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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6·25전쟁 70주년

현장 취재 / 6·25참전소년소녀병전우회가 문 닫던 날

끝없이 소외된 소년병 이야기 “이제 그만 포기하렵니다”

글 : 이경훈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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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전 펜 대신 총을 들고 전선으로 달려간 紅顔의 소년들.
백발노인이 돼선 국가유공자로 인정받기 위해 6년간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결실을 맺지 못했다. 이들이 바란 소년·소녀병에 대한 예우법이 20대 국회에서도 무산됐기 때문이다.


⊙ 코로나19 때문에 마지막 모임도 취소돼
⊙ “소년병 명예회복 위해 분신자살 빼고 온갖 짓 다 했다”
⊙ 정치인들, 소년병 명예회복 약속했지만 결과물은 없어
⊙ 140명의 연 5만원 회비로 16년간 버텨
⊙ 국격 때문에 소년병 쉬쉬. 소년병 예우는 국격 훼손 아닌 국위 선양
2012년 7월 21일 대구 낙동강전승기념관에서 열린 위령제에서 한 노병이 추모사를 듣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조선DB
  지난 4월 16일, 대구에 있는 6·25참전소년소녀병전우회(이하 전우회) 윤한수(尹漢壽·87)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 회장은 4월 27일 전우회 모임을 마지막으로 갖고, 30일 전우회 활동을 종료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4월 27일, 소년병들의 마지막 모임을 취재하기 위해 대구로 내려갔다. 대구 칠성시장 근처인 중구 태평로 231(동인동1가 196)에 도착해 3층으로 올라갔다. 문을 여니 사무실의 불은 꺼져 있고 접이식 철제 의자 네 개만이 놓여 있었다. 하늘색 면 마스크를 쓴 한 노인이 의자에 앉아 전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은 기자를 보곤 “코로나19 때문에 마지막 모임이 취소됐다”고 했다. 전우회 윤한수 회장이었다.
 
  대구 방문의 목적은 전우회의 여러 소년병을 만나 그들이 겪은 70년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다. 코로나19 때문에 소년병들의 마지막 모임을 볼 수 없다는 게 아쉬웠다. 윤 회장 맞은편 의자에 앉자 그는 자신이 소년병이 된 사연부터 전우회 회장을 맡아 오늘에 이르는 70년의 세월을 연대순으로 풀어나갔다. 궁금한 게 있으면 그때그때 끼어들어 질문했다.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지 큰 소리로 여러 번 물어야 했다.
 
 
  소년(지원)병과 학도병의 차이
 
텅 빈 사무실에 홀로 앉아 있는 윤한수 회장. 보증금 1500만원에 월세 20만원인 15평짜리 사무실이다.
  — 소년병이랑 학도병이랑 어떻게 다릅니까.
 
  “만 17세 이하의 신분으로 군번과 계급을 부여받고 6·25전쟁에 참전한 군인이 소년병이야. 2005년 이전에는 소년병을 군번 없는 비(非)군인인 학도병·학도의용군과 같게 취급했지. 학도병은 군번이랑 계급이 없다고. 2005년 소년병 모임을 조직해 소년병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는데 소년병에 대한 실체는 정의(定義)됐지만, 실질적인 명예 회복이 아직 안 됐어. 국가가 소년병의 존재를 부정하니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낸 《6·25전쟁 소년병 연구》에 따르면, 학도병은 ‘1959년 시행된 병역법 시행령에 따라 1950년 6월 29일 이후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해 1951년 2월 28일 해산일까지 근무한 자’로 규정돼 있다. 1951년 2월 28일 정부가 학도의용군에 대한 해산 및 학교 복귀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학도의용군 정의에 따르면, 학생이었지만 징집·가두모집·자원으로 인해 참전한 학생들이 군번을 받고 정규군으로 편제된 자는 학도의용군 신분이 될 수 없다.
 
  6·25참전소년병은 ‘전쟁이 발발한 이후 군번을 부여받은 정규군으로서 그 학적 소유를 불문하고 만 17세 이하의 나이에 조국 수호를 위해 전후방에서 근무하고 일정 기간의 복무 완수(상이 포함)로 인해 제대한 자’로 정의할 수 있다.
 
  1934년생인 윤 회장은 호적상으론 1935년 출생이다. 1950년 대구 계성중학교 3학년(만 15세) 때 6·25가 터졌다.
 
