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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남북 문화체육 교류를 위한 세 차례의 북한 방문기

글 : 조문수  숭실대 산업·정보시스템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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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되면 물류 대란 올 것… 대학이 교육·물류 허브로 작동해야
⊙ 남북체육교류협회, 북한 유소년 축구단 훈련 지원
⊙ 구한말 평양에서 開校한 숭실대, 북측 대학교류에 힘써와

趙文秀
⊙ 55세. 숭실대 산업공학과 졸업. 미국 웨스턴일리노이대 경영학 석사, 아이오와대 산업공학
    석사 및 박사. 숭실대 학생처장·평생교육원장 역임.
⊙ <자연친화적 디자인과 제조시스템: 통합적 제품디자인의 자연친화적 평가방법개발>
     <유사성 계수를 이용한 그룹화 문제 해결 알고리즘> 등 논문,
    《산업물류시스템: 물류기법을 중심으로》 《청정생산기술》 등 저서,
    《통합정보화 시대의 공장설비계획, 입지, 계획 그리고 설계》 등 역서 다수.
2007년 제주도에서 숭실대 축구부와 북측 선수단이 첫 친선경기를 가졌다.
  필자는 북한을 생각하면 늘 묘한 감정에 빠지게 된다. 북한이 못사니 무조건 도와줘야 한다는 측은한 감정이 아니다. 2007년부터 평양을 몇 차례 방문할 때마다 실감한 게 있다. 그들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기술과 방법을 지원하는 것이 통일을 앞당기는 지름길이다.
 
  물론 필자는 북한전문가가 아니다. 북한 정치나 세계 경제를 연구한 석학(碩學)들보다 더 많은 학식이나 배경을 갖고 얘기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평양을 여러 차례 오가면서 경험한 것들을 바탕으로 통일을 위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지식인으로서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얘기하고 싶을 뿐이다. ‘통일대박’이 언어적 수사(修辭)가 아닌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목표가 되기 위한 몇 가지 사업을 제안하고자 한다.
 
 
  처음 만난 북측 인사
 
  2007년 3월 1일부로 숭실대 학생처장(이효계 총장 시절)에 임명되자마자 남북 친선(親善) 축구경기 추진사업을 맡게 됐다. 숭실대는 구한말 설립된 최초의 종합대학이다. 평양에 있던 숭실대는 분단 이후 서울에 캠퍼스를 두게 됐다. 이 때문에 110여 년간의 역사 속에서 ‘평양 숭실 복원’이라는 뜻을 갖고 북측 대학과 교류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러던 차에 남북체육교류협회(현재 필자는 이사로 근무 중임)를 통해 2007년 3월 23일 대학 차원의 친선 축구경기가 성사됐다. 제주도 서귀포시 강창학구장에서 본교 축구단과 북한 17세 이하 대표단과의 친선경기가 이뤄졌다. 당시 필자는 축구부 단장을 겸임하고 있었다.
 
  북측 축구단을 대표했던 A 단장과 B씨를 만났다. 내가 만난 첫 북한 사람이다. 이들의 첫인상은 아주 부드러웠다. 그러나 이들이 나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의 정보를 얻으려 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에 약간의 긴장감과 경계심을 갖게 됐다. 필자가 배운 북한에 대한 인식 탓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날 북조선 17세 이하 축구단과 숭실대학 축구단의 경기는 승패를 떠나 신명나게 경기를 가졌다. 경기가 끝나고 남북 선수들은 서로 유니폼을 바꿔 입고 공격과 수비진을 교환해 또 한 번 경기했다. 마치 통일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경계심은 조금씩 줄어들었다. 어느 정도 친해지자 A 단장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조 선생, 앞으로 평양에 가게 되면 김형직사범대학과 자매결연을 꼭 하시오.”
 
  김일성종합대학도 있는데 왜 굳이 김형직사범대학을 거론했을까. 그해 6월 평양을 처음으로 방문하게 되면서 숭실대학과 김형직사범대학과의 관계에 대해 알게 됐다.
 
