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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6·25전쟁 70주년

현장 취재 / 6·25 무공훈장 찾아주기

“못 받으신 무공훈장을 찾아드립니다”

글 : 이경훈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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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정신으로 70년 전 기록과 싸우며 역사의 퍼즐을 꿰맞춰 훈장 전하는 이들의 이야기.
6·25 무공훈장 찾아주기 조사단 출범(2019년 7월 24일) 후 지금까지 약 5000명에게 훈장 전달(5만6000명→5만1000명).
조사단에 전화(1661–7625)하면 방법 알려줘


⊙ 현역 해군 소장도 조사단 통해 아버지 훈장 찾아
⊙ 훈장을 탄 지도 모른 90代 노인, 손자가 전화해 할아버지 훈장 찾아줘
⊙ 딸만 11명에 막내아들 하나인 집안, 아들 전사해 代 끊겨 추적 어려워
⊙ 훈장 찾아준다고 하니 보이스피싱으로 오해해
⊙ 한자판독병이 70년 전 古문서 해독
6·25 참전 수훈자 무공훈장 수여식에서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참전용사 이천복씨의 증손자가 할아버지가 받은 훈장을 신기한 듯 살펴보고 있다. 사진=조선DB
  70년 전의 기록을 찾아 선배 전우에게 무공훈장을 찾아주는 군인들이 있다. ‘6·25 무공훈장 찾아주기 조사단(이하 조사단, 단장 신기진 대령)’ 단원들의 이야기다. 조사단은 2019년 7월 24일 시행된 ‘6·25전쟁 무공훈장 수여 등에 관한 법률(약칭 6·25무공훈장법, 2019년 4월 23일 제정) 시행령’에 따라 출범했다.
 
  2022년 12월 31일까지 한시적으로 운영된다. 전쟁 공로자 조사 및 신원 확인, 훈장 수여 등의 업무를 맡는다. 공로자란, 훈장 수여 대상자로 결정되었으나 실제로는 훈장을 전달받지 못한 사람(미지급자·미수여자)을 말한다. 조사단의 활동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공로자(미지급자)에 대한 신원 확인이다. 과거 병적 기록, 제적부(除籍簿) 등을 뒤져가며 퍼즐을 맞춰가듯 70년 전의 영웅을 찾아 나간다.
 
  조사단은 국방부 장관의 지시로 만들어졌지만 육군 인사사령부 인사행정처에 소속돼 있다. 훈장 미수여자가 육군에 가장 많기 때문이다. 공군은 공식적으로 훈장을 모두 수여했다고 밝혔다. 조사단의 사무실은 육해공 3군 본부가 있는 계룡대에 있다. 단장(대령)을 포함해 중령 1명, 소령 4명, 원사 3명, 상사 2명, 군무원 3명, ‘한자판독병’ 2명 등 총 16명으로 구성돼 있다. 영관 장교와 20년 이상 복무한 부사관, 군(軍) 생활을 20년 가까이한 뒤 군무원으로 채용된 이들이 조사단원들이다. 공식 편제에선 제외돼 있지만, 70년 전 한자로 작성된 문서를 발굴하고 확인하기 위해 야전 부대에서 ‘한자판독병’을 지원받았다.
 
  조사단은 전국(234개 구역)을 세 권역으로 나눠 탐문 조사 활동을 벌인다. 탐문 1팀(팀장 소령 최재원)은 충청·호남권, 탐문 2팀(팀장 소령 이철승)은 서울·경기·강원권, 탐문 3팀(팀장 소령 김영록)은 영남권을 담당한다. 각 팀은 4명으로 이루어졌고 연간 25개 구역 탐문을 목표로 한다. 코로나19로 인해 올해는 4월 기준으로 15개 구역에 대한 탐문을 마쳤다. 기획총괄장교 박창남 중령이 조사단의 실무를 총괄한다.
 
 
  현역 해군 소장, 아버지의 훈장 찾아
 
신기진 6·25 무공훈장 찾아주기 조사단장.
  지난 4월 28일에는 현역 해군 제독이 조사단으로 전화를 했다. 아버지의 훈장 수훈 사실을 문의한 것이다. 조사단은 경남 창원시의 미지급자 명단에서 화랑무공훈장이 결정된 고(故) 천순조 일등 중사의 주민등록표 원장(元帳)을 찾았다.
 