  “나는 붙들려 가고 싶진 않아서 내 발로 걸어 나갔지. 자고 일어나면 앞집의 친구들이 붙들려가고, 아침이면 동네가 울고불고 난리야. 그때는 경찰을 순사라고 했거든. 순사들이 와서 반장이나 동장을 앞세워 애들을 모아갔지. 난 친구 셋이랑 자원입대했어.”
 
  윤 회장은 낙동강 방어선이 만들어질 때쯤 경북여중 모병소에서 특과병(特科兵)에 지원했다. 오늘날로 치면 특기병이다. 보병이 아닌 공병, 정보, 군수, 포병 등에 해당한다. 보병이 아닌 특과병으로 가면 살 확률이 조금이나마 높지 않을까 해서였다. 윤한수씨는 2대 독자에 외동이다.
 
  “키가 작으니 입대가 안 된다는 거야. 꼭 가고 싶다 하니 모병관이 부모 동의서랑 학교장 추천서를 써 오래. 학교장 추천서야 당연히 (입대를) 장려하는 분위기니까 그걸 받아 내서 군에 갔지.”
 
  윤 회장은 8월 20일 육군에 입대해 제대로 된 훈련도 없이 포병 특기를 받은 채 1사단에 배속돼 9월 4일 영천·신녕전투에 투입됐다. 평소 학교에서 교련 수업을 받아 제식은 익숙했지만, 전술에는 백지였다. 수류탄 던지는 훈련을 일주일 정도 받고 야전(野戰)으로 갔다.
 
  “보는 거라곤 죽은 사람, 다친 사람뿐이었어. 살려달라고 고함치고 비명을 지르니 발을 못 떼었어. 105mm 포탄을 창고에서 들고 포(砲)에 갖다줘야 하는데 겁이 나서 갖다주질 못했어. 여기 만져 봐. 들어갔지? 여기가 수류탄이 터져 파편이랑 모래알이 박혔던 데야. 옥수수밭에서 인민군을 만나 수류탄을 던졌는데, 그때 상처야.”
 
  1사단에 배속된 그는 북진(北進) 대열(隊列)을 따라 10월 20일경 평양에 도착했다고 했다. 40인민학교 주둔 중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할 때 105mm 포 바퀴에 깔려 다치고 말았다. 기절할 정도로 크게 다쳤는데 아카징키(빨간 소독약) 바르는 게 전부였다고 했다. 그나마 멀쩡한 반대쪽 팔로 포탄을 날랐다. 1953년 베티고지 전투에서는 화랑금성무공훈장을 받았다.
 
  “서부 전선에서 1사단 5포병단 작전과 선임 하사를 하면서 보름 동안 한잠도 자지 않고 커피 마셔가며 지원 사격을 했지.”
 
 
  소년병 제대 후 학업 포기하고 생활 전선으로
 
2008년 6월 경북 칠곡군 다부동 전적기념관에서 사진을 양손에 든 윤한수 당시 사무총장. 사진=조선DB
  윤씨는 1954년 5월 1일 제대를 했다. 학교에 다시 다녀야 했는데 학적은 중학교 4학년으로 기록돼 있었다. 졸업을 하려면 2년을 더 다녀야 하는데 사정상 그럴 수 없었다.
 
  “학교는 포기하고 대구 서구 출장소(오늘날 서구청)에 촉탁, 임시직으로 들어가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어. 지방공무원 채용시험에 붙어서 18년을 일했지. 37세엔 남산1동에서 동장도 하고. 표창도 많이 받았지. 그러다 42세, 75년에 그만뒀어.”
 
  공무원 생활로는 생계유지가 힘들었다. 아이들을 대학에 보낼 수도 없었다. 천막 가게를 했는데, 공무원 시절 버릇으로 고지식하게 장사를 하니 빚만 떠안았다. 나이 60을 넘겨 대구 성서에 있는 동국무역 성서공장에 경비원으로 취직해 정년(70)을 채웠다.
 
  — 자녀는 어떻게 되시나요.
 
  “너이(넷). 2남 2녀. 못산다 모두. 밥이나 먹고살지. 학교(공부)를 못 시켰으니까…. 머스마(사내애)들은 공업학교 보내 일찌감치 직업 전선에 내보냈지. 여자애는 아르바이트해서 돈 모아 전문대 가고. 큰 애가 60세, 막내가 47세.”
 
