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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주러시아 해군무관 윤종구 제독의 한·러 군사교류 비망록〈1〉

“크렘린 무명용사 묘에 헌화하는 최초의 한국군 장성 보며 전율 느껴”

글 :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gomsi@chosun.com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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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러 수교 직후 함정 교환방문… KAL기 격추 10주기와 맞물려 큰 어려움 겪어
⊙ 러시아 해군, 부산방문 때 함정에 조기 게양하고 추도묵념
⊙ “러 태평양함대 미사일 고속정 타고 한국해군 함정을 블라디보스토크항까지 안내”

윤종구 제독
1947년생. 광주제일고, 해군사관학교(24기), 서울대 경영학과, 하버드대 소련지역학 석사,
조지타운대 러시아지역학 박사 / 합참의장 보좌관, 주영국 국방무관, 주러시아 해군무관,
주러시아 국방무관, 모스크바 주재 군사외교단장(2000~2002), 재향군인회 국제협력실장,
대우조선해양 상임고문 역임 / 보국훈장 천수장(2002), 러시아정부 공로훈장(2004) 수훈
  1992년 7월 26일 송응섭(宋膺燮) 합참 제1차장(육사 16기·작고)은 1990년 9월 한·소 수교 후 군 고위 장성으론 처음 러시아를 방문했다. 러시아 총참모부 칼레스니코프 총참모장(대장)의 초청은 한·러 군사교류의 물꼬를 트는 것이어서 주목받았다. 송 대장을 수행한 이가 당시 영국무관을 마치고 얼마전 주러 해군무관으로 모스크바에 부임한 윤종구(尹鍾九·69) 대령(해사24기·예비역 준장)이었다.
 
  방문 이틀째인 7월 27일 오전 10시, 송 대장은 크렘린궁 인근 알렉산드로프스키 공원에 있는 무명용사 묘에 헌화했다. 1965년 건립된 이 묘는 1941년 11월 모스크바 근처 크루코보 마을에서 독일군과 싸우다 전사한 러시아 병사들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외국 지도자들이 꼭 방문하는 우리의 국립현충원에 해당하는 장소다. 쇼팽의 장송행진곡에 맞춰 송 대장이 꺼지지 않는 불꽃의 기념비 앞에 서서 헌화·묵념하는 동안 양국 국가가 울려 퍼졌다. 윤 대령은 온 몸이 떨리는 전율을 느꼈다.
 
  한국과 소련은 1990년 9월 대사급 외교관계를 맺었고 1991년 9월 서울에 러시아 무관부가 개설돼 니콜라이 우소프 해군대령이 초대 국방무관으로 왔다. 한국은 같은 해 10월 용영일(龍永一) 정보본부장(육사 16기)이 주소(駐蘇) 한국 무관부 개설식을 하고자 윤종구 대령을 대동하고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마투조크 사건
 
  윤종구 제독은 해사와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후 대위 때인 1975년 미국 하버드대로 유학갔다. 소련경제학을 전공해 1978년 석사학위를 마치고 귀국해선 국방정보본부의 소련 분석관으로 일했다. 그를 눈여겨본 이가 당시 합참본부장 유병현(柳炳賢) 육군 중장(육사 특7기)이었다. 유 중장은 대장 진급 후 1978년 11월 창설된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으로 임명됐을 때 윤 소령을 자신의 부관으로 데려갔다. 한미연합사령부 창설의 현장을 경험하고 난 후 1979년 정보본부로 복귀한 윤 소령은 다시 미 조지타운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러시아지역학으로 박사과정을 마친 뒤 1984년 귀국했다. 그가 중령으로 정보본부에서 근무하던 그해 11월 23일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에서 조선어를 전공하고 평양주재 소련대사관에서 통역보조로 일하던 청년 바실리 야코블레비치 마투조크(당시 22세)가 판문점으로 관광 왔다가 군사분계선(MDL)을 넘어온 사건이 발생했다.
 
  마투조크의 미국 망명 요구에 북한군 경비병이 그를 데려가겠다며 분계선을 넘어와 총을 쐈고 우리 측도 응사해 20여 분간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당시 윤성민(尹誠敏) 국방부장관은 윤 중령을 불러 마투조크 합동신문에 참여하라고 지시했다. 서강대 교수로 위장한 윤 중령은 유창한 러시아어로 접근했다.
 
  “여자친구가 있느냐”는 등의 쉬운 질문으로 시작해 마투조크에게 접근하자 마투조크는 놀라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해 카피차 소련 외무차관이 국경회담차 북한을 방문했을 때 자신도 수행했는데, “차관을 따라 상장 계급을 단 북한 장성들이 동행했으며, 대화 내용 중 북한에 T-72 전차와 항공기 등을 제공한다는 내용이 있었다”고 토로한 것이다. 이어진 고급 정보에 윤 장관은 물론 미 CIA(중앙정보국) 한국지부장인 제임스 딜레니도 깜짝 놀랐다고 한다.
 
