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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분석

노무현·문재인·임동원·송민순·이종석의 회고록으로 살펴본 ‘북한에 대한 속마음’ 분석

5대 ‘회고록’에 등장한 진보 인사들의 對北觀, 미국 ‘피해의식’에 북한 아닌 미국만 비난 열중

글 : 이정현  월간조선 기자  johh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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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눈치봐야 할 시기에 벌어진 인권결의안 북한 결재(決裁) 논란
⊙ 송민순 회고록, 문재인 맷집을 길러 줬다?
⊙ 피해의식에 가까운 반미(反美)정서
⊙ 남북정상회담에 집착해 미(美) BDA 제재 풀어 주는 데 앞장
⊙ 북핵 협상카드·자위용으로 인정
⊙ 북핵 포기 요구가 ‘비현실적’이라고 주장
⊙ “NLL 국제법 근거 없다”는 외교·통일라인
  10월 말 발간된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장관의 회고록 《빙하는 움직인다》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그는 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2006.1~2006.11)과 외교통상부장관(2006.1~2008.2)을 지냈다. 그는 회고록에서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기권, 대북 협상, 대미(對美) 외교 등 인화력 강한 사안들을 회고하면서 협상 이면(裏面)에서 오고간 논의 내용을 밝혔다.
 
  《월간조선》은 송 전 장관 회고록과 함께 차기 야당 대권주자로 유력한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2007.3~2008.2)의 회고록 《운명》,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2003.3~2006.2)과 통일부 장관(2006.2~2006.12)을 지낸 이종석의 《칼날위의 평화》와 김대중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장(1999.12~2001.3)과 통일부 장관(2001.3.~2001.9)을 지낸 임동원의 《피스메이커》를 항목별로 분석했다.
 
  분석에는 백종천 전 청와대 안보실장(2006.11~2008.2),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2006.12~2008.2), 김만복 전 국정원장(2006.11~2008.2)이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정리한 《한반도 평화의 길》과 노무현 정부 주요 인사들의 발언을 정리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말말》 등의 서적을 참고하고, 문순보 자유민주연구원 안보전략연구실장으로부터 당시 상황에 대한 자문도 구했다.
 
  이러한 분석을 보면 친북(親北)노선을 견지해 온 정권이 이어진 10년 동안 대북정책 수뇌부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정책결정을 해 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1 북한인권결의안과 통일에 대한 인식
 
  ■ 배경
 
  북한 눈치를 봐야 할 시기
 
2007년 10월 남북정상회담.
  2007년 11월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기권 한 달 전에 남북정상회담(10.2~4)이 있었다. 표결 시기에 서울에서 남북 총리회담이 열리고 있었다. 회고록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은 “방금 북한 총리의 송별오찬을 하고 올라왔는데 바로 북한인권결의안에 찬성하자고 하니 그거 참 그렇네”라고 발언했다. 노무현의 이 말은 기권하라는 ‘가이드라인’을 내린 것으로 해석된다.
 
  송 전 장관은 “지난해 우리는 처음으로 이 결의안에 찬성했고 그때도 북한이 소리만 냈지, 실제 자신들이 필요하면 수시로 우리에게 접근해 왔습니다. 이미 우리의 주도로 결의안 내용을 많이 완화시킨 것도 북한이 알고 있습니다. 기권할 경우 앞으로 남은 기간 비핵화를 진전시키고, 평화체제 협상을 출범시키는 데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막막합니다”라고 노 전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며 저항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국정원장이 그러면 남북 채널을 통해서 북한의 의견을 직접 확인해 보자고 제안했다”고 실제로 백종천 안보실장이 북한의 주장을 쪽지에 적어 가져왔는데 〈역사적 북남 수뇌회담을 한 후에 반(反)공화국 세력의 인권결의안에 찬성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북남 관계 발전의 위태로운 사태를 초래할 테니 인권결의 표결에 책임 있는 입장을 취하기 바란다. 남측의 태도를 주시할 것이다〉는 요지였다는 것이다. 문재인 비서실장 역시 〈일단 남북 경로로 확인해 보자고 결론을 내렸다〉고 기술되어 있다.
 
  북한이 반대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북한의 결재를 받고 중대사를 결정한 노무현 정부의 어이없는 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2007년 11월 ‘남북관계주요일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11.3~7 북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금강산관광 현물지급 불가” 경고
  11.5 남북피해자 지원단 사무실 개소/제1차 남북농업협력 실무접촉(개성)
  11.8 경공업 원자재 1차 대가상환을 위한 남북이행기구관 실무협의(개성)
  11.9 제1차 남북총리회담 준비를 위한 2차 예비접촉(개성)
  11.11 제1차 남북총리회담 준비를 위한 3차 예비접촉(개성)
  11.12 제32차 남북군사실무회담(통일각)
  11.14~15 제7차 남북이산가족 화상상봉
  11.14~16 제1차 남북총리회담(서울)
  11.20 제33차 남북군사실무회담(평화의 집)
  11.20~21 남북철도협력분과위원회 제1차 실무접촉(개성)
  11.24 제34차 남북군사실무회담(평화의 집)
  11.27~29 제2차 남북국방장관회담(평양)
  11.27~12.1 남북농업협력(양돈)사업 북한 현장답사(평양)
  11.28~29 남북도로협력분과위원회 제1차 실무접촉(개성)
  11.28~30 제9차 남북적십자회담(금강산)
  11.29 제1차 남북관계발전 기본계획 고시
  11.29~12.1 북한 김양건 통일부장외 6명 방한
 
  이렇듯 북한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굳이 송 전 장관은 북한이 당연히 반발할 유엔 북한인권결의안에 찬성하려 한 것일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북한 퍼주기’에 대한 비판여론으로 다음 정부에서 자신들의 대북정책이 뒤집어질 것이라는 걱정이었다.
 
