저자들은 다음과 같은 증거가 중국의 대리(代理)실험 사실을 뒷받침한다고 주장한다. 중국이 1982년부터 파키스탄에 핵기술을 이전했다는 점, 1998년 파키스탄 핵실험의 결과와 1990년 롭 누르 실험장에서 진행된 핵실험의 폭발 결과 및 탄두 설계가 일치한다는 점이다. 파키스탄이 인도의 핵실험 17일 뒤에 핵실험을 감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1990년 중국의 대리실험을 통해 핵무기가 작동할 것이란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파키스탄의 1~5차 핵실험은 하나의 갱도에서 한 번에 이뤄졌는데 이는 기술적으로 매우 어렵다고 했다. 스틸만은 자신이 만난 중국인 과학자들 역시 대리실험이 사실이라는 인상을 줬다고 한다. 대리실험 사실을 부인하는 모습은 전혀 볼 수 없었다고 했다.
 
  스틸만 등은 1~5차 핵실험이 있은 이틀 후 진행된 6차 핵실험 역시 미스터리라고 했다. 1~5차는 우라늄이 사용됐으나 6차 실험 직후에는 플루토늄이 검출됐다는 것이었다. 스틸만은 파키스탄이 과거 가동하던 원자로에서 불법적으로 빼낸 핵연료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이 6차 핵실험과 관련한 여러 언론보도가 나왔다. 북한의 플루토늄이 사용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북한 고위 탈북자가 ‘파키스탄이 1998년 대리실험을 해줬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스틸만은 북한의 우라늄 핵개발 프로그램은 1990년대에 시작됐다고 분석한다. 파키스탄의 베나지르 부토 총리가 북한과 미사일-핵기술 교환 협정을 맺으며 시작됐다. 북한은 파키스탄 ‘핵무기의 아버지’ A. Q. 칸으로부터 받은 기술을 사용해 우라늄 농축시설을 만들었다. 스틸만은 이 과정에서도 중국의 도움이 필요했다고 한다. 파키스탄의 비행기가 중국 영공(領空)을 지나 북한에 들어가서 기술을 전달하기 때문에 중국의 묵인 혹은 도움이 있었다는 판단이다. 스틸만은 중국 과학자들과 대화를 나눠본 결과, 북한의 핵무기는 CHIC-4 설계도를 기반으로 만든 것이라고 했다. 중국이 파키스탄에 보낸 것이 핵확산 시장에 나오게 돼 북한에까지 건너갔다는 것이다. 이 삼각 협력관계에 대하여 한국의 전문가나 언론은 독자적 심층취재를 한 적이 없다. 이제부터 그것을 시도한다.
 
 
  칸의 등장
 
‘파키스탄 핵개발의 아버지’ A. Q. 칸 박사.
  여기서 잠깐 파키스탄의 핵개발 과정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파키스탄이 중국의 기술 지원만으로 쉽게 핵개발에 성공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47년, 파키스탄과 인도는 영국으로부터 분리·독립했다. 파키스탄은 지금의 파키스탄 지역인 서(西)파키스탄과, 지금의 방글라데시 지역인 동(東)파키스탄으로 나뉘었다. 동서(東西) 파키스탄이 인도를 사이에 두고 갈라졌다. 그러다 1971년 인도의 지원을 받은 동파키스탄이 서파키스탄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방글라데시로 분리·독립했다.
 
  이슬람교의 파키스탄과 힌두교의 인도는 서로를 숙적으로 생각했다. 분리·독립 과정에서 종교적 박해를 피해 거주지역을 떠나야 했던 인구는 1500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슬람교도들은 인도를 떠나 파키스탄으로, 힌두교도는 파키스탄을 떠나 인도로 도망쳤다. 20세기 가장 큰 규모의 이주(移住) 사태였다.
 
  이런 중 1974년 인도가 핵개발에 성공했다. 파키스탄으로서도 핵개발만이 유일한 생존수단이라고 느끼게 됐고, 국제사회의 제재와 압박에도 불구하고 핵개발을 강행했다.
 
  파키스탄의 핵개발 성공 요인으로는 정책 결정자의 결단력, A. Q. 칸이라는 집념과 광기(狂氣)에 가득 찬 과학자의 존재를 꼽을 수 있다. 재래식 군사력에서 우위인 인도가 핵무기까지 갖게 된다는 위기감도 중요했다. 파키스탄에서는 두 개의 부서가 핵개발을 담당했다. 무니르 칸이 이끄는 파키스탄 원자력위원회(PAEC)는 플루토늄 핵무기를, A. Q. 칸이 이끄는 칸 연구소(KRL)는 우라늄 핵무기를 각각 개발했다.
 
  A. Q. 칸은 영국·독일·네덜란드 3국이 운영하는 우라늄농축컨소시엄 우렌코(URENCO)의 계약회사에서 번역가로 근무했다. 칸은 네덜란드의 시설에서 우라늄 농축 기술의 존재를 알게 됐다. 그는 독일어로 돼 있는 원심분리기의 설계도를 네덜란드어와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맡았다. 이 과정에서 기술을 빼돌린 그는 인도의 핵실험 이후 파키스탄으로 돌아가 자신이 가져온 유럽 최고의 기밀을 당시 총리던 줄피카르 알리 부토에게 소개했다. 젊은 번역가가 국제적 스파이로 거듭난 뒤 파키스탄 우라늄 농축 핵개발의 총책임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PAEC와 KRL은 원수같이 지내며 경쟁했지만 1998년 핵실험 성공 이후에는 하나가 돼 기쁨을 즐겼다. 이들이 펼친 서로의 경쟁이 핵개발을 앞당긴 또 하나의 큰 요소였다.
 