  조사단 탐문 3팀 최해규 원사가 유가족에게 연락해 훈장 전달 방법을 상의하던 중 천 일등 중사의 장남이 전 사이버작전사령관 천정수 제독(해군 소장)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아버지가 생전에 받지 못한 훈장을 아들이 대신 찾은 것이다.
 
  천 일등 중사는 1952년에 입대해 금화지구 전투에 참전했고, 1953년 5월에는 중공군의 포로가 됐다. 포로가 되기 전에는 수도사단 수색대대 소속이었다. 1954년 금화지구 전투 유공으로 훈장 수여가 결정됐다. 포로교환 협정에 따라 1953년 8월에 귀환해 8사단과 1110야전공병단에서 1957년까지 복무했다. 전역 후에는 2남 1녀를 두었고, 천정수 제독이 고등학교 1학년인 1980년에 사망했다.
 
  천 소장의 부친은 생전에 중공군의 포로가 된 상황과 전공(戰功)으로 훈장을 받은 사실을 천 소장에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천 제독도 아버지의 훈장 수훈 사실을 확인하려고 노력했으나 절차상의 이유로 관련 내용을 알지 못한 채 잊고 지냈다. 천 제독은 오는 5월 중순 아버지의 훈장을 전달받을 예정이다. 천정수 소장은 “많은 수훈자와 유가족도 나처럼 하루속히 훈장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국방부 장관의 임명을 받아 조사단을 이끄는 신기진 단장(대령)은 1988년에 군 생활을 시작했다. 인사(人事)를 담당하는 인사행정이 그의 병과이다. 5군단, 5사단을 거쳐 육군인사사령부 병인사관리과장을 지냈다. 신 단장의 ‘무공훈장 찾기’는 중령 시절부터 시작한다. 무공훈장 찾아주기 비상설 TF(2008~2012)에서 2년간 실무를 맡았기 때문이다. 이를 인정받아 작년 7월 24일 조사단장이 됐다.
 
  신 단장은 기자를 만나자마자 “홍보가 제일 중요하다”면서 “홍보 효과가 점점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 그의 책상에는 한자 공부를 위한 한자 수험서가 꽂혀 있었다. 신 대령은 “개인정보보호법이 생긴 뒤, 훈장을 찾아주는 일이 더 어려워졌다”고 했다. 정보보호법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지자체가 훈장 미수여자의 인적 사항을 제공하는 데 우호적이었으나, 법이 만들어진 후에는 실무자들이 부담을 가져 조사단의 활동에 비협조적이라는 것이다. 그간 공문을 보내도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1년간 열심히 알린 덕분에 반응이 오고 있다고 했다.
 
 
  여당이냐 야당이냐? 안 중요해
 
  — 조사단 활동에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입니까.
 
  “이동 거리가 너무 깁니다. 전국을 돌아다니다 보니 실제 업무 시간보다 이동에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됩니다. 무공 수훈자를 찾기 위해서는 인적 사항 등 개인정보 조회가 필요한데, 이에 대한 지자체의 협조가 잘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도 지자체가 협조를 잘해주면 먼 거리를 가도 피곤하지 않을 텐데…”
 
  ― 어느 지자체가 가장 협조적입니까.
 
  “군, 읍, 면 단위로 내려갈수록 협조적입니다. 우리 조사단의 활동 취지에 대한 공감도가 높습니다. 특히 지난 2월에는 서대문구청과 협업으로 서대문구를 주소지로 하는 247명의 대상자 중 120명의 무공훈장 주인공과 그 유가족을 찾는 성과를 냈습니다. 서대문구 민원여권과에서 적극적으로 협조해줬습니다. 특히 김혜나 주무관은 코로나19로 조사단의 출장이 제한되는 상황에서 열정을 갖고 45명의 호국 영웅과 유가족의 소재를 확인해 조사단에 알려줬습니다. 서대문구는 모범 사례입니다.”
 
