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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발굴

제2차 인천상륙작전을 아십니까?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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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년 2월 10일 한국 해군 수병 70명, 해병대 100명이 인천 만석동 해안에 상륙
⊙ 당초 유엔군의 서울 공격에 앞선 위장상륙작전으로 기획되었으나, 인천 완전 탈환
⊙ 인천항 통한 군수물자 지원 가능해지면서, 3·15 서울재탈환 등 유엔군의 반격작전에 기여
제2차 인천상륙작전의 주역들. 왼쪽부터 노명호 소령, A. E. 스미스 제독, 통역관 최병해 대위, 김종기 소령, 최영섭 소위.
  작년에 개봉한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약 705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그런데 잘 알려지지 않은 또 하나의 인천상륙작전이 있다. 1951년 2월 10일 한국 해군·해병대가 벌인 제2차 인천상륙작전이다. 이 작전에 투입된 병력은 170명에 불과했다.
 
  맥아더 원수가 지휘했던 1950년 9월 15일의 제1차 인천상륙작전에 연합군 함정 261척과 7만1339명의 상륙군이 동원됐던 것을 생각하면 비교도 할 수 없는 소규모였다. 하지만 이 작전에 투입된 해군·해병 특공대는 인천시를 탈환했다. 이 작전은 그해 3월 15일 유엔군이 서울을 재탈환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유엔군, 한국 철수 검토
 
  1950년 10월 25일 청천강 인근에서 중공군과 첫 전투를 벌인 후 국군과 유엔군은 후퇴를 거듭했다.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내준 유엔군은 1월 8일에는 평택-안성-제천-삼척을 잇는 북위 37도선까지 후퇴했다. 설상가상으로 1950년 12월 23일 미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1950년 여름 낙동강 교두보를 지켜낸 전선사령관의 죽음은 유엔군 장병들과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워커 중장의 후임으로 부임한 사람은 매튜 리지웨이 장군이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전선에서 용명(勇名)을 떨쳤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말했다.
 
  “대통령 각하, 여기 오게 되어서 기쁩니다. 저는 여기 머물려고 온 것입니다.”
 
  유엔군이 한국을 버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노(老)대통령은 얼굴을 활짝 폈다. 이어서 리지웨이 장군은 1951년 1월 21일 〈우리는 왜 여기서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라는 제목의 훈령(訓令)을 내려, 유엔군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하지만 그 이면(裏面)에서는 유엔군의 한국 철수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미 1950년 12월 6일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에게 ▲만주폭격 ▲중국 해안 봉쇄 ▲장제스군 투입 ▲증원군 파견 등을 요구하면서 이런 요구가 거부될 경우에는 전멸을 피하기 위해 유엔군을 일본으로 철수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1950년 12월 29일 맥아더에게 보낸 작전지침에서 “단계적인 방어선에 따라 전투를 하면서 후퇴하다가 금강방어선에서 중공군이 우세한 전력을 집결시켜 유엔군을 압도할 것 같다고 판단하면 유엔군을 일본으로 철수시키도록 지시를 내리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1·4 후퇴 후 상황은 더욱 급박해졌다. 1951년 1월 9일 미 합참은 맥아더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한반도에서 철수하는 것이 병력과 물자의 심각한 손실을 막기 위하여 꼭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일본으로 철수해도 좋다”고 했다. 1월 12일 미 합참은 한국 정부와 군인, 경찰, 공무원 및 그 가족 100만명을 제주도로 철수하는 계획을 검토했다. 1월 13일에는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맥아더에게 친서를 보내 확전(擴戰)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맥아더, “인천항만의 가치는 지대”
 