  — 자식들 공부를 많이 못 시켜서 안타깝죠.
 
  “안타깝지. 그래서 정부에 항의하는 이유도 그거라. 훈장을 받으면 38만원이 나오는데, 이건 내 전투 공적에 대한 국가 보상이지 소년병에 대한 평가가 아니란 말이지. 소년병은 자신의 존재와 공헌을 인정해주길 바란다고. 우리는 전시(戰時)에 모자라는 인력을 보충하기도 했지만, 배움이 있었기에 군에 필요한 지식을 제공해줬어. 그때는 글을 제대로 쓰는 사람이 없었어. 미군 물자가 들어와 고문관들이 한 번 시범 보여주면 그걸 보고 학생(소년병)들이 나머지한테 알려줬어.”
 
 
  제사 지내던 모임에서 소년병 실체 알리는 단체로
 
2010년 소년병전우회 사무실에 모인 회원들. 왼쪽이 윤한수 당시 사무총장. 사진=조선DB
  정년을 채운 윤씨는 우연한 기회에 소년병 모임에 참석했다. 이 소년병 모임은 다부동 전투에 참전한 소년병들이 모여 1997년경에 만들었다. 후손이 없는 전사자들을 위해 제사를 지내주자는 취지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소년병의 실체를 알리거나 위상을 정립하려는 계획은 없었다. 2004년에는 이 모임을 모태로 6·25참전소년소녀병전우회(전우회)가 탄생했다.
 
  2004년 당시 윤 회장이 본 전우회의 모습은 제대로 된 정관 하나 없는 친목회 수준의 단체였다. 2005년에는 윤 회장이 사무총장을 맡아 정관을 만들고 실무를 주도했다. 당시 회원은 120명가량이었는데 실제 참여 인원은 30~40명 정도였다. 소년병의 실체를 알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2008년에는 이재오 당시 국민권익위원장이 직접 대구의 전우회 사무실을 찾아오기도 했다.
 
  국방부는 2008년 이전까지만 해도 유엔 아동권리협약상 18세 미만은 징집하지 못하도록 한 규정 때문에 국군 소년병의 존재 자체를 쉬쉬해왔다. 그러던 중 전우회는 2011년 8월 국방부로부터 소년병의 존재를 확인받고 생존자 명단까지 받았다. 2011년 11월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만 17세 이하의 소년병 참전자는 총 2만9603명(만 13세 이하 1600여 명 포함)으로 육군 2만2849명, 해군 2984명, 공군 1197명, 유엔군 2766명이었다(소속이 중복된 사례도 포함). 이 중 2573명이 전사했다. 연령별 참전자 수는 만 17세(1만5000여 명), 만 16세(7000여 명), 만 15세(3000여 명), 만 14세(1700여 명), 만 13세(1600여 명) 순이었다.
 
  여기에 여군 467명을 더하면 3만81명의 만 17세 이하의 소년·소녀가 6·25전쟁에 참전한 것이다. 2011년 8월을 기준으로 소년병만 7054명이 생존해 있었다. 서울·경기·강원 지역 거주자가 전체 생존자의 3분의 2를 차지했다.
 
  2011년 전우회는 생존자 전원(7054명)에게 편지를 보냈고, 이 중 1004명으로부터 입회 신청을 받았다. 연회비를 5만원씩 받기로 했는데, 실제 회비를 낸 이는 130~140명 수준이었다. 1년 수입이 약 700만원가량 됐다. 이 돈만으로 단체를 유지해나갔다. 전우회는 실무를 책임지는 윤 회장에게 급여를 주지 못하니 사무총장에다 부회장이라는 직책까지 붙여줬다. 일종의 감투를 하나 더 씌워준 것이다. 그러다가 2018년 12월 18일에는 전우회 회장이 됐다.
 
  “전우회 회장은 대구가 아닌 영주에 사니, 내가 실무를 다 맡아서 했다고. 보수는 10원도 없었지. 15년 동안 그렇게 해왔어. 경리도 없고 내 손으로 다 해왔는데….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컴퓨터를 내가 할 줄 몰라. 학원에 가서 배울 순 없고 어깨너머로 배워서 탄원서, 진정서 만들어서 여기저기 보냈지. 컴퓨터 모니터도 돋보기를 쓰고 봐야 해. 얼마나 고통스러운데.”
 
