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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惡)의 기록 ‘조총련 60년 활동 일지(日誌)’

글 :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mongo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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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조선노동당 일본 지부였다”는 자술서
⊙ 문명국가 속에 어떻게 이런 ‘게토’가 존재할 수 있나?
⊙ 김일성, “주체사상은 총련의 생명이다”
⊙ 한반도 냉전의 주역, 대한민국 파괴 공작 기지
⊙ 일본인 납치 사건 이후 3만명대로 줄어(많을 때는 40만)
일본 도쿄 중심부에 있는 조총련 중앙본부.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 총련 결성 60돌을 맞아 작년에 펴낸 《총련주요활동일지(1955~2015)》를 최근 입수하여 읽어보았다. 이 문서는 조총련의 정체(正體)를 420페이지에 걸쳐 나타내고 있는데, “우리는 조선노동당 일본 지부였다”는 자술서에 다름 아니다. 일본에 북한 정권이 하나 더 있었다는 느낌이다.
 
조총련이 펴낸 《총련주요활동일지》.
  조총련에 대하여 가장 밝은 이로 꼽히는 홍형(洪熒) 전 주일대사관 공사는 이렇게 요약한다.
 
  “조총련은 교포 단체로 위장한 조선노동당의 재일(在日)지부이며, 적지(敵地) 일본에서 대한민국을 공격해 온 기지다. 조총련은 지난 70년간 평양의 전략과 지시에 따라 정치 모략 전쟁부터 잔혹한 비밀공작까지 수행했다. 즉 한반도 냉전의 주역(主役)이었던 것이다.”
 
  그는 조총련의 본질에 대한 인식과 진단이 정확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일 양국이 모두 조총련의 공작에 당해왔다고 본다면서 “한일관계가 좀 더 발전되지 못한 배후에는 조선노동당의 전위대, 즉 ‘종북(從北)의 원조(元祖)’인 조총련 조직이 있었다”고 단정하였다. 대한민국은 미국에 종속된 가난하고 음험한 독재국가이고, 북한은 주체적인 사회주의 국가라는 이미지를 1980년대 중반까지 일본은 물론 국제사회에 확산시켜 온 것도, 그래서 한국 사회에 종북세력을 결정적으로 키워온 것도 바로 조총련이었다는 분석이다.
 
 
  조총련의 지도이념은 주체사상
 
《총련주요활동일지》에 실린 김일성이 조총련 의장 한덕수를 만나는 사진. 이 책은 김씨 3대에 대해 극존칭을 사용하고 있다.
  일지(日誌)를 읽으면 북한에서 조선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을 읽는 기분이 든다. 용어나 표현이 완전한 북한식이다. 문제는 일본에서 그렇다는 점이다.
 
  이 책의 첫 기록, 즉 이른바 주체34(1945)년의 역사는 북한식 조작으로 출발한다.
 
  〈8월 15일: 위대한 김일성 주석님께서 령도하신 항일혁명 투쟁의 승리. 일제식민통치로부터 조국해방.〉
 
  광복의 그날 김일성은 소련군 장교로서 러시아 땅에서 대기 중이었고, 조국은 미국과 소련의 군사적 승리에 의하여 해방되었다는 엄연한 사실(史實)은 조총련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조총련의 절대 교리는 사실에 구애받지 않는 주체사상이기 때문이다.
 
  〈1981년 8월 22일: 위대한 수령 김일성 주석님께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 35돌 재일조선인 축하단과 “주체사상은 총련의 생명이다”는 담화를 하시었다.
 
  10월 27일: 위대한 김일성 주석님께서 사로청 제7차 대회에서 하신 력사적 연설 “청년들은 주체혁명 위업의 믿음직한 계승자가 되자”에 대한 학습 모임, 총련의 각급 기관들에서 일제히 진행.
 
  12월 6일: 위대한 김일성 주석님께서 총련 중앙 부의장과 “총련은 주체사상의 요구대로 애국활동을 벌여나가야 한다”라는 담화를 하시었다.
 
  1982년 1월 26~27일: 총련 각 현본부위원장 회의 진행. 회의는 위대한 김일성 주석님의 새해 교시를 높이 받들고 운운(後略).〉
 
  북한 서적처럼 이 일지도 김일성·김정일·김정은에겐 최고 존칭을 붙이고 고딕 글자로 인쇄하였다. 문명국가 한복판에서 조총련의 사교적(邪敎的) 행태가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출발 때부터 김일성 신격화(神格化)를 받아들인 때문이다. 조총련 소속 다수 재일동포에게 김일성은 일본 천황을 대체하는 존재였다. 그들은 2016년에도 아직 정신적 해방을 거치지 못한 채 1945년 이전 체제에 살고 있는 셈이다.
 
