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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김철진의 평양실록 ③ 先軍 체제를 지키려는 金正日의 몸부림

정리 :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verhop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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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軍복무를 10년 하고도 총 한번 제대로 안 잡아 본 병사도 있다”, 선군정치에 이의제기한 ‘군부파’
⊙ 김정일, “나는 300만명의 당원과 300만명의 평양시민, 200만명의 군인만 믿는다”
⊙ 룡천역 폭발 사고 후 4년간 배후 조사한 북한, 결론은 ‘남한이 보낸 간첩의 소행’

[편집자 주]
분단 후 57년, 그 세월 동안 평양에서는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김철진씨는 북한의 당과 군을 잘 들여다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남으로 넘어온 탈북자다. 평양에서 그가 직접 목격한 갖가지 사건에 대한 그의 증언을 《월간조선》이 입수해 연재한다. 이는 후일 통일 한국이 써 나갈 새로운 대한민국 현대사의 사초로 활용될 수 있을 터다. 사실적인 기록을 위해 읽는 데 문제가 되지 않는 한 북한말 표현을 고치지 않았다.
인민군 789군 부대를 시찰하면서 장병들에게 손을 흔드는 김정일. 김정일은 생전에 인민군의 역할을 강조하는 선군정치를 주장했다.
  ‘선군(先軍)’, 북한체제를 알려면 꼭 이해해야 하는 개념이다. 김정일 통치 시기, 구체적으로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강조됐다. 잊어버릴 만하면 《로동신문》 사설이나 신년사에서 한 번씩 언급돼서 그런지 남한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원래의 의미대로 제대로 이해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선군정치는 군(軍)이 중앙당이나 내각 등 모든 기관보다 힘이 세다는 의미가 아니다. “조국보위도, 사회주의 건설도 우리가 다 맡자”는 구호에서 알 수 있듯, 군이 국방뿐 아니라 사회의 여러 분야에 나선다는 뜻이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군대를 동원해 발전소를 짓거나 주택 10만호를 건설하는 식이다.
 
  말이 좋아 선군이지, 민간 부문에서 자체적으로 해결이 안 되는 걸 군인들이 억지로 동원되어 해결한다는 말이다. 기형적으로 진화한 체제에서 삐걱대는 부분을 군이 임시로 접착해 주고 있는 셈이다. 물론 그 결과로 군의 권력이 중앙당 산하의 조직들보다 실질적으로 세진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원칙적으로 군은 어디까지나 당의 영도 아래 움직인다.
 
  선군정치를 위해 비상설기구였던 국방위원회가 상설기구로 개편되고, 군 중심의 당과 국가 지도체제가 차차 공고화되기 시작했다.
 
 
  軍 내부의 갈등, 先軍派 vs. 軍部派
 
선군파의 주요 장성들. 왼쪽부터 조명록, 김영춘, 김정각.
  선군을 주창하고 몇 년이 흘렀다. 군 내부에서 선군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른바 ‘군부파’다. 군부파의 주장은 이랬다.
 
  “선군이라는 미명 아래 병사들이 건설현장 인부로 동원되고 있다. 10년을 복무해도 총 한 번 제대로 쏴 보기는커녕 삽질만 하다 제대하는 병사도 있다. 이래서야 전투력에 문제가 안 생기겠는가. 군인이라면 전투력을 높이기 위해 훈련을 해야지, 왜 노역에 동원돼야 하나.”
 
  선군파와 군부파의 갈등은 점점 심해졌다. 양 파벌의 면면을 보면 이렇다.
 
군부파의 주요 장성들. 왼쪽부터 김일철, 김격식, 리명수.
  선군파의 우두머리는 당시 총정치국장이던 조명록 차수, 총참모장이었던 김영춘, 조직부국장이었던 김정각 등이었다. 군부파의 주요 인사는 당시 인민무력부장이었던 김일철, 2군단장이었던 김격식, 작전국장이었던 리명수였다.
 
