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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甲濟의 시각

위대한 만남, 李承晩·트루먼 이야기

글 : 조갑제  조갑제닷컴·조갑제TV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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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세계를 지킨 韓國戰의 두 최고 사령관은 69년 만에 多富洞에서 동상으로 다시 만났다. 한국인은 비로소 背恩忘德을 면했다!
  참혹한 6·25전쟁 이후 황폐화된 한국 사회에선 《정감록》의 ‘해도진인설(海島眞人說)’이 퍼졌다. ‘바다섬에서 백성을 구하기 위하여 나타난 진인(眞人)’이 ‘트루먼’이란 것이었다. ‘Truman’을 ‘Trueman’으로 오해한 것인데 기댈 곳이 없는 민초들 사이에선 ‘해도’, 즉 바다섬도 미국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오스트리아 출신인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인 줄 오해하고 하늘을 가르는 전투기를 ‘호주댁’이 부탁하여 보내준 ‘호주기’라고 부르던 시절이다. 이런 낭설(浪說)에는 그러나 사실적 근거가 작은 조각처럼 숨어 있는 경우가 있다.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이승만(李承晩) 초대(初代) 대통령과 함께 남북한에 걸쳐 사는 대한민국 8000만 국민의 생존과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그는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原爆) 투하를 결단, 한민족(韓民族)을 해방시켰고 2년 뒤엔 소련의 팽창에 대응한 트루먼 독트린 선포로 반공노선을 분명히 했다. 1948년에는 대한민국 건국에 유엔이 산파 역할을 하도록 했다. 그 2년 뒤 북한군 남침 때는 즉석에서 미군 파병을 결단했으며, 그해 가을 중공군의 남침으로 유엔군이 총퇴각할 때 한국 사수(死守) 정책을 고수했고, 미국의 엄청난 경제력을 총동원한 본격적인 대소(對蘇) 봉쇄 작전으로 그 40년 뒤 소련제국이 무너지는 길을 열었다. 적어도 세 번 한국인을 살린 셈인데 한국에선 푸대접을 받는다. 트루먼이 맥아더의 원폭 투하 요구를 거절, 북진(北進) 통일이 좌절되었다고 오해하는 한국인들은 맥아더를 치켜세우기 위하여 트루먼을 깎아내린다. 이런 풍조의 반영이 인천 자유공원에 당당히 서 있는 맥아더 동상과 임진각 한구석에 초라하게 버려진 트루먼 동상일 것이다.
 
 
  자수성가한 기업인의 꿈
 
이승만·트루먼 대통령 동상 제막식을 알리는 플래카드. 민간 주도로 만든 동상이 다부동에 들어서는 데에는 경북도와 칠곡군의 협조가 있었다.
  냉전(冷戰)에서 자유세계가 이기는 데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고 하여 20세기 3대 전쟁 중 하나로 꼽히는 한국전쟁의 결전장 경북 칠곡군 다부동(多富洞)에, 휴전 70주년을 맞은 올해 이 전쟁의 두 최고사령관 이승만·트루먼 대통령의 동상이 세워져 7월 27일 제막식을 가진다. 광화문 광장의 세종대왕 동상 등 한국 제1의 기념물 조각가로 꼽히는 김영원(金永元) 선생이 빚은 높이 420cm 대작이다. 민간이 주도하여 만든 동상을 국가(경북도, 칠곡군)가 기증받아 세웠다는 점에서 순수한, 그래서 모범적인 기념물 건립 사례로 남을 것이다.
 
  두 동상을 만든 ‘이승만·트루먼·박정희동상건립추진모임(동건추)’은 앨트웰민초(民草)장학회 설립자 김박(金博) 앨트웰텍 회장의 발의(發議)로 2016년 5월 2일 발족한 이후 오늘의 번영과 자유를 있게 한 세 위인의 동상을 세우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해 왔다. 민간인의 정성을 모으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김박 회장은 소년가장 출신의 자수성가한 기업인인데 “내가 먹고살게 된 것은 이 세 분 덕분이다”면서 감사의 표시를 하려고 했다. 2017년 11월 14일의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탄생 100주년을 맞아 서울 상암동에 있는 박정희대통령기념관에 박정희 동상을 기증, 세우려 했으나 반대 세력에 휘둘린 당국의 비협조로 아직까지 성사되지 못하고 있다(그해로 예정되었던 박정희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 발행도 취소되었다).
 
