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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비화

韓庸燮 국방대 교수, 黃長燁씨 망명 직후 北核 인터뷰

“영변 핵시설, 美北 제네바합의 틈타 옮기려 했다”

글 : 한용섭  국방대 교수  hanyongsup@yahoo.co.kr

정리 :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사진 : 서경리  月刊朝鮮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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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씨, 北의 농축우라늄 핵개발(UEP)을 CIA 보고서보다 7년이나 앞서 폭로

⊙ “1990년 이미 플루토늄 추출 완료… 지하 핵실험장도 건설”
⊙ “金正日 주관하에 노동당 군수공업부 全炳浩 담당으로 핵개발”
⊙ “北, 제네바 합의 이전 개발한 핵무기는 미국이 용인한 것으로 판단”
⊙ “北, 핵개발 포기 결정한 적 없어… NPT 탈퇴는 金正日의 아이디어”

韓庸燮
⊙ 60세.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서울대대학원 정치학 석사, 하버드대 정책학 석사,
    미국 RAND대학원 안보정책학 박사.
⊙ 제21회 행정고시 합격, 국방부군비통제관실 핵정책담당관, 핵통제공동위원회 전략수행요원,
    UN군축연구소 선임객원연구원, 국방부 장관 정무비서관, 미국 RAND연구소 연구위원,
    국방대 안보문제연구소장,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 외교통일안보분과 자문위원, 국방대 부총장 역임.
⊙ 저서: 《한반도 평화와 군비통제》 《자주냐 동맹이냐》 《동아시아의 안보공동체》
    《국방정책론》 《미중 경쟁시대의 동북아 평화론》.
⊙ 現 한국핵정책학회 회장, 국방대학교 교수.

[편집자 주]
한용섭 국방대 교수가 18년 전인 1997년 9월 23일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와 북핵(北核) 문제에 대해 비공개 인터뷰를 했던 내용을 《월간조선》에 제공해 왔다. 1997년 2월 한국으로 망명한 황 전 비서는 이 자리에서 북한의 핵개발, 제네바 합의에 대한 김정일의 생각 등에 대해 털어놓았다. 한 교수는 “당시 ‘핵 관련 내용은 절대 공개하지 않겠다’고 황 전 비서와 약속했지만, 그의 증언이 우리가 북핵 문제에 대처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 인터뷰 내용을 공개한다”고 말했다.
1997년 4월 20일 황장엽 전 국제담당 비서가 측근인 김덕홍씨와 함께 서울공항을 통해 입국해 만세삼창을 하고 있다.
  1997년 2월 12일 베이징(北京) 주재 한국대사관으로 북한 주체사상의 대부(代父)인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 황장엽(黃長燁)씨가 귀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황장엽씨는 남북한과 중국 간의 치열한 외교전 속에서 3월 18일 필리핀 루손섬으로 간 뒤 한 달여 만인 4월 20일 서울에 도착했다.
 
  4월 20일 황장엽씨가 측근인 김덕홍(金德弘) 여광무역연합총회사 총사장과 함께 서울공항을 통해 입국해 “평화통일을 위해 몸 바치겠다”며 만세삼창 하는 모습을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봤다. 당시 나는 국방부 군비통제관실에서 북핵을 담당하다 국방대 교수로 자리를 옮긴 지 4년이 지났을 때였다.
 
  1992년 남북이 합의했던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핵개발을 계속했고,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1993년 영변 핵단지 내 2개의 미신고 시설에 대해 특별사찰을 요구했다. 북한은 이를 거부하고 1993년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했고, 1994년에는 IAEA까지 공식 탈퇴했다.
 
  클린턴 정부는 영변 핵시설의 폭격을 검토하는 등 상황은 ‘제1차 북핵 위기’라고 불릴 만큼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특사 형식으로 방북해 김일성(金日成)과 대화를 시도했고, 미국은 북한의 핵 동결 대가로 경수로 2기를 건립하고, 연간 50만 톤의 중유(重油)를 제공하며, 미북 관계 정상화를 추진한다는 내용의 ‘제네바 합의’를 하면서 북한의 핵개발을 틀어막았다.
 
 
  北核의 ‘퍼즐 조각’ 완성할 기회 잡아
 
1997년 4월 20일 오전 귀순 67일 만에 서울공항에 도착한 황장엽(오른쪽에서 세 번째)-김덕홍씨 일행이 비행기에서 내린 뒤 이병기(왼쪽에서 두 번째) 안기부 2차장(현 비서실장)의 안내를 받아, 공항청사 1층 로비에 마련된 환영식장으로 향하고 있다.
  당시 정부는 북핵에 대해 불확실한 정보뿐만 아니라 북한에서 어떤 인물이 북핵 정책을 결정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나는 1991년부터 1992년까지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 전략수행요원으로 남북 당국자 간 핵 회담에 참여했다.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는 1991년 12월 31일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따라 남북이 합의하에 구성한 기구다.
 
  그런 마당에 북핵 정책결정 과정에 참여했을 고위인사가 망명했으니, 1997년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북핵 정보에 대해 ‘퍼즐 조각’을 맞춰보고 싶은 생각에 속이 근질거렸다.
 
  1993년 무렵에 나는 권영해(權寧海) 국방부 장관을 정무비서관(現 정책보좌관)으로 보좌한 인연이 있었다. 그래서 황장엽씨가 망명한 뒤인 1997년 여름 권영해 국가안전기획부장께 “북한 핵을 연구하고 있는 학자로서 황장엽 선생을 인터뷰하고 싶다”면서 “지득(知得)한 정보는 연구용으로만 활용할 생각”이라는 취지를 전달했다.
 
