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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6·25전쟁 70주년

독자수기 / 6월이 오면 더욱 슬픈 엄마의 故鄕

글 : 김주현  자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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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자줏빛 할미꽃 피고, 산머루 열매 알알이 여무는 곳
⊙ 다섯 살 되던 해 6·25 발발, 다리 잃고도 매일같이 키질하시던 어머니
⊙ 정화수 떠놓고 致誠 드려 날 낳으셨지만 不孝의 기억 사무쳐
⊙ 6·25의 상처 가슴에 묻고 가셨지만, 6월이면 아픈 기억 용솟음
고향을 가고 오는 길, 나지막한 임진강 다리 위를 건너다 보면 맑게 흐르는 물밑에 수많은 고기떼가 노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진은 임진강과 주상절리. 사진=조선DB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6·25, 벌써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갈피갈피 묻어두었던 아버지 어머니의 이야기와 내 삶의 흔적을 꺼내본다. 신작로에서 보면 아무도 살 것 같지 않은 삼태기 모양 같은 아늑한 곳에 초가집 석 채, 남매들이 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곳이 있다.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그곳으로 가는 길 오른쪽에는 다랑논이 있고 봄이면 자줏빛 할미꽃이 핀다. 그리고 신맛 나는 싱아를 뜯어 맛볼 수도 있다. 왼쪽에는 나지막한 산비탈 길에 5월이면 찔레꽃이 흐드러지게 핀다. 그 꽃과 향을 짝사랑하다 산머루가 푸르게 멍든 열매를 알알이 여물게 하는 곳, 가끔은 길 마소가 무거운 짐을 등에 얹고 가쁜 숨을 헐떡이며 농부와 오르내리던 그 길을 따라 열일곱 단아한 새색시가 가마 타고 시집오니 그곳이 엄마의 고향이다.
 
  위로는 기골이 장대하시어 콩 가마니를 어깨 위아래로 마음대로 다루시는 홀로 되신 시아버님과 시동생 둘이 있었다. 집 왼쪽에는 시고모가, 오른쪽에도 시고모님이 그러니까 3남매가 정을 나누며 사시는 곳이었다. 어려운 시집살이지만 위로 봉양하고 아래로는 보살피며 아들딸 4남매를 낳아 키우며 행복하게 사셨다.
 
  자식 욕심이 많으신 시아버님이 어느 날 어머니를 불러 앉히고 여러 해 태기(胎氣)가 없으니 며느리 하나를 또 얻으시겠다는 그 말씀에 참새가슴처럼 급히 뛰는 마음을 진정하고 딱히 방도가 없기에 그날부터 마당 앞에 있는 샘터에서 아침저녁으로 정화수(井華水) 떠다 장독대에 놓으시고 삼신 할머님께 빌고 빌어 그러기 1여 년 만에 나를 나셨고 내 동생도 낳으셨다. 그러나 조부님은 나의 탄생을 못 보고 작고하셨다.
 
 
  다섯 살, 6·25전쟁
 
영국군 참전 유적지의 기념비.
  어머니는 하늘에 치성을 드려 낳은 자식이니 착한 사람이 되라고 늘 말씀하셨지만 나면서부터 늘 나는 병약했다. 연년생으로 태어난 동생이 있었기에 내 젖은 아주, 아주 짧았다.
 
  그때 내가 안 태어났더라면 어머니는 슬프고 고단한 삶을 살지 않으셨을 텐데, 늘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외할머니가 계셔서 유모같이 나를 키우셨다. 외할머니는 외아들을 도쿄에 유학 보냈으나 소식이 없자 가산을 정리해 우리 집에 몸을 의탁하고 같이 계셨기에 외할머니는 나에게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셨다.
 
  내가 다섯 살이 되는 해 10리(4km) 남쪽에서 섬광이 번쩍이고 총소리가 콩 볶듯 하니 그것이 6·25 남침 전쟁이었단다. 남들은 피란을 간다고 난리였지만 아버지 어머니는 자유를 찾아 남하한 큰아들이 평화가 오면 집에 돌아올 그날을 기다리며 어수선한 세상이지만 농사일만 하고 있었다.
 
