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탈북자 김철진의 평양실록 ① 평양에 분 칼바람

심화조 사건의 숨겨진 내막

정리 :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verhope@chosun.com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2년간 2만여 명 희생된 심화조 사건의 내막과 결말
⊙ 김정일, “아버지 괴롭힌 최지주 후손들과 서북청년단 잔당 잡으라는 게 아버지의 유훈”
⊙ 평양 용성구역의 70세 이상 노인들은 모두 서북청년단 단원이라며 처형

[편집자 주]
분단 후 57년. 그 세월 동안 평양에서는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김철진씨는 북한의 당과 군을 잘 들여다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남으로 넘어온 탈북자다. 평양에서 그가 직접 목격한 갖가지 사건들에 대한 그의 증언을 《월간조선》이 입수해 연재한다. 이는 후일 통일 한국이 써 나갈 새로운 대한민국 현대사의 사초로 활용될 수 있을 터다.
김정일은 생전에 인민보안부(前사회안전성)를 자주 찾았다. 지난 2010년 6월 인민보안부에서 운영하는 대동강 과수종합농장을 찾은 김정일.
  1996년 평양에는 스산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후일 ‘심화조 사건’으로 불리게 된 희대의 간부 숙청 작업이 시작된 것. 첫 작업이 평양의 용성구역 안전부(현재의 경찰서)에서 시작했다고 해 일명 ‘용성 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심화조 사건의 주연은 채문덕이었다. 시간은 심화조 사건이 일어나기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정일과 그 동창생 채문덕
 
  채문덕은 김정일과 같은 시기 김일성종합대학을 다녔다. 졸업 후 평양시의 안전국장(군인 계급으로는 중장)까지 올라가며 승승장구했다. 그런데 1992년 채문덕에 대한 견제가 들어왔다. 당시 중앙당 본부의 당 책임비서였던 문성술과 평양시 당 책임비서였던 서윤석의 견제였다. 문성술은 중앙당 조직간부부 1부부장도 함께 맡고 있었다. 이들은 채문덕이 김정일과 대학 동창생이라는 것만 믿고 ‘안하무인격으로 날친다’고 주장했다. 결국 채문덕은 평안남도 북창군으로 쫓겨 가 득장 분주소의 소장(중좌 직급)으로 직급까지 격하됐다. 채문덕으로서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을 테다.
 
  1995년, 채문덕은 다시 중앙 무대로 돌아왔다. 평안남도에서 이를 갈며 복귀를 꿈꾼 지 꼭 3년 만이었다. 장성택의 후원을 받아 가능했다. 중앙당 조직행정부 부부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장성택의 형 장성우 前3군단장.
  이듬해인 1996년, 중앙당 내에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그때까지 사회안전성(현재의 국방위원회 인민보안부)의 정치국장 자리는 장성택의 형 장성우가 맡고 있었다. 그런데 장성우가 인민군 평양시 방어군단인 3군단장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인민보안부의 정치국장이 어떤 자리인가. 한국으로 치면 청와대의 민정수석이나, 경찰청장 혹은 국정원 2차장에 비교할 수 있는 핵심 직위다. 장성우가 맡고 있던 정치국장 자리를 물려받은 이가 바로 채문덕이다.
 
  유배 아닌 유배 생활에서 돌아와 치안의 핵심 자리를 차지한 채문덕이 그 순간 떠올린 이가 누구였을까. 바로 자신이 쫓겨 가게 된 단초를 제공한 문성술과 서윤석이었을 게다.
 
  채문덕을 정치국장으로 임명하며 김정일은 채문덕에게 한 가지 지시를 내렸다. 김일성의 유훈이라며 김정일이 내린 지시는 이런 내용이었다.
 
  “일제 강점기, 김일성이 고향 만경대에서 지낼 때, 김일성 가문을 착취한 ‘최지주(崔地主)’라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해방 후 최지주의 아들 최성택은 남조선으로 달아나 장성이 되었다. 다른 자식들과 그 후손은 아직도 북에서 자신의 출신을 속인 채 살아가고 있다. 아직도 그들을 잡아내지 못했다.
 
  또 한 가지 골칫거리로 서북청년단이 있다. 광복 후와 6·25 전쟁 당시 악질적인 반공활동을 한 서북청년단의 잔당들이 아직도 북에 많이 남아 있으니 이들을 꼭 잡아서 숙청하라.”
 
  김정일이 왜 이런 지시를 내렸을까. 김일성의 유훈이라는 핑계를 댔지만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1994년 7월 김일성이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평양의 고위급 간부들과 인민들은 김정일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다. 한정된 정보만을 보며 사는 일반 인민들과는 다르게 ‘로열 패밀리’의 뒷모습을 조금씩이라도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이들 사이에 김일성과는 또 다르게 독단적인 김정일의 행태에 대해 뒷말과 비난이 돌고 있었다. 언젠가는 이들이 반기를 들 수도 있겠다는 것을 감지한 김정일이 선택한 것이 바로 대대적인 숙청과 물갈이였다.
 
