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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격공개

北 혁명조직원과의 死生決斷 대화록 ⑦ 北 김일성 6·25 남침 전후 김익두 목사 외 수천 명 처형 이유

글 : 도희윤  피랍탈북인권연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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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성, 6·25전쟁 때 황해도 기독교 저항세력 결사항전에 경악
⊙ “천안함 테로(테러) 때 ‘차라리 솔직히 말하지’라며 량심적인 빨갱이들 분노”
⊙ 6·25는 명백히 남침
⊙ 유독 기독교 탄압 심한 北
⊙ 공산주의에 대항한 기독교의 순교투쟁, 자유통일 역사에 길이 남아야

도희윤
1967년생. 연세대 행정대학원 사회복지학 석사 / 피랍탈북인권연대 대표, 도대체 TV 대표, 한국자유전선 사무총장, 뉴라이트 전국연합 북한인권특별위원장,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 사무국장 역임

[편집자 註]
도희윤 피랍탈북인권연대 대표는 2019년 5월 16일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 내부 혁명조직원 김씨와 2014년 중반부터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도 대표는 인터뷰에서 “혁명조직 일원은 ‘김정은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방법은 그를 제거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며 또 “그는 ‘새로운 지도자가 또 독재를 하더라도, 그건 개발독재이기 때문에 지금처럼 신격화된 독재보다 낫다. 박정희 같은 사람으로 북조선을 끌고 가다 통일을 이루면 된다’고 했다”고 말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도 대표는 《월간조선》 기고를 통해 혁명조직원과 나눈 대화 내용 등을 자세히 공개하겠다고 약속했다. 도 대표가 보내온 ‘北 혁명조직원과의 사생결단(死生決斷) 대화록’ 제목의 글에는 그가 혁명조직원 김씨(닉네임 ‘최이상’)와 메신저를 통해 나눈 대화 등이 담겼다.
  세상이 거의 미쳐나가는 수준이다. 신문·방송의 사설 제목만 보아도 지금 대한민국이 얼마나 엉망진창, 아비규환인지 가늠할 수 있다. ‘아, 한국’ ‘아, 한국 대통령’ ‘아, 한국 국민’, 거의 절규 수준이다. 거기에 진보학자로 널리 알려진 고려대 최장집 교수조차 “그들 민주주의는 전체주의”라고 작심 질타를 날리고 있으니 상황이 얼마나 엄중한지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다.
 
  이런 와중에 북한 김정은은 뭔가 크게 사고라도 칠 듯 백마에 모닥불 쇼를 하고 있으니, 얼마 남지 않은 2019년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
 
  신년호에는 북한의 수많은 종교 중에 유독 기독교에 대해서는 일고의 포용력도 보여주지 않는 북한 세습왕조의 야만성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북한 아우는 황해도 신천 지역에서 벌어진 6·25 전쟁사 과정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얼핏 보면 북한 당국의 야만적 행태가 기독교회와 교인들이 자초한 것처럼 선전하는 북한식 인식에 바탕을 두는 듯 보이지만, 악마의 사악한 행동 속에서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는 데 주안점을 두었을 것이라 필자는 짐작한다.
 
 
  김일성의 초대 기독교 총회 회장인 김익두
 
북한은 신천 학살이 미군 측이 저지른 만행이라고 하지만 당시 미군은 북진을 하면서 평양을 선점하려고 했기에 황해도 신천군에는 오랫동안 머물지 않았다.
  신천 지역에서 기독교 목회 활동을 하던 김익두 목사가 북한 김일성 밑에서 초대 기독교도 총회 회장이 되어 기독교계 거두가 된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고, 공산 세력에 충성하는 것처럼 보이던 김 목사가 퇴각하는 북한 공산군에 대항해 결사항전의 순교자적 모습을 보인 것도 역사의 드라마임이 틀림없다. 미제의 앞잡이며 잔혹한 민간인 학살의 주역으로 가담한 것으로 지목되어 신천박물관에 철천지 원쑤로 전시되어 있는 김익두 목사와, 1980년 광주에서 있었다는 5·18학살 소문과 거의 흡사한 여인네 젖가슴을 도려내는 미군과 국군의 사진을 진실인 양 버젓이 전시하는 저들에게서, 전 세계를 통틀어 붉은 무리는 하나같이 사고하는 게 똑같다는 데에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이 글을 빌려 김익두 목사와 함께 순교한 신천 지역 기독교인들의 명복을 빈다.
 
