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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과 동향

유엔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보고서 중 6·25 전쟁 중 납북자 문제

“광범위하고 조직적 납치 자행… 북한이 사전에 계획한 작전”

글 : 김성동  월간조선 기자  ksdh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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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남한을 급습하기 직전인 1950년 6월 6일 국가안전보위부에서 노동당에 보낸 긴급 문서에 따르면, 필요한 인력을 범주화하여 엔지니어, 약사, 의사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언급하였다.(보고서 중)

⊙ 전쟁 중 납북자 3만에서 10만으로 추산
⊙ 납치는 노동당 소속 군인들에 의해 자행됐으며 민간인 국제법 위반
⊙ 청년 충원함으로써 사회주의 정부의 사회기반시설을 건설하고 유지 의도
⊙ 1949년 8월 5일 작성 북한 문서, “남한의 반공 무리들을 북으로 데려와 그들을 분열시키고 파괴한다”
2013년 8월 경남 거제 농소마을을 방문한 유엔북한인권조사위원회가 납북 피해 가족들의 증언을 듣고 있다.
  유엔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는 지난 2월 17일 북한의 인권 침해 실태를 조사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정치범 수용소, 식량권 유린, 고문, 임의적 체포와 구금, 생명권 침해, 강제 실종 등 9개 분야에 걸쳐 조사한 결과를 담은 보고서에서 COI는 현 북한 정권의 최고 책임자인 김정은을 국제형사재판소(ICC)에 회부해야 한다는 주장도 함께 실었다. 북한 정권의 반체제 인사에 대한 재판 없는 처형이나 수용소 수용 등 처참한 북한 인권 상황이 남한 일부 단체의 주장만이 아닌 세계 전체의 공인을 받게 된 것이다.
 
  인구 30만명이 학살당한 유고 내전, 100만명이 희생당한 르완다 사태의 책임자들처럼 김정은도 ICC에 회부해야 한다는 의견까지 담은 이 보고서가 발표됐을 때 국제 여론은 북한의 반(反)인륜적 인권 범죄에 주목했다.
 
  《뉴욕타임스》 같은 매체가 2월 26일자 사설에서 “북한의 반인륜적 범죄 실태를 알고 있고 이에 관한 수많은 보고서가 있었지만, 살인과 고문, 낙태, 성폭력, 정치적·종교적 박해 등 이번 보고서만큼 북한의 처참한 인권 실태를 상세히 다룬 보고서는 없었다”고 평가했을 정도다. COI의 보고서가 북한 인권과 관련해서는 ‘사전적 역할’을 하게 됐다는 평가에 다름 아니다. 이 사설에서 《뉴욕타임스》는 또 “김정은을 반드시 ICC에 회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정작 당사자격인 우리는 비교적 조용했다. 세계 여론은 들끓었지만 국제 사회에서 이 보고서에 직접적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는 한국의 반응은 조용함에 가까웠던 것이다. 정부든 언론이든 당시 시기적으로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행사가 겹친 탓도 있었지만 침묵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정략적 이해관계 때문에 북한인권법 제정조차 못하고 있는 국내 정치권이 상징하듯, 지난해 8월 하순 북한 인권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방한했던 COI 마이클 커비 위원장이 “북한 인권에 너무 무관심한 한국 언론에 실망했다”고 한 발언이 상징하듯 이 문제에 관심을 크게 갖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여론에 상관없이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정부와 언론의 홀대 속에서도 국내 북한 관련 인권단체들이 이 보고서가 나온 다음의 움직임은 활발하다. 대표적인 단체 중 하나가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KWAFU·이사장 이미일)다.
 
  이 단체는 스위스 제네바를 방문해 3월 17일 COI가 유엔인권이사회에서 1년여간 조사해 온 북한 인권 관련 보고서를 발표하는 순간을 함께했다. 다음 날인 18일에는 그 현장에서 북한 정권에 대해 6·25 전쟁 당시 강제 납치 시인 및 해결을 촉구하는 시위도 벌였다.
 
  이 단체의 활동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남(南)과 북(北)이 전쟁 중 납북자(拉北者)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가운데서도 정부 지원 없이 민간 차원에서 끊임없는 활동을 통해 6·25 전쟁 중 북한이 남한의 민간인들을 강제 납치했음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북한 정권은 국내 북한 관련 인권단체의 “6·25 전쟁 중 북한 정권에 의한 강제 납치자가 있었다”는 주장에 대해 “전쟁 납북자는 없다”, “정치적 모략이다”라고 주장해 왔다. 남한 정권이 결과적으로 북한의 주장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스탠스를 취해 왔다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공식적으로 북한이 전쟁 중 남한 민간인들을 납치했다는 사실을 인정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전쟁 중 납치자의 존재 여부는 언제나 민간 단체들의 몫이었다.
 