  얼마 후 미음자(ㅁ)로 된 우리 집 안마당에는 눈이 푸르고 코가 큰 낯선 외국 젊은 병사들이 포로가 되어 메우고 있었다. 이들은 설마리 전투에서 포로가 된 영국군 병사들이었다. 허기와 죽음의 공포에서 떨고 있는 그들이 남하한 큰아들처럼 불쌍하고 애처로워 어머니는 검은콩을 볶아 무명옷에 풀을 먹이기 위해 쓰는 풀 자루에 볶은 콩을 담아 나를 업고 인민군(人民軍) 몰래 밖에 나가는 척하며 그들에게 떨어뜨려 주면 그들은 고맙다는 눈빛을 하며 너나 할 것 없이 똑같이 나눠 먹었다고 하셨다.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이국만리(異國萬里)에서 싸웠던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는지….
 
  그다음 햇보리가 익어가는 초여름 어머니는 아버지와 같이 보릿단을 머리에 이고 배메기 고개를 지나고 있었다. 배메기 고개는 어느 해인가 임진강이 홍수로 범람하여 깊은 산골짝 고개까지 물이 차올라 배들이 그곳까지 와서 배를 정박시키고 매어두었다 하여 배메기 고개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그때 산등성이를 타고 도망가는 인민군을 관측(觀測)하고 사격을 한 포탄 파편에 어머니는 왼쪽 발목이 잘려나갔다. 치료도 받지 못하고 얼마가 흘렀다. 그 후 진군한 아군에 의해 어머니는 아버지와 같이 후방(後方)으로 이송되었다.
 
  그해 겨울 집에 남아 있던 외할머니, 큰형수, 작은누나, 작은형, 나, 동생 이렇게 여섯 식구는 국군에 의해 양주군 덕정으로 소개(疏開)되었고, 옆집에 살던 친척들도 같이 소개되었다. 밭에 나가 말라 비틀어진 배춧잎과 품삯으로 받아온 보리쌀을 넣고 끓인 죽으로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후방 먼 곳까지 이송되어 치료하셨지만, 다리 하나를 무릎 위까지 절단하여야만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치료가 끝나자 보호자가 필요 없기에 어머니의 곁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거동할 수 없던 어머니는 병원에서 기거하면서 여자 간호사들의 바느질을 하여 주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부탁해 고향이 가까운 의정부병원에까지 오게 됐다.
 
  그날 바깥 날씨가 추운데 어느 여자가 떡을 팔러 다니는데 “떡 사세요, 떡 사세요” 하는 소리가 얼핏 들리기에 귀에 익은 목소리 같아 사람을 시켜 불러오니 고종사촌 형님이셨다. 한참 붙들고 울다 우리 식구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병원 옆에 집을 얻고 덕정에서 피란살이하는 우리와 만났지만, 너무나 슬프고 안타까워 몇 날 며칠을 울면서 지냈다. 아버지 역시 어머니를 찾아 이 병원 저 병원을 헤매고 다니시다 의정부병원에서 소식을 듣고 우리 식구들을 만났다.
 
  한번은 헌병에게 붙잡혀 인민군 첩자로 몰리게 되셨다. 그동안 자초지종을 다 이야기하였으나 하늘이 알고 땅이 알아도 판사가 모르면 재판을 못 하듯 아버지의 사정 이야기는 소용이 없었다.
 
  네가 죽을 자리는 네가 파라고 하기에 구덩이를 파고 그 구덩이에 들어가 눈을 감고 손을 머리 위로 얹으라고 해 그대로 했다. 눈을 감고 식구도 못 만나고 죽는구나 하는 그때 탕 하는 소리가 들렸다. 죽었구나 하는데 정신이 멀쩡하니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헌병들이 너는 구덩이를 파는 것을 보니 농사꾼이구나 하면서 그냥 보내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판잣집의 여덟 식구
 
부모님 유택을 돌보고 나서 가족들과. 맨 오른쪽 까만 옷이 필자다.
  세 갈래로 흩어졌다 다시 만난 우리 식구들은 의정부 생활이 그리 길지 않았고, 고향이 가까운 동두천으로 갔다. 그곳에서도 오래 있지 못하고 쫓겨 다시 신산리라는 곳으로 왔다. 미군과 영국군이 있어서 사람들이 북적여 열심히 일하면 목에 거미줄은 면할 수 있었으나 외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형수, 작은누나, 작은형, 나, 동생 여덟 식구가 살기에는 힘들었다.
 
