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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동의 인간탐험

신은미보다 더 북(北)을 사랑했던 김요한씨의 고백

나는 그들의 위악을 보았고 신은미씨는 그걸 보지 못했다

글 : 김성동  월간조선 기자  ksdh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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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국립교향악단 유럽 공연, 에릭 클랩튼 평양 공연 무산은 한국 방송사 협찬 못 얻었기
    때문
⊙ 북한 외교부상 박명국과 호형호제. 런던에서 만난 태영호 공사는 젠틀하고 합리적인 성품
⊙ “보통강 유원지에서 북한 대학생들은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를 불렀다”
⊙ 공항 주차비가 없어서 주변 도로를 맴돌아야 했던 북한 외교관
⊙ 김정은 집권 후 북한 지도층의 미래에 대한 불안 더 커져
⊙ 저장 매체의 초소형화가 급속한 북한 변화 불러
⊙ 북한 해동위 간부들은 북한 내 자본주의를 숭상, 전파하는 첨병
  그는 한때 2014년 11월 북한에 대한 긍정적 발언으로 ‘종북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재미교포 신은미씨보다도 더 북한을 사랑했다. 사랑했으므로 2006년 9월부터 3년여 전까지 30여 차례 북한을 다녀왔다. 외국 국적의 교포 신분이었다. 어쩌면 그는 북한을 자유롭게 방문하기 위해 뉴질랜드로 이민을 떠났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연극 기획자로, 음반 제작자로 30대 중반인 90년대에 벤츠를 끌고 다닌 성공한 엔터테인먼트 사업가였다. 감성적이었던 그는 99년 아이들이 스무 명 넘게 죽은 ‘씨랜드 화재’로 아이를 잃고 한국을 떠난 국가대표 필드하키 선수 출신 부모가 훈장까지 반납하고 ‘남은 아이를 위해 이민을 떠난다’는 보도를 보고 이민을 결심했다. 그가 한국에서 만든 마지막 음반은 가수 강산에씨의 〈연어〉였다. 2000년에 그는 뉴질랜드로 이민을 떠났다.
 
  얼마 후 호기심과 동포라는 감성에 끌려 주 호주 북한 대사관에 전화를 했고 벤츠를 끌면서도 주차비를 걱정하고 소매가 해진 와이셔츠를 입은 북한 외교관을 호주에서 만났다. 그 외교관은 지금 북한 외교부상인 박명국이다. 그는 박명국의 도움으로 잔뜩 호기심을 지닌 채 2006년 9월 북한 정권 창건일인 이른바 ‘9·9절’에 맞춰 북한을 방문했다.
 
  그때 그곳에서 생각했다. “나이가 들면 아내와 함께 대동강을 거닐며 이곳에서 살리라”고.
 
북한이 김요한씨에게 보낸 초대장.
  그것을 시작으로 그는 북한에서 사업에도 투자했고 북한 국립교향악단의 유럽공연, 에릭 클랩튼의 평양 공연 등을 추진했다. 그 과정에 런던에서 이번에 탈북한 태영호 공사도 만났고 런던 주재 북한 대사관도 방문해 봤다. 평양에서는 동평양대극장 정중앙에 앉아 뉴욕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회를 감상하기도 했다. 그 정중앙에 앉은 모습이 한국 MBC와 영국 BBC 등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그 대가로 미국, 영국, 호주, 한국 등을 오갈 때 그는 공항에서 2~3시간씩 조사를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야 했다.
 
  지금은 회한뿐이다. 감성적인 그였기에 그 회한은 너무 아프다. 너무 북한을 많이 방문한 탓인가. 위선과 억압이라는 북한의 본질을 보고 말았다. 북한에 투자한 사업은 애초 수익을 기대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다 치더라도 마음으로 입은 상처가 너무 크다.
 
  그는 그동안 북한을 오가며 보고 느꼈던 일들을 책으로 낼 생각을 했지만 지금 당장 출판할 생각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래서 기자의 인터뷰 요청을 몇 차례 거부했다. 결국 그는 가명(假名) 사용을 전제로 기자와 만났다. 북한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것은 상관없지만 남한에서의 활동이 부자연스러워지는 것을 염려한 까닭이었다. 그는 북한 방문 시 김기남 노동당 비서와 찍은 사진, 박명국 외교부상 가족과 찍은 사진 등을 제공했다. 북한이 그에게 보낸 초청장과 그가 참석한 연회에서 제공한 칠면조구이 등이 적힌 차림표까지 제공했다. 이만하면 그가 북한을 30차례 이상 다녀온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김요한이라는 이름은 그의 가명이다.
 
