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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발간한 《김정숙 전기》

백발백중 명사수, 광복 후 다양한 활동 등 김정숙 우상화에 혈안

글 : 최우석  월간조선 기자  woosu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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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발백중의 명사수”… 실상은 김일성 앞에서 벌벌 떠는 평범한 여자
⊙ “광복 후 활발한 대외 활동”… 실상 김일성은 볼품없다는 이유로 김정숙과 동행 안 해
⊙ “김정은의 김정숙 우상화는 친모 고영희의 핸드캡 상쇄하기 위한 카드”
전기에 나온 김정숙 독사진. 김일성은 볼품없는 외모의 김정숙을 평생 구박했다고 한다.
  1973년 2월 북한 당 정치위원회 비밀회의에서 후계자로 책봉된 김정일은 연산군(燕山君)이 생모인 폐비윤씨(廢妃尹氏)를 복위(復位)시켰듯이 이내 생모 김정숙의 복위와 우상화(偶像化)에 착수했다. ‘항일의 여성영웅’ ‘혁명의 어머니’ 등 찬양구호를 만들고 김정숙의 이름을 붙인 지역과 대학을 만들며 대대적인 우상화 작업을 벌였다. 김정숙 우상화 작업의 강도가 가장 셌던 시기는 73년 말부터 76년까지 3년간이다. 당시 김정일은 ‘곁가지(이복형제) 투쟁’ 중이었다. ‘곁가지 투쟁’은 김정일이 후계자로 지명되고 계모 김성애를 시작으로 삼촌 김영주, 이복동생 김평일 등을 백두혈통의 ‘곁가지’로 규정, 제거한 것을 말한다. 김정일의 김정숙 우상화는 본인이 백두혈통임을 강조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우상화 작업 이후 김정숙은 김일성, 김정일과 함께 백두산 3대 장군 반열에 올랐다.
 
  이후 평년 수준을 유지한 김정숙 우상화의 강도는 40여 년이 지난 현재 다시금 높아졌다. 김정은이 조모(祖母)인 김정숙 우상화에 팔을 걷어붙인 것이다. 김정은은 자신이 정권을 잡은 2012년 12월부터 김정숙 우상화에 본격 착수한 이후 매년 그 강도를 높이고 있다.
 
북한 김정은은 2014년 김정숙 사망 65주기를 맞이해 금수산 태양궁전을 참배했다.
  김정은은 2014년 12월 24일 김정숙 생일을 맞아 김씨 일가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 태양궁전 참배에 나서 김정숙을 ‘혁명의 위대한 어머니’로 치켜세우는가 하면 이날 조선중앙 TV의 대부분을 김정숙 관련 내용에 할애하라고 했다. 한 탈북자는 “당시 오전 9시부터 방송을 시작, 김정숙 관련 프로그램을 연속으로 내보냈는데 이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했다. 《월간조선》은 김정은이 어떤 식으로 조모인 김정숙을 미화(美化)했는지 살펴보기 위해 북한이 2014년 12월 24일 김정숙의 생일에 맞춰 출간한 《김정숙 전기》 확장판을 입수, 분석했다. 《김정숙 전기》는 김정숙의 ‘105가지 업적’으로 구성돼 있었다.
 
 
  “최고의 명사수”
 
  김정숙 미화의 핵심 키워드는 크게 세 가지다. 우선 첫 번째는 김일성 빨치산 시절(1930년대) 김정숙이 거둔 ‘전과(戰果)’다.
 
  전기는 김정숙이 빨치산 부대에서 벌인 활약상을 상당한 분량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내용이 사실이라면 김정숙은 액션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일당백의 전투능력과 초인에 가까운 체력을 가진 인물이다. 전기에 따르면 일단 김정숙은 ‘백발백중의 사격술’을 자랑하는 명사수였다. 다음은 김정숙의 사격술을 묘사한 부분들이다. 책에 나온 내용 그대로를 옮긴다.
 