  — 어느 지자체가 가장 비협조적입니까.
 
  “대도시로 갈수록 비협조적입니다. 특히 광역시, 부산, 서울. 서울시에 25개 구청이 있는데, 반은 정말 우호적, 반은 그렇지 않습니다. 만에 하나 개인정보 유출 등의 문제가 생기면 책임소재를 다퉈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현장에서 조사단원과 지자체 실무자들이 얼굴을 맞대며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 지자체장이 여당인지 야당인지에 따라 태도가 다르지 않습니까.
 
  “제가 경상도 사람인데, 목포에 갔을 때 목포시청에서 엄청 잘해줬습니다. 광양에서도 그랬고. 지역이나 여야에 관계없이 대부분 잘해줍니다. 업무를 추진하는 담당자의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지자체 실무자들이 ‘조사단을 도와줘야겠다’는 마음이 있으면 잘 대합니다.”
 
 
  조사단 해체되는 날까지 단장 맡고 싶어
 
  신기진 단장은 탐문 팀이 전국 각지로 출장을 갈 때마다 매번 동행한다. 해당 지역의 시장이나 군수, 구청장을 만나 최대한 협조를 얻어내기 위해서다. 시장이나 군수가 없으면 부시장, 부군수라도 꼭 만난다고 한다. 조사단원들만 보내는 것보다는 대령인 단장이 직접 단체장을 만난 뒤 ‘시장님, 군수님을 만나고 왔다’고 하면 실무자들의 반응이 다르기 때문이다. 2박 3일에서 3박 4일 동안 해당 지역의 구청이나 면사무소를 돌아다니며 팀원과 탐문 조사 활동을 벌인다. 필요하면 마을회관이나 집성촌도 들러 미수여자를 수소문한다.
 
  70년 전 자료에는 A씨가 창녕 거주로 기록돼 있지만, 분가한 뒤 가구주가 돼 서울에 사는 경우 서울시의 25개 구청을 돌아다니며 일일이 A씨의 이름을 검색해야 A씨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대도시가 더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하는 이유다. 광양에서 무공훈장 대상자 300명 중 200명에 대한 인적 사항을 확인했다면, 나머지 100명은 인근 대도시인 목포나 광주, 대전, 서울 등지에서 일일이 찾아 나가야 한다.
 
  신 대령은 “조사단이 해체될 때까지 단장을 맡아 한 분이라도 더 (훈장을) 찾아드리고 싶다”고 했다. 인터뷰 도중에도 인천 중구청에서 출장 요청이 왔다. 조사단의 인천 중구 지역 미지급자에 대한 탐문 조사 활동에 중구청이 협조하겠다는 것이었다.
 
  신기진 단장은 단원들이 전문성을 살릴 수 있도록 이들의 임기를 보장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본인이 원할 경우, 노하우를 갖춘 단원들이 임기에 구애받지 않고 조사단이 해체될 때까지 활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장기보직 형태로 조사단이 운영되길 원했다. 통상 한 보직은 임기가 1~2년으로 제한된다. 새로운 사람이 오면 대민(對民)관계의 노하우 등을 잃어버리고 업무 숙달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신 대령은 “생존해 계신 분에게 훈장을 찾아줬을 때 제일 기분이 좋다”면서도 “‘왜 이렇게 늦었나’ 하는 아쉬움도 있다. 조사단이 해체되는 2022년 12월 31일까지 최대한 많은 분을 찾겠다”고 했다.
 
 
  派獨 간호사에게 무공훈장 찾아줘
 
고 원영희 대위에게 수여된 화랑무공훈장을 유가족이 대신 받고 있다. 사진=6·25 무공훈장 찾아주기 조사단
  조사단은 파독(派獨) 간호사들의 훈장도 찾아냈다. 고 원영희 대위와 권순희(94)씨의 이야기다.
 
