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戰雲의 한반도

충격증언 - 북한 핵과학자 아내가 증언한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의 실상

2006년 1차 핵실험 후 풍계리 ‘송이·칠색송어’, 김정일 진상품에서 사라졌다!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풍계리 지하 핵실험장 공사는 1960년대 시작 … 정치범 동원해 지축공사
⊙ 여러 명의 러시아 핵과학자가 풍계리 찾아 … 일부는 북한 귀화해
⊙ ‘고난의 행군’ 시절인 1997~98년 함경북도 주둔 6군단, 쿠데타 모의하다 발각
⊙ 김일성, 세쌍둥이 낳아 … 김정일이 동생 김현일을 연못에 빠뜨려 죽여
⊙ “1980년 광주 5·18 당시 북한군 100명 침투 … 귀환 도중 97명 사망”
미국의 북한전문 웹사이트인 38노스가 지난 2015년 11월 2일 찍은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 전경.
  올해 김일성 생일(4월 15일)을 앞두고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의 핵실험장에선 일찌감치 6차 핵실험 준비를 마쳤다. 핵보유 욕망에 사로잡힌 김정은과 풍계리를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트럼프와 시진핑의 만남 이후 미국 항공모함인 칼빈슨 함이 다시 한반도로 이동 중이다.
 
   전쟁의 긴장감 속에서 풍계리 핵실험장의 실상을 고발한 책이 나왔다. 저자는 탈북 작가로 풍계리 핵실험장에서 근무한 핵과학자의 아내다. 남편은 방사능 피폭으로 사망했고 그녀는 2000년 말 중국을 거쳐 남한에 정착했다. 책 제목은 《풍계리》다. 소설 형식을 빌려 팩트와 픽션을 섞었지만 픽션은 등장인물의 실명·구체적 정황을 감추기 위한 장치다. “북한에 두고 온 가족과 동료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작가 김평강(필명)은 인민군 군관의 자녀로 평양에서 태어났다. 선대가 당 간부 집안이다. 평양연극영화대를 졸업, 조선중앙방송위원회 학생소년부와 아동문학 편집부에서 근무했다. 결혼 후 남편이 일하는 풍계리와 평양을 오갔다고 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장성택(1946~2013)과 김일성종합대 동창이다. 이 대학 총장인 황장엽과는 사제지간이다. 김평강의 집에는 장성택을 비롯해 김일성대 교수인 형부 등 북한 엘리트들이 자주 모였다고 한다. 덕분에 김일성 일가의 비밀스런 속살을 곁에서 들을 수 있었다. 기자는 4월 12일 서울 광화문에서 작가를 만나 소설 속 ‘팩트’와 풍계리의 과거·현재를 들었다.
 
  — 남한에 정착한 뒤 황장엽 선생을 만났나요.
 
  “그럼요. 아버님이라 불렀어요. 제게 비서로 일하라는 제안을 하셨지만 따로 비서를 두고 계셨고 주변에 수행·경호하는 분들이 많아 사양했어요. 황장엽(존칭 생략)은 아버지나 장성택의 스승이셨어요. 또 아버지와 장성택은 친구, 장성택·황장엽은 사돈이셨죠. 그러니까 장성택 누나의 딸과 황장엽 아들이 결혼한 사이로 대단히 가까웠어요. 황장엽은 제게 ‘장성택이 후세 정권실세가 될 것이다. 그러면 북한도 개혁·개방으로 갈 것’이란 말씀을 하셨죠. 또 장성택은 황장엽에게 ‘미국이나 한국과 손잡는 방향으로 가면 북한 강경파·원로들의 오해를 받아 단칼에 잘리니까 중국식 개방으로 살금살금 교류하면서 차츰 문을 열어야 한다’고 하셨대요.”
 
장성택(왼쪽)과 황장엽. 두 사람은 사제지간이자 사돈 관계이다.
  — 만나 본 장성택은 어떤 분이셨나요.
 