  ①〈백두산녀장군 김정숙 어머님께서는 조국을 자신보다 더 뜨겁게 사랑하시었기에 일제침략자들을 끝없이 증오하시었다. 백두산녀장군의 불타는 증오심은 그이께서 지니신 백발백중의 사격술의 비결이기도 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전투가 끝날 때마다 지휘관들은 김정숙 어머님께 적들을 얼마나 소멸했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이의 탄띠에서 탄알이 몇 발 없어졌는가를 보고 소멸한 적인원수를 확인하군 하였다. 김정숙 어머님께서는 임의의 순간에, 아무리 어려운 조건과 환경속에서도 방아쇠만 당기면 영낙없이 백발백중하시였다. (불타는 사랑과 증오 부분)〉
 
  ②〈주체28(1939)년 5월 23일 대홍단전투에 참가하신 김정숙 동지께서는 지휘처 가까이에서 위대한 수령님의 신변안전에 깊은 주의를 돌리시며 기여드는 적들에게 명중탄을 안기시였다. 김정숙 동지께서는 전투가 시작되자 적장교를 단방에 쏘아눕히시고 련이어 기관총수들을 명중사격으로 쓸어눕히시였다. 그리고 적들의 필사적인 발악에 대처하여 사령관동지께서 계시는 지휘처의 위치를 보다 안전한 곳으로 이동할것을 제기하시였다. (청봉숙영지의 나무에 구호를 쓰시는 항일의 녀성영웅 부분)〉
 
  ③〈주체28(1939)년 6월이였다. 《결사대》라는 완장을 팔에 낀 100여명의 《토벌대》놈들이 도적고양이모양으로 살금살금 사령부 숙영지쪽으로 기여들고 있었던 것이다. 김정숙 어머님께서는 한목숨 바쳐서라도 혁명의 사령부를 지켜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슴을 불태우시였다. 어머님께서는 더 생각할 사이없이 사령부가 있는 반대방향으로 번개같이 달리시며 적들에게 련속 명중탄을 안기시였다. 그럴 때마다 뒤따르던 적들이 너부러졌다. (령결사옹위의 총성 부분)〉
 
  ④〈김정숙 어머님께서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신지 며칠이 지난 어느날이였다. 부대에서는 신입대원들을 축하하는 사격경기가 조직되였다. 침착하고도 능란한 솜씨로 여유작작하게 장탄을 하신 어머님께서는 목표판을 향하여 방아쇠를 당기시였다. ‘땅, 땅’ 연방 총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때마다 목표판에는 총구멍이 뚫리고 장내에서는 환성이 터져 올랐다. 참으로 명사격술이였다. 신입대원들은 물론 구대원들까지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들은 김정숙 어머님의 사격술을 따라배워야 하겠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면서 백발백중의 명중탄을 안기신 김정숙 어머님의 신묘한 사격술에 탄복하였다. (백발백중 사격술의 비결 부분)〉
 
  ⑤〈주체33(1944)년 3월 8일, 조국해방을 위한 최후공격작전을 면밀히 준비하던 그때 수많은 명사수들이 참가한 큰 규모의 사격경기대회가 진행되였다.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 어머님께서는 대원들의 한결같은 믿음과 기대가 어린 눈길을 한몸에 받으시며 화선에 나서시였다. 김정숙 어머님께서는 200m반신형 출현목표, 그리고 300m구보형 이동목표 사격경기에서 출현목표와 이동목표를 번개같이 쏴 맞히시였다. 다음으로 김정숙 어머님께서는 선수들이 제일 힘들어 한다는 점처럼 보이는 5개의 병을 2분 동안에 쏴맞혀야 하는 100m병쏘기경기에서도 번개같이 병모가지들만 쏴 맞히시였다. (잊지 못할 그날의 총성 부분)〉
 
  ⑥〈주체36(1947)년 9월 28일이였다.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김정숙 어머님께서는 삼일포를 찾으시였다. 물우에 떠있는 물오리떼를 바라보시던 수령님께서는 총을 가져오라고 이르시였다. 물오리들이 쉬임없이 움직이는 물우에 떠있어 맞히기가 어려울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어머님께서는 별로 겨냥하는 기색도 없이 물오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시였다. 순간 물오리는 날개를 몇 번 퍼덕이더니 물우에 늘어졌다. (삼일포의 메아리 부분)〉
 
 
  첫 여성 낙하산兵
 
전기에 나온 김정숙(왼쪽으로부터 두 번째) 사진. 백두산 여장군으로 불리는 김정숙은 사진으로 봤을 때 몸집이 작은 평범한 여성이었다.
  전기에 따르면 김정숙은 사격술에만 능한 것이 아니었다. ‘기발한 전술적 묘안(주체25년 겨울 내도산방어전투때에 있은 일이다. 김정숙 어머님께서는 우등불을 피워 적들을 유인한 다음 유리한 위치에 매복해있다가 답새겨야 한다, 우등불을 보고 달려들던 적들은 매복전에 걸려 숱한 시체만 남기고 도망쳤다)’ ‘능숙한 정황판단(주체28년 6월 지하공작을 하시던 때 김정숙 어머님께서는 소조원들을 위해 안전한 도하지점을 찾아냈다)’ 등에서는 김정숙이 탁월한 전투 전술 능력을 갖춘 인물임을 강조했다.
 
