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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통신

임현수 목사 억류 사건과 대북지원단체들의 고민

해외 지원단체들, 이권 개입 등 유혹에서 벗어나야

글 : 박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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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당국과 접촉하면서 깨달은 한 가지는,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의무에는 귀를 닫고, 토의 과정에 나온 지원은 당연히 받아 챙길 채권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 임 목사, 110여 차례 방북해 북한 고아들 돌봐… “北의 ‘꼬투리 잡고 내치기’에 당한 것”
⊙ 北, 친북이든 반북이든 방북 주요 인사 동향 지속적으로 감시
⊙ 지원 물자, 2~3일 후면 장마당에서 팔리는 현실에 ‘씁쓸’
⊙ 대북지원 인사들, 이권 연루될 소지도 많아… 北, ‘포에버21’ 대표와 어업권 비밀협상도
⊙ 北, 이산가족 상봉사업 황금알 낳는 거위로 생각… 실제로는 생존자 적어 사업추진 어려워
룡천역사. 수천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2004년 평안북도 룡천역 열차 폭발사건으로 북측을 돕기 위해 수많은 성금과 밀가루 등을 지원했다.
  필자가 처음으로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단둥(丹東)에서 압록강 철교를 건널 때의 일이다. 중국 해관(海關)으로 넘어온 ‘평북 버스’에 올라타니 운전석 유리창은 금이 갔고, 버스 안에는 사람 대신 짐만 가득했다. 가난한 북한의 형편이 한눈에 느껴졌다. 철교를 건너 입국 수속을 하고 해외동포 영접처에서 데리러 오기를 기다리다 신의주 역사까지 너른 광장을 가로질러 걸었다.
 
  북한에 대한 호기심으로 신의주역 광장과 건너편에 위치한 김일성혁명 역사관 등 이곳저곳을 사진으로 찍었다. 평안북도 신의주 아래의 피현이나 남신의주로 떠나는 기차를 기다리는 주민들의 모습은 내게 많은 자극을 주었다. 어두컴컴한 대합실에 쪼그려 앉아 도시락을 까먹는 주민들, 나무 장의자에서 새우잠을 자는 이들, 하나같이 어두운 잿빛 얼굴이었다.
 
  단둥에서 압록강 철교를 건넜다는 흥분도 있었지만 오후 2시경 평양으로 떠나는 국제열차를 타기까지 서너 시간 여유가 있었던 덕에 호젓한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평양까지 나를 안내했던 해외동포 영접처 간부가 윗선에 어떻게 보고를 올렸는지 나는 졸지에 카메라 조사를 받았다. 그들은 “평양에 들어오는 동안에 어떤 사진을 찍었는지 조사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며 나를 고려호텔 2층에 있는 사진 현상소로 데려갔다.
 
  나는 신의주 역사에서 찍은 필름 대신, 기차 안에서 찍은 들판의 소나 산야(山野)의 풍경이 담긴 필름을 내어주었다. 그들은 현상을 해보더니 그다지 문제 삼을 것이 없었던지 되돌려주었다. 북한과 이란은 이런 점에서 여행이 편한 곳이 아니다. 마음내키는 대로 사진을 찍었다가는 후환(後患)이 두려운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에 억류된 임현수(60) 목사는 북한 방문 시에 단체 사진 이외에는 사진을 전혀 찍지 않았다. 북한 측에 빌미를 주지 않으려는 세심한 태도로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임현수 목사의 대북활동에 대해 일말의 염려를 갖고 있었다.
 
  임현수 목사는 지난 1990년 토론토 큰빛교회에 부임한 이래 1996년 북한의 고아들을 돌보는 일부터 시작해 국수공장, 라면공장 등 상당히 큰 규모의 대북지원을 해오면서 캐나다는 물론 전 미주 지역에서 앞장서 북한 선교를 이끌어온 인물이다. 현재 캐나다 정부는 현지 스웨덴 대사관을 통해 임 목사와의 접견을 요청 중이나 계속 거절되고 있으며, 아직까지 그의 정확한 상황은 파악되지 않고 있다.
 