  “김정남을 거의 길렀다고 들었어요. 손이 여성의 손처럼 말랑말랑하고 정이 많으셨어요. 제 볼에 뽀뽀를 하셨는데 징그럽다고 생각했었죠. (웃음) 말수가 적지만 농담을 잘하시고 아코디언(연주실력)이 귀신이셨어요.”
 
  — 왜 책을 내셨나요.
 
  “장성택과 김정남 등 북한의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던 북한 지성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어요. 핵실험으로 풍계리 산천초목은 파괴되고 방사능에 오염됐으며 인권이 짓밟히고 주민들의 삶은 기약할 수 없게 됐어요. 해를 두고 수십 년간 무너져 간 아름다운 땅과 불쌍한 풍계리 주민을 외면할 수 없어 이 책을 통해 인류에 고발하기로 했어요.”
 
  기자는 책 속에 표현된 팩트들을 골라 인터뷰를 진행했다.
 
 
  팩트1
  2006년 1차 핵실험 당시 충격적 체험
 
  그날(10월 9일) 오전 유리창 대신 비닐박막을 댄 창문에 갑자기 퍽!퍽!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창 너머 많은 새들이 내리 꽂혔다. 김평강은 “풍계리 집과 핵실험장 간 거리는 70리, 약 30km가량이지만 마치 지진이 난 것처럼 집이 흔들렸다. 밖에 나가 보니 참새와 까치, 흰눈썹이, 황금이, 양진이, 황여새 같은 새들이 창에 부딪쳐 죽어 있었다”고 했다.
 
  “처음엔 핵실험인 줄 몰랐어요. 그냥 공사를 크게 했구나, 하고 생각했지만 남편을 통해 알게 됐어요. 풍계웅담의 계곡에서 수많은 물고기들이 하얀 배를 드러내고 떠내려가는 것도 보았어요. 죽은 물고기를 건져 끓여 먹었어요. 나는 새가 땅에 떨어지고 물고기가 죽는 현상을 당시엔 이해할 수 없었죠.
 
  나중 남한에 정착해 이곳 학자들에게 물어보니 새는 초음파로 제어되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방향감각을 잃고 벽에 부딪쳐 죽을 수 있다고 하더군요. 물고기 역시 쇼크를 받을 수 있다고 해요.”
 
  작가는 당시 상황을 책에 이렇게 표현했다.
 
  〈… “누나! 누나! 새들이 죽었어요!”
 
  옥성이는 잠결에 들리는 충성이의 아우성에 눈을 떴다. 푸름이 밝아 오는 하늘에서 검은 점점들이 떨어져 내리는 것들이 보였다. 영롱한 새들이 앞을 보지 못하고 창에 부딪쳤다가 맥없이 땅바닥에 떨어져 찬란한 빛을 잃었다. …〉 (p.345)
 
  당시 풍계리 주민들은 죽은 물고기를 건져 끓여 먹었다. 하지만 혈사와 복통의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
 
  “풍계리는 송이버섯과 칠색송어가 유명해요. 풍계리 송어는 중국·일본으로 수출되는데 맨발에 밟히던 송이군락, 송이 향기와 (송이를 구울 때 나던) 자작나무 연기내음이 지금껏 사라지지 않아요. 하지만 방사능 피폭으로 송이는 오염됐습니다. 해마다 일본은 송이 수입차를 공화국(북한)에 보내 송이를 수집해요. 핵실험 기지에서 산출된 송이가 일본에 넘어간다는 것과 일본 국민이 먹게 된다는 것을 알고는 있을까요? 첫 번째 핵실험이 성공한 2006년부터 2016년 5차 핵실험에 이르기까지 북한 주민들이 풍계리 인근에서 채취한 송이버섯이 무려 수천 톤에 달합니다.
 
  칠색송어도 마찬가지예요. 빛을 받으면 비늘이 여러 색을 띤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김정일 진상 명단에 칠색송어가 빠졌어요. 방사능 오염 때문이에요.”
 