  전우회는 소년병의 실체를 알리기 위해 청와대, 국민권익위원회 등 국내 기관뿐만 아니라 미국 국방성과 상·하원 인권위원회 등 해외에도 서한을 보냈다. 김관진 국방부 장관 시절에는 국방부가 소년병 전우회 관계자를 초청해 ‘국격’을 이유로 들며 우회적으로 전우회의 활동 자제를 요청하기도 했다고 한다. 국방부 관계자가 “소년병 문제가 국제화돼 좋을 게 없다. 소년병 단체가 너무 한다”는 취지의 말을 전우회 관계자에게 했다는 것이다.
 
 
  없는 살림에 500만원 들여 헌법 소원까지
 
소년병 전우회가 16년간 사용한 문패 앞에 선 윤한수 회장. 사진=조선DB
  2014년 6월 11일, 전우회는 헌법재판소에 징집행위로 인한 기본권 침해를 이유로 헌법소원심판(2014헌마456)을 청구했다. 결과는 청구 기간 미준수로 인한 각하(却下)였다. 헌법재판소 구성 이전의 공권력 행사에 대해서는 1988년 9월 19일부터 기산(심판 청구 기간을 따지기 위한 기간 계산의 시작)하여야 하는데, 1988년 9월 19일로부터 1년이 훨씬 지난 2014년 6월 11일이 돼서야 이 사건에 대한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였기 때문이다. 헌법소원심판을 위해선 기본권의 침해가 있음을 안 날부터 90일 이내에, 기본권의 침해가 있는 날부터 1년 이내에 반드시 청구하여야 한다. 소년병은 청구 기간의 소멸이 발생한 것이다.
 
  그럼에도 헌법재판소는 “소년병의 특수성을 감안해 현재 시행 중인 보상 관련 법률이 성인으로 참전한 사람과 소년병을 동일하게 취급하고 있어 소년병들이 입은 피해의 특수성과 중대성을 충분히 고려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면서 “별도의 특별법을 제정하거나 기존 법률을 개정해 소년병의 특수한 희생과 공헌에 따른 보상 내지 배상을 도모하는 것이 금지된 것은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소년병들은 헌법소원에 500만원을 들였다.
 
  18대 국회부터 시작해 20대 국회에 이르기까지 소년·소녀병을 국가유공자로 예우하기 위한 입법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다. 19~20대 국회에선 미래통합당 유승민 의원이 앞장서 소년병을 챙겼지만 입법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유승민 의원실 관계자는 “‘6·25 참전 소년·소녀병 보상에 관한 법률안’이 기재부의 반대와 국방부의 소극적인 자세로 결국 법사위 문턱을 넘지 못했다”고 했다. 관계자는 지난해 11월 정기회의 국방위 법안 심사 때 (소년·소녀병 법안이) 꼭 논의되도록 유승민 의원이 국방위원들에게 직접 친전 편지, 문자까지 보냈지만 법안이 다뤄지지 않아 아쉽다고 했다.
 
  기재부의 반대 논리는 ▲국가보훈체계훼손 우려 및 보훈 원칙 정립 필요 ▲형평성 논란 및 재정부담 고려 ▲예외적인 보상을 위해선 명확한 공적 자료 등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보훈처 역시 현행 보훈 체계는 ‘국가유공자예우법 및 참전유공자 예우법’에 따라 보상금과 수당 등이 지원되는데, 개별 입법을 통한 별도의 보상 체계가 신설될 경우 유사 입법 증가로 기존 국가보훈 체계가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냈다.
 
  현재 소년병은 ‘참전유공자법’에 따라 매달 32만원의 6·25참전명예수당을 받는다. 이 금액도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인상된 액수다. 여기에 지자체마다 적게는 3만원에서부터 많게는 15만원까지 추가로 지원한다.
 
  문제는 참전명예수당과 무공영예수당을 중복해 받을 수 없다는 점이다. 무공훈장을 받으면 매달 무공영예수당을 받는다. 훈장의 등급에 따라 금액이 달라지는데, 태극(40만원), 을지(39만5000원), 충무(39만원), 화랑(38만원), 인헌(37만5000원) 순이다. 즉 가장 높은 등급인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사람은 이에 따른 무공영예수당 40만원만 받을 수 있고, 참전명예수당 32만원은 받을 수 없다. 윤씨는 화랑무공 수훈에 따른 무공영예수당 38만원만을 받고 있다.
 