 
  ■ 회고록
 
  # 정권교체에 대한 불안감
 
  〈노무현 정부가 2006년에 이어 2007년에도 일관되게 북한인권결의안에 찬성했다면 다음 정부가 10·4정상 선언을 포함한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뒤집을 명분을 찾기가 그렇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송민순, 《빙하는 움직인다》 P.454)
  →(이하 해설) 송 전 장관은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확고히 하기 위해 북한인권결의안에 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 노무현 정부는 낮은 지지율로 정권교체가 거의 확실한 상황이었다. 이런 가운데 2007년 10월 남북정상회담 결과를 다음 정부에서 뒤집힐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북한인권결의안에 찬성했으면 자신들의 성과를 뒤집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정상회담이 잘 끝났지만 임기가 많이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다음 정부로 넘어가기 전에 회담 성과를 공고하게 해 둘 필요가 있었다. 남북정상 간의 합의는 법적으로 따지면 국가 간 조약의 성격이다. 10·4 공동선언은 국가나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조약에 해당했다. 그래서 나는 정상회담 합의에 대해 국회에서 비준동의를 받아 두는 게 좋겠다고 강조했다. 그때엔 유엔 총회에서도 지지결의를 할 만큼 분위기가 좋았다. 국회에 비준동의안을 제출하면 한나라당도 감히 정략적으로 반대하기 어려웠을 분위기였다. 그런데 한덕수 당시 국무총리가 끝내 안 했다. (중략) 그러다 실기(失期)하고 말았다. 결국 정권이 바뀌면서 정상 간의 소중한 합의가 내팽개쳐지고 말았다.〉(문재인, 《운명》 p.359~360)
  → 문재인 전 대표가 남북정상회담을 국회 비준 받지 못한 것에 후회하는 부분이다. 2007년 10월 남북정상회담은 대선을 얼마 남기지 않고 이뤄졌다. 정권교체가 될 경우 대북정책의 획기적 변화가 불가피했다. 이러한 초조함에서 국회비준 등을 추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 ‘대북지원’이 남북관계의 지렛대
 
  〈다른 나라들이 발의한 결의안에 그냥 찬성하는 것과 발의에 앞장서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남과 북은 서로의 체제를 일단 인정하고, 그 바탕 위에서 협상을 통해 상호 신뢰를 쌓으면서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이 불가피하다. 한국이 국제사회의 북한 비난을 선도하는 것과 남북 신뢰구축을 주도하는 것은 병립하기 어렵다. 북한인권결의안에 찬성하고 대북지원은 늘리는 것이 균형 있는 정책일 것이다. 그래야 한국이 국제사회의 대북 자세를 주도할 입지를 만들 수 있다. 특히 미국의 대북 협상파들로 하여금 필요시에 한국의 대북 압박을 기대할 수 있으니 한국이 제시하는 협상전략을 존중해 주자는 목소리를 내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송민순, 《빙하는 움직인다》 p.454)
  → 노무현 정부가 ‘결의안에 그냥 찬성하려고 했던 정부’라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발의에 앞장서는 정부’다. 국제사회에서 북한에 대한 비난을 강화한 박근혜 정부에 대한 비판이 깔려 있다. 이런 이유에서 노무현 정부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책에 ‘대못’을 박아 놓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다. 핵심적인 부분은 대북지원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부분이다. 큰 틀에서 정책의 기본은 대북지원 확대였다. 해당 부분은 노무현 정부가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을 지지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상호 긴밀히 협조하는 기구인 ‘남북연합’을 제도화하여 남과 북이 힘을 합쳐 민족경제공동체를 형성·발전시키는 한편 군비통제를 실현하여 냉전의 잔재를 청산하고 평화를 정착시키는 등의 중차대한 당면과제들을 시행해 나가자는 것이 대통령의 뜻입니다.〉(임동원, 《피스메이커》 p.46)
  →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회고록에서 2000년 6월 3일 대북 특사로 김정일을 만났을 때 통일방안을 이렇게 제의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의 통일정책을 계승했다. 송 전 장관은 〈남과 북은 서로의 체제를 일단 인정하고 그 바탕 위에서 협상을 통해 상호 신뢰를 쌓으면서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이 불가피하다〉고 회고록에서 기술한 부분을 보면, 임 전 장관의 생각과 그 흐름을 같이한다.
 
  〈임동원 수석은 북한의 속성을 감안하여 먼저 주고 뒤에 받는다는 의미의 ‘선공후득(先供後得)’ 방식을 정책의 바탕으로 삼았다. 나는 비슷한 각도에서 상대에게 혜택을 제공하면서 이를 축적하면 결국 그 자체가 지렛대로 바뀐다는 이른바 ‘혜택 제공-혜택 박탈’(incentive-disincentive) 논리를 제시했다.〉(송민순, 《빙하는 움직인다》 p.62)
  → 김대중·노무현 정부 대북정책의 기본은 우선 지원을 하고 이를 지렛대로 이용한다는 생각이었다. 송 전 장관은 회고록에서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기술했다. 우선 지원을 늘리면, 북한이 남한에 의지하게 될 것이라는 낙관론이 깔려 있다. 대북지원이 결국 핵무기 개발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에 대한 답변은 없고 막연히 지원을 계속하면 관계가 좋아질 것이라는 낙관론만 있는 것이다.
 
 
  ■ 정리
 
  자신의 허물을 가감 없이 솔직하게 털어놓은 회고록을 찾기는 쉽지 않다. 유리한 부분은 크게 강조하고 불리한 내용은 은근슬쩍 생략하는 것이 보통이다.
 