 
  팩트2
  1960년대부터 핵실험장 공사에 정치범 동원
 
북한 6차 핵실험 움직임이 포착된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
지난 3월 30일 ‘디지털글로브 38노스’가 촬영했다.
  풍계리는 백두산에서 500리 떨어져 있다. 북한에서도 가장 깊은 골짜기다. 수려한 백두산 줄기의 만탑산 깊은 산록에 핵실험장이 위치해 있다. 김평강의 말이다.
 
  “제가 처음 풍계리를 찾은 것은 1980년대 말입니다. 당시 군부대 군관들 사이에선 ‘미사일 기지’를 건설한다며 쉬쉬하고 있었어요. 그때는 핵실험 기지라는 말을 안 했어요. 나중에 수많은 탱크와 고사포들이 줄줄이 들어서는 스산한 광경이었으나 한편으론 풍계리 산천은 수줍음을 머금은 처녀처럼 아름다웠죠.”
 
  그녀는 이런 말도 했다.
 
  “풍계리 지하 핵실험장 공사는 1978년부터 본격화됐다고 할까요? 78~79년 사이 군대가 풍계구역 깊은 골짜기 안쪽을 차지하면서 원주민을 소거시켰거든요. 핵실험장 공사는 헤아릴 수 없는 인명사고로 사람이 죽어 나가기로 십 년이 하루 같았다고 해요. 하루에도 크고 작은 수십 발의 발파작업, 한 달이 멀다 하고 큰 산을 허무는 굉음이 산천을 흔들었대요.”
 
  — 공사는 누가 했나요.
 
  “군부대가 풍계리 깊은 숲속에 똬리를 튼 것은 1970년대 후반이나 핵실험장 공사는 훨씬 이전부터 시작됐다고 들었어요. 1960년대 중반부터 공사가 시작됐는데 정치범들을 동원해 A, B, C갱도의 지축공사를 벌였다고 해요. 풍계리에서 동북쪽으로 올라가면 정치범수용소가 있었어요. 그곳을 ‘16호 관리소’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허리도 펼 수 없는 사람 앉은키 높이의 반토굴에서 일생 토끼처럼 허리, 다리를 못 펴고 앉은뱅이로 살아야 해요. 새벽 4시부터 시작되는 작업은 하루도 쉴 수 없고요.”
 
  — 정치범들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나요.
 
  “저는 군 차량으로 이동하며 봤지, 대화까지 나눌 상황은 못 됐어요. (이들은) 목줄기에 살이 하나도 없고 눈이 새까맣게(퀭하게) 들어갔더군요. 아예 눈인지 굴인지 모를 정도였어요, … 얼마나 여위었던지. 이후 핵실험장 공사를 다 마치자 내막을 아는 사람은 죽이고 나머지는 다시 요덕, 온성, 정거리, 순천 등의 정치범수용소로 이감시켰다고 해요.”
 
 
  팩트3
  북한의 핵 기술은 러시아 과학자로부터 전수받아
 
  〈… 준수한 얼굴의 이 남자는 소련 과학 아카데미 물리문제연구소의 이론부장이며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러시아의 천재 물리학자 레프 란다우(Lev Landau)의 수제자였다. (중략) 어머니가 조선 여성인 유리 젤리코브 박사는 어머니의 고향 북조선에 대하여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다. …〉(p.79~81)
 
  — 책에 ‘북조선 핵 프로그램 성공을 위해 김정일은 젤리코브 박사를 점찍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젤리코브 박사는 실존인물인가요.
 
  “풍계리에 여러 명의 러시아 핵물리학자가 있었어요. 이들 이름을 조합해서 만든 이름이 ‘젤리코브’인데 러시아 하리코프대를 나온 학자를 모체로 했어요. 여름 휴양 때면 이들과 함께 해수욕도 하고 ….”
 
  — 러시아 과학자들이 풍계리에서 함께 살았나요.
 