  황장엽씨는 한국 도착 80일 만인 7월 10일 기자들과 만나 “핵무기 관련 시설을 직접 본 적은 없다”면서 “1993년 IAEA 특별사찰이 제기됐을 때, NPT를 탈퇴했다는 점에서 모든 당 비서가 핵무기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만 밝혔다. 사실상 북한 핵개발에 대한 구체적 언급을 회피한 것이다. 황장엽씨의 북핵 관련 언급이 《황장엽 회고록》 등 관련 저서에도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그의 북한 핵과 관련한 상세한 인터뷰는 나와의 그것이 사실상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셈이다.
 
  당시 김영삼(金泳三) 정부는 제네바 합의에 따라 1995년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를 발족시켜 2003년 완공 예정으로 경수로를 함경남도 신포·금호 지구에 건설하고 있었다. 당시 상황에서 북한이 핵개발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이 공개될 경우, 정권 차원에서 곤혹스런 일일 수도 있었다.
 
  9월 23일 오전 10시 국가안전기획부 안가(安家)에서 황장엽씨와 만났다. 그의 옆에는 김덕홍씨가 배석했고, 안기부 요원도 인터뷰 내용을 기록했다. 황장엽씨는 카랑카랑한 선비의 모습 그대로였다. 후두염을 앓아 가끔 금속성이 섞이는 불편한 발음이 있었으나, 질문을 끝까지 듣고 차분하게 답변했다.
 
  그러나 핵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하려는 듯, 경계하는 태도가 역력했다. 그 때문에 두 시간이 주어진 그와의 인터뷰에서 질문지를 내놓고 할 수도 없었고, 더군다나 녹취(錄取)나 메모도 불가능했다. 1시간가량을 머릿속에 저장하다 곧 한계가 왔다. 핵 문제를 비켜간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방안, 김정일(金正日) 체제의 안정성 등으로 마음의 문을 열어놓고, “좋은 말씀인데, 메모를 해도 되겠느냐”고 양해를 구했다. 양복 안주머니에 준비해 간 질문지 뒤편에다 외웠던 내용들을 토해내듯 기록했다.
 
  황장엽 인터뷰를 통해 알게 된 내용들은 1994년 미·북 제네바 합의 이후 북한 핵개발 계획이 국제적 감시하에 만족스럽게 동결됐다고 평가해 온 미국의 생각과 크게 다른 것이었다. 결국 북한은 국제사회의 감시를 피해가며 핵개발을 계속했고, 2002년 10월 미 국무부는 켈리 동아태 담당차관보가 방북했을 때 “북한이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을 시인했다”고 공식발표하면서 ‘제2차 북핵 위기’로 치닫게 된다.
 
  2010년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65주년 기념식에서 김정일과 김정은(金正恩)이 열병식을 관람하기 위해 주석단에 들어서는 그 시각, 황장엽씨는 서울 논현동 안전가옥에서 쓸쓸하게 운명했다.
 
  나는 황장엽씨에게 “핵 관련 발언은 절대 공개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생전(生前)에 한 약속을 지켰다. 그를 인터뷰한 지 18년, 그가 작고한 지 4년이 지난 시점에 그의 북핵 증언 인터뷰가 지금도 의미가 있는 내용이 있기에 이를 소개한다. 물론 당시 나는 인터뷰 직후에 그 내용을 메모와 기억에 따라 정리해 두었었다. 황장엽씨의 인터뷰 내용은 북핵을 다루는 담당자들의 ‘희망적 사고’가 오늘날 북한을 사실상의 핵 보유국으로 만들었고, 북한은 애초부터 핵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편의상 인터뷰 진행 순서와 무관하게 핵무기 관련 증언을 중심으로 재구성했다. 가급적 당시 황장엽씨의 발언을 가감 없이 살리려 노력했고, 경우에 따라 대화 내용에 대한 부연 설명을 추가했다.
 
 
  지하 핵실험장도 건설
 
  —김일성은 1972년 비밀리에 핵개발을 지시했을 뿐만 아니라, 지하화를 지시했습니다. 김정일은 영변 핵 단지를 조성했기 때문에 김정일이 아니면 핵을 포기하기도 힘들었을 것이 아닙니까. 영변 핵 단지에 “우리 과학자들은 자체의 힘으로 원자력 부품을 능히 개발하고 운영할 수 있다는 주체적 혁명정신을 가지고 과학 연구 사업을 해야 합니다”라는 훈시문과 함께 초상화가 걸려 있다고 합니다. 핵무기 개발은 인민무력부의 사업이 아닌가요. 고도의 비밀을 요구하면서, “군사기지”라며 사찰을 결사적으로 반대한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은가요.
 
  “핵무기 개발 사업은 김정일 주관하에 노동당 군수공업부에서 전병호(全炳浩, 2014년 심근경색으로 사망)가 맡아서 했습니다. 그리고 군수공업부 제1부부장 박성봉이 모든 일을 주관해 처리했죠. 모든 일을 비밀로 처리했으므로,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합니다. 핵무기 개발 사실을 숨기기 위해 ‘군사기지’라고 하면서 사찰을 거부했습니다.
 
  앞으로도 특별사찰은 받지 않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전병호의 말에 의하면, 미국과 제네바 합의 이후 내게 ‘앞으로 5년 동안 다른 데 다 옮겨 놓으면 안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하 핵실험장도 건설해 놓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병호가 말하길 ‘아주 넓다’고 했어요.”
 
  황장엽씨가 ‘북한이 주요 핵시설을 (영변 밖의 지역으로) 옮기려 한다’는 말을 했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지금도 미국과 IAEA가 찾지 못한 지하 농축시설이 존재할 것이기 때문에 당시 그의 발언을 지금도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북한은 1991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직후 영변 지하 폐연료봉 저장시설을 흙으로 덮고 나무를 심어 군사시설로 위장했다. 미국은 1992년 6월 IAEA 특별이사회에서 위장된 영변 핵시설 위성사진을 이사국들에 공개해 특별사찰을 결의토록 했다. IAEA의 요구에 따라 한 달 이내에 특별사찰을 받아들여야 했던 북한은 핵심시설 공개를 거부하고 결국 1993년 3월 NPT를 탈퇴했다.
 