1951년 4월 3일 강원도 양양 전선을 시찰하는 맥아더 원수와 리지웨이 중장(뒤 왼쪽).
  미국이 한반도 철수까지 고려하게 된 것은 서방세계의 전력(戰力)이 한국에 집중된 틈을 타서 소련이 서유럽을 침공할 것을 두려워한 영국·프랑스 등 동맹국들이 미국에 한국을 포기하자고 졸라댄 이유가 컸다. 유엔총회 의장과 캐나다, 인도 대표로 구성된 휴전위원회는 1951년 1월 13일 ▲현 위치 휴전 ▲평화회복을 위한 정치회담 개최 ▲한반도에서의 모든 외국군의 점진적 철수 ▲한반도 전체를 관리하기 위한 준비 절차 착수 등을 내용으로 하는 휴전안을 제시했다. 사실상 대한민국 포기를 전제로 하는, 중공과 북한에 유리한 내용이었다. 한창 승기를 타고 있던 중공은 1월 17일 이를 거부했다. 마오쩌둥의 오만이 대한민국을 구한 것이다. 유엔은 2월 1일 중공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유엔에서 이런 외교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 한반도에서도 전기(轉機)가 마련되고 있었다. 유엔이 중공에 휴전안을 제안한 다음 날인 1월 14일 리지웨이 장군은 콜린스 육군참모총장, 반덴버그 공군참모총장, 스미스 CIA 국장 등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작년 말 워커 장군 후임으로 부임한 후,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지금 합참은 미군의 일본 철수를 계획하고 있다.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철수한다는 것은 패배를 의미한다. 내 자신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철수할 때 철수하더라도 적과 접촉을 통해 적의 능력과 의지를 확인하겠다.”
 
  이에 따라 리지웨이 장군은 미 제25사단 제27연대에 위력수색정찰을 명령했다. 존 H. 마이클리스 대령이 지휘하는 이 부대는 1월 15일 새벽 전차, 포병, 공병 및 항공지원을 받으면서 오산에서 수원까지 진출했다. 이들과 부딪친 중공군 부대는 약간 저항하다가 북으로 도주했다.
 
  중공군의 전투력이 생각보다 시원치 않다는 것을 확인한 유엔군은 자신감을 얻었다. 리지웨이는 5개 사단을 동원해 북진반격작전에 들어갔다. 유엔군은 1월 24일 원주를 탈환했다. 1월 31일~2월 9일 유엔군은 군포, 안양, 수리산, 모락산, 청계산 및 관악산 일대까지 진출해 중공군과 격전을 벌였다. 국군 제1사단 15연대는 같은 날 노량진-영등포로 이어지는 선까지 진출했다. 중공군은 2월 6일 주력을 한강 이북으로 철수시키는 한편, 관악산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서울방어를 위해 인천에 주둔하고 있던 북한군 제17사단이 관악산으로 이동했다.
 
  이런 승세(勝勢)에도 리지웨이는 더 이상의 북진을 망설였다. 그는 맥아더에게 보낸 전문(電文)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강 이북으로의 공격은 현명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위험 요소가 너무 많습니다. 중공군의 계략에 말려들어 갈 염려도 있습니다. 8군의 능력도 미치지 못합니다. ‘서울탈환’은 군사적 경지로 보면 ‘바보짓’이라고 생각됩니다.〉
 
  맥아더는 다음과 같은 답신을 보냈다.
 
  〈서울탈환은 군사적으로는 유효성이 적지만 외교적·심리적 효과는 크다. 김포비행장과 인천항만의 가치는 지대(至大)하다. 인천항만과 김포비행장 확보는 보급문제를 대폭적으로 해결할 수 있고, 8군에 대한 항공지원도 증대할 것이다.〉
 
  맥아더가 말한 ‘인천항만 확보’라는 과업을 수행한 것은 바로 한국 해군과 해병대였다.
 
 
  월미도를 포격하라
 
제2차 인천상륙작전 당시 한국 해군의 기함이었던 백두산함(PC-701함).
  1·4후퇴 후 한국 해군은 인천 팔미도, 무의도, 영흥도, 덕적도, 연평도 일대의 해역(海域)을 봉쇄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기함은 PC-701함(함장 노명호 소령)이었다. PC-701함은 해군 장교 부인들이 삯바느질을 하고 장병들이 월급을 떼서 모은 돈으로 구입한 한국 해군 유일의 포함(砲艦), 1950년 6·25전쟁 발발 직후 부산에 상륙하려던 북한군 특수부대원들을 태운 적 수송선을 대한해협에서 격침시킨 바로 그 구국(救國)의 배 백두산함이었다. YMS-510정(정장 함덕창 대위), JMS-301정(정장 박기정 대위), JMS-302정(정장 홍원표 대위), JMS-306정(정장 최병기 대위), JMS-310정(정장 모예진 대위) 등이 함께 작전을 수행했다. YMS는 미국 해군, JMS는 일본 해군이 사용하던 소해정(掃海艇)으로 소구경 화포를 장착한 200~300톤급의 배들이었다.
 