 
  일본과 북한이 합작한 북송사업
 
재일동포 북송사업은 북한, 조총련, 일본 보수 정권, 일본 공산당, 언론, 적십자사 등의 합작품이었다.
  일지는 1955년 5월 25~26일에 조총련 결성대회가 있었는데 이는 김일성의 〈주체적인 해외교포 운동 사상의 빛나는 결실이며 재일동포들의 생활에서 근본적인 전환을 가져온 역사적 사변〉이라고 했다. 조총련의 전신(前身)인 재일본조선통일민족전선(民戰)이 일본 공산당의 지도를 받아오다가 북한 정권 소속으로 돌아선 것이다. 조총련을 키운 것은 북송(北送)사업이었다.
 
  이 일지가 가장 자랑스럽게 기록한 것이, 약 9만3000명을 생지옥으로 보낸 ‘재일조선인귀국운동’, 즉 재일동포 북송사업이다. 그 시작은 이렇다.
 
  〈1958년 8월 11일: 총련 가나가와 현 나카도메 분회 동포들, 처음으로 공화국에로의 즉시 귀국을 결의, 위대한 김일성 주석님께 편지를 드림, 일본 정부에 요청서 제출.
 
  9월 8일: 위대한 김일성 주석님께서 재일동포들이 돌아와 새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모든 조건을 보장해 줄 것이며 이것은 공화국 정부의 민족적 의무라는 데 대하여 천명하시었다.〉
 
  재일동포 북송사업엔 조총련과 북한 정권뿐 아니라 일본의 보수 정권, 일본의 공산당, 소위 양심적 지식인, 언론, 적십자사가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북조선 천국론’이 횡행하였다. 재일동포의 절대다수는 남한 출신인데도 일본과 북한이 합작한 선동에 넘어갔다. 일본 측은 요사이 표현을 빌리자면 인종청소 차원에서 치안에 위해(危害)가 되는 재일(在日) 조선인 수를 줄이겠다는 계산이 있었다. 침략 전쟁에 대한 반성에서 좌경화된 일본의 지식인 사회는 북송에 대한 사실적 비판을 자제하였다.
 
  〈1959년 12월 14일: 제1차 귀국선 니가타 출항. 1차 귀국 동포 수 975명, 한덕수 의장을 비롯한 각 단체 대표들, 일조(日朝)협회, 니가타 현 지사 열광적으로 환송. 16일 6만여 명 군중의 환영 속에서 청진항에 도착. 총련 중앙상임위원회, 귀국사업에 적극 협조해 준 일본 인민들에게 사의를 표하며 계속 협조해 줄 것을 호소하는 성명 발표.〉
 
  12월 21일 김일성은 북송된 동포들과 만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재일조선 동포들의 참다운 조국이다”고 말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일지는, 이들을 환영하는 평양시 군중대회가 15만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고 적고 있다.
 
 
  문명 속의 게토
 
  북송에 협조한 일본 공산당의 미야모토 겐지 당수(黨首)의 비서 격이었던 데라오(寺尾五郞)는 북한을 방문한 뒤 《38도선의 북》이란 책을 썼다. “김일성이 지도한 천리마 운동 덕분에 북한은 머지않아 1인당 소득에서 일본을 능가하게 될 것”이라고 과장한 이 책을 읽고 ‘지상천국’행을 자원한 동포들도 많았다.
 
  홍형씨는 “이 사업을 주도한 것은 조총련과 일본 사회의 범(汎)좌파지만 대한민국이 거국적으로 반대했던 이 반(反)문명적 계획을 적극 이용, 지원한 것은 일본의 민족주의 세력인 우익과 언론 및 일본 정부였다”고 비판한다. 북송사업은 한일 국교 정상화 6년 전에 시작되어 더 이상 희망자가 없어 사업이 종료되는 1984년까지, 즉 국교 정상화 후에도 19년이나 더 지속되었다.
 