  동건추는, 2019년부터 이철우(李喆雨) 경북도지사와 접촉, 이승만·트루먼 대통령 동상을 다부동 전적지에 세우기로 합의, 주민 설득과 행정적 절차를 진행해 왔다. 한국 현대사를 긍정하고 한미동맹을 강화하는 윤석열(尹錫悅) 정부가 들어서고, 마침 휴전 및 한미동맹 70주년을 맞는 2023년 7월 27일에 두 영웅의 동상을 적지(適地)에 세우게 된 것은 역사적 의미를 더욱 깊게 한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듯이 다부동에 선 두 동상도 투쟁의 결과물이다.
 
 
  트루먼 푸대접
 
2009년 필자가 찍은 트루먼 대통령의 동상 사진. 지금은 평화공원 기념비 광장으로 옮겨졌다.
  10여 년 전 필자는 임진각의 평화공원을 찾아가 관리인에게 “여기 트루먼 동상이 있다는데 어디죠?”라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그런 게 있다고요?”였다. 작년 이곳을 찾은 이하원 《조선일보》 논설위원도 같은 경험을 했다고 한다.
 
  〈임진각 주변 어느 곳에도 트루먼 동상 안내판이 없었다. 10여 분간 여기저기를 찾아 헤매다가 간신히 동상을 발견했다. 변색이 진행되고 칠이 벗겨지고 왕거미들이 집을 짓고 있었다.〉
 
  이하원 논설위원은,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가, 〈해리 S. 트루먼-평범한 인간의 비범한 리더십〉에서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서 한국인들의 운명에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고 평하면서 트루먼을 “대한민국의 대부(代父)”라고 불렀다는 점을 소개하면서 동상이 거미들의 놀이터가 되게 한 것을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고 개탄했었다.
 

  미국 미주리주 인디펜던스에 있는 트루먼 도서관 관장을 역임한 마이클 디바인 씨는 2015년 8월 4일 《코리아 타임스》에 “트루먼 기념물을 세울 때이다”는 제목의 칼럼을 실었다. 그는 1945년과 1950년에 트루먼이 내린 결단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번영하는 한국은 존재할 수가 없는데 맥아더 동상만 있고 트루먼 동상은 없는 게 아쉽다고 했다. “트루먼과 그 행정부의 업적을 무시하는 것은 한국인 그 자신들이 스스로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박탈하는 것이다”고 칼럼을 마무리했다.
 
  이런 점에서 다부동에 민관(民官) 협력으로 세워진 이승만·트루먼 동상은 한국인들이 배은망덕(背恩忘德)하다는 비판을 면하게 해줄 것이다.
 
 
  위대한 인간
 
이승만 대통령 동상 비문에는 6·25 전쟁 발발 직후 “남녀노소가 몽둥이와 돌멩이를 들고서라도 싸울 것”이라고 한 이 대통령의 말이 새겨져 있다.
  이승만·트루먼은 위대한 지도자이기 전에 위대한 인간이었다. 20세기 인류에 대한 최대 도전이었던 국제 공산주의를 무너뜨리는 데 손잡았던 동지였으며, 기독교와 반공(反共)자유민주주의 신념을 공유한 불굴의 투사였지만 그 바탕은 소박하고 겸손한 인격체였다.
 
  1875년에 출생한 이승만은 1884년에 태어난 해리 S. 트루먼보다 아홉 살이 많았고 1950년 한국전으로 연결되기 전까지는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다(트루먼은 고졸이고 이승만은 박사 출신). 이승만은 ‘최초’와 인연이 많다. 대한민국과 상해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 최초의 박사, 최초의 일간신문(《매일신문》) 대표, 최초의 공산주의 비판자, 미국 대통령(시어도어 루스벨트)을 만난 최초의 한국인, 미 의회 최초 연설, 최초의 본격적 정치평론서(《독립정신》) 저자, 최초의 국제적 베스트셀러 작가(《Japan Inside Out》) 등등. 그는 개화운동가, 독립운동가, 교육자, 건국 지도자, 전쟁 지도자, 근대화 혁명가, 시인[漢詩], 최고의 명필(名筆), 그리고 십자가를 진 한 어린양이었다. 개화, 독립, 건국, 호국, 근대화의 주역이었던 그가 거대한 90년의 생애(生涯)를 마감한 곳은 조국이 아니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0년 6월 25일 북한군 남침 보고를 받은 직후 존 J. 무초 미국 대사를 불러 한 말 “남녀노소가 몽둥이와 돌멩이를 들고서라도 싸울 것이다”는 국제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총력전(總力戰) 선포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그해 7월 19일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전쟁은 남과 북의 싸움이 아니라 소수의 공산당 대(對) 한민족(韓民族) 전체의 대결’이라고 한 것이나, 김일성 세력을 ‘공산파쇼 집단(Comminazis)’이라 조롱하고, 유엔이 국경을 뛰어넘어 세계시민 정신으로 세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싸우고 있다고 정의(定義)한 것은 남침을 세계사적 차원의 사상전쟁으로 보았다는 이야기이다.
 