  아무튼 제주도에서의 친선경기를 계기로 필자는 평양을 몇 차례 방문할 수 있었다. 몇몇 북한 친구도 사귀었다. 특히 A 단장은 그해 8월 중순 제주도 FIFA 세계청소년 축구대회에서 다시 만났다. 마치 오랜 친구처럼 서로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숭실대와 김형직사범대학
 
  숭실대는 1897년에 평양에서 개교한 최초의 민족대학이자 근대화 4년제 대학이다.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105인 사건, 국민회사건, 3·1독립운동,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했다. 한마디로 독립운동의 선도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신사참배라는 미신행위의 강요에 대항해 학교 문을 스스로 닫기도 했다. 6·25전쟁 이후 1954년 서울에서 재건한 현재는 평양 숭실의 정신을 지금까지 계승해 오고 있다.
 
  숭실대 하면 축구를 빼놓을 수 없다. 조선축구사(史) 연구에 따르면, 1918년 평양에서 창단한 숭실대 축구부는 평양을 대표하는 축구부였다. 경성을 대표하는 축구부와 경평축구대회의 주역으로 활동했는데 평양, 서울의 두 축구부는 조선 축구의 선두주자로 명성을 떨쳤다.
 
  1921년 제1회 전(全) 조선 축구대회 결승전 진출을 시작으로, 평양기독교청년회 주최 제1회 전 조선 축구대회 결승전에 진출했다. 그 이후 1938년 폐교될 때까지 숭실대의 경기 성적은 조선 최고였다. 한국축구계의 ‘한국 축구 100년을 빛낸 55인’과 1950년대의 ‘베스트11’에 숭실 출신이 선정되기도 했다. 폐교되기 전까지 각종 축구대회에 참가해 우승 7회, 준우승 6회 등의 성적을 올리며 명실공히 조선 축구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했다.
 
  숭실대학은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민족대학이었다. 1910년대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비밀결사는 조선국민회였는데, 조선국민회는 1917년 ‘숭실대·숭실중학교’의 졸업생과 재학생을 주축으로 조직되었다. 당시 조선국민회에서 활약한 사람 중에 김일성(金日成)의 아버지 김형직(金亨稷)이 있었다. 그가 바로 숭실중학교 출신이었다.
 
  평양에 소재한 김형직사범대학은 평양교원대학을 모체로 시작된 북한의 가장 권위 있는 사범대학이다. 1946년에 개교했다. 역사학부, 교육학부, 통신학부 등 40여 개의 학과로 구성돼 있으며, 평양시 동대원 구역에 소재하고 있다.
 
 
  손으로 밀면 접히는 고려항공 의자
 
고려항공기 비상구에 적혀 있는 비상 안내문.
  2007년 6월 22일 베이징행 비행기를 탔다. 베이징 소재 북한대사관의 관계자를 만나 북한음식점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그는 “김형직사범대학과의 교류를 위한 첫걸음을 축하한다”며 북한 비자 발급에 신경을 써주었다. 첫 번째 평양 방문의 일행은 통일부 관계자, MBC 통일방송협력단장, 광주상무프로축구부단장, 중국 쿤밍 홍타스포츠센터 축구감독 등 총 8명으로 구성했다.
 
  다음날 아침 고려항공에 올라탔다. 오르자마자 겁이 났다. 우리 일행이 탄 비행기는 아주 오래된 소련제(製)로, 앞 의자를 손으로 밀면 그냥 접히는, 아주 오래된 것이었다. 활주로를 벗어나자마자 의자는 거의 눕다시피 뒤로 젖혀졌다. 승무원에 의하면 기름값을 아끼려고 그렇게 했다는데 이해가 되질 않았다.
 
  평양까지 비행하는 동안, 승무원들은 김일성 사상(思想)을 거론하며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북한산 생수(生水)가 아주 좋다는 얘기도 들려줬다. 한 여(女) 승무원은 승무원 일을 그만두고 의과대학에 진학할 것이라고도 했다. 비행기 비상문에 적혀 있는 안전 문구는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
 
  <덮개를 아래로 제끼시오. 손잡이를 당기고 자기 쪽으로 문을 여시오. 밖으로 문을 던지시오.>
 
  미국에서 오랜 생활을 한 필자는 한글이 참으로 쉽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됐다.
 