  윤 중령은 필리핀과 스웨덴 무관 후보로 추천됐지만, 소련이 참가한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능력 있는 소련분석관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따라 무관발령은 취소됐다. 올림픽이 끝나자 정보본부장은 “고생했다”며 그를 영국 무관으로 임명했다. 1988년 11월 그는 임시 대령으로 영국으로 출국해 3년간 국방무관으로 근무 후 1991년 가을 귀국했다.
 
  진급에서 계속 누락됐던 윤 대령은 1991년 7월 부인(이경화 서울음대 강사)과 함께 모스크바로 보름간 여행을 떠났다. 전역 후 민간인으로서 러시아 정착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윤 대령은 러시아에 진출하려는 삼성·현대·대우 같은 기업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었다. 그즈음 그에게 용영일 정보본부장이 뜻밖의 전화를 걸어 왔다.
 
  용 본부장은 다짜고짜 “10월 5일 귀국해 나와 함께 러시아, 폴란드, 체코, 헝가리, 루마니아 등 동구권 5개국에 무관부를 개설하는 일을 한 후 조만간 주러 해군 무관으로 부임하라”고 했다. 1992년 3월 윤종구 대령은 전역을 뒤로하고 초대 러시아 해군무관으로 다시 모스크바 땅을 밟았다.
 
 
  KAL기 격추 10주기에 러시아함정 친선방문이라니
 
1999년 1월 25일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전 주러시아 대사를 지냈던 홍순영 외교부장관이 러시아 무명용사묘(Kremlin Wall)에 헌화행사를 했다. 뒷줄에 이인호 대사가 보인다. 사진=윤종구 제독
  1992년 여름 모스크바를 방문한 송응섭 대장은 해군함정 상호방문에 합의했다. 윤종구 제독은 “함정방문은 국가원수급 공식방문의 성격을 지녀 ‘군사교류의 꽃’이라 불린다”며 “러시아가 북한을 의식해 계속 난색을 표시했지만 교섭 끝에 1993년 9월 역사적인 첫 상호 함정방문이 이뤄졌다”고 말했다.
 
  그때 예상치 못한 장애물이 나타났다. 1983년 사할린 상공에서 대한항공 007기가 소련 전투기에 의해 격추돼 탑승객 269명이 몰살당한 비극적 사건의 10주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대한항공기 피격을 놓고 옐친 대통령이 “소련의 범죄행위”(1992년 11월)라고 했던 사과를 러시아 정부가 1993년 “소련 당국은 이 사건과 관련해 책임이 없다”며 말을 바꾸자, 국내 여론이 최악의 상황으로 바뀐 것이다. 이에 정부는 예정된 러시아 해군함정 방문 행사의 즉각적 연기를 지시했다.
 
  이 같은 지시를 접한 윤종구 해군무관은 경악했다. 러시아 태평양함대 소속 해군함정 3척이 부산을 방문하기에 앞서 1993년 8월 23일 이미 칭다오항에 기항해 5일간의 공식방문 일정에 들어간 것이다. 수교 이후 첫 군사교류인 함정방문을 한국 측에서 요청했다가 일방적으로 연기하겠다고 통보하면 양국 외교관계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방한 러시아함정에 조기 게양을 요구
 
1991년 10월 28일 저녁 모스크바 메트로폴 호텔(Metropole Hotel)에서 열린 주소련대사관 대한민국 무관부 개설 리셉션. 왼쪽부터 윤종구 대령, 한 사람 건너 국방무관 최영하 대령, 용영일 정보본부장, 공로명 대사. 사진=윤종구 제독
  윤 대령은 즉각 주러 한국대사관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러시아 해군사령부로 달려갔다. 인사와 행정을 총괄하는 셀리바노프 해군 제1부사령관(상장)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 대한항공기 격추사건을 기억하는가? 일주일 전부터 한국의 프라임타임 뉴스에 소련의 대한항공기 격추사건이 집중적으로 보도되면서 한국 국민들 중에 러시아를 ‘살인마’라고 부르는 사람들까지 있다.
 
  “알고 있다”. (불같이 화를 내면서) 그게 우리 해군과 무슨 상관이냐. 격추사건은 소련 방공군의 소행이다.”
 
  ―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있다. 알래스카 상공에서 미국이 방공미사일로 소련 민항기를 쏴서 시체 한 구도 못 건졌다고 생각해 봐라. 당신은 미국에 적개심이 안 생기겠나. 내가 부임 후 몇 달도 안 돼 함정방문 불발로 두 나라 외교관계에 치명상을 남기고 사라져야 하나. 나는 한국의 외무부나 합참의 명령대로 당신에게 ‘니엣 비지타(= no visit)’라는 공식서한 한 통만 쓰면 그것으로 내 임무는 끝이다. 그러나 나는 한·러 관계 발전을 위해 한국 관계자들을 설득해 목숨을 걸고 이 자리에 왔다.
 