 
  대북지원단체들의 동태 감시받아
 
사리원 육아원. 북한이 전시효과를 위해 선전에 동원하는 쌍둥이 형제들은 좋은 대접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 층만 올라가면 숨겨진 고아들의 비참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지난 1월 27일 북한을 방문한 임현수 목사가 북한 측에 구금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는 ‘북한이 청구서를 내밀었구나’ 하는 당혹감이 들었다. 소위 북한을 드나들면서 지원 사업을 하는 사람치고 북한의 ‘꼬투리 잡고 내치는’ 방식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은 친북(親北)이든 반북(反北)이든 주요 인사에 대한 정보 탐문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임 목사와 같이 대북지원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일지라도 결코 예외일 수 없다. 필자도 북한을 자주 드나들다 보니 지금은 편안하게 대할 수 있는 북한 친구들이 더러 생겼다. 중국에 가면 늘 만나는 북한 간부가 고마운 것은, 나를 만나기 전에 나에 대한 정보를 반드시 열람하고 나오기 때문이다. 그는 요즈음 나에 대한 보고가 이런저런 것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일러준다.
 
  남한이 아닌 해외에 살고 있어도 북한은 감시의 눈초리를 떼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임 목사의 처신이 어렵겠구나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북한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후원자의 성금(誠金)이 필수적이다. 후원자를 모으기 위해서는 당연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은 북한 현실을 설명해야 할 때도 있다.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해야 감동도 배가(倍加)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가 교회나 각종 기독교 단체에서 하는 연설은 요즈음 같은 세상에는 인터넷에 즉각 올라오기 마련이다.
 
  임 목사가 담당하는 큰빛교회 사무원 박모씨는 “임 목사는 북한 측이 금하고 있는 현지 선교 활동을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박씨는 “임 목사는 우리말을 잘하는데다 북한의 정치제도를 잘 알아 법을 어겨 감금됐을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면서 “임 목사는 그곳 환경에 매우 현명하게 대처했을 것”이라고 했다.
 
  과연 그러했을까? 필자가 인터넷을 검색하니 평소 그의 교회 설교 내용들이 수도 없이 글과 동영상으로 검색되었다. 북한은 종교 활동이 엄격히 금지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상은 좀 다르다고 한다. 임 목사에 의하면, 북한 관리든 주민이든 모두 그를 “목사님”이라 호칭한다는 것이다. 식사 시간이면 오히려 정부 관리들이 “식사기도를 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임 목사는 “17년간 선교하면서 우리가 밥을 먹여주던 서너 살 코흘리개들이 이제 스무 살이 됐다”며 “그들은 북한 당국이 자신들을 먹여 살린 게 아니라 캐나다 동포들이 자신들을 도와줬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안다”고 전했다. “이들은 남쪽의 적대세력이 아니라 든든한 우호세력”이라고도 했다.
 
  임 목사의 순진무구함은 도를 넘는다는 생각마저 든다. 임 목사는 그에게 식사기도를 부탁하는 등 북한 관리들이 기독교에 우호적이라거나 구호물자 도움을 받았던 아이들이 남한의 적대세력이 아닌 우호세력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버젓이 떠도는 그의 설교를 보면 선을 넘어선 부분이 등장한다.
 
  “신의주는 이제 종교의 자유지역입니다. 자기의 직업적 특기를 살려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곳에 들어가는 헌신자들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캐나다에 이민 와 제빵업을 하던 한 성도는 지금 북한에 들어가 빵공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교육 분야에 종사했던 한 장로는 탁아소를 열어 열심히 섬기고 있습니다. 지금 들어가지 않는다면 너무 늦을지도 모릅니다.”
 