 
  모든 지도자가 핵개발 계승
 
  파키스탄 핵개발에 있어 흥미로운 점은 정권이 바뀌어도 핵개발 정책에는 변화가 없었다는 점이다. 국가 지도부가 미국과 국제사회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핵개발에 국운(國運)을 걸었다. 줄피카르 알리 부토 총리는 1965년 “풀만 먹게 돼도 핵개발에 나설 것”이라고 했다. 그는 군부(軍部) 쿠데타로 물러나 사형을 당하면서도 핵개발 계획을 끝까지 묻어뒀다. 새롭게 들어선 무함마드 지아 울하크 정권 역시 전임 부토 정권이 진행하던 핵개발을 이어받았다. 파키스탄은 이후 군부와 민간인 출신 지도자가 여러 번 돌아가며 나라를 이끌었다. 정권 교체 과정에서 쿠데타와 암살 시도 등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지만, 누가 새로 정권을 잡든 전임 정권이 추진하던 핵개발 계획만큼은 똑같이 이어받았다. 후진국이던 파키스탄은 미국의 원조가 끊기고 제재를 받음에도 해외에서 필요한 부품을 밀수입해 기술을 개발했다. 칸 박사는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오를 때마다 새로운 문제에 봉착하는 고난의 시간이었다. 바느질용 바늘, 좋은 자전거, 하다못해 포장도로도 만들지 못하는 국가가 가장 새롭고, 가장 어려운 기술들을 만들어가려 했다.”
 
  우여곡절 끝에 파키스탄은 우라늄 농축, 모의실험, 그리고 핵폭탄 제조에 성공했다. 인도가 1998년 핵실험을 하자 파키스탄 역시 핵실험으로 응수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게 됐다. 미안 나와즈 샤리프 총리는 1998년 핵실험 직전 책임자를 만나 “실패하면 우리는 살아남지 못한다, 제발 실패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핵실험에 실패하면 이스라엘 등 서방세계의 폭격을 받아 국가 자체가 없어지게 되는 상황을 우려한 것이다. 핵실험 책임자던 PAEC의 무바라크만드 박사는 실험 직후 이렇게 말했다.
 
  “파키스탄의 기대수명은 세계 122위다. 문맹률은 162위다. 이제 우리는 핵무기 부문에서 세계 7위가 됐다.”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과시욕이 부른 핵확산
 
  한국은 북한이 핵개발에 성공했음에도 이러한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A. Q. 칸이라는 불만에 가득 찬 광기(狂氣) 어린 과학자도 없었다. 칸의 심리치료사는 그를 ‘히틀러 콤플렉스 환자’로 규정했다. 유럽에서 유학 중이던 칸은 파키스탄의 한 제철소에 지원해 떨어졌다. 국가가 그의 능력을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데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다 유럽에서 원심분리기 기술을 구해 국가의 핵개발을 이끌게 됐다. 결국에는 그가 일하고 싶어했던 제철소 자체를 인수해, 핵무기 부품을 생산하는 공장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는 ‘핵의 아버지’ ‘국민 영웅’이라는 칭호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핵기술을 북한과 이란, 리비아 등에 팔아넘겼다.
 
  자신이 개발한 기술에 대한 과시욕이 칸 박사로 하여금 핵확산에 나서게 했다는 분석이 많다. 물론 칸 본인과 파키스탄 국가 차원의 이익을 위해 핵기술을 확산했다고 봄이 타당하다. 스틸만은 중국-파키스탄-북한의 삼각 네트워크를 통해 핵확산이 이뤄졌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 미스터리의 진실을 확인해보기 위해 미국의 전직 고위 당국자와 핵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인터뷰는 2020년 8월 말~9월 초에 진행됐다.
 
 
  1. 1993년 부토와 김일성은 무엇을 주고받았나?
 
베나지르 부토 전 파키스탄 총리.
  파키스탄과 북한은 수십 년 동안 무기 분야에서 협력해왔다. 북한의 김영남(金永南) 당시 외무상은 1992년 8월 파키스탄을 방문했다. A. Q. 칸 박사는 김영남과 비밀리에 노동미사일 구입과 핵기술 교류에 대해 논의했다. 칸 박사는 북한의 초청으로 1993년 5월 북한을 방문해 노동미사일 실험을 참관했다.
 
  1993년 베나지르 부토가 총리 자리에 올랐다. 그는 몇 년 전 총리에 한 번 선출된 적이 있으나 군부에 대항하다 해임됐다. 부토는 그 과정에서 군부와 A. Q. 칸의 심기를 거스르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칸 박사는 부토가 처음 총리를 지낼 때는 만나주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칸이 1993년 겨울 부토에게 직접 전화해, “북한에 가달라”고 했다.
 
  부토는 책 《디셉션(기만)》의 저자인 영국 기자 애이드리언 레비와 캐서린 스콧-클라크와의 인터뷰에서 비밀을 실토했다. 칸 박사는 부토 총리에게 북한의 노동미사일이 꼭 필요하다고 했다. 부토는 1993년 12월 29일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났다. 그는 “김일성 주석에 대해 엄청 많은 보도가 나오곤 했는데, 그는 묘사된 것과 전혀 달랐다. 악마 같은 독재자가 아니라 수다스러운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부토는 만찬 자리에서 김일성에게 귓속말로 “제발 노동미사일 청사진을 주십시오”라고 했다. 김일성은 놀란 표정을 짓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좋다”고 했다고 한다. 부토의 설명이다.
 
  “북한 사람들은 미사일에 대한 정보를 컴퓨터 디스크(CD)에 담아야 한다고 말했다. 각종 자료가 담긴 가방 하나를 건네줬다. 김일성은 양측의 실무진이 합의 내용을 진행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실무진이 도대체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미사일뿐이었을까’라는 의문이 들기는 했다. 북한과의 거래는 현금으로만 가능하다고 했다. 우리 측의 실무진 대표는 칸 박사와 가까운 카와자 지아우딘 장군이었다.”
 