  천막생활을 하다 목재를 구하여 판잣집을 짓고 온 가족이 열심히 일하였지만 넉넉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외국군 부대에서 근무하는 젊은 군인(카투사)들이 와서 밥을 해달라기에 어머니는 집 떠난 큰아들 생각에 따뜻한 밥과 국을 해주었는데 그것이 인연이 되어 일요일마다 많은 군인이 와서 밥을 먹고 돈을 내고 가니 조금씩 살림 형편이 펴지게 되었다.
 
  그들이 조금씩 가져다 주는 커피, 초콜릿, 사탕, 우유 등 그 당시에는 먹어보기 힘든 것들을 맛볼 수 있으니 난리통에서도 행운이었고, 저녁이면 수북이 쌓인 돈을 가지런히 펴 정리하시며 어머니는 불편함과 슬픔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집이 좁아 집 하나를 더 지으니 더 많은 사람이 북적였다. 당시에는 운송수단이 별로 없어 민간인들이 군에서 재무시(지엠시·GMC) 트럭을 임차해 후생사업이라 하여 운수업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저녁에는 그들이 열대여섯 명이 숙식하다 보니 북새통이었다. 운전사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지만 조수는 얼굴이고 옷이고 간에 기름때가 줄줄 흘렀다.
 
  저녁이면 냉각수(당시에는 부동액이 없었나 보다)를 전부 뽑아야만 되었다. 그러지 않으면 엔진이 얼어 터지기 때문인데 엔진에서 뜨끈뜨끈한 물을 뽑아 세면을 했다. 아침에도 북새통이었다. 더운물을 엔진에 넣어야 하므로 가마솥에 물을 끓여 엔진에 넣고 그도 안 되면 화롯불을 엔진 밑에다 피워서 엔진을 녹이지 않으면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당시 재무시는 운전사가 시동을 걸려면 조수는 차 앞에서 스타찡(자동차 시동 핸들)이라는 손잡이로 온 힘을 다하여 돌리면 운전사가 시동을 걸었다. 그도 안 되면 다른 차가 앞에서 끌고 사람들이 뒤에서 밀고 한참 난리를 쳐야 동네가 조용해졌다. 세상도 변하고 유행도 변했다.
 
  카투사가 떠나고 재무시 후생사업자도 떠나고 그다음은 양키 물건 장수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틈새에는 하숙생 같은 분도 있었다. 황해도가 고향인 그분은 양복기술자였다. 항상 오른손 검지에는 쇠로 된 골무를 끼고 있었고, 다래 소주를 한 잔씩 드시고 왔다.
 
  다래 소주는 둘레가 젊은 아가씨 허리만 하고 서너 살 먹은 아이 키만 한 옹기인데, 입구가 아주 좁아 가느다란 호수를 꽂아 입으로 쭉 빨아서 작은 종지에 한 잔씩 따라 팔고는 했다. 술 따르는 재주가 없으면 입으로 들어온 술을 꼴깍 마셔야 하니 술을 뽑아내는 재주가 없는 구멍가게 주인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항상 얼굴에 홍조를 띠고 있었다. 양복기술자 아저씨는 가끔 그 술을 드시고 오면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를 부르셨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봄 제비 넘나드는 서낭당 길에….”
 
  노래는 여기까지다. 몇 번을 부르다 보면 어느덧 붉은 눈가에는 이슬이 맺힌다. 고향에 두고 온 처와 자식 생각에… 그 슬픔을 누가 알까?
 
 
  6·25가 갈라놓은 형과 형수
 
작은누님(왼쪽)과 아내. 작은누님은 89세다.
  양키 물건 장수도 여럿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별한 사람은 메루치가다(일본 발음)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몸은 멸치처럼 바짝 말랐지만, 무게를 잡고 유머를 하며 설치고 다니는 품새가 그중에 우두머리 같아 붙여진 별명이다.
 
