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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최초 만화영화 제작자 장영환은 왜 처단자 가족이 됐나

“김정일, 독립군에 돈 대준 장인 ‘처단자 가족’으로 낙인찍어”

글 : 신관복  장영환 며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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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 전 탈북, 《월간조선》이 보도한 공작원 왕 사장과 인연
⊙ 아버지 장영환, 외할아버지 이력 때문에 흥행 만화영화 연출가 자리 빼앗겨
⊙ 어머니, 김정일 지시로 피아니스트 지위 하루아침에 잃어
⊙ ‘처단자 가족’에 이어 ‘탈북자 가족’으로 낙인 찍힐 북의 가족 생각하면 눈물
  2016년 11월 30일 한 통의 메일이 왔다. 기자가 쓴 ‘북한 정찰총국의 미군 수륙양용 장갑차 밀수 계획/정찰총국 5국(해외정보국) 공작원 왕 사장, 돈에 눈먼 국내 사업가 포섭!’이란 기사(《월간조선》 12월호·11월 17일 발간)를 읽었는데 만나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신분도 밝히지 않은 데다, 만나려는 이유도 적혀 있지 않아 답 메일을 보내지 않았다. 며칠 뒤(2016년 12월 11일) 또다시 메일이 왔다. 자신이 기사에 나오는 왕 사장을 잘 알고 있어, 대화를 한번 나누고 싶다는 것이었다. 기자는 그런 이유라면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답을 했고,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2016년 12월 29일 예약해 둔 광화문 한 음식점에서 그와 만났다.
 
  그는 진한 북한 말투로 자신을 탈북한 지 10년이 된 장○○라고 소개했다. 기사에 나오는 왕 사장의 사업과 그의 해외생활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는데 그에 대한 내용이 자세히 보도돼 놀라 연락한 것이라며 기자와 만난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2시간 가까이 대화를 하면서 그가 북한 최초의 만화영화인 〈금도끼와 쇠도끼〉를 제작한 장영환씨의 아들임을 알게 됐다.
 
 
  아버지 장영환
 
장씨는 북한 최초의 만화영화인 〈금도끼와 쇠도끼〉를 제작한 장영환씨의 아들이었다. 사진은 장씨가 직접 그린 아버지 초상화다.
  장씨는 본인이 유명인사의 아들임에도 탈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승승장구하던 부친이 김정일에게 하루아침에 ‘팽’당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기사화해도 되느냐고 물으니,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글솜씨가 있는 본인의 아내가 자신의 이야기를 쓰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편집장에게 보고하니, 추진하라고 했다. 다음은 그의 아내인 신관복씨가 2017년 1월 10일 남편의 입장에서 써 보내온 글이다.
 
  서울, 우리 세 가족이 이 땅에 온 지 꼭 10년이 되었다. 우리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서 조금 나가면 한강이 흐르고 우리 집 13층에서 저 멀리 바라보면 남산타워가 보이는데 처음 서울에 왔을 때에는 한동안 한강을 대동강이라 했고 남산타워를 주체탑이라 불렀다가 정정하곤 했다. 36년 동안 살아온 평양 곳곳의 지명들과 모습들이 금방 하루아침에 잊힐 리 만무했다. 그래도 지금은 그냥 내 나름대로 반 서울 사람 되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우리 세 식구는 서울 와서 10년을 살았다. 강산이 변하는 그 나날 동안 우리 세 식구가 단 하루도 떠올리지 않은 적이 없는, 단 하루도 잊어버린 적이 없는 그것은 이북에 있는 가족들 생각이었다. ‘이산가족.’ 이 뼈아프고 가슴 아픈 말은 결코 우리가 서울서 산 10년 동안에만 가슴에 사무친 말이 아니었음을 여기 와서 새삼스럽게 깨달았고 그 아픔은 이미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기 전 38선이 그어져 남과 북으로 오도 가도 못하게 된 그 시절부터 죽는 날까지 어떤 이들의 한생 전부에 걸쳐 마음속 한구석에 자리한 아픔이었음을 절감했다.
 