 
  “The buck stops here”
 
트루먼 대통령은 “The buck stops here(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를 자신의 모토로 삼았다.
  트루먼 대통령 또한 한국전에 대한 관점이 이승만과 일치하였다. 미국 미주리주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육군사관학교를 지원했으나 시력이 나빠 포기한 뒤로 대학에 가지 않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던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에서 포병 대위로 싸웠다. 지방 판사로 뽑히는 등 지역 정치의 바닥에서 출발, 상원의원이 된 뒤엔 제2차 세계대전에 따른 군수(軍需) 사업의 효율성을 점검한 ‘트루먼 위원회’를 이끌어 명성을 얻었다. 1944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고, 이듬해 4월 루스벨트 급서(急逝)로 대통령직을 인수했다.
 
  트루먼은 솔직 담백한 성격 그대로 결정적 시기에 신속한 결단으로 전후(戰後) 세계질서를 만들어갔다. 그가 결정한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의 타이밍은 한반도의 운명을 갈랐다. 일찍 투하했더라면 소련의 참전을 막아 분단되지 않았을 것이고 늦게 떨어뜨렸다면 소련군은 부산까지 내려와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되었을 것이다.
 
  1945년 12월 이승만은 전후(戰後) 세계 정치 지도자로선 처음으로 공산당을 문명 파괴 세력으로 규정, 결별을 선언하는데 트루먼 또한 공산주의를 만악(萬惡)의 근원으로 본 사람이었다(두 사람은 이상주의자 우드로 윌슨 숭배자였다는 공통점도 있다). 1947년 소련의 공산주의 확산 전략에 정면 대응을 선포한(트루먼 독트린) 그는 소련의 위협에 대비한 서유럽 부흥계획인 마셜 플랜, 베를린 봉쇄에 대한 대규모 공수작전, NATO 출범 등을 밀어붙이는데 이는 대소(對蘇) 봉쇄작전과 냉전(冷戰)의 시작이었다.
 
  1948년, 트루먼 대통령은 유엔이 한국과 이스라엘 건국에 산파 역할을 하도록 했다. 그해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트루먼은 미국 역사상 가장 극적인 역전승(逆轉勝)으로 재선(再選)되었다(그의 부인조차 낙선을 예상했고 《시카고 트리뷴》은 개표가 시작되자마자 ‘트루먼이 낙선했다’는 기사를 찍어 희대의 오보를 했다). 이 선거는 한국인의 운명에도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집무실 책상 위에 명패 대신 놓아둔 “The buck stops here(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남침에 대한 전광석화(電光石火) 같은 대응을 예고했다. 결단의 사나이 트루먼이 북한군이 남침한 그날 백악관의 주인으로 있도록 한 미국인들의 선택이 한국과 자유세계를 살렸다.
 
 
  “개자식과 같은 마적단의 습격 사건”
 
트루먼 대통령 동상 비문에는 6·25 발발 소식을 듣고 트루먼 대통령이 했던 “딘,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개자식들을 막아야 합니다(Dean, we've got to stop those sons of bitches no matter what)”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트루먼 대통령은 6월 25일 딘 애치슨 국무장관의 전황(戰況) 보고를 받자 “딘,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개자식들을 막아야 합니다(Dean, we've got to stop those sons of bitches no matter what)”고 말하고 미군 파병을 결단한다. “알지도 못하는 나라의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하여” 연인원 약 180만 명의 군인들을 보내 약 15만 명이 죽고 다쳤다. 이는 세계 최대 강국이 아무런 영토적 이해관계가 없는 작은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자국(自國)의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투입한,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사건이었다. 당시 트루먼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클라크 클리포드(나중에 국방장관 역임)는 회고록에서 “나는 제국을 보존한다는 목표가 아니라 이상(理想)을 지키기 위해 지구의 반 바퀴나 떨어진 곳의 전쟁에 참여할 나라가 (미국 말고는) 지구상에 달리 없다고 생각했다”고 썼다.
 