  송 전 장관의 회고록은 자신이 주도한 2007년 2·13 합의의 성과를 강조하고 있다. 책을 읽다 보면, 2·13 합의만 이행되었다면 북핵 문제가 해결되었을 것이라는 본인의 생각을 시종일관 이어 나가고 있다. 송민순 전 장관의 《빙하는 움직인다》에서 2007년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기권 부분은 책의 흐름에서 꼭 들어갈 필요가 없는 사족(蛇足)과 같은 내용이다.
 
  송민순 전 장관 회고록 발간 이후 송 전 장관과 문 전 대표의 갈등을 중심으로 주요 언론이 보도했다. 주장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송 전 장관과 문재인 전 대표는 큰 의견 대립이 없고 큰 줄기에서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단번에 문제를 해결하지 말고 단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은 북한의 핵 포기를 우선 요구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며 단계적으로 핵무기 축소를 요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송 전 장관의 회고록이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맷집을 길러 준 것이다”는 평가가 있다. 유력 대선 후보인 문 전 대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빠져나가고 있다. 현재 안철수 국민의당 전 공동대표, 안희정 충남도지사,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등 야권 후보가 정리되지 않은 가운데, 송 전 장관의 회고록을 통해 문 전 대표가 노무현 정부의 가치를 이어받은 적자(嫡子)로 각인되는 효과가 있다. 내년 대선에서 맞이할 수밖에 없는 종북 논란을 미리 털고 갈 수 있어 오히려 문 전 대표에게 유리하다는 주장이다. 또 “반기문 UN사무총장 지지가 목적이다”는 해석도 있다. 송 전 장관의 회고록을 읽어 보면, 반기문 UN사무총장이 등장하는 부분은 각별히 신경을 썼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외교부 선배를 배려했다는 분석이다.
 
 
  2 남북정상회담에 집착
 
  ■ 배경
 
  ‘피가 마르는 고통’ BDA 풀어 줘
 
  2005년 9월 미국은 3년여에 걸쳐 북한의 밀수 네트워크를 추적 조사한 끝에 핵개발과 관련된 자금이 예치된 마카오 소재 중국계 은행인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을 돈 세탁 우려 대상으로 지목했다. 그 결과 BDA는 북한과 거래를 중단하고, 총 2400만 달러의 북한 계좌를 동결했다.
 
  북한이 “피가 마르는 고통”이라고 표현한 BDA 제재는 북한의 숨통을 조인 가장 확실한 압박이었다. 조금만 더 BDA 제재를 이어 갔으면 북한의 태도가 달라졌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2007년 2·13 합의를 통해 제재가 풀린다. 2·13 합의는 정상회담에 집착한 노무현 정부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결과적으로 노무현 정부는 BDA 제재를 풀어 주기 위해 노력했다.
 
  노무현 정부 통일·외교 라인 핵심 관계자들은 BDA 제재 때문에 남북정상회담이 지연된 부분에 대해 안타까워한다. 2005년 9·19 공동성명으로 북핵 문제가 해결되었는데, 미국의 BDA 계좌 동결로 사태가 틀어졌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노무현 정부 초기로 예정된 남북정상회담까지 뒤로 밀렸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북한 계좌 동결 조치 때문에 북한이 도발을 감행했다고 생각할 정도다. 결론적으로 일이 틀어진 원인을 미국에 돌리는 것이다.
 
 
  ■ 회고록
 
  # BDA 제재로 ‘남북정상회담 연기’ 주장
 
  〈드디어 2005년 9월 6자회담에서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9·19 공동성명이 채택되자, 머지않아 북측에서 정상회담 관련 회신이 올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가 9·19 공동성명을 채택하고 돌아서자마자 북한의 마카오 주거래은행인 BDA 내 북한 계좌를 동결함으로써, 9·19 공동성명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우리 정부의 다각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북한은 BDA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북한은 2006년 7월 미사일 발사 실험에 이어 10월 초 핵실험을 저지르고 말았다. 남북정상회담은 한참 더 밀리고 말았다.〉(문재인, 《운명》 p.350)
  → 노무현 정부 인사들은 미국의 BDA 계좌 동결로 남북정상회담이 뒤로 밀린 부분을 가장 안타까워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2006년 미사일 도발 등도 미국의 BDA 계좌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나고 보니 역시 아쉬운 게, 남북정상회담이 좀 더 빨리 이뤄졌어야 했다. 그리될 수도 있었다. 6자회담이 풀려서 정상회담 분위기가 무르익을 시점에 터진 미국 재무부의 BDA 동결 조치가 남북정상회담까지 동결시키고 말았다. 그 바람에 한 1년을 공백으로 흘려보냈다. 그 공백 없이 정상회담이 열렸으면 남북관계는 휠씬 많은 진도가 나갔을 것이다.〉(문재인, 《운명》 p.359)
  → 문재인 전 대표의 회고록을 보면, 제재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읽을 수 있다. 나아가 BDA 제재만 없었으면 정상회담이 좀 더 빨랐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적고 있다.
 