 
  리을설의 셋째 사위 박명국과의 만남
 
북한 ‘9·9 절’ 기념식에 참석해 중앙에 앉아 있는 김요한씨. 오른쪽이 해동위 김관기 국장이다.
  — 북한에는 왜 가고 싶었습니까.
 
  “이민 이후 상당히 빨리 시민권을 취득하게 되었습니다. 대략 3년 만에 받았던 것 같습니다. 시민권 신청 시기부터 시민권이 나오면 제일 먼저 북한에 가 보고 싶었습니다. 이념, 사상 등에 관한 제 스탠스는 확립된 것이 없고요. 그저 단순한, 순전히 제 개인적 호기심의 발로였다고 할 수 있는데요. 그냥 북한, 평양이 어떤 곳인지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지요. 북한 방문에 관한 길을 찾다가 호주 캔버라의 북한 대사관에 전화를 하게 되었고 당시 전화를 받은 사람이 박명국이란 공사 직함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그게 북한 방문의 첫걸음이었습니다.”
 
  — 뉴질랜드에서 호주로 가서 박명국을 만난 거네요.
 
  “네. 제가 전화로 북한에 가 보고 싶다고 하자 박명국 공사는 ‘얼굴도 안 보고 어떻게 방문을 주선해 줄 수 있냐’고 하더군요. 그래서 얼굴을 보면 북한을 여행할 수 있게 해 주겠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되묻고는 내친김에 다음 날 바로 캔버라로 날아가 버렸죠. 박 공사는 저의 이런 즉각적 행동에 상당한 감흥이 있었던 것 같고 …. 하여간 캔버라 공항에 마중나온 박 공사와 2박 3일간 함께하며 꽤나 친밀감을 높였죠. 흔히 한국 사람들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형, 동생 사이가 되었던 거죠. 이후 제가 사는 뉴질랜드로 초청해 한 주간 가족들과 같이 지내기도 했고 제 딸과 박 공사의 딸 은별이와는 서로 메신저를 주고받는 등 아주 가깝게 지냈죠.”
 
  — 박명국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저는 처음에 이 사람이 그냥 단순한 외교관인 줄만 알았습니다. 사실 북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체에 대해 말이 없거든요. 이름만 알았는데 혹시나 싶어 포털 사이트를 검색해 보고는 사실 깜짝 놀랐습니다. 그때 제 감정은 ‘와! 높은 사람이구나 …’ 하는 것이었죠. 작년에 사망한 리을설이 장인이었죠. 리을설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러졌죠. 리을설은 김일성의 혁명 동지로 1995년에 원수가 됐고 김정일의 호위 사령관을 하는 등 그야말로 북에서는 혁명 영웅이죠. 셋째 딸 리춘희가 박명국의 부인인데 처형 리춘경은 호위사령부 산하 연못회사 총사장을 하는 등 북에서는 대단한, 한마디로 로열패밀리 집안이라 할 수 있겠지요. 통일부 자료 등에는 넷째 사위로 알려졌는데 제가 알기로는 셋째 사위로 분명 알고 있습니다.”
 
  — 최근 영국 런던 주재 북한 대사관 태영호 공사 탈북 사건 때 태 공사가 교통비까지 걱정할 정도로 어렵게 지냈던 것이 화제가 됐는데 김 선생께서 만난 북한 외교관들의 모습도 그렇던가요.
 
  “글쎄요. 뭐라고 꼭 집어서 말하기는 쉽지 않지만 하여간 경제적으로 상당히 압박이 있음은 분명했습니다. 좀 우스운 이야기지만 처음 제가 캔버라에 갔을 때 박 공사가 공항 도착장에서 마중하지 않고 공항에서 나와 도로가에 서 있으면 차로 픽업하겠다고 했거든요. 사실 북한 사람을 처음 만나는 거라 좀 겁이 나기도 했습니다. 이대로 혹시 납치라도 당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공항 주차료가 아까워 그랬던 겁니다. 차는 벤츠인데요. 웃을 수도 없고 …. 당시에 제 감정이 좀 착잡하긴 했네요. 그래도 일국의 외교관인데 …. 처음 만나 식사를 하는데 박 공사의 와이셔츠 소매 끝자락이 많이 해진 것을 보게 되어 좀 의문은 있었습니다. ‘근검절약이 몸에 밴 것인가, 아니면 진짜 없어서 그런 것인가?’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호주에서 생활비로 월 600불, 그것도 호주달러로 받는다는데 그저 도와주고 싶은 마음만 들었습니다.”
 