  1951년 2월 1일 부산에 있던 백두산함은 유엔 해군 제95.14기동분대와 연합작전을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고 오전 6시에 출항, 다음 날 오전 덕적도 앞바다에 도착했다. 노명호 소령은 해군・해병 혼성부대를 이끌고 덕적도에 주둔하고 있던 김종기 소령을 만나 서해 도서(島嶼)의 적정(敵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 소령은 1950년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 당시 해병 2대대장으로 참전했었다.
 
  그날 오후 백두산함의 노명호 함장과 갑판사관 최영섭 소위(해군대령 예편)는 미국 순양함 CA-75 헬레나함의 초대를 받았다. 영국 순양함 벨파스트함의 작전장교도 헬레나함에 올랐다. 헬레나함의 함장이 말했다.
 
  “지금 유엔 지상군은 수원에서 한강선으로 반격작전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우리 서해 해군전대(戰隊)는 지상군 전투를 엄호하기 위해 지난 1월 25일과 28일 인천지역 적 진지에 함포사격을 실시했습니다. 맥아더 원수는 인천항을 확보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함장은 테이블 위에 월미도 지도를 펼쳤다.
 
  “이 섬에 숨어 있는 적의 포(砲)진지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701함(백두산함)이 이 지도에 표시한 표적에 대해 근접 함포사격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적이 응사하면 우리 미국과 영국 함정이 엄호사격을 해 주겠습니다.”
 
  노명호 함장이 말했다.
 
  “하겠습니다. 언제가 좋겠습니까?”
 
  “내일 (2월 3일) 정오가 좋겠습니다.”
 
  2월 3일 정오, 백두산함은 적군이 장악하고 있는 인천항 안으로 돌입, 월미도 전방 1000m 지점에서 적의 포대와 초소에 포격을 했다. 적도 즉각 응사해 왔다. 미국과 영국 순양함, 구축함 등도 적 진지를 포격했다. 작전 중 주포장 최석린 병조장이 대퇴부를 관통당하는 중상을, 조타사 임인정 수병은 경상을 입었다. 갑판사관 최영섭 소위도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최영섭 예비역 대령의 회고다.
 
  “함교에서 지휘를 하고 있는데 총에 맞은 줄도 몰랐어요. 옆에 있던 신호수가 ‘갑판사관님, 바지에 피가 가득 괴어 있습니다’라고 하기에 보니, 바지가 피에 젖어 있더군요. 미국 헬레나함에서 ‘중상자를 빨리 데리고 오라’고 해서 중상을 입은 최 병조장과 함께 헬레나함으로 가서 치료를 받았지요. 술·담배와 먹을 것을 주더군요. 헬레나 함장은 ‘701함의 용전으로 적의 화점(火點)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치하했습니다.”
 
 
  수병들로 특공대 급조
 
작전에 참가한 병사들 중 70명은 육전 훈련을 받지 않은 함정 근무 수병들이었다.
  백두산함은 월미도에서 작전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다시 덕적도에 들렀다. 덕적도 주둔 해병부대장 김종기 소령은 “그동안 수집된 정보에 의하면 인천 지역의 적은 아군의 반격 때문에 서울로 이동했으며, 시내의 적도 크게 동요를 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했다. 노명호 소령과 김종기 소령은 덕적도에 주둔하고 있는 해군·해병 혼성부대를 인천에 상륙시키기로 계획했다. 당시는 해군과 해병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아 장병들이 해군과 해병을 오고 가거나 함께 근무할 때였다. 제1차 인천상륙작전 당시에는 해병대 2대대장으로 활약했던 부대장 김종기 소령도 이때는 해군 소속이었다.
 