  〈‘BDA 사건’이 좌절시킨 것은 9·19 공동성명만이 아니었다. BDA 사건은 남북이 2005년 가을로 잠정 합의한 제2차 남북정상회담도 좌절시켰다. 2005년 6월 대통령 특사로 평양을 방문한 정동영 장관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노 대통령의 뜻에 따라 2차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했다. 정 장관은 장소에 구애받지 말고 9월 중에 정상회담을 개최하자고 제안했고, 김정일 위원장도 정상회담에 긍정적이었다. (중략) 나는 9·19 공동성명이 발표되던 날, 2005년 가을에는 남북정상회담이 실현될 것이라고 거의 확신했다. 그러나 ‘BDA 사건’이 터지면서 상황은 다시 지체되기 시작했다. 특히 BDA 사건이 대형 쟁점으로 발전하면서 6자회담이 공전되자, 북한은 정상회담에 대해서도 소극적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2005년 가을에 이루어진 남북간의 정상회담 관련 접촉에서 북한은 ‘기다려 달라’고 했으나 이후 접촉에서도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결국 BDA 사건이 정상회담을 불발시킨 것이다.〉(이종석, 《칼날 위의 평화》 p.350~352)
  → 노무현 정부 외교·통일 인사들은 2005년 가을 남북정상회담을 확신하고 있었다. 정권 초기에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려 부단히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정상회담 실패의 원인이 BDA 사건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 남측의 정상회담 집착을 이용한 북한
 
  〈북한은 한국 정치인들이 방북 일정이나 성과를 국내 정치에 활용하려 한다는 약점을 알고 있었다. 이때도(2004년 6월 정동영 통일부 장관 방북) 북한은 정동영 장관의 김정일 위원장 면담을 마지막 순간까지 정하지 않고 불필요한 추측을 하게 만들었다. 북한의 그런 행동은 남북 관계의 진정한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물론, 기존의 북한에 대한 이미지를 더욱 기이하게 만들었다. 체제의 속성도 있지만 뭐든지 협상 카드로 만들어야 하는 그들만의 고육지책일 수도 있다.〉(송민순, 《빙하는 움직인다》 p.99)
  → 정상회담에 매달리니 북한이 이를 이용하는 것은 당연했다. 북한은 남한 국내 정치를 이용해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해 왔다. 정치인들이 방북 성과에 목매는 상황을 적절히 이용해 왔다. 안타까운 것은 북한의 전략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정상회담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북측은 일정액의 현금지원까지 요청했다. (중략) 그러나 박지원 특사는 ‘정상회담 후에 인도적 지원이나 경제협력은 가능하나 현금지원은 불가하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중략) 김 대통령은 박 특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잘사는 형이 가난한 동생네 집에 빈손으로 갈 수는 없지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는 마당에 식량난 등 북한주민들의 어려운 사정을 감안해 주는 게 도리 아니겠습니까. 박 특사께서는 이번 정상회담 선물로 우리가 현금 1억 달러를 지원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마지막 협상에 임하도록 하세요.”〉(임동원, 《피스메이커》 p.27~28)
  → 남북정상회담을 미끼로 끌려다닌 것은 김대중 정부가 시작이었다. 임동원 전 장관은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준비 과정에서 북한의 요구 사항을 적고 있다.
 
 
  # BDA 제재 풀어 주고 정상회담 성사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이 BDA 문제를 탄력적으로 풀어서 9·19 공동성명이 이행 궤도에 들어가도록 부시 대통령을 설득하려고 했다. (중략) 부시 대통령은 그런 방식의 변화 시도에 관심이 없었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도록 압력을 가해야 한다면서, 만약 북한이 거부하면 미국은 북한의 핵무기 확산은 물론, 화폐 위조와 불법자금 조달을 막기 위해 한·중·일·러와 협력을 동원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특히 한국과 중국이 대북 압박에 가담해야 함을 강조했다. (중략) 노 대통령은 다소 굳은 표정으로 “지금 각하와 나 사이에 손발이 맞지 않고 있다. 안에서는 6자가 회담을 하면서 밖에서는 압박을 행사하면, 북한은 미국이 결국 자신을 붕괴시키려는 것으로 볼 것이다. 그렇게 하면 북한은 문을 걸어 잠그고 변화를 거부할 것이다”라고 했다.〉(송민순, 《빙하는 움직인다》 p.215~216)
  → 기본적으로 BDA 제재는 북한의 불법행위 때문에 벌어졌다. 나아가 불법자금을 차단하는 내용이었다. 북한의 불법자금은 당연히 핵개발 자금이다. 이러한 제재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은 “북한은 미국이 결국 자신을 붕괴시키려는 것으로 볼 것이다”며 북한편을 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정상회담의 풍성한 성과를 보면서 정부 출범 후 지긋지긋하게 고생했던 대북 관계의 여러 사건들이 떠올랐다. 사실 5년 내내 대통령과 우리를 힘들게 만든 것이 북핵 문제였다.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외교적으로 관리해 낸 노 대통령의 철학과 인내력과 정치력은 대단히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그 시기 지혜로운 리더십으로 나라를 구한 것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중략) 보수 진영과 보수 언론들이 마치 미국과 다른 견해를 갖게 되면 큰일 날 듯 걱정을 쏟아내며 공격을 했지만 끄떡도 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뜻이 워낙 강하니, 결국 부시 행정부도 대북 강경 일변도 정책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결국 대화를 통한 외교적 해결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중략) 6자회담을 통한 완전한 비핵화 합의를 끌어내고, 북한의 모든 핵 프로그램 폐기와 함께 동북아의 영구적 평화를 위한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 구조를 만들게 됐다.〉(문재인, 《운명》 p.360~361)
  → 문재인 전 대표가 주장하는 ‘완전한 비핵화 합의’는 2007년 2·13 합의를 의미한다. 노무현 정부의 2007년 2·13 합의는 정권 말 남북정상회담에 집착했기에 가능했다. 당시 한반도 비핵화 실무그룹 발족, 북한 영변 핵시설 폐쇄·봉인, 국제원자력기구(IAEA) 감시·검증 활동 재개, 북·미 양자 대화 개시, 대북 경제·에너지 지원 등을 합의했다. 그해 10월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서둘렀던 합의였다. 협상을 통해, 북한에 가장 혹독했던 BDA 제재가 풀렸다.
 