  남자들만 양키 물건 장수가 있는 것은 아니고 여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물건을 사서 후방에 내다 파는 장사꾼이지만 한편으론 먹고살기 위한 생존이었다. 그 사람들의 삶도 순탄치 않았다. 후방으로 물건을 가지고 나르는 동안 길목마다 지키는 헌병이나 특무대 요원에게 들키면 물건을 압수당해야 했기에 때로는 농부처럼 벼 적삼에 밀짚모자를 쓰고 지게에다 물건을 숨기고 다녔고, 새참을 내가는 시골 아낙네처럼 위장하고 주전자에는 막걸리도 담아 다녔지만 장사가 그리 녹록지 않았다.
 
  가짜 MP(헌병)에게 당하기도 했다. 짧은 세월이었지만 카투사도 떠나고, 재무시 운전사도 조수도 메루치가다도 양키물건 장수도 가버렸다. 우리 집은 그나마 집이 넓어서 하숙집으로 변했다.
 
  그즈음 자유를 찾아 남하하다 죽었다는 큰형의 소식을 전해 들은 지 한참 후인데, 그가 다시 충청도에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아버지가 찾아가셨다. 그러나 젊은 사람을 한강을 건너 데려오기가 여의치 않아서 특무대에 돈을 써서 귀대하는 장병으로 위장 군복을 입혀 데려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돈은 참으로 대단한 위력이었다.
 
  남편과 자식도 없는 젊은 며느리를 마냥 붙잡고 있을 수 없어서 등을 떠밀다시피 하여 재혼시키고 난 한 달 후에 형 소식이 왔으니, 재혼한 형수도 형도 6·25가 연출한 생의 비극이었다.
 
  재가한 지 한 달도 안 된 형수가 다시 오겠다고 했지만, 당시 사회 통념으로는 불가능하였다.
 
  큰형은 사랑하는 사람이 기다려주지 않은 실망감에 한동안 방황하며 괴로워했지만 재혼에 성공해 다시 행복을 찾았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피란 갔던 큰누나가 고향을 찾아가는 길에 하룻밤 묵을 데가 없어 하숙집을 찾은 곳이 부모·형제가 있는 우리 집이었다.
 
  우리네 식구들은 다섯 갈래로 헤어졌다, 연어가 모천(母川)을 찾아가다 길목에서 만나듯 그렇게 다들 만났다. 장사도 시들해질 때쯤 고향이 수복되어서 고향에 땅이 있는 사람들은 농사를 짓기 위하여 고향으로 갔다.
 
  우리도 외할머니, 아버지, 큰형과 형수가 먼저 고향으로 갔지만 본래 고향은 아니었다. 농토가 있는 2km 후방에 집단으로 모여 정부에서 준 목재로 집을 짓고, 아침 일찍 초소(哨所)에서 신분을 확인받고 일하다가 해질 무렵이면 초소를 거쳐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 민통선 마을이었다.
 
  두 누님은 결혼하였고 어머니와 형, 나, 동생 네 식구는 그냥 후방에 남아 있었다. 어머니는 재봉틀을 사서 군복을 수선하면서 우리를 뒷바라지하셨다. 낙(樂)이라고는 라디오에서 전하는 뉴스와 가수들의 노래, 또 밤이면 32절지쯤 되는 책장에 세로로 된 글씨가 빼곡한 고전(古典)을 나와 동생을 양쪽에 눕히고 읽어주는 것이었다. 철없던 초등학교 시절 운동회나 소풍을 갈 때 남들처럼 엄마나 누나의 손을 잡고 가는 아이들이 부러워서 나와 동생은 눈물을 보이며 울었고 엄마는 마음으로 우셨다.
 
  농번기(農繁期)나 추수가 끝나고 날씨가 추워지면 아버지는 우리 사는 후방에 나와 생활하셨는데 나나 동생은 어머니 곁에서 잠을 잘 수 없어서 서운했다. 지금 생각하면 불효막심한 철없는 생각이었다.
 