  트루먼은 나중에 한국전 참전 결단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결정보다 더 어려웠다고 고백했다. 그는 1950년 6월 29일 기자회견에서 유엔군 기치하의 파병이 갖는 합법성과 정당성을 정확하게 규정했다.
 
  “한국은 유엔의 도움으로 세워졌습니다. 유엔 회원국들이 공인(公認)한 정부인데 마적단으로부터 불법적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유엔 회원국들은 한국에 대한 마적단 습격 사건을 진압하기 위하여 한국을 구원하기로 하였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김일성의 남침을 “개자식과 같은 마적단의 습격 사건”으로 부른 셈이다. 자존심이 강한 이승만·트루먼은 김일성을 스탈린의 꼭두각시로 생각하였으므로 ‘김일성’이란 이름을 거의 입에 담지 않았다. 이승만은 김일성을 규탄해야 할 대목에선 스탈린을 비판했다. “나는 스탈린을 상대하지 너 같은 인간은 무시한다”는 경멸감이 느껴진다. 링컨도 남북전쟁 때 ‘전쟁’이란 말을 거의 쓰지 않았고 ‘반란’이라고 했다. 이승만, 트루먼, 링컨, 레이건, 닉슨, 박정희 같은 위대한 지도자들은 이념적이고 용어 선택이 정확하다.
 
  북한노동당 정권을 ‘마적단’이라고 부른 또 다른 이로 김정일의 명령으로 납치되었다가 살아 돌아온 신상옥(申相玉) 감독도 있다. 1989년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김정일이 주최한 파티에서 간부들이 남한 유행가도 부른다는데 어떤 분위기였습니까”라고 물었다. 신 감독은 “딱 마적단이에요. 북한이란 마을을 점령, 분탕질하는 마적단”이라 했었고 이게 가장 정확한 규정임을 뒤에 알게 되었다.
 
 
  迂廻전략
 
  1950년 8월에 전개된 다부동 전투는 한미군(韓美軍)이 최초의 연합작전으로 북한군 주력을 저지, 부산 교두보를 지켜냄으로써 인천상륙작전과 북진의 시간을 번 세계사적 결전이었고 한미동맹을 예약한 승리였다. 한미군을 주력으로 한 유엔군의 항전(抗戰)으로 대만이 살았고 일본이 경제 부흥, 서독이 재무장, NATO가 군사동맹체로 강화되었으며, 미국은 군사비를 네 배로 늘려 본격적인 대소(對蘇)봉쇄 정책에 나섰고, 한국은 ‘자유의 방파제’ 덕분에 번영의 길을 달려 그 40년 뒤 소련 및 동구 공산주의체제가 무너졌다. 1989년 동구 공산권 붕괴의 한 촉매제는 88서울올림픽의 ‘벽을 넘어서’ 정신이었다. 이승만·트루먼은 거대한 우회(迂廻)전략으로 소련제국을 무너뜨린 대전략가였다.
 
  이승만과 트루먼은 한니발의 칸나에식 우회작전을 폈다. 스탈린의 소련이 김일성을 하수인으로 삼아 자유세계 전체에 대한 도전장을 던졌다는 인식하에서, 국제연합군을 조직하여 정면대응, 중앙돌파를 저지한 뒤 평화의 시간을 벌고 악의 제국을 배후에서 무너뜨리는 우회로를 선택했던 것이다. 한국전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북한군이 무너지자 중공군이 개입하고 이를 소련 공군이 지원, 판이 커졌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으로 무승부가 된 것 같았으나 이승만·트루먼과 뒤를 이은 두 나라 지도자들은 자유와 돈을 무기로 삼아 평화공세를 폈다.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이, 로마군의 중앙군을 묶어놓고 기병을 동원한 측면 우회 포위 공격으로 로마군을 전멸시킨 칸나에 전투의 개념을 범(汎)지구적 규모로 확대시킨 대전략이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 진영은, 공산군 남침을 저지하고 소련과의 핵전쟁을 피하면서 자유세계가 가진 우월한 힘을 총동원, 소련 공산 제국의 경제적 기반을 흔들어 악의 제국이 핵폭탄을 껴안고 총 한 방 쏘지 못하고 무너지도록 한 것이다. 냉전(冷戰) 승리의 기초를 만든 이승만·트루먼과 마무리를 잘한 레이건 및 부시 대통령이야말로 냉전 시대의 최고 전략가였다. 중국과 소련을 떼어내어 세계 판도를 바꾼 닉슨 대통령은 부통령 시절 한국을 방문, 이승만을 만난 뒤 이 노인의 전략 감각에 감탄했다(회고록).
 