  “아뇨. 같이 살지는 않았고 (풍계리 핵실험장에) 왔다가 평양으로 돌아가곤 했어요. 주로 평양에 거주하거나 청진 ‘외국인숙소’에 머물렀어요. 더러는 귀화한 분도 있어요. 소설 속에 ‘젤리코브’는 귀화한 분입니다.”
 
  《풍계리》에는 ‘국방과학원 원장 유리 젤리코브 박사는 현지 연구실태와 공사과정을 시찰하기 위해 수십 번 이곳을 다녀갔다’(p.17)는 표현이 나온다. 물론 ‘이곳’은 풍계리를 지칭한다.
 
 
  팩트4
  1997년 미완(未完)의 함북 6군단 쿠데타 사건
 
탈북 작가가 쓴 풍계리 핵실험장의 실상을 고발한 소설 《풍계리》 표지.
  함경북도에 주둔한 북한 군대가 6군단이다. 6군단은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 관동군을 후방에서 지원하던 부대로 군사적으로 중국 대륙과 맞닿은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으로 아사자가 속출하던 1997~98년 사이 6군단 전체가 쿠데타를 모의했다고 한다. 김평강은 “사령관 휘하 6군단 군인 모두가 충성, 충성을 맹서하며 반란을 꿰었다”고 증언했다.
 
  어느 날 새벽 5시쯤, 거사하기로 모의했지만 전날 밤 10시쯤 중앙(평양)에서 파견된 군부대가 6군단을 포위, 반란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한다.
 
  — 당시 교전은 없었나요.
 
  “없었어요. 6군단 사령부를 ‘264군 부대’라고 불렀는데 함북 경성에 있었어요. 중앙에서 온 군대가 6군단 사령부를 전격 포위했죠. 나중 들은 얘기지만 6군단 사령관이 밀고를 했다고 합니다.
 
  반란에 가담한 장교들은 한 사람도 안 남고 다 죽었고, 가족들은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어요. 6군단은 이후 9군단으로 교방(교체)됐습니다.”
 
  하루아침에 반란군이 된 6군단 가족들은 날이 밝기 전, 각지의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 이들을 수송하느라 온 시내가 발칵 뒤집혔다고 한다. 그녀의 말이다.
 
  “객차도 아닌 사면이 꽉꽉 막힌 석탄통에 반란군 아녀자들을 쓸어 넣었어요. 새벽 5시 무렵이었죠. 여자들이 머리를 풀어 헤치고 통곡하는 소리를 들었어요.”
 
  — ‘고난의 행군’을 못 견뎌 군부가 반란을 일으킨 것인가요.
 
  “그렇게 판단하고 있어요. 1990년대 아사자가 300만명에 이르렀고, 군인조차도 아사를 견디기 어려웠던 시절이었으니까. … 황장엽 선생도 당시 ‘하루 한 끼를 굶어 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북조선 사람이 아니다’고 하셨죠. 최고위층 당 간부도 끼니를 굶었고 ‘장군님도 죽을 쑤어 드신다’는 노래가 나왔을 정도입니다.
 
  그 무렵 북한 주민들은 ‘이제 올 데까지 왔다’고 탄식했어요. 황장엽 선생 가족들조차 ‘이제 다섯 끼만 더 먹으면 쌀이 다 떨어진다’고 하셨으니까. … 군인들이 영양실조로 넘어지고, 이제는 (정권) 뒤집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죠. 6군단이 반란을 일으킨 1997~98년 사이가 최악이었어요.
 
  당시 중국으로 30만명이 탈북했고 이 중 남한에 3만명이 들어왔어요. 평양 지하철이 거지들로 꽉 찼는데 방법이 없었습니다. 훗날 장성택과 황장엽이 똑같은 얘기를 했어요. ‘남한이 (2000년 당시 햇볕정책으로) 돈을 안 줬다면 북한은 벌써 망했을 것’이라고. 북한 주민들도 6군단 반란사건을 보고 동정심이 있었어요. ‘저게 성공했더라면 좋았을 걸 …’ 하고.”
 