  이 정도면 북한 내에 들어가서 일하는 사람들의 신원을 까발리는 수준이다. 몇 해 전 북한 당국은 신의주에서 예배를 보다 붙잡힌 기독교인 60여 명을 총살했다. 임 목사는 이 사실을 아예 모르는 것인가. 필자가 과문(寡聞)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문제는 이처럼 공공연하게 북한의 실상을 까집어 놓고 말하는 것은 북한 사람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라는 것이다. 누구보다 임 목사가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큰빛교회는 담임목사가 집회하러 가서 어떤 설교를 하는지 스크리닝하는 기능이 전무(全無)하다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포에버21’ 장도원 사장의 대북지원
 
북한 청진시 장마당에서 버젓이 유통되고 있는 지원 물자. ‘대한민국’이라는 글씨가 뚜렷하다.
  둘째, 임 목사가 그동안 북한을 80여 차례, 혹은 100여 차례에 걸쳐 방문했다는 기록의 신빙성이다. 이것은 문제의 본질과 관련이 없어 그리 중요한 대목은 아니다. 다만 북한에 이처럼 수도 없이 드나들었다는 것이 대북 사업에서 본인이 차지하는 위상을 드러내려 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남들은 평생 한 번 가볼까 말까 한 평양에 100여 차례씩이나 다녀왔다고 하면 남의 눈에는 대단한 거물(巨物)로 비치지 않겠는가? 소위 자기 자만(自慢)이 본인의 발목을 잡지 않았을까하는 염려가 앞선다.
 
  정말 북한에 100번을 갔다면 늘상 같은 이유로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굶주린 북한 사람들이 빈손으로 찾아오는 것을 반가워할 리 없기 때문이다. 악순환의 고리에 본인이 걸린 것이다. 우리가 하루에 세 끼를 먹어야 하듯, 한번 채워넣은 북한 당 간부들의 탐욕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이 임 목사를 통해 북한을 방문했음은 물론, 그의 사역을 위해 수만 달러에서 수백만 달러에 이르는 거금을 내놓았다. 물론 이러한 헌금을 착복했을 리 만무하지만, 동행했던 이들마다 북행(北行) 목적은 제각각이었을 것이다. 단순 동행에서부터 가족 상봉을 고대하는 이산가족과 사업상의 이윤을 바라고 동행했을 수많은 사람…. 그들의 기호와 의도에 어떤 방법으로 대응했을까 걱정도 된다.
 
  임 목사와 함께 북한을 방문했던 미국 캘리포니아주 남부의 기업인인 ‘포에버21’의 장도원 사장은 2008년 무렵 북한 재개발 사업에 관심을 갖고 나선경제특구 건설 사업에 2500만 달러, 에너지 사업을 한다며 자강도에 발전소를 구상했던 일이 있었다.
 
  포에버21은 장도원 사장이 운영하는 여성의류 브랜드 생산 기업이다. 봉제업계의 신화적인 경영인으로 성공적인 삶을 사는 장도원 사장은 부인과 협업으로 사업을 일궜다. 그는 《포브스》가 2015년 선정한 미국의 400대 부자 가운데 88위(59억 달러)에 랭크된 인물이다. 1981년 이민 온 이들 부부는 한인 타운의 자그마한 매장에서 사업을 시작, 현재 전 세계 480개의 매장과 3만5000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있다.
 
  장도원 사장은 나선지구에 배가 없어 고기를 잡지 못하는 현실을 보고, 동해안 지역의 어업에 투자함으로써 북한을 지원하였다. 북한에 일정한 입어료(入漁料)만 내고 동해안 고기를 싹쓸이하는 중국의 행태에 속만 끓이는 북한 입장에서 장도원 사장의 북한 지원은 한 줄기 서광과 같아 보였을 것이다. 중국과의 어업권 계약이 끝나자 북한이 장 사장 측과 접촉했던 일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장도원 사장의 방북이 단순한 지원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이권(利權)이 개입되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북한 당국과 접촉하면서 깨달은 한 가지는,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의무에는 귀를 닫고, 토의 과정에 나온 지원은 당연히 받아 챙길 채권(債權)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그들은 국제관례나 상거래의 균형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북한이 “한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면, 그게 빼도 박도 못하는 논리적 모순인 줄 알면서도 억지에 말려드는 경우가 다반사다. 어쩌다 북한 사람들이 상식을 잃어버린 집단으로 전락해 버렸는지 모를 일이다. 가난이 그들을 눈멀게 하고, 배고픈 현실이 염치없는 백성으로 만들었나 보다.
 
