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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밀분석

오늘날의 김정은을 있게 한 권력투쟁史

“수소폭탄으로 세계가 나를 두려워하게 하라!”

글 : 김승철  북한개혁방송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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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은, 포사격·전투기 훈련 등 武器 등장할 때 가장 즐거워해
⊙ 親兄(김정철) 얼굴에 구슬 던지고, 경기 뒤진다고 농구공 발로 차
⊙ 이복兄(김정남) 암살 시도하며 야망 키워
⊙ 김정은 집권을 관통하는 유일한 코드는 ‘강경 또 강경’… 정치·군사·사회 全 분야에서 나타나
⊙ 절대권력 위해 살아온 김정은… 先制對應 않으면 민족悲劇 초래할 것

김승철
⊙ 북한 함흥수리대학 졸업, 함경남도 중소수력발전설계사업소 설계원, 러시아 벌목공,
    1994년 대한민국 입국, 북한연구소 연구원. 현재 북한개혁방송 대표.
김정은은 전투기, 포사격 등 무기가 등장하는 곳에서 가장 기뻐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로동신문》은 김정은이 2016년 첫 軍관련 활동으로 인민군 대연합부대들의 포사격 경기를 시찰했다고 보도했다.
  2016년 1월 6일 오전 10시 30분, 북한발 인공지진 소식에 놀랐던 세계는 낮 12시 30분에 발표된 북한의 ‘수소탄 시험 완전성공!’ 보도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더 큰 충격은 조선중앙방송이 공개한 김정은의 수소탄 시험 진행 명령서에 적힌 문장이었다. 김정은은 〈온 세계가 주체의 핵강국, 사회주의 조선, 위대한 조선로동당을 우러러보게 하라!〉고 썼다. ‘당(黨)’을 김정은과 동격으로 보는 북한의 표현법을 고려할 때 ‘온 세계가 나 김정은을 두려워하게 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수소탄 시험으로 세계가 자신을 두려워하게 만들겠다는 김정은의 사고방식은 광기(狂氣)가 극한에 도달한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북한에 대한 압박과 제재를 수소탄 시험이라는 최악의 수단으로 극복하겠다는 김정은의 배짱은 다음 날 《로동신문》 1면에 직접 사인한 명령서 사진을 공개함으로써 다시금 확인됐다. 김정은은 압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 강하고 극단적인 방법으로 도발하고 있다.
 
  이번 수소탄 시험을 계기로 본 김정은의 정신·심리적 상태를 유년기와 권력쟁취 과정을 통해 분석해 봤다. 그에게는 두려움이나 자제와 같은 코드가 아예 없는 것처럼 보인다. 김정은으로 하여금 합리적인 이성(理性)과 지성(知性), 본능(本能), 인식(認識)을 삼켜 버리게 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집권 4년간 고위간부 130여 명 처형
 
  우선 김정은은 상대나 주민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갖도록 하는 것이 자신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김정은은 후계자로 지명되자 가장 먼저 이복형 김정남의 측근들을 제거했고, 고모부 장성택을 잔인하게 총살했다. 장성택을 총살한 직후 조선중앙방송에 등장한 김정은은 한때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얼마 후 14.5mm 고사총으로 인민무력부장 현영철을 형체도 없이 처형할 때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환한 웃음으로 나타났다. 집권 4년간 130여 명의 고위간부들을 처형, 숙청한 김정은은 군 고위간부들의 별을 뗐다 붙였다를 반복하며 절대권력을 즐기고 있다. 권력 2인자 황병서 총정치국장이나 박영식 인민무력부장, 최룡해 로동당 비서는 김정은 앞에서 굴종하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다.
 