  — 경제적으로 많이 도와줬겠네요.
 
  “좀 도와줬죠. 박 공사 딸 은별이가 당시 21세였는데 하이스쿨에 다녔어요. 대학에 다닐 나이였는데도 말이죠. 알고 보니 외교관 신분이라도 대학은 학비를 내야 했고 고등학교까지만 무상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죠. 씁쓸했던 기억도 있네요. 2007년 연말로 기억되는데 박 공사로부터 다급한 메일을 받았습니다. 딸 은별이가 눈 수술을 급히 하게 돼 수술비가 필요하다는 내용이었죠. 어쩌겠습니까? 아프다는데 …. 대략 몇천 불 보내줬는데 열흘인가 있다가 호주 주재 북한 대사관이 철수한다는 뉴스를 보게 되었습니다. 머릿속에 여러 생각은 들었지만 그래도 그때는 이해했지요.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요.”
 
 
  첫 방문 때 너무 좋았다
 
김요한씨가 북한에 투자한 유리섬유공장. 영문이 적힌 플래카드는 북한에서 최초였다고 한다.
  — 북한을 처음 방문했을 때의 느낌은 어땠습니까.
 
  “2006년 ‘9·9절’ 때 처음 갔는데 솔직히 첫 방문 때 너무 좋았습니다. 경제적으로는 낙후된 곳임을 익히 아는 사실이었지만 남들이 쉽게 가 보지 못하는 곳인 데다가 말 그대로 북한이지 않습니까? 적당한 신비감도 있었고 평양은 생각보다는 그런대로 살 만한 곳이란 느낌이 우선 들었습니다. 일종의 반공교육에 속았다는 생각도 일면 들었고요. 그도 그럴 것이 처음 순안 공항에 도착했는데 벤츠로 마중을 나왔고 다소 낡았긴 했지만 숙소도 괜찮았습니다. 아니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상상을 초월했지요. 욕실이 큰 방만 했고 개인용 일제 TOTO 사우나 도크까지 설치되어 있었으니까요. ….”
 
  — 그렇다고 너무 좋기까지 했다는 건 좀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좋았습니다. 그저 순수하게만 보였고 심지어 저는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의 원형적 모습, 그러니까 가장 순수한 인간의 모습을 북한에서 볼 수 있었다고까지 생각했었습니다. 하여간 북한도 사람이 사는 곳이란 생각이 지배적이었고 긍정적 요소들이 눈에 많이 들어오긴 했습니다. 아마 신은미씨를 비롯한 북한 방문기를 발표한 분들의 느낌, 감정들과 동일 선상이었지 않았나 싶네요.”
 
  — 김 선생을 초청한 북한 기관은 외무성입니까.
 
  “아닙니다. 처음 박명국 공사가 주선을 했는데 알고 보니 통전부 산하 ‘해외동포 원호위원회’(해동위)였습니다. 한 30번 이상 방문했는데 초기에는 해동위 중심으로 갔지만 나중에는 일반 회사, 기업소 초청으로 다니곤 했습니다.”
 
  — 30차례 이상 북한 방문을 계속하면서 북한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은 어떻게 변했습니까.
 
  “북한에 대해 한동안 유지되던 제 감정, 느낌들은 사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했습니다. 그만큼 북한에 대해, 그 실체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고 경험하면서 아쉽게도 많이 변했습니다. 회의가 온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인민들에 대한 것은 아니고 우리가 말하는 ‘북한’ 그 자체에 대해서는 상당한 실망과 상실에다 배반의 감정이 동반되기도 합니다.”
 
  —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까.
 
  “우선은 해동위 간부들의 양면적 모습을 꼽을 수 있겠고 저 같은 경우는 처음에 말씀 드렸지만 이념이나 사상 등의 변화보다는 사람이 사는 현실에 대한 감성적 경험, 체험에 의존적인데요. 예를 들면 제가 탁구를 좋아해서 평양에 가면 항상 만경대 체육촌에 있는 탁구관에 가서 운동을 합니다. 사실 여기는 국가대표 선수들이 연습하는 곳인데 제가 가면 항상 파트너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갈 때마다 저의 파트너가 되어 준 K가 고마워 점심 식사를 한번 사려고 했는데 항상 사양하는 것입니다. 그의 아내는 여자축구 선수에다 세 살배기 딸이 있었는데 제가 가족들 데리고 밥 한번 먹자고 갈 때마다 요청했는데 계속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안 된다는 겁니다.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됐습니다. 그 친구와 밥을 먹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요.”
 