  자유통일 이후 신천의 혁명박물관은 미 제국주의와 대한민국 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현장이 아니라, 공산 세력에 목숨으로 결사항전한 기독교인들의 숭고한 순교박물관으로 재탄생되어야 한다. 또한 반공·자유 인사들에 대한 천인공노할 만행을 숨기고자 조작한 희대의 대사기극이자 비극임을 널리 알리는 역사의 교육현장이 되길 바라며 이 글을 시작한다.
 
 
  6·25는 명백히 남침
 
  최: 신천 학살에 대한 북과 남의 견해가 어떤지 론쟁을 해보아야 합니다.
 
  도: 신천기념관은 북한 주민을 겨냥한 선전물이겠지만 그 고민을 잘 알고 있습니다.
 
  최: 신천에 대한 자료를 준비하여 래일 토론을 합시다.
 
  도: 알았습니다. 근데 아우님, 남침입니까 북침입니까? 6·25전쟁이 말입니다.
 
  최: 저는 증오감을 말하자는 게 아니라 학술토론을 하자는 것입니다. 명백히 남침입니다만 다른 문제도 있습니다. 래일 의제는 6·25전쟁과 신천사건입니다.
 
  도: 하하하, 무섭습니다. 살살해주시죠.
 
  최: 준비하시고요. 맞짱을 떠봅시다. 아니 사정이 없습니다. 저를 마구 조져대도 일없습니다. 길고 짧은 것은 대보아야 안다는 조선 속담 있지 않습니까?
 
  도: 아우님, 우리가 이기고 지고가 없지 않습니까? 도망가야겠습니다. 하하.
 
  최: 아닙니다. 여기서는 서로 다른 이견을 좁혀나가야 합니다. 래일의 맞짱을 위해서 오늘 그만 쉬도록 하는 게 어떻습니까?
 
  도: 하하, 알겠습니다. 편히 쉬시지요.
 
  맞짱 토론날이 밝아왔다. 여지없이 아우는 자신이 편한 시간대에 장문의 1차 토론문을 보내왔다. 사실 아우와의 대화 중에 사소한 이견들이 존재한 것은 사실이지만, 서로를 알아가고 체제변혁을 위한 혁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상호 간 이견을 잘 조율하는 것은 혁명의 실행 못지않게 중요한 과제임이 틀림없었다. 필자에게도 상당한 기술적 융통성이 요구되는 상황이었지만 그냥 부딪쳐보자는 생각으로 아우와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6·25전쟁과 신천사건
 
평양에 세워진 대표적인 기독교 건축물인 봉수교회와 장충성당의 모습.
  최: 대표님, 6·25전쟁과 신천 학살사건은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실은 우리 민족이 화해하기 어려워하는 것도 6·25전쟁의 원한과 상처를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6·25전쟁을 누가 일으켰느냐 하는 문제에서는 북과 남의 주장이 서로 다릅니다. 북에서는 북침이라고 하고 남에서는 남침이라고 하고…. 여기서 문제로 되는 것은 남과 북의 주민들이 그것을 그대로 믿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북한 주민들은 남한의 북침으로 시작됐다고 하는 것과, 남주민들은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동족상쟁이 시작됐다고 믿고 있으며, 믿으려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둘 다 근거가 있습니다.
 