 
  ■ 정리
 
  노무현 정부는 미국의 BDA 제재만 없었으면 남북정상회담을 정권 초기에 개최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2007년 2·13 합의는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남측이 미국을 설득해 BDA 제재를 풀어 줬기에 가능했다. 원하는 바를 얻은 북한은 천안함 피격, 연평도 도발 등을 이어 가다가 결국 2009년 5월 25일 2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이렇게 합의는 휴지조각이 됐다.
 
  연변 냉각탑 폭파 등 북한이 보인 여러 행동은 쇼에 지나지 않았음은 그 후 밝혀졌다. 북한은 협상을 통해 시간을 벌면서 핵무기 개발을 고도화시켰던 것이다. 핵개발은 단기간에 성과를 낼 수 없다. 6자회담 등 협상 중에도 핵개발을 하지 않았다면 핵실험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협상을 이용해 시간을 벌면서 핵능력을 고도화시킨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핵실험을 하기 위해서는 수십 년에 걸친 기술 축적이 필요하다. BDA 제재와 상관없이 북한은 핵무기 기술을 축적·개발해 왔다고 볼 수밖에 없다. 시간끌기 전술이었던 것이다. 이런 현실을 외면하고 노무현 정부는 남북정상회담에만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실패의 가장 큰 이유는 ‘당근’만으로 북한을 설득하려 했기 때문이다. ‘채찍’은 포기하고 ‘당근’으로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노무현 정부의 생각은 뿌리가 깊다. 당선자 시절부터 유엔의 대북 제재에 반대한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2003년 1월 30일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당선자 자격으로 일본 NHK-TV와 가진 회견에서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으로 유엔을 통한 대북 제재를 가하는 방안에 반대한다”고 발언했다.
 
 
  3 반미(反美)로 변질된 자주(自主)외교
 
  ■ 배경
 
  노무현 정부의 ‘섣부른 민족주의’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2002년 6월 미군 장갑차에 여중생 두 명이 압사당한 효순·미선양 사건은 노무현 정부 출범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어찌 보면 반미 노선은 자연스러울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우리의 힘으로 남북관계를 정상화시키고, 미국과의 관계도 바로 잡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섣부른 민족주의’라 할 수 있다.
 
  반미 분위기는 노무현 정부에서 노골화됐다. 노무현 대통령 스스로 2002년 9월 11일 대구 영남대 초청강연에서 “미국 안 갔다고 반미주의냐? 반미면 또 어떠냐?”고 발언할 정도였다.
 
  이러한 흐름에서 한미동맹을 부인하는 “한미동맹의 중요성은 많이 떨어졌다”는 발언을 노 전 대통령이 직접 하기도 했다.
 
  〈한미동맹은 본시 대북 억지를 위한 것입니다. 지금도 그 목적은 유효할 것입니다. 그러나 남북 간 국력의 차이와 냉전 구도의 변화로 대북 억지를 위한 한미동맹의 중요성은 많이 떨어졌습니다. 지금은 남북대화의 국면입니다. 진정으로 대화를 성사시키고자 하는 생각이 있다면, 현재의 상황에서 대북 억지를 위한 한미동맹과 관련된 수사적인 표현의 수준을 있는 대로 높여서 강조하는 것은 굳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대북 억지를 위한 한미동맹을 강조하지 않는 것이 좋을 상황입니다. 여기에다 일본까지 끌어넣어 더불어 ‘이념과 가치를 함께하는’ 한·미·일 협력관계를 과시하는 것은 남북관계는 물론, 나아가서는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까지 불편하게 만들 뿐입니다.〉(2008년 10월 1일 10·4 남북정상선언 1주년 기념 학술회의)
 
  노무현 정부 인사들의 생각은 비슷했다. 송민순 전 장관의 경우 2006년 10월 18일 ‘21세기 동북아 미래포럼’ 연설에서 “미국은 국가로서 존재한 기간에 비하면 전 세계 전략 차원에서 인류 역사상 전쟁을 가장 많이 한 나라다”라고 말하는 등 발언의 수위가 높았다. 이틀 뒤 미국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미국의 전쟁 중에 3만명이 전사하고 10만명이 부상한 한국전쟁도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 그(송 전 장관)에게 상기시켜 줘야 할 것이라고 본다”고 했다.
 
  노무현 정부는 유독 ‘자주(自主)’를 내세웠다. 한반도의 문제는 우리가 결정한다는 생각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5년 2월 국회연설에서 “우리 군대는 스스로 작전권을 가진 자주군대로서 동북아시아의 균형자로서 동북아 지역의 평화를 굳건히 지켜 낼 것”이라는 발언에서 알 수 있듯이 민족주의적 발언을 자주 했다. ‘자주’는 현실적이지 못했다. 나아가 반미(反美)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 회고록
 