 
  서북청년단 조작 사건의 시작
 
  김정일은 채문덕에게 ‘심화조’를 조직하라고 명령했다. 심화조는 우리로 치면 특별감찰팀 같은 특별 조직이었다. 심화조 차원에서 전국의 모든 간부들을 ‘재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아무리 당시 김정일이 악의 축으로 자리 잡는 초기 단계를 밟고 있었던 시기라 해도 감찰팀 같은 조직을 어느날 갑자기 만들기는 눈치가 좀 보였을 터. 구실이 필요했다.
 
  채문덕의 레이더망에 한 사람이 걸려들었다. 평양 용성구역 행정위원회의 위원장이었다. 채문덕이 정치국장을 맡기 직전인 1995년 말 용성구역에서는 다소 사소해 보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안전부 주민등록과의 안전원(군사계급은 대위) 박 모라는 사람이 용성구역의 행정위원장을 ‘간첩’으로 신고했다. 박씨는 자신이 담당한 주민등록 자료를 살펴보다가 알게 되었다며, 행정위원장이 미군 첩보기관에서 훈련을 받고 6·25 전쟁 시기에 남조선에서 침투한 간첩이었다는 보고를 올렸다. 그런데 박씨가 참고했다는 자료가 허위라는 게 밝혀졌다. 박씨는 되레 간부 모함죄에 걸려 불명예 제대를 했고 심지어 량강도 백암군으로 추방까지 당했다. 어떻게 보면 잔잔한 바다에 잠깐 일었던 파도 같은 이 사건은 이듬해 폭풍의 전조곡이 됐다. 채문덕이 이 사건에 주목한 것이다.
 
  김정일이 심화조 지시를 내리고 얼마 후 갑자기 용성구역의 룡추동 뒤의 산에서 미국산 무기와 수류탄, 총알이 발견됐다는 긴급 뉴스가 TV를 통해 나왔다. 뉴스의 내용은 이랬다.
 
  <6·25 전쟁 시기,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해 서북청년단 특공대가 북으로 잠입했다. 이들의 뒤에는 미국이 있었다. 이들은 당시 김일성이 집무를 보던 용성구역 건지리의 최고사령부를 습격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북조선 인민 속으로 숨어든 서북청년단 잔당들은 지금도 무기를 감춰 놓고 때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드디어 룡추동 뒤의 산에 이들이 숨겨 놓은 미국산 무기들을 찾아냈다. 계급적 원수들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뒤이어 용성구역 행정위원장도 실은 서북청년단의 한 명이었다는 발표가 나왔다. 행정위원장은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지방으로 쫓겨났던 안전원 박씨는 평양으로 돌아왔다. 중좌로 승급된 후 그 전에 일했던 부서인 사회안전성 주민등록국의 책임지도원으로 승진까지 했다. ‘하마터면 놓칠 뻔한 서북청년단의 잔당을 잡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운’ 업적을 인정받아 공화국 노력영웅 칭호도 받았다.
 
 
  2년 동안 2만여 명 희생
 
고문에 못 이겨 자신이 서북청년단 단원이라고 자백하고 처형당한 서관히 前농업담당 비서.
  1997년 초, 사회안전성 본부에 중앙상무조가 설치됐다. 책임자는 물론 채문덕이었다. 전국의 모든 도, 시, 군 안전부에 ‘심화조를 설치해 간부들의 경력을 검증하라’라는 지시가 김정일의 이름으로 내려왔다.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심화조의 첫 타깃은 중앙당의 농업 담당 비서였던 서관히였다.
 
  서관히는 김정일이 비료를 사 오라고 준 300만 달러(미국 달러)를 탕진했다는 이유로 사회안전성 교화국 7교화소(황해북도 사리원시에 위치)에서 교화생활을 하고 있었다. 심화조는 서관히를 다시 불러 냈다. 평양시 만경대구역 봉수동에 있는 사회안전성 예심국 구류장 안에서 모진 고문이 시작됐다. 고문에 못이긴 서관히는 거짓 자백을 했다.
 