  1994년 10월 21일 북미 간 합의한 제네바 합의에 따르면, 경수로 건설기간 동안 5MW 시험원자로에서 나온 폐연료봉을 안전하게 보관하고, 북한에서 재처리하지 않고 다른 안전한 방법으로 폐연료봉을 처분한다는 조항이 있다. IAEA는 제네바 합의에 따라 경수로가 완공되는 2003년 시점에 맞춰 영변의 폐연료봉 저장시설을 사찰하려 했고, 북한은 그전까지 IAEA의 눈을 피해 폐연료봉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 했던 것이다.
 
  황장엽씨의 ‘지하 핵실험장 건설’ 언급처럼, 미국은 평안북도 금창리 지하터널을 지하 핵실험장으로 지목하고 60만 톤의 식량과 관계 개선을 대가로 1999년 5월과 2000년 5월 현장방문단을 2차례 파견했으나, 핵시설을 찾아내지 못하고 “네오콘들의 정보조작”이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나는 황장엽씨가 증언한 것이 2006년 10월 1차 핵실험, 2009년 5월 2차 핵실험을 실시한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를 포함해 제3의 장소가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핵 문제 협상에 임하면서 핵개발 포기라는 최종 결정은 김정일이 했겠지만, 결정 과정에 많은 전문가, 관료, 당 관계자가 참여했을 것이라는 견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핵개발 포기 결정은 한 바가 없습니다. 끝까지 과거의 핵개발에 대해 숨겼고,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미국도 과거 북한의 핵 문제는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넘어간 것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플루토늄을 보관하면서, 우라늄 농축 설비를 도입해 개발을 기도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북한은 핵개발을 포기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향후에도 철저히 은폐해 가며 핵개발을 해나갈 것이라고 하고 있다. 미국은 6~7년 후 경수로 핵심부품이 들어갈 때, 과거의 핵개발을 검증하기로 ‘유보’한 것인 반면, 북한은 이를 미국이 ‘묵인’한 것이라고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생각한 것이다.
 
  황장엽씨는 북한이 플루토늄 핵무기 개발에 이어 우라늄농축프로그램(UEP·Enriched Uranium Program)도 추진하고 있다고 증언했다. 북한은 2006년 10월 첫 핵실험을 강행했고, 2009년 6월에는 ‘우라늄농축프로그램 착수’를 선언했다. 이에 앞서 2004년 3월 14일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북한이 파키스탄의 칸 연구소로부터 핵연료와 원심분리기, 탄두 설계도 등 농축우라늄 핵무기 생산에 필요한 장비·기술을 ‘패키지’로 제공받은 것으로 결론지었다.
 
  황장엽씨는 CIA 보고서보다 7년이나 앞서 북한의 UEP 프로그램의 존재를 폭로한 것이다. UEP 프로그램은 우라늄 농축시설에 대규모 자금이 들어가기 때문에 개발비가 많이 들어가는 단점이 있지만, 농축시설을 여러 곳에 분산해 은닉하기에 용이하고, 일단 제조시설이 설치되면 농축우라늄의 지속적인 생산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北核, ‘협상용 카드’ 아니다
 
1987년 소련을 방문하기 위해 평양역을 출발하는 김일성을 환송하는 김정일과 황장엽(김일성으로부터 오른쪽 두 번째). 북한 발행 《천리마》 1987년 1월호에 실린 사진.
  —핵기술 수준을 보면, 영변 원자로는 1958년 도입한 구소련 기술입니다. 1991년 미 CIA 추정보다 훨씬 낡은 기술이죠. 북한의 핵 능력은 보잘것없다고 판단하고 있는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990년 북한은 이미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습니다. 핵무기 만드는 기술은 있습니다.”
 
  황장엽씨는 핵 문제를 언급하는 것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셀리그 해리슨(Selig S. Harrison, 재미 친북학자) 미 국제정책연구소(CIP) 선임연구원에 의하면, 1991년 12월 노동당 중앙위원회가 핵개발 중단을 결정했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사실이 아닙니다. 북한이 핵개발 포기를 공식적으로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북한이 처음엔 핵개발을 고집하다가 ‘협상카드’로 활용하리라고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한) 1991년 12월이라는 얘기도 있고.
 
  “아닙니다. 마음을 고쳐먹은 적이 없습니다.”
 
  —1992년 1월 7일 남한이 팀스피릿 훈련 중단을 발표했을 때 북한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혹시 1991년 12월 31일 팀스피릿 훈련 중단에 합의하고 김일성에게 보고할 때 영구히 중단시켰다고 보고한 것은 아닌가요. 최우진(崔宇鎭)이 1992년 12월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 위원장 회담에서 “남측이 팀스피릿 훈련을 재개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하면서 “제발 철회해 달라”고 읍소했습니다.
 
  황장엽: “북한의 군부는 팀스피릿 훈련을 위협으로 간주한 적이 없으며, 문제라고 이야기한 적도 없습니다.”
 
  김덕홍: “그러나 군과 청년의 동원, 기지(基地)에 집합, 차량집결 등 에너지와 노동력, 시간을 소모하게 하는 훈련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질문에 대해 두 사람은 잠시 이야기를 나누더니 각자 상반된 답변을 했다. 김덕홍씨가 좀 더 전문가인 것처럼 이야기했다. 그러나 황장엽씨의 말대로 팀스피릿 훈련은 통상적 방어훈련으로, 북한은 이 훈련을 빌미로 대외 선전과 내부 단속을 하는 등 ‘정권안보’에 사용했다. 현재 한미 키리졸브, 독수리연습에 대해 시비를 거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1992년 10월 7일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의(SCM)에서 북한이 핵사찰에 성의를 보이지 않을 경우, 팀스피릿 훈련을 재개한다고 발표했을 때, 북한은 경악했습니다. 그 이후 남북고위급회담 북측단장 연형묵(延亨默) 정무원 총리가 축출됐다고 하던데, 남북회담 책임자들에 대한 문책이 있었나요.
 