 
  팩트5
  방사능 피폭으로 고통 받는 풍계리 주민과 핵과학자들
 
인터뷰를 하고 있는 탈북작가 김평강의 뒷모습.
  〈… 죽은 연구사(핵과학자·편집자 註)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한동안 말없이 작업하던 연구원들도 곧 정신질환을 일으켰다. 감정교감장애와 우울증, 심한 공황장애를 일으켜 쓰러지고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고 화를 내는 등 인격이 파괴되어 다른 연구사로 교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연구사의 아내들은 불임으로 고생하고 심지어 기형아를 출산하는 불행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 (p.352)
 
  — 핵과학자의 방사능 피폭을 직접 목격했나요.
 
  “핵실험 이후 갱도 안에 들어가 연구하던 연구사들과 인부들이 대거 피폭됐어요. 남편도 그때 피폭된 것 같아요. 그이를 면회하러 휴양소에 간 기억이 나요. 한겨울이었는데 폭설이 내린 깊은 산 중턱에 병원 푯말도 없이 격리된 공간이었어요. 컨테이너 같은 깨끗한 병실에 환자가 1, 2명씩 있었습니다. 남편이 저를 병실마다 데리고 가서 아내라고 소개했지요.
 
  남편이 옷을 벗는데 몸에서 비늘 같은 게 후두두 떨어지더군요. 또 욕창에다 살이 썩어 내리고 있었어요. 엉덩이 뼈가 드러날 정도였고 살갗에 겹겹이 고름이 차 올랐어요. 갱도에서 쓰는 공구를 불에 달궈, 그걸로 고름을 뽑았어요. 숨이 멎는 아픔을 참고 누렇게 뜬 욕창의 썩은 부위를 떼어 내는 광경을 지켜보기란 ….”
 
  — 풍계리 주민들은 방사능 피폭의 영향이 없었나요.
 
  “차츰 풍계리에도 이상한 병이 돌았어요. 가장 많은 병은 폐암과 중풍이었는데, 뇌졸중(중풍)으로 쓰러지거나 반신불수가 된 사람이 많았고 돼지고기를 먹거나 발라서 치료하는 과정에서 ‘화기’라는 토질병이 생겨 주민들 사이에 퍼져 나갔습니다.”
 
  책 《풍계리》에는 이런 표현도 나온다.
 
  〈… 영문 모르게 전립선과 성기능 부전으로 고생하다가 자살하는 청년들, 노인들이 심근경색으로 마비증상을 일으켰고 유행성관절염과 유행성간염, 간경변, 뇌출혈로 서서히 쓰러졌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 누구도 그 까닭을 알지 못했다. …〉(p.353)
 
  — 주민들은 핵실험 사실을 몰랐고, 피폭도 몰랐다는 것인가요.
 
  “풍계리 깊은 수림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원주민들은 몰랐을 겁니다. 각종 발파 소리만 듣고선 알 수 없었을 거예요. 핵실험장 주변에는 겹겹이 초소를 세워 외부 접근을 차단했고요. 책을 쓴 이유도 그런 풍계리 실상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팩트6
  김정일은 세쌍둥이의 장남이었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핵무기 병기화 사업을 지도하는 장면이라고 《노동신문》이 지난 3월 9일 공개한 사진. 김 위원장 앞에 놓인 구형(球形) 물체는 핵폭발 장치로 추정된다.
  김평강은 “장성택과 아버지에게 들은 얘기”라며 김일성이 세쌍둥이를 낳았는데 첫째가 김정일, 둘째가 김현일, 셋째가 김봉일(이름을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했다)이라고 주장했다.
 
  “엄마 김정숙은 둘째(김현일)만 싸고돌았고, 엄마사랑을 독차지했대요. 작고 소심한 첫째(김정일)에 비해 성격이 대틀이고 안하무인격인 둘째는 동무이면서 라이벌이었다고 합니다.”
 