  최: 남한의 근거를 들어보면, 김일성이 남한을 침략하기 위하여 쏘련의 승인을 얻어 많은 군사 장비를 보급받아 준비를 충분히 했다. 전혀 전쟁을 할 의향이 없었던 남한은, 전쟁에 대비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전쟁 개시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당했다. 후퇴를 거듭하여 락동강 방어선까지 밀렸다. 락동강 방어선까지 무너지면 마지막으로 부산인데 부산까지 점령당하면 뒤에는 남해 바다로 락동강 방어선을 고수하다 죽나 후퇴하다 죽나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필사적인 방어를 하여 시간을 얻었고 미군의 개입과 인천상륙으로 전선의 형세가 바뀌어 북으로 북상하였다. 퇴각하던 북한군의 전선이 압록강에 이르자 중공군이 참전하여 다시 퇴각하여 전쟁 시작점으로 돌아왔다. 38선 부근에서 2년6개월간 전쟁을 하였으나 승부가 나지 않아 남과 북은 유엔군 측과 중공군의 제안을 받아들여 전쟁 3년 만에 정전하였다.
 
 
  남침 유도설 기반으로 한 北 기만책
 
  최: 북한의 근거를 들어보면, 한반도와 일본은 전략적으로 대국들이 지배권을 확보해야 할 지역이었다. 특히 미국은 일본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한 데 기초하여 이제 한반도만 장악하여 친미국가로 만들면 앞으로 중국과 쏘련을 견지하는 데서 매우 유리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남한의 리승만에게 군수 장비와 전략물자들을 넘겨주어 전쟁 준비를 하게 하였다. 남한에 의한 북침이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도 만반의 전쟁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고, 38선 일대에서는 상대방의 전투력을 파악하기 위한 대소 전투들이 2년간 지속되던 상황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이날도 남한과 북한 사이에 전투가 진행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즉시에 전 전선에 걸쳐 공격을 개시하였는데, 남한군은 지역전투로 그칠 줄 알고 방심해 있은 상태였으며, 전면전이 시작되자 남한은 퇴각하고 3일 만에 서울을 장악하였다. 락동강까지 밀고 나갔으나 많은 전투 장비가 파손되고 무기도 부족하였으며, 모자라는 병력을 남한 지역에서 보충하니 정신 상태와 훈련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이때 무기와 장비를 보내주겠다던 쏘련이 약속을 어기여 무장 장비와 탄약이 도착하지 않아 락동강 방어선을 돌파할 수가 없었고…. 그다음부터는 남한의 주장과 같습니다.
 
 
  양심적인 빨갱이, 천안함 폭침에 대한 북한 내부 비판
 
천안함 폭침으로 파괴된 선체를 인양한 모습. 백령도 뒤편으로 들어온 북한 잠수정에 의해 피격된 천안함 사건에 대해, 북한 내부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는 것은 혁명조직원을 통해 처음 소개되는 내용이다.
  최: 대표님. 조국해방전쟁은 민족적 및 계급적 모순을 정의의 통일전쟁으로 해결하려는 우리 장군님의 대결단에 의하여 진행되었으며, 그 후과는 엄청났지만 우리는 대를 이어서라도 이 과업을 수행하여야 한다, 이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어디서 난 소리입니까? 빨갱이들이 솔직하지 못하고 비겁한 것은 사실입니다. 천안함 테로 때에도 량심적인 빨갱이들이 몹시 분노한 것도 차라리 (내가 그랬다) 할 것이지, 남조선 사람들의 분노만 사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민주주의 한국과 6·25 때의 한국은 다릅니다. 솔직하지 못하기는 리승만 때의 남한도 같습니다. 1948년 리승만, 요시다, 맥아더 3자 비밀회담에서 맥아더의 지시에 따라, 일본은 이제 일어나게 될 조선전쟁에서 미국의 B29 전략폭격기들이 발진하게 될 비행장을 건설하기로 하고 한국은 일본에 수만 석의 쌀을 주기로 합의 보지 않았습니까. 그래 일본에 준 호남벌의 쌀이 후에 북한 주민들의 머리 우에 폭탄이 되어 떨어지리라는 것을 남한주민들은 몰랐다 치고 리승만도 몰랐단 말입니까.
 
  만일 남한이 6·25 때의 한국으로 남아 있거나, 전두환, 로태우 집권시기의 한국으로 남아 있다면 한반도의 통일을 주도할 자격이 없습니다.
 
 
  기독교 탄압의 시작, 지하교회 존재
 
  최: 오늘은 종교 이야기를 합시다. 남한에는 어떤 종교단체들이 있습니까?
 