  1931년 강원도 춘성군(現 춘천시)에서 태어난 원영희씨는 춘천간호학교를 졸업하고 1950년 9월 간호후보생 6기로 자원입대했다. 1953년 6월에는 8사단 외과 병원에서 근무했다. 중동부 전선에서 부상한 장병을 치료한 유공으로 화랑무공훈장 2개를 서훈받았지만 미처 훈장은 받지 못하고 1957년 대위로 전역했다. 이후 원 대위는 1970년대 초반 가족을 남겨두고 홀로 독일로 건너가 파독 간호사 생활을 했다. 안타깝게도 독일에서 수술을 받다가 사망했다.
 
  유족은 아들 이유경(65)씨와 여동생인 예비역 소령 원영주(83)씨가 있다. 원영주씨도 언니를 따라 1958년 간호 장교가 돼 1972년 전역한 뒤 파독 간호사로 일했다. 67년 만에 어머니의 무공훈장을 대신 전해 받은 이유경씨는 “하늘에 계신 어머니께서 정말 기뻐하실 것 같다”고 말했다.
 
  아흔넷의 권순희씨와 고 원영희 대위는 고교 동창이자 임관 동기이기도 하다. 권씨는 1952년 제2이동외과병원 근무 시 화랑무공훈장 서훈자로 결정됐으나 훈장을 받지는 못했다. 조사단과 국가보훈처의 협업으로 68년 만에 훈장을 수여받았다. 권씨도 1974년부터 79년까지 파독 간호사 생활을 했다.
 
 
  3팀장 김영록 소령, “군인 정신으로 한 분이라도 더 찾겠다”
 
  영남권을 담당하는 3팀장 김영록 소령은 30사단에서 병사로 복무하던 중 단기간부사관에 지원해 장교가 됐다. ROTC와 학사장교 등을 교육하는 육군학생군사학교 교육통제과장을 지낸 후 조사단에 자원했다.
 
  김영록 팀장은 “훈장을 찾아주기 위해 전화를 하다 보면 보이스피싱으로 자주 오해를 받는다”고 했다. “이젠 하다 하다 훈장 준다고 보이스피싱을 하느냐”는 반응을 보인다고 했다. 전화를 다섯 차례나 했는데 훈장 수훈자가 이를 믿지 않아 해당 지역의 예비군 동대장이 직접 찾아가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김 팀장은 조사단의 탐문 활동과 전화 상담을 ‘감정 노동’이라고도 표현했다. 업무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하소연 전화가 와도 끝까지 들어준다는 것이다.
 
  김 팀장은 군인 정신을 발휘해 한 분이라도 더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출장을 나가면 흐름이 끊길까 봐 화장실도 가지 않고, 구청의 컴퓨터 앞에 앉아 모니터에 여러 개의 검색 창을 띄워놓은 채 스마트폰으로 한자를 찾아가며 미수여자 찾기에 빠져든다고 했다. 김 소령은 “훈장을 찾는 총성 없는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면서 “우리가 아니면 이분들에게 훈장을 영원히 전해줄 수 없다는 절박함을 갖고 임하고 있다”고 했다.
 
 
  제적정보시스템 접근할 수 있어야
 
제적부.
  김영록 소령은 대법원의 가족관계등록정보시스템 중 제적 정보시스템 접근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을 대법원이 관장하지만, 등록사무의 처리에 관한 권한은 시(구)·읍·면의 장(長)에게 위임돼 있다. 조사단이 전국의 시군구를 돌아다니며 미지급자를 찾는 이유다. 제적 정보시스템 접근 권한이 있으면 미수여자의 상당수는 전국을 돌아다니지 않고도 전산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대법원 행정처는 제적 정보시스템 접근 권한을 부여하는 것은 어렵다는 반응이다. 조사단에 제적 정보 검색 권한을 부여하기 위해선 관련 법률의 개정이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조사단에 제적부 정보를 다룰 권한이 주어지면 무공훈장 미지급 대상자를 찾는 게 훨씬 수월해집니다. 전사자는 20대 초반에 전사했기에 호주(戶主)인 경우가 드뭅니다. 제적 정보시스템을 통해 전사자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큰아버지, 큰형님 혹은 동생까지 따라 올라가 어느 호적에 올라갔는지를 찾아야 하는데, 이 과정이 복잡하고 시간도 많이 걸립니다.”
 