  보훈처 관계자는 지난 5월 13일 《월간조선》과의 통화에서 “소년병이 국가유공자 수준의 예우를 받을 수 있도록 정부 입법을 통한 특별법 제정 등에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윤한수 회장의 목소리에선 노병(老兵)의 한(恨)이 짙게 묻어나왔다.
 
  “10여 년간 한 걸 생각하면…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사정하고… 몸서리가 쳐져. 분신자살만 빼고 다 해봤어. 서울역부터 시작해 전국 지하철, 버스터미널 앞에서 유인물도 배포했고. 아들이 나한테 이러더라고 ‘아버지 그렇게 어리석습니까? 안 되는 걸 왜 하십니까’. 집념, 정신력으로 여태껏 해왔지. 정부가 소년병을 인정하면 소년・소녀에 대한 인권이 침해돼 국격이 손상된다고 생각하는데 이건 국격 손상이 아니야. 국격 손상이 일시적으로 있다고 해도 국가 장래로 봤을 때는 (소년병을) 선양해야지 위급할 때는 나라를 지킨다는 개념이 뚜렷해질 것 아니야? 그래서 소년병을 인정해달라고 하는 건데.”
 
 
  16년간의 전우회 활동 종료
 
2012년 6월 21일 오후 대구 남구 낙동강전승기념관에서 열린 제15회 6·25참전순국소년·소녀병 2573위 위령제. 사진=조선DB
  윤한수 회장은 전우회 활동 지속 여부를 두고 회비를 내는 147명을 대상으로 서면으로 찬반 투표를 했다. 이 중 38명만이 전우회 활동 유지에 찬성했다. 사무실 정리에 반대한 이들에게는 따로 연락했다고 한다.
 
  전우회가 12년간 사용한 이 사무실은 옥탑방에서 전우회를 꾸려나가다가 2008년에 입주한 보증금 1500만원, 월세 20만원짜리 15평 사무실이다. 지난 4월 25일에는 철거용역업체에 40만원을 주고는 사무실에 있는 집기들을 모두 정리했다. 윤 회장은 전우회가 갖고 있던 6·25참전 소년병에 대한 모든 정보도 폐기했다고 한다.
 
  — 아깝지 않으세요.
 
  “아, 아깝지. 개인정보도 내가 갖고 있어서 될 일이 아니고. 전체 소년병 명부는 국방부에서도 갖고 있으니 (이제 모임이 해체되니 개인인) 내가 보관할 필요가 없지.”
 
  — 지금 기분이 어떠세요.
 
  “인정받지 못해 억울하지. 한도 있고. 다른 6·25참전유공자 단체가 형평성을 이야기하며 우리 활동을 안 좋게 봐. 참전유공자회 회원 수가 월등히 많잖아. 근데 자기네들도 봤잖아. 어린 나이에 똑같이 무거운 군장 메고 자기 키보다 큰 총을 질질 끌면서 따라오는 걸 봐놓고도 이러나.”
 
  왜 전우회는 대구에 자리를 잡았을까. 국토의 92%가 점령당한 상황에서 낙동강 전선을 지키기 위해 대구·경북 지역의 소년들이 많이 참전했기 때문이다. 소년병 전사자 명부를 보면 주로 1950년 8월에서 9월에 입대자 수가 증가한다. 이 시기에 전사자 수도 늘어났다. 1950년 7월에 입대한 소년병은 789명이지만, 낙동강 방어선이 펼쳐지고 북진이 시작되는 8・9월경에 입대한 소년병은 9495명이다. 소년병 모임이 대구에서 태동한 이유다.
 
  고령의 소년병들은 이제 2000여 명 정도 생존해 있다고 한다. 70년 전 홍안의 소년들은 백발의 노인이 돼 역사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다. 전국 어디에도 소년병을 기리기 위한 참전기념비나 충혼탑 하나 없다.
 
  매년 6월이면 전우회는 대구지방보훈청에서 예산 450만원을 지원받아 연중 가장 큰 행사인 ‘순국 소년·소녀병 위령제’를 대구 남구 낙동강승전기념관에서 개최해왔다. 하지만 올해부터 이 위령제도 더는 열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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