  도: 불교, 기독교, 천주교, 천도교, 그 외 민족 종교 등이 있습니다.
 
  최: 불교는 알겠는데 그 밖에 하나님 믿는 단체들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도: 천도교는 동학이라고 하면 아실 것이고, 천주교는 교황 아시죠? 원래 천주교에서 마틴 루터라는 독일 신부가 천주교는 썩었다고 하면서 종교개혁을 외치며 나온 것이 기독교인데, 천주교에서는 개신교라고 부릅니다. 유럽 사회에서는 구교, 신교라고도 하지요.
 
  최: 알 만합니다. 이런 생각을 해보신 적 있습니까? 북한의 종교에 대하여 이야기합시다.
 
  저는 종교에 대하여 전혀 모릅니다. 단지 사람들이 하나님, 부처님, 알라신을 믿는데, 우리나라는 하나님 믿는 사람들과 부처님 믿는 사람들만 있다 이 정도입니다. 북한 당국이 종교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한다는 데 대하여서는 다 아는 사실이고, 그런데도 북한에는 아직도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지하종교 조직들도 있습니다.
 
  도: 지하종교 조직들을 만나보신 적 있으신지요.
 
  최: 최근에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20년 전까지만 해도 종교조직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만나볼 리는 없지요. 그러나 자료로 본 적이 있습니다. 신의주에는 매우 큰 조직이 있었습니다. 또 개별적으로 믿다가 적발된 사람들도 있고요.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이상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종교조직이든 아니면 친목을 위한 사조직이든 조직하면 무조건 체포하거나 처형하지요. 그러나 개별적으로 믿는 경우 기독교는 용서가 없지만, 불교와 관련한 종교조직이나 사람들에 대한 처리는 대단히 관대하다는 것입니다. 대표님 생각에는 왜 그런 것 같습니까?
 
  도: 기독교와 수령 독재가 다른 것 같으면서도 너무 비슷하니까요. 그래서 오히려 위험하다고 보는 거 아닐까요.
 
  최: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종교에 대하여 관심 밖이기 때문에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단지 한 가지 생각되는 점이 있어서입니다.
 
 
  기타 종교에는 관대한 북한, 유독 기독교는 용납 안 해
 
신천 지역에서 목회 활동을 하고 있던 김익두 목사.
  최: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다 적발되면 용서가 없지요. 그러나 부처님께 불공드리다 적발되면 당 위원회나 보안서에 불려가서 욕이나 먹는 정도입니다. 리유가 있습니다. 1950년으로 되돌아가야 하고 또 미국 이야기를 꺼내야 합니다.
 
  도: 예, 열람하겠습니다.
 
  최: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종교탄압의 구실을 모두 미국에 돌린다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 그런 게 아닙니다. 8·15광복 이전 북 지역은 기독교 세력의 기본 중심지라고 하더군요.
 
  도: 맞습니다. 신의주 등.
 
  최: 1950년 전쟁 시기 황해남도가 특히 기독교인들이 많이 밀집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전체 수는 신의주에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밀집도에서는 황해남도라고 합니다. 특히 신천군, 삼천군은 인구의 60%가 교인들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정확한 자료입니다. 1945년 10월 10일, 공산당을 창건한 북한은 후에 야당인 신민당과 소수 종교정당을 통합하여 로동당을 만들었습니다. 로동당 안에 종교정당으로 기독교 민주당이 있었습니다. 당수로는 1950년에 김익두라는 사람입니다.
 