  제적부 정보란, 오늘날 가족관계등록부와 유사하다. 호주제(戶主制)가 폐지되기 전인 2007년 12월 31일 이전까지는 호주를 중심으로 가족관계를 기록한 호적부(戶籍簿)가 사용됐다. 2008년 호적법이 폐지되면서 이 호적부가 제적부로 남게 된 것이다.
 
  현재 제적 정보시스템은 이름과 리(里), 번지 단위까지 세부 정보를 입력해야만 해당자에 대한 제적 등본 확인이 전국에서 가능하다. 주소를 읍・면 단위밖에 모른다면, 해당 읍・면 지자체까지 찾아가 일일이 미지급자를 검색해야 한다. 예를 들어 홍길동씨의 세부 주소를 알면 전국 어느 곳에서나 홍길동씨에 대한 제적부를 확인할 수 있지만, 홍길동씨에 대한 주소를 읍・면・동 단위까지만 알고 정작 번지를 모르면 직접 관할 읍・면・동을 찾아가 검색해야 한다. 홍길동을 찾기 위해 전국 243개의 지자체를 일일이 찾아야 하는 경우가 벌어진다.
 
  김영록 소령은 안타까운 사연도 소개했다. 세 남매를 남기고 사망한 훈장 미수여자의 자녀에게 아버지의 훈장 수여 사실을 알렸으나, 자신에 대한 직접적인 금전 지원(보상)이 없는 것을 알고는 훈장 수권을 거부한 사례도 있다고 했다. 이렇게 되면 ‘수권자 없음’ 처리를 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유가족이 없는 경우도 ‘수권자 없음’에 해당한다. 김 팀장은 ‘수권자 없음’ 처리를 하는 일이 없도록 최대한 행정관서와 협조해 가까운 범위에 있는 친척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다.
 
 
  인터넷 명단에서 아버지 이름 보고 훈장 찾아
 
훈장 수여자가 받는 화랑무공훈장과 훈장 증서, 국방부 장관의 직함이 새겨진 시계.
  지난 4월 29일에는 경기 용인에 거주하는 한상빈씨가 아버지 고 한형근 이등 중사의 화랑무공훈장을 찾았다. 한씨는 부친의 군번을 찾기 위해 30년 전부터 병무청 등에 여러 번 문의했으나 생년월일 등이 일치하지 않아 아버지의 군번을 찾지 못했다.
 
  세월에 지쳐 포기에 이를 때쯤 육군본부 홈페이지에 6·25 무공훈장 찾아주기 명단을 게시한다는 소식을 듣고 한씨는 육군 홈페이지를 확인했다. 홈페이지에 게시된 명단에서 부친의 이름을 발견한 한씨는 곧바로 조사단에 전화했다.
 
  전화를 받은 탐문 3팀의 김영록 소령은 한씨 부친의 6·25전쟁 참전 당시 자료를 토대로 병적자료를 조사했다. 당시에는 거주표(장병에 대한 정보를 수기로 남긴 일종의 병적 자료)상 생년월일과 제적등본상의 기록이 다른 경우가 빈번했다. 출생신고를 늦게 하는 등 여러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씨의 부친도 병적부와 제적부의 정보가 불일치하는 사례였다. 다행히 한씨는 부친이 생전에 작성한 이력서를 간직하고 있었고, 이력서에 작성된 복무기록과 본적, 소속 등이 병적기록과 일치했다. 본적이 함경남도로 돼 있어 현재 주소지와 다르고, 생년월일이 달랐기에 그동안 아버지의 군번을 찾지 못했다.
 
  한씨의 아버지는 함경남도 흥남에서 태어나 1950년 12월 월남해 1951년 5월 1103야공단에 입대했다. 고 한형근 이등 중사는 평소 “내가 훈장을 받은 사람이다”고 자랑을 했고, 아들 한씨는 그 기억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꼭 훈장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한씨는 “아버님의 명예를 찾게 돼 기쁘고 아버님께서도 매우 기뻐하실 것이다. 병무청에만 문의하고 포기했으면 찾지 못할 뻔했다. 조사단에 정말 감사드린다”고 했다.
 