  백발백중의 사격술과 탁월한 전투 전술 능력을 갖춘 김정숙은 북한의 첫 여성 낙하산병이기도 했다.
 
  ‘첫 녀성락하산병’ 부분에 담긴 내용이다.
 
  〈조국해방의 대사변을 준비있게 맞이하기 위하여 훈련기지에서 활동할 때 있은 일이다. 김정숙 어머님께서는 조국이 해방될 그날을 한시라도 앞당길 일념으로 훈련에 훈련을 거듭하시였다. 마침내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 올라 락하하게 될 날이였다. 비행기가 세찬 동음을 울리며 동체를 부르르 떨더니 대지를 차고 하늘로 날아오르자 녀대원들은 크나큰 흥분과 감정에 휩싸였다. 첫 락하훈련인것으로 하여 긴장함을 감추지 못하는 녀대원들을 바라보신 어머님께서는 맨 앞으로 나서시며 자신께서 먼저 락하하겠다고 하시고는 힘차게 발을 굴러 위험천만한 허공중으로 몸을 날리시였다. 이어 ‘야!’하는 환성이 터졌다.〉
 
 
  빨래했던 여자
 
  북한의 주장대로 김정숙이 쐈다 하면 백발백중의 명사수였을 수 있다. 그런데 《김정숙 전기》에는 사살한 일본군 인원 등이 정확히 명시돼 있지 않다. ‘김정숙이 적들을 모두 저격했다’는 식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저격수들은 이런 부분에 대한 설명이 비교적 명확하다. 예를 들면 세계 최고 저격수로 꼽히는 핀란드군 출신의 시모 해위해(Simo Ha¨yha¨)는 1939년 9월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한 겨울전쟁에서 총 800명을 사살했고, 소련의 대표적인 총잡이 바실리 자이체프(Vasily Zaytsev)는 2차 대전에서 400명의 독일군을 해치운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 밖에 이반 시도렌코(Ivan Sidorenko)는 스탈린 그라드 전투에서 500명을 저격했고, 여성인 루드밀라 파블리첸코(Lyudmila M, Pavilchenko)는 오데사 지역에서 약 2달 동안 187명을 사살했다. 정말 김정숙이 매복전, 유인전, 기습전, 야간습격전 등 그야말로 변화무쌍한 전술을 펼쳤는지 믿기에는 설명이 너무 부족하다.
 
  미 중앙정보국(CIA)에서 24년간 일했던 마이클 리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김정숙은 빨치산 활동을 할 때에 야영지에서 그 빨치산 대원들의 양말, 옷을 세탁하고 페치카에 불을 지피고 심부름하는 하녀 비슷한 여자였습니다.”
 
  하녀 비슷한 여자가 무슨 명사수이고, 최고 전술가냐는 이야기다. 마이클 리는 CIA에서 주로 북한 정보를 분석하는 일을 했다. 그는 1961년 김일성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나라며 급파한 간첩 황태성을 심문했고, 한국 여객기 테러사건을 일으킨 김현희와 북한에 납치됐던 신상옥, 최은희씨도 직접 만나 조사하는 등 굵직한 사건을 많이 맡은 인물이다.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도 “빨치산을 했던 사람들도 (마이클 리의 발언과 같이) 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런 말 전하다가 수용소 간 사람도 꽤 된다고 들었다”고 했다.
 
  《동아일보》는 1962년 5월 30일부터 김일성의 직속담당기자로서 온갖 연설문, 담화문을 대필한 한재덕씨가 쓴 ‘김일성을 고발한다’는 글을 실었는데 거기에 김정숙이 어떤 인물인지 예상할 수 있는 내용이 있다.
 