 
  고향 가는 길
 
  세월이 흘러 작은형은 서울의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는 후방에서 집 두 채를 관리하며 중학교에 다녔다. 어머니와 동생은 다시 민통선 마을 고향으로 이사를 했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와 식구들이 보고 싶으면 토요일 오후 학교에서 돌아와 교통편이 없는 고향을 향해 40리(16km)를 걸어 뉘엿뉘엿 해가 질 때쯤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나고 시큼한 소죽 끓이는 냄새가 나는 고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날이 어두웠지만 불편한 몸으로 마당에서 수건을 쓰고 키질하던 어머니는 40리를 군용(軍用) 자동차가 지나가면서 일으키는 먼지를 뒤집어쓰고 온 아들이 반가워 머리에 쓴 수건을 벗어 온몸을 털어주곤 하셨다. 눈물이 절로 났다.
 
  그 이튿날 점심을 먹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오면 무려 80리를 걸어 다닌 셈이다. 지금 사람들이 생각하면 바보 같은 일이라 하겠지만 어머니가 보고 싶고 식구들이 그리워지면 고향에 아니 가곤 못 배겼으니 힘이 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고향을 가고 오는 길에 나지막한 임진강 다리를 건너다 보면 맑게 흐르는 물밑에서 수많은 고기떼가 노는 모습을 볼 수 있고, 설마리 계곡을 굽이굽이 돌다 보면 영국군 참전 유적지를 둘러볼 수 있었다.
 
  그곳에는 전투사(戰鬪史)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전투역사(戰鬪歷史)
 
  1951년 중공군 제63군의 3개 사단은 서울을 향하는 적성 연천지구 침공로(侵攻路)에 대공격을 감행했으며 적군의 진격로(進擊路)에는 영국군 제29여 단이 임진각이 굽어보이는 지역을 방어하고 있었다.
 
  영국군 글로스타샤 연대(聯隊) 제1대대는 제170 박격포대대(迫擊砲大隊) C중대(中隊)와 오늘날 임진 포대로 명명된 포병단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영국 여단 휘하의 별정대대와 두 개의 다른 대대(大隊)는 글로스타샤 연대 동쪽에 포진(布陣)하며 제8 쎈추리온 전차대대(戰車大隊)와 25파운드 포탄의 제45야포대 및 제55 공병중대(工兵中隊)가 이를 지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단의 방어지역은 12,000m에 달하는 광범위한 전선(戰線)이었다.
 
  1951년 4월 22일은 따뜻한 봄날이었으며 바로 이날 임진각 격전(激戰)은 시작되었다.
 
  전투 첫날밤 글로스타샤 대대(大隊)는 10배에 달하는 적군에 대항하여 용전(勇戰)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 2일간의 혈전 끝에 설마리 계곡까지 후퇴하였다.(전적비 지역) 4월 24일까지 격전에서 생존자들은 이 기념비 위에 솟아 있는 고지(高地)에 집결하였으나 적에게 완전히 포위되었다.
 
  탄약은 거의 소모되고 과로(過勞)와 허기에 지친 상태에서도 내내 그날 밤 적의 연속적 공격을 물리치고 고지(高地)를 사수(死守)하였으며 4월 25일 아침 적의 포위망을 마지막으로 돌파하기 위한 공격을 감행하기까지 진지(陣地)를 고수(固守)하였다.
 
  글로스타샤 연대는 혈전 끝에 67명만이 탈출에 성공하였으나 이 전투에서 59명이 전사(戰死)하고 325명은 포로(捕虜)가 되었으며 이들 중에는 180명의 부상병(負傷兵)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3년간의 포로수용소에서 34명이 사망하였다.
 
  이 격전(激戰)에서 글로스타샤 연대는 2명이 최고 무공훈장(武功勳章)을 받았으며 모든 장병의 희생정신은 세계전사에 빛나고 있다.
 
  3일간에 걸친 이들의 과감한 격전은 당시 중공군의 진격을 지연(遲延)시켜 유엔군의 재편성(再編成)에 소요되는 시간적 여유를 마련하는 데 이바지하였으며 또한 중공군의 서울 침공을 저지하는 데 크게 공헌(貢獻)하였다.
 
