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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交문서로 본 金正日의 몰타 유학 해프닝

外信 오보 믿고 金平日을 金正日로 착각… 4개월간 신원 파악도 못 해

글 : 박희석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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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佛 《AFP》, “金正日, 英語 공부 위해 8박 9일간 몰타 방문”
⊙ 在外공관들, “확인하는 대로 보고하겠다”만 반복
⊙ “金正日의 몰타 체류는 특이행동, 여자 문제로 인한 강제 외유”
⊙ 외교 당국, 《AFP》 보도 40일 후에 몰타 현지 출장 최초 실시
1980년 10월 북한 노동당 제6차 당 대회가 끝나고 나서 기념행사를 관람하는 김일성 부자와 1983년 당시 ‘김정일 몰타 유학설’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외무부와 재외공관이 주고받은 비밀전문.
  김정은(金正恩)이 김정일(金正日)의 후계자로 공인받은 때는 2010년 9월이다. 당시 그는 북한 인민군 대장,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직을 맡으면서 명실상부한 북한 정권의 2인자가 됐다. 그런데 김정은이 후계자가 된 후 외국으로 유학을 갔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그랬다면 우리 정보 당국과 언론은 그 배경으로 ▲김정일 사망 ▲북한 군부 쿠데타 ▲중국의 압박 ▲형제간 권력 암투 등 다양한 ‘설(說)’을 가정하고, 사실관계 확인에 총력을 다했을 것이다.
 
  그런데 30여 년 전 실제 이런 ‘사건’이 있었다. 1982년 12월 2일(현지 시각), 프랑스 통신사 《AFP》는 몰타 일간지를 인용해 “북한 김정일이 민토프 몰타 수상의 초청을 받아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 개인 자격으로 몰타에 머물고 있다”고 보도했다.
 
  몰타는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 남방 93km 지중해에 있는 섬나라다. 국토 면적은 361km2로 제주도 면적의 1/6에 해당한다. 1982년 기준 몰타의 인구는 35만명이고,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3870달러다. 주요 수입원은 경공업, 관광업, 농업 등이다.
 
  몰타는 북한과 1971년 수교한 이래 경제 교류를 확대하고 있었지만, 그 규모는 7만 달러(1980년)에 불과했다. 워낙 소국이라 북한과 군사적으로 협력할 일도 없었다. 지정학적 위치도 북한의 이익과 부합한다고 보기 어려운 곳이다. 따라서 북한 정권의 2인자가 갑자기 ‘개인 자격’으로 ‘영어 공부’를 위해 몰타에 체류하고 있다는 건 북한 권력 지형에 큰 변화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당시 김정일은 권력 투쟁에서 밀려 해외로 몸을 피한 것일까. 몰타에 있던 ‘김정일’은 진짜 김정일이었을까.
 
  최근 《월간조선》은 외교부 산하 외교사료관에 정보공개를 청구해 문건 1부를 입수했다. 총 85쪽 분량인 이 문건은 1982년 12월부터 1983년 4월까지 외무부장관과 ▲영국 ▲일본 ▲이탈리아 ▲리비아 ▲바티칸 ▲덴마크 등 6개국에 주재한 재외공관장들이 ‘김정일’의 ▲몰타 방문 목적 ▲현직 활동사항 등을 파악하기 위해 주고받은 비밀전문을 묶은 것이지만, 그 제목은 〈김평일 북한 주석 차남의 몰타 유학, 1982~83〉이다.
 
  문건 제목과 실제 내용이 다른 건 당시 우리 외교 당국의 ‘정보력 부재’를 방증한다. 사실 1982년 몰타를 방문한 ‘김정일’은 그의 이복동생 김평일(金平日)이었지만, 우리 정부는 외신 오보를 좇아 김정일이 강제 외유를 한 것으로 파악했다. 이후 몰타에 체류한 ‘김정일’이 김평일이었다는 걸 확인하는 데만 4개월을 허비했다.
 
 
  “北傀 金正日의 몰타 방문 목적, 활동사항을 보고하라!”
 
몰타는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 남부 지중해에 있는 소국이다.
  1983년 12월 당시는 김정일이 1980년 10월 북한 노동당 제6차 당 대회에서 공개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후계자 지위를 차지한 지 2년밖에 되지 않은 시기였다.
 