  # ‘자주’가 ‘반미’로 변질된 계기
 
  〈효순·미선양 사건과 촛불집회를 거치면서, 한미관계는 2002년 후보 시절부터 이미 핫이슈였다. 한미관계는 동전의 양면이기도 했다.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부터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대북 화해협력 정책의 지속, 한미동맹 균형외교, 그리고 자주국방을 주요 외교 안보 노선으로 천명했다. (중략) 대통령은 한미동맹을 중시했지만, 동시에 한국이 국력신장에 걸맞게 자주국방 의지를 가져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문재인, 《운명》 p.263~265)
  → 문맥을 보면 ‘자주’국방에 방점을 찍는 발언이다. 한미동맹을 중시했다는 설명은 수사(修辭)로 보인다. 노무현 정권 출범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효순·미선양 사건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우리 국민과 국가의 자주적인 삶을 열망했다. 혹자는 우리가 왜 자주적이지 않냐고 항변할지 모르지만, 대한민국 국군통수권자가 60만 국군에 대한 작전통수권도 갖고 있지 못한 데다 사회지도자들이 공공연하게 주한미군을 인계철선으로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대미의존 심리가 뿌리 깊은 현실에서 ‘자주’를 말하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노 대통령은 생각했다.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남북관계에서도, 외교에서도 우리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중략) 자주국방과 자주외교는 나와 많은 이들이 노무현 대통령을 통해 실현하고 싶은 이상이기도 했으며, 참여정부 출범을 맞아 함께 꿈꾸던 소중한 가치이기도 했다. (중략) 문제는 대한민국에서 수십 년간 기득권을 유지하며 보수를 자처하는 세력이 자주국방과 자주외교를 반미·친북과 동급의 ‘불온한’ 용어로 만들어 놓았다는 데 있었다. 진정한 보수라면 진보보다 더 소리 높여 자주국방을 주장하고 이를 실천해야 마땅할 텐데 자칭 보수세력은 ‘자주’를 불온시하고,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반미’나 ‘친북’으로 매도했다.〉(이종석, 《칼날 위의 평화》 p.71~72)
  → 당시 당국자들의 진심은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의 회고록에 잘 나와 있다. 이종석 전 장관은 노무현 정부가 추구했던 ‘자주’를 설명하면서, 보수층으로부터의 비난에 억울함을 토로했다. 자신들 이전의 정부가 미국에 굴종(屈從)했다는 생각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작권 등을 미군이 갖는 것이 국가의 자주권이 침해당하고 있다는 인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노무현 정부의 생각은 국민적 동의를 얻지 못했다. 언론을 중심으로 비판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비판을 이 전 장관은 “‘반미’나 ‘친북’으로 매도당했다”고 하소연하는 것이다.
 
 
  # 미국이 남북협상을 방해한다?
 
  〈2003년 5월 대통령의 첫 미국 순방은 기억에 남는다. 미국의 네오콘 사이에서 북한 폭격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중략) 미국이 준비한 한미공동성명 초안에 북핵 문제에 대해 ‘모든 옵션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미국 입장이 포함돼 있었다. 쉽게 말하면 ‘(전쟁을 포함해) 모든 수단을 불사한다’는 뜻이다. (중략) 그런 가능성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불안심리가 높아져, 외국인들의 한국투자를 포함한 우리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위험이 컸다. (중략) 그 문장을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로 바꾸고자 안보팀이 무진 애를 썼다.〉(문재인, 《운명》 p.264)
  → 문 전 대표의 경우 미국이 한반도 전쟁 위험을 높이려 했는데, 이를 노무현 정부가 막았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전쟁은 미국도 원하지 않는다.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전쟁을 각오해야 한다는 역설이 있다. 이를 무시하고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고 미화하고 있는 것이다.
 
  〈1998년 8월 초 미국으로부터 ‘금창리 지하핵시설 의혹’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중략) 미국 국방정보국이 제공한 북한의 지하핵시설 첩보를 접한 미국의 상하원 의원들과 보좌관들은 북한에 대해 격분했다. (중략) 그러나 CIA는 이 첩보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상태였다. 그렇다면 미국 국방정보국이 확증되지도 않은 이런 첩보를 흘리는 저의가 무엇인지에 관심이 모아졌다. 미사일방어체계(MD) 개발을 밀어붙이려는 미국 국방정보본부의 일부 강경세력이 금창리 지하핵시설 의혹을 제기하여 ‘럼스펠드 보고서’를 뒷받침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임동원, 《피스메이커》 p. 300~302)
  →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주요 인사들은 미국이 남북협상을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깔고 있다. 나아가 미국에 눌려 있다는 피해의식까지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뿌리가 깊다.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회고록에서 미국 강경파가 근거가 약한 북한의 핵개발 정보를 흘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나는 NSC에서 3년간 대미 외교를 다루면서 일부 미국의 한반도 담당 관리들이 자신들의 부당한 주장을 교묘히 한국 언론과 여당에 흘려 자신의 업무상 목표를 달성하는 데 이용한다는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이종석, 《칼날위의 평화》 p.132)
  → 이종석 전 장관은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기술하면서 뒤에서 공작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는 NSC 차장으로 근무하며 3년간 국방문제를 다루면서 군은 국가방위의 간성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거대한 이해집단이라는 결론을 내렸다.〉(이종석, 《칼날위의 평화》 p.282)
  → 나아가 이 전 장관은 미국뿐만 아니라 국군도 불신했다.
 
  〈불현듯 ‘장기판의 졸’ 생각이 났다. 이런 한미관계는 안 된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런 일방적 관계는 바꾸어야 한다. 더 이상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협상이 가능한 균등한 한미관계로 가자!〉(이종석, 《칼날위의 평화》 p.99)
  → 국제관계의 냉혹한 현실을 ‘장기판의 졸’로 ‘자기비하’하는 내용이다.
 
 
  ■ 정리
 
  한반도 문제는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지금이라도 중국이 북한에 대한 원유공급을 중단하면 북한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북한이 무너지지 않는 것은 현상유지를 원하는 중국의 정책 때문이다. 나아가 미국 입장에서 북핵 문제는 아시아에 개입할 명분을 준다. 노무현 정부는 이러한 현실보다 ‘자주’라는 이상(理想)에 집착했다.
 
  군사적 충돌을 각오하더라도, 어떻게든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막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우리 정부가 가지고 있었다면 결코 북한은 핵실험을 감행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반성을 찾아볼 수가 없다.
 