  평안북도 신의주 출신인 아버지 장영환은 그림 재주를 타고난 분이었다. 아버지는 광복 전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그야말로 야생에서 동물들이 살기 위해 생존경쟁하듯 이리 뒹굴, 저리 뒹굴며 자랐다. 땔감이 없어 고향 가까이 흐르는 압록강에 떠다니는 뗏목의 껍질을 벗겨 내는 게 일이었다. 아버지는 형과 함께 그런 위험천만한 일을 수도 없이 반복하면서도 그림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다.
 
  아버지의 낙은 뾰족한 돌멩이를 붓 삼아 땅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수탉, 강아지 등 보이는 족족 땅을 도화지 삼아 그리곤 했다. 아버지는 광복 후 신의주경제전문학교 수료 과정에서 자질을 인정받았다. 이는 평양미술대학 입학이라는 넓고 탄탄한 인생의 첫 주로에 들어서는 자양분이 됐다. 대학 졸업 후 본교의 교원으로 3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던 아버지 장영환은 1958년 조선예술영화촬영소 만화영화제작단 연출가로 일했다. 이때 평생의 반려자(伴侶者)를 만났다. 바로 평양음악무용대학 피아노과를 나와 조선예술영화촬영소 교향악단 피아니스트였던 조태란이었다. 조태란 여사는 나의 어머니시다.
 
장영환씨는 북한 주민 모두가 사랑하고 좋아했던 만화영화 〈소년장수〉를 제작, 승승장구했다. 북한 사람들은 〈소년장수〉가 방영되는 시각이면 염치불구하고 TV가 있는 집에 미리부터 가 앉아 시청시각을 기다리곤 했다고 한다.
  부모님을 떠올리면 한 가지 떠오르는 아름다운 기억이 있다. 지금의 부인과 대학 시절 학과정의 필수코스였던 대학생교도대라고 하는 군 복무를 80미리 포병부대에서 6개월간 같이했는데 어느 날 저녁에 단체로 TV를 시청하는 시간이 있었다. 당시 TV에서는 〈버들그네〉라는 만화영화가 나오고 있었다. 만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가는데 연출과 영화문학, 책임미술, 모두 장영환이었다. 같이 시청하던 대학동기들은 나와 내 아내에게 우레와 같은 손뼉을 쳐줬다.
 
  아버지는 북한 만화영화계에 한 획을 그은 분이다. 북한의 최초 만화영화 창시자로서 첫 만화영화인 〈금도끼와 쇠도끼〉, 김일성이 청소년 시절 어린아이들에게 들려주었다던 동화를 만화로 각색한 〈나비와 수탉〉을 비롯하여 〈두 장군 이야기〉 〈코끼리와 곰〉 〈영리한 너구리〉 등 100여 편의 만화영화를 창작했다. 북한 주민 모두가 사랑하고 좋아했던 만화영화 〈소년장수〉의 위력은 대단했다. 텔레비전이 없는 집 애들과 어른들은 〈소년장수〉가 방영되는 시각이면 염치불구하고 TV가 있는 집에 미리부터 가 앉아 시청시각을 기다리곤 했다. 하물며 수다 떠는 시간에 50부작인 이 만화영화에서 나오는 캐릭터들의 운명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부정 캐릭터였던 ‘호비’에게 북한 영화배우들에게 수여하는 최고의 칭호인 인민배우라는 명칭을 붙여주기도 했다. 그만큼 북한 만화영화는 인기가 있었다. 북한에서 만화영화는 김일성 일가를 우상화하고 찬양해야 하는 예술영화, 드라마와 달리 정치적 내용을 주제로 하지 않아도 돼 창작가가 자기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아버지에게 만화 제작은 꼭 맞는 옷과 다름없었다.
 