  〈나는 전후 두 번 김일성의 가정에 초대받아 그 아내와 애들까지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아내는 삼십 전후의 키가 조그마한 아주 평범한 가정부인으로 보였는데 그 촌뜨기 같은 소련식 옷차림이 그를 더욱 소박하게 보이게 하였는지도 모른다. 어느 모로 보나 이전에 빨치산 투쟁을 하였다는 여성으로는, 더욱이나 소문 같은 명사수의 여장부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김일성이 예상외로 우락부락 큰소리를 내며 가정폭군 노릇을 하였는데 그 아내는 그 앞에서 벌벌 떠는 꼴이었다. 대개 밖에서 여성을 위하는 체 말이 많은 사람일수록 가정에서는 폭군이라고 했다. 김일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모순점
 
  김정숙이 첫 여성 낙하산병이었다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전기에 따르면 광복 전에 공수훈련을 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당시 게릴라 전술을 펼쳤던 항일 빨치산 부대에 공수훈련이 가능한 수송 비행기가 있었다는 것은 두서없는 주장이다. 다만 김정숙이 공수훈련을 한 곳이 소련이라면 첫 여성 낙하산병이었을 가능성은 적지만 그런대로 이해는 된다. 소련은 1932년 최초로 공수여단을 만들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김정숙은 김일성과 1930년대 만주 일대에서 일제에 항거해 빨치산 활동을 벌였고, 30년대 말부터 시작된 일제의 대토벌에 쫓겨 40년 10월 하순 아무르강(江)을 건너 소련으로 피신했다. 당시 김정숙과 김일성은 이미 결혼한 상태였다. 소련으로 들어간 김일성 일행은 한동안 블라디보스토크 인근의 남야영 또는 B야영이라 부르는 곳에 머물다 42년 7월 하바롭스크에서 동북쪽으로 약 70km 떨어진 북야영, 일명 A야영으로 옮겼다. 김일성과 김정숙은 소련으로 들어간 이후 45년 8월 광복 때까지 줄곧 두 야영에 머물렀다. 이 시기 김일성과 김정숙은 함께 대피한 ‘김일성 부대원’들과 함께 소련군 산하 88특별여단에서 복무하는데 이때 김정숙이 공수훈련을 받았다면 첫 여성 낙하산병이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88특별여단의 주 임무는 정찰이었다. 일반적으로 공수훈련은 특수부대가 받는다. 만약 김정숙이 첫 여성 낙하산병이었다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북한은 밝힐 수 없다. 김정일 출생의 비밀 때문이다.
 
  김정숙은 남야영(B야영)에서 북야영(A야영)으로 떠나기 5개월 전인 42년 2월 16일 김정일을 낳았다. 이에 어린 시절 김정일은 소련식 이름인 ‘유라’로 불렸고, 이 이름은 입북 이후 그가 60년 7월 남산 고급중학교(현재 평양 제1고등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대로 쓰였다. 김정일이라는 이름은 그가 공민증(우리의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고, 대학에 진학하면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정숙이 김정일을 소련에서 낳은 것은 사실로 확인된 사안이다. 실제 김정일이 다닌 남산 고급중학교 동창생은 언론 인터뷰에서 “김정일이 자기를 소개할 때 42년 2월 16일 하바롭스크 병영에서 태어났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1993년 6월 30일자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김정일이 출생한 남야영, 즉 하바롭스크 시의 마을 주민 중 노인들은 김일성 부자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기사 내용이다.
 
  〈주민 쉬미코프 바벨(88) 씨는 “당시 줄 하나와 별 4개가 있는 견장(대위계급)을 단 까비딴(영어 ‘captain’에 해당하는 러시아어) 김일성이 가족 및 조선-중국인-러시아인 등으로 편성된 군인 2백여 명과 함께 마을에 들어와 관사를 짓고서 돼지를 키우고 채소농사를 지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주민 페니기아 바르바르(81·여) 씨는 “김일성의 관사에 우유를 얻으러 갔다가 그의 두 아들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참고로 김정일에게는 ‘슈라’라는 이름의 친동생이 있었지만 1948년 여름 연못에 빠져 죽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김정일이 ‘백두산 밀영(密營)’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김일성과 그가 이끄는 빨치산 대원들이 1936년 가을부터 백두산 일대에 비밀유격 근거지인 밀영을 조성하기 시작했는데 그중 한 곳인 ‘백두산 밀영’에서 김정일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북한에서 김정일의 백두산 출생신화의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김정일 본인으로 전해진다. 김정일은 72년 5월 간부들과 백두산 산행을 다녀오면서 “백두산은 나의 고향, 나는 백두산의 아들”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북한 입장에서 김정숙이 첫 여성 낙하산병이었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증명한다면 그것은 김정일이 백두산이 아닌 소련에서 태어났다는 숨겨진 진실을 고백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한 탈북자의 이야기다.
 