  김정은은 현지시찰을 할 때 군인·주민들과 포옹하고, 악수하는 자연스러운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어린이와 동물을 보면 매우 좋아하는 꾸밈없는 모습도 보인다. 김정은이 군 관련 행사 중에서 가장 즐거워하는 때는 포사격과 비행기 훈련 등 무기를 갖고 놀 때이다. 지난해 7월 ‘인민군 항공 및 반항공군 비행지휘성원들의 전투비행술경기대회-2015’ 행사장에서 전투기를 바라보는 김정은은 너무 좋아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김정은은 권력을 다루는 면에서는 히틀러 못지않은, 어떤 경우에는 히틀러보다 더 잔인하고 악랄한 모습을 보여준다. 권력에 관한 한 김정은은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절대 악(惡)의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고 있다. 수소탄 시험으로 세계가 김정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한 위협도 하겠다는 김정은의 심리상태를 알려면 김정은의 성장과정을 깊숙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어린 시절, 좋아하는 분야에 강한 집착 보인 김정은
 
김정은의 수소탄 실험 진행 명령서. 그는 “온 세계가 조선로동당을 우러러 보게 하라”고 명령했다.
  김정은의 유년시절은 권력과 야망이라는 두 가지 코드로 설명할 수 있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계모 밑에서 눈치를 보며 성장한 김정은의 아버지 김정일(金正日)은 10대 후반부터 이성(異性)에 집착했고 즐겼다. 대학시절에는 마음에 드는 여성을 보면 내각상이나 부상을 하는 아버지를 둔 친구들의 집을 빌려 즐길 정도였다. 김정일은 1968년경부터는 대학 동창생 리평의 부인이었던 성혜림과 비밀 연애를 시작했다. 1969년에 성혜림을 리평과 이혼시키고 동거에 들어가 1971년에 장남(김정남)을 낳았다. 아들을 밥상 위에 앉혀 놓고 밥을 먹을 정도로 자식사랑이 가득하던 1970년대 초 김정일은 또 다른 여성 고영희를 좋아하게 된다.
 
  1975년부터 김정일 비밀파티에서 옆자리에 고정적으로 앉았던 만수대예술단 무용배우 고영희는 이듬해부터 동거하다시피 했다. 평양시 순안비행장 부근의 비밀별장인 ‘희영각’에서 청소를 담당했던 탈북여성의 증언에 의하면, 일주일에 두세 번 김정일과 고영희가 희영각을 찾아 폴라로이드 사진을 서로 찍어 주며 생일파티도 하고 포르노 영화도 보았다고 한다. 1977년 여름 어느 날 고영희가 침실에 갖추어 놓은 칫솔을 들고 “이건 저번에 내가 사용하던 칫솔이 아닌데 누구 다른 손님 오셨나요?”라며 경계심을 드러냈다고 한다.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의 독촉으로 1974년 김영숙과 결혼했는데 이 때문에 신경쇠약과 우울증을 앓게 된 성혜림은 1975년 병치료를 구실로 모스크바로 쫓겨났다.
 
  당시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가 성혜림에게 “아들(김정남)을 내놓고 물러나라”고 요구했는데 그 무렵 김정일의 애인이었던 고영희는 권력세계의 비정함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1981년 김정일과 고영희 사이에 김정철이 태어나고 1984년에는 김정은이 태어났지만 공개적으로 살림을 꾸릴 수는 없는 처지였다. 김정일의 외조카 이한영씨가 쓴 책 《대동강 로열패밀리》에 의하면, 성혜림이 낳은 맏아들 김정남(1971년 출생)은 1975년이 돼서야 김일성의 손자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아들 둘을 데리고 김정일이 제공하는 전국의 별장과 특각을 돌아다니며 떠돌이 생활을 했던 고영희로서는 자식들의 미래가 걱정됐다고 한다. 계모 김성애와 이복형제들에 대한 편애(偏愛)로 인한 김일성과 김정일의 갈등은 1990년대 들어 충돌양상으로 번진 것도 고영희를 두렵게 했던 원인 중 하나였다.
 
  1980년에 김정남은 유럽으로 유학을 갔고, 김정철·정은 형제도 1990년대에 차례로 유학을 갔다. 김정남은 1991년에 북한으로 돌아왔지만 김정철·정은 형제는 1990년대를 유럽에서 보냈다. 감수성이 예민한 10대의 어린 시절을 부모와 떨어져 외국에서 보낸 김정은에게는 정상적인 인성이 형성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스위스 유학시절 김정은은 학우들과 정상적인 관계를 형성하지 못해 멍청하다는 뜻의 ‘딤(dim)정은’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학교에 출석하지 않는 날이 연중 100일을 넘어 성적도 하위에 속했다. 형 김정철과 달리 농구와 축구를 좋아하고 강한 승부욕을 보였다. 김정은은 마이클 조던의 광팬이었다. 그는 자신의 단짝 친구들에게 고급제품들과 북한의 별장 사진 등을 보여주며 과시하고 인정받으려 했다고 한다. 유학시절에 대한 동창들의 기억을 종합해 보면, 김정은은 공부에는 관심이 없는, 철부지 소년이었으나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서는 강한 집착을 보였다.
 