  — 왜요.
 
  “제가 같이 식사를 하려면 우선은 제 담당 기관의 상부로부터 승인을 받아야 하고 K도 해당 부문의 승인을 받아야만 가능한 구조적인 체계가 있었던 거죠. 승인, 승인, 승인 …. 운동하다가 밥 한 끼 먹는데 양쪽에서 승인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여기서부터 제가 눈을 뜨기 시작한 거죠. 타 지역에 사는 어머니와 딸이 만나려고 해도 승인이 필요하다고 하고 …. 참 희한한 세상이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세상에 부러움 없고 지상 최대의 사회주의 낙원인데 말입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서 사람이 살아야 하는 곳인가 하는 의문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 북한에서 사업에도 투자했다가 실패했다면서요.
 
  “초창기에 아무것도 모르고 무조건 믿고 시작했죠. 처음 투자한 것이 신의주에 있는 동양회사와 배터리 재생 공장이었는데 계약금을 송금하고는 그대로 주저앉았습니다. 당시 동양회사 신의주 지사장은 전철수라고 신의주에서 아주 유능하고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재정 검열을 받으러 평양에 간 후로 돌아오지 않는 겁니다. 뒤에 알게 되었는데 총살을 당했습니다. 당시 국내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는데 저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유리섬유 공장에 투자했는데 그마저도 실패로 끝났네요. 여러 이유들, 그중엔 잘 모르고 덤빈 제 책임도 간과할 수 없지만 총체적으로 북한은 투자하기엔 너무나 불안정한 구조, 체제라고 봅니다.”
 
  — 어떤 점이 그렇습니까.
 
  “그 사람들은 미래가 불안하다 보니 사업에 있어서도 일단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내 호주머니에 챙기고 보자는 미시적 접근이 발전적 투자 환경을 가로막는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신뢰가 없는, 그런 곳입니다. 속이고 또 속이고 …. 그래도 저는 괜찮았습니다. 애초부터 돈을 벌려고 투자를 한 것은 아니었거든요.”
 
  — 북에 가서 만난 사람들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다면?
 
  “제 호기심이 문제이긴 합니다만 한번은 택시를 혼자 타고 창광거리에서 양각도 호텔에 갔습니다. 원래 외국인은 반드시 안내가 동행해야만 택시를 탈 수 있는데 제가 북한에 사는 재중 동포 흉내를 완벽하게 해낸 것이죠. 돌아오니 난리가 났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제 담당 안내는 심한 벌을 받았고 저를 태워 준 택시 드라이버는 평양 바깥으로 쫓겨났다고 들었습니다. 두고두고 후회가 된 일입니다. 정말 통일이 되면 꼭 찾아서 속죄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자주 방문하면서 꽤 친했던 호텔 커피점 복무원이 있었습니다. 많이 친하게 되자 어느날 조심스럽게 제게 주의를 주었습니다. ‘선생님, 여기서는 조심하셔야 합니다. 선생님은 혼자서 그냥 여기저기 다니신다 해도 다 보는 눈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다닌 곳, 어디서 하신 말 등은 다 상부로 보고가 됩니다. 하여튼, 그리 아시고 정말 조심하십시오.’ 돌출 행동이 많았던 제게 진심으로 걱정 끝에 한 말이었는데 그때 저는 많이 놀랐습니다. 아, 북한이 이런 곳이구나.”
 
 
  사업 투자 과정에서 사기도 당해
 
박명국 북한 외교부상(왼쪽)과 호주 주재 북한 대사관 앞에서.
  — 김정은 집권 후 북한 지도층의 생각에 변화가 감지되던가요.
 
  “원래 그런 사회이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이 한층 더한 것으로 여깁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녀를 바깥으로 보내고 자신들도 해외로 나가려고 애쓰는 상황이라고 봅니다. 내일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은 일종의 공포이지 않겠습니까?”
 
  — 탈북자들이나 소위 북한 전문가들 가운데는 북한의 급속한 붕괴를 예측하는 이들이 꽤 있는데요.
 
  “제가 처음 북한을 다닐 때 북한은 절대로 붕괴하지 않는다는 확고한 제 나름의 신념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미국을 비롯한 외부의 압박이나 제재로 붕괴된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다만 최근 들어서 붕괴라는 표현보다는 상상할 수 없는 변혁의 과정이 급속하게 내부에서 생성될 수 있을 가능성은 열어 두고 있습니다. 저장 매체의 초소형화가 큰 역할을 할 것으로 예견은 합니다.”
 