  순안공항에 도착해 평양으로 들어가는 30분 동안 북한의 민낯을 볼 수 있었다. ‘메말라 있는 나라’ 그 자체였다. 마중 나온 북한 정보 당국 관계자의 첫인상은 필자가 어렸을 때 교육받고 상상했던 전형적인 북한간부였다.
 
  평양에서의 첫 행사는 김일성 동상 참배였다. 꽃을 들고 참배를 해야 하는 건지, 혹시 불이익이 있는 건 아닌지 순간 망설였다. 그러다가 그냥 서 있기만 했다. 동상 크기 때문에 위압감이 들었다. 이렇게 서 있어도 되는가 하는 불안감도 들었다. 북측 인사가 한국 와서 현충원에서 참배하던 기억이 떠올라 괜찮을 것이라 자위했다.
 
  김일성 친가(親家)가 있는 모란봉 지역에서는 평양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평양시내를 관광하고 항일(抗日)투사묘지도 갔다. 일반적인 관광이 아닌, 특수한 지역의 관광이라 마음대로 이곳저곳을 다닐 수는 없었지만, 사진은 자유롭게 찍을 수 있었다. 평양의 백화점이나 거리의 풍경, 버스, 전차, 구호 등 남한 텔레비전에서 보던 그런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거리에는 강냉이나 구운 감자를 파는 노점상들도 있었다. 중국의 시장경제 영향을 받은 듯했다. 구호내용에는 미국에 대한 욕설이나 비방은 여전했지만, 전체적으로 줄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날 저녁, 평양 양강도호텔에서 우리를 위한 만찬이 열렸다. 북측 고위공직자가 참석하면서 자리는 상당히 진지해졌다. 반찬으로 계란 프라이가 쟁반 한가득 나온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나마 신경을 쓴 요리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북측 당국자에게 들은 얘기지만, 의식주 중에서 먹는 문제가 심각하다고 했다.
 
 
  김일성 노래 청취 불량하다고 권총으로 위협
 
  그날 밤 호텔 지하에 있는 당구장과 노래방에서 술을 마시면서 ‘사건’이 터졌다. 동료 중 한 명이 평양 소주와 맥주에 취했는데 김일성 장군 노래가 나올 때 마이크 줄을 마구 흔들어댔다. 순간, 음악은 꺼지고 불이 환히 켜졌다. 그 시간 이후부터 험한 분위기가 지속했다. 감히 김일성 장군의 노래가 나오는데 태도가 불량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왔다던 국가보위부의 젊은 직원이 권총을 들고 위협했다. 그는 머리가 아주 짧고 눈빛에서 살기를 느낄 정도로 주체사상 신념이 투철해 보였다. 필자는 신(神)의 신의 아버지(김형직을 말함)가 다니던 학교(숭실)의 교수라는 신분을 거론하며 중재에 나섰다. 그 다음날 동틀 때까지 그 젊은이와 술잔을 기울이며 사건을 무마했다.
 
  술이 덜 깬 그 다음날 아침 평양에서 한 시간 떨어진 곳의 동명왕릉에 들러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아름다운 유적을 보았다. 동명왕릉은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36호이다. 서기 427년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함께 옮겨왔다고 전해지는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의 무덤이다. 평양의 동남쪽 22km 지점의 재령산 서쪽 끝 구릉 위에 있다. 분구(墳丘)에 2단 이상의 돌기단이 있고 묘역 시설도 갖추어져 있다. 고구려 무덤 중 규모가 가장 크다. 북한이 1993년 이 능을 대대적으로 보수했다고 한다.
 
  필자는 전날 마신 술로 인해 현기증이 났다. 평양시로 돌아오는 길에서 일행은 검문을 받아야 했다. 평양시내는 한적했다. “사람들은 다 어디에 갔느냐”고 물어봤더니 북한 당국자는 “다들 핵 만들러 갔시오”라고 했다. 농담으로 한 말이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웃으며 넘길 말이 아니었다.
 