 
  ‘작은 대장’ 불리는 것 싫어해
 
김정은은 2009년 김정일 후계자로 등장했고 2012년 최고 권력자가 됐다. 그의 시기를 관통하는 핵심 단어는 바로 ‘강경 또 강경’이다. 사진은 김정은이 올해 신년사에서 제시한 과업을 철저하게 관철할 것을 촉구하는 대규모 군중 대회.
  일본인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는 자신의 책 《김정일의 요리사》와 여러 인터뷰에서 “김정일이 간부들에게 김정철, 김정은을 소개할 때 대장복을 입혔는데 김정은은 김정일을 만나러 온 군과 당의 간부들에게 큰소리를 치고 하대(下待)를 하는 등 어려서부터 권력지향적인 행동을 보였다”고 밝혔다. 김정은이 여덟 살 되던 해에 구슬 게임의 일종인 오델로 게임을 하다가 형(김정철)이 구슬을 놓치자 화를 참지 못하고 형의 얼굴을 향해 구슬을 던진 일도 있었다고 한다. 김정은은 10살 때의 어느 날 자신의 이모가 ‘작은 대장’이라 부르자 못마땅해하며 큰 소리로 화를 내는 바람에 이후 이모는 ‘김대장’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런 일도 있었다. 2003년 김정일이 북한 함경북도 청진시를 현지시찰할 때 그곳에서 김정은이 대학 농구선수팀에 섞여 경기를 치렀다고 한다. 그런데 김정은이 속한 팀이 상대팀에 밀리자 김정은은 아버지 김정일과 어머니 고영희가 보고 있는 데서 농구공을 발로 차 버리고 경기장을 뛰쳐나갔다고 한다. 김정은은 자신의 기분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김정일은 이런 김정은을 더 아낀 것으로 추정된다. 후지모토 겐지는 “김정일은 평소 당이나 군 간부들 앞에서 김정은에 대해서는 ‘나를 닮았다’며 만족스럽게 이야기했고 ‘김정철 그 녀석은 안 돼. 계집애 같아서’라고 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2000년 들어 아버지 김정일은 맏아들 김정남을 후계자로 삼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김정남이 ‘고난의 행군’ 후반기인 1996년부터 아버지에게 “나라가 살기 위해서는 문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내가 후계자가 되면 개혁개방을 하겠다”고 주장하고 다니던 김정남은 1998년경에 아버지 김정일과 노선문제로 크게 싸우고 눈밖에 나 중국에 나가 있는 시간이 늘면서 후계자의 자리에서 멀어졌다.
 
  김정남이 아버지와 크게 싸우고 눈밖에 났던 1990년대 말부터 고영희와 그의 측근들은 김정철·정은 형제를 후계자로 내세우기 위한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김정남과 그의 아들 일행 4명이 2001년 5월 1일 일본 하네다 공항에서 체포돼 중국으로 추방되는 사건이 벌어진 이후 북한군 내부에서는 김정은의 생모(生母) 고영희를 ‘존경하는 어머님’이라며 우상화하기 시작했다. 고영희가 어머님이 된다는 것은 그 아들이 후계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아들이란 바로 김정일이 자신을 닮았다고 내세우던 김정은인 것이다.
 
  김정은 집권 첫해인 2012년 5월 북한 간부들을 대상으로 고영희 우상화 기록영화 ‘위대한 선군조선의 어머니’ 시청각교육을 실시했는데, 김정일과 고영희가 군부대를 시찰하는 장면이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시찰했던 시기는 김일성 사망(1994년) 이후였다. 1시간 25분짜리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어린 김정은과 고영희가 함께 있는 사진 3장이 나온다. “어머님께서는 존경하는 김정은 대장동지께서 자기의 실력으로 인민 앞에 나설 것”이라는 내레이션도 이어졌다.
 
