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탈북자 김철진의 평양실록 ⑫ 권력의 새로운 중심이 된 초대소

박정희 대통령 애창곡 ‘낙화유수’ 부르다가 중징계받은 적도

정리 :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verhope@chosun.com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장성택 징계는 초대소 사유화했다가 발각된 것이 계기
⊙ 김정은도 수시로 초대소 찾아 휴양… 초대소 잘못 관리했다 숙청된 간부들 많아
북한에 외빈이 방문하면 숙소로 사용하는 백화원 초대소. 평양 외곽에 있다.
  북한 권력층 내 많은 사건은 초대소를 배경으로 일어났다. 북한 특권층의 전속 별장쯤 되는 초대소는 언제 어떻게 처음 만들어졌을까.
 
  196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6월 19일, 실질적인 김정일 체제가 수립됐다. 당시 김일성은 내각의 수상이었다. 김일성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김일성종합대학을 입학할 수 있었던 김정일은 졸업 후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에서 당 근무를 시작했다.
 
  당권을 틀어쥔 김정일은 1970년대에 들어서자 노동당 강령까지 고쳤다. ‘온 사회를 주체사상화하자’라고 명시하였던 것을 ‘온 사회를 김일성주의화하자’로 바꿨다. ‘당의 유일사상체계10대원칙’도 내놨다. 그에 근거한 당의 유일적 영도체제, 즉 사회주의의 변질형인 일인 독재체제를 수립했다. 이 모든 게 시작된 매해 6월 19일을 당 기관들이 명절처럼 기념하는 이유다.
 
 
  ‘이제 전투복을 벗고 쉬십시오’
 
‘김일성의 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던 정춘실 전 자강도 전천군 상업관리소장. 2중노력영웅 칭호를 받았다.
  당권을 장악한 김정일은 초대소, 별장을 북한 전역 각지에 건설하기 시작했다. 명목은 김일성을 위한다는 거였다. ‘이젠 전투복(김정은이 자주 입고 다니는 인민복)을 벗고 양복(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편하게 휴식하십시오.’ 김일성은 14세의 어린 나이에 압록강을 건너 조국의 광복을 위해 20 여 년간을 험악한 만주밀림 속에서 온갖 고생을 다하며 일본제국주의와 무장투쟁을 해서 광복을 가져왔고, 1950년 미국의 부추김을 받고 이승만 정부가 일으킨 6·25전쟁에서 미국을 비롯한 16개 자본주의 나라들의 침략 전쟁을 정의의 전쟁으로 맞서 승리를 이룩한 소위 ‘백전백승의 강철의 영장’이며, 100년이 지나도 복구할 수 없다고 하던 북한을 사회주의 강성대국으로 일으켜세웠기 때문에 이제는 그 노고를 생각하여 국가의 일은 자기와 당이 다하겠으니 쉬라는 것이 김정일의 주장이었다.
 
  초대소를 짓기 위한 특수부대를 창설했다. 인민무력부 직속의 1여단이었다. 공식명칭만 여단이지 실질적인 병력은 군단급이었다. 여단장은 중장(투스타)이 맡았고, 십여 개의 대대가 건설을 맡았다. 건설자재는 100% 고급 수입 자재였다.
 
  1여단은 운수대대, 목공대대, 미장대대 등 기술부대와 건설전문부대로 편성했다. 한 개 대대와 기술부대에서 한 개 소대씩 동원해 초대소와 별장들을 몇 호 특각 건설이라는 이름을 걸고 건설을 비밀리에 진행했다. 초대소, 별장 설계를 전문으로 맡아 진행하는 백두산 건축설계연구원도 설립했다. 중앙당 재정경리부 직속 기관으로 사무실은 평양시 중구역에 있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전국 각지에서 본격적으로 초대소를 짓기 시작했다. 삽을 뜨자 빠른 속도로 건물을 완성했다. 김일성이 전국 각지의 현지 지도를 한다고 하면서 별장, 초대소들에서의 호화생활을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1991년 북한 중앙TV와 《노동신문》이 김일성의 자강도 현지 지도 장면을 보도한 적이 있었다. 당시 김일성과 자강도 전천군 상업관리소 소장 정춘실이 함께 찍은 사진이 공개됐다. 정춘실은 2중노력영웅으로 ‘김일성의 딸’이라고 불리기도 한 인물이었다. 둘이 사진을 찍은 장소가 바로 자강도 강계시에 있는 100호 별장이다.
 