  북한 신천 지역에서 목회 활동을 했던 김익두 목사에 대해 북한의 아우가 처음 언급하였다. 관련 자료를 살펴보면 김익두 목사에 대한 남·북한의 이야기가 6·25 전쟁사만큼이나 다른 큰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실제 미 제국주의의 만행을 알리는 신천박물관의 경우 김익두 목사에 대해 상당 부분 할애해 설명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만큼 북한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체제를 위협한 인물이고, 기독교 수장으로서 지역 주민들과 북한 전체 신도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최: 1950년 미군과 국군이 북상하자, 김일성은 모든 주민에게 북쪽으로 피란을 가라고 지시했습니다. 구체적인 조직사업이 진행됐는데, 기독교인들이 밀집되여 있는 신천군과 삼천군에는 로동당의 지시가 40%밖에 먹히지 않아 교인들을 설복하라고 김익두를 내려보냈습니다. 김익두 자신이 물론 기독교인이지요. 김익두는 신천에 내려와서 교인들을 교회당에 모아놓고 피란을 선동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공산당 정권 밑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자면 미군이 들어와야 한다. 미군이 들어오기 전에 신천과 삼천군 구응면 일대에서 폭동을 일으켜 빨갱이 정권을 뒤집어 엎어야 한다. 그러고는 지금 미군이 들어오고 있다, 공산당은 패주하고 있다. 우리가 폭동을 일으켜 이 지역에서 정권을 장악하면 미군이 도우러 올 것이다.”
 
  사실 김익두는 이미 전에 미군 정보기관과 련계를 맺고 있었으며, 인천상륙과 동시에 폭동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김익두가 내려왔을 때에는 폭동 준비가 상당히 완료된 상태였습니다. 그것은 주민의 60%가 교인들이었고 사실상 기본적으로 김익두가 장악한 것이었습니다.
 
 
  기독교 조직의 반란
 
  최: 폭동 준비를 위하여 어떻게 했는가는 생략하겠습니다. 반공부녀회, 반공청년행동대 등 많은 조직을 만들어 내고 그 지휘를 교회가 하였습니다. 무기 탈취를 위하여 군인들을 독살하거나 유인 살해하고, 한 차량분의 총탄과 적지 않은 무기도 확보하였습니다. 드디어 폭동 준비가 완료되자 폭동을 위한 마지막 교회모임에서 교인으로 가장한 내무원이 폭동을 선동하는 김익두를 사살하였습니다. 그러자 교회에 있던 교인들이 내무원을 때려죽인 다음 그의 시체를 찢어놓았습니다. 그러고는 김익두의 시체를 안고 거리로 달려나갔습니다.
 
  폭동의 시작은 군 방송국 방송으로 그때 당시 북한의 애국가였던 동해와 천지물이라는 노래를 반주 없이 육성으로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노래는 방송국의 아나운서였던 16세의 처녀가 불렀습니다. 전주대에 매달린 스피커에서 밤 10시경에 노래가 나오자 김익두의 시체를 안은 교인들과 무장행동 대원들이 군 인민위원회, 군당청사, 군 내무서, 군 정치보위부 등 군내 정권 기관들을 포위 점거하려고 하였습니다. 다른 기관에 대한 점거는 쉬웠는데 무장인원들이 있는 보위부 내무서, 그리고 자위대가 지키는 군당청사를 점령 못 하고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군 정치보위부에는 2명의 인원이 있었고, 내무서에는 20명가량 있었으며 군당 자위대 인원은 40명에서 50명가량 있었다고 합니다.
 
 
  생생한 반란 현장
 
신천교회 교인들을 중심으로 저항조직을 만들어 총격전을 벌였다는 당시의 신천군 인민위원회 청사의 모습.
  최: 북한의 독재자는 주민들을 교양하는 자료는 모두 거짓으로 그럴듯하게 엮어대지만, 사실을 알아야 할 사람들에게는 아주 정확한 자료만을 알려줍니다. 그럼 계속 쓰겠습니다.
 
  북한의 아우는 이 대목에서 자신이 북한 당국이 정확한 사실을 알려주는대상임을 넌지시 언급하고 있다. 실제 아우는 자신이 직접 듣고 보고 느낀 점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진실 여부는 그다음의 문제이리라.
 
  최: 군 정치보위부엔 2명의 인원밖에 없었으나 악질이라는 것을 고려하여 50여 명이 몰려가 포위한 다음 손들고 나오라고 소리쳤다. 밖을 내다보니 10명 정도가 무기를 들고 나머지는 몽둥이나 농쟁기를 들고 서 있었다. 만일 건물 안으로 밀고 들어왔으면 쉽게 죽일 수도 있으나 아무런 훈련도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 소리만 치고 있었다.
 