  “문책이 아닙니다. 연형묵은 원래 ‘로봇’이었기 때문에 남북회담에 문책을 받을 성격이 아닙니다. 남북회담의 최고 책임자는 통일전선부 부장인 림동옥(林東玉)이었으므로 문책이 있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당과 정부의 중요 직책을 맡았던 연형묵은 1992년 12월 정무원 총리에 기용된 지 2년6개월 만에 외견상 경제파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총리직에서 해임, 자강도 책임비서로 좌천됐다. 잠시 김정일의 시야에서 비껴갔던 연형묵은 김일성 사망 이후 군과 군수공업에 대한 김정일의 관심이 집중되면서 다시 신임을 받게 됐고, 1998년 1월에는 ‘노력영웅’ 칭호를 받았다. 2005년 10월 22일 지병으로 사망했다.
 
 
  북한의 대화 목적, 오로지 주한미군 철수
 
1994년 6월 평양을 방문한 지미 카터 내외와 김일성 주석이 당간부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노동신문》 1994년 6월 17일자) 좌측 끝은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좌측 세 번째부터 카터 전 미대통령, 김일성, 로자린 카터 대통령 부인, 우측 끝은 강석주 외교부부부장.
  —황장엽 선생은 ‘북한은 남북대화를 적과의 전쟁으로 간주하며, 모든 전략을 김정일의 결재하에 추진하고 있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1990년 남북고위급회담에 북한이 임했던 것은 남한을 안심시키고 국제적 이미지를 좋게 하자는 의도에서였으며, 당시 연형묵은 로봇에 불과했다고 하였는데요?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남북한 통일학술회의에 나오는 사람들도 대부분이 통일전선부 사람들일 것입니다.”
 
  —남북고위급회담의 핵 전문가 회담에서 남한의 팀스피릿 훈련 취소와 북한의 IAEA 협정 조인, 사찰수용을 조건부로 타결했을 때, 북한은 승리했다고 했습니다. 북한은 (핵카드와) 주고받을 것이 있다고 생각했지 않았을까요.
 
  “아닙니다. 북한은 남한에 평화 무드를 조성하고, 한국 국민의 허위 안보의식을 고취하고, 전쟁 억제력을 약화시키고, 주한미군이 물러날 조건을 갖추는 수단으로 남북대화를 추구하였을 뿐입니다.”
 
  1991년 12월 13일 남북기본합의서에 이어, 12월 31일에 한반도 비핵화 선언이 채택됐다. 12월 31일,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열린 남북한 핵 전문가 회담에서 우리 측은 “비핵화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했고, 북한 측은 “못 받아들인다”고 했다가, 밤 9시쯤 “남한 측이 팀스피릿 훈련을 중단하면, 비핵화를 받아들이겠다”고 구두(口頭)로 약속했다.
 
  이듬해 1월 7일 오전 10시 노태우 정부가 한미 팀스피릿 훈련 중단’을 발표하자, 북한은 우리 측 발표를 지켜본 후 1시간 뒤인 11시에 IAEA의 사찰을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황장엽씨는 북이 핵을 무조건 개발할 것이고 포기 결정을 한 적도 없다고 진술했기 때문에 확인 차원에서 질문했던 것이다.
 
1994년 10월 21일 로버트 갈루치 미 북핵대사(왼쪽)와 강석주 북한외교부 부부장이 제네바 합의문에 서명하고 있다.
  —북한은 대화하면서 상대방을 안심시키고, 한편으로는 땅굴을 파고, 간첩선을 내보내는 위장전술을 바탕으로 한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남한이 1993년 팀스피릿 훈련 재개를 발표하자 모든 남북대화를 중단했습니다. NPT 탈퇴는 북한이 팀스피릿 훈련 재개와 IAEA의 특별사찰 요구에 반발한 것이고, 한국 정부는 미국의 꼭두각시에 불과하고, 조·미 관계가 풀리지 않으면 남북대화는 불가능하다고 인식한 계기라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조·미 평화협정을 맺고, 그에 근거해서 한반도에 평화가 조성되었으니, 주한미군은 있을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할 것입니다.”
 
  —한국이 1993년 1월 26일 팀스피릿 훈련을 발표하자, 1월 29일 북측은 남북 당국 간 대화 중단 성명(남쪽의 강경대응이 북한의 강경파와 군부를 득세하게 만들었다는 견해)을 발표합니다. 북한은 당시 어떤 생각이었나요. 북한의 대화파를 궁지에 몰지 말고, 적당하게 ‘당근’을 주면서 키울 필요가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대화파, 강경파 구분없이 모두 김정일이 시키는 대로 하고 있습니다.”
 
  —남북기본합의서가 발표되자 북한은 “이제 남북 사이에 불가침 협정이 맺어졌으니, 남은 것은 조·미 평화협정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북한은 합의서 자체에만 큰 성과를 부여하고, 구체적 이행은 전혀 생각지 않은 것은 아닌가요.
 