  〈나는 한국인의 용기와 인내심, 그리고 이승만의 힘과 지혜에 깊은 감동을 받고 떠났다. 나는 이 대통령이 공산주의자를 상대할 때는 ‘예측 불가능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통찰력 있는 충고를 한 데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내가 그 후 더 많이 여행하고 더 많이 배움에 따라서 그 노인의 현명함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승만은 미국의 꼭두각시가 아니었다”
 
마크 클라크 장군.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에 서명한 유엔군 사령관은 마크 W. 클라크 대장이었다. 그는 전역(轉役)한 뒤 《다뉴브에서 압록강까지》라는 회고록을 써 자신이 상대하였던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생생한 관찰기를 남겼다. 유엔군, 특히 미국의 도움으로 전쟁을 치르면서도 자존심을 세우면서 고집스럽게 국익(國益)을 추구하는 노(老)투사의 모습을, 존경심을 깔고 객관적으로 묘사하였다. 그는 휴전을 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 때문에 많은 곤욕을 치렀지만 기술(記述)은 결코 적대적이지 않다. 이승만 대통령의 애국심과 교양, 그리고 용기에 감동한 사람처럼 썼다.
 
  〈한국전을 통하여 이승만은 아시아에서 장제스(蔣介石), 네루와 버금가는 위상(位相)을 확보하였다. 그는 아시아의 반공국가 및 비(非)공산국가군(群)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공산주의자들과의 투쟁을 통하여서뿐 아니라 때로는 미국과 맞서기를 서슴지 않는 행동을 한다는 사실을 통하여 그런 지도자가 되었다. 이승만은 꼭두각시가 아니었다. 그는 아시아인이었다. 그는 강력한 지도자였다. 성장하는 강력한 군대를 갖고 있었다. 그는 반공지도자일 뿐 아니라 반(反)식민지 지도자였다. 많은 아시아 사람에게 이승만은 극동 지역에 존엄과 자존심을 가져다준 인물이었다. 이런 이미지는 그가 동맹 강국들의 의지(意志)에 끌려가지 않고 오히려 그들과 맞서 전쟁을 자신의 뜻대로 이끌고 있다는 점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평판과 자존심으로 그는 다른 아시아 정부를 상대할 때도 정상급(頂上級)보다 낮은 직급자는 만나려 하지 않았다.〉
 
 
  한국전의 정치적 負傷者
 
  1950년 11월 중공군의 본격적 개입으로 유엔군이 총퇴각을 시작하고 맥아더 사령관은 미군 철수를 거론하는데 영국마저 한국 포기를 설득할 때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이승만) 편에 섰다. 맥아더에게 “싸우다가 져서 철수하는 건 몰라도 미리 철수는 안 된다”고 못 박았고 애틀리 영국 수상에겐 “미국은 친구가 어려울 때 버리는 나라가 아니다. 미군이 물러나면 우리를 믿고 싸웠던 한국인들이 다 죽는다”고 했다.
 
  그는 휴전협상의 가장 큰 쟁점이었던 반공포로 문제에서도 인도주의적 원칙을 견지, ‘본인 의사에 따른 송환 원칙’을 밀어붙였다. 이 때문에 협상이 지연되어 미군 전사자가 늘었지만 그는 이미 파병 결단 때 ‘자유의 대가는 비쌀 것’이라 예견했었고 그 부담을 안았다. 트루먼은 “우리는 인간들을 넘겨주어 도륙당하게 하는 방식으로 휴전을 사지는 않을 것이다”고 선언해버렸다. 휴전 협상 기간 중 전사한 미군은 약 2만 명이다.
 