  그나마 남한 정부가 전쟁 중 강제 납치자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2011년 8월이다. 그해 8월 2일 6·25 전쟁 중 민간인 납북자 55명을 공식 인정했던 것이다. 6·25 전쟁 발발 후 61년 만에 전쟁 중 납북자를 정부 차원에서 최초로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정부가 인정한 것은 민간단체인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가 주장하고 있는 9만여 명의 전쟁 중 납북자 숫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月刊朝鮮》은 이미 취재를 통해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 정부가 작성한 기록을 통해 전쟁 중 강제 납북된 인사가 8만명이 넘는다는 사실을 소개한 바 있고 그 명부를 책자로 발간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 유엔북한인권조사위에서는 전쟁 중 납북자(강제 실종자로 표현)를 3만에서 10만으로 적시하고 있다. 유엔북한인권조사위원회가 왜 그런 판단을 내리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이 보고서에 잘 드러나 있다. 이 위원회의 보고서를 보면 6·25 전쟁 중 남한 인사들에 대한 강제 납치는 사전에 계획됐고 조직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이 보고서 중 6·25 전쟁 중 납북자들에 관한 부분의 보고서 요약이다.
 
 
  납치를 포함하는 타국민 강제 실종
 
  강제 실종이란, 정부 산하의 모 부서 공무원, 혹은 모 기관이 정부의 승인이나 묵인하에 직간접적으로 정부를 대신하여 혹은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활동하는 사(私)조직이 개인의 의사에 반하여 개인을 체포, 구금, 납치하거나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는 경우에 해당하는 것으로, 개인의 생사 또는 행방의 공개를 거부하는 행위 혹은 개인의 자유를 박탈함으로써 개인을 법의 보호권 밖에 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행위가 수반된다.
 
  유엔 강제실종선언 1조에는 다음의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
 
  1. 강제 실종의 행위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범죄 행위이다. 이는 유엔(UN) 헌장의 목적을 부정하는 행위이자, 세계인권선언에 명시되었을 뿐 아니라 국제적인 도구들을 통하여 재천명되고 발전된 인권과 기본적인 자유에 대한 심각하고 노골적인 침해로 간주되어 비난 받을 행위이다.
 
  2. 강제 실종의 행위는 피해자 개인을 법의 보호권 밖에 두며 개인과 그 가족에게 극심한 고통을 가하는 것이다. 이것은 국제법을 위반하는 것이며, 그중에서도 법 앞에서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자유와 안전의 권리, 고문과 여타 잔혹 행위, 비(非)인도적 행위 또는 모멸적인 처우나 처벌을 받지 않을 권리를 위반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생명권에 대한 침해 혹은 극심한 위협 행위이다.
 
 
  납치의 시기 및 유형, 그리고 기타 강제 실종 및 비자발적 실종-1950-1953: 한국전쟁 중 대한민국 민간인 납치
 
6·25 전쟁 중 북한이 강제 납북한 인사들의 명단을 작성한 서류.
  6·25 전쟁 중에, 북한군은 남한에서 수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그들의 자택 혹은 자택 부근에서 북한으로 끌어갔다.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하여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에 서명하기까지 지속된 한국전쟁 시기에 38선 이남에 거주하던 민간인을 납치한(kidnapping) 후 북한에 재(再)정착시킨 행위는 민간인 납치에 해당한다. 이러한 납치 피해자들은 전시 납북자(Korean War abductees)로 분류된다.
 
  6·25 전쟁 중에 억류되고 강제적으로 북한으로 끌려간 대한민국 민간인의 숫자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3만에서 10만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하여 다년(多年)간의 심도 있는 연구를 진행해 왔으며, 한국전쟁 당시에 납치된 대한민국 국민들의 생사 여부와 현재 상태를 확실히 하기 위해 헌신해 온 민간단체인 KWAFU는 산하 연구기관인 한국전쟁납북사건자료원(KWARI)의 조사를 토대로 하여 9만6013명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이 기록은 대한민국 정부와 희생자가족회가 납북 직후에 수집한 납북자들의 세부 정보에 기반한 것이다. 이 명부는(9만6013명 명부) 피해 가족들로부터 얻은 자료와 증언에 의해 뒷받침된다.
 