  — 사업 투자 과정에서 사기도 당했다면서요.
 
  “어이가 없는 일입니다만 빨치산 시절에 김일성의 연락병을 한 리오송이란 혁명 투사가 있습니다. 이미 사망했습니다만 이 사람의 아들이 리창일이라고 당시 연락소에 소속되었는데 한국전쟁 이후에 리오송이 중국 단동의 병원에서 한족 간호사와의 사이에서 난 이복동생이 있는 겁니다. 형은 혁명 투사 아들로 평양에 있고 이복동생은 단동에 거주했는데 아버지가 혁명 투사라서 북한에서 안 되는 일이 없다며 접근한 것입니다. 두 번째 사업인 유리섬유 공장에 투자했는데 투자금만 받아 가고 소식이 없습니다. 지불 각서도 받았지만 만날 수 없는데 휴지나 마찬가지지요.”
 
  — 드라마나 가요 등 한국 문화가 북한에 많이 전파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실제 경험했는지요.
 
  “네. 북한 기관들은 각 무역회사들을 가지고 있는데 한번은 유력한 기관의 수입과장 일행과 중국에 동행한 적이 있습니다. 평양에서부터 국제 열차를 같이 타고 나와 상당히 친밀감이 형성되었지요. 중국 연태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노래방엘 가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북한 노래를 부르더니 나중에는 나훈아 노래 〈무시로〉를 표정까지 따라 하며 부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북한에서 알기가 쉽지 않은 노래라고 생각되는 〈바위섬〉이란 노래도 불렀고요. 비서로 따라온 친구가 상업학교 갓 졸업하고 취직한 아이였는데 과장이 노래를 하라니 이선희의 〈J에게〉를 하는 것입니다. 이미 자기들끼리는 한국 노래를 암암리에 부르는 것이 만연된 것으로 충분히 짐작되었습니다.”
 
  — 중국이 아닌 북한 내에서는 그런 체험을 해본 적이 없습니까.
 
  “있죠. 한번은 보통강 유원지를 산책하는데 어디선가 귀에 익은 멜로디가 들려왔습니다. 한쪽에서 대략 열 명 정도의 대학생들이 둘러앉아 기타를 치며 술도 마시고 놀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들어 보니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라는 노래더군요. 상당한 반가움과 호기심에 가까이 갔습니다. 해외 동포라고 제 소개를 하고는 방금 들었던 그 노래를 다시 한번 불러줄 수 있느냐고 조심스럽게 요청했었지요.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분명히 방금 들었는데 이 친구들 태도가 돌변한 것입니다. ‘예? 무슨 노래말씀입니까? 장군님 노래요?’ 아, 순간 제가 당황했지요. 그렇게 또 북한을 알아 간 것이지요.”
 
 
  사익에 집착하는 북한 지도층
 
연회에 참석한 북한 김기남 비서(왼쪽)와의 기념촬영.
  — 북에서 만난 소위 북한 지도층은 어땠습니까.
 
  “제가 경험한 것은 강성대국을 외치며 우리식 사회주의 조국의 건설과 확고한 주체사상의 확립된 자세와 태도, 즉 경제적으로는 다소 어렵지만 항상 우월적 자존심을 겉으로 내세우지만 실상은 만연된 부패와 비리, 거짓이 없이는 살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전투적으로 사익에 집착하는 모습을 쉽게 발견하곤 합니다. 평양에서 주로 제가 상대하던 해동위 간부들은 은근히 외교관 상점에 같이 구경 가자고 해 놓고는 이것저것 자기들 필요한 것들을 집고는 계산하도록 만드는 겁니다. 고려호텔 같은 곳에서 식사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냉면 한 그릇 먹었는데 나중에 정산서를 보면 제가 안 먹은 것들이 막 올라와 있는 거죠. 물론 북한이니까 다 이해는 하지만 많이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지도층이 조금 젠틀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한국 영화 DVD 같은 것을 은근히 많이 요청하기도 했고요. 자기들만 볼 게 아니고 확 풀어서 인민들도 마음대로 보게 하든지 ….”
 
  — 남한이라면 만나기가 쉽지 않은 고위층을 북한에서는 쉽게 만날 수 있었는데요.
 