  한편 한국전쟁 중(1950~1953) 영국군은 1,109명이 전사하고 2,671명이 부상하였다.〉

 
 
  벼 수확의 기억
 
독도에서 아내와.
  고향을 찾아 내 땅에서 농사를 짓는다고 하지만 농토가 멀다 보니 마차(馬車)와 소는 꼭 있어야 했다. 마차라고 해야 옛날 장터에서 짐을 나르던 손수레 같았지만, 소가 끄는 마차이니 앞부분이 소 한 마리 들어갈 만치 길었고 맨 앞에는 멍에가 있어 소 목에다 마차 멍에를 얹고 멍에 있는 목줄을 감아 소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고 끌고 다녔다.
 
  그것도 요즘처럼 베어링이 달린 고무바퀴가 아니라 전쟁 통에 부서진 탱크에서 바퀴를 떼다가 가운데는 통나무를 박고 중앙에는 주물(鑄物)로 된 갈매에다 탱크 궤도에 있던 철봉을 샤프트로 이용하여 만든 마차를 소가 끌고 다녔으니 마치 무쇠 덩어리를 끌고 다니는 것처럼 힘들어했다.
 
  길도 포장도로가 아니라 군사용 도로에다 오르락내리락을 대여섯 번은 해야 농토에 갈 수 있었고, 굴러가는 마차에 윤활유를 주입하는 것도 아니고 포장용 콜타르를 주워다 석유를 붓고 불로 끓이면 걸쭉한 죽처럼 되는데 이것을 윤활유 대용으로 썼다.
 
  봄에 땅이 녹기 시작하면 겨우내 모아둔 두엄을 날라야 하고, 봄밭도 갈아야 하고, 논도 한 번 갈고 두 번 갈고, 모내기가 되면 써레로 논바닥도 평평하게 골라야 했다.
 
  6월이면 보릿단도 마차로 날라야 하고 가을에는 수확한 볏단도 소가 다 집으로 날라왔으니, 소들이 고통을 말을 못해서 그렇지 지옥 중에서도 상지옥이었다.
 
  벼 수확이 끝났다고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다. 날씨가 쌀쌀해지면 보리 파종(播種)이 시작되는데 날씨가 남쪽 지방보다 추운 관계로 고랑을 깊이 파고 파종해야 하기에 소 두 마리가 앞에서 멍에를 메고 쟁기를 당겨 밭을 갈았다.
 
  소 두 마리가 밭을 갈다 보니 암소 두 마리가 같이 일하면 힘이 부족하고, 황소 두 마리가 일하면 틈만 나면 씩씩거리며 싸움질하려고 한다. 그래서 황소와 암소가 한 조가 되면 황소는 암소에게 잘 보이려고 밭 가는 농부 말도 척척 알아듣고 일도 열심히 한다.
 
  사람과 소의 의사소통은 고삐를 잡고 ‘이랴!’ 하면 가고, ‘워’ 하면 멈추고, 고삐를 잡아당기면 오른쪽으로, 고삐로 오른쪽 옆구리를 툭툭 치면서 ‘더디어’ ‘어디어’ 하면 왼쪽으로 간다. 밭을 갈 때는 두 마리 소가 같이 일해야 하기 때문에 의사소통 방법이 한 가지 더 있다.
 
  또 쟁기를 두 손으로 잡아야 하기 때문에 왼쪽으로 가기 위해서 ‘마마’라는 구호가 하나 더 있다. 왼쪽 소는 고삐가 오른쪽에 있지만, 오른쪽 소고삐는 왼쪽에 있다. 밭을 가는 마부가 양(兩) 소고삐를 가운데 두어야 소 다루기가 쉽기 때문이다. 밭 가는 마부가 밭을 고루 갈기 위해선 제식훈련(制式訓鍊) 제병(諸兵) 지휘자(指揮者)처럼 소에게 계속 훈령(訓令)을 한다.
 