  1940년대 말로 추정되는 어느 무더운 여름날, 김정일은 평소 자신에게 대들던 동생 김현일을 정원 연못에 빠뜨려 죽여 버렸다고 한다. 엄마 김정숙은 충격을 받아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1949년 가을 김정숙은 딸 김경희(장성택의 아내)를 낳은 뒤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말이다.
 
  “세쌍둥이 이야기는 북한 내부에서도 극소수만 아는 얘기입니다. 김현일이 물에 빠져 죽었을 때가 8~9살 무렵이었을 겁니다. 김경희가 태어나기 직전이라 들었어요.
 
  세쌍둥이 중 막내는 러시아에서 자랐다고 해요. 김일성이 스탈린하고 힘을 합쳐 정권을 잡았잖아요. 그래서 스탈린에게 셋째를 맡겼는데 나중 교회 목사가 되어 북한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김일성을 회개시키려 셋째가 엄청나게 노력했다’는 얘기를 황장엽 선생에게도 들었어요. 셋째는 아직도 생존하고 있답니다. 저는 그가 남한에 있는 줄 알았어요. 원래 김일성 집안이 기독교 집안이잖아요. 이 말을 듣고 누가 저더러 미쳤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런 (세쌍둥이) 얘기를 분명 (장성택·황장엽에게) 들었어요.”
 
  그래서인지 북한 사회가 유독 세쌍둥이에 집착하는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고 한다.
 
  “누가 세쌍둥이를 임신했다고 하면 산골이든 섬이든 ‘직승 비행기’(헬리콥터)로 날아갑니다. 그러곤 평양산후원에 후딱 모셔다가 출산시켜서 그 애들을 6개월 동안 잘 키워서 돌려보내요. 세쌍둥이에게 은장도, 은반지를 선물하고 출생과정을 기록영화로 만들기도 해요. 북한에선 세쌍둥이가 숱하게 돼요.”
 
 
  팩트7
  광주 5·18 당시 북한군이 침입했다?
 
북한 대성산 혁명열사릉 모습.
  김평강은 소설 《풍계리》에서 ‘통일전선부 101호 대남연락소 수장을 맡고 있는 유철용이 일당백의 전사 100명을 이끌고 광주로 내려갔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이 주장을 “아버지와 장성택 친구들이 나눈 대화를 통해 듣게 됐다”고 했다.
 
  〈… 식민지 파쇼정권에 반대하여 5·18 광주 인민봉기의 시위 현장으로 남조선 혁명가들의 투쟁을 도와 간다고 하면서 기세충전하여 떠났던 영웅들이었다. 통일전사들은 국방군에 의하여 발각이 되었다. 유철용은 긴급후퇴 명령을 내렸고 무선을 통하여 조선인민군사령부에 퇴각의사를 밝혔다. (중략) 미처 인민군 복장으로 갈아입지 못하고 남측 복장으로 복귀하고 있었다. 당시 북조선 제8군단이 시험포 사격훈련을 하고 있었는데 복귀하던 그들을 지도간부 3명만 빼고 모두 사살하였다. …〉(p.90~91)
 
  — 광주 5·18 당시 북한군이 내려왔다는 설이 있지만 확인된 적은 없습니다.
 
  “아버지와 장성택의 친구들이 나눈 이야기를 들었어요. 김일성종합대 교수인 제 형부도 같은 이야기를 하셨어요. 북한 내부에선 100명의 전사들이 광주에서 작전을 마치고 귀환하다 오인사격으로 죽고 3명만 살았다고 알려졌지만, (북한 당국이) 실상은 일부러 죽였다고 해요. 이남에 갔다 온 것이 알려지면 안 되기 때문이죠. 그래서 사격훈련을 조작해서 죽인 것이에요.
 
  그러나 죽은 사람 시신을 평양의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두고 영웅칭호를 수여했어요.”
 
  — 혁명열사릉에 간 적이 있나요.
 