  여기에서 한 가지 살펴봐야 할 것이 군 수뇌부의 직제 구조다. 오진우가 인민무력부장(한국의 국방부 장관에 해당)으로 있을 때는 인민무력부장이 군부의 핵심인 총정치국, 총참모부, 인민무력부를 모두 통솔하며 군과 군내 당 정치사업 분야의 수장 노릇을 했다.
 
  1995년 오진우가 암으로 사망한 후 변화가 생겼다. 최광이 인민무력부장으로, 조명록이 총정치국장으로 취임하면서 권력이 둘로 갈라졌다.
 
  최광이 죽고 난 후인 1998년, 군 권력구조는 크게 변화했다. 총참모부가 인민무력부에서 독립해 나왔다. 기존의 작전국이나 정찰국 등 전투부서와 군단들에 대한 통수권은 총참모장에게 넘어갔다. 이로써 총참모부와 총정치국, 인민무력부가 병렬적인 구조로 국방위원회의 통제를 받게 됐다. 인민무력부장의 권한이 전보다 현저히 줄어들면서 군부파는 심하게 반발했다.
 
  김정일은 딜레마에 빠졌다. 선군정치 체제를 유지하면서 군 수뇌부의 갈등을 잠재워야 했다. 그래서 생각한 게 인사이동이었다. 2군단장이었던 김격식(군부파)을 총참모장으로 올리고 총잠모장이었던 김영춘(선군파)을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보냈다가 인민무력부장에 임명했다. 인민무력부장이었던 김일철(군부파)은 인민무력부 1부부장 겸 제2자연과학원 원장으로 철직시켰다. 이런 식으로 선군파와 군부파가 권력을 주거니 받거니 나눠 갖게 하며 갈등을 봉합하려 했다. 이런 노력은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군부파의 반발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만수무강연구소마저 가져간 군부
 
  김정일의 선택은 ‘선군’이었다. 김정일은 이런 말까지 했다.
 
  “나는 300만명의 당원과 300만명의 평양시민, 200만명의 군인만 믿는다.”
 
  사실, 김정일 체제의 입장에서 보자면 선군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금강산발전소 건설이나, 주택 10만호 건설 같은 대공사에 투입할 인력은 군인들 외에는 없었다. 일반 주민들을 동원하자면 공사 기간 동안 그 가족들을 먹여살려야 하니 비용이 들고, 시간도 많이 소요될 게 뻔했다. 굴을 파는 등 위험한 작업에 기껍게 나설 리도 만무하다.
 
  2009년, 김격식이 대장에서 상장으로 강등됐다. 총참모장이었던 인물이 4군단장으로 내려가게 됐다. 이를 두고 남한에서는 좌천이 아니라 특별한 임무를 맡긴 게 아닌가 하고 분석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계급을 강등하면서 내려보내는 게 어떻게 좌천이 아니겠는가. 이듬해에는 김일철을 모든 직무에서 해임한 후 물러나게 했다. 결국 군부파는 모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
 
  김격식이 물러난 총참모장 자리를 이어받은 것은 리영호였다. 리영호는 ‘91훈련소’로 불리는 평양방어사령부의 사령관이었다. 평양방어사령부의 사령관은 성분이 좋은, 검증된 인물들이 맡아 왔다. 리영호의 아버지 리봉수는 김일성의 주치의였다.
 
  이처럼 김정일이 선군파를 지지하자 선군파는 점점 더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김정일의 안위를 지키고 건강을 관리하는 호위 업무와 만수무강 사업까지 맡겠다고 나선 것이다. 결국 호위국을 약화시키고 기초과학연구원(만수무강연구소)도 국방위원회 산하로 옮겨 버렸다. 기초과학연구원은 원래 중앙당 재정경리부 산하기관이었다.
 
  선군정치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으면서 필연적으로 중앙당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2007년 초, 김정일은 “중앙당의 기구를 개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중앙당이 너무 비대해졌다는 이유였다.
 