  북한 정권은 노동력이 부족한 전후(戰後) 복구기에 북송 동포 속의 전문가와 기술자 인력을 활용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9만명을 인질로 삼고 일본에 사는 연고자들에게 빨대를 꽂은 채 조총련을 뜯어먹고 마음대로 조종하였다. ‘문명 속의 게토’ 조총련의 불가사의한 존립은 이렇게 가능하였다.
 
  일지에 나타난 조총련의 일상적 활동은 북의 세습체제 호위에 집중되어 있다. 북한 정권에 불리한 행위를 한 일본 당국이나 언론에 대한 항의, 대한민국 정부 공격(반정부 활동 지원), 한일 이간질, 북한의 세습 독재자에 대한 충성 맹세가 그것이다. 이런 행동들은 대한민국 공산화로 귀결된다.
 
  1964년 6월 3일 한일 국교 정상화 회담을 반대하는 학생 시위를 진압하기 위하여 정부는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조총련은 6월 5일 〈남조선 인민들의 애국투쟁을 지지하는 성명 발표〉에 이어 6월 25일 〈미제와 박정희 도당을 반대하는 재일조선인 중앙대회〉를 열고, 8월 6일엔 재일본조선언론출판인협회 이름으로 〈남조선 언론인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육영수 암살 사건 수사 방해
 
육영수 여사 암살범 문세광.
  조총련을 이용한 북한의 대한민국 파괴 공작 역사에서 최대의 성공작은 1974년 8·15사건이다. 북한 정권은 김호룡(金浩龍)이라는 조총련 공작원을 내세워 민단 청년 단체 출신이던 문세광(文世光)을 포섭, 박정희 대통령을 사살하려다가 곁에 있던 부인 육영수(陸英修) 여사를 죽였다. 조총련은 일본 언론과 정치권, 그리고 지식인 사회에 대한 여론 조작으로 김호룡에 대한 일본 경찰의 수사를 차단하는 데도 성공한다.
 
  〈1974년 8월 18일: 총련중앙상임위원회, 박정희 역적 도당이 ‘8·15 저격 사건’에 공화국과 총련을 관련시키는 악랄한 모략 책동을 감행하고 있는 것을 규탄하여 성명 발표.
 
  9월 2일: 총련 중앙 대표들, 남조선 당국이 갖은 모략 책동을 벌이고 있는 것을 적극 비호하며 뒷받침하고 있는 일본 수사 당국에 강력히 항의.〉
 
  일본 경찰은 문세광을 조종한 김호룡을 입건도 하지 않았다. 일본 파출소에서 총을 훔쳐 한국 대통령을 죽이려다가 그 부인을 죽인 사건인데도 수사에 협조하지 않아 문세광에 대한 배후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조총련은 1974년 하반기, 문세광 배후에 대한 일본 경찰의 수사를 방해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다. 9월 20일엔 오사카에서 2만5000명이 참여한 집회와 시위행진을 했고, 일본 외무성과 총리 관저로 찾아가 항의하였다. 그해 10월 30일 일조협회는 172차 북송선 환송 축하연을 니가타에서 열었는데 문세광에게 암살 지령을 내리는 데 이용하였던 북한의 만경봉호 선장과 선원까지 초청하였다.
 
  홍형씨는 육영수 암살 사건은 그 전해에 있었던, 중앙정보부(부장 이후락) 팀의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한 보복이었다고 본다. 김대중 납치는 조총련의 선동에다가 주권을 침해받아 자존심이 상한 일본 정부의 반감, 그리고 일본 언론과 지식인 사회의 동조가 겹쳐 일대 반한(反韓) 선풍을 불러일으켰다. 문세광이 조총련 공작원에 포섭된 것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였고, 일본 정부가 문세광 배후 수사를 중단한 것도 그런 흐름의 반영이었다.
 
  일지는 〈1983년 8월 22일: 김대중을 납치 감금한 박정희 파쇼 도당을 규탄하는 히비야 공회당 집회, 9월 6일: 남조선 대사관원이 관여하였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과 관련한 규탄 성명, 10월 14~20일: 남조선 청년학생들의 애국투쟁을 지지하는 재일조선청년학생들의 지역 단위 집회, 11월 6일: 남조선의 민주수호국민협의회가 낸 시국 선언문 지지 성명, 11월 13일: 총련 일꾼 등 1만5000여 명의 가두선전, 삐라 살포〉로 이어진다. 이 와중에 김일성은 9월 15일 북한을 찾은 조총련 간부들을 만나 “총련 일꾼들을 혁명화할 데 대하여”라는 주제의 담화를 하였다.
 