  “김정숙 이야기는 거의 거짓말입니다. 북한 사람들도 대부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첫 여성 낙하산병이란 주장을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은 김정숙이 소련에서 훈련을 받았고 그곳에서 김정일을 낳은 것은 팩트이기 때문입니다.”
 
 
  김정숙의 親 서민적 행보 강조
 
전기에 나온 김정숙 그림. 김정숙의 친 서민행보를 보여주기 위한 그림인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키워드는 검소와 소박한 삶이다. 전기는 김정숙이 특권층임에도 친서민 행보를 보였다고 했다.
 
  〈김정숙 동지께서는 언제나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 다니시었다. 농촌에 나가시면 농민들과 함께 씨앗도 뿌리고 마당질도 하시었다. 건설 장에 가시면 무릎까지 빠지는 감탕판에도 들어가시여 삽질까지 하시였으니 누구도 이런 분을 그처럼 명망높으신 백두산녀장군이시라고 생각지 못하였다. (백두산녀장군의 인간적 매력 부분)〉
 
  〈주체37(1948)년 4월, 평양에서 력사적인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대표자 련석회의가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녀성대표들은 목메여 사모님이라고 부르며 어머님의 품에 와락 안기였다. 품에 안긴 그들의 잔등을 두드려주시면서 어머님께서는 ‘나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전사예요. 그러니 김정숙 동무라고 불러주세요’라고 따뜻이 타이르시였다. 얼마나 겸손하시고 소박하시였는가. (동무라 불러주세요 부분)〉
 
  〈한평생 동지들과 인민들을 위해 모든것을 송두리채 바치고 세상을 떠나간 김정숙이였지만 자녀들을 위해서는 한푼의 돈도 재산도 남기지 못했다. (재부-‘재산의 북한말’ 부분)〉
 
  〈김정숙 동지는 여느 사람들과 꼭같이 지내는것이 제일 마음 편하다고, 우리가 만일 지난날 산에서 싸웠다 하여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이라도 행세하거나 편안히 지내려 한다면 인민들이 우리를 따르지 않을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 (언제나 평민의 자세에서 부분)〉
 
  〈어느 날 어머님께서는 상처를 치료받으시기 위하여 련화동에 있는 한 고려의사를 찾아 저택을 나서시였다. 의사를 부르면 저택에서도 치료를 받으실 수 있으셨지만, 어머님께서는 의사를 부르려고 하는 부관을 만류하시였다. 부관이 승용차를 가져오자 어머님께서는 병원에 가면서까지 나라의 귀한 휘발유를 랑비하겠는가고 하시면서 종시 걸어서 떠나시였다. (인력거군의 눈물 부분)〉 이런 식이다.
 
 
  김일성과 김정숙은 애틋했다?
 
  세 번째 키워드는 김일성과의 사랑이다. 전기에는 김정숙이 김일성을 헌신적으로 사랑하며, 그를 위해서는 모든 희생을 감수했으며 김일성도 그에 대해 감사하다는 표현을 자주 했다는 내용이 다수 담겼다. 다음은 김일성을 위해 김정숙이 헌신했다는 부분 몇 가지를 뽑은 것이다.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 어머님께서는 해방 후 새 조국건설의 바쁘신 나날을 보내고 계시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 항상 따뜻한 진지를 드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시였다. (감이 재간이 아니라고 하시며 부분)〉
 
  〈김정숙 어머님께서는 밤낮이 따로 없이 사업에만 열중하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잠시나마 계수나무의 향기 속에서 휴식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정원에 계수나무들을 심으시고 가꾸시는데 온갖 정성을 다하시였다. (계수나무에 깃든 이야기 부분)〉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 어머님께서는 위대한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오로지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의 안녕에 최대의 심혈을 기울이시였다. (백두산녀장군께서 심어주신 애국의 넋 부분)〉
 
  전기에 따르면 김정숙의 헌신적인 사랑에 김일성은 다음과 같이 화답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었다. 김정숙 동무는 나에 대한 충실성이 매우 지극한 동무였습니다.
 
  ▲김정숙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동지들을 위해 한 생을 살았습니다.
 