  “북한의 목표는 한국을 정치적으로 와해하고, 무력으로 침략할 조건을 만들어내는 데 있습니다. 북한은 남북기본합의서를 이행할 생각이 전혀 없었죠. 북한은 구체적 이행을 전혀 생각한 바도 없고. 그 불가침협정이 끝났으니, 이제 조·미 평화협정을 맺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킨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강하게 나올 때 북한은 양보하고, 우리가 약하다고 생각되면 절대 양보하지 않는다는 견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김일성, 김정일은 일본에 대해서 표면적으로는 고자세(高姿勢)를, 내면적으로는 끌어당기기를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처럼 한국도 모든 것에 대해 의연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남북대화를 안 한다고 하면 북한은 오히려 하자고 달려들 것이지만, 하자고 매달리면 안 할 것입니다. 북한은 남의 손에 든 것만 갖고 협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자기 것은 하나도 안 주고, 바꾸지도 않을 것입니다.”
 
 
  NPT 탈퇴는 金正日의 아이디어
 
2008년 6월 27일 북한은 핵동결의 표시로 영변의 핵시설 냉각탑을 폭파했다.
  —NPT 탈퇴는 누구의 아이디어였나요.
 
  “김정일의 아이디어죠. (NPT 탈퇴를) 누가 건의하고 할 문제가 아닙니다.”
 
  1993년 3월 12일 북한이 NPT를 탈퇴했을 때는 아직도 기억이 또렷하다. 그날 김영삼 대통령은 권영해 국방부 장관과 함께 해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했다. 국방부군비통제관실 핵정책담당관이었던 나는 북한의 NPT 탈퇴 배경, 대처방안을 신속하게 분석, 작성해 박용옥(朴庸玉) 군비통제관(예비역 육군 중장, 국방차관 역임)에게 전달했고, 박 국장은 국방장관께 전달했다. 점심시간, 정오뉴스를 통해 북한의 NPT 탈퇴 사실이 전해졌고, 김영삼 대통령은 그날 오후 서울로 돌아와 긴급하게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했다. 나는 국가안보회의실 옆방에서 회의 상황을 체크했다.
 
  —1993년 3월 NPT 탈퇴 결정도 사전에 간부 간 회의가 없었으며, 김정일 단독으로 결정했다고 황 선생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NPT 탈퇴 발표 전날(1993년 3월 11일)에 중앙인민위원회 제9기 7차 회의가 개최되었고, 중앙인민위원회·원자력공업부·정무원에서 각각 공동으로 발표했습니다.
 
  “중앙인민위원회, 정무원, 원자력 공업부가 모이지 않았습니다. 김정일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중앙인민위원회가 모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황장엽씨는 중앙인민위원회는 정책 결정기구가 아니며, 이들 기구들이 모였다면 아마도 성토대회를 열기 위해 모였을 것이라고 했다.
 
  —결정 과정에 많은 기관이 참여하지 않았습니까. 관련 기관 대책회의가 있지 않았나요.
 
  “당의 회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대외관계협의회’라고 통일전선부, 국제부, 외교부, 군수공업부가 참가하는 회의입니다. 내가 국제부장에 임명된 후 1993년 12월과 1994년 1월, 두 차례 회의를 가졌습니다.
 
  또 하나의 회의는 매주 목요일 오후 3시 ‘대외파견심의위원회’를 엽니다. 6명이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인원인데, 공안담당 계응태(桂應泰) 비서(위원장, 정무원 부총리 역임), 국제담당인 저, 전병호 군사담당 비서, 경제담당 비서 한성룡(韓成龍), 교육담당 비서 최태복(崔泰福, 최고인민회의의장 역임), 김국태(金國泰,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역임) 등이 참석했습니다.
 
  대외 파견자들을 심의할 뿐 아니라 당 비서국에서 대외 관련 업무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습니다. 그리고 매주 토요일 당 비서국 정기모임이 있습니다. 이 모임에서 전병호한테 핵무기 개발의 실상이라든지, 핵 연료봉 인출이라든지, 조·미 핵협상의 경과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의견도 가끔 제시했습니다.”
 
  김정일은 NPT 10조1항(당사국은 주권을 행사함에 있어 본 조약상의 문제에 관련되는 비상사태가 자국의 최고이익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고 결정하는 경우에는 본 조약으로부터 탈퇴할 권리를 가진다)을 알 턱이 없었기 때문에 외교부 국제조약국의 조언을 받았을 가능성에 대해 질문했던 것이다.
 
  —김정일 사조직(김정일-계응태-김용순 등)이 모든 정책 결정을 한다던데요?
 
  “아닙니다. 사조직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핵 연료봉을 섞어놓으면
 
2002년 10월 19일 방한 중인 제임스 켈리 대북 특사가 미 공보원에서 북핵 관련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회견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미·북 회담의 최후 보루였던 연료봉 인출은 안 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1994년 5월 초, 영변 원자로에서 핵 연료봉을 꺼낸 이유는 무엇입니까. 원동연(元東淵) 아태위 부위원장이나 갈루치의 설명대로 원자로 부식, 터질 염려 때문인가요. 미국이 남북관계 개선과 연계해 협상 진도가 지지부진하자 위기상황을 조성해 협상하기 위해 그런 것(金求植, 통일연구소장)인가요. 알렉산더 만수로프(Alexandre Mansourov) 전 평양 주재 러시아 외교관의 주장대로 강경파가 외교부의 미진한 성과에 불만, 군부 중심으로 결단한 것인가요.
 
  “매주 목요일 정기회의에서 전병호한테 들었습니다. 그리고 외교부가 주도권을 쥐고 조·미 핵협상을 처리해 나갔습니다. 강석주(姜錫柱)가 전화로 연락해 오면 의견이 있으면 말하고, 없으면 통보만 받는 형식이었습니다. 이때 당 국제부는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당 국제부가 나서서 사회주의와 당과 강의 관계를 정리할 수 없었고, 외교 문제는 외교부가 주도적으로 해나갔습니다.”
 
  —누가 주도했나요. 미국과 협상의 끈은 어떻게 유지했나요.
 