  건물 안에는 경기관총 한 정과 자동총 한 정, 권총 두 정이 있었는데, 25세의 과장이 뛰어나가며 경기관총을 휘두르자 3명 정도가 즉사하고 4명 정도가 부상을 당하자 모두 달아났다.
 
  밤중에 당한 일이라 가만 생각해보니 내무서나 군당에서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내무서로 2명이 달려가니 거기도 70명가량 모여서 소리를 치고 있었는데 무장인원은 얼마 없고 나머지는 역시 농쟁기였다.
 
  내무원들은 무서워서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안에서 총질하였는데 이따금 쏘고 있었다. 뒤에서 달려나가며 기관총을 휘두르자 10명 정도가 즉사했고 모두 달아나버렸다. 20명의 인원으로 군당에 달려가 보니 군당 자위대와 150명 정도의 인원들이 총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때 당시 비교적 군사훈련을 받은 인원은 군당 자위대였는데 필사적으로 건물 안에서 대항하고 있었다. 자연히 25세의 과장이 내무서와 정치보위부의 지휘관이 되었는데, 많은 무장인원이 군당청사로 사격을 가하는 것을 보고 내무원들이 주춤하자 뒤에서 달려나가며 기관총을 휘둘러 혼자서 150여 명을 쫓아버렸다. 군당 자위대와 내무서의 2개 소대가량의 인원을 정비하고 긴급회의를 열었는데, 밖에 매달린 스피커에서 공산당 정권은 폭동지휘부에 의하여 장악되였고, 군 안의 정치는 교회에서 하게 되였다고 아나운서가 원고를 읽고 있었다. 그때야 상황파악을 하고 방송실로 달려가 아나운서를 체포하였다.
 
  도: 예, 계속 남겨주세요.
 
 
  3일간 계속된 즉결처형
 
청진의 한 지하교회 교인이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초상화 밑에서 기도하고 있다. 이 여성은 기독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처벌받은 뒤 행방불명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서울USA 제공
  최: 방송을 통해 폭동지휘부가 교회당이라는 것을 알고 군 방송을 통해 폭동이 실패하였으니 다음번 행동 토론을 위해 폭동지휘 성원들은 교회당에 모이라고 아나운서를 통해 방송하였다. 그다음은 교회당으로 가는 길옆에 매복했다가 길가에 들어서는 사람들은 모조리 사격하여 죽여버렸다. 밤중이라 아무것도 모르고 보위부와 내무서 군당에서 쫓겨나 숨어 있던 주모자들이 밤중에 교회당으로 찾아가다 주모자 대부분이 사살됐고, 살아남은 자는 방송을 듣지 못한 몇 명뿐이었다. 다음 날 날이 밝아서야 폭동 참가자들은 폭동이 실패했고 밤중에 많은 폭동지휘부 성원이 사살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날이 밝자 군 안과 주변 마을을 돌아다니며 어젯밤에 농쟁기를 들고 밤중에 나갔던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고 물었다. 누가 어제 폭동에 따라갔댔는지 마을 사람들이 알고 있었는데, 나갔던 사람들은 모두 교인들이었고 그것을 알려준 사람들은 당원들이거나 교인들이 아닌 마을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마당에다 끌어내여 전시법에 따라 즉결처형하였다.
 
  이 즉결처형은 3일간 계속되었는데 약 300명가량의 기독교를 믿는 농민들과 신자들, 폭동지휘부 성원들이었다고 한다. 그때 목격자의 말에 의하면 시체가 도랑에 뒹굴고 있었다고 한다.
 
 
  신천학살
 
  최: 신천에 들어온 미군은 폭동지휘부 성원들과 참가자들, 신자의 일부와 군 안에 있던 폭력 건달들로 치안대와 무궁화 무장청년단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무장조직들을 모아서, 폭동 참가자들을 처형하는 데 참가했거나 그들을 밀고한 사람, 로동당원들과 신자가 아닌 개인적 원한이 있던 사람들을 비롯한 군 정권 기관에서 일한 사람들과 그의 가족들, 한마을에서 사는 친척들까지 모조리 무참하고 잔인하게 학살하였다.
 