 
  부토의 고백 “나는 전달책”
 
  부토는 가방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는 끝까지 확인하지 않았다고 했다. 부토는 김일성에게서 정확히 무엇을 전달받았는지, 파키스탄이 준 것은 없는지에 대해 죽을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부토는 2007년 암살돼 목숨을 잃었다.
 
  그로부터 1년 후 영국에서 활동하는 기자 시암 바티아가 《안녕, 부토 총리(Goodbye Shahzadi)》라는 책을 냈다. 2003년 부토와 진행한 인터뷰를 회고록 형식으로 엮은 책이다. 바티아 기자는 부토가 “죽을 때까지 밝히지 않겠다고 약속한 중요한 비밀을 털어놨다”고 했다. 부토는 “무엇 하나를 말해주겠다”며 바티아에게 녹음기를 끄라고 했다.
 
  부토는 “나는 파키스탄 군부 그 누구보다도 국가를 위해 많은 일을 해냈다”고 했다. 부토는 평양에 가기 전에 호주머니가 가장 깊은 코트를 샀다고 한다. 북한이 원하던 우라늄 농축 관련 과학 자료가 담긴 CD를 이 호주머니에 넣어 북한으로 가져갔다는 것이다. 부토는 양측의 물건을 서로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갈 때는 CD를, 귀국할 때는 북한의 미사일 자료가 담긴 CD를 들고 왔다는 것이다. 부토는 CD를 몇 장 들고 왔는지, 파키스탄의 자료를 전달받은 북한의 인사는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 바티아는 이 내용을 계속 외부에 공개하자고 했으나 그는 끝까지 이를 막았다고 한다.
 
  이 증언이 사실이라면 파키스탄의 핵확산 문제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게 된다. 전·현직 파키스탄 총리들은 모두 ‘국가 차원의 핵확산은 없었고 칸 박사의 일탈’이라는 입장을 취해왔다. 그런데 현직 총리 신분으로 북한에 가서 직접 우라늄 농축 기술을 전달하고 노동미사일 기술을 받아왔다는 증언이 나온 것이다. 파키스탄 정부는 이런 주장에 대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라고 일축했다. 부토는 죽었고 북한은 말하지 않을 것이다. 전문가들은 바티아 기자의 책에 담긴 부토의 주장을 어떻게 생각할까?
 
 
  “현금 바닥난 국가끼리 기술 이전 거래”
 
올리 하이노넨 전 IAEA 사무차장.
  미국의 핵전문가인 데이비드 올브라이트 과학국제안보연구소(ISIS) 소장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그는 “부토가 직접 (우라늄 농축 기술을) 전달한 것은 아니더라도 A. Q. 칸 쪽에서 했을 수 있다”고 했다. 올브라이트는 이라크 대량살상무기 사찰과 2012년 미국과 북한의 2·29합의에 참여한 인물이다.
 
  2011년 영변의 핵시설을 직접 방문해 우라늄 농축 시설을 둘러보기도 했다. 미국 국방부 산하 국방정보국(DIA)에서 선임 정보분석관을 지낸 무기전문가 브루스 벡톨 역시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그의 설명이다.
 
  “부토 때부터 시작된 협력 관계가 계속 이어졌다. 두 나라 모두 머리를 잘 썼다. 현금이 바닥나 있던 국가끼리 서로 거래를 시작한 것이다. 파키스탄 장군들이 북한으로부터 뇌물을 받아 우라늄 농축 기술을 전했다는 증거가 있다. 파키스탄은 이를 숨기려고 하겠지만 이는 그럴 수 없는 문제다.”
 
  벡톨은 자신이 DIA에서 근무하던 1996~1997년에 북한과 파키스탄의 기술 이전 움직임이 자주 포착됐다고 한다.
 
  올리 하이노넨 전 IAEA 사무차장은 “정확히 공개된 정보가 없기 때문에 단정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북한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이 김일성-부토의 1993년 회담으로 인해 시작됐다는 주장에도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했다. 그는 IAEA의 북핵 사찰 총책임자를 지내며 약 20차례 북한을 방문했다. 2003년 리비아의 대량살상무기 포기 이후에는 파키스탄 당국자들과 만나 핵확산 과정을 직접 조사했다. 그의 설명이다.
 
  “북한은 (1994년) 제네바 합의로 인해 플루토늄 프로그램이 중단된 상황이기 때문에 우라늄 농축 기술을 원했을 수 있다. 북한은 1980년대 후반부터 우라늄 농축에 도전했다. 1993년 (김일성-부토) 회담으로 인해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이 북한에서 시작됐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1987년 즈음 북한은 리비아와 이란이 접촉했던 유럽 회사들을 통하여 (우라늄 농축 관련) 물건을 사들였다.”
 
 
  황장엽 “파키스탄 협력으로 플루토늄 문제 해결”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
  북한노동당 국제담당 비서이던 황장엽(黃長燁) 선생은 조갑제(趙甲濟) 기자에게 이런 증언을 한 적이 있다.
 
  “1990년대 초반 김일성이 살아 있을 때에도 핵무기 개발 책임자(노동당 군수공업부장) 전병호가 핵실험 계획을 세워 허가를 받으려 했습니다. 전병호는 ‘우리는 핵실험 준비가 다 되어 있는데 왜 주석께서 허가를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불평도 했어요. 1994년 제네바 합의 이후엔 나를 찾아와 ‘러시아에서 플루토늄을 얻어올 수 없을까’라고 묻더군요. 내가 ‘왜 아직도 충분하지 않은가’ 했더니 그는 ‘몇 개를 더 만들어 놓아야 한다’고 말했어요. 그 얼마 뒤 전병호가 나타나더니 ‘이젠 됐다. 파키스탄과 협력하기로 했다’고 말하였습니다.”
 