  납치는 광범위하게 조직적으로 자행되었으며 이는 북한 정부가 정책적으로 사전에 계획한 것임을 말해 준다. KWAFU에서 제출한 9만6013명의 명단 통계치에 따르면, 남한 민간인 납치 행위가 농작(農作), 건설 노동, 그 밖의 기술적인 영역에서 경험이 있는 청년들을 충원함으로써 사회주의 정부의 사회기반시설을 건설하고 유지하기 위해 사전에 계획된 작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위원회 측에 제출된 통계치는 납북 민간인의 직업 구성을 보여준다.
 
  납치는 노동당 소속 군인들에 의하여 자행되었다. 군인들은 민간인들을 자택과 직장에서 잡아 갔으며, 조사할 것이 있어서 억류될 것이라는 내용은 인지시키되 집으로 돌려보내 주지는 않았다.
 
  서울에서 열린 공청회에서, 김남주씨는 충무로에서 전기사업을 하던 아버지의 납북 사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사복을 입은 두 명의 남자가 김씨 아버지의 가게로 찾아와 아버지를 찾았다고 한다. 김씨의 아버지가 나오자 인민군 세 명이 와서 아버지를 끌고 갔으며 다시는 아버지를 볼 수 없었다고 한다. 북한 측의 요원들이 나중에 김씨의 형을 잡아가려고 집에 다시 찾아왔지만 다행히 피하여 잡혀가지 않았다. 김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때는 행복했던 가족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죠. … 60년이 지난 지금도 제가 경험한 그때의 고통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저희는 아직도 그 고통 속에 삽니다. 저는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며 웁니다.”>
 
  또한 실용적인 기술과 전문성을 지닌 다수의 청년들 이외에 의료, 법률, 공공업무 각 분야에서 숙련된 전문가들도 납치의 대상이었다. 대한민국 정부의 안보, 정보 부서에 종사했던 사람들도 납치의 대상이었다. KWAFU의 자료에 따르면 공무원 2919명, 경찰 1613명, 법조인 및 변호사 190명, 의료 전문가가 424명에 이른다.
 
  납북된 경찰의 아들 최광석씨는, 아버지가 잡혀갈 것이 두려워 경찰복뿐 아니라 경찰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모든 물건을 숨겼다고 증언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잡혀갔고 다시는 가족을 보지 못했다.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등 북한 관련 인권단체들이 해마다 광화문에서 열고 있는, 북한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전쟁 중 납북자, 국군포로 9만여 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는 행사. 지나가는 행인들이 명단을 살펴보고 있다.
  <“저희 아버지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보안 부서에서 일했습니다. 경찰과 비슷한 개념이지요. 저희 아버지가 제게 아버지의 경찰복과 그와 관련된 문서들을 지하실에 숨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저는 지하실에서 그 물건들을 숨기고 있었고 아버지를 잡아가려고 온 빨갱이들과 아버지가 나누는 대화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저희 아버지한테 같이 가시자고 했습니다. 아버지를 붙잡아간 거죠.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걸 마지막으로 들었을 때, 아버지는 어머니, 그러니까 제게는 할머니한테 작별 인사를 하시더군요. 그때가 마지막으로 제 아버지 목소리를 들은 때입니다.” >
 
  박명자씨는 아마 북한 밖에 생존하고 있는 마지막 피랍자일텐데, 한국전쟁 당시 그녀가 일했던 병원의 의료진 중 절반에 해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북으로 잡혀갔던 한국전 당시의 경험을 증언했다. 박씨는 함경남도 함흥에 병원을 짓기 위해 서울대학교 병원의 의료진 절반에 해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북한군에게 잡혀갔던 당시를 증언했다.
 
  “우리는 그때 산간 지역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의사, 간호사, 원무과 직원들 할 것 없이 너무나 지쳤습니다. 우리는 다리가 너무나 아팠고 인민군들은 지친 사람은 나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손을 들고 앞으로 나온 사람들은 처형됐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겁이 나서 그냥 따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리가 풀리니까 인민군들이 계속 때리면서 일어나 걷게 했습니다.”
 