  “처음에는 황당하기도 했습니다만 인민문화궁전에서의 연회에 초청되었는데 제가 주탁에 앉게 되었고 김기남 당비서와 같이 식사를 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 차례 그런 자리가 있었습니다. 몇 해 전 사망한 김중린 비서와 같이 식사하기도 했고요. 한국 같으면 꿈도 못 꿀 일이겠지요. 내심 저를 전략적으로 자기들 해외 동포 조직의 일군으로 키우려는 계획 아래 다분히 전략적인 측면도 있다고 봅니다. 저뿐만 아니고 많은 해외 동포들이 이런 자리에 초대되곤 하는데 연회 참석자들은 어쩌면 스스로 신분 상승이 된 듯한 착각에 사로잡히게 되죠. 이런 내면적 욕구 충족의 발로에 기인해 동포 조직의 회장을 맡기 위해 끊임없는 다툼이 있기도 합니다. 대한민국에서는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고, 실상은 현지 교민 사회에서도 존재감이 없는 사람들이 북한에서는 뭔가 정부 인사나 되는 듯한 착각에 스스로 함몰되어 가는 것이라고 봐야죠.”
 
  — 북한 지도층에게서 자유민주 사회처럼 말로라도 인민을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나요.
 
  “글쎄요. 말로는 항상 인민을 걱정한다고 그러죠.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가 그들의 핵심 가치 아닙니까. 인민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좀 그렇네요. 인민, 나아가 시민이 결국 일을 해낼 것인데 인민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그럴 수는 없겠지요. 최근 한국 사회에 유행한 진짜 개, 돼지로 취급하는 곳이 북한이 아닐까 싶네요.”
 
  — 북한의 해외동포 조직은 어떻게 조직돼 있습니까.
 
  “일본의 조총련이 대표적이죠. 중국엔 재중 동포 조직이 지역별로 구성되어 있고 러시아에는 ‘고려인 련합회’라고 있습니다. 조총련, 재중 동포, 고려인 련합회는 별도의 관리 체제가 구성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 통전부 산하 해외동포 원호위원회에서 미국, 캐나다, 유럽(독일 중심), 호주, 뉴질랜드를 묶어 해외 동포 조직으로 관리하고는 있습니다. 물론 담당 참사는 지역별로 배정되어 있습니다. 동포 조직이라니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실상은 회원도 몇 안 되는, 어떻게 보면 부실한 조직입니다. 다만 미국은 규모가 좀 있습니다만.”
 
  — 각 나라별로 해외동포 조직의 특성이 다릅니까.
 
  “네. 순전히 제 개인적 견해입니다만 유럽 조직은 북한쪽 입장에서 보면 순수함이 있게 보였습니다. 유럽이라고는 하지만 독일이 거의 전부인데요. 오래 전 동백림 사건을 비롯해서 그쪽은 일관된 스피릿을 유지한 혈통적으로는 순수하다고 봅니다. 호주, 뉴질랜드 등은 논하기 어려울 정도로 교민 사회에서의 활동도 미미하고 회장단이라는 면면도 좀 그렇죠. 북한 측에서도 내실이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그저 자기들 국가 행사 때 먼 나라에서 방문단이 왔다는 홍보성, 그러니까 실상은 북한 내부 홍보용으로 존재 가치를 두는데 의미가 있고요.”
 
  — 미국 조직이 큰 이유는요.
 
  “미국은 좀 특이합니다. 교민 역사도 오래되었고 교민 수가 많다 보니 자연적으로 북한에 가족을 둔 이산가족이 많은 겁니다. ‘재미련’이라는 중앙 조직 산하에 서부, 동부, 중남부 지회를 두고 여러 사업들을 하는데 이산가족 북한 방문이 주력 사업으로 보입니다. 오래 전부터 이산가족 방문 시 신청비를 받고 있는데 물론 행정비 등이 발생하긴 하지만 상당한 금액입니다. 순수 신청비만 수백 불이 되고 여행비는 몇천 불이 되는데 통전부와 커넥션이 되어 있는 정황이 농후하다고 봅니다. 구체적 사례들이 있지만 불편한 문제들이 야기될 소지가 있어 여기까지만 …. 동포 조직을 관리하는 해동위 간부들은 사회주의 통일 사업의 파수꾼을 자처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모든 것이 ‘돈’, 즉 북한 내 자본주의를 숭상, 전파하는 첨병인 것이죠.”
 