  협상이 질질 지연되면서 38도선을 따라 참혹한 고지전(高地戰)이 계속되었고 사상자가 늘어나자 트루먼에 대한 미국 여론의 지지도 떨어지고 공화당의 비판도 거세졌다. 답답한 트루먼은 1952년 1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공산 정권과 상대하는 건 정직한 사람이 마약 조폭 조직 두목과 협상하는 것과 같다. 중국이 휴전을 요구한 이유는 시간을 벌어 일선에 물자를 보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올바른 접근법은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닐까? 열흘간의 시한을 설정, 최후통첩을 하는 것이다. 모스크바에 ‘중국의 해안을 봉쇄할 것이며, 만주의 모든 군사시설을 파괴할 것이고, 방해하면 어떤 항구나 도시도 없애버릴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이를 피하려면 한반도에서 중공군이 철수해야 하고, 러시아는 중국에 대한 전쟁물자 지원을 중단해야 한다’고 통보하는 것이다. “자유세계는 너무 오래 고통을 당했으니 만약 최후통첩에 응하지 않으면 전면전을 하겠다. 이번이 소련 정권이 죽느냐 사느냐를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다”-이렇게 할까?〉
 
 
  출마 포기
 
  《전쟁 대통령들》이란 책에서 이 일기를 소개한 저자(著者) 마이클 베슐로스는 스트레스를 받은 트루먼의 판타지라고 평했다. 1950년 가을의 중공군 개입은 한국의 북진 통일을 저지했을 뿐 아니라 트루먼과 맥아더의 운명도 바꿔놓았다. 중공군 개입 없이 한반도가 통일되었더라면 1952년 대통령 선거에선 현직 민주당 대통령 트루먼과 공화당 후보 맥아더의 대결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중공군 개입을 예고하는 수많은 정보를 묵살한 맥아더는 중공군 공세에 밀리자 중국 본토 봉쇄, 만주폭격 등 확전(擴戰)을 요청하면서 한국 포기 카드까지 꺼내 트루먼에게 대들고, 영국의 노동당 정부 또한 확전 반대는 물론 원자폭탄을 쓰지 말라면서 한국을 버리자고 압박했다. 트루먼은 1950년 12월 15일 2차 세계대전 때도 취하지 않았던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특별연설에서 전세(戰勢)가 불리해졌음을 인정하고 미군의 현역 병력을 350만 명까지 두 배 이상 늘리고 전쟁물자 생산도 가속화할 계획이라면서 인플레는 피할 수 없고 “여러분은 세금을 더 내고 공장에서, 광산에서, 더 많은 시간을 일해야 할 것이며 문명의 미래는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했다. 국력을 총동원, 다른 방법으로 공산당을 꺾겠다는 전략의 피력이었다. 40년 뒤 국제공산주의가 무너지도록 한 결단이었다.
 
  전선이 고지전으로 교착되자 파병을 결단했을 때 압도적 지지를 보였던 여론도 돌변했다. 1951년 1월엔 지지율이 36%까지 떨어졌고 한국 파병에 대해 잘못했다는 여론이 49%, 잘했다는 여론은 28%였다. 트루먼이 다음 해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 아이젠하원와 대결할 경우 59대 28%로 질 것이란 예측도 나왔다.
 
  1952년 3월 29일 트루먼 대통령은 민주당 행사에 나와 불출마 발표를 했다. 그는 “공화당원들은 한국에서 철수하면 인기가 오를 것이라 하고 다른 이들은 원자폭탄을 터트려야 한다고 말한다”면서 “만약 원자폭탄이 투하된다면 큰소리치는 이들이 제일 먼저 방공호로 뛰어갈 것이다”고 했다. 이어서 그는 “나는 오랜 시간 나라를 위하여 효율적으로, 정직하게 봉사해 왔다고 생각하는데 더 이상 후보 지명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 말이 갑자기 나와서 민주당원들은 영문도 모르고 박수를 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트루먼은 맥아더와 함께 한국전의 정치적 부상자(負傷者)가 되었다. 그가 물러날 때 지지율은 22%로 탄핵 직전 사퇴한 닉슨보다도 낮은 역대 최저였다.
 