  한창 북한에서 후계자 수업을 받으며 대내용 ‘치적’을 쌓거나, ▲소련 ▲중공 등 우방을 찾아 그 지위를 인정받는 작업을 해야 할 시점에, 김정일이 ‘영어 공부’를 하러 몰타에 갔다는 건 북한 권력 지형에 큰 변화가 있었다는 걸 암시했다. 앞서 언급한 외신 보도를 접한 우리 정부는 김정일의 외유 목적을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1982년 12월 3일 이범석(李範錫) 외무부장관은 강영훈(姜英勳) 주(駐)영국 대사, 지연태(池蓮泰) 주이탈리아 대사에게 “북괴(北傀) 김정일의 구체적인 몰타 방문 목적과 활동사항, 최근 몰타 정세를 파악해 보고하라”는 전문을 보냈다.
 
  강 대사는 설리번 주몰타 명예총영사(자국에서 외국의 총영사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에게 연락해 ‘김정일 몰타 방문’을 확인하려 했지만, 설리번은 “김정일의 ▲방문 목적 ▲활동사항 등은 비밀이라 탐문이 어렵다”며 “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해 파악하도록 노력하겠다. 관련 사항을 입수하는 대로 연락을 하겠다”고 말했다.
 
  당시 몰타에는 우리 측 주재원이 없었다. 몰타는 독립 이듬해인 1965년 4월 한국과 대사급 외교 관계를 맺었지만, 1971년 노동당 민토프가 집권하면서 북한과 수교하고, 우리 측 대사의 신임장 제정을 거부했다. 이에 정부는 몰타의 설리번을 명예총영사로 임명해 현지와의 소통 창구로 활용했다.
 
  강 대사는 12월 7일 외무부장관 앞으로 보내는 전문에서 설리번의 얘기를 언급하고, “이와 별도로 영국 외무성에 관련 사항 탐문을 요청했고, 영국 외무성은 주몰타 영국 대사관에 지시해 가능한 한 협조를 다하기로 약속했다”고 보고했다.
 
  같은 날 이범석 외무부장관은 강영훈, 지연태 대사에게 다시 전문을 보냈다. 이는 “조선 분야 기술협력 가능성 조사차 11월 24일부터 12월 1일까지 몰타를 방문한 대한조선공사 측이 입수한 첩보로는 김정일은 2일간 몰타를 방문했지만, 몰타 정부는 김정일의 언론 통제 요청을 수용해 그가 출국한 후 방문 사실을 발표했다”며 “이 첩보와 관련한 내용을 상세하게 파악해 보고하길 바란다”고 지시하는 내용이었다.
 
  3일 뒤, 지연태 주이탈리아 대사는 “설리번과 주몰타 미국 대사관을 통해 파악한 내용에 따르면 김정일은 11월 26일 몰타에 도착해 12월 4일 떠났다” “12월 2일 자 친여당 성향을 가진 일간지는 김정일이 민토프의 초청으로 영어 학습차 방문했다고 보도했다” 등의 내용이 담긴 전문을 외무부장관에게 보냈다. 하지만 북한 정권의 2인자가 8박 9일 동안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 평양에서 지중해 소국을 찾았다는 건 설득력이 부족하다.
 
 
  金日成, 老壯派 반발 무마하려 모든 직무에서 金正日 배제?
 
1982년 12월 2일, 몰타 현지 신문은 “김정일이 영어 공부를 위해 몰타를 방문했다”고 밝혔고, 프랑스 통신사 《AFP》가 인용ㆍ보도했다. 이에 우리 외교 당국은 김정일의 몰타 방문 목적을 파악하느라 6개 재외공관을 동원했다.
  일본에선 12월 8일 “김정일의 몰타 방문은 강제적인 장기 외유”라는 취지의 기사가 보도됐다. 일본 내 한국계 신문 《통일일보》는 대북 소식통을 인용해 “김정일의 권력세습체제 확립 책동 횡포와 당(黨)·군(軍)·정(政) 간부 등 반대자에 대한 대량숙청 등의 강압 정치 때문에 곤경에 빠진 김일성(金日成)이 김정일을 모든 직무에서 배제하고, 강제로 몰타에 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김정일은 1982년 11월 15일 열린 북한 노동당 및 정권 기관 연례총회인 ‘연간 총화 회의’에서 당·군·정 내 기성 간부들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자신의 친위세력인 ‘3대 혁명소조’ 청년들을 앉히겠다고 얘기했다.
 