  대동강에 배를 띄워 선상식사가 오후 4시까지 이어졌다. TV에서 보던 대동문, 주체사상탑, 양각도, 옥류관 등이 눈앞에 펼쳐졌다. 선상식사 중에 북측은 우리의 짐가방들을 다 뒤져본 것 같았다. 5·1경기장에서 MBC가 주최하는 어린이 축구경기를 참관하면서, 축구나 스포츠를 통한 교류는 정치적 접촉과 달리 남북교류를 활성화하는 밑받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날 저녁 김형직사범대학 관계자와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이 필요한 전자도서관과 학교 축구장 인조잔디 설치 지원에 대해 요청을 받았다. 필자는 역사, 국어, 과학 등 고고학적인 자료와 정기적인 학술교류를 제안했다. 내게는 큰 성과였다.
 
 
  통일을 위한 대학의 역할
 
중국 윈난성 쿤밍에 위치한 홍타스포츠센터.
  첫 번째 평양 방문 이후, 대학이 통일을 준비하는 데 있어 기여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심했다. 숭실대의 정체성상 ‘진리와 봉사’라는 기독교 사상과 맞물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참으로 고민이었다. 체육을 통한 대학 간의 정기적인 학술교류, 또한 탈북자를 위한 대학 차원에서의 맞춤형 직업교육은, 난민의 입장에서 진행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북한 난민들의 정착을 돕는 교육센터로서, 남한 문화에 적응하기 위한 기본교육과 적응교육, 직업훈련(job training), 인권과 민주화, 사회복지 등을 위한 교육은 숭실대의 사명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IT 대학과 벤처중소기업학과 등은 탈북자로 하여금 남한사회 자본주의체제에 적응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2007년 7월 21일 당시 숭실대 총장님을 모시고 반기문(潘基文) UN 사무총장을 만나러 뉴욕을 향해 떠났다. 그 무렵 사무총장 관저를 보수하느라 뉴욕 아스토리아 호텔에 머물던 반기문 총장은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반 총장은 탈북자를 위한 숭실대학 내 센터 건립에 UN 차원에서 돕겠다는 약속도 했다.
 
  필자는 반 총장을 만나기 전 숭실대의 3대 학장인 모펫(Moffett) 선생의 아들 프린스턴 신학대학 명예교수 사무엘 모펫(Samuel Moffett) 교수를 만나 헨리 루스 재단(Henry Luce Foundation)에 기부를 위한 추천서를 받아뒀다. 반기문 총장에게 센터 건립을 위한 지원 요청을 하기 위함이었다. 모펫 교수 부부는 의약봉사로 평양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모펫 교수에게 평양의 한 노인이 다가와 눈물을 글썽이며 귓속말로 “I know your father(나는 당신의 아버지를 압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는 아직도 북측에 기독교 정신이 깃든, 어쩌면 평양 숭실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 그리고 아쉬움을 간직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증적 사례였다.
 
  2007년 8월 17일부터 이틀간 제주도에서 FIFA 세계청소년 축구대회가 있었다. 그때 북한 청소년 축구단을 이끌고 온 A씨를 다시 만났다. 마치 친구인 양 반가웠고 필자가 평양을 방문했을 때의 경과에 대해 서로 얘기했다. 그는 숭실대 박물관에 보관 중인 자료를 언급하며 광복 이전의 자료가 턱없이 부족하다며 몇 가지 얘기를 들려줬다.
 
  그는 김형직의 사상과 생애에 대한 기록을 자랑스럽게 말했다. 김형직의 숭실대 중퇴 및 이후 행보의 기록에 대한 언급, 김형직의 노래 작곡, 제일사범대학에서 김형직사범대학으로의 변천사 등을 들려줬다. 그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대학(당시 학장이 한국인) 같은 제3국의 대학이 김형직사범대와 숭실대와의 공식적인 만남을 주선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아이디어도 제안했다. 남한의 숭실대학이 김형직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하는 것도 남북교류를 위해 좋은 방법이라 했다. 명예졸업장 건은 정치적 판단이 필요한 사안이라 필자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2007년 10월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평양에서 개최됐다. 양측 합의 사항 사회문화분야 교류협력 사업 중 한의학(고려의학) 부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로 했다. 정상회담 이후 열린 남북총리회담에서 당시 대통령 주치의, 통일부 문화교류본부장 등과 만나 민족의학교류재단설립 가칭 ‘평양숭실한방병원’에 대한 의제를 제안했다. 민족의학 임상연구 및 치료·요양 전문병원 건립 운영과 민족의학 약제 데이터베이스 구축 및 약제 상품화 사업, 전산시스템 구축 및 연구센터, 그리고 민족의학 학술 교류 및 백서 발간 등 구체적인 사업내용까지 담았다.
 