 
  北, 이산가족 상봉사업에 큰 기대를 걸었지만
 
  필자가 염려하는 대목이 이것이다. 임 목사가 장도원 사장을 대동하여 북측 인사들을 접견하는 과정에서 어떤 오퍼(제안)가 있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어떤 경로를 거쳐 이런 구상이 언론에 보도되었는지 모르지만, 나선지구의 건설 사업에 2500만 달러, 자강도에 에너지 사업을 한다며 발전소를 구상했던 일이 알려진 것이다.
 
  북한 측과 대동강여관 복구 사업 자금 지원과 함께 인근 재개발 사업에 관한 논의도 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장도원 사장은 이 호텔을 외국인 전용으로, 컨벤션 센터를 비롯한 대규모 무역센터 등 부대시설도 동시에 건설하기 위해 북측과 내용을 협의 중이라고 알려졌지만, 이 사업이 성공적으로 이뤄졌다는 뒷소식은 듣지 못했다. 필자가 염려하는 부분은 논의 과정에서 약속 이행을 언질했다면, 북측으로서는 이를 약속 불이행으로 몰아갈 소지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임 목사가 억류되었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그동안의 임 목사 교회 설교가 북한 당국에서 이의를 제기하더라도 방어할 만한 충분한 준비는 되었으려니 여겼다. 단지 그가 북한 쪽 입장에서 더 이상 용도 폐기될 수준이 아니라면 말이다.
 
  필자도 북한 측으로부터 이산가족과 관련하여 제안을 받은 바 있었다. 이명박(李明博) 정권 5년, 얼어붙은 남북관계처럼 이산가족 상봉도 꽁꽁 얼어붙은 것이다. 이산가족 상봉을 빌미로 한밑천을 챙기려는 북한의 의도는 실제 그리 오랫동안 지속될 황금알은 아니다. 왜냐하면 실향민 가운데 북한의 가족을 만나려는 기대와 정서를 가진 사람들은 북한에서 열 살 이상을 살다 온 1935~1940년생, 나이로 치면 75세에서 80세 이상인 사람들이어서 이들의 자연 수명으로 볼 때 이산가족 상봉 사업은 터널의 끝이 보이는 편이다.
 
  그런 이유로 북한은 내게 해외 동포들이 북한 영내로 들어와 고향을 방문해도 좋고, 남한 연고를 둔 가족들은 일정한 비용만 내면 북한에서 여권을 만들어 단둥이나 선양(瀋陽)으로 내보내 남한의 가족들과 만나게 하겠다는 제의였다. 나는 이러한 제의가 단순한 제의 수준을 넘어 북에 대한 일정한 기여(寄與)를 바라는 속셈이 있음을 알고 더 이상 진행하지 않기로 했다.
 
  필자는 한때 북한의 의료 관련 지원을 도울 일이 있었다. 어느 정도 일이 마무리되어 갈 무렵 훈장을 수여하겠노라는 제의를 받았다. 그런 일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자, 김일성대학의 원사 학위를 주겠노라는 것이다. 원사는 박사보다 한 단계 높은 것이다. 이마저도 거절했다.
 
  참고로 북한의 학위 종류는 우리의 석사에 해당하는 ‘학사’와 ‘박사’, 그리고 명예칭호인 ‘원사’가 있으며 대학 졸업생들에게는 우리나라와 달리 학위를 수여하지 않고 전문가(인문계통)나 기사(이공계통) 자격을 부여하고 있다. ‘원사’는 박사학위 소지자로서 해당 분야에서 특출한 연구성과를 올리거나 후진양성 등 업적을 쌓은 학자에게 수여하는 ‘명예칭호’다.
 
 
  지원 물자 장마당에 팔아먹는 黨 간부들
 
평양 김일성대 학생들이 톱밥을 이용해 계단을 청소하고 있다.
  대북지원을 하면서 무엇을 바라거나 어떤 반대급부를 바란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옥죄는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문제점을 익히 아는 나로서는 북한과의 사이에 어떤 이권 개입이나 명예를 얻는 일에 조심스럽게 대처했다.
 
