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秘話

김정일 死後 북한 엘리트들의 권력 쟁탈전

김정은 신임 얻기 위한 ‘세 계파’의 충성경쟁

글 : 정광성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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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일은 그동안 알려진 2011년 12월 17일이 아닌 이틀 전인 15일에 평양 강동초대소에서 사망
⊙ 북한 젊은 엘리트들의 친목클럽인 ‘룡남산클럽’과 ‘창광클럽’의 실체
⊙ 장성택 북한 군부 장악하려다 실패
⊙ 김정일, 2002년 박근혜 전 대통령 만나고 칭찬해
⊙ 김정남, 자신이 동생한테 죽을 것 이미 알고 있었다
2010년 10월 북한 김정일과 김정은이 대규모 열병식을 관람하는 모습. 사진=조선DB
  북한은 2011년 12월 19일 ‘특별방송’을 통해 김정일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당시 남한에 알려진 내용은 ‘김정일이 12월 17일 사망했다’고 그 이틀 뒤인 19일에 북한이 공식 발표한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후 김정일은 17일이 아닌 15일에 이미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월간조선》은 최근 ‘북한은 왜 김정일의 사망일을 실제와 다른 이틀 후로 발표했는지’ ‘김정일 사후(死後) 북한 로열층에서는 어떤 권력 다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입수했다. 해외에 나온 북한 고위층의 증언을 통해서였다.
 
  김정일은 2011년 10월부터 당뇨병으로 인한 혈당 증가와 고혈압 치료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이는 2008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3년 만이다. 김정일은 그때부터 집중치료를 받았지만, 상태는 더욱 안 좋아졌다. 같은 해 12월 10일부터 증상이 급속히 악화되기 시작했고, 12월 15일 새벽 2시경, 평양 강동초대소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12월 15일 밤, 북한 최고 실세 8인방 긴급 회동
 
  김정일의 건강이 악화되자 김정은, 김정철, 김여정, 김경희, 장성택, 김영남, 김영춘, 리용호 등 당시 북한의 최고 실세 8인방은 긴급 회동을 가진다. 이 자리에서는 김정일의 동생인 김경희가 참석해 ‘오빠(김정일)의 상태가 좋지 않다.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는데 그 후 채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김정일이 사망했다. 8인방의 가장 큰 고민은 김정일 사망 발표 시기와 뒤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대비책이었다. 8인방은 그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사망 날짜를 17일, 발표는 19일에 하기로 합의했다. 그럼 왜 15일이 아닌 17일로 했을까?
 
  한 고위 탈북자는 이에 대해 “김정은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김정일이 죽었으니 내부에선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라며 “이들은 그 기간 동안 만약에 있을 유혈사태에 대해 철저히 준비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정보에 따르면 8인방의 회동은 여러 날 동안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회동에서 어떤 내용이 오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국내 대북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해봤을 때 김정은을 제외한 7인은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혹시 모를 유혈사태(流血事態)에 대비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북한 권력자들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면서 김정은 체제의 안정적인 정착을 바라는 한편, 어느 그룹이 김정은의 신임을 더 얻느냐를 놓고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북한 엘리트들은 세 그룹으로 나뉘어 충성 경쟁을 했다.
 
 
  김정은 놓고 젊은 엘리트 vs 군부 충성 경쟁
 
  김정일 사후 북한에선 김정은에 대한 충성 경쟁으로 치열한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먼저 김정은 가문 중심으로 형인 김정철과 여동생 김여정이 이끄는 젊은 엘리트 그룹인 ‘룡남산클럽’과 ‘창광클럽’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소위 말하는 항일혁명 원로와 6·25참전 세력이 치열하게 충성 경쟁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보다 앞서 김정철을 지지했던 세력이 있다. ‘봉화클럽’이다. 봉화클럽은 북한 군부 장성의 자녀들이 2007년에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원래 이들은 김정일의 장남인 김정남을 지지했으나 김정남이 후계구도에서 밀려나자 김정철에게 줄을 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봉화클럽은 2009년 2월 16일 김정일이 자신의 생일날 김경희, 장성택, 김정철, 김정은, 김여정 등 가족이 모인 식사 자리에서 후계자로 김정은을 공식 지명하면서 사실상 해체됐다.
 
  봉화클럽이 해체되자 김정철에게 줄을 대기 시작한 것이 룡남산클럽이다. 이 클럽은 장성택의 조카이자 큰형인 장성우의 아들 장용철 말레이시아대사가 만든 오래된 사교클럽이다. 하지만 실제 이 클럽을 키운 것은 2006년에 사망한 장성택의 딸 장금송과 최룡해의 아들 최준이라고 한다.
 