  가칭 민족의학교류재단은 국내 한의학 최고의 권위자와 학자들로 구성하고 북측의 우수한 고려의학 연구인력 및 임상치료 경험과 남측의 한의학과 관련된 생명공학, 전산 및 지식정보 분야의 인프라를 총망라한 지원시스템을 공동 구축하는 사업을 추진하고자 했다. 지금도 이 사업에 대한 합의는 유효하다.
 
  그해 10월 25일, 필자는 중국 윈난성 쿤밍에 위치한 홍타스포츠센터에 갔다. 7억 위안을 들여 쿤밍호 서산 삼림공원에 건설한 종합스포츠 타운으로, 축구장 11면을 보유한 최고의 훈련소였다. 2006년에 설립된 재단으로 필자가 상임이사로 있는 사단법인 남북체육교류협회는 남북한 축구 꿈나무를 육성하기 위해 북측선수단을 지원하고 있었다. 우리는 중국 홍타스포츠센터에 북측 유소년 축구선수들을 데려와 훈련을 시켰다. 그곳에서 북측 체육관계자들을 만나 남북 대학 축구단 전지훈련 및 친선경기에 대해 의논했으며 마침내 성사시켰다.
 
 
  기다림 속에서의 두 번째 평양 방문
 
평양 만경대 김형직의 묘 앞에 있는 김형직, 강반석 부부 동상.
  2008년 초 나름대로 교류와 통일 준비를 했다고 생각한 필자는 중국 선양을 통해 다시 평양으로 갔다. 2007년도에 만난 북측 인사를 순안공항에서 다시 만났다. 그 인사는 2008년 평양에서 열렸던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공연장에 미국 성조기를 달지 말지 논란이 있을 때 성조기를 달게끔 한 북한 내 상당한 권력층 인사였다고 한다.
 
  그의 도움으로 필자는 김형직사범대학 관계자와의 회의에서 구체사항을 의논할 수 있었다. 전자도서관과 인조잔디 설치 등에 관한 사안이었다. 당시 김일성종합대학은 과학도서관 시설 현대화를 위한 남북교류사업 내용으로 도서관 자동화 프로그램(LAS), 디지털 도서관 프로그램(DL), 홈페이지(WEB) 제공,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기타 부대 장비, 출입관리 프로그램, 출입 통제기, 바코드 출력 프로그램, 프린터, 바코드 라벨, 학생증 발급 프로그램 등을 남측으로부터 지원받고 있었다. 김형직사범대학도 비슷한 지원을 요청했다.
 
  또한 남북체육용품을 위한 생산공장과 평양숭실한방병원 건립을 준비하기 위해 평양시 사동 구역 장천동에 35만m2(서울로 비교하면 잠실 중심가의 10만6000여 평에 해당)를 불하받기로 하고 부지를 둘러보았다. 평소 갖고 있던 남북교류의 꿈이 실현되는 듯했다.
 
  그 다음날 북측 인사는 필자 일행을 묘향산으로 안내했다. 묘향산은 높이 1909m로 8만6000봉이 있는 유네스코 지정 청정지역이다. 묘향산맥의 중부에 있는 산으로 11세기 초부터 산세가 기묘하고 향기를 풍기는 산이라 하여 묘향산이라 불렀다. 예부터 한국 5대 명산의 하나이자 조선 8경의 하나로 알려져 왔다.
 