 
  6·15선언 이후 자신감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가운데 조총련 일지가 ‘대통령’이란 직함을 붙여 부른 유일한 사람은 김대중이다.
 
  〈2000년 6월 13일: 위대한 김정일 장군님과 김대중 대통령의 력사적인 평양 상봉 진행(注-조총련도 북한처럼 ‘정상회담’이란 용어를 쓰지 않는다).〉
 
  2000년 6월의 김대중·김정일 회담과 6·15선언은 조총련에는 새로운 기회가 되었다. 과거 공안기관의 수사대상이던 조총련 소속 북한 공작원들이 해외민주인사로 둔갑, 공개적으로 서울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런 자신감이 조총련 일지에서도 묻어난다. 특히 조총련과는 불구대천의 원수 사이이던 재일거류민단(在日居留民團)이 굽히고 들어오는 모양새로 공동행사가 여기저기서 벌어진다.
 
  〈2000년 8월 11일: 6·15 공동성명 환영, 8·15 해방 55주년 기념 총련, 민단 이쿠노 동지부 납량 대회, 진행. 1599명의 동포들 참가(다른 지역에서도 잇따라 공동행사).
 
  8월 24일: 총련 중앙부의장을 비롯한 대표들, 민단 중앙에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투쟁을 함께할 총련 중앙의 제의서를 넘겨줌.
 
  9월 30일: 북남공동선언 지지 나라 현 ‘완코리아마당’(나라 현의 총련본부와 민단지방본부 공동 주최), 나라조선초급학교에서 진행(注-개최지가 조총련 소속 학교로서 주도권을 누가 잡았는지 알 수 있다).
 
  11월 9일: 총련 중앙위원회 제18기 4차 회의에서 서만술 제1부의장, “새로운 유리한 정세에 맞게 광범한 동포들과의 사업을 보다 잘하여 운운” 보고.
 
  12월 15일: 조총련의 금강산 가극단, 남조선 서울에서 첫 공연, 남조선 인민들 절찬, 공연마다 초만원.〉
 
 
  일본인 납치 가담, 드러나다
 
  조총련의 60년간 활동일지는 2002년 9월 17일의 사건을 자랑스럽게 적고 있다.
 
  〈위대한 김정일 장군님께서 평양에서 일본 수상 고이즈미 준이치로와 상봉하시고 조일 평양선언에 서명하시었다. 총련 중앙 서만술 의장, 지지 환영 담화 발표.〉
 
  그러나 이른바 ‘조일(朝日)평양선언’엔 6·15선언을 계기로 잘나가던 조총련에 치명타를 안기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김정일이 고이즈미에게 일본인 납치 사실을 시인하고, 생존자를 임시 방문식으로 귀국시키는 약속을 한 것이다(귀국한 피랍자들은 일본 정부의 결정으로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김정일이 시인한, 북한 공작원들의 일본인 납치에 조총련이 관련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본의 언론과 여론으로부터 집중적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분노한 여론에 밀린 고이즈미 정권은 수교 회담을 접고, 대북(對北) 강경책으로 선회하였다. 조총련의 쌓이고 쌓인 악행(惡行)이 드디어 보복을 부르는 순간이었다. 이때부터 (일지에 나타난) 조총련의 활동은 수세적으로 위축된다.
 
  〈2002년 11월 13일: 일본 공안조사청 차장이 총련에 대하여 ‘파괴방지법 적용’ 운운한 것과 관련, 조사청을 찾아가 강력 항의.
 
  12월 20일: ‘랍치문제’를 구실로 한 일본 반동들의 책동이 격화되는 속에서 총련과 재일동포들에게 조선해외동포원회위원회에서 편지를 보내옴.〉
 
  북한과 조총련에 가장 호의적 보도를 해온 《아사히신문》은 2003년 1월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신 ‘북조선’으로 표기하기로 하였다. 《요미우리신문》 등 다른 언론은 그전부터 ‘북조선’이라고 썼다.
 
  〈2003년 1월 22일: 총련 중앙 대표들, 아사히신문이 정초부터 공화국의 호칭을 왜곡하고 불공정한 편향 기사를 연재하고 있는 데 대하여 도쿄 본사를 찾아가 엄중항의(1월 24일엔 일본신문협회와 민간방송연맹을 찾아가 항의).
 