  반면 창광클럽은 김정은의 여동생인 김여정을 필두로 김영남 전 북한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손자인 김성현이 조종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룡남산클럽과 창광클럽은 가입절차와 운영구조가 매우 독특하다. 먼저 룡남산클럽의 경우 운영체계가 두 가지 구도다. 즉 룡남산클럽 안에서도 ‘금별클럽’과 ‘은별클럽’으로 서열이 나뉜다. 먼저 금별클럽은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권, 기관 등에 근무하는 대상들이 모인다. 반면 은별클럽은 현재 김일성종합대학에 재학 중인 대상들이 활동한다. 하지만 금별클럽의 경우 가입하면 그 조직체계가 피라미드식으로 되어 있어 단계별 책임자 외에는 다른 조직에 대해선 알 수 없다고 한다.
 
  이와 별개로 창광클럽은 비교적 간편한 운영체계이며, 룡남산클럽에 비해 막강한 자금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룡남산클럽이 북한 정치 핵심계층의 자녀들 모임 사교클럽이라면, 창광클럽은 외교가 자녀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어 비교적 신사적이라고 한다. 즉 룡남산클럽은 소위 국내파 출신 모임이며 창광클럽은 해외파 출신들이 중심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은은 룡남산클럽과 창광클럽을 미래 북한을 이끌고 나갈 젊은 엘리트 집합체라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김정은도 한때 창광클럽에 잠시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충성’ 경쟁서 장성택에게 밀린 군부세력
 
2013년 4월 북한 김정은과 장성택이 평양 금수산태양궁전에서 열린 인민군 창건 81주년 기념 열병행사를 지켜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조선중앙방송
  북한군은 지금까지 소위 항일혁명 원로들과 6·25전쟁에서 공을 세운 인물들이 이끌어왔다. 2011년 당시 혁명 1세대로서 살아 있는 인물은 리을설이었다. 리을설은 2015년 11월 사망했다. 다수의 고위 탈북자는 리을설을 권력에 관심이 없고, 오직 김일성 가문을 위해 맹목적으로 충성한 사람이라고 증언했다. 북한 권력자들도 리을설을 가리켜 ‘바보온달’이라고 불렀다.
 
  이런 리을설을 통해 장성택을 비롯한 엘리트들을 견제하고, ‘선군정치’를 내세워 김정은을 군부 편으로 끌어당기려고 한 세력이 있었다. 바로 오극렬과 김영춘을 비롯한 군부세력이었다.
 
  이들은 먼저 김정은의 최고사령관으로서 담대함과 ‘선군령도’를 과시하기 위해 2012년 4월 15일 김일성 탄생 100돌과 4월 25일 북한군 창건일을 맞아 장거리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장성택의 견제와 김정은의 암묵적인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북한 군부세력은 여러 방법으로 김정은에 대한 충성심을 과시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장성택과 엘리트들의 반대에 가로막혔다. 이로 인해 군부는 불만이 점점 쌓여가고 있었다고 한다.
 
 
  장성택 군부 장악 실패… 위기의 발단
 
2015년 1월 1일 김정은이 군부 인사들과 김일성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태양궁전을 찾아 참배를 드리고 있다. 사진=조선중앙방송
  김정일은 자신이 죽은 뒤 장성택을 통해 군부를 장악하고 김정은에게 충성을 다하도록 발판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2010년 군과는 아무 연관이 없던 장성택을 인민군 대장과 동시에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한 것만 놓고 봐도 알 수 있다. 실제 김정일 사후 장성택은 군부 인사와 사상검증을 통해 군을 장악하려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군 내부의 반발이 거셌다. 먼저 군의 혁명 원로들이 장성택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장성택은 군 장악의 카드로 최룡해를 군부로 끌어들였다. 장성택이 최룡해를 군부로 끌어들인 것은 최룡해 부친 때문이었다. 최룡해 부친인 최현은 김일성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한 빨치산 출신으로서 북한 인민군의 전설적 인물이었다. 장성택은 이런 아버지를 둔 최룡해를 앞세워 군부를 장악하려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쉽지 않았다. 군 원로들은 최룡해는 인정했으나 장성택이 그 뒤에 숨어 있는 것을 알고 더욱 반발했다.
 