  미국이 위험을 경고하는데도 이를 믿을 수 없다는 의심은 계속됐다. 북한은 수차례의 핵실험으로 이제 북한의 핵 능력에 대한 논쟁은 큰 의미가 없다. 북한이 핵 능력을 향상하기 위해 꾸준히 실험을 해 왔다는 점에서 미국의 첩보는 큰 틀에서 틀린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에는 미국의 증거 제시가 부족했다는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
 
  미국이 뚜렷한 증거 없이 북한이 핵개발을 추진하고 있다고 의혹을 흘리고 있다는 주장은 계속된다. 미국이 긴장을 높이고 있다는 생각이다.
 
 
  4 의심스러운 ‘비핵화 의지’
 
  ■ 배경
 
  북핵은 자위용?
 
2016년 10월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 서울 종로구 삼청동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퇴근하던 중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과거 발언을 정리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말말》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은 2004년 11월 12일 미국 방문 중에 행한 로스앤젤레스 국제문제협의회 연설에서 “북한이 ‘핵은 외부 위협에 대한 자위용 억제 수단’이라고 한 것은 일리가 있는 측면이 있다”고 발언한다.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하는 폭탄 발언이었다. 노무현 정부 주요 인사들 역시 생각이 비슷했다.
 
  〈미국이 북한 핵 문제를 유엔안보리에 회부하기로 했는데 우리 정부는 이를 반대해야 한다.〉(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 2003년 2월 10일 국회 대정부 질문)
 
  〈북한의 핵·생화학 무기는 남한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체제방어 또는 강대국을 상대로 한 협상카드용이다.〉(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2002년 2월 2일 KBS심야토론)
 
  〈북측은 핵무기를 개발한 것은 없으며, 현 단계에서 개발할 의도도 없고, 이 문제는 미국과 대화를 통해 해결해야 하나, 검증을 원한다면 미국의 검증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고 언급했다.〉(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 2003년 1월 29일 방북 후 기자회견)
 
  〈북한의 빈곤 문제도 핵실험의 배경 원인 중 하나이며, 우리도 같은 민족으로서 책임을 감수해야 한다.〉(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 2007년 1월 1일 통일부 시무식)
 
  〈김대중 대통령이 햇볕정책을 했기 때문에 북한이 핵실험을 해도 전쟁 위험이 없고 우리는 안전하다.〉(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 2006년 10월 17일 해남 방문)
 
  북한의 핵 포기를 회의적으로 보면서, 북한의 붕괴 가능성에 대해서는 극히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북의 붕괴는 통일이다. 여러 가능성 가운데 하나로 상정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에 대해 거부반응이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발언을 보면 이러한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북한 붕괴를 언급하는 것은 우리 정책이 북한의 갑작스런 붕괴를 기다리고 조장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 우리는 북한의 붕괴를 원치 않는 토대 위에 있다. 북한은 갑작스럽게 붕괴할 가능성이 매우 낮고 한국 정부는 그런 것을 조장할 생각이 없고, 여야도 마찬가지다.〉(2005년 4월 13일 독일 동포간담회)
 
 
  ■ 회고록
 
  # 북한은 붕괴하지 않는다?
 
  〈우리는 정확한 상황 파악보다는 김일성의 사망으로 한반도 문제의 돌파구가 열릴 것이라는 기대가 앞섰다. 이후에도 우리의 희망적 사고가 현실을 앞서는 경우가 많았다. 1989년 북한 핵 문제가 표면에 드러난 뒤부터 한국과 미국은 북한의 정변이나 체제 붕괴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가설을 포용해 왔다.〉(송민순, 《빙하는 움직인다》 p.30)
  → 이러한 생각은 폭넓게 퍼져 있었다. 송 전 장관은 김일성 사망 등을 예로 들며 북한 체제 붕괴 가능성이 낮다는 주장을 펼친다. 송 전 장관은 북한 정권 교체 시도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이 붕괴하지 않으니 협상을 통해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논리다.
 
  〈붕괴임박론은 북한도 동구 공산권처럼 조만간 급변 사태로 붕괴될 것이라는 시각이다. 그동안 붕괴임박론에 힘을 실어 준 사태가 세 번 발생했다. 첫 번째는 동구 공산권 붕괴와 동서냉전의 종식이다. (중략) 두 번째는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면 북한체제가 붕괴할 것이라는 예측인데, 1994년 7월 그가 갑자기 사망했다. (중략) 세 번째는 2008년 가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이상설이 나돌면서 급변사태와 붕괴가 임박했다는 것이 당시 정부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세 번 모두 붕괴되지 않았다. 희망사항에 불과한 오판이었다.〉(임동원, 《피스메이커》 p.590)
  → 김대중 정부의 임동원 전 장관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의 연장선에서 김정은 체제 역시 붕괴되지 않을 것이라 믿고 있는 것이다.
 
 
  # 핵 포기 요구는 비현실적
 
  〈‘선 핵폐기론’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비현실적이다. 우선 미국을 포함한 각국의 이해관계가 미묘하게 얽혀 있는 국제적인 문제인 북한 핵 문제를 남북관계 진전의 전제조건으로 연계시킨 것은 남북관계를 진전시키지 않아도 좋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의도는 북한이 조만간 붕괴할 것이고 그 결과 북한이 우리 측에 흡수통일되면 북핵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므로 북한이 붕괴할 때까지 기다려 보자는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다.〉(백종천·이재정, 《한반도 평화의 길》 p.146)
  → 노무현 정부 인사들은 북한에 먼저 핵무기를 포기하라고 주장하는 것이 비현실적이라고 주장할 정도다.
 
  〈이명박 정부는 ‘10·4 남북정상선언’ 자체는 물론 이와 관련하여 참여정부가 북측과 합의한 사항들을 거의 이행하지 않아 ‘10·4 남북정상선언’을 사실상 사문화시켰다.〉(김만복, 《한반도 평화의 길》 p.87)
  → 2007년 10·4 남북정상선언과 관련해 김만복 전 국정원장의 주장이다. 남측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남북관계가 악화되었다는 주장인 것이다. 기본적으로 협상이 깨진 것은 북한의 도발과 핵실험 때문이다. 북한이 도발을 해도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이다.
 