  2월 18일: 총련 중앙 부의장, 일본의 우익 반동세력과 언론이 ‘만경봉-92호’를 비방 중상하고 총련과 의도적으로 관련시키면서 여론을 오도하고 있는 것과 관련하여 조선회관에서 기자회견.
 
  3월 5일: 각지에서 조선학교 학생들에 대한 폭행, 폭언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것과 관련하여 일본 법무성에서 학교를 찾아 실정 료해.〉
 
 
  김현희를 가짜로 몬 이유
 
일본인 하라 다다아키의 납치범 신광수.
  일본인 납치 문제의 폭로와 세계화엔 김현희씨가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조총련은 1987년 11월 29일에 일어난 김승일-김현희의 대한항공 폭파 사건(탑승자 115명 전원 사망)에 신속하게 반응하였다.
 
  1987년 12월 3일자 조총련 일지는 〈남조선 비행기 실종 사건과 연관시켜 악랄한 반공화국, 반총련 소동을 일으키고 있는 전두환, 로태우 역적 도당의 모략 책동에 항의하여 각지에서 긴급집회, 가두선전 진행〉이라 적었다. 12월 12일엔 〈우리 학교 학생들에 대한 폭행 사건을 방지할 것을 일본 경시청 당국에 요구〉하고, 15일엔 〈일본인 명의의 여권을 가진 여성(注-김현희)을 남조선으로 끌고 간 것과 관련하여 담화를 발표〉하였다. 김현희와 관련된 거짓말은 이 무렵 일본에서 제작되어 한국으로 들어온다. 1988년 2월 4일 〈총련 중앙 리진규 제1부의장, 남조선 비행기 사건이 자작 연극이라는 데 대하여 기자회견에서 폭로〉, 14일엔 〈우리 동포 상공인들과 일본의 경제계, 언론계 등 인사 420여 명이 모여 남조선 비행기 실종 사건의 진상을 옳게 인식할 데 토대하여 조일 경제인들의 교류를 한층 강화해 나갈 데 대하여 논의〉라고 적었다.
 
  김현희는 자신에게 일본어를 가르친 ‘리은혜’라는 납치되어 온 일본 여성의 존재를 증언하였다. 2002년 9월 17일 김정일은 고이즈미에게 다구치 야에코의 실존을 인정,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고 통보하였다. 다구치가 다른 피랍자 하라 다다아키와 결혼하여 살았는데 하라도 간경변으로 죽었다고 하였다. 두 사람의 무덤은 홍수 때 유실되었다고 했다. 일본인들은 이런 설명을 믿지 않았다.
 
  이 하라 다다아키를 납치한 북한 공작원이 신광수(辛光洙)였다. 1985년 그는 납치해 간 하라 다다아키의 신상정보를 이용, 일본인 여권을 만들어 한국에 들어왔다가 안기부에 체포되었다. 신(辛)은 “김정일이 나를 불러 직접 납치를 지시하였다”고 진술하였다. 안기부는 이 사실을 일본 경찰에 알렸으나 일본 측은 공개수사를 하지 않았다.
 
  하라는 조총련 오사카상공회 이사장 이삼준(李三俊)이 자영하던 중국 요릿집의 요리사였다. 하라를 아오시마 해안으로 유인, 손발을 묶어 자루 속으로 집어넣을 때 이삼준 등 조총련 3명이 합세하였다. 신광수는, 하라를 대기 중이던 북한 공작선에 실어서 북한으로 데리고 갈 때 동승하였다.
 
  김대중 정부는 출범 직후 신광수를 석방시켜 두었다가 김정일과 만나고 온 뒤 63명의 비전향 장기수와 함께 북으로 보내버렸다. 김정일의 반인도범죄 물증을 은폐하는 데 협력한 셈이다. 노벨평화상 수상자 김대중의 신광수 북송은 일본의 친북 지식인들까지도 유구무언(有口無言)으로 만들었다.
 
 
  코미디 수준으로 떨어진 활동
 
《총련주요활동일지》에 실린 조총련 결성 30주년 기념대회 모습.
  조총련의 60년 일지 최근 연도 부분은 거의 코미디 수준이다.
 