묘향산 내에 있는 김일성박물관 입구.
  묘향산 내에 있는 김일성박물관은 그야말로 축구운동장을 몇 개 붙여놓은 정도로 광대해서 다 둘러보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김일성이 타고 다니던 기차나 벤츠 자동차, 각국에서 사온 온갖 물품 등을 진열해 놓은 것을 보면서 우상화에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실감했다. 60년 넘게 진행되어 온 우상화 작업으로 북한체제가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결과적으로 통일을 위해 우선 교육을 통한 통일 선도작업이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예를 들어 통일이 내일 당장 된다고 할 때 북한 주민들이 각 가정에 걸려 있는 김일성 부자(父子) 사진을 과연 떼어버릴까? 절대 그렇지 않다. 남한 사람과 북한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감정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언어의 이질성을 극복하는 것도 시급하다. 북한에서는 오징어를 낙지라고 쓴다. 반대로 남한에서는 북한의 낙지를 오징어로 표현한다. 문화체험, 소프트웨어 같은 IT 관련 사업, 한반도 역사의 재조명, 그리고 대학 간의 체육교류 등 남북교류 사업은 산 넘어 산이다.
 
  두 번째 평양 방문은 내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 방문이었다. 필자가 묵었던 호텔의 전력 사정이 나빠 양말을 포함해 가져갔던 모든 옷을 껴입고 잠을 청했다. 너무 추워 매일 밤 자다 깨야 했다. 못사는 동족(同族)을 코앞에 두고 현재의 작은 어려움을 불평하는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지 새삼 깨달았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北의 시각
 
세 번째 평양 방문 당시 묵었던 문수초대소. 국빈급 인사들이 묵는 곳이다.
  필자는 2008년 3월 신학기가 시작됨과 동시에 평양에 다시 들어갔다. 한국은 이명박(李明博) 정부로 바뀌었다. 허영만 화백(<식객> 준비로 북한 음식문화 탐방차 방북)과 청와대 관계자 등이 동행했다. 필자의 두 번째 평양 방문 때의 고생(추위)을 고려했는지 이번에는 문수초대소로 숙소를 정해주었다. 초대소는 말 그대로 국빈급을 모시는 곳이다.
 
  필자는 북측 인사와 김형직사범대학과의 학술교류와 민족의학센터 건립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기업가의 도움으로 평양 땅 2억 평에 말레이시아를 통한 조림사업 의제도 다뤘다. 그런 와중에 그해 3월 26일 남북한 월드컵 예선전을 평양에서 하기로 했던 것이 실천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새로 출범한 이명박 정부를 믿을 수 없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남북체육교류협회 차원에서 북한 대표팀들 훈련 지원사업은 계속됐다.
 
  다음날 우리 일행은 북측의 안내로 김일성 시신이 있는 금수산궁전으로 갔다. 입구에서부터 난리가 아니었다. 옷 먼지를 털어내는 진공관 청소기를 통과해야 했다. 시신 앞에서 고개 숙여 인사하는 북한 주민의 대열은 끝이 없었다. 그러한 광경이 익숙하지 않은 나로서는 그냥 서 있기만 했다. 이러한 사상적 차이를 어떻게 줄일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게 하는 순간이었다. 교육산업을 통해 이질적 사고(思考)의 차이를 줄이는 방안이 절실했다.
 
  조선민족작가로 추앙받는 작가의 그림 두 점을 사느라 낮에 평양의 한 백화점에 들렀다. 약품과 건강식품 등 구성 제품은 다양했지만, 북한 주민이 사기에는 고가(高價)였다. 평양에서 다시 만난 북측 관계자 중 한 명이 최근 암에 걸렸다는 얘기를 듣고 그를 위한 약을 사 선물로 줬다. 북한은 의료시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최근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이 독일에서 발표한 ‘드레스덴 선언’에도 나와 있듯이, 인간이 사는 데 가장 필수적인 요건만이라도 충족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각자 자리에서 통일 준비 필요
 
2007년 7월 뉴욕에서 만난 반기문 사무총장. 반 총장은 탈북자를 위한 센터 건립에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몇 차례의 방북 경험에 비춰 최근 화두(話頭)가 된 ‘통일대박론’을 곰곰이 생각해 봤다. 통일은 준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안을 제시하는 것은 없다. 대학에 있는 한 사람으로서 대학 차원의 ‘통일 준비’를 강조하고 싶다. 쉽게 말해 대학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반도 평화, 통일에 관한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최근 숭실대는 통일부와 통일교육 협력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통일의 주체는 궁극적으로 남북한 주민이다. 하지만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집권 세력의 이념적 지향에 따라 통일 논의가 지나치게 큰 폭으로 변동하는 문제점을 드러내곤 했다. 정부가 주도하는 통일론은 대체로 거대 담론이나 추상적인 구호에 머물기 쉽다.
 