 
  트루먼, 퇴임 연설에서 冷戰 승리 예고
 
  냉전 승리 후 트루먼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는 극적으로 높아져 요사이는 역대 45명의 미국 대통령 중 5~9위이다. 1953년 1월 15일 트루먼은 퇴임 직전의 작별 연설에서 승리를 예언했다.
 
  〈역사는 나의 재임 기간에 대해서 냉전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그림자를 드리운 시기라고 기억할 것입니다. 하루도 이런 전면적 투쟁의 영향을 받지 않고 지낸 날이 없었습니다. 그 배후엔 항상 원자폭탄이란 존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나의 재임 기간을 냉전의 시작이라고 본다면, 이 8년간 그 냉전을 이길 수 있는 진로(進路)가 설정되었다는 점을 인정할 것입니다.〉
 
  왜 미국 정부는 한국전을 냉전 승리의 시작으로 보는가? 미 국방부 장관실 공간사(公刊史)인 《전쟁의 시련(1950~53)[The Test of War, History of the Office of the Secretary of Defense]》은 결론 부분에서 한국전이 세계사의 흐름에 끼친 영향을 이렇게 요약하였다.
 
  〈한국전은 20세기 후반의 세계정세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제2차 세계대전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주장할 만하다. 특히 중공군의 1950년 11월 대공세는, NSC-68(미국 국가안보회의 전략문서)이 건의한 정책과 재무장 방안의 채택을 합리화시켜주었다.
 
  트루먼 행정부는 소련이 북한과 중국의 공격을 사주하였으며 다른 곳에서도 그런 짓을 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미국은 유럽의 NATO 맹방(盟邦)들을 지키는 것을 최고의 우선순위로 두었다. 한국전은, 늘어가는 소련의 핵무기 재고(在庫)에 대응하여 미국이 핵무기 제조와 운반 수단(폭격기, 미사일, 잠수함)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하였다.
 
  평화시에도 외국과 군사동맹(NATO)을 유지한다는 것은 미국 역사상 가장 이례적인 외교 정책이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미국과 대부분의 유럽 회원국조차도 NATO를 서류상의 존재로 인식하였다. 아시아에서 일어난 한국전쟁이 유럽에 대한 소련의 위협을 증폭시켜 NATO 회원국들로 하여금 통합 지휘 체제를 구성하고 더 많은 군사력과 자원을 이 동맹에 제공하도록 만든 것은 일종의 패러독스이다.〉
 

  한국전은 NATO와 다른 나라에 대한 미국의 군사 원조를 세 배나 늘리게 하였다. 1953~54년 미국 방위비(원자력 에너지 및 기타 비국방부 예산 포함)는 연방 예산의 3분의 2를 차지하게 되었고, 병력은 두 배 이상 늘었으며, 한국전에 자극받은 미국인들은 평화시에도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게 뒷받침하였다.
 
  북한군 남침 직전인 1950년 6월 미군 병력은 146만 명이었고, 해외 주둔은 그 20%인 28만1000명이었다. 3년 뒤인 1953년 6월 30일 현재 미군은 355만5000명, 해외 주둔은 27%인 96만3000명으로 늘었다. 독일, 일본, 한국의 주둔 병력이 가장 많았다. 외국에 주둔하는 미군과 관련한 민간인들과 그 가족의 숫자는 130만 명에 달하였다.
 
 
  美 의회 연설에서 퇴임한 트루먼에게 감사
 
  휴전과 함께 온 축복인 한미동맹은 함께 피 흘린 두 나라의 약속이었다. 동건추는, 다부동 이승만·트루먼 동상에 “맹방의 약속, 이제는 자유통일이다”는 말을 새겼다. 한미동맹은 트루먼의 후임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에 성사되었지만 그 토대를 만든 이는 이승만·트루먼이었다. 1954년 7월 28일, 미국을 방문한 이 대통령은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에서 퇴임한 트루먼 전 대통령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나도 여러분처럼 워싱턴이나 제퍼슨이나 링컨에게서 영감(靈感)을 받아왔습니다. 나도 여러분처럼 여러분의 영광스러운 선조들이 전 인류를 위하여 추구했던 자유를 수호하겠다고 스스로 맹세해 온 사람입니다. 저는 한국인이지만, 교육과 정서를 놓고 봤을 때는, 미국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고립무원(孤立無援)한 나라를 파멸로부터 구출하여주었으며, 그 순간 진정한 집단안전보장(集團安全保障)의 횃불은 일찍이 없이 찬란히 빛났던 것입니다. 우리는 한국 파병이란 획기적 결정을 내림으로써 우리가 바다로 밀려나지 않게 구원해준 트루먼 전 대통령에게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나는 이 기회에 미군의 어머니들에게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깊은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장 암담한 처지에 놓여 있던 시기에 그들은 육·해·공군 및 해병대에서 복무하는 자식을, 남편을, 그리고 형제를, 한국으로 보내주었습니다. 두 나라 군인들의 영혼이 우리나라의 계곡과 산등성이에서 함께 하느님 앞으로 올라갔다는 사실을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추모하듯이 전능의 신도 그들을 쓰다듬어주시기를 빌어 마지않습니다.”
 