  ▲김정숙은 여러 번 나를 위기에서 구원해주었습니다. 그는 내 신변안전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육탄이 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동지들과 공동위업에 대한 헌신성, 이것은 김정숙의 성격에서 핵을 이루는 것이었으며 또한 그가 지닌 인간적 매력이기도 하였습니다.
 
 
  김일성, 김정숙 평생 구박
 
  전기는 김일성과 김정숙의 사이를 아주 각별하게 표현했지만, 실상은 완전히 달랐다. 김일성은 볼품없는 외모의 김정숙을 평생 구박했다고 한다. 또 공식적인 자리에 절대 김정숙과 동행(同行)하지 않았다.
 
  1962년 5월 30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김일성을 고발한다’는 기사의 일부분이다.
 
  〈김정숙은 김일성이 소련으로 들어가던 당시의 아내로 그때 그의 부대 내에서는 가장 똑똑하고 또 총을 잘 쏘기로 유명하였다는 정평이었다. 그런데 김일성의 기이한 현상 한 가지가 화제에 오르게 되었다. 김일성이 그 아내를 어떤 회합이나 ‘파티’나 극장에나 동반하는 일이 거의 없으며, 그를 사람 앞에 내놓지 않는 사실이었다. 여성해방을 운운하고 남녀평등권법령을 서두른 김일성이 어찌하여 자기 아내만은 집안 구석에 가둬두고 내놓지 않는가? 하물며 그 여자는 과거 유격대 시대의 동지라고 하지 않느냐는 의문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소련군 측 최고간부들과 어울리는 대대적인 파티가 있어 소련 장군들은 물론 북한 측 고급간부들까지 되도록 모두 부인을 동반하고 나오는 자리에도 어찌된 까닭인지 김일성은 아내를 동반하지 않았다. 그러니 북한의 최고간부 가운데도 김일성의 아내를 본 사람은 극히 적었다.〉
 
  마이클 리 전 CIA 요원은 “김정숙은 못난 외모에 한글도 못 읽었다”며 “김일성은 지도자가 된 이후, 부인 김씨의 외모와 학력이 드러날까 봐 절대 공개석상에 노출하지 않았다”고 했다. 김정숙은 1949년 출산 중 사망했는데,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사인은 자살이었다.
 
  1990년 소련신문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는 김정숙은 김일성이 당시 비서였던 김성애(김일성의 두 번째 처)와 불륜관계에 빠졌기 때문에 그 충격으로 자살했다고 보도했고, 탈북자들도 이를 인정하면서 밝혀졌다.
 
  김일성의 친척인 강명도 경민대 교수는 “실제 김정숙의 산파를 했던 친척의 증언으로는 김정숙이 출산 도중 하혈을 한 상태에서 처리하지 않고 문을 걸어 잠근 채 죽었다”고 했다. 김정숙이 자살했을 때 김정일과 그의 여동생 김경희의 나이는 각각 일곱 살과 세 살이었다.
 
 
  후지산 줄기
 
일본 《마이니치신문》이 입수한 김정은의 친모 고영희 사진. 김정은은 고영희의 핸디캡(재일교포 출신)을 상쇄하기 위해 김정숙 우상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김정은이 얼굴도 보지 못한 조모 김정숙에 대한 우상화, 미화 작업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김정은 유일 체제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자신만이 진정한 백두혈통으로 유일한 정통성이 있다는 것을 백두혈통의 뿌리인 김정숙의 우상화를 통해 부각시키려는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인 김정일이 김정숙 우상화에 나섰던 것과 목적이 같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김정숙 우상화, 미화 작업의 강도가 2014년을 기점으로 점점 세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가까운 데 있었다. 바로 김정은의 친모 고영희 때문이다. 고영희는 1970년대 중반 김정일과 동거에 들어간 뒤 세 명(김정철, 김정은, 김여정)의 자식을 낳았다. 김정일은 4명의 아내(성혜림, 김영숙, 고영희, 김옥) 중 고영희를 가장 사랑했다고 한다. 소식통들이 말한 바로는, 고영희는 1998년께 유선암을 진단받고 항암치료를 받다가 2003년 파리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
 
  문제는 고영희가 북송 재일교포 출신이란 점이다. 북한에서는 북송 재일교포를 ‘째포(재일교포를 비하한 표현)’라고 부른다. 정보 당국 관계자는 “고영희의 출생 당시 이름은 고희훈이었고, 일본 이름은 다카다 히메(高田姬)였다”고 했다.
 