  중앙당 조직부는 과장급 이상 간부들 중 100여 명을 추려내 중앙당에서 해임하고 각 중앙 기관들로 분산배치했다. 2007년 11월에 일어난 일이었다. 중앙당에서 간부로 일하던 이들이 다른 기관으로 옮겨가게 되자, 재정경리부는 그들의 집을 모두 몰수했다. 당 간부에게 내려진 집이니, 직분이 바뀌면 내놓아야 한다는 이유였다.
 
  점점 날씨가 추워졌지만 이들은 살 집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직장으로 가족들을 데려와 사무실 한쪽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불만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이들 중 몇몇 사람들이 용기를 냈다. 더이상 참을 수 없다며 김정일에게 신소 편지를 썼다. 이런 내용이었다.
 
  <중앙당 재정경리부 부장인 리봉수의 아들과 딸은 중앙당에서 근무하지 않는데도 중앙당 사택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정치국 위원들에게 매일 부식물을 배달하는 공급차가 이들의 집에도 들러서 음식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의 집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만이라도 원래 살던 중앙당 간부 사택에서 살게 해 주십시오.>
 
  편지는 어떤 결과로 이어졌을까. 김정일은 편지를 찢어 버렸다. 편지를 쓴 9명의 전직 중앙당 간부들과 그들의 가족은 전원 15호 정치범 관리소로 보내졌다. ‘종파분자’라는 낙인이 이들에게 찍혔다. 김정일이 제일 싫어하는 게 바로 ‘집단행동’이었다.
 
 
  “룡천역 폭발사건은 남한 소행”
 
지난해 7월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열병식. 북한 체제는 ‘선군’의 기치아래 돌아가고 있다.
  이후 김정일은 조직부에 재정경리부를 집중적으로 검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2008년 조직부가 재정경리부를 감찰했다. 각종 비리들이 드러났고, 리봉수 부장과 다른 과장들은 지방으로 추방됐다.
 
  리봉수의 비극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김책시로 쫓겨나 농장원으로 일하고 있던 리봉수에게 옛 부하가 찾아갔다. 검열 정국에서 무사히 살아남은 과장이었다. 재정경리부 운수과장을 맡고 있던 이 인사는 자신의 옛 상사가 고생하는 게 안쓰러웠던지 면회를 갔는데, 김정일이 이 사실을 알게 됐다. 김정일은 ‘가족주의 종파 온상’이라며 이들을 모두 15호 정치범 관리소로 보내 버렸다.
 
  간부들 사이에 불안과 불만이 번져 나갔다. 2008년 초에는 중앙당 통일전선부 부부장 최승철과 부하들이 체포됐다. 남한의 정보기관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죄목이었다. 최승철과 통일전선부는 그 전까지 일을 잘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이들은 결국 처형당했다. 간부들 사이에는 “김정일이 노망이 났다. 망둥이가 자기 새끼를 잡아먹듯 당과 국가에 충성을 다했던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있다”는 말이 돌았다.
 
  피바람은 계속됐다. 2008년, 서남식 전 철도성 부상과 김진성 전 문화상이 처형됐다. 김일성 때부터 철도성에서 일해 왔던 서남식이 갑자기 처형을 당한 이유는 뭘까. 시간은 처형 4년 전으로 돌아간다.
 
  2004년 4월 22일 평안북도 룡천군 룡천역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 엄청난 사람이 죽고 다쳤다. 사상자가 1170여 명에 달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폭발 시점이 공교로웠다.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던 김정일이 탄 특별열차가, 폭발 사고가 일어나기 9시간 전에 룡천역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사고 직후 북한은 사고의 경위와 상황을 서둘러 발표했다. 비극적인 사고였다는 설명이었다. 김정일의 속내는 달랐다. 무려 4년간 조사가 이어졌다. 룡천역 폭발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를 캐내기 위한 조사였다. 그 결과 범인으로 지목된 게 서남식과 김진성이었다. 서남식이 6·25 전쟁 당시 한국에서 파견된 간첩이고, 김정일을 암살하기 위해 폭발 사고를 일으켰다는 설명이었다.
 