  아버지는 1972년 당시 문화예술계를 총괄하던 김정일에게 직접 공훈예술가의 칭호를 수여 받았다. 아버지는 서구권 나라에 만화를 수출하는 데도 앞장섰다. 그야말로 60년대부터 80년대 중반까지 승승장구했다. 아버지의 위상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시점에 간부사업에서 낙선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음으로 양으로 이유를 알아봤고, 어머니의 계급 성분이 ‘처단자 가족’으로 분류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된서리를 맞은 것은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평양음대 피아노과 출신으로 조선예술영화촬영소 교향악단 피아니스트로 우아하고 도도한 자리에 있던 어머니는 문학예술계에서 출신 성분이 불건전한 자는 선동선전의 기수인 예술인의 대오에 있을 수 없다는 김정일의 지시로 하루아침에 피아니스트의 당당한 자리를 잃었다. 공부를 잘했던 나도 일류대 진학이 되지 않았다. 지역 전체에서 1등을 해도 최종 면접에서 탈락하기 일쑤였다. 나보다 공부 못했던 친구들이 떵떵대는 것을 보면 서러웠다. 탈북을 결심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처단자 가족’이 된 이유
 
‘처단자 가족’이 되면서 평의대병원 의사인 이모를 제외한 가족 모두는 광산이나 농촌으로 추방됐다. 그곳에서 시시각각 불온분자로 의심받고 툭하면 사상검열의 비판무대에 올려져 모욕적인 인신공격의 발언을 일상으로 들으며 비참하게 살다 세상을 떴다.
  나의 어머니가 ‘처단자 가족’으로 분류된 것은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은 외할아버지(조인규)의 경력 때문이었다. 외할아버지는 광복 전 세브란스의전(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나온 의사였다. 광복 전 3·1운동이 있던 그해에 입학, 1925년에 졸업했다. 세브란스의전은 미국 선교사에 의해서 설립된 의학전문학교라 졸업생들을 전국 각지의 선교사병원에 파견했다. 외할아버지도 고향인 평안북도 선천군에 있는 선교사병원인 ‘미동병원’에서 근무했다. 실력이 출중했던 외할아버지는 나중에 개인병원을 차려 광복 전에는 돈도 꽤 많이 벌었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황해도 재령 나무리벌의 만석꾼 정씨의 딸이었다. 선천군에서는 그야말로 대단한 유지(有志)였다.
 
  광복이 되고 나서 이북에 소련군이 들어오고 공산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소위 그들이 말하는 기본 계층에 속하지 못하는 지주, 자본가들과 관리들, 그리고 재산깨나 있던 사람들은 이남으로 가야 할지 말지 갈팡질팡했다. 스물둘에서 갓난아이까지 아이들이 올망졸망 달린 가장이었던 외할아버지는 월남의 결단을 못 내리고 있었는데 이 와중에 전쟁이 터졌다. 온 강토가 전쟁의 참화에 휩싸여 도대체 왜 이 나라 백성이 이런 난리통을 겪어야 하는지 분간하기도 전에 수많은 죄 없는 사람들이 어딘가에서 죽었다. 날마다 라디오를 들으며 전세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온 신경을 가다듬어 판단하려고 애쓰던 어느 날 밖에서 의사선생님 찾는다는 소리에 ‘왕진 청하러 왔는가?’ 하며 집안 평상복 차림으로 대문 밖을 나섰던 외할아버지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 가문의 비극은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후에 들은 바로는 퇴각하던 인민군들이 곳곳에서 식자깨나 있고 재산깨나 있던 사람들을 밖으로 불러내어 “우리랑 갈 거야? 안 갈 거야?” 물은 뒤 안 간다고 하면 근처 어딘가로 끌고 가서 무자비하게 죽이든지 아니면 강제로 끌고 가다가 죽였다고 한다. 외할아버지의 죽음은 ‘처단자 가족’이라는 주홍글씨로 남아 그들의 운명을 죽을 때까지 괴롭혔다. 김책공업대학 교수로 있던 첫째 외삼촌과 평양의대병원 소아과 의사였던 이모, 그리고 황해제철소 기술직으로 있던 셋째 외삼촌, 지방 어느 대학교 교수였던 작은이모를 비롯한 온 형제·자매에게 찾아온 운명의 소용돌이였다. 평의대병원 의사인 이모를 제외한 가족 모두는 광산이나 농촌으로 추방됐다. 그곳에서 시시각각 불온분자로 의심받고 툭하면 사상검열의 비판무대에 올려져 모욕적인 인신공격의 발언을 일상으로 들으며 비참하게 살다 세상을 떴다.
 