  자신은 서북청년단 단원이고, 북한의 농사를 망치려고 일부러 비료값을 탕진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농업위원회 위원장을 하다 죽은 김만금도 같은 서북청년단이었고, 황해남도 당 책임비서 피창린, 개성시 당 책임비서를 했던 김기선, 강원도 당 책임비서 림형규도 서북청년단 단원이었다는 자백이 나왔다. 이에 대해 두 명, 과거 채문덕의 ‘원수’였던 문성술과 서윤석이 이 화살을 피해 가지 못했다. 중앙당 본부 당 책임비서였던 문성술과 당시 평안남도 당 책임비서를 맡고 있던 서윤석도 서북청년단 잔당이었다는 자백이 서관히의 입에서 나왔다. 채문덕의 개인적인 복수가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처형이 시작됐다. 이미 죽은 김만금도 예외가 아니었다. 평양시 형제산구역 십미리에 있는 사회주의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던 김만금의 시체를 파내서 거기에 대고 총을 쐈다.
 
  림형규, 피창린, 김기선 등을 고문한 끝에 자백을 받아 내고 총살했다. 문성술은 평양시 형제산구역 안전부에 있는 구류장에 가두고 온갖 고문을 했다. 문성술은 모진 고문에도 자백하지 않고 자기는 죄가 없다고 버텼다. 그러자 설사약을 먹이고 3일 동안 물 한 모금 먹이지 않았다. 문성술은 그렇게 사망했다. 서윤석은 고문을 통해 온 몸의 모든 뼈마디가 부서져서 죽었다. 처형당한 간부들의 가족은 전부 사회안전성 교화국에서 관리하던 18호 관리소로 옮겨졌다.
 
위성으로 촬영한 18호 교화소. 미국의 북한인권위원회가 지난 2003년 공개한 사진이다.
  칼부림은 일파만파 퍼졌다. 용성구역에서 거주하는 70세 이상의 노인들 중 대부분이 서북청년단 특공대원이라는 혐의를 받았다. 6·25 때 청년으로 넘어왔으니 지금 쯤은 70세 이상이라는 계산법이었다. 이들은 모두 고문을 받고 자백을 한 후 총살당했다. 그 가족들은 관리소로 갔다.
 
  평양시 강남군, 자강도 희천시 등 각 지역의 안전부에서 당 책임비서를 고문하다가 죽이는 사건도 속출했다. 이 사건의 여파로 강남군과 희천시에서는 안전부를 해산하고 병사들을 다 제대시키고 다시 조직하기도 했다.
 
  나중엔 관리소가 넘쳐나 관리소를 새로 지었다. 1998년 여름 함경남도 대흥군에 17호 관리소가 새로 들어섰다. 그 후 어느날 밤, 18호 관리소에 있던 ‘서북청년단 잔당의 가족들’이 무개 화차에 실려 17호로 이감됐다.
 
  2년의 기간 동안 총살되거나 관리소로 간 이들은 2만명에 육박했다. 평양의 중앙기관 간부들은 1997년과 1998년 두 해를 공포 속에서 보냈다. 밤에 문 두드리는 소리만 나면, 자신을 체포하러 오는 소리인 줄 알고 공포에 떨었다. 그 가족들도 물론이었다. 두 해 동안 평양 사람들은 숨죽이며 살았다. 김정일의 목표가 그렇게 실현됐다.
 
 
  김정일의 兎死狗烹
 
장성택 숙청도 김씨 일가식 토사구팽이 아니었을까. 지난해 12월 ‘국가전복음모의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체포당하는 장성택.
  심화조가 큰 공을 세웠다며 김정일은 채문덕과 당시 주민등록국장이었던 박창선에게 공화국 영웅 칭호를 내렸다. 참모장 황진택에게는 김일성 훈장을 주었다. 그외 나머지 심화조로 일한 이들에게 국가수훈표창을 주었다. 그러면서 계속 불순분자들을 잡아내라 격려했다.
 
  심화조 활동은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중앙당 군수담당 비서였던 전병호와 사법·검찰 담당 비서였던 계응태에 대한 조사에 들어가자, 평양의 간부와 주민들 사이에서 의혹과 불만의 목소리가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김일성 정권에 충성을 바쳤던 많은 간부들과 주민들이 다 간첩이라면 어떻게 지금까지 이 나라가 유지되었는가’라는 의문이었다.
 
  그러자 김정일은 다른 패를 빼 들었다. 바로 ‘토사구팽’이었다. 어차피 간부들을 대거 숙청하고 분위기 단속을 하려는 애초의 목표는 초과 달성됐으니, 남은 순서는 사냥개를 죽이는 것이었다. 김정일의 새로운 지시가 내려왔다. “국가안전보위부와 보위사령부가 힘을 합쳐 사회안전성을 조사하라”는 지시였다.
 
  이후 나온 조사 결과는 다시 평양을 들썩이게 했다. 심화조 사건이 채문덕의 개인적인 복수심과 공명심이 불러온 비극이라는 게 조사의 결론이었다. 김정일은 마치 자신은 심화조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는 것처럼 중앙당에 해당 사안과 관련한 점검을 다시 하고 관련자를 철저히 처벌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이제 사회안전성이라는 말만 들어도 치가 떨리니 인민들을 보호하는 뜻인 인민보안성으로 조직의 이름을 바꾸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때 사회안전성이 인민보안성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 후 2010년에는 국방위원회 인민보안부로 다시 개칭됐다.
 