  〈2010년 11월 23일: 총련 본부 등, 대를 이어 계승되는 충실성을 확고한 신념으로 간직하고, 총련 조직 안에 위대한 김정일 장군님과 경애하는 김정은 원수님의 사상체계, 령도체계를 확립하는 사업을 힘차게 벌려나갈 것 등을 토의.〉
 
  여기서 김정은의 이름이 처음으로 공식 언급되었다. 조총련은 3대 숭배에 돌입한다.
 
  〈주체 102(2013)년 2월 13일: 경애하는 김정은 원수님께서 조선대학교의 조청(朝靑) 위원회 성원들이 올린 편지를 보아주시었다.〉
 
  일지에는 ‘보아주시었다’라는 노예적 표현이 수십 차례 나온다.
 
  〈4월 3일 공화국의 최고 존엄을 해치며 핵전쟁 침략 책동에 광분하는 미국과 남조선 역적 패당을 비롯한 추종세력들을 단죄 규탄하는 긴급회의, 조선회관에서 진행. 총련 중앙 대표들, ‘아사히신문’이 조국을 모독하고 총련을 비방 중상하는 기사를 게재한 것과 관련하여 도쿄 본사를 찾아가 강력히 항의.〉
 
  한때 가장 호의적이었던 《아사히신문》이 규탄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조총련의 고립을 상징한다.
 
  일본 법무성 입국관리국은 작년 12월 한국 국적자가 45만7772명, 이른바 ‘조선적자(朝鮮籍者)’(조총련)가 3만3939명이라고 발표하였다. 조총련 소속원은 전체 외국인의 1.5%이며, 특히 전년도보다 5.1% 줄어들었다. 민단의 7.4%이다. 지금 추세로는 수년 내에 민단의 5% 이내로 감소할 것이다. 한국과 일본에서 양심 있는 사람들이 뭉쳐 조총련의 정체를 폭로한 덕분이기도 하지만 근원적으론 60년간 쌓아온 악업(惡業)의 무게로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자랑스럽게 낸 일지는 그런 악행의 목록집이다. 30년 전 김현희를 가짜로 몬 것까지 자랑스럽게 적었으니 조총련이 북한 정권의 복사판이란 주장이 설득력 있다.
 
  일지엔 〈조국에서 보내온 교육원조비와 장학금〉 수령표가 붙어 있다. 60년간 북한 정권이 161회에 걸쳐 475억6919만390엔을 조총련에 내려보낸 것으로 나와 있다. 한국 돈으로 약 5000억원이다. 이건 사실일까? 홍형 전 공사는 “조총련이 북으로 보내준 돈의 1%나 될까요? 내려보냈다는 돈도 조총련이 거둔 걸 그렇게 포장한 게 아닐까요?”라고 했다.
 
  조총련은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는 데 돈과 기술, 그리고 부품까지 제공하였다. 대량살상무기 개발과 반인도 범죄에 가담한 조총련은 일지 발간을 통하여 스스로 “우리는 조선노동당 일본 지부였다”고 고백한 셈이니 새로운 시각에서 조총련 문제를 다룰 필요가 있겠다.
 
 
  왜 일본에 조총련 비호를 따지지 않는가?
 
  1. 일본은 우방국을 뒤엎겠다는 조직이 거의 멋대로 파괴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특권과 특혜를 주었다. 정치적 비호도 서슴지 않았다. 국교 단절이나 선전포고에 해당하는 행위이다. 한국 정부는, 국가 차원에서 이에 대한 책임 추궁을 하지 않았다. 국내 좌파세력은 친북(親北) 노선의 연장선상에서 친조총련 노선이므로 그렇다 치고 보수세력이 무관심하다. 조총련 문제는 독도나 종군위안부 문제보다 더 긴급한 사안인데도.
 
  2. 좌파 정권 시절, 조총련을 해외동포 조직이나 해외민주화 세력으로 간주하여 도와주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는 북한 정권 지원과 똑같은 차원의 반역이다. 이에 대한 국가적 조사가 필요하다.
 
  3. 일본과 북한이 합작한 재일동포 북송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평화시기에 있었던 가장 비참한 반인도적 범죄였다. 북송된 사람들 중 상당수가 지금도 강제수용소에 갇혀 있고 나머지는 거주 이전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니 진행 중인 사건이다. 한국과 일본이 협력, 북한을 압박, 해결책을 모색해야 할 의무가 있다.
 
  4. 대한민국 정부 이상으로 확고한 입장을 견지, 조총련을 상대로 이념전장에서 고군분투(孤軍奮鬪)해 온 《통일일보》의 역사적 역할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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