  ‘3대 혁명소조운동’이란, 현대과학기술과 사회주의 건설에 뒤떨어진 구(舊) 간부들의 기술 실무 수준을 제고하고 이들을 점차 청년층으로 교체하기 위해 전개된 운동이다. 이는 김일성이 1973년 2월 당정치위원회 확대회의에서 각 공장·기업소·협동농장에 현대적 과학기술을 소유한 청년들로 편성된 3대 혁명소조를 파견할 것을 제시한 것에서 시작했다.
 
  이에 따라 김정일은 당 핵심과 청년 인텔리로 구성된 수만 명 규모의 3대 혁명소조를 공장·기업·공공기관에 파견해 ‘낡은 사상’과의 투쟁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김정일은 ‘3대 혁명소조’ 조직을 자신의 ‘홍위병’으로 만들었고, 이를 기반으로 숙부 김영주 등 경쟁자를 물리치고 1974년 후계자에 내정됐다.
 
  1980년 후계자 공인 이후, 김정일이 다시 숙청계획을 언급하자 노장·온건파는 강하게 반발했다. 빨치산 원로 서철이 주도한 당 중앙검열위원회는 ‘3대 혁명소조’의 ▲월권 행위 ▲인민 억압 ▲부녀 폭행 ▲공금 횡령 등의 부정행위를 고발했다. 이 소식을 들은 김일성은 격노했고, 김정일을 모든 직무에서 배제하고 해외로 내쳤다는 게 《통일일보》의 보도 내용이다.
 
  이 신문은 또 대남공작기구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가 발행하는 월간 사진잡지 《조선화보》에 김정일 사진이 1982년 7월 이후 등장하지 않은 점을 언급하면서 북한 내부 권력 투쟁에서 김정일이 밀려난 것이라는 취지로 보도했다.
 
  이에 이범석 외무부장관은 최경록 주일본 대사에게 “일본 외무성 등과 접촉해 ‘김정일 강제 외유’에 대해 아는 게 있는지 지금 탐문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최 대사는 12월 9일 “일본 외무성 북동아과 및 분석과에 확인했지만, 아직 확실한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답했다”며 “관련 정보를 확인하는 대로 보고하겠다”고 답했다.
 
  종합하면 당시 우리 외교 당국은 ‘김정일’로 추정되는 인물이 몰타에 입국한 지 2주 이상 지난 시점까지 그의 ▲방문 목적 ▲활동사항 등은 물론 신원조차 파악하지 못했던 셈이다. 재외공관장들은 “확인하는 대로 보고하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결국 우리 외교 당국은 유의미한 첩보를 얻지 못한 채 새해를 맞이했다. 그런데 1983년 1월 10일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북한 부주석을 역임한 강양욱의 장례식에 참석한 김정일의 사진을 공개했다. 이와 관련, 도쿄발(發) 《연합통신》은 “《노동신문》 1월 10일 자 사진을 보면, 김정일을 제외한 조문객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다”며 “《노동신문》의 기사가 사전에 매우 철저하게 검열당하는 걸 고려하면, 이는 김정일이 자신은 특별한 사람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고 분석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몰타 外務省, “北韓 주요 인사 아들은 2년간 몰타 머물 예정”
 
  1983년 1월 중순 이후 몰타 방문 여부와는 별개로 김정일이 평양에 머무르는 정황들이 연이어 나왔다. 그런데 우리 외교공관장들은 1월 말부터 ‘김정일 몰타 장기 체류’라는 첩보를 올리기 시작했다.
 
  1월 23일, 지연태 주이탈리아 대사는 이범석 외무부장관에게 “1월 20일 설리번의 제보에 의하면 김정일이 현재 몰타에 체류 중이며 북괴 대사관원 비호하에 영어 공부를 하고 있다”며 “김정일이 지난 12월 초 몰타를 일단 출국했다가 재입국했는지는 현재 알 수 없으나, 설리번에게 동태를 계속 파악하게 하고, 이탈리아 정보기관과 접촉해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다음날에는 긴급 전문을 보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우리 대사관의 특별협조 요청에 따라 이탈리아 외무성이 1월 24일 몰타 주재 자국 대사를 통해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김정일이 장기체류를 위한 개인용 가구와 일상용품을 특별기편에 적재, 몰타에 입국(일자 미상)해 현재 체류하면서, 발레타대학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설리번 명예총영사도 1월 24일 이를 확인하고 우리 대사관에 전화로 같은 내용을 제보했다.”
 
  1월 29일, 지 대사는 또 긴급 전문을 보내 이탈리아군(軍) 정보보안국이 입수해 제보한 내용을 알렸다.
 