  최: 미군은 그들에게 무기를 제공하였고 학살 현장에 나와 지켜보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치 떨리는 만행은 102명의 아기와 520명의 아기 엄마들과 아줌마들을 군당방공호에 몰아넣고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질러 학살하였다. 이때도 미군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이것이 신천학살 만행이다. 신천학살에는 국군이 참가하였다는 기록은 없고 일부 수색대가 마을과 주변 야산을 수색하였을 뿐이라고 했다.
 
  미군이 퇴각하기까지 50여 일 동안에 신천군과 삼천군, 구응면 일대에서 35600여명을 잔인한 방법으로 학살했는데, 여기에는 신천 고급중학교 학생이었던 건달패 두목이 제일 앞장섰다고 한다. 그는 자기의 학교 녀선생까지 수일 동안 강간하고 죽였으며, 미군과 함께 남으로 나갔다가 다시 켈로부대의 성원으로 구월산 일대에 잠입하여 사람들을 랍치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청장년들에게는 손을 못 대고 주로 처녀들과 부녀자들에 대한 랍치 강간살인을 했다고 한다. 결국 신천 땅에 있는 기독교 신자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사람을 남녀노소 가림없이 모두 무참히 잔인하게 학살하였다.
 
  이 부분에는 너무나 상반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북한 교회 재건위에서 발간한 《북한 기독교 100장면》이라는 책에서는, 처형된 숫자와 방법은 대체로 비슷하지만 주객은 전혀 다른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특히 방공호에 생매장한 사건은, 전쟁 이후 북한이 1956년 농업집단화 정책으로 야산을 개간하던 중 신천지구의 폐광에서 해골로 변한 시쳇더미가 발견되었다. 이 시체들은 모두 행방불명된 반공 인사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책은 이를 미군과 국군의 소행으로 역선전하기 위해 신천 지역에 혁명박물관을 지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北, 기독교 탄압하는 이유
 
  최: 결국 김익두가 미군 첩보대의 지원을 받아 조직한 폭동은 수백명의 교인들과 나머지 모든 사람의 죽음으로 끝났고, 북한은 치안대 가담자나 폭동가담 교인들의 가족들을 후에 모두 수용소로 보냈다. 8·15광복 직후 신의주에서 일어난 학생폭동도 기독교 교회가 주도했고, 신천 대학살도 기독교 교회가 주도했다.
 
  따라서 북한 당국은 기독교 조직들이 다른 나라에서는 어떤지 몰라도 북한에서만은 대중적 폭동과 학살의 온상이라고 보고 있으며, 살생을 금한다는 불교 교리와는 다르며, 불교 신자들이 반국가 폭동을 시도한 적은 없지만, 기독교는 그 교리에 매혹돼서 많은 사람이 모여들 수 있고, 또 교회의 지도자들의 말을 신자들이 맹목적으로 잘 따르기 때문에 쉽게 무모한 폭동에로 나온다고 보고 있다. 이것이 기독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리유이다. 이상입니다.
 
  도: 신천기념관은 알고 있지만 신천 사건의 전말에 대해 깊이 있게 살펴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자료를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신천사건이 과장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어쨌든 이런 일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참으로 비극입니다.
 
  최: 참으로 비극입니다. 비극이 비극을 또 만들고 반복되는 것이 민족의 비극입니다. 가슴 아픈 일입니다.
 
  도: 그러게 말입니다. 전쟁에 착한 전쟁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다시는 이런 비극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북한의 아우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은, 북한 당국이 수많은 종교 중에 유독 기독교에 대한 탄압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 이유가, 신천 지역에서 있었던 순교적 의거(북한은 ‘반란’이라 표현)에 크나큰 충격을 받은 결과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객관적으로 봐도 동족상잔의 전쟁을 일으킨 야만적인 공산주의 세력들에 대항한 기독교 교인들의 순교투쟁은 다시 한 번 자유통일 역사에 길이 남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김익두 목사에 대한 평가도 의로운 순교자, 혁명가의 삶으로 높이 추앙받아 마땅하리라 생각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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