  우리로부터 지원받았던 북측 인사들 역시 종국에는 그 끝이 좋지 않았던 것을 경험했다. 가령, 200만 달러 정도의 지원 물자를 보내면, 기증서류상으로는 300만 혹은 400만 달러로 밸류를 높여달라는 것이다. 당에 충성 자금 혹은 당에 대한 기여도를 높이려는 불순한 동기에서였다.
 
  우리가 지원 물자를 보내 2~3일 후 평양시 낙랑구역의 신시가지인 ‘통일거리’에서 버젓이 상품으로 되팔리는 소식을 들어도 어쩔 도리가 없다. 장마당이나 상점에서 팔리더라도 규제할 방도가 딱히 없기 때문이다. 지원 물자로 들어간 상품이 당과 간부들의 배만 불리는 결과를 낳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아야만 한다. 뻔히 알면서도 눈감는 게 차라리 지혜로운 일인지도 모른다. 마땅한 해결책이 없는 탓이다.
 
  필자의 단체로부터 지원을 받았던 기관들이나 당 간부들은 무상으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당국에는 물자 대금 지불을 보고, 수령해 중간에 착복한다든지 물자를 시중에 내다 팔아 거액을 챙겼다. 그러니 그런 관행이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비리를 저지른 당간부들이 총살이나 수용소로 끌려갔다는 후문을 들을 때마다 대북지원의 한계와 더불어 자괴감마저 드는 경우가 비일비재(非一非再)했다.
 
 
  북한에 목매고 일하는 민간기구의 현주소
 
함경도 회령역. 탈북자들은 회령역을 이용해 중국으로 탈출하기도 한다.
  임현수 목사의 억류 사건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오리무중이다. ‘북한 인권 법’을 계기로 캐나다 정부가 북한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해 비록 스웨덴 정부가 나서서 힘을 쓴다고 해도 자국 대사관이 있는 것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일 것이다. 미국과 북한이 막다른 골목에 이를 때도 캐나다는 북한과 외교관계를 유지했었으나, 지금은 외교관계 단절로 쉽지 않은 형국이 되었다.
 
  재미교포 케네스 배를 장기간 억류했던 북한이 이런저런 꼬투리를 잡아 책상 밑으로 흥정하고 풀어준 것은 반드시 돈과 관련이 있다. 북에 다섯 달 씩이나 억류되었던 김진경(金鎭慶) 옌볜과학기술대 총장은 극히 예외적으로 아직까지 북한과 인연을 맺고 있다.
 
  평양에 과기대를 개교한 이래 최근에는 의과대학까지 설립할 것을 구상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에 억류되었던 사람치고 김 총장만이 끈질기게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캐나다 동포인 김재열 목사는 북에서 풀려난 이후로 중국에 머물며 나진 선봉 지역에 자신이 벌여놓은 한방병원과 산원에 대한 지원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반면에 평양 고려호텔에서 예배를 보면서 통성 기도를 해 말썽을 일으킨 기독교 구호단체인 한민족복지재단은 북한 출입이 좌절되자, 중앙아시아로 선교의 물꼬를 텄다가 2007년 분당샘물교회에서 남녀 신도 19명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들에게 납치되는 사태로 직격탄을 맞았다. 북한에 목을 매고 일하는 민간기구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셈이다.
 
  2004년 룡천역 사고로 일단의 후원자들을 이끌고 평양을 방문했던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의 서경석(徐京錫) 목사는 룡천역 현장을 보여주지 않는 북한 당국과 대치하다가 주체탑에 올라 항의 시위를 벌이고 남쪽으로 내려온 이후부터 진보적 성향에서 벗어나 우파적 반북운동가로 거듭났다. 그야말로 180도 사상전환을 한 것인데 그가 평소 지닌 사고로 본다면 북한에 마음 상한 한풀이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북에 다녀온 사람마다 친북 혹은 반북으로 자리매김하는 모양새는 북한이 주는 천(千)의 얼굴에 대한 각양각색(各樣各色)의 반응이다.
 