 
  ■ 정리
 
  2006년 5월 29일 재향군인회 신임 회장단을 청와대로 초청한 자리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북한이 핵을 개발하는 것은 선제공격용이 아니라 방어용이며 남한의 지원 여부에 따라 핵 개발을 계속하거나 포기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북한이 핵을 선제공격에 사용하게 되면 중국의 공조를 얻지 못하는 등 여러 제약이 따를 것”이라고 발언했다. 한반도 비핵화 의지가 있는지 의문을 가지게 만드는 부분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 지원 정책은 북한의 실체에 대해 오판(誤判)했다. 핵을 만들어도, 도발을 계속해도 지원을 오히려 늘리는 아이러니의 배경이다. 이러한 오판은 북한을 북한의 입장과 논리로 봐야 한다는 소위 ‘내재적 접근’ 방식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에서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북한이 생존을 위해 핵을 가지려 하는 것은 당연하다거나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에서 노무현 정부 이후 북한의 도발과 핵실험에는 눈을 감고 오히려 우리측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는 실정이다.
 
 
  5 영토라고 말하지 못한 NLL
 
  ■ 배경
 
  NLL 국제법 근거 없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월간조선》 2013년 2월호는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검토 보고서(대외비)’를 공개했다. 2007년 10월 4일 남북정상회담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북방한계선) 무력화’ 발언이 사실이라는 내용이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정상회담에서 노 전 대통령은 이렇게 발언했다.
 
  “NLL문제, 그것이 국제법적인 근거도 없고 논리적 근거도 분명치 않은 것인데 … 남측에서는 이걸 영토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헌법 문제라고 나오고 있는데 헌법 문제 절대 아닙니다. 얼마든지 내가 맞서 나갈 수 있습니다.”
 
  “안보군사 지도 위에다가 평화경제 지도를 덮어 그려 서해평화협력지대라는 큰 그림을 그려 보자는 것입니다.”
 
  남북기본합의서 등을 통해 남북이 서해경계선으로 확인한 NLL을 무시하고 북한의 NLL 무력화에 빌미를 제공한 발언이었다.
 
  노 전 대통령의 평소 생각이 그러했다.
 
  〈서해북방한계선은 어릴 적 땅 따먹기 할 때 땅에 그어 놓은 줄이다. 이것은 쌍방이 합의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그은 선이다. 그 선이 처음에는 작전금지선이었다. 이것을 오늘에 와서 영토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남북간에 합의한 분계선이 아니란 점을 인정해야 한다. 헌법상 북쪽 땅도 우리 영토인데 그 안에 줄을 그어 놓고 영토선이라고 주장하면 헷갈린다.〉(2007년 10월 11일 청와대에서 열린 정당대표·원내 대표 초청 간담회)
 
  일련의 흐름으로 볼 때 노무현 정부는 NLL을 영토라고 생각하지 않고, 통일 전까지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각에 따라, 2007년 10·4 남북정상선언을 통해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노무현 정부 인사들의 회고록을 보면, NLL 포기 등의 비난을 의식해 직접적인 언급은 삼가고 있다.
 
 
  ■ 회고록
 
  # 영토 문제를 군사적 관점으로 보지 말라?
 
  〈해상경계선 문제를 건드리지 않고 경제적 호혜구조를 만들어 이 지역의 평화정착 문제를 접근한 것으로서 남북 간 군사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게 아니라 남북의 경제협력과 공동번영을 통한 항구적인 긴장완화와 평화정착 관점에서 접근하는 참신한 ‘발상의 대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김만복, 《한반도 평화의 길》 p.421)
  → 김만복 전 국정원장의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에 대한 평가이다. ‘발상의 대전환’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NLL 포기 논란에 대한 명확한 해명은 못하고 있다.
 
  〈참여정부 시기 남북간 군사적 긴장완화에 획기적인 이정표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참여정부 5년간 NLL 인근과 휴전선 일대에서 한 차례의 교전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남북대결로 인해 군인이건 민간인이건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증명하고 있다.〉(이종석, 《칼날 위의 평화》 P.276)
  → 천안함 피격과 연평도 도발 등은 이명박 정부의 잘못이라는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2004년 6월 4일 남북장성급회담에서 서해상 충돌방지를 위한 합의를 하면서 그 조건으로 남측은 군사분계선 지역에서 선전활동을 중지하고 선전수단들을 제거했다. 북의 입장을 수용하고, 2007년 10·4 남북정상선언을 통해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까지 진전되니 북한으로서는 무리한 도발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보는 것이 옳은 것이다. 그럼에도 이종석 전 장관은 오히려 회담의 성과를 강조한다.
 
 
  ■ 정리
 
  노무현 전 대통령은 NLL에 대해 《성공과 좌절》에서 〈(NLL 문제에 대해) 우리는 목숨을 걸고 지킨 선이라고 자랑할 것만이 아니라 평화를 만들어 낼 대안도 나와야 한다〉며 〈NLL이라는 분쟁의 선 때문에 우리 국민들이 희생된 것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의 경우 “우리나라 어느 공식문서에도 NLL이 영토적 성격이라고 써 놓은 곳이 없다. NLL은 기본적으로 영토개념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2007년 8월 11일 국회에서 발언하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노무현 정부 인사들은 ‘영토수호’보다는 협상을 통해 북한을 달래는 데 집중했다. 노무현 정부는 북한과 NLL문제를 확실하게 정리하려 하지 않고, 은근슬쩍 넘어가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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