  자강도 강계시를 비롯해 평양시 강동군 봉화리, 룡악산, 함경남도 함흥시, 평안북도 천마산, 묘향산, 평안남도 평성시, 강원도 원산시 등 전국 각지에 초대소를 지어놓고 즐기던 김일성은 1994년 7월 8일 결국 사망했다.
 
 
  초대소에 울려 퍼진 ‘낙화유수’
 
  김일성이 사망하자 김정일은 1995년 초에 김일성이 이용하던 초대소의 일부를 자기의 전용으로 남기고 나머지는 각 도당위원회에서 1여관으로 등록하고 간부 전용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본인이 아직 나이가 많지 않은데다, 자기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일명 ‘혁명선배’들이 아직 즐비하니 이들을 의식해서였다.
 
  그런데 1995년 중순, 중앙당에 보고가 올라왔다. 상반기 함경남도 도당사업총화를 위한 도당전원회의가 함경남도 신흥군의 1여관에서 열렸는데 여기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졌다는 보고였다. 도 간부들이 모여서 파티를 하는데 감히 김일성의 별장 자리에서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이 즐기던 18번 ‘낙화유수’라는 노래가 울려 퍼졌다는 것. 이 자리에는 여성들도 함께였다고 했다.
 
  당시 북한에서는 〈민족과 운명〉이라는 영화를 많이 상영했다. 영화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여성들과 함께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라는 노래를 하며, 제일 좋아하는 18번이라고 소개하는 장면이 있다. 북한에서 이 노래가 박정희 대통령의 18번으로 알려진 이유다. 물론 북한 내에서는 금지곡이다.
 
  그런데 당 회의에서 이 금지곡을 불렀다. 함경남도 도당전원회의가 끝나고 내각 화학공업성 산하 제32화학건설연합기업소 후방부지배인이 기념 파티를 열었다. 이 자리에 예쁘고 노래를 잘하는 기업소 선전대 여성들이 참석했는데, 그중 한 여성이 ‘낙화유수’를 부르고 다른 여성들은 춤을 추었다.
 
  함경남도 함흥시는 북한의 화학공업도시라 불릴 정도로 화학 관련 중요 기관이 많이 자리하고 있다. 국가과학원 산하 함흥화학분원과 제2자연과학원(국방과학원) 산하 화학연구소와 화학재료연구소가 있고 흥남비료공장을 비롯한 크고 작은 화학공장들이 많다. 화학건설연합기업소가 있는 이유다. 기업소 지배인이 중앙당 후보위원이며 도당위원이므로 기업소후방부에서 도당 파티를 주관하게 된 것이다.
 
  그냥 지나갈 뻔한 사건이 불거진 이유는 이러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18번 노래를 부른 여성은 이후 도당책임비서의 눈에 들어 도당 도서실 사서로 승진했다. 이 여성이 간부들과 마음 놓고 교제하기 위해 남편에게 이혼을 제의했다. 이 남편은 제32화학건설연합기업소의 간부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은 아내 덕으로 당시 간부 차량의 운전사를 하고 있었다. 이혼 제안에 화가 난 남편은 아내에게서 들은 ‘파티에서 울려 퍼진 18번’에 관한 일을 중앙당 신소과에 편지로 제보했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김정일은 중앙당 조직지도부 검열부 부부장이었던 이제강을 내려보냈다. 책임지고 전말을 알아오라는 지시였다. 검열단의 결과보고를 받은 김정일은 ‘감히 김일성 주석의 별장 자리에서 여성들을 불러 못 부르게 되어 있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파티를 한 것은 신임을 받아온 함경남도 간부들이 나를 배신한 것’이라고 하면서 그 파티에 참석하였던 도급 간부들 전원을 철직(해임)했다. 도당 책임비서는 황해남도의 작은 군급기업소 지배인으로, 도 안전국(지금의 도 보안국) 국장은 소장(한국의 준장)에서 중좌(중령)로 좌천시켰다. ‘낙화유수’를 부른 여성과 노래에 맞춰 춤을 춘 여성들은 부르지 말라는 노래를 부르고, 간부들을 유혹해 알면 안 되는 초대소의 내부 상황을 안 죄로 관리소로 끌려갔다. 사회안전성(지금의 인민보안부) 교화국에서 관리하는 평안남도 북창군에 자리 잡고 있는 18호 관리소로 가야 했다. 비밀 보장을 위해서였다.
 