  KWAFU에서 제출한 역사 문헌들에 따르면, 납치가 우발적인 범죄 행위가 아니라 북한의 주요 기관에서 계획한 바에 따라 노동력과 기술력을 확보하려는 분명한 목적을 갖고 자행된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북한의 문서들은 특정 기술과 전문성을 요하는 당시 북한의 다양한 상황들을 드러내 준다. 예를 들어, 북한이 남한을 급습하기 직전인 1950년 6월 6일 국가안전보위부에서 노동당에 보낸 긴급 문서에 따르면, 필요한 인력을 범주화하여 엔지니어, 약사, 의사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언급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의 문서들과 외국 정부 기관에서 전시에 주고받은 전보들에 따르면, 전시에 이뤄진 민간인 납북자들에 관한 세부 정보들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기밀 해제된 러시아 정부 문건에 담긴 당시 주 북한 러시아 대사가 1950년 8월 17일에 본국에 보낸 서신에는, 서울 시민들을 북한의 농장으로 이송시키는 결정을 담고 있는 1950년 7월 17일자 북한 문서가 번역되어 있다.
 
 
  “反共무리 데려와 그들을 분열, 파괴”
 
  전시(戰時) 납북의 이면에 숨은 목적은 노동자, 기술자의 확보와 동시에 남한의 역량에 손상을 입히는 것으로 간주된다. 북한 내에서 노동력과 전문성에 대한 필요는 전쟁으로 인한 북한의 자체적인 인구 감소, 해방 직후 북한 정부에 의해 이뤄진 북한 주민의 이주에 따라 증가하고 있었다. 해방 후, 38선 이북에 북한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 새로 세워진 사회주의 정부는 사유재산을 빼앗았고 지주, 인텔리, 종교인들과 같이 사회주의 정부에 위협이 되는 사람들에게 강압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한 결과, 북한 주민의 다수가 남한으로 이탈했고 이에 따라 노동력의 부족이 초래됐다. 납치는 또한 남한 사회에 혼란을 불러올 수 있었으며, 이로 인해 남한의 전후 국가 재건을 방해할 수 있었다. 1949년 8월 5일 작성된 문서는 “남한의 반공 무리들을 북으로 데려와 그들을 분열시키고 파괴한다”는 북한의 정책을 보여준다.
 
  정전협정은 남북 양측의 사령관으로 하여금 1950년 6월 24일 이후에 휴전선을 건넌 양측의 민간인이 고향으로의 귀환을 희망하는 경우에 귀환을 허가, 지원하도록 지시한다. 국제 인도법은 무력 분쟁 시에 억류된 민간인을 송환하도록 규정한다. 이러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1950년 6월 24일 이전에 남한으로부터 휴전선을 넘어가서 전쟁이 종결되는 시점까지 북한에 체류한 남한 민간인의 경우, 남한으로의 송환이 이루어진 경우는 단 한 건도 없었다. 한국전쟁 이후로, 북한은 수많은 남한 사람들이 자의적으로 북으로 왔다고 주장하면서 전시 납치 사례를 지속적으로 부인해 왔다. 예를 들어 2013년 6월 30일, 김정은은 《로동신문》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번에 현 괴뢰집권 세력이 벌려놓은 ‘전시랍북자’ 소동은 선임자의 도발행위를 훨씬 릉가하고 있다. … 구태여 그들의 의거 입북에 대해 말한다면 그것은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이 정치적 신념과 통일에 대한 열망, 민족적 량심에 따라 단행한 애국적 장거이다.>
 
 
  납치자 문제에 대답 없는 북한
 
6·25 전쟁 납북인사피해 진상규명위원회 발족식.
  1956년에 국제적십자위원회(the International Committee of the Red Cross)를 통해 남한 민간인 납북자들의 생사 확인을 ‘실향 사민(displaced persons)’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북한 측에 요청했다. 7000여 명의 납북인사 명단이 위원회 측에 제공됐고, 이에 대해 겨우 337명에 관한 정보만이 답변으로 돌아왔다. 더 많은 수의 납북자들에 관한 정보 요청에 대해서는 ‘납북’이나 ‘납북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반박을 받았다.
 
  2012년에 KWAFU 측은 현재까지 생사 확인이 되지 않은 9만6013명의 전시 민간인 납북자의 명단을 국제적십자위원회에 제출하며 이들의 생사 확인에 관한 세부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지원을 요청했다.
 