  1996년 전병호는 다시 황장엽 선생에게 “이제 해결이 되었다. 파키스탄에서 우라늄 농축 기자재를 수입할 수 있게 합의되었다. 이제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2. 1998년 파키스탄 6차 핵실험의 미스터리
 
  파키스탄은 1998년 5월 28일 다섯 차례의 핵실험을 했다. 이틀 뒤인 5월 30일에는 첫 번째 실험장으로부터 약 100km 떨어진 사막에서 여섯 번째 핵실험을 했다. 미국 로스앨러모스의 핵과학자들이 6차 핵실험이 일어난 상공에서 플루토늄을 검출했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1~5차 핵실험에는 우라늄이 사용됐으나 6차 때는 플루토늄이 사용됐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파키스탄은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이 없었다. 이에 따라 파키스탄이 북한의 플루토늄탄(彈)을 대리실험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북한의 한 고위급 탈북자는 《월간조선》 2006년 9월호에 실린 조갑제 기자와의 인터뷰 기사에서 “파키스탄이 북한의 플루토늄 핵무기를 대리실험해줬다”는 주장을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북한이 플루토늄을 파키스탄으로 가져가서 공동실험을 한 적이 있다. 그 실험 결과로 핵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자료를 모으는 데 성공했다. 플루토늄 물질을 파키스탄으로 가져가서 실험한 것인지, 핵폭탄을 가져간 것인지는 나도 모른다.
 
  파키스탄과 북한 사이의 유착관계는 상상 이상이다. 파키스탄은 북한으로부터 핵탄두 운반용 미사일 개발 기술을 배우고, 북한은 파키스탄으로부터 핵개발 기술을 배우는 아주 이상적인 협력체제가 오랫동안 작동해왔다. 서로 국익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무샤라프 대통령이 친미(親美)정책을 쓰고 있지만 지금도 그런 협조관계는 내밀하게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이 탈북자는 “미국 정부도 북한-파키스탄의 공동실험 사실을 알고 있지만 이를 인정했을 경우의 후속(後續) 조치와 여파를 걱정하여 모른 척하고 있다”고 했다.
 
 
  “棺에 원심분리기와 설계도면 실어 날라”
 
  북한이 1998년 핵실험을 참관한 것은 사실이다. 미국 CIA는 파키스탄 주재 북한대사관에서 경제참사관으로 근무하던 강태윤이라는 인물과 북한 기술진이 참관한 것을 확인했다. 강태윤은 외교관 신분으로 해외에서 북한 핵·미사일 부품을 조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이런 일을 담당하는 북한의 창광무역 소속이었다.
 
  핵실험 10일 뒤 강태윤의 아내 김사내가 칸 연구소 영빈관 인근에서 총격을 받고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김사내가 핵폭탄 실험에 대한 자료를 미국 측에 전달하려다 발각되어 암살됐다는 설(說)이 나돌았다. 김사내의 시신(屍身)은 핵과학자들이 북한에 돌아갈 때 탑승한 보잉 707기에 같이 실렸고, 관(棺)엔 우라늄 농축 시설의 부품들이 함께 들어 있었다는 정보 당국 관계자들의 주장도 나왔다. 원심분리기인 P-1과 P-2를 포함한 여러 설계도면이 실렸다는 것이다. 이 비행기에는 칸 박사가 동승했다는 설도 있었다.
 
  전문가들은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1990년대 당시 북한의 경수로(輕水爐) 사업을 추진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미국 측 수석대표를 지낸 미첼 리스 전 국무부 정책기획실장은 “‘대리실험’이라는 주장을 하려면 정확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파키스탄이 북한의 핵무기를 대신 실험해줬다면 북한이 이미 핵무기를 개발했고, 이를 파키스탄으로 보내 실험을 부탁한 것이 된다. 왜 다른 무기들은 자국 내에서 다 실험하다 이때만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실험을 의뢰하나”라고 했다.
 
  하이노넨 전 IAEA 사무차장은 ‘로스앨러모스가 플루토늄을 검출했다’는 것은 익명의 로스앨러모스 소식통의 말을 인용한 것이지 이 연구소의 공식입장이 아니라고 했다. 그의 설명이다.
 
 
  “美 정부의 기밀문서 해제가 관건”
 
데이비드 올브라이트 국제과학안보연구소장.
  “북한이 플루토늄탄 설계도를 어디선가 구해서 플루토늄 핵무기를 만들었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이를 파키스탄에 가져가서 실험을 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왜 그냥 북한에서 실험하지 않았나? 제네바 합의 등을 위반하는 것을 우려해 그렇다고 주장할 수도 있는데, 북한이 이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했을까? 충분한 동기가 있었다고 보나? 핵폭탄을 가지고 다른 나라로 가서 핵실험을 한다는 것 자체도 매우 이상하다. 거의 모든 국가는 자국 영토 내에서 핵실험을 했다. 자국 영토가 아닌 곳에서 실험한 국가는 1950년대 영국과 1960년대 프랑스였다. 영국은 호주에서 했고, 프랑스는 알제리에서 했다.”
 
  올브라이트 소장은 파키스탄의 6차 핵실험에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가 있다고 했다. 그의 설명이다.
 