  급기야 군부 원로들은 리을설을 찾아가 불만을 토로했다. 다음 날 리을설은 김정은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김일성이 창건한 인민무력부의 혁명 정통을 부인하면 안 되며, 군부에 대한 사상검증 중단과 권위를 보장해달라고 요청했다. 김정은은 장성택을 불러 리을설의 요청을 전달했다. 이후 장성택은 군부가 김정은에게 충성 맹세를 하는 조건으로 군부에 대한 모든 조치를 중단했다.
 
  이후 2012년 2월 19일, 장성택은 평양 모란관에서 김영춘, 오극렬 등 군부 원로들과 함께 모종의 파티를 열었다. 장성택은 그 자리에서 군부 핵심인사들이 김정은에 대한 충성 맹세를 공개석상에서 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의 일환으로 3월 8일 ‘국제여성의 날’을 맞아 김정은이 참석한 은하수관현악단 공연 중 오극렬과 김원홍 등이 무대에 나와 노래를 불렀다.
 
  북한에서 군 핵심인사들이 직접 무대에 나와 노래를 부르는 일은 거의 없다. 당시에도 이를 놓고 전문가들은 의아해했다.
 
  이에 대해 고위 탈북자는 “한마디로 장성택이 군 원로들에게 망신을 준 것이다. 오극렬급의 군 원로가 무대에 나와서 노래를 한 것은 아마 처음일 것”이라면서 “장성택 처형을 김원홍이 주도했는데 이때 당한 치욕을 되갚아준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김정은에 대한 충성 경쟁에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도 뛰어들었다. 김영남과 뜻을 함께한 이는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상(副相・차관)과 김계관 외무성 부상 등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영남은 21년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한 노련한 외교관 출신이다.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위상을 더 높이고, 미국과 동등한 위치에서 북핵 문제의 해결과 대규모의 원조를 이끌어내겠다는 것이 김영남의 전략이었다. 김영남은 미국과 고위급 회담과 남한과의 정상회담 성사를 통해 김정은에게 충성심을 입증받고자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김영남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당시 북한은 이명박 정부와 정상회담을 논의하기는 했으나 생각대로 되지 않자 차기 정부와 정상회담을 계획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북한은 남한의 차기 정부로 박근혜 정부를 내심 원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김정일이 생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을 리더십 있는 지도자로 평가했다고 한다. 김정일이 2002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방북할 당시 만난 이유도 박정희 전 대통령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김정일은 박 전 대통령을 만난 후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고 칭찬까지 했다고 한다.
 
 
  김정남은 동생에 의해 죽을 것 미리 알고 있어
 
김정은은 2017년 2월 자신의 이복형인 김정남을 말레이시아 국제공항에서 독살했다. 사진=조선DB
  김정일은 죽기 하루 전인 12월 14일, 김정남을 평양으로 불러 김정은의 정권안착에 방해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일은 그 대가로 김정남에게 해외에서 평생 사용할 수 있는 자신의 개인 계좌 중 몇 개를 양도했다.
 
  하지만 김정남은 언젠가 이복동생인 김정은이 자신을 죽일 것을 알고 망명을 계획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2년 10월 김정남은 싱가포르에서 고모인 김경희를 만나 “정은이가 해외에서 나의 행동을 감시하고 유사시 암살하려 한다”고 불평을 늘어놓으면서 “나도 이제는 살자면 망명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김경희는 “내가 살아 있는 한 정은이가 절대로 너를 해치지 못하게 내가 방어해주겠다. 만일 내가 죽으면 그때 너도 해외로 망명하라”고 했다고 알려졌다.
 
  평양으로 돌아간 김경희는 장성택에게 “정은이가 정남이를 죽이도록 방치해두려 하는가. 정남이 죽으면 나도 죽는다”라고 협박했다. 김경희는 김정은에게 전화를 걸어 “형제간에 서로 죽이는 일은 없어야 한다”며 “만일 네가 정남이를 죽이려 한다면 나부터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경희는 김정은보다 김정남에게 더 각별한 애정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경희는 장성택과 결혼한 이후 몇 해 동안 아이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김경희는 자신의 오빠 아들인 김정남을 누구보다 예뻐했으며, 자신의 집에 데려다 함께 살 정도로 김정남을 아꼈다. 장성택도 마찬가지다. 김정남을 더 예뻐했다고 한다. 김정남이 해외로 떠돌 때 중국을 움직여 김정남을 보호하고 그에게 자금을 대준 것이 바로 고모부 장성택이었다.
 
  당시 김정남은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마카오를 거점으로 활동했다. 고모 김경희의 당부에도 김정남은 만일에 대비해 스위스 정부와 망명을 조율했고, 이 소식이 평양에 전해졌다. 이 소식은 김정은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정남은 독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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