  간부들은 믿지 않았다. ‘서남식이 정말 간첩이라면 왜 하필 그때 그런 모험을 했겠는가’라는 의문이 퍼졌다. 그러면서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룡천역 폭발 사건은 독재정권에 항거하기 위한 암살 기도였구나”라며 암살 기도설을 믿게 됐다.
 
 
  중앙당 3호 청사 해체
 
  감찰은 계속 이어졌다. 중앙당 3호 청사는 결국 해체되고 말았다. 중앙당 3호 청사는 대남사업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을까, 대남사업을 전담하던 통일전선부, 작전부, 대외연락부 등의 부서가 한데 모여 있는 청사였다.
 
  3호 청사가 해체된 결정적인 계기는 ‘46연락소’ 사건이었다. 46연락소는 당 작전부에 소속된 부서였다. 해외첩보 영화들을 번역하고 연구해 작전부의 전략 수립에 응용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2006년, 46연락소 연구원들이 사고를 쳤다. 남포에 내려가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중앙당 신분을 들먹이며 외상을 요구하면서 돈을 내지 않은 것. 식당 사장이 계속 돈을 내라고 하자, 연구원들은 사장을 때리기까지 했다.
 
  김정일에게 보고가 들어갔다. 그러지 않아도 대남공작부서 소속 연락소 부원들이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는 일이 많아 비난의 목소리가 큰 참이었다. 이런 일이 자꾸 발생한 근본적인 이유는 ‘물자부족’이었다. 음지에 있던 이들에게 물자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자, 할 수 없이 양지로 나와 돌아다니면서 일련의 사건들이 터졌다.
 
  김정일은 “별것도 아닌 것들이 중앙당 신분을 추락시킨다”며, “연락소 부원들의 신분증에서 중앙당이라는 글자를 삭제하라”고 명령했다.
 
  3호 청사에 있던 부서 중 작전부의 많은 부서가 인민무력부 정찰총국 산하로 옮겨졌다. 대외연락부는 통째로 내각 직속 부서가 됐다. 통일전선부만 3호 청사에 그대로 남았다. 통일전선부는 남한의 종교인사나 기타 거물급 인사들을 상대하고 관리하는 부서다.
 
  검열과 숙청이 이어지며 간부들은 ‘당에 아무리 충실해도 소용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는 간부들이 자신의 보신에만 신경 쓰면서 국가사업에는 신경 쓰지 않는 결과로 이어졌다. 2008년, 그해 평양의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평양시민들 중 동상에 걸리는 사람이 속출했다. 집에 있었는데도 동상에 걸린 사람도 있었다.
 
 
  등장 직후 밉상으로 찍힌 청년장군
 
  2009년 1월 김정일의 특별지시가 내려왔다. 중앙당,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국방위원회, 인민무력부,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보안부 등 주요 기관에 내린 지시였다. 내용은 이랬다.
 
  “동무들이 지금까지 나를 받들어 일을 잘해 온 것처럼, 앞으로 청년장군 김정은(金正恩) 대장동지를 잘 받들어 모시고 수령님이 개척한 주체혁명위업을 끝까지 완수하록 해야겠습니다.”
 
  이 내용이 적힌 판을 각 기관의 청사 중앙홀에 항상 붙여 놓게 했다. 중앙기관의 간부들 속에서 속살거림이 번져 나갔다. ‘왜 전세계 국가 중 우리나라와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몇 개의 나라만이 왕권이 이어지고 있는 것인가. 나이도 어린 김정은이 어떻게 당과 국가를 지도할 것인가’라는 내용의 의구심과 불만이 불거졌다. 공개적으로 얘기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뒤에서 이런 얘기들이 오고갔다.
 
  2009년 6월 25일, 드디어 청년장군 김정은의 공식적인 첫 지시가 내려왔다. 국가안전보위부와 인민보안부, 중앙검찰소에 내려진 지시였다. 바로 ‘도박 근절’이었다. 평양시 공원에서 장기와 카드를 하면서 도박행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잡아들이고 숙청하라는 내용이었다.
 