  “미국은 파키스탄의 여섯 번째 실험 이후 플루토늄이 상공에서 검출된 것을 확인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여러 이견(異見)이 있었다. 북한이 파키스탄에 플루토늄을 줬다는 얘기도 있었다. 당시 북한은 플루토늄이 별로 없을 때였다. 많아야 4kg 정도였다. 북한이 갖고 있는 거의 모든 플루토늄을 파키스탄에 전달한 것이라는 얘기인데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파키스탄의 쿠샵 원자로는 1998년 4월에 가동됐다. 파키스탄은 핵실험할 정도의 플루토늄이 없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과거에 운영하던 카눕 시설이 있는데 여기서 플루토늄을 추출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런데 이 시설 역시 제대로 작동하는 곳이 아니었다. 플루토늄이 있었다고 해도 매우 적은 양이었을 것이다. 6차 실험이 플루토늄을 사용한 것인지, 우라늄을 사용한 것인지는 아직도 명확하지 않다. 왜 여섯 번째 실험을 했는지 자체도 의문이다.”
 
  그는 당시 핵실험에 대한 미국 정부의 기밀문서가 22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공개되지 않고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그는 “트럼프가 김정은을 사랑하는 상황에서 이런 자료가 공개될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기밀해제가 될 때가 오고 있다. 기밀이 해제되면 진실이 드러날 것”이라고 했다.
 
 
  “北 ‘대리실험’ 경험 치고는 형편없는 수준”
 
  일부 전문가들은 1998년 파키스탄이 북한의 핵무기를 대리실험했을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했다. 그러나 북한이 2006년에 실시한 1차 핵실험 결과를 보면 과거에 핵실험을 한 것 치고는 너무 형편없는 수준이었다고 했다.
 
  벡톨 교수는 “(대리실험) 가능성은 있지만 북한의 핵실험 결과를 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2006년 1차 핵실험의 폭발 규모는 2kt이었다. 1998년에 한번 실험을 해봤다면 결과가 이렇게 부실할 수 없다. 2kt은 매우 초보적인 수준이다”고 했다.
 
  미국의 군사전문가인 브루스 베넷 랜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대리실험) 가능성은 있지만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파키스탄은 매우 조심스럽게 실험을 진행했다. 여러 핵무기를 지하에서 한 번에 터뜨렸다. 이는 어떤 무기가 성공하고 어떤 게 실패했는지를 남들이 모르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정확한 실험 결과는 파키스탄만 알고 있다고 했다. “북한이 1998년 실험한 것이 성공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2006년에 다시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고 했다.
 
 
  3. 1990년 중국은 파키스탄의 핵무기를 대리실험했나?
 
셰릴 로퍼 대량살상무기 폐기 전문가.
  스틸만은 중국 과학자들과 얘기를 나눠본 결과, 1990년 5월 26일 중국이 롭 누르에서 파키스탄의 핵무기를 대리실험해줬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1998년 파키스탄의 핵실험은 하나의 갱도에서 다섯 발의 핵무기를 터뜨리는 매우 복잡한 방법을 사용한 점, 이런 어려운 실험을 인도 핵실험 이후 17일 만에 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이미 중국에서 대리실험해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고 했다.
 
  미국의 대량살상무기 폐기 전문가인 셰릴 로퍼 씨는 이런 주장을 일축했다. 그는 로스앨러모스에서 35년간 근무하며 카자흐스탄과 에스토니아 등 지역의 핵무기 폐기 작업과 화학무기 감독 업무를 해왔다. 로퍼 씨의 설명이다.
 
  “대니 스틸만을 잘 알고 있다. 로스앨러모스에서 같이 근무했다. 스틸만은 중국 핵실험장을 방문한 거의 첫 번째 미국인 과학자였다. 많은 중국인 과학자를 만난 것으로 알고 있다. 그가 쓴 책들을 읽어봤는데 많은 부분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실이 아닌 내용이 많다. 하나의 갱도에서 여러 핵무기를 실험하는 것이 어렵다고 하는데 그렇게까지 어려운 것은 아니다. 갱도를 낚싯바늘 모양으로 만드는 방법이 있다. 바늘이 휘어 있는 쪽 끝부분에서 폭발을 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방사성 물질의 유출을 막아낼 수 있다. 파키스탄이 실시한 다섯 차례의 실험은 연속적으로 ‘쾅, 쾅, 쾅’ 일어났다. 어렵기는 하지만 충분히 가능하다.”
 
  그는 “중국이 파키스탄 핵개발에 도움을 줬을 수는 있다”면서도 ‘중국의 도움 없이 파키스탄의 핵개발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훌륭한 과학자들을 갖고 있는 국가의 경우 외부 도움이 꼭 필요하다고 보지 않는다. 파키스탄과 북한의 경우가 그랬다”고 했다. “도움을 받으면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도움을 거절할 이유는 없다”고 했다.
 
 
  “중국은 ‘대리실험’할 이유가 없다”
 
  하이노넨 전 사무차장 역시 1990년 대리실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중국이 파키스탄에 핵물질을 전달하고 여러 협력 관계를 맺었다는 증거는 있지만 이는 대리실험과는 별개”라고 했다. 이를 뒷받침할 어떤 증거도 없다고 했다.
 
  “누군가가 대리실험을 하려면 이를 의뢰한 국가의 핵무기 역량이 갖춰졌어야 한다. 파키스탄이 이런 능력을 1990년에 이미 갖췄을까? 만약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중국의 핵무기에 파키스탄이 만든 핵물질을 결합해 실험했다는 것인데, 당시 파키스탄은 핵실험에 필요한 수준의 핵물질을 보유하지 못했다고 본다. 중국으로부터 핵물질을 전달받은 게 바로 그 얼마 전이었기 때문이다.”
 
  올브라이트 소장 역시 “스틸만의 주장은 알고 있다”면서도 “이는 기밀로 유지될 사안이기 때문에 스틸만의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만약 대리실험이 사실이라면 기밀로 분류돼 세상에 공개하지 못하게 됐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는 “중국이 이런 대리실험을 할 이유 자체가 없다고 본다”고 했다.
 