 
  “개새끼! 조그만 새끼가 나를 죽이려고 해”
 
  다시 2000년대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2002년 5월 고영희와의 경쟁에서 패하고 오랫동안 병치료를 하던 성혜림이 사망하면서 북한 내부 상황은 김정은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그런데 2년 후 2004년 5월 고영희 역시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김정은은 위기감을 느꼈다고 한다. 김정은이 스무 살 때였다. 위기 타개책은 김정남 암살사건으로 이어졌다. 2004년 11월, 유럽의 오스트리아에 살고 있는 이종사촌 누이 김옥순을 찾아갔던 김정남이 암살당할 뻔했으나 사전정보를 입수한 오스트리아 내무부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다. 고영희가 사망하자 곧바로 경쟁자인 이복형 김정남을 암살하려 했다는 것은 김정남, 김정은 친위세력 간의 암투 역시 치열했음을 보여준다. 흥미롭게도 고영희가 사망한 이듬해인 2005년에 김정일 현지지도를 따라다니는 횟수가 가장 많이 늘어나기 시작한 사람이 바로 황병서 당시 당 부부장으로 2006년에는 가장 많은 횟수를 기록했다. 황병서는 2002년 군대 내에서 고영희(김정은 생모)를 ‘존경하는 어머님’이라고 내세우는 우상화 사업을 담당했었다고 한다. 2005년에 부상(浮上)한 또 한 사람은 혁명화로 처벌받은 장성택을 대신한 리제강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이다. 김정일이 김정은 측근들에게 힘을 실어 준 것이다.
 
  하지만 2007년을 계기로 상황은 역전돼 김정남에게 기회가 왔다. 고혈압과 당뇨 등 고질병을 앓아 온 김정일이 2006년 하반기부터 건강이 악화되자 김정남은 외국에서 아버지의 치료문제를 담당하면서 부상하기 시작했다. 2008년 8월 여성군부대를 현지시찰하던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에도 김정남이 큰 역할을 했다. 김정남의 요청으로 2008년 10월 24일 프랑스 뇌신경외과 전문의(專門醫·프랑수아 사비에르 루)가 베이징을 거쳐 평양으로 들어가 김정일을 치료하기도 했다. 미확인 뉴스와 소문이지만 당시 김정일이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장성택은 김정남을 내세우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2008년 9월경 의식을 차린 김정일은 김정남을 내세우려 하던 장성택을 견제하고 김정은을 다시 내세웠다고 한다. 김정일 뇌졸중 치료에서 핵심역할을 하면서 김정남에게 기회가 오는 듯싶었지만 2009년 1월 8일 김정은을 후계자로 지명하면서 다시 역전됐다. 2009년 1월 15일자 《연합뉴스》가 ‘북한 김정일, 3남 김정은 후계자 지명’이라는 첫 보도를 한 지 열흘 만인 1월 24일 베이징 국제공항에 나타난 김정남은 일본기자들을 만나 “(후계자 문제는)아버지가 결정하실 문제”라고 밝혔다. 아직은 아버지의 결정이 완전한 것이 아니며 바뀔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자신에게도 기회가 올 것이라는 의미였다.
 
  이렇게 되자 김정은은 김정남에게 노골적인 선전포고를 했다. 바로 ‘우암각 사건’이다. 김정남이 해외에서 후계자 경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강조하고 있던 2009년 4월 3일, 평양시 중구역에 있는 우암각에 국가안전보위부 부원들이 들이닥쳤다. 그 자리에 있던 김정남의 측근들은 총격전 끝에 모두 체포됐다. 국가안전보위부를 장악한 김정은 측근들이 “김정남이 평양에 귀국한다”는 거짓 정보로 김정남의 측근들을 유인했다고 한다. 당과 군대, 보위부 등에 있던 김정남의 측근들은 줄줄이 체포됐고 이 소식은 중국에 있던 김정남에게 알려졌다. 다음 날인 2009년 4월 4일, 김정남은 베이징에 있는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김정은이 내 동창들을 잡아갔어. 조심해야 하겠어”라고 했고, 3일 후 제3국의 친구에게 “당분간은 평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해 4월 말 김정남은 또 다른 친구에게 “개새끼! 조그만 새끼가 나를 죽이려고 해”라며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권력의 化身
 