 
  장성택의 초대소 사유화
 
2002년 임동원 당시 대북특사가 방북했을 당시 백화원 초대소를 찾은 김정일.
  이 사건을 계기로 김정일은 김일성의 별장, 초대소들을 지방 당에 맡길 수 없다고 하면서 각 도당에서 관리하던 1여관들을 소환하여 당시 자신이 가장 신임하던 ‘로열 패밀리’의 일원, 장성택(張成澤)에게 관리하도록 했다. 장성택은 당시 중앙당 조직행정부 1부부장이었다. 1995년 후반의 일이었다. 김정일은 장성택에게 사회안전성(인민보안부)에 35국이라는 새로운 부서를 만들어 전국에 있는 별장, 초대소들을 호위사령부로부터 이관을 받아 보초와 순찰을 비롯한 경비를 맡아보고 관리하라고 지시했다. 이때부터 초대소가 김정일 전용별장, 초대소가 된 셈이다.
 
  이때만 해도 김정일은 하나밖에 없는 친동생 김경희의 남편인 장성택을 누구보다 제일 신임했다. 장성택은 그야말로 2인자로 최고의 권력을 행사했다. 사회안전성 정치국장도 자기의 측근이었던 채문덕을 대장 계급을 주며 임명해, 일명 ‘심화조’를 김정일의 지시 아래 꾸몄다. 김정일의 후계를 반대하던 북한의 고위 간부들을 숙청하기 위해서였다.
 
  김정일의 신임을 이용해 장성택은 중앙당5과(지금 6과) 사업에까지 간섭했다. 마음에 드는 여성들을 초대소에 근무하도록 직접 인사에까지 관여했다. 급기야는 김정일이 잘 이용하지 않는 초대소들 중 몇 개를 자신의 전용 초대소로 만들었다. 이곳에서 그는 자기를 잘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술과 환락의 파티를 즐겼다.
 
  이 사실이 발각된 건 2003년 어느 봄날이었다. 중앙당 서기실에서 가정서기를 맡아보던 서기가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김정일은 해당 서기에게 강원도 원산시에 있는 송도원 초대소로 가족들을 데리고 내려가 두 달 동안 바닷바람을 쐬면서 몸보신을 하라고 특별 휴가를 줬다.
 
  그 서기는 가족들을 다 데리고 송도초대소로 내려갔다.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나는 중앙당 서기실 서기’라고 하면서 김정일의 지시로 건강회복을 하려고 내려왔다고 신분을 밝힌 그에게, 초대소 단속초소의 보초병이 ‘중앙당 조직행정부 장성택 1부부장이나 사회안전성 35국장의 직접적인 지시가 없이는 들어갈 수 없다’고 답한 것이었다. 승강이까지 있었지만 서기는 끝내 초대소에 들어가지 못했다.
 
  송도원 초대소는 평양에서 차로 2~3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이었지만 김정일은 그때까지 한 번도 그곳을 이용하지 않았다. 송도원 초대소는 온전히 장성택 차지였다. 완전히 본인의 전용 초대소로 만들고 자기를 따르는 측근들과 파티를 즐기던 곳이었으므로 자기나 최측근인 35국장의 승인 없이는 그 누구도 출입시키지 말라고 단속초소에 엄격히 지시를 내린 것이었다. 아무리 김정일의 서기라고 밝혀도 소용이 없었던 이유다.
 
  김정일의 화는 그야말로 하늘로 치솟았다. ‘내 지시로도 통과할 수 없는 곳이 이 땅에 있는가’라며 당시 중앙당 조직지도부 간부부 1부부장이자 중앙당 본부 당 책임비서였던 이제강에게 강력한 검열단을 꾸리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제강이 초대소 문제를 본격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장성택은 이제강에게 ‘친구로 지내자’고 하면서 김정일에게 적당히 꾸며낸 보고를 올려달라고 부탁했다. 장성택과 가까이 지내는 것보다 김정일에게 충성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판단한 이제강은 검열결과를 사실 그대로 김정일에게 보고하였다.
 
 
  장성택, 복귀 후 이제강 제거
 
북한 삼지연에 있는 소백수 초대소.
  검열결과를 보고받은 김정일은 화가 나서 우선 장성택의 모든 직무를 박탈하고 장성택을 가택 연금한 후 대대적인 조사를 진행했다. 사회안전성 35국장을 반당 반혁명분자로 총살하고 수도건설국장이었던 김학철과 청춘봉사관리국 국장이었던 강영철을 비롯한 장성택 최측근들의 목숨도 거뒀다. 조직지도부 행정부를 해산해 버리고 부부장이었던 이용화를 함경북도 무산군에 노동자로 내려보내는 조치도 취했다.
 