  노명호 소령, 김종기 소령은 2월 8일 헬레나함의 함장, 영국 순양함 벨파스트함의 작전장교와 회동했다. 관악산 일대에서 한참 유엔군과 중공군 간에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때였다. 작전계획은 갑판사관 최영섭 소위가 짰다. 2월 10일 오후 6시에 덕적도 주둔 해군・해병 1개 중대를 인천에 상륙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상륙지점은 인천기계제작소. 미국과 영국 해군이 엄호사격과 항공지원을 해 주는 가운데 백두산함 등 한국 해군 함정이 해군・해병대를 상륙시키고, 이들이 적의 위치를 파악해서 알려주면 해상의 해군 화력이 적진을 때린다는 작전이었다.
 
  덕적도 주둔 병력을 수송하는 임무는 JMS-310정(정장 모예진 대위)이 맡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2월 10일 오전 10시10분 JMS-310정이 덕적도에 도착했지만, 그때까지 병력이 집결하지 못했던 것이다. 병력이 섬 곳곳에 산재(散在)해 있었던 탓이었다. JMS-310정은 이날 오후 4시까지 인천 팔미도로 병력을 수송하게 되어 있었지만, 악천후와 간만(干滿)의 차이 때문에 시간을 지키는 것이 어려워졌다.
 
  그렇다고 작전을 중단할 수도 없었다. 노명호 소령과 김종기 소령은 각 함정에서 지원자 70명을 선발, 특공대를 편성했다. 백두산함의 갑판사관이던 최영섭 예비역 대령(당시 소위)은 “함정에 근무하던 수병(水兵)들로 급히 부대를 편성하다보니 총이 없었다. 캐나다 구축함에서 자동소총을 얻어다 나누어 주었다”고 회고했다.
 
 
  기상대 고지 점령
 
특공대는 월미도에서 8문의 적 야포를 노획했다.
  2월 10일 오후 4시30분, 특공대원들은 JMS-302정(정장 홍원표 대위)과 발동선 두 척에 분승해서 팔미도를 출발했다. 백두산함 갑판사관 최영섭 소위는 미국 해군장교 1명, 통신병 두 명과 함께 JMS-302정에 승선했다. 백두산함, YMS-510정, JMS-301정, JMS-306, JMS-310정 등도 함께했다.
 
  반석동 해안의 인천기계제작소가 상륙지점으로 결정된 것은 김종기 소령이 제1차 인천상륙작전 당시 이곳에 상륙해서 지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천상륙작전 때 이곳은 적색해안(Red Beach)이라고 불렸다.
 
  오후 6시부터 미국과 영국 해군 함정이 함포사격을 시작했다. 동시에 상륙부대는 목적한 지점에 상륙하는 데 성공했다. 김종기 소령은 특공대원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이제 우리는 적지에 있다. 함포는 우리가 작전하는 이곳까지 도달하지 않는다. 너희들은 돌아가려 해도 보다시피 우리를 싣고 온 배는 이미 떠나고 없다. 나를 믿고 나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지 않으면 너희들은 살아나지 못할 것이다. 이제 해군 병사인 너희들은 육전(陸戰)을 위해 훈련할 여가도 없고, 작전에 대해 설명할 여유도 없다. 너희들은 이곳에서 헤어져 각자 진격을 개시, 21시까지 이미 지시한 대로 인천기상대 고지에 집합하라. 21시까지 집합하지 않는 사람은 전사자로 간주한다.”
 
  이들이 상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덕적도에서 출발한 해병대 병력 100명도 같은 지점에 상륙했다. 월미도와 인천역 쪽에서 적탄이 날아왔다. 5개 소대로 편성된 이들 병력은 대부대가 상륙한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대대 앞으로!” “중대 앞으로!”라고 외치며 목적지인 기상대 고지를 향해 돌진했다. 그날 밤 9시, 해병 3개 소대는 고지 서쪽에서, 해군 수병 2개 소대는 고지 북쪽에서 공격을 가했다. 소총, 따발총, 경기관총을 쏘며 대항하던 적은 얼마 후 시청방향으로 후퇴했다. 포로가 된 적을 심문했더니 “본 병력은 관악산으로 이동했고, 남아 있던 소규모 경비병력은 함포사격이 시작되자 대규모 부대가 상륙한 걸로 착각하고 도주했다”고 했다.
 