  나는 서울에 온 후 2년간 연세세브란스병원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 외할아버지가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했다는 이야기가 생각나, 주치의에게 당시 졸업생들 명단을 어떻게 하면 확인해 볼 수 있는지 물었다. 주치의의 도움으로 졸업생 명단을 확인했다. 명단에는 정확히 적혀 있었다. ‘조인규, 1900년생, 1919~1925년 마취학과 수료.’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듣던 역사적 사실을 서울에서 직접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외할아버지는 독립군에 돈 대준 듯
 
  어머니는 외할아버지의 이력 때문에 승승장구하던 아버지가 피해를 보는 것을 상당히 미안해했다.
 
  “당신이 원하면 시원하게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어줄게요, 나 때문에 그 좋은 데 못 가서 되겠소? 우리 아버지 때문에 간부사업 안 된다고 하는데 내가 어렸을 때 두루마기에 각반 차고 드나들던 그 많은 사람 나중 우리 어머니한테서 들어보니 뭐 만주에서 독립군 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얘기도 있는데 우리 아버지 독립군에 돈 대주었음 주었지 무슨 죄가 있어 인민군에게 처단될 사람은 아니오. 아마 무슨 청년단인가 그런 막돼먹은 젊은 놈들한테 당했다는 소문도 있소.”
 
  아버지는 조금도 처가를 원망하거나 중앙당 선전부에 간부로 가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천성으로 좋아하는 그림과 만화를 계속해서 할 수 있는 데 대한 다행스러운 마음으로 물론 처가의 안 좋은 이력으로 젊은 후배들에게 계속해서 흥행한 만화영화의 연출과 책임미술가 자리를 뺏기기 일쑤였지만 그다지 깊은 회한도 없이 만 60세 되던 1990년 5월 31일 떳떳하게 퇴직의 날을 맞이했다.
 
  최근 아내는 10년 전 읽었던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를 두 달 동안에 걸쳐서 다시 읽었다. 연해주에서 만주로, 만주에서 평양, 평양에서 서울, 서울에서 경남 하동과 진주까지 거침없이 오가던 일본강점기 때가 왠지 헛헛하게 다가왔다고 한다. 또 소설의 제일 마지막 장면이 왠지 쓸쓸하게 읽혔단다. “만세! 우리나라 만세! 아아 독립 만세! 사람들아! 만세다!” 두루마기와 모자는 어디다 벗어던졌는지 동저고리(남자가 입는 저고리) 바람으로 덩실덩실 춤추며 나루터에서 마을 길로 올라오며 장 서방이 하는 말이다. 그 해방으로 장장 20권의 대하소설은 막을 내렸는데….
 
  부인과 함께 아들을 데리고 중국의 선전공항에서 캄캄한 하늘을 바라보며 과연 이 길이 옳은 길인지, 우리 세 식구의 탈출로 인해 ‘처단자 가족’에 이어 ‘탈북자 가족’으로 또다시 낙인찍힐 평양의 내 가족의 그 지긋지긋한 가족문건에 대해 생각했다. 나중에 내 가족의 후손 중 그 누가 또 나와 같은 회상을 하며 선대의 탈출로 하여 자기들의 부모나 형제들이 겪은 암담한 이야기를 가슴 아프게 펼쳐놓는다면 이것은 얼마나 큰 죄악이 될까? 춘하추동 사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오니 엄혹한 겨울은 때가 되면 가고 화창하고 아름다운 봄은 반드시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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