  “학창 시절, 혁명열사릉에서 글짓기대회가 열렸는데 제가 ‘청소년 백두산상(賞)’을 탔어요. 그때 (5·18 전사자) 묘비명을 봤지요. 5·18 당시 《노동신문》에 ‘광주에 인민봉기가 나 전두환이 진압군에게 환각제를 먹여 사람을 짐승으로 보게 해서 임산부의 배 안에 손을 넣어서 태아와 밸(작은 창자)을 던졌다’고 연일 보도했고, 시위하는 모습도 TV로 방영했는데 그 무렵 글짓기 대회가 열렸던 거죠.
 
  (글짓기) 대회 시작 전에 ‘남조선 사람들은 어려움 속에서 지도자를 잘못 만나 고생하는데 우리는 얼마나 잘살고 있느냐’는 내용의 추도식을 가진 것으로 기억해요.”
 
  — 열사릉 묘비에 ‘광주’나 ‘5·18’ 같은 글귀가 있던가요.
 
  “아뇨, 그런 글은 없었지만 영웅이라는 칭호가 있었어요. 보통 북한에서 죽은 이들에게 ‘노력 영웅’이란 칭호를 붙여요. 그런데 전투해서 죽은 이는 ‘공화국 영웅’이라 부릅니다. 이들 묘비에 ‘공화국 영웅’이라 적혀 있었어요.”
 
  — 6·25 때 전사자의 묘비 아닌가요.
 
  “아뇨. 남조선에서 싸우다 돌아온 사람들을 묻었다고 하더라고요.”
 
  소설 《풍계리》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 전우들을 다 잃고 겨우 목숨을 부지한 세 사람의 영웅에게 화정초대소에서는 공화국 영웅 칭호를 내신하였다. 그들은 지금도 대남사업부와 통일전선부에서 수장으로 살아 있다. …〉 (p.91)⊙
 
장성택과 언더그라운드 밴드 ‘택성악단’
 
  김일성대 비밀 예배모임 발각돼 일부 투신
 
  장성택이 아코디언 연주를 잘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90년대 ‘택성악단’이란 청년가무단을 조직한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작가 김평강에 따르면 ‘택성악단’은 정치범수용소를 방문, 반당·반혁명죄로 체포된 정치범들을 위로했다고 한다. 김평강의 말이다.
 
  “오래된 정치범 중에는 거물급 인사도 있었다고 해요. 1970년대 정치범수용소를 방문했던 가까운 친지의 말씀에 따르면, 어느 수용소에 소설가 한설야와 안막·최승희 부부가 생존해 있었다고 해요. 그만큼 외부와 차단된 폐쇄적인 곳이지요.”
 
  김정일은 ‘택성악단’의 존재를 듣고 대로(大怒)했다. 이름만 듣고도 ‘택성단’이 ‘장성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택성악단은 겉으론 음악단 성격으로 결성됐으나 자유로운 영혼을 기리는 모임이었다. 찬송가를 각색해 서정가요들을 연주했다. 일종의 언더그라운드 밴드였다.
 
  김정일은 즉각 택성악단을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장성택은 제13차 사회주의청년학생축전단을 이끌고 단장으로 중국을 방문하고 있었다. 체포명령이 떨어진 날, 택성악단의 핵심 멤버들은 김일성대 건물 22층 옥상에서 비밀 예배모임을 갖고 있었다.
 
  북한 정치보위부가 이들을 포위하자 일부 택성단 간부들은 옥상에서 투신, 자진했고 나머지는 전원 총살됐다. 김평강은 “총살된 이들 중에 10대만 10명이라고 들었다. 사라진 단원 수가 40여 명에 이르는데 이 사건은 아직도 비밀에 부쳐졌다”고 했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1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박혜연    (2018-05-24) 찬성 : 82   반대 : 35
그래서 오늘 풍계리 핵실험장이 완전 폭파폐쇄했도다!!!!!

202105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2020년4월부록
정기구독 이벤트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