  “과거 핵 문제에 대한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핵 연료봉을 다 꺼내 놓았습니다. 그리고 사용 후 핵 연료봉을 섞어놓으면 과거 핵개발 행적이 발각되지 않으리라 생각했죠. 미국에 가져가면 다 해명될 것이라고 보고, 미국으로 핵 연료봉을 실어가는 것에 대해 반대했습니다.”
 
  —제네바 핵 합의에 이르게 된 이유는요.
 
  “미국이 중유를 제공하고, 특별사찰에 대해 눈감아주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미래의 핵 문제에 대해서만 신경을 쓰고, 과거의 핵 문제에 대해서는 눈감아주었다고 봅니다. 북한 당국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핵무기 1~2발을 만들고 있음을 미국이 다 알면서도 그것은 큰 문제가 안 된다고 하며 눈감아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네바 핵 합의가 된 것입니다.”
 
  —경수로와 중유 제공 매년 50만 톤이면 큰 것이죠. 그런데 왜 내가 만난 북한 사람들은 신통치 않다고 이야기합니까.
 
  “중유 제공은 북한에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주지 않았으면 제네바 핵 합의를 수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북한 경제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죠.”
 
  —그건 누구의 아이디어였나요.
 
  “강석주와 김정일 라인에서 다 결정했습니다.”
 
  —1994년 6월, 북한에선 ‘전쟁에는 전쟁’ ‘대화에는 대화’라며 전쟁위기가 한창 고조됐습니다. 미국도 전쟁을 고려 중이었을 때,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북한 방문이 있었습니다. 북한도 전쟁을 준비 중이었나요.
 
  “평양은 준전시 상태였기 때문에 특별한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다만 영변(북한은 ‘분광지구’라고 부름) 지역에 김정일이 전투명령을 하달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위기의 심각성은요. 미국의 군사응징에 대해 두려워했습니까.
 
  “당연히 두려워했죠.”
 
  —미북 관계 개선에 어느 정도 신경을 쓰고 있나요.
 
  “미국과의 관계 개선은 결국 일본에 배상금을 타내기 위한 전술입니다. 미국과 관계 개선 자체에 크게 중점을 안 둡니다. 그 증거로는 내가 망명하기 직전에 연락사무소를 나진·선봉 지역에 둘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아직도 성사가 안 되는 것으로 보아 별로 중점을 두지 않는다고 판단합니다.”
 
 
  동구권 붕괴 후, 외교부 전면에 부상
 
2009년 4월 5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위성관제종합지휘소’를 찾아 ‘광명성2호’의 발사 전 과정을 관찰한 후 과학 기술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정일의 왼쪽은 전병호 당 군수공업담당 비서, 오른쪽은 개량형 로켓 개발 총책임자인 주규창 당 군수공업부 제1부부장이다.
  —1993년 12월,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 당 국제부 부장,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이 되었는데, 그때 김용순(金勇淳, 대남·외교의 사령탑 역할을 했던 북한의 前 노동당 대남담당 비서, 2003년 10월 교통사고로 사망)에서 황 선생으로 바꾼 이유가 있습니까.
 
  “나는 1984~1987년 어간에 당 국제담당 비서였습니다. 1990년 초에 사상담당 비서가 되었으나, 사상담당 비서는 김정일이 하고, 나는 사상이론 커뮤니티의 장(長)으로 활동했습니다.”
 
  —김용순은 1990년 5월부터 1993년 12월까지 국제담당 비서, 평화군축연구소를 관리했습니다. 1993년 5월 노틸러스연구소의 북한 에너지 문제 전문가 피터 헤이스(Peter Hayes) 박사를 초청, 조·미 관계 개선과 핵 문제를 동시에 풀어야 함을 강조하는 등 대외사업을 잘 했는데, 왜 김용순에서 황 선생으로 바뀌었나요.
 
  “이유는 잘 모릅니다. 내가 1984~1987년에 국제담당 비서였으므로, 다시 맡긴 것 같습니다. 김용순이는 그보다 더 빨리 교체됐습니다. (김용순은) 1992년 12월에 대남담당 비서가 되었고, 1993년 1월부터 12월까지는 최태복이 국제담당 비서가 되었습니다. 그때 윤기복(尹基福, 조평통 위원장 역임)이는 통전부를 맡아 일본을 담당했습니다. 나는 당 국제부 밑에 20명의 박사들로 비밀연구소를 운영했는데, 그 사업을 김덕홍에게 맡겼습니다.”
 
  2006년 8월 발행한 《황장엽 회고록》은 당시 상황을 더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1993년 말경 김정일은 나에게 전화를 걸어 국제비서를 다시 맡아달라고 했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저는 목이 나빠서 수령님을 모시기 곤란합니다.” 그러자 김정일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목이 쉬면 수령님 귀에 가까이 대고 크게 말하면 됩니다.” 그러면서 그는 국제부가 이제는 외교부를 지도 통제하지 않고 세계 각국 당들과의 교류만을 사업으로 하고 있다는 것과, 당들과의 사업이 곧 사상이론 사업이기 때문에 사상이론 전문가가 비서를 맡는 게 옳고, 따라서 주체사상연구소를 국제부에 합병시키라는 것이었다.… 나는 사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당시 국제비서로 있던 허담(許錟)이 건강악화로 인해 비서업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허담은 형식상 최고인민회의의 대외사업을 맡고 있었으나, 신병치료 때문에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또 김용순이 통일전선담당 비서로 간 뒤로 기존에 과학교육 비서로 있던 최태복이 1년 동안 국제비서를 맡았는데, 그가 주체사상을 몰라 국제비서에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1993년 12월 11일 최고인민회의 제9기 6차 회의에서 부주석 이종옥(李鍾玉), 박성철(朴成哲)에 추가해 김영주(金英柱) 복권, 김병식(金炳植) 등 부주석을 2명 추가했습니다. 이것은 핵정책 결정 과정의 보강 아닌가요? 황 선생의 국제담당 비서 임명도 그렇지 않습니까.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 이후 당 대 당 외교는 부차적인 것이 돼버렸습니다. 오히려 외교부 중심의 외교가 일차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대미 협상은 김정일이 외교부를 직접 지휘하게 됐고, 자연스레 ‘김정일-강석주(現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 당시 외교부부부장)’ 라인이 형성되었습니다.
 