  지금까지도 북한으로부터 어떠한 답변을 받은 바가 없다. 납치 이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시 납북자가 생존해 있을 확률은 줄어든다. 강제 및 비자발적 실종 실무그룹(WGEID)에도 진정서가 제출되었다. 그러나 북한 측의 협조가 부진한 관계로, 실무그룹 측에서는 어떠한 정보도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전시 납북자들은 북한에 정착한 이후, 극심한 차별 대우를 받았다. 특정 기술을 가졌다는 이유로 선택되어 납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자산이라기보다는 적대 세력으로 간주되었다.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전적으로 수용하지 않는 개인은 심각한 처벌을 받거나 밀착 감시를 받았다. 대부분의 경우는 오지의 탄광으로 보내졌다. 수많은 경우 노동 수용소나 정치범 수용소행 형을 받았다. 6만6000명가량의 남한 민간인이 강제 북송된 이후인 1950년 9월 5일에는 강원도 소재 북한 내무서에서 보고서를 제출하였는데, ‘해방된 서울 시민들(liberated Seoul citizens)’이 어떠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을 완곡하게 담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해방된 서울 시민들은 색출하고(searched), 심문하고(interrogated), 감시해야 한다(monitored)고 되어 있다. 이 보고서는 전(former) 서울 시민들이 일하던 각 공장, 탄광, 작업장에서 북한 정권의 통치하에 ‘고용된 노동자들’의 명단을 작성하는 법을 지시하고 있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원치 않는 행위가 발생되지 않도록 하며, 도망자가 발생할 시에는 즉시 체포하는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
 
 
  이어지는 증언들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미일 이사장이 이 협의회 사료관에 전시된 납북자들의 사진 앞에서 6·25 전쟁 당시 강제 납북된 인사들의 납북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위원회에 증언한 한 목격자는, 삼촌이 복싱 선수였는데 납북되어 스파이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남한에 남아 있는 가족들에 대한 감시가 강화되자, 복싱 선수의 여자 형제 한 명과 남자 형제 두 명은 월북하였다. 복싱 선수는 형제 한 명과 여자 형제가 북한에서 각자의 가정을 꾸리는 동안 다른 형제 한 명과 살았다. 이 대가족은 평양에서 꽤 잘살았는데, 이것도 북한의 스파이 부서 상관이 탈북, 월남하자 모두 끝이 났다. 이 사건으로 인해 복싱 선수는 부서의 다른 모든 직원과 함께 처형당했다. 복싱 선수와 함께 살던 형제도 처형당했다. 결혼하여 분가해 살던 형제는 연좌제의 피해를 입을 자신의 가족을 생각하여 자살을 시도하였다. 이 형제와 그의 가족은 나중에 모두 살해된 것으로 여겨진다. 복싱 선수의 여자 형제와 그녀의 딸(증언자)은 오지의 탄광 지역으로 추방당했다.
 
  남한 민간인 납북자의 딸이 위원회에서 증언하기를, 1977~1978년에 남한 출신 민간인들을 고산 지대로 몰아내는 작업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대학 교수여서 가족이 도시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1977년도에 그들은 다른 남한 출신자 가족들과 함께 멀리 떨어진 깊은 산속으로 쫓겨났다고 한다. 그녀는 “그렇게 쫓겨난 이후로 우리는 사람 취급을 못 받고 살았어요”라고 증언했다.
 
  전시 납북자들은 북한을 떠나 고국 남한으로 돌아올 자유뿐 아니라 남한의 가족들 또는 정부와 소식을 주고받을 자유까지 빼앗겼다. 대부분은 북한에서 결혼 혹은 재혼을 했고 최하위 성분이 되어 그들 자신뿐 아니라 후손들까지 교육, 고용의 기회를 박탈당했다. 여러 증언자들이 위원회 측에 그들의 성분이 ‘적대 계층’으로 분류됐다고 증언했다.
 
  전시 납북자의 딸은 자신의 아버지가 남한 출신인 것을 알게 된 자신의 남편이 이혼을 강요하였다고 증언했다.
 
  대한민국 민간인 납치는 사전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북한과 외국의 문서 자료를 통해 노동자가 필요했던 당시 북한의 상황, 대한민국 국민들을 북한에 재정착시키려는 의도를 확인할 수 있다. 북한인권조사위원회에서 이루어진 증언들을 통하여, 대규모로 자행된 강제 재정착, 특정 직군의 사람들을 겨냥한 납북 행위를 확인했다. 인민군(KPA)이 이러한 납북 행위를 자행했다는 사실은, 전시 민간인 납치 행위가 당시 북한 인민군의 수장이었던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자행된 것임을 확증하는 것이다. 북한인권조사위원회에서는 북한의 인민군이 전시라는 이점을 활용하여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민간인들을 강제로 북송시켰으며, 정전협정에서는 납북 민간인들에게 송환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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