  “이려 마마 고랑으로 올라가 이놈의 소가 아침도 안 먹었나 왜 이리 힘이 없냐!” 하면서 심심치 않게 계속 떠들어 대야 소들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일을 잘한다. 이처럼 농사짓는 소가 힘이 약하면 안 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힘이 좋고 덩치가 큰 황소를 선호했다. 하지만 그놈들도 개중엔 고약한 놈이 있어서 사람을 보고 대들 것 같은 자세를 취하고 씩씩거린다. 이런 놈들 버릇 가르치는 방법이 소 주인에게는 따로 있다.
 
  소들이 고약한 행동을 하면 소 주인은 손에 끼는 반지에 뾰족한 바늘 박은 것을 주머니에 감추어 두었다가 슬그머니 반지를 끼고 쇠코뚜레를 잡고 소 콧등에 일격을 가하면 아무리 덩치가 크고 고약한 소라도 콧등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다음부터 주인의 헛기침 하나에도 무서워서 벌벌 떤다. 가여운 소들 전생(前生)에 무슨 잘못을 했기에 그토록 고달픈 삶을 살까? 깊이 생각해 본다.
 
 
  포탄에 다리를 잃어버린 어머니
 
필자는 2007년 사진전 〈한국인의 초상〉(전민조 作)에 소개되었다. 원래 필자 이름은 김주복이었는데, 개명을 했다.
  소에게 호시절(好時節)은 어미 소의 젖을 빨고 천둥벌거숭이 모양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니는 7~8개월 정도다. 그다음은 동네에서 소코만 전문으로 뚫는 아저씨를 만나게 된다. 그 아저씨가 제일 먼저 하는 말은 “많이 컸구나, 이제 너 고생길을 열어주러 왔다” 하며 엉덩이를 쇠갈퀴로 살살 긁어주면 송아지는 시원한 맛에 순진해진다. 그러다 콧등을 쓰다듬으며 콧속에 엄지와 검지를 넣어 제일 얕은 곳을 골라 오른손에 들고 있던 반질반질한 박달나무 꼬챙이로 꽉 찌르면 송아지는 “음매” 하고 비명(悲鳴)을 지르지만 때는 늦었다.
 
  코 뚫는 아저씨는 주인에게 막걸리 한 대접에 김치 한 조각 얻어 자시고 사라지지만 송아지는 그때부터 고생길에 접어든다. 이리 뛰고 저리 뛸 수도 없고, 왼쪽 오른쪽 앞으로 가는 것, 멈추는 것, 마차 끄는 것, 논 갈고 밭 가는 일을 살기 위해선 인내로써 참고 견디며 배워야 한다.
 
  비단 소들만이 힘든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도 새벽에 일어나 들에 나가 일할 준비를 해야 했고 소가 힘들까 봐 지게에다 짐을 나누어 지고 다녔다. 나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검은 고무신이 닳아서 모래알이 들어올 때까지 그 신을 신고 다니는 고단한 삶을 사셨다.
 
  말수가 적은 아버지는 늘 인내하며 사셨고 남들이 쓴소리를 하여도 그저 벙긋이 웃어넘기고 마셨다. 한여름 마당에 멍석을 깔고 식구들이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다 이야기 골이 깊어지면 어머니는 가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다리를 잃어버려 이렇게 고생하는 것은 포사격한 아군 때문도 아니고 공산군 때문도 아니며 전쟁 통에 피란도 안 가고 평생 일에 묻혀 마누라까지 일터에 끌고 다니며 일을 시킨 영감탱이 때문이다”라고 아버지를 원망하시며, “내가 죽으면 한 맺힌 배메기 고개, 그곳에 묻어 달라”고 하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무런 말씀도 안 하며 자신의 괴로움과 아내의 슬픔과 고통도 마음으로 삭이며 평생을 일밖에 모르셨다. 여름철 농한기(農閑期)에는 산에서 일년생 싸리나무를 베어다 마당비도 만들고 소쿠리, 봉당을 쓰는 수수비도 만들어 이웃에 나누어 주기도 하셨다.
 