 
  신은미씨에 대해
 
박명국의 가족들과 함께. 왼쪽 김요한 바로 옆과 그 뒤편은 모녀로 호주 주재 북한 대사관을 탈출해 제3국으로 망명했다.
  — 신은미씨의 방북과 그의 활동이 한국 사회에 문제가 된 적 있습니다. 김 선생께서는 신은미씨의 방북과 그의 행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이분은 처음엔 본인의 표현대로 평범한 재미동포 아주머니였다고 봅니다. 저처럼 그저 북한을 호기심에서 방문, 여행하고 싶었던 것도 분명하고요. 순수했다고 봅니다. 솔직한 자신의 방북기를 한 매체에 연재했는데 대중의 관심을 받으면서부터 점차 궤도를 달리한 것 같습니다. 북한을 신은미씨보다 먼저 다녀온 입장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다면 그분이 있는 그대로 본 사실, 느낀 것들을 객관적으로 중간적 입장에서 전한다는 전제에 스스로 함정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경험에 의존한 가정이 팩트로 필터링 없이 변환되었고 신념으로 발전된 케이스라고 봅니다. 분명히 본 것들이지만 그것들이 ‘진실’이 아닐 수 있음을 간과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는 봅니다.”
 
  — 왜 그렇게 된 걸까요.
 
  “저는 신은미씨가 성악을 전공했다는 것에 주목합니다만 무대나 스포트라이트, 즉 대중의 관심에 익숙했던 것 같고 방문기가 어떤 부분, 진영에서 환호를 받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 투사로 만들어져 갔다고 생각합니다. 평범한 아주머니가 감당하기에 너무나 부담되는 한국 사회의 양 극단의 존재를 너무 쉽게 상대하려고 하지나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하기야 이미 이분은 이제는 본인이 표현한 ‘평범한 재미동포 아줌마’에서 한참 멀리 계시기도 합니다.”
 
  — 뭘 잘못 본 걸까요.
 
  “한 가지만 거론하자면 그분이 북한에서 ‘지극의 순수함’으로 보고 만난 주변의 많은 이들이 철저하게 훈련된 기관원이란 사실이 간과되었다는 점입니다. 북한을 순수한 감성으로만 이해하고 알기에는 참으로 복잡하고 세월이 많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제가 처음 북한에 갔을 때 당시 담당인 조경화 부국장이란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녁 시간이었고 개인적으로 편안한 상태에서 교제하는 시간이었죠.
 
  자신은 북강원도 화전민의 아들인데 만약 자본주의 나라에서 태어났더라면 자신의 인생은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사회 최하층의 삶을 살았을 것인데 사회주의 조국이었기에 능력대로 공부할 수 있었고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해서 당원이 되었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올 수 있었다고 ….
 
  당시에 저는 듣고 보니 고개는 끄덕여졌죠. 동의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깨달은 것은 이 사람들의 이 모든 말이나 행동이 전략, 각본이었지요. 신은미씨는 스스로 그 프레임에 들어갔다고 저는 보이네요.“
 
  — 북한을 방문하면서 경험한 북한 관련 단체, 기관, 인권, 선교단체의 실상을 많이 봤을 텐데요.
 
  “좀 예민한 질문이긴 한데요. 제가 통일을 부르짖는 수많은 북한 관련 운동 단체, 기관들, 북한 인권을 위해 열심인 운동가들, 남북통일을 위해 밤낮으로 기도하는 선교 단체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정작 통일이 되면 이분들 큰일인데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직설적으로 말씀 드리면 핵심에 ‘돈’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보면 돈하고의 싸움인 것 같기도 합니다. 탈북 브로커들도 마찬가지고요. 돈, 다 돈이 문제지요.”
 
 
  런던 북한 대사관 방문
 
김요한씨가 투자한 공장의 외부 모습.
  — 런던 주재 북한 대사관도 방문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008년 2월 26일로 기억합니다. 뉴욕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평양 동평양 대극장에서의 역사적인 연주회 이후 북한 국립 교향악단의 런던 연주회가 기획되었습니다. 미들즈버러를 비롯한 영국 내 몇 도시 순회 연주회인데 당시 조직 위원회에 커미티 멤버가 5명이었는데 영국인 3명, 런던 북한 대사관의 리웅철 서기관과 제가 포함되었습니다. 공연 협의차 런던을 몇 차례 방문했는데 주로 북한 대사관에서 미팅을 가졌습니다.”
 
  — 성사가 안 됐죠.
 