김정은의 공포정치로 130여 명의 고위간부가 처형됐다. 왼쪽부터 리영호 인민군 총참모장,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변인선 총참모부 작전국장, 마원춘 국방위원회 설계국장, 한광산 노동당 재정경리부장.
  김정남과 김정은의 경쟁구도가 아버지 김정일의 뇌졸중으로 날카로워진 2009년은 후원세력들 간의 권력투쟁이 절정으로 치닫기 시작한 해였다. 2009년 8월 24일 밤 장성택의 형이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차수였던 장성우(76세)가 사망했다. 장성택은 2006년 7월 사망한 형 장성길(중장)에 이어 두 형을 모두 잃었는데 모두 미묘한 시점에 형님들이 모호한 원인으로 사망한 것이다. 김경희, 장성택 부부는 김정남의 가장 강력한 후원세력이었지만 서서히 무력화하고 있었다.
 
  장성택을 필두로 한 김정남 측의 보복은 2010년 6월 2일 새벽 0시 45분, 당중앙위원회 제1부부장 리제강(80세)이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정남 세력과 김정은 세력, 다시 말해 장성택과 리제강 세력이 벌이는 피의 후계자 권력쟁탈전이 정점(頂點)에 도달했다. 리제강이 죽은 이틀 뒤인 2010년 6월 4일, 부드럽고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김정남이 마카오에서 《중앙일보》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그는 “아버지는 건강하고, 나는 유럽으로 망명하지 않을 것”이라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인터뷰가 있은 지 일주일도 안 된 2010년 6월 15일 KBS는 “김정일 위원장의 후계자로 떠오른 셋째 아들 김정은 측근들이 최근 장남 김정남을 암살하려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고 보도했다. 중국 정부의 도움으로 2차 암살위협에서 벗어난 김정남의 분노는 2개월 이후 아버지 앞에서 폭발했다. 2010년 8월 26일, 창춘에서 중국 방문길에 나선 김정일을 만난 김정남은 동생의 암살위협에 분노를 터뜨렸다고 한다. 김정남의 항의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노동당 창건 기념일 하루 전인 2010년 10월 9일 일본기자들을 만나 3대 독재세습을 비판하면서 개혁·개방을 주장했다. 후계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긴 김정남의 마지막 저항이었다. 이후 여러 경로를 통해 김정은으로부터 최후통첩 식의 살해협박을 받은 김정남은 더 이상 언론에 나타나지 않았다. 김정은은 이복형 김정남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하며 권력의 화신(化身)이 됐다.
 
  김정은의 성장과정이나 후계자 지명을 전후한 시기의 권력투쟁 방식을 보면 몇 가지 중요한 특징들이 있다. 목표에 대한 열정과 집요함, 행동에서의 공격성과 즉흥성, 수단과 방법에서의 무자비함이 김정은이 갖고 있는 권력의지의 특징이다. 집요하고 강력하며 무자비한 권력의지는 김정은이 성년이 된 이후 더 강해졌다.
 
 
  김정은, 2012년 리영호 사망 후 호전적으로 변해
 
  김정은의 권력의지와 심성은 2009년 1월 후계자로 지명된 이후 다양한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김정은이 후계자가 된 지 열흘이 되던 2009년 1월 17일 북한 총참모부는 성명을 통해 “정전상태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대결은 곧 긴장격화이며 그것은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전쟁”이라면서 “전면대결 태세에 진입해 징벌을 가하겠다”고 협박했다. 이어 1월 30일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변인 성명에서는 “시간도 주었고 알아들을 만큼 충고도 하였다”며 도발을 시사했고 그해 말 제3차 서해교전을, 이듬해 2010년 3월에는 천안함 폭침을 감행했다. 2010년 11월에는 연평도 포격도발을 자행했다.
 