 
  110여 차례 방북
 
  1996년 처음으로 대북 식량지원 사업을 시작한 임 목사는 이후 농업 개발, 의료, 수산업, 컴퓨터, 영어 분야까지 다양한 분야로 지원 범위를 넓혀갔다. 큰빛교회에 따르면, 임 목사는 원산을 비롯해 북한 여러 지역의 육아원과 애육원 고아 1만350명, 양로원 3곳과 굴포유치원 등 다양한 교육시설, 나진의 양계장, 회령의 유기농 비료공장, 2000명 수용 가능한 목욕탕, 국가대표 빙상선수 등도 지원하고 있었다.
 
  이러한 노력은 큰빛교회를 비롯해 북미주의 다양한 교회와 단체, 개인들의 후원을 힘입었다. 임 목사는 1990년 캐나다 토론토 큰빛교회에 부임한 뒤 110여 차례 방북해 북한의 고아와 어려운 사람들을 돌봐왔다. 북한에 국수 및 라면공장, 백두산 들쭉농장 등을 세웠고 2013년에는 ‘북한고아를 위한 사랑의 동복 보내기 운동’도 전개했다.
 
  임 목사의 지원은 식량지원과 농업개발, 의료지원을 비롯해 수산업과 컴퓨터, 영어교육까지 분야가 매우 다양하다. 규모도 웬만한 일반 국가나 특정 국제기구의 지원 규모보다 큰 것으로 알려졌다. 임 목사는 과거 교회 간증에서 “원산을 비롯한 북한 여러 지역에 있는 육아원과 애육원의 고아 1만350명을 지원하고, 양로원 3군데와 나진 굴포유치원 등 다양한 교육시설에 콩기름과 분유, 기저귀를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밖에 500명 규모의 평양의 가발공장, 함흥의 선봉연유판매소 지원은 물론, ‘동해바다 살리기’ 프로젝트로 대형 어선 2척과 소형 어선 50척을 제공해 수산물 수출을 지원했다. 외형상으로 드러난 임 목사의 대북지원 현실은 가히 엄청나다.
 
  필자는 그가 몸담고 있는 큰빛교회가 이 과정에 어떠한 기여를 했는지를 묻고 싶다. 내가 보기에는 큰빛교회 목사인 임현수씨가 한 일이지 교회의 기여는 거의 없었다고 보인다. 수많은 방북 과정에 소요되는 천문학적 여행 비용과 지원 물자를 위해 교회가 기여한 바는 어디까지인가? 필자는 이를 단순한 숫자 놀음으로서가 아니라 큰빛교회가 임 목사가 북한이라는 ‘금단의 지역’을 다니는 동안 어떤 균형과 통제를 반드시 했어야 한다고 본다.
 
  정녕 굶주린 북한 동포들을 살려야 한다는 과제를 모든 교인이 동일하게 인식하고 있다면 당회나 북한선교위원회라는 제도적 장치가 작동했어야 했다. 필자가 알기로 큰빛교회는 이 부분에 관해 전혀 모르고 있거나 누구도 제동을 걸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임 목사 ‘원맨쇼’에 불과한 것이다. 교회 밖에 조국사랑 네트워크나 GAP(Global Assistance Partner)라는 단체를 만들어 이를 효과적으로 추진하려고 했던 흔적은 있지만, 현재 이러한 단체가 북한 사역에 간여하고 있다는 어떤 징후도 보이지 않는다.
 
 
  대북지원에도 원칙이 있어야
 
임현수 목사.
  제아무리 북한과 추진해야 할 업무에 비밀스러운 부분이 있다고 할지라도 주머닛돈을 쌈짓돈처럼 움직이는 대북지원은 재고하기에 너무 늦은 감마저 든다. 이번 사태는 그동안 큰빛교회가 담임목사가 일방적으로 추진해 온 북한 사역(使役)에 대한 적절한 통제를 하지 못해 치르게 된 값비싼 대가로 여겨진다.
 
  진정으로 북한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일이었다면, 임 목사가 억류되는 불상사가 발생하더라도 교회에서 이를 대물림할 인물이 나와야 한다. 그런데 임 목사 사건에서 보듯, 교회가 그동안 북한 사역을 임 목사 한 사람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교회는 과실만 따 먹은 것은 아닌지, 깊은 자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 셈이다.
 