 
  4. 파키스탄은 북한에 정확히 어떤 기술을 전달했나?
 
  A. Q. 칸 박사는 2004년 1월 파키스탄 정보 당국(ISI)의 조사를 받았다. 이때 작성한 그의 진술서에는 북한과 리비아, 이란에 어떤 기술을 넘겼는지가 담겨 있다. 물론 그의 주장에는 사실과 다른 내용이 많지만 참고해볼 만하다.
 
  칸은 1996년 파키스탄이 북한에 노동미사일의 대금(代金)을 지불하지 못하는 상황이 왔다고 한다. 이때 파키스탄 군부는 북한이 뇌물을 주면 밀린 대금을 지불하겠다고 했다. 앞서 언급된 강태윤 참사가 파키스탄의 카라마트 육군 참모총장 등에게 300만 달러 상당의 뇌물을 지급했다. 칸은 강태윤으로부터 돈을 받아 직접 장군들에게 전달했는데, 강태윤이 추가 뇌물을 전달할 테니 우라늄 농축 기술 개발을 도와달라고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이 기술을 전달하기 이전에 북한은 이미 핵무기를 보유했다고 한다. 칸 박사는 “(북한 측은) 한국전쟁이 끝난 얼마 뒤인 1950년대 중반에 러시아로부터 200kg 상당의 플루토늄과 핵무기 설계도를 받았다고 했다. 북한은 미르자 박사와 내게 완성된 핵무기를 보여줬다. 우리 것보다 기술적으로 더 뛰어났다”고 했다. 북한이 플루토늄탄은 이미 갖고 있으니 우라늄탄을 만드는 데 파키스탄의 도움이 필요했다는 이야기다. 그의 진술서 일부를 인용한다.
 
  〈나는 부하들에게 구식 P-1 원심분리기 20개를 준비해 북한에 보내도록 했다. 북한 기술자들은 이미 파키스탄 시설에서 근무를 한 적도 있었기 때문에 (신식인) P-2 원심분리기도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은 P-2 원심분리기 4개를 요청했다. 나는 이를 카라마트 참모총장에게 보고했고, 그는 그렇게 하라고 했다. 나는 카라마트 장군의 관사를 찾아가 250만 달러를 전달했다. (중략)
 
  북한은 (원심분리기) 장비들을 자신들의 비행기에 직접 실어갔다. 이 비행기를 통해 (노동)미사일 부품이 파키스탄에 전달됐다. 미르자 박사와 나심 칸 역시 각종 소프트웨어 체계를 만들어 북한에 전달했다.
 
  북한은 육불화우라늄(UF6) 일부를 가져와 분석하기도 했다. 우리가 이를 돌려본 결과 우라늄 농축을 할 정도로 깨끗하지 않았다. 북한은 육불화우라늄 가스 일부를 요구했다. 자신의 것과 비교해보겠다고 해 그들에게 줬다. 이 가스는 기술적으로나 금전적으로 아무 가치가 없다. 누구나 해외에서 이 정도의 샘플은 구입할 수 있었다. 파이프에서 흐르는 기체나 액체의 속도를 측정하는 유량계(流量計) 샘플도 하나 전달됐다. 유량계는 육불화우라늄을 사용할 때 필요한 장비다. 파키스탄은 이를 직접 수입할 수 없었다. 이는 유럽에서는 쉽게 구할 수 있는 장비였다. 북한은 대가로 우리에게 크라이트론(핵폭탄에 들어가는 기폭장치 고속 스위치) 만드는 방법을 알려줬다. 수입이 금지된 부품이었다. 이는 핵무기를 폭파시킬 때 필요하다.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기술이었다.〉
 
 
  “북한의 원심분리기 기술은 파키스탄 것”
 
  전문가들은 러시아가 200kg 상당의 플루토늄을 북한에 줬고, 북한이 이미 핵무기를 갖고 있었다는 칸의 주장에는 신빙성이 없다고 했다. 1950~1960년대는 러시아도 미국과의 군비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핵물질을 최대한 생산·비축하고 있을 때였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파키스탄으로부터 우라늄 농축 기술 전체, 혹은 일부를 전달받은 것은 맞다고 봤다. 파키스탄이 중국으로부터 받은 CHIC-4 핵무기 설계도가 전달됐을 가능성도 높다고 했다. 북한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이 파키스탄의 도움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선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2007년과 2011년에 북한을 방문했던 올브라이트 소장은 북한이 파키스탄 원심분리기 기술을 사용한 것을 직접 확인했다고 한다. 원심분리기를 여러 개 연결해 우라늄을 농축하는 ‘캐스케이드’ 설계가 파키스탄 방식이었다는 것이다.
 
  “파키스탄의 캐스케이드는 하나당 344개의 P-2 원심분리기를 사용한다. 총 6개의 캐스케이드가 사용되며 원심분리기는 총 2064개가 들어간다. 북한 측과 만난 자리에서 ‘영변에 원심분리기가 총 몇 개가 들어가느냐’ 물었다. 북한 담당자는 ‘캐스케이드당 344개가 들어가고 있다’고 했다. 숫자가 (파키스탄 설계와) 정확히 일치했다. 북한이 영변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칸의 캐스케이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北, 설계도·부품보다 중요한 人的 지원 받아
 