  “김정일은 현재 몰타 체류 중이며 영어 학습 중이라고 한다. 김정일은 최근 자신의 체력단련 장소로 지정된 특수부대를 방문해 부대 편성 등에 관심을 보이면서 많은 질문을 했다고 한다. 그는 몰타 고위 관리들과 친교를 쌓는 데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주이탈리아 미국 대사관 측도 1월 28일 몰타 주재 자국 대사관을 통해 김정일이 몰타에 체류하는 걸 확인했다.”
 
  지 대사는 또 전문에서 주이탈리아 일본 대사가 겸임 대사 신임장 제정을 위해 몰타를 방문했을 당시 현지 외무성 관계자로부터 들은 얘기도 언급했다.
 
  호리 주이탈리아 일본 대사는 몰타를 방문해 현지 외무성 의전장에게 김정일 체류 여부를 물었고, 이에 의전장은 “북한 주요 인사의 아들이 몰타에 머물고 있다. 그는 향후 2년간 몰타 소재 대학에서 영어 공부를 할 것이다. 더 깊은 내용은 언급할 수 없다”고 답했고, 호리 대사는 이 얘기를 지 대사에게 전한 것이다.
 
 
  “金正日, 해변 빌라에 살며 몰타 관료들과 親交”
 
1970년대 중반 군부대를 방문해 권총을 겨누는 김정일. 당시 그는 ‘3대 혁명소조’ 조직과 원로 빨치산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숙부 김영주를 밀어내고 김일성의 후계자 자리를 차지했다.
  1983년 2월 1일, 최경록(崔慶綠) 주일본 대사는 일본 외무성 측으로부터 입수한 ‘김정일 동향’ 관련 첩보를 외무부장관에게 보고했다.
 
  “1월 28일 주이탈리아 일본 대사관이 외무성에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김정일 같은 인물은 1982년 11월 20일 몰타에 도착했다. 아직 몰타를 떠났다는 정보는 없지만, 적어도 지난 1월 20일까지는 체재했을 것으로 추측한다고 한다. 김정일 같은 인물은 태스크포스(특별임무 수행을 위한 임시편성 부대) 형식으로 편성한 몰타 군대에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최 대사는 주중 일본 대사관이 베이징 출장 중인 북한 주재 이집트 대사관 관계자로부터 들었다는 내용도 함께 보고했다. 이는 김정일이 1982년 11월 민토프 초청에 의해 몰타를 방문한 것은 사실이며, 12월에는 덴마크 코펜하겐에 갔는데, 1983년 1월에 참석해야 할 행사가 여러 개여서 귀국한 것으로 추측한다는 전언이었다.
 
  이범석 외무부장관은 주덴마크 대사관에 “김정일이 몰타를 방문했고, 82년 12월에 코펜하겐을 경유했다고 하는데, 관련 사항을 파악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주덴마크 대사관 측은 “2월 8일 오후 덴마크 외무성 한국 과장 레이먼에 의하면 김정일 입국이나 경유에 대해 아는 사실이 없으며, 의전실 쪽으로는 통보받은 일이 없고, 덴마크 정부와는 아무런 접촉이 없었다고 한다. 경찰 및 공항 당국에도 확인했지만, 입국 사실이 없다는 반응이라서 계속 확인한 후 보고하겠다”고 답했다.
 
  김좌수(金左洙) 주바티칸 대사도 2월 2일 이 장관에게 ‘첩보 보고’를 올렸다. 김 대사는 전문에서 “이는 한국·이탈리아 가톨릭의원 친선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는 부르노 스테가니니 이탈리아 하원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에게 요청해 몰타 주재 이탈리아 군사정보요원이 조사한 결과”라고 밝혔다. 보고의 요지는 김정일은 북한에서 이상행동과 여자 문제 등으로 김일성의 노여움을 사 몰타에 ‘강제 외유’를 나왔으며, 향후 1년간 해변에 있는 빌라에서 현지 대학을 오가며 공부할 계획이란 것이다.
 
  김 대사는 또 2월 23일 이 장관에게 전문을 보냈는데, 그 내용은 “스테가니니 의원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김일성의 22세 된 아들이 현지 대학에서 영어를 배우고 있으며, 몰타 관리 및 장교들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김일성에겐 당시 해당 연령대의 아들이 없었다. 김정일은 1941년생으로 1983년 당시 42세였다. 김일성과 김성애 사이의 아들인 김평일, 영일은 각각 1954년, 1955년생으로 이미 1983년에 20대 후반이었다. 김일성이 자신의 담당 간호사 제갈씨를 통해 얻은 막내아들 김현은 1971년생이다. 따라서 스테가니니의 첩보대로라면 ‘몰타 체류 북한 인사’는 김일성의 아들이 아니란 얘기가 된다.
 