  평소 임 목사는 “북한 사람들이 극단적인 사고로 빠져 들어갈 위험이 많을 때일수록 우리가 먼저 품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임 목사는 “북한이 중국 품에 안기는 것을 빤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으냐”며 “김정일(金正日) 이후 어찌하려고 이러는지… 북한의 어려움을 통해 과실을 따 먹고 중간 지점에서 반사이익을 누리는 게 중국이니 중국 좋은 일 시키지 말자”고 여러 번 강조했다. 또한 그는 “헐벗은 땅에 방치돼 있는 우리 동포들을 우리가 구하지 않으면 누가 구하겠는가”라며 “해외동포가 먼저 그들에게 손을 내밀고 도와줘야 한다”고 호소했다.
 
  필자는 임 목사의 진정성 어린 호소가 결코 가시덩굴에 떨어져 아무런 과실도 없이 말라비틀어지거나 새들의 먹이로 전락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남북한이 대척점에 있을 때, 해외 교포들과 단체를 통해 대북 대화와 통일 기반 구축에 많은 수고를 해온 것 또한 사실이다.
 
  임 목사 문제가 단순한 해프닝으로 막을 내리고 그가 가족과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고대할 뿐이다. 반면 큰빛교회와 임 목사 자신이 이번 경우를 타산지석(他山之石) 삼아 이권 개입이나 금도를 벗어난 대북지원이 아닌 한계점 내에서 최선을 다하는 우직한 고집도 기대하고 싶은 것은 단순히 필자만의 바람이 아니기를 기도한다.
 
  임 목사 사건 직후 북한을 방문해야 하는 대북지원 활동가가 필자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에 우리의 기우(杞憂)와 지혜로움이 묻어나는 글을 적었기에 그 일부를 드러낸다.
 
  “북을 방문하던 초창기, 의약품 등 지원 물자 박스 몇 개를 가지고 고아원을 꼭 방문하겠다고 고집 부리던 저에게 북의 간부가 당시 약 몇백만 달러어치의 지원 물자를 가지고 도착한 임 목사님에 대해 이야기해 주며, 그가 얼마나 조국을 위해 애쓰며 수고하는지 말해준 적이 있습니다.
 
  당시 해외의 작은 교민사회에서 살고 있던 저로서는 당시 임 목사님께서 감히 상상치 못하는 규모와 내용으로 북의 안타까운 사정들을 돕고자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그분의 사역과 열심이 아름다운 결실을 맺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너무나 많은 분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북의 아이들과 사람들을 섬기러 왔다가 더 섬길 수 없는 경우들을 지난 10여 년의 기간 동안 수다히 보아 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실수를 경험하지 않고 주님의 지혜와 겸손함을 덧입고,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소영웅주의와 자기 과시 등의 때가 묻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앞서간 분들에게 겸손히 배우고, 뒤에 오는 분들에게 깨끗하고 순전한 권면으로 서로를 세우고 지키고 배우자고 합니다. 때로는 북한이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오해받고, 지탄의 대상으로 아픔을 경험하곤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이 길을 걸어가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으로 가능함을 믿습니다. 캐나다 큰빛교회 임현수 목사님의 소식으로 저에게도 걱정과 사랑으로 안부를 물어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임 목사님은 평양 비자가 거부되다가 입국해 이러한 사태가 발생했는데,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어떤 목적을 갖고 간 것이 아님은 확신합니다. 우리의 일은 주님께서 우리를 조건 없이 섬기시며 사랑하셨던 그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하며, 주님께서 ‘1막 끝, 2막 시작’이라며 등장인물을 바꾸실 때 허락한 대사와 역할만 하고 내려오는 것입니다.
 
  자기가 나타나는 자리가 아닐 때 감독 되시는 주님의 허락 없이 일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죽기까지 감당할 일을 맡기실 때, 뒷걸음치며 ‘왜 그렇게 어려운 역할만 내게 주시느냐’며 외면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다 하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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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태    (2015-05-13) 찬성 : 171   반대 : 143
안타깝다고 하기에는 너무 공포스럽고 인간으로서 추악함을 다 갖고 있다는 생각이네요

20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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