  2000년 초부터 심화조에 대한 조사가 시작됐다. 7월 채문덕은 사형을 당했다. 9월에는 나머지 심화조 단원들이 전격 체포됐다. 체포도 드라마의 한 장면 같이 진행됐다. 사회안전성 봉화예술극장에 사회안전성에서 일하는 모든 성원들을 모이게 한 후, 중앙당의 계응태 비서가 들어와 황진택, 박창선 등 사회안전성의 장성 10여 명을 일거에 공개 체포했다. 전국의 안전부에서 심화조로 파견 나왔던 안전원 6000여 명도 체포됐다. 이들은 총살당하거나 교화소로 보내졌다.
 
  심화조 사건과 직접적 연관이 없는 이들도 칼바람을 피할 수 없었다. 연좌죄가 적용돼 사회안전성 조직부국장은 중장에서 상좌로 밀려나, 평양시 력포구역 안전부 정치부장으로 갔다. 선전부국장(소장)은 신경성뇌출혈을 일으켜 평양시 보통강구역에 있는 안전성 병원으로 실려 갔다. 정신을 차린 후엔 자살했다. 본부 지도과장(대좌)은 중좌로 철직돼 평양시 평천구역 안전부 정치부 부부장이 되었다.
 
  심화조 사건의 피해자들에게 김정일은 ‘따뜻한 손길’을 내렸다. 관리소에 잡혀 갔던 사람들에게 “김정일 최고사령관이 높은 배려를 내렸다. 자기 자리에 돌아가서, 자기가 살던 집으로 다시 가서 살도록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이 와중에 웃지 못할 일들도 벌어졌다. 처벌 당시, 아버지가 총살된 후 관리소에 가는 가족들 중 혈연관계로 이어지지 않은 사위와 며느리들은 본인이 요구하면 이혼을 할 수 있게 해 줬었다. 이들 중엔 다른 사람을 만나 재혼하고 살던 사람도 많았는데, 다시 돌아와 원래의 남편 또는 부인과 살도록 하라고 해서, 한동안 이혼과 재결혼 바람이 불기도 했다.
 
  평양시에서는 관리소에 갔던 사람들의 억울함을 김정일의 ‘인덕정치’로 어루만져 준다며 옥류관과 연못관, 평양면옥을 비롯한 큰 식당들에서 연회를 열었다. 이들에게 당이 한 끼 식사를 차려 주면서 위로를 한다는 명분이었다. 이 가족들이 밥을 먹으면서 김정일의 인덕정치에 보답하겠다는 말을 해야 했는데 그러지 않고 안전원들의 만행을 규탄하기만 하자 위로연을 중지했다.
 
  그도 그럴 것이 관리소에 들어가 딸, 손녀들은 다 안전원들에게 강간당하고 피창린 같은 이는 아들 3형제가 다 매맞아 죽고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그것을 한 끼 식사로 대체하려는 김정일의 속임수가 통할 리가 없었다.
 
 
  崔地主의 후손들 결국 총살
 
  김정일은 자신은 몰랐던 일인 양 굴었지만 평양 주민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어떻게 안전성 정치국장 채문덕 한 사람의 독단으로 고위급 간부들이 싸그리 처형당할 수 있었겠는가.
 
  가족들의 불만 제기 때문인지, 그 후 18호와 17호 관리소의 거의 모든 안전원들이 체포되고 철직되었다. 심화조 사건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김정일의 말을 빌리면, 김일성이 유훈까지 내리며 잡으라고 했다던 만경대 최지주의 후손들은 어떻게 됐을까. 최지주의 딸은 과거를 속이고 함경북도 무산군 상업관리소 소장을 맡고 있었고, 그의 남편은 무산군 행정위원회 국장으로, 아들은 국경경비대 부소대장으로 군사복무를 하고 있었다. 심화조 사건이 끝나고도 한참 후인 2007년 말, 18호 관리소에 잡혀 왔다.
 
  2008년 4월에 가족 3명이 함께 옥수수가루(일명 속도전가루)를 배낭에 메고 관리소를 탈출했다. 무산군까지 가서 국경을 넘으려다가 그만 잡혀 버렸다. 탈출 20여 일 만에 다시 관리소로 돌아온 것이다.
 
  그 후 6월 관리소 강변에 수감자들이 다 모인 채 최씨 여인은 교수형을, 그의 남편과 아들, 그들에게 잠복초소 위치를 대준 인민반장은 공개 총살을 당했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02102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2020년4월부록
정기구독 이벤트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