  게다가 고영희의 부친, 즉 김정은의 외조부인 고경택은 친일 행적이 있다. 일본에 살 때 육군성 산하 ‘히로타 군복 공장’에서 일한 것으로 비밀 자료에서 드러났다. 김일성이 항일투쟁에서 맞섰던 일본군의 군복을 만들어준 게 며느리 고영희의 부친이란 얘기가 되는 셈이다. 이런 이유로 일부 당 간부와 주민 사이에서는 “원수님(김정은을 지칭)은 백두혈통이 아니라 후지산 줄기”라고 비꼬는 이야기도 돈다고 한다.
 
  이런 문제가 신경이 쓰여서였을까. 김정은은 2013년 고영희 우상화 작업에 착수한다. 고영희의 묘소 참배 시 김일성·김정일 묘소처럼 일반 화환 외에도 꽃다발과 꽃송이를 바치라고 지시했고, ‘선군조선의 어머님’이란 기록영화를 당과 군 간부들에게 선전하며 베일에 싸여 있던 고영희의 모습과 육성을 공개했다. 당시만 해도 김정은이 고영희에 대한 우상화를 본격적으로 벌일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고영희와 관련한 북한의 움직임은 이게 전부였다. 이후 현재까지 북한 매체에서는 고영희를 거명하거나 시사하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았다. 내부적으로도 일반 주민 등을 대상으로 한 고영희 우상화 작업이 전개되지 않고 있다는 게 탈북자나 우리 정보 당국의 전언이다.
 
  안찬일 세계 북한연구센터 소장의 이야기다.
 
  “김정은은 자신의 아버지인 김정일이 모인 김정숙을 우상화해 김일성·김정일과 함께 ‘백두산 3대 장군’으로 찬양됐던 것처럼 고영희를 찬양하는 분위기도 달아오를 것으로 기대하고 우상화를 시작했는데, 재일교포 출신이라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역효과가 난 것 같습니다. 생모의 우상화가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지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된 것이지요. ‘후지산 줄기’라는 수군거림이 들리니 자신은 백두혈통이라는 것을 부각하기 위해 김정숙 우상화 강도를 높인 것입니다.”
 
  —왜 하필 김정숙 우상화 강도를 높였을까요.
 
  “김정은은 지금 김일성, 김정일에 대해서는 꼬리 자르기를 하고 있습니다. 화폐에서 김일성 초상화를 빼고, 김정일이 2월 8일(1948년 2월 8일 북한군 창건)에서 4월 25일(1930년 4월 25일 김일성이 이른바 항일 빨치산을 조직했다는 날)로 바꾼 건군일을 다시 2월 8일로 되돌린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 아버지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은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백두혈통에 대한 우상화를 해야 하니 김정숙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김정은은 김정숙이 고영희의 핸디캡을 상쇄할 수 있다는 점도 염두에 뒀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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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달기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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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혜연    (2018-01-13) 찬성 : 73   반대 : 25
북한여성들 특히 여배우들은 김정일의 비밀파티때 모두 한복입고 참석했고 파티드레스나 포멀한정장은 모두 외국인여성들 차지였지!!!! 애국우파찌라시인 월간좇선 누가보더라도 왠만한 친종북성향의 언론사들보다 훨씬 더 찌릉내가 풍기더구먼
  박혜연    (2017-12-28) 찬성 : 1   반대 : 38
사실 북한여성들의 외모는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결코 미녀들이라고 볼수없는 볼품없는 외모들이 주류다!!! 단 예술인들일 경우 무용배우들은 그나마 미인축에 낄정도이지만 그래봤자 우리나라의 1950년대에서 1980년대 여배우수준의 얼굴을 자랑할정도로 뒤쳐진면이라고!!!!
  박혜연    (2017-11-23) 찬성 : 5   반대 : 75
김정일이 첫사랑 성혜림을 좋아했던 이유는 단 하나 성혜림의 외모가 여덟살때 세상을 떠난 생모 김정숙의 이미지와 많이 닮았다는 이유다!!! 사실 성혜림은 현재기준으로 보더라도 미녀와는 거리가 먼 순박한 아낙네스타일이다!!!! 궁금하면 탈북자들에게 따지지말고 월간조선 기자들아!!!! 니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북괴기록영화들이나 보고 판단해라!!!!

20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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