  서해교전과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도발은 ‘샛별대장, 청년대장의 위대한 업적’으로 포장돼 2010년 9월의 당대표자회에서 김정은이 대장의 군사칭호를 받고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 되는 데 기여했다. 2009년을 계기로 북한의 대남도발이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된 것은, 권력을 위해 수단과 방법,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극단적인 선택을 마다하지 않는 김정은의 권력욕에 기인했다. 통치자금 마련을 위해 2009년 12월 1일에 전격적으로 실시했던 화폐교환은 김정은의 또 다른 과격성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2011년 12월 김정일이 심장마비로 사망한 이후 북한 지도자가 된 김정은은 2012년 들어 자신의 권위와 정당성을 남한사회로까지 확산하려 했다. 그해 북한 신년공동사설은 “경애하는 김정은 동지는 곧 위대한 김정일 동지”라고 했고, 뒤이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정책국 공개질문장’ 형식으로 9개 항목의 질문서를 우리측에 보내 왔다. 곧이어 ‘겨레의 통일염원을 짓밟고 북남관계를 최악의 파국에 몰아넣은 이명박 역적패당의 10대 죄악을 결산한다’는 제목의 조국통일연구원 비망록도 발표했다.
 
  김정은은 군사적으로는 전방위적이고 전면적이며 공격적인 도발을 감행하고 남북관계에서는 북한의 정치적 우위를 강조하며 정당화를 시도해 왔다. 김정은의 집권 1년 차였던 2012년 북한은 남한의 대북정책과 언론이 김정은의 소위 ‘최고존엄’을 건드린다며 그해 4월 23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 특별작전행동소조 통고’를, 같은 해 6월 4일에는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공개통첩장’을 발표하고 남한의 주요 언론사 좌표까지 공개하며 협박했다. 김정은 집권 1~3년 기간에 북한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바로 김정은의 ‘최고존엄’이었다.
 
 
  권력이 유일한 판단기준
 
김정은에게는 없는 사진이다. 김정일(앞줄 왼쪽)과 성혜림 사이에서 낳은 어린 김정남(앞줄 오른쪽)과 김정일의 조카 이한영(뒷줄 오른쪽). 김정남은 이복동생 김정은에게서 암살당할 위기를 몇 차례 겪었다.
  김정은은 집권 첫해 모란봉악단을 새로 설립해 록키와 미키마우스 등 미국의 아이콘들을 과감하게 소개하며 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2012년 7월 리영호를 숙청하면서 본격적인 강경정책을 폈고, 그해 10월 리영호가 죽고 난 다음에는 더욱 호전적으로 변했다. 2012년 12월 북한은 ‘은하 3호’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했고 2013년 2월 제3차 핵실험을 실시했다.
 
  김정은의 정치, 군사적 도발은 날이 갈수록 강도가 높아졌다. 2013년 4월에는 개성공단을 폐쇄했고, 2013년 12월에는 고모부 장성택을 공개 총살했다. 2015년 4월에는 강건군관학교 마당에 군 주요간부들을 모아 놓고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을 절차도 없이 죽였다. 후계자 시절부터 지금까지 7년 동안의 김정은 집권시기를 관통하는 하나의 코드가 있다면 ‘강경 또 강경’이다. 이러한 강경대응 방식은 정치와 군사, 외교, 조직과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다.
 
  김정은이 분야와 대상을 가리지 않고 강경을 고수하는 이유는 김정은의 인식과 사고방식이 권력이라는 단 하나의 유일기준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2009년부터 지금까지 북한의 대남(對南)도발과 남북관계, 북·중관계, 정치적 숙청과 주민통제 등 모든 선택과 결정에 있어 전후좌우를 고려할 것 없이 목적 하나에만 집중해 왔다. 이런 방식이 가능한 것은 북한 체제가 권력과 정권, 경제와 사회, 내각과 인민이 분리되어 자립해야 하는 시스템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김정은으로서는 권력을 강력하게 틀어쥐고 주민을 철저히 통제한다면 체제를 자기가 원하는 대로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김정은이 수소탄 시험을 결정하면서 “세계가 나를 두려워하게 하라”는 명령서를 공개한 것은 권력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과 손실도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극한의 광기(狂氣)에 빠져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권력을 위한 자신의 모든 행동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김정은의 사고방식이 얼마나 위험천만한지를 알 수 있다.
 
  북한에 대한 제재와 압박을 강화할 경우 김정은은 지난 반세기 넘게 쌓고 축적해 온 핵과 화학무기로 우리를 파멸시킬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이, 한·미·일(韓美日)과 유엔이 북한 김정은에 대해 신중하면서도 선제대응을 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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