 
  최초이자 마지막 만남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8월 5일 미주리주 인디펜던스의 트루먼 전 대통령 자택에서 트루먼 전 대통령과 만났다.
  1954년 8월 5일 오전, 이승만 대통령 일행은 미 공군기 편으로 미주리주 캔자스시티에 도착했다. 일행은 국무부가 내준 차편으로 인디펜던스의 트루먼 자택으로 출발했다. 트루먼 내외가 현관 앞으로 나와 일행을 맞았다. 집 앞 길거리에서 약 500명의 주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승만 대통령이 트루먼 전 대통령에게 말했다.
 
  “참으로 반갑습니다. 나는 귀하가 미군을 파병해 우리가 생존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결단을 내리신 귀하에게 나와 한국 국민의 변치 않는 감사를 표합니다. 귀하의 결정은 우리 국민의 사기를 북돋아줬고, 우리가 공산주의자들과 싸워 물리칠 수 있도록 해줬습니다. 한국인 모두가 이를 고마워하고 있으며, 이러한 감사의 뜻을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트루먼과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가 환담한 후 밖으로 나온 이승만 대통령은 집 앞에 모인 군중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이 세계를 자기네 통치하에 놓기 위해 밤낮없이 준동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마을에서, 학교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가정에서도 그들과 투쟁해야 합니다.”
 
  이어 이승만 대통령은 옆에 있는 트루먼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나는 1950년 비 오는 날 깜깜한 새벽, 기도했고 주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싸우지 않고 공산주의자들을 이 세상에서 몰아낼 방법은 없습니다. 부디 건강하세요.”
 
  두 사람이 만난 것은 이것이 최초이자 마지막이었다. 트루먼은 한국에 온 적이 없다. 이런 그들이 69년이 흘러 2023년 7월 27일 동상으로 다부동에서 재회(再會)한다.
 
 
  한국 유학생과 트루먼의 만남
 
한종우 전 국민대 이사장은 미국 유학생 시절 트루먼 대통령과 만났다.
  1957년 여름 미국 캔자스대학교 대학원에 유학 중이던 한종우(韓鍾愚, 故人, 동양통신 전무, 코리아 헤럴드 사장, 국민대학교 이사장, 성곡언론재단 이사장 역임)씨 등 30여 명의 유학생들이 캔자스시티에 있는 연방은행 건물 내 트루먼 전 대통령 사무실을 찾아갔다. 기념도서관이 서기 전이라 캔자스시티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학생들은 백악관 시절부터 비서로 일했던 할머니의 안내로 집무실로 들어갔다. 학생들이 도열하여 인사를 하니 트루먼 대통령은 일어나서 학생들을 쭉 훑어보다가 한종우씨 앞에 섰다.
 
  “어디서 왔어요?”
 
  한종우씨는 트루먼이 자신을 일본 학생으로 생각하는 듯하여 큰 소리로 말했다.
 
  “각하, 저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트루먼은 자신의 파병 결단으로 살아난 나라에서 온 젊은이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란 듯, 반갑게 손을 잡고 앞으로 끌었다. 책상 위에 놓인, 자개로 만든 담배 상자를 가리키면서 자랑하듯이 말했다.
 
  “이건 당신 나라의 이승만 대통령이 나에게 준 겁니다.”
 
  그러곤 기념사진을 찍었다. 자개 담뱃갑은 아마도 이승만 대통령이 트루먼 자택을 방문하였을 때 선물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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