 
  “몰타 체류 北韓 인사는 金正日의 이복동생 金平日”
 
1983년 3월 주리비아 대사관이 입수한 김평일의 서명과 몰타 내 거주지.
  《AFP》 보도가 나간 지 약 4개월이 지난, 1983년 3월 21일 주리비아 대사관은 현지 주재 이탈리아 대사관 측으로부터 중요한 자료를 입수했다. 우리 외교 당국이 김정일로 추정한 인물의 사진을 구한 것이다. 최상섭(崔常燮) 주리비아 대사는 이범석 외무부장관에게 “몰타 체류 북한 인사는 김평일”이라면서 입수한 사진을 발송했다. 다음은 최 대사가 당시 보낸 전문이다.
 
  “우리 대사관은 김정일 몰타 체류설 확인을 위해 관계관이 1983년 1월 15일부터 18일까지, 2월 9일부터 11일까지 몰타 현지 출장을 가서 ▲명예총영사 ▲보수당(야당) 관계자 ▲몰타 주재 이탈리아·영국 대사관 관계자와 접촉해 몰타 체제 북괴 인물을 확인하려고 노력한 결과, 3월 17일 주리비아 이탈리아 대사관을 통해 해당 인물의 사진을 입수했는데, 이 사람은 김평일(김일성 2남, 김정일 이복동생)로 확인됐습니다.”
 
  김평일은 한때 김일성의 후계자 물망에 올랐지만, 빨치산 원로들이 김정일을 지지하면서 밀려났다. 1974년 김정일이 권력을 잡은 이후 김평일은 ‘곁가지’ 취급을 받았다. 김정일은 1979년 김평일을 유고 주재 북한 대사관 부무관으로 내보냈다. 그렇다면 1982년 당시 김평일의 몰타 유학은 그가 외교관으로서 어학 실력을 기르려는 목적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범석 외무부장관은 3월 14일 이 내용을 영국, 이탈리아, 바티칸 주재 대사들에게 알렸다. 다음날 지연태 주이탈리아 대사는 “김정일 몰타 체류 사실 확인과 관련해 이탈리아 외무성에 사실 재확인을 의뢰해 제보를 받았다”며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가. 현재 몰타에 체류 중인 김일성의 아들은 이복 차남인 김평일로 확인됐음.
 
  나. 이탈리아 외무성 1차 제보가 김정일로 착오를 일으킨 이유는 1982년 12월 2일 몰타 일간지 오보에 기인했던 것이나, 김정일이 계속 평양 체류 중이라는 우리 대사관 반증자료에 의거 재조사한 것임.
 
  다. 김평일은 처와 북괴 경호원 수명을 동반하고 있으며, 발레타 근교 별장에 체류 중임.
 
  라. 김평일은 대학에서 주 2회 영어 수강을 하며, 숙소에서 몰타인 영어 개인교사의 지도를 받고 있고, 체육관에서 신체단련을 하는 것 외에 외부인사 접촉 등 대외활동은 거의 없이 조용히 지내고 있음.〉
 
 
  韓國 外交 당국은 4개월간 ‘헛발질’만…
 
김평일은 1979년 주유고 대사관 부무관을 지낸 이후 주헝가리 북한 대사를 비롯해 주핀란드 대사, 주폴란드 대사 등을 지내며 해외를 떠돌고 있다.
  지금까지 살핀 것처럼 우리 외교 당국은 4개월 동안 몰타 체류 북한 인사가 ‘김정일’이라고 확신할 만한 단서를 찾지 못했다. 외무부는 재외공관에 전문을 보내 “파악하라”고 지시하고, 공관들은 주재국 외교 당국의 첩보에만 의존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몰타의 면적은 제주도 1/6에 불과하다. 이 중 몰타 섬의 크기는 246km2로 경기도 고양시(267km2보다 작다. 수도 발레타의 당시 인구는 1만4000명이고, 이들의 절대다수가 전형적인 유럽인 외모를 갖춘 몰타인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외교관 번호판을 단 승용차를 타고, 다수의 경호원이 따라붙는 동양인을 찾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얘기할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 외교 당국은 약 2달 동안 현장 조사는 시도하지 않고, 전문만 주고받았다. 주리비아 대사관 직원이 몰타 출장을 간 것도 《AFP》 보도 후 40일이 지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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