  사회주의 국가들이 있을 때는 당의 국제부가 외교부의 우위에 있었으나, 사회주의 국가의 소멸로 공산당들이 없어졌기 때문에 당 국제부의 역할도 중요도가 소멸되었습니다. 김병식은 조총련(朝總聯)을 끌어들이기 위해 임명했는데, 조총련의 재정(財政)은 통일전선부가 맡고, 활동은 국제부가 감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병식은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해 많은 비판이 있었습니다.”
 
 
  金正日, 갈루치 북핵특사 좋아해
 
1991년 12월 10일 정원식 총리 주최로 신라호텔 다이너스티룸에서 열린 만찬에서 정 총리(오른쪽)와 연형묵 북한 정무원 총리(왼쪽)가 건배하고 있다.
  —1993년 12월에서 1994년 10월 21일 제네바 합의 때까지 어떤 역할을 했나요. 1994년 6월 셀리그 해리슨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했습니까. 구소련의 평양 주재 외교관을 지낸 알렉산더 만수로프에 의하면, 평화군축연구소에서 NPT 관련 아이디어를 많이 내 노동당 국제부에 건의하고, 노동당 국제부는 당 조사부에 건의하고, 다음으로 김정일이 결재하였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1980년대 내가 국제부장이었을 때, 평화군축연구소는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평화군축연구소는 유명무실해졌으며, 퇴직 외교관이나 연구원들의 쉬는 장소에 불과했습니다. 따라서 평화군축연구소에서 아이디어를 내 정책 건의하고 할 계제가 아니었습니다.”
 
  황장엽씨는 구체적인 내용은 잘 모르겠다는 투로 답했다. 국제부장의 역할이 크게 줄었을 뿐만 아니라 제네바 회담 때는 강석주라는 인물이 등장하면서 김정일-강석주 라인이 형성돼 핵 문제를 처리했고, 자신은 부차적 인물로 주도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만수로프의 주장대로 “평화군축연구소가 비핵화에 비중 있는 역할을 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대해 “평화군축연구소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중앙인민위원회가 핵 문제에 대해 어떠한 역할을 했습니까.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김정일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강석주가 신임을 받고 있다는 것은 지미 카터-김일성 회담 때 강석주가 배석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강석주와 김정일 사이에서 노동당 국제부가 전혀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네요.
 
  “강석주가 김정일과 논의해 처리했습니다. 당 국제부에서는 가끔 강석주가 통보해 주면 듣는 것이었습니다. 김정일은 강석주에게 로버트 갈루치(Robert Gallucci, 미국 북핵특사 역임)를 북한에 데려오라고 말했습니다. 갈루치가 (북한의) 과거 핵에 대해 알면서도 눈감아준다고 생각하였던 것이죠. 그래서 갈루치를 특별히 좋아했습니다.”
 
  1994년 미·북 제네바 합의의 주역인 갈루치 전 차관보는 2013년 2월 19일 아산정책연구원이 개최한 ‘아산핵포럼 2013’ 기조연설에서 “지난 20년간 대북정책은, 그 성격이 포용이든 봉쇄이든 간에 북한이 동북아 지역에 가하는 위협을 줄이는 데 분명히 실패했다”고 밝혔다.
 
  —미국과의 협상만 협상으로 인식하고 있나요.
 
  “(북한은) 강대국과 협상한다는 자체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을 위협하는 한편으로 미국으로부터 얻어낸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미국에는 사정도 하고 양보도 합니다. 한국에는 절대 하소연하거나 양보 못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갈루치도 (협상하자고) 강석주에게 하소연하고, 강석주도 갈루치에게 (중유를 더 달라고) 하소연했습니다.”
 
  —강석주가 갈루치에게 “특별사찰을 먼저 받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협상이 끝나버리는 게 아닌가”라며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라고 하소연했다고 하던데요?
 
  “….”
 
 
  북한 정권과 주민을 분리해 지원해야
 
북한의 NPT 탈퇴를 헤드라인으로 보도한 《조선일보》 2003년 1월 10일자 신문.
  —황 선생께서는 북한 정권과 주민 둘을 분리해, 정권에는 적대정책을 지속해 쇄국(鎖國)과 군국주의(軍國主義)가 오히려 강화돼 문제가 곪아 터지도록 하고, 주민에게는 소비품·식량·의약품 원조로 환심을 사야 한다고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북한 경제가 한국 경제에 예속되도록 만듦으로써 붕괴를 촉진시켜야 한다고 했는데요.
 
  “북한 김정일 정권은 개혁·개방을 할 수 없는 정권입니다. 경제 문제는 정무원에게 책임을 묻고 김정일은 군부와 당을 장악하는 데 중점을 둘 것입니다. 북한 주민에게 식량과 의료, 소모품(강냉이, 옷, 의약품)은 주되, 농기계, 비료 등은 주지 말고 결국 북한을 한국에 의존시키고, 개혁개방 요구할 것이 아니고 오히려 쇄국과 군국주의 정책을 부추겨야 합니다.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도 설비나 기계를 줄 것이 아니라 소모품 위주로 주어야 합니다.
 