  아버지는 자식들 얼굴 한번 보며 빙그레 웃는 것이 행복이고 낙이셨고, 텁텁한 농주(農酒) 한잔 마시고 안주 삼아 수염 한번 쓸어내리며 ‘시원하다’ 하는 그 말씀이 낙이셨다.
 
  그렇게 허무하지만 인내하며 사시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여름 육신은 흙에 묻고 영혼은 하늘나라로 가셨다.
 
 
  단아하게 살다 간 어머니
 
  그리고 그 다음 다음 해, 먼 산에는 아직 잔설(殘雪)이 희끗희끗할 때 어머니도 삼베옷 입고 상가 소리 들으시며 당신의 고통과 슬픔을 가슴에 묻고 한 맺힌 배메기 고개가 아닌 자식들의 뜻대로 밉지만 그리운 아버지 곁으로 가셨다.
 
  나를 낳기 위해 하늘에 빌고 치성을 드리지 않았더라면 어머니는 스쳐가는 포탄 파편을 피하셨을 텐데…. 그런 어머니를 위하여 생전에 나는 무엇을 해드렸는가? 걸어 다니실 수 있는 의족(義足)을 마련해드렸는가? 휠체어에 편안히 모시고 관광(觀光)을 다녀봤는가? 젊은 시절 삶이 고달프지만 생전에 자주 찾아뵙고 마음이라도 어루만져드렸다면 조금이나마 불효라도 씻을 수 있었을 텐데!
 
  가끔 어머니가 그리워져 옥상에 올라가 고향 쪽을 바라보면 하염없이 달에 구름이 가는지, 구름에 달이 가는지 자꾸자꾸 구름은 고향 땅 그림을 그리며 흘러간다.
 
  문득 나도 저렇게 흘러흘러 고향 집 대문 들어서면 천상(天上)에 마실 가신 어머님, 집에 와 계시려나? 생각해본다.
 
  6·25의 아픈 슬픔도 오랜 세월이 흘렀고, 부모님이 이 세상에 왔다가 하늘나라 가신 지도 강산이 수없이 변하였다. 어머니는 용서와 모든 한을 당신의 가슴에 묻고 가셨지만 6·25 남침이 원죄라는 것은 항상 내 가슴에서 용솟음치고 있다.
 
  6·25의 아픈 상처를 몸에 담고 사셨던 부모님. 그러나 아버지는 나에게 인내라는 거룩한 유산(遺産)을 주셨기에 55년이라는 긴 세월 한 직업을 가지고 외곬 인생을 살 수 있었고, 어머니는 모든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여 맑고 단아(端雅)하게 살다 가셨다.
 
  그래서 내 작업실에는 이런 ‘시(詩)’를 써놓고 있다.
 
  숙명(宿命)
 
  여름에는 먼동이 트고
  겨울에는 어둠에 갇혀서 일터에 오면
  키다리 시계가, 뻐꾸기가
  일곱 번씩 아침 인사를 하고
  멈춰선 시계는 나를 반긴다.
  백열등 불빛 아래서 명리(名利)를 잊고
  무아(無我)의 황홀 속에
  손끝만이 열정의 집념을 불태운다.
  빛바랜 금속을 닦아 빛을 보태주고
  여인에, 사랑의 땀보다 더
  매끄러운 기름을 먹여주면
  멈춰진 시계는 잠든 영혼(靈魂)을 토해내고
  영롱한 빛을 내며 다시 힘차게 달린다.
  나는 행복하다
  어제가 그랬고 내일도 그렇듯
  하늘이 내게 준 숙명을 따라
  멈춰진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하리라.

 
  어머니 고향 집터는 어느 해는 꽃이 자주 피는 감자밭이 되기도 하고 가을에는 온 밭에 눈덩이를 던져놓은 것 같은 목화밭이 되기도 한다. 어머니가 그리워지는 6월 그곳에 가면 나를 얻기 위해 어머니가 정화수 떠 가시던 샘터에는 땅에서 보글보글 샘솟는 물이 흰 모래알을 춤추게 하고, 그 옆에는 세월을 잊은 해당화가 송이송이 피어 있다. 6월이 오면 그곳이 더욱 슬픈 엄마의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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