 
  70년 전 기록에서 영웅 발굴해내는 ‘한자판독병’
 
  한자판독병 김한솔 병장(28·베이징대 졸업)과 장한빈(24·칭화대 재학) 병장이 없으면 조사단은 움직일 수 없다. 이들의 손을 거쳐 훈장 미지급자에 대한 기초 자료가 모이기 때문이다. 김 병장은 5사단 포병연대에서, 장 병장은 15사단 26포병대대에서 복무하던 중 작년 3월 15일 조사단으로 파견 왔다. 오는 6월에 모두 제대한다. 이들은 역량 평가 등을 거쳐 한자판독병으로 선발됐다.
 
  김한솔: “자료는 존재하나 수기 작성 등으로 인한 오류가 너무 많습니다. 한자 오기(誤記)가 대표적입니다. 교육 수준이 높지 않아 자신이 알고 있는 한자와 발음에 맞는 확실한 한자가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당시 한자는 약자체와 번자체의 중간 단계라서 지금 사용하는 한자와는 크게 다릅니다. 성명 오기, 군번 불일치, 후대의 잘못된 정리 등으로 판단 내릴 근거가 빈약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름과 군번 중 하나만 오기될 경우에는 기록을 바탕으로 검증해나가지만, 이름과 군번이 모두 일치하지 않는 일도 있다. 각종 오류가 누적돼 실제 인물과 그 인물에 대한 기록 간의 불일치가 빈번하다. 자료가 확실하지 않을 때는 수훈자와 그 가족의 제보를 통해 교차 검증을 해나간다고 한다.
 
  장한빈: “휘갈겨 쓰다 보니 헷갈리는 글자가 많습니다. 5를 3이나 8로 쓴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예전 기록을 일일이 판독해 군번 찾기부터 시작해 대상자를 찾는 과정이 마치 퍼즐을 맞추는 느낌입니다. 어렵지만 재미도 느낍니다. 사명감으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一, 二, 三을 세로로 쓰다 보니 정작 다르게 읽히는 경우, 군번 없이 입대한 뒤 군번을 부여받아 이중 군번에 해당하는 사례, 이중 군번인 자가 추후 군번 재교부로 군번이 바뀌는 경우, 병사로 입대해 전사 처리됐으나 장교 군번이 확인되고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 사례, 병적부(연명부)상의 이름은 일치하지만, 군번이 한 자리씩 밀려 이름과 군번이 불일치하는 경우(홍길동 309101→홍길동 309102) 등이다.
 
  한자판독병들은 70년 전 수기 작성된 과거 기록을 스캔해 이미지 파일로 만든 자료를 모니터로 확인한다. 거주표(신상명세서·보직명령서), 전공 상신서, 순보철, 전사자명부, 매장(埋葬)·화장(火葬) 보고서, 제적부 등을 검토한다. 70년 전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 사람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얻어내 최신화하는 것이 이들의 임무다. 군번을 찾다가 도저히 단서를 찾을 수 없으면 경우의 수를 계산해 몇몇 숫자를 집어넣어 보며 때려 맞춰가는 경우도 있다. 어떻게든 실마리를 찾으려 한다.
 
  장한빈: “이름에서 글자 하나만 다른 형제가 함께 입대했는데, 한자 오기로 누가 받았는지 알 수 없었던 사례가 기억납니다. 국민 참여가 많이 필요합니다.”
 
  김한솔: “삼 형제 모두가 전쟁에 나갔는데 동생분만 살아 돌아왔습니다. 동생이 형의 미지급 훈장 수훈 소식을 듣고 우신 게 기억에 남습니다. 전화 제보(1661-7625)로 많이 도와주십시오.”
 
  양주각 소령은 1950년 9월 군의관으로 임관해 1960년 소령으로 전역했다. 거제 포로수용소를 경비하는 35포로경비대대 의무대장이었다. 당시 상관으로부터 “군의관인 당신이 폭파하면 의심받지 않을 것”이라는 지시를 받고 포로수용소를 폭파해 반공포로들이 수용소를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왔다. 양 소령은 지난 4월 용인의 한 요양원에서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1953년 6월 18일 훈장 수여가 결정됐으나 66년이 지난 후에야 훈장을 받게 된 것이다. 92세의 양주각씨는 “살아생전에 훈장을 받게 돼 정말 기쁘다”고 했다.
 