브루스 벡톨 前 DIA 선임정보분석관.
  올브라이트 소장은 “파키스탄의 도움이 없었다면 북한은 ‘우라늄 핵폭탄’을 만들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파키스탄은 북한의 우라늄 농축 기술과 핵무기 설계 기술 개발을 도왔다”며 “파키스탄이 북한에 중국식 핵무기 CHIC-4 설계도를 전한 것 같다. 중국이 이를 북한에 직접 줬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는 우라늄 농축 기술 개발은 설계도나 부품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인적(人的) 도움이 필수라고 했다. “칸은 북한 기술자들을 매우 비밀스러운 파키스탄 핵시설에 초청해 P-2 원심분리기 작동 방법을 교육시켰다”는 것이다. 칸은 이란과 리비아에도 원심분리기 기술을 전달한 사실이 있지만, 이 국가들의 과학자들을 초청한 적은 없다. 북한이 더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얘기다.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 사이 국방정보국(DIA)에서 근무한 벡톨 교수는 “미국은 클린턴 행정부 때부터 파키스탄이 북한에 원심분리기 기술을 이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는 “파키스탄의 핵무기는 중국의 도움이 없었으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은 파키스탄으로부터 통째로 받은 것”이라고 했다. 그는 “파키스탄의 C-130 수송기가 중국 영공을 지나는 것은 물론 중국에서 중간 급유를 하고 북한으로 가 우라늄 농축 기술을 전달했다”며 중국과 파키스탄의 국가 차원의 합의가 있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그는 중국-파키스탄-북한의 삼각 핵확산을 확신하고 있다.
 
  베넷 선임연구원 역시 북한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은 파키스탄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으로 봤다. 그는 “북한의 1~3차 핵실험(2006~2013년)은 다 플루토늄탄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4~6차 핵실험(2016~2017년)에 어떤 물질이 사용됐는지는 불확실하지만 고농축 우라늄이 사용됐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북한이 파키스탄으로부터 우라늄 농축 도움을 1990년대 후반부터 받았다고 한다면 (우라늄탄) 개발에 이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을 것으로 본다”고 했다.
 
 
  진실은 북한만 알고 있다
 
  하이노넨 전 사무차장은 “기술 이전이 있었다는 점은 확실하다”면서도 파키스탄의 도움으로 북한이 우라늄 농축에 성공했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그는 “북한이 파키스탄으로부터 우라늄 농축이라는 중요한 기술을 전달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더 많은 국가로부터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 역시 중요하다”고 했다. “증거가 확인되지 않았지만 파키스탄보다 더 고급 기술을 갖고 있는 나라의 도움을 받았다고 본다”고 했다. “핵기술을 전달받은 북한과 같은 나라는 직접 기술을 계속 개발해나간다”며 “북한 나름대로의 노하우와 조달 네트워크를 갖췄다”고 했다.
 
  핵폐기 전문가인 로퍼 역시 하이노넨과 비슷한 주장을 했다. 그는 “핵과 관련된 기술은 어느 정도 다 규격화돼 있다”며 “예를 들어 모든 나라의 원심분리기가 다 비슷한 것처럼 보인다. 아주 세부적인 부분을 들여다봐야 차이점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이 때문에 어떤 과학자도 ‘파키스탄의 원심분리기가 영변에서 사용된다’고 확실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모두 ‘파키스탄 것처럼 보인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지그프리드 헤커 박사는 2010년 영변을 찾아 북한 측에 원심분리기의 출처를 물은 바 있다. 이때 북한은 ‘유럽 기술을 기반으로 자체 제작했다’고 했다. 로퍼는 “헤커의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며 “그렇게 질문하면 당연히 그런 답변이 나왔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주체사상’을 강조하는 북한으로서는 특히나 더 자기들이 만들었다고 대답하지 않겠느냐”며 웃었다.
 
  하이노넨 사무차장은 이렇게 덧붙였다.
 
  “북한에도 훌륭한 과학자들이 많다. 파키스탄 핵확산의 미스터리가 풀려도 북한의 핵개발 미스터리가 풀리지 않는다. 북한이 직접 털어놓지 않는 이상 진실은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
 
 
  5. 미국은 파키스탄의 핵개발을 못 막았나 안 막았나?
 
마이클 오핸런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
  미국은 1970년대부터 파키스탄의 핵개발 움직임을 포착했다. 원조 중단·제재 등의 외교적 압박을 가했지만 파키스탄은 핵개발을 강행했다. 일부 전문가는 미국이 파키스탄의 핵개발을 사실상 ‘묵인’했다고 단정한다. 1980년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미국은 파키스탄이 필요했다. 아프간 반군(叛軍) 지원을 위해서는 아프간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파키스탄이 필요했다. 2001년 9·11테러 이후 진행된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에서도 파키스탄의 도움이 절실했다. 파키스탄의 영토와 영공에서 작전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미국이 파키스탄의 핵개발에 반대하면서도 묻어둘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올브라이트 소장은 “파키스탄의 핵개발을 멈추려고 시도는 했으나 결과적으로 실패했다”고 했다. 그는 “미국은 대만에 강력한 압박을 가해 핵개발을 포기하도록 했으나 파키스탄에는 이 정도의 압박을 가하지 못했다”고 했다. 미국의 역대 행정부는 파키스탄에 대한 원조를 연장하기 위해서는 파키스탄에 핵무기가 없다는 사실을 해마다 의회에 통보해야 했다. 핵무기가 있었음에도 ‘아직 완전한 역량을 갖추지는 못했다’는 식으로 의회에 보고해왔다. 올브라이트는 역대 미국 행정부의 축소 보고와 관련해, “이는 미국의 수치스러운 역사”라고 했다.
 
  벡톨 교수도 “파키스탄이 비핵화를 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도록 했어야 하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했다. 파키스탄의 핵실험이 인도의 핵실험 이후 대응 차원에서 이뤄진 점, 중국이 파키스탄을 지원했다는 점 등 파키스탄에 압박을 가하기에는 여러 복잡한 일이 엮여 있었다고 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묵인’이라는 표현 자체에 동의하지 않았다. 마이클 오핸런 브루킹스 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미국이 묵인했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며 “파키스탄을 멈추려 했는데 이를 이루기 위한 충분한 방법이 없었을 뿐”이라고 했다. 리스 전 국무부 정책기획실장은 “파키스탄은 주권국가이고 국익에 최선인 정책 결정을 내린다”고 했다. “미국은 파키스탄의 핵 프로그램을 막기 위해 제재와 외교적 압박을 가했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미국이 지정학적으로 파키스탄을 필요로 한 사실 역시 하나의 요소로 작용됐다”고 했다.
 