  국민은 구호 위주의 거대 담론인 통일론에 대해 식상해 한다. 나와는 상관도 없어 보이는 통일론에 관심을 가지라고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다. 특히 젊은 세대에서 통일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넓게 퍼져 있다.
 
  필자는 대학이 한반도 통일 논의에서 허브(hub)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물론 대학이 통일 의제를 주도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통일 논의를 대학을 중심으로 형성하고 토의하고 교육하여야 한다는 교육·물류의 거점을 뜻하는 것이다. 정부는 정부대로, 군(軍)은 군대로, 종교는 종교대로 역할을 하는 것이 좋다. 다만 통일에 대한 모든 사람의 견해가 대학을 중심으로 광장처럼, 시장처럼 오가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 통일론이 투명하고, 건강해질 수 있다.
 
  구체적인 준비의 예로, 필자는 최근 ‘통일을 준비하는 기업의 투자전략’이라는 주제로 모 방송국 심포지엄에 참석해 통일되면 물류대란이 발생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물류산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특히 물류의 의미를 넓게 해석해 다양한 시나리오를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필자가 얘기하는 물류는 단순한 물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는 ‘통일친화적 사회로의 전환’과 같은 개념이다. 관광, 레저, 운하 물류는 물론 교육, 문화까지 접목한 광의의 물류산업을 말하는 것이다. 통일시대의 물류산업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문화교육적 물류 기반을 확보해야 하고 그에 따른 물류산업의 표준화를 마련해야 한다.
 
  통일 후 한반도는 태평양, 중국, 시베리아, 유럽으로 이어지는 세계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할 수 있다. 또한 통일은 다양한 측면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할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의 일자리가 주로 한국 내에 머물러 있는 데 반해 통일되면 북한 지역으로 물류 관련 일자리가 확대될 것이다.
 
  북한 지역에 있어서 과연 어느 지역에 거점을 확보해야 하는가를 거리, 비용, 시간 등 어떤 기준으로 확보하고 준비해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 교육적인 차원에서 인터넷 등을 이용한 IT 물류융합의 개발과 이를 위한 물류특성화 인력양성, 해외인턴의 활성화, 물류관리사 전문인력 양성, 고등학교 차원의 물류기능인력 양성 등이 시급한 현실이다.
 
 
  상당한 시간 소요되는 남북교류
 
  오늘날 북한을 정상적인 국가라고 생각하거나 북한의 지도체제를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북한을 변화시키고 시장개방과 함께 핵을 내려놓게 하는 각각의 방법적 차이는 너무나 크다.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남북이 작은 교류부터 지속가능한 교류를 통해 신뢰를 축적하는 데서 출발한다.
 
  필자는 2007년부터 북한에 대한 지원 업무를 위해 수차례 평양을 방문했다. 북한 지원 업무 중에서 나름대로 성과를 낸 부분도 있고, 계획대로 이루지 못한 것도 있다.
 
  그 이유는 우리 쪽의 노력 부족 때문이기도 했고, 북한 측의 유연하지 못한 자세 때문이기도 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북한과의 교류협력에서 성과를 내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는 점이다. 지금 씨앗을 뿌리면 수십 년 지난 뒤에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그게 나의 남북통일론의 핵심(核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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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달기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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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혜연    (2018-02-17) 찬성 : 24   반대 : 26
월간좇선도 좀 기레기로 살지말고 올바르게 기사나 써!!!! 친종북언론사들인 민중의소리나 오마이뉴스 한겨레도 건전한기사들을 과거에 비해 많이쓰는판에....!!!!
  박혜연    (2018-02-17) 찬성 : 14   반대 : 11
이런거나 쓸것이지!!!!! 내로남불 종북몰이 기사 맨날쓸거냐 ㅡㅡ

20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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