  부대원들이 기상대 고지에 집결하기 시작하자, 김종기 소령은 불을 피우고 큰 소리로 군가를 부르게 했다. 드디어 모든 대원들이 기상대 고지에 집결했다. 김종기 소령은 백두산 함장 노명호 소령과 헬레나 함장에게 발광(發光)신호를 보냈다. “특공대는 21시 기상대 고지를 점령함. 확인된 적군 전사 11명. 아군 피해 없음.”
 
  김종기 소령은 적의 저항이 경미한 것을 보고, 내친김에 인천시청까지 점령하기로 했다. 그날 밤 11시, 1개 분대 병력이 인천시청을 점령했다. 이들은 시청에 걸려 있던 인공기와 스탈린·김일성의 사진을 뜯어내 짓밟아 버렸다. 김종기 소령은 시청에 본부를 설치했다.
 
 
  적 전차 노획
 
1951년 2월 11일 월미도에서 노획한 적 전차. 맨 오른쪽은 최영섭 소위, 가운데는 기관사 강명혁 중위.
  다음 날인 2월 11일 오전 6시 특공대는 월미도로 진격했다. 저항은 없었다. 이들은 남쪽 능선에서 적의 야포 8문을, 동남쪽 중턱에서는 고장 난 적 전차(戰車) 한 대를 노획했다. 최영섭 예비역 대령은 “701함(백두산함) 승조원들 중에 손재주가 좋은 병사가 있어서 전차 엔진을 수리, 페인트로 차체에 701이라고 숫자를 적은 후 몰고 다녔다”고 했다. 이 전차는 작전이 종료된 후 다른 전리품들과 함께 부두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나중에 인천에 들어온 영국 해병대가 밤 사이에 가져가 버렸다. 백두산함의 노명호 소령, 김종기 소령이 영국군 사령부에 항의했지만, 돌려받지 못했다.
 
  김종기 소령은 월미도를 점령한 후 백두산함과 헬레나함에 ‘07:00시 월미도 탈환. 적 야포 8문과 전차 1대 노획. 사기충천’이라는 발광신호를 보냈다.
 
  노명호 소령은 “우리 한국 해군이 인천을 점령했으니 시민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포고령을 내렸다. 해군 특공대와 해병대는 잔적(殘敵)을 소탕하면서 인천시 전체를 점령했다.
 
백두산함의 갑판사관이었던 최영섭 예비역 해군 대령.
  인천탈환 소식을 접한 제95기동함대 사령관 A. E. 스미스 제독은 참모들과 함께 백두산함을 방문했다. 스미스 제독은 노명호 소령에게 작전 성공을 치하한 후, 한국 해군·해병대가 상륙했던 만석동 해안에 상륙하자고 했다. LCVP(상륙주정·Landing Craft, Vehicle and Personnel)에서 내린 스미스 제독은 마중을 나온 김종기 소령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말했다.
 
  “내가 해야 할 인천탈환 상륙작전을 귀관이 먼저 해 줘서 고맙소. 웰던(Weldone).”
 
  스미스 제독은 참모들에게 “인천항만과 부두를 조속히 복구하라”고 지시했다. 스미스 제독은 LCVP를 타고 월미도 남쪽을 돌면서 우리 병사들이 노획한 적 전차를 수리하는 모습과 야포들을 관찰했다. 스미스 제독을 수행한 미국 해병대원들이 우리 장병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2월 15일 한국 해병대 1개 대대와 미 육군 특수공병여단이 인천에 상륙, 복구작업에 착수했다. 최영섭 예비역 대령의 말이다.
 
  “8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전선을 38선까지 올리고 한강 진출의 마지막 관문인 관악산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적의 배후를 흔들 수 있는 교두보 확보가 절실하다고 판단, 미 극동군 해군사령관에게 인천지역에 위장상륙작전을 요청했습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장사에 문산호와 학도병들을 투입, 위장상륙작전을 벌였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었던 셈이죠. 그런데 위장작전을 목적으로 인천에 상륙했던 소규모 부대가 아예 인천시 전체를 탈환해 버렸으니, 스미스 소장도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해군은 현재 제2차 인천상륙작전 당시 해군·해병 특공대가 상륙했던 인천시 만석동에 기념비 건립을 추진 중이다. 대한제분이 만석동 공장 인근 녹지 일부를 부지로 제공했다. 제막식은 오는 5월 말이나 6월 초에 가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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