 
  군번 없는 90의 아버지에게 훈장 찾아준 아들
 
  임영일(90) 일병의 아들 임래웅씨는 인터넷에서 무공훈장 찾아주기 캠페인 포스터를 보고 조사단으로 전화해 그간 아버지에게 들어온 무용담을 조사단원에게 전했다. 임영일씨는 1930년 광주 광산구에서 태어나 학도병으로 참전했다. 낙동강 방어선이 형성되기 전, 포항과 영천지구 전투에 투입됐다고 한다. 전투 중 발바닥에 관통상을 입었고 육군 원호대(援護隊·상이군인을 모아놓은 부대)를 거쳐 1951년 1월에 전역했다. 전역을 앞두고 원호대에서 명함 크기의 임시 수여증서로 대체한 화랑무공훈장 수여증서를 받았고, 이를 평생 간직하다 최근 분실했다는 내용이었다. 임래웅씨는 조사단에 아버지의 훈장 수여 기록이 남아 있는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훈장을 찾을 수 있는지 물었다.
 
  임래웅씨는 이미 지난해 전화 민원 등을 통해 아버지의 훈장을 찾고자 했으나 훈장 명부에 일치하는 군번이 없어 원하는 성과를 얻을 수 없었다. 조사단은 임씨 전화를 받고는 상훈 명부에서 해당 군번과 일치하는 훈장 기록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어 군번 착오자나 불명자 중에 임영일 일병에 해당하는 기록이 있는지 재확인했다. 아들이 전해준 무용담이 신빙성이 있고, 아버지가 90세지만 전화 인터뷰 등이 가능하다고 했기 때문이다.
 
  임영일 일병은 조사단과의 전화 통화에서 당시 7사단 8연대 1대대장과 부연대장을 부대장으로 기억해냈고, 소속 부대가 평양까지 진격했다는 내용을 말했다. 조사단은 이를 바탕으로 각종 자료를 확인한 결과, 비록 상훈명령상에 임씨의 군번은 없지만 육군 원호대에서 다수의 장병이 임시 수여증서를 받았다는 내용과 당시 지휘관에 대한 기억과 기록의 일치, 포항·영천지구에서 방어 당시의 정황이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금성 화랑무공훈장 수여 대상자로 최종적으로 인정했다.
 
 
  기록으로 드러나는 전쟁의 참상
 
  지난 5월 8일 충남 계룡시 두마면 사무소에는 탐문 2팀의 유재영 주무관이 면사무소 직원의 도움을 받아 탐문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두마면 사무소 관계자는 “조사단원들이 자리도 안 뜨고 일만 해서 쓰러질까 걱정”이라고 했다. 유 주무관에게 다양한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병적과 제적의 불일치로 신원 확인에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여기 보시면 병적 기록에는 1953년 6월 20일 전사로 나와 있지만, 제적부에는 1953년 8월 20일 전사로 기록돼 있습니다. 두 달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면 서기(書記)가 전사통지서를 오독(誤讀)하여 오기한 경우입니다. 제적부를 보면 전쟁의 참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1남, 3남은 기록돼 있는데 2남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2남이 전쟁에서 전사해 호적에 올리지 않은 것입니다. 사후 양자 입적, 대리 입대, 대(代)를 이어야 하는 형 대신 동생이 징집돼 동생이 두 번 입대한 사례, 전쟁에서 전사한 2남의 이름을 4남이 그대로 쓰는 경우, 3남이 두 명인 경우, 딸만 11명인 집안에서 막내아들이 전사해 대가 끊겨 호적 추적이 불가능한 경우 등이 있습니다. 낙동강 일대나 강원도 지역은 면사무소가 폭격으로 소실돼 제적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추적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지난 3월에는 미국에 거주하는 해외 생존 미지급자 두 명의 신원을 확인했다. 훈장 전달을 위해 현지 영사관과 접촉 중이다. 이들은 1951년 11월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용학수 하사와 1952년 11월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김종희 하사다.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세 명의 수녀가 조사단에 연락한 사연, 손자가 할아버지의 훈장을 찾은 일,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나 70년이 지난 뒤에야 아버지의 훈장을 받은 일, 광복군 출신 김국주 장군이 미처 받지 못한 훈장을 찾아준 일 등은 70년 전 6·25가 남긴 사연 중 일부이다.
 