  브루스 베넷 연구원은 “미국이 파키스탄의 비핵화를 이뤄내지는 못했지만 핵 역량 완성을 최대한 늦추려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파키스탄은 F-16 전투기를 미국으로부터 구입해 핵 운반체계로 사용하려 했다”며, 그런데 미국은 판매를 중단했다는 것이다.
 
 
  6. 북한의 非核化는 가능할까?
 
  북한이 사실상의 핵무장 국가로 인정받는 ‘파키스탄 모델’을 추구한다는 분석이 많이 나왔다. 전문가들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북한을 비핵화(非核化)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했다.
 
  리스 전 실장은 “북한을 비핵화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한다”며 “북한의 정권이 바뀌고 한반도가 통일되는 상황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외부에서 원격으로 북한의 비핵화를 이뤄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본다”고 했다.
 
  오핸런 연구원은 “빠른 시일 안에 비핵화를 이뤄내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고 했다. “김정은은 핵무기가 없었던 사담 후세인과 무아마르 카다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목격했다”며 “김정은은 핵무기를 가문(家門)의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인종차별 정책이 없어지게 된 일,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카자흐스탄이 소련 붕괴 이후 분리된 것 같은 정도의 국가적 변화가 생겨야 비핵화가 가능하다고 본다. 핵무기를 포기한 국가는 이들뿐”이라고 했다.
 
  벡톨 교수는 “미국과 유엔, 유럽연합이 얼마나 강력한 제재를 가할지에 달려 있다”고 했다. “북한이 비핵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북한과 파키스탄을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고 했다.
 
  “지정학적 차이가 있다. 북한은 불량국가다. 국제사회의 규범을 아예 따르지 않는 국가를 뜻한다. 북한·미얀마·이란·예멘 같은 나라들이다. 이들은 국제사회의 규범을 따르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 파키스탄은 그렇지 않았다. 국제사회의 일원이었다. 미국과 거래를 하고 다른 국가와도 무역을 했다. 물론 가난한 국가였지만 국제사회가 필요했다. 인도가 핵폭탄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파키스탄과 북한의 다른 점이다. 북한이 핵보유국으로 인정받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미국이 평양에 대사관을 열고 북한의 핵무기를 인정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 이는 북한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北核을 포기시킬 방법이 없다
 
브루스 베넷 랜드연구소 선임연구원.
  베넷 연구원도 핵실험 이후 비핵화한 나라는 없다고 했다. 핵무기를 개발한 뒤 자체적으로 비핵화에 나선 곳은 남아공 정도뿐이라고 했다. 그는 북한의 핵 프로그램 동결 후 핵무기 수를 줄여나가는 방법만 남은 것 같다고 했다.
 
  “소련이 4만 개에서 7000개로 줄였다. 크게 줄이는 것은 가능하다고 본다. 북한의 핵물질 생산만이라도 멈추게 하면 성공적이라고 생각한다. 우울한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은 현재 미국에 대한 억제력을 갖추려고 하는 것 같지가 않다. 이미 충분한 양 이상을 갖고 있다. 수백 개 정도가 될 수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기 때문에 핵물질 생산 동결을 우선 추진해야 한다. 북한이 만약 동결 방향으로 가지 않으면 누군가가 북한에 선제공격을 가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으로 본다.”
 
  그는 선제공격의 의미에 대해서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로퍼 전문가 역시 비핵화 가능성을 낮게 내다봤다. 그는 “김정은은 핵무기가 체제를 보장한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해왔다”며 “갑자기 비핵화에 나설 가능성은 없다”고 했다. 그는 “남아공은 인종차별 정책이 급격하게 바뀌는 과정에서 비핵화를 했다. 핵무기를 갖고 있던 백인 지도자들은 흑인 등 다른 사람들 손에 넘어가는 것을 우려했다”고 했다. 그는 “김정은이 비핵화에 나서도록 설득할 방법이 무엇이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1989년 남아공 비핵화 당시 대통령을 지낸 프레데리크 빌렘 데클레르크 전 대통령은 미국과 북한의 비핵화 협상이 한창이던 2018년 7월 김영남(金永男)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북한 핵문제와 관련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1989년 남아공과 현재 북한의 상황은 완전히 다릅니다. 당시 남아공은 외부 위협들로 인해 핵무기를 개발했지만 이런 위협들이 사라졌습니다. (우리의 비핵화는) 소련 붕괴와 앙골라 주둔 쿠바군의 철수, 나미비아의 성공적인 독립 절차에 따른 결과입니다. 남아공이 민주적인 협상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결의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아울러 남아공이 직면했던 가장 큰 도전 과제는 인종 갈등을 넘어선 민주주의를 확산하는 것이었습니다. 남아공은 핵무기 보유에 따른 부담뿐만 아니라 최대한 빨리 국제사회로의 재진입을 원했기 때문에 핵 역량을 폐기할 명확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북한의 상황은 전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전체주의 독재자 김정은의 핵심 관심은 김(金)씨 왕조를 이어가는 겁니다. 핵무기를 이런 과정에서 사용할 협상 카드로 보고 있습니다. 김정은은 북한 경제를 불능화하는 제재를 끝내고 싶어 합니다만 북한 정권에 어떤 위협도 없다는 것이 완전하게 확실해지지 않는 이상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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