  그럴 경우, 한국은 경제·국제적 역량에서 우위이므로 이것을 제대로 활용하게 되는 것이며, 자연스레 북한의 민심이 한국 쪽으로 쏠리게 될 것입니다. 주민의 불만이 폭발해 북한 정권은 3년 내, 즉 2000년 내에 붕괴할 것입니다. 북한의 군수공업은 이 상태로 3년만 끌게 되면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군수공업이 망할 때까지 군국주의 정책을 더욱 강화시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분단이 고착화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죠. 북한이 노리는 바는 대 미국, 대 일본 관계 개선을 통해 외국의 지원을 받는 것입니다.
 
  특히 일본의 배상금을 노리고 있습니다. (남한이) 일본과 외교를 잘해 일본이 배상금을 주지 않도록 (일본을) 한국 편으로 끌어들여야 합니다. 외국의 지원과 영향력이 거세지면 한국은 설 땅이 없습니다. 외국이 지원해 주고자 하면, ‘한국이 할 것이니 가만히 있으라’고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북한 주민의 대 한국 지지 움직임이 현실화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야 통일에 도움이 됩니다.
 
  주민들에게 1년에 200만 톤 정도의 옥수수를 계속 제공하는 것이 김정일에 대한 주민의 불만을 극대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판문점을 통해 육로로 매월 20만 톤이 들어가게 되면, 3년 내 북한은 한국 편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러한 정책에 대해 한국 국민의 여론을 설득하는 데 애로점이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을 장기적이고 전략적으로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북한은 매우 자부심이 많고 반항심이 많은데, 칭찬해 주면 대단히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 양보를 이끌어낼 수 있겠습니까. 돈과 식량을 주고 양보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주어도 양보는 얻을 수 없다고 봅니다.”
 
 
  “고르바초프는 머저리”
 
2002년 5월 24일 워싱턴의 세미나장에서 한용섭 교수(왼쪽 두 번째)가 로버트 아인혼 전 미 국무부 비확산군축담당 특보(맨 왼쪽), 최근 한일 관계 발언으로 논란을 빚은 웬디 셔먼 국무부 정무차관(오른쪽 두 번째), 갈루치 전 북핵특사(맨 오른쪽)와 만나 담소를 나누고 있다.
  —김정일이 군부대를 자주 방문하는 것은 그가 군부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증거라는 관측도 있습니다. 1990년 5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에 오른 것을 보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는 데 시간이 너무 촉박하지 않으냐는 것이죠. 김정일은 봉쇄·통제정책을 강화할 것으로 보는데, 그럴 경우 정치적 업적이 없는데다, 경제가 계속 나빠질 경우 군부 쿠데타가 발생할 것으로 점치는 사람도 있는데요?
 
  “(쿠데타가 발생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판문점대표부 이찬복 대표(인민군 상장), 셀리그 해리슨 박사, 샘넌 상원의원과 레이니 전 주한미대사는 “주한미군의 주둔을 당분간 수용, 주한미군이 남북한에 대해 중립적으로 바뀌면 주둔해도 괜찮다”고 발언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조국평화통일위원회나 당의 통일전선부에서는 외세 배격, 주한미군 철수를 부르짖고 있는 등 정부 각 기관들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요.
 
  “일치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통전부나 외교부나 김정일의 지시와 통제에 의해 행동하기 때문에 일치돼 있습니다.”
 
  —북한은 4자 회담에서 주한미군 문제 논의와 미·북 평화협정을 꼭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주한미군 문제를 협상카드로 쓰면서, 식량의 지원을 노리는 건가요, 아니면 끝까지 철수를 주장할까요.
 
  “주한미군은 반드시 철수해야 한다는 것이 북한의 입장입니다. 무력적화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죠. 식량을 준다고 북한이 군사적인 면에서 양보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김정일은 북한 인민 1300만명을 굶겨 죽여도 1000만명 인민과 군대의 총대만 붙들고 정권을 유지해 갈 것입니다.”
 
  —북한은 남한을 평화체제 구축에서 자격이 없다고 하는데, 자격 인정하는 조건으로 무엇을 요구하려 하는 건가요, 아니면 전혀 타협이 불가능한가요.
 
  “남한의 자격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을 제일 무서운 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미국과 협상하려는 것입니다. 미국과의 협상도 주고받기식의 협상이 아니라, 미국의 것만 가지고 협상하는 것입니다.”
 
  —소규모 인도주의적 지원 외에 정부 차원의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을 북한의 군비축소(軍備縮小)와 연계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실현 가능성이 없습니다. 북한 군부가 양보할 리가 없습니다. 식량 지원은 연계하지 말고 대폭 주민에게 주는 것이 북한 주민의 친(親)한국 유도를 위해 유용합니다.”
 
  —북한 군사력이 상당하니 일방적인 군축을 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고르바초프는 소련을 위해 일방적인 군축을 실시했습니다. 북한이 군축하게 되면, 우리가 경제적 지원을 대폭 해줄 수 있다고 했더니, 북한 측 인사가 주한미군 철수하면 해결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군축은 중국과 미국도 찬성하고 있습니다.
 
  “고르바초프는 머저리입니다. 북한이 일방적인 군축을 할 리 없습니다. 4자회담이 성공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조·미 평화협정과 주한미군 철수를 위한 협상입니다. 설사 식량을 지원해 주어도 전방에 배치한 병력을 후방으로 철수한다든지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북한 정권은 무력(武力)을 중요시합니다.
 
  협상 과정에서 간혹 김정일의 위신을 높이고 협상의 지렛대를 제고하기 위해 군사적 위협이나 도발을 감행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협상용이지 전쟁 도발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위협과 시위를 하는 것은 그만큼 힘이 모자라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노동 1호를 슬쩍 보여준다든지, 군사분계선 안에서 도발을 할 때 겁을 먹을 것이 아니라, 강력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군사도발 시 완전 적시(適時)에 응징하고, 북한이 도발한 사실을 사진으로 찍어 증거를 남겨 국제사회에 즉각 보여주어야 합니다. 북한이 발뺌하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위협과 시위를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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