 
  무공훈장 찾아주기는 全 국민 캠페인
 
탐문 팀의 전용 차량. 왼쪽 운전석부터 최해규 원사, 박창남 중령, 김영록 소령.
  조사단의 살림을 맡은 박창남 기획총괄장교는 “한 분이라도 더 살아계실 때 영광을 안겨드리고 싶다”면서 “단순히 훈장 하나 더 찾아주는 게 아니라 국가의 소중함을 알려주는 사업, ‘국가가 없으면 개인도 못 지켜준다’는 교훈을 전 국민이 알게 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박 중령은 “조사단의 활동이 단순히 군과 유관기관만의 활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범국민 차원의 운동이 돼야 한다”고 했다. 정부 조직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특별법까지 만들어가며 범국가적으로 무공훈장 미수여자를 찾는 것은 영웅들이 우리 곁에 남아 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공훈장 수훈자를 찾는 ‘우주선(우리가 주는 선물) 프로젝트’에 전 국민이 참여해 국가의 소중함, 6·25의 교훈을 다시금 새길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무공훈장 수훈자에 대한 혜택으로는 무공영예수당(월 약 36만원) 지급, 보훈병원 이용, 국립묘지 안장 등이 있다. 무공훈장 미지급자 명단은 육군본부 홈페이지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6·25 무공훈장 찾기 조사단’ 전화번호는 1661-7625이다.⊙
 
무공훈장의 역사
 
  무공훈장의 역사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 18일부터 시작된다. 무공훈장령이 제정되면서 전공을 세운 장병에게 무공훈장을 수여하게 됐다. 6·25전쟁부터 소급 적용돼 1953년 7월 27일 전쟁이 끝날 때까지 무공훈장을 받거나 대상자로 선정된 인원은 17만9000여 명이다(1954년까지 추가 심의). 이 중 육군이 가장 많은 16만2950명을 차지하고 해군(1만3038명), 공군(3343명) 순이다. 이 중 육군은 5만4000여 명, 해군은 1641명이 훈장을 지급받지 못한 상태다. 공군은 공식적으로 훈장을 모두 수여했다고 밝혔다.
 
  육군은 당시 전황을 고려해 사기 진작 차원에서 무공훈장령과 대통령내훈 2호에 따라 사단장급 지휘관에게까지 훈장 수여를 위임하고 대상자에게 임시 수여증서(가수여증)를 나눠줬다. 실제 훈장과 훈장증서는 교부하지 못했다. 1960년까지는 현역 복무자를 대상으로, 1961년부터 1965년까지는 전역자를 대상으로 훈장을 수여했다. 이후에도 무공훈장 찾아주기 운동을 지속해왔다. 2019년에는 더 시간이 없다고 판단해 특별법까지 제정하여 조사단을 구성, 무공훈장 찾아주기에 매진하고 있다.
 
  무공훈장을 찾아주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전공을 세울 당시는 국가 기록과 행정 체계가 오늘날처럼 정비되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이다. 과거 기록을 바탕으로 훈장받은 대상자를 확인하고 소재지를 파악하는 것이 어렵다. 오늘날과 같은 주민등록번호는 1968년 이후에 도입됐다. 2008년 호적법이 폐지되고, 개인정보보호법의 시행으로 개인정보를 열람하거나 제공받는 것이 더 힘들어지자 미수여자 찾기가 더 어려워졌다. 일부 지자체는 당시 호적 자료가 전시(戰時) 폭격 등으로 소실됐다. 이 경우 집성촌 등 마을 단위 탐문 활동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북(以北) 출신 미수여자 2239명에 대해서는 이북오도청(以北五道廳)을 통해 탐문 활동을 벌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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