  “네. 제가 맡은 주요 업무는 한국의 방송사를 연결하는 것인데 방송료로 공연 경비를 확보하는 일입니다. 직전에 뉴욕필 평양 공연을 MBC가 독점 중계하며 중계료로 수억 원을 지불했죠. 이전에 조용필, 이미자 평양 공연 시 한국 방송사에서 방송료로 3억~5억원 상당을 북한에 건네기도 했었습니다. 당시 MBC 문화방송의 통일방송협력단과 기초 협의 단계의 미팅을 가졌지만 아쉽게도 정권 교체기에 접어들어 방송사들이 나서지 않게 되었고 결국은 재정 문제로 취소되고 말았습니다.
 
  — 에릭 클랩튼 평양 공연도 추진했다면서요.
 
  “하루는 리웅철로부터 메일이 왔습니다. 에릭 클랩튼의 평양 공연을 꼭 성사시켜야 한다고요. 당시 전 세계를 카 레이싱으로 일주하는 팀이 있었는데 신의주에서 판문점까지 레이싱을 하고 평양에서 에릭 클랩튼의 공연으로 마감한다는 프로젝트였습니다. 상당히 흥미롭고 매력 있는 기획이었지만 역시 한국 방송사의 협찬이 없어 무산됐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한국 방송사에서 나서지 않으면 아무 것도 되지 않는 결과가 아이러니할 따름입니다.”
 
  — 런던에서 만난 리웅철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리웅철은 저하고는 동갑으로 상당히 빨리 친하게 되었습니다. 김일성종합대학 영문학부를 나왔는데 과묵하고 무게가 있는 친구였습니다. 골프도 좋아했고 아주 머리가 좋았습니다. 어떻게든 저를 도우려고 애를 썼는데 영국 북한 대사관에서 뭘 할 수 있는 게 있어야죠. 평양으로 소환되기 열흘 쯤 전에 의미심장한 말을 제게 던지긴 했는데 …, 지금 생각하면 그저 안타까움만 남네요.”
 
  — 태영호 공사는 리웅철 후임이었나요.
 
  “그렇게 봐야겠지요. 태 공사는 리웅철이 평양으로 소환된 후 웅철이 소식을 묻느라 몇 차례 통화했습니다. 물론 그 전에 본 적은 있었는데 상당히 젠틀하고 합리적인 성품이라고 느끼긴 했습니다. 중국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한 적도 있습니다. 태 공사가 2000년경부터 영국 북한 대사관에 근무했다고 보도되었는데 제 기억으로는 리웅철이 북한으로 소환되기 직전에 온 것 같네요. 웅철이 휴대폰을 태 공사가 그대로 받아 사용했거든요. 2010년쯤일 겁니다.”
 
  — 런던 주재 북한 대사관은 몇 차례나 방문했습니까..
 
  “대략 서너 번 갔었네요. 런던의 북한 대사관은 제법 규모가 있는 2층짜리 주택이었는데 1층 거실은 접견실로 쓰고 탁자와 의자들이 있었죠. 벽면 상단 중앙엔 김씨 부자의 사진이 걸려 있고 각종 선전물과 간행물들이 널려 있었고요. 한쪽에 주방과 식당이 있고 2층엔 방들이 여러 개 있어서 대사관 직원들이 가족과 함께 동거하는 형태였습니다.”
 
  — 우리는 북한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저는 운동으로 탁구를 좋아합니다. 테니스도 동일하겠지만 경기 대회에서 이기려면 내가 가진 기량, 테크닉의 모든 것을 발휘해 상대를 제압하여야 합니다. 승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운동으로 함께 즐기려면 좀 다릅니다. 잘 치는 사람이 공을 잘 줘야 랠리가 오래가고 잘되는 것입니다. 좀 통속적인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저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네요. 사랑만이 모든 것을 변하게 할 수 있는 힘이라고 …. 그래도 동족, 형제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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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달기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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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혜연    (2018-01-28) 찬성 : 16   반대 : 15
평양에 거주하는 최고위층 인사들의 월급수준이 서울에 거주하는 대기업과장들의 월급수준과 같으며 결코 대기업 회장님들의 월급보다 낮은편이다!!!! 알겄느뇨
  박혜연    (2017-12-26) 찬성 : 8   반대 : 9
게다가 몇년전에 제3국의 망명했다는 경제참사와 그녀의 딸이 입은 옷들 저때가 2006년도인데 역시 우리나라에서는 이태원의 옷가게에서도 쉽게 구할수있는 옷들이라는걸 알아야할때....!!!!
  박혜연    (2017-12-01) 찬성 : 12   반대 : 9
리을설의 외손녀와 리을설의 셋째딸의 옷차림을 봤는데 우리기준으로 볼때에는 청담동 사모님수준보다는 조금 낮은 수준의 옷을 입었더구먼

20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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