  국가보위부 부부장, 중앙검찰소 부소장, 인민보안부 부부장, 보위사령부 부사령관 등 4명으로 이뤄진 6·25 중앙상무 그루빠(그룹)가 조직됐다. 이들은 평양시 보위부, 평양시 보안국, 평양시 검찰소와 보안부 정치대학 학생들, 각 지방에서 올라온 기동타격대와 함께 평양시 공원들을 불시에 덮쳤다. 장기와 카드를 하며 놀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체포됐다. 이들은 2년에서 7년 사이의 교화형이라는 벌을 받았다. 그해 8월 도박을 했다는 이유로 한 달간 평양시에서 추방된 세대만 약 400여 세대에 달했다. 심지어 체포를 위해 비행기까지 동원했다. 러시아에서 일하고 있던 사람들을 잡아와서 교화를 보낸 것.
 
  이제는 불만이 간부들뿐 아니라 일반 평양시민들에게까지 번졌다. “청년장군의 첫 지시가 인민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탄압하는 것이냐”는 비난이 나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해 12월 1일, ‘화폐변경’ 조치가 발표됐다. 인민생활 향상을 위한 중대조치라고 하면서 예고도 없이 화폐교환 절차가 진행됐다. “국가가 인민들이 아득바득 모아 놓은 돈을 몰수한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평양시민들 사이에서 터져나왔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한 달 뒤인 2010년 1월 1일에는 “개인은 달러를 쓸 수 없다”는 방침이 발표됐다. 불만은 극에 달했다. 노골적으로 김정일과 김정은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도 이제는 개혁개방을 하여야 한다’는 내용의 무기명 편지가 김정일에게 도착하기도 했다.
 
 
  軍 미필을 ‘대장’으로 임명
 
  화폐변경에 대한 비난이 점점 더 거세졌다. 원래대로라면 화폐변경은 2단계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2009년에는 주민들이 달러를 내놓으면 2002년에 미리 만들어 놓은 화폐로 바꿔 준 다음, 2010년 3월이 되면 2002년산 화폐를 다시 2009년에 찍은 화폐로 바꿔 준다는 계획이었다.
 
  달러를 많이 가지고 있던 간부들의 저항은 완강했다. 결국 김정일과 김정은은 화폐개혁이 실패했다고 인정해야 했다. 박남기가 희생양이 됐다. 화폐개혁을 시도한 원흉으로 지목돼 총살당했다.
 
  선군정치의 기치 아래, 군을 완벽히 장악하려는 김정일·김정은 부자의 노력은 계속됐다. 2010년 9월 당대표자대회가 열렸다. 4차 당대표자대회에서 김정은, 김경희, 최룡해, 김경옥 등 4명은 조선인민군 대장의 군사 칭호를 수여받았다.
 
  “어떻게, 단 하루도 군사복무를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대장 칭호를 줄 수 있는가?” 불만 섞인 비난이 군에서 터져 나왔다.
 
  그 후 김정일은 최룡해를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 자리에 앉히려 했다. 그러자 당시 총참모장이었던 리영호를 비롯한 군 장성들이 거세게 반대했다. 결국 이후 리영호와 다른 여러 명의 군 간부들이 숙청됐다.
 
  3대 세습에 대한 유례없이 강한 반항과 불만이 간부들 사이에서 표출됐다. 불만의 화살을 돌리기 위해 애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오랫동안 당 간부 자리에 있었던 계응태, 전병호, 한성룡 등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너무 많고 병이 들었다는 이유로 해임됐다. 그리고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이 죽었다.
 
  시간이 흘렀지만 북한 주민들과 간부들의 불만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이들은 현재도 “대학도 안 나온 어린 김정은이 어떻게 국가를 지도해 나갈 것인가” 우려하며 불안한 눈으로, 김정은이라는 존재와 그의 아버지가 어거지로 꾸려 놓은 선군정치라는 체제를 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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