  사회안전성 35국의 전체 군관(장교)들을 제대시켜 노동자, 농민으로 지방에 보내기도 했다. 당시 서기의 출입을 막은 보초병들도 처벌을 피할 순 없었다. 모두 강제 제대시켜 집으로 돌려보냈다. 초대소 비밀을 발설하는 경우에는 사형을 받겠다는 서약서를 쓰게 하였다.
 
  김정일은 ‘그렇게 믿었던 장성택이 배신을 했으니 총살하고 싶지만,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 김경희의 남편이니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장성택의 모든 직무를 박탈했다. 집에서 2년간 근신하게 하였다가 2005년도에 중앙당 조직지도부 행정부를 되살리면서, 1부부장으로 임명했다. 간부사업(인사이동)에는 일절 관여하지 말고 오직 김정일을 따라다니면서 사업보좌만 하라는 단서가 붙었다. 그 후 김정일은 자기가 즐기는 초대소, 별장들을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없다고 하면서 보초를 비롯한 순찰은 호위사령부가 다시 맡아 진행하고 내부사업은 서기실을 통해 자기가 직접 관리했다.
 
  1995년부터 2003년까지 2인자로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장성택은 2005년도 다시 복귀한 후에는 인사권한을 갖지 못했다. 진정한 권력을 갖지 못한 것이었다. 김정일이 죽은 후 김정은을 조카라고 우습게 생각하였다가 결국은 비참하게 사형을 당했다. 장성택을 밀어내는 데 기여를 했던 이제강은 결국 장성택의 복수를 피하지 못했다. 2010년 6월 이제강은 원산에 출장 갔다가 올라오는 길에 황해남도 연산군에 위치한 고속도로에서 벼랑으로 차가 떨어져 운전사와 함께 사망하고 말았다. 그때까지도 앙심을 품고 있던 장성택의 복수였다.
 
  2011년 12월 김정일이 사망한 후, 3대 세습으로 권력의 자리에 올라간 김정은은 김정일이 이용하던 초대소, 별장들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고 측근들을 데리고 가서 즐기는 유흥장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러한 초대소, 별장은 기본적으로 전국 각지의 경치 좋은 곳이면 어김없이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날씨와 계절에 따라 더울 때에는 양강도나 함경북도, 자강도 등 북쪽으로 올라가고 추울 때에는 황해남도나 강원도 등 따뜻한 남쪽으로 내려가 휴양한다. 김정일은 중국을 자주 방문했는데 돌아오는 길엔 항상 평안북도에 있는 천마산 초대소에 들러 쉬었다가 평양으로 돌아갔다. 평양시 강동군에 있는 봉화리 초대소도 자주 이용한 것으로 평양 주민들에겐 알려져 있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3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박혜연    (2018-04-08) 찬성 : 30   반대 : 23
봄이온다 평양공연단들이 통일전선부 초대소인 미산각에서 만찬하는모습 사진들이나 동영상들로 봤겠지 거기서 일하는 아가씨들의 외모 역시 우리기준으로 보면 조각같은 미녀들은 결코아녀!!!!
보수언론사라도 잘못쓰고 그러지마라!!!! 북한에서 가장 예쁜처녀들이 널려있는곳은 중앙당 예술단 소속 무용배우들이다!!!!! 만수대예술단 국립민족예술단 피바다가극단 영화음악록음소 소속의 여가수들도 대체로 부자집 맏며느리감 아줌마스타일이고!!!!! 알었냐
  박혜연    (2018-01-29) 찬성 : 39   반대 : 39
글구 월간좇선 내가 경고를 하는데 북한 전역에 널려있는 초대소들에서 일하고 있는 5과 소속 아가씨들의 외모들을 보면 이곳 대한민국에 흔하게 널려있는 미모의 아가씨들하고 비교해보면 모두 아줌마스타일의 평범한 얼굴들이여!!!! 진짜!!!! ㅡㅡ 웃기는 짬뽕이야!!!!
  박혜연    (2018-01-27) 찬성 : 23   반대 : 25
초대소 내부를 모 사이트에서 본적이 있는데 걍 특별할것도 없게 생겼더구먼 ㅡㅡ 물론 일반백성들은 함부로 못들어가지만....!!!!

202105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2020년4월부록
정기구독 이벤트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