  “그럼,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윤 대령은 셀리바노프 제독에게 두 가지 제안을 했다. 첫째, 러시아 장병들이 절대 부산 거리에서 술 취해 비틀거리지 않도록 정훈교육을 철저하게 해 줄 것, 둘째, 9월 1일 부산항 정박 러 함정들의 함상 과업정렬시 반기(半旗)를 게양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묵념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윤 제독은 “KAL기를 소련 방공군 요격기가 격추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한국인들은 그저 ‘러시아군’의 소행으로 알기에 해군도 일말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설득했다”면서 “서울올림픽 때 KGB(국가보안위원회)가 참가 선수들의 사전교육을 훌륭하게 해 한국민들이 소련선수단에 호감을 갖고 응원하며 양국수교의 필요성에도 공감했던 것을 상기시켰다”고 회고했다.
 
  윤 제독은 “지금 생각해도 정복을 입은 채 마스트에 조기를 걸고 묵념을 해 달라는 요구는 러측 입장에서는 모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면서 “만약 러시아 해군이 두 가지 요구를 들어준다면 모든 언론에 러시아 친선방문 무드를 조성하고, KAL기 격추가 러시아 해군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적극 홍보하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설득했다”고 말했다.
 
 
  반기(半旗) 내건 러시아 군함
 
처음으로 러시아 전투함에 탑승한 윤종구 해군무관을 러시아 해군 전대장, 함장 등이 찾아와 새벽 3시까지 보드카와 코냑으로 공격(?)했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전우와 같았다. 사진=윤종구 제독
  셀리바노프 제독은 한참 동안 “정훈교육은 시키겠지만, 반기와 묵념은 못한다”고 버텼다. 윤 대령은 그가 “돌아가라”며 어린아이 머리만한 주먹으로 책상을 두드릴 때는 솔직히 겁이 났다. 그러나 용기를 내서 “두 조건을 들어주지 않으면 함정방문은 물론 우리 한국 무관단은 철수해야 할지도 모른다”며 “한국민들에게 러시아 해군의 평화사랑 이미지를 주자”고 버텼다.
 
  셀리바노프 제독은 잠시 생각하다 참모들을 데리고 집무실로 들어가며 “기다리라”고 했다. 러시아 해군함정 방문(8월 30일~9월 3일)이 먼저 성사돼야 한국 해군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답방할 수 있는 것이어서, 윤 대령은 절박한 심정에 몹시 초조했다. 한국발 뉴스에서는 벌써 러시아 해군 방문에 대한 소식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20분 정도 지났을까, 집무실 문이 열리고 셀리바노프 제독과 참모들이 나타났다. 비서실장(대령)이 보드카 몇 잔과 아르메니아 코냑 잔이 놓인 쟁반을 들고 나왔다. 윤 대령은 순간 뭔가 좋은 결과가 있음을 직감했다.
 
  셀리바노프 제독이 “가스파진 윤, 므네 느라비시샤 뜨이(Mr. Yoon, I like you). 다바이(Let’s drink)”라며 건배를 제의했다. 그가 윤 대령을 막내동생처럼 부른 것이다. ‘가스파진(미스터) 윤’이라는 호칭을 썼고, 특히 너(you)라는 호칭 중에서 러시아인들이 격식을 따지는 ‘브이’ 대신, 가족이나 친구 간에 부르는 ‘뜨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그는 보드카를 단숨에 들이켜며, 윤 대령에게도 원샷을 명령(?)했다.
 
  셀리바노프 제독은 “방금 총참모장과 해군사령관과도 협의했다”고 말하며
 
  “당신 하자는 대로 다 할 테니 조건이 하나 있다. 당신 장관에게 보고하라. 대한민국의 모든 언론을 통해 러시아 해군은 평화를 사랑하는 해군이고, 대한항공기 격추 사건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강조해 달라. 양국 해군이 평화를 사랑하는 군대라는 이미지를 이번 상호방문을 통해 알리자. 대신 절대로 부산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없도록 철저히 교육하겠다.”
 
  윤 대령은 감격했다. 그는 “맛좋은 아르메니안 코냑도 어떻게 마셨는지 모르고 대사관으로 돌아와 국방부에 전화보고를 했는데, 정말로 무관으로서 최고의 날이었다”고 회상했다.
 
  이 같은 극적인 윤 대령의 담판으로 마침내 1993년 8월 30일 태평양함대 소속 세 척의 러시아 군함이 사상 처음으로 부산항을 방문했다. 양국 함정이 상대국을 공식 방문하기는 1884년 조선과 러시아가 통상조약을 체결한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러시아함정은 8월 30일 밤을 부산 영도 남방 5마일 해상에 정박, 하룻밤을 보낸 뒤 다음날 오전 7시 우리 구축함 충남함과 각각 예포 24발을 발사, 인사를 교환한 뒤 부산내항으로 진입했다. 8월 31일 러시아 ‘아드미랄 판테레예프호(8700t)’ 등 러시아 해군함정 3척이 부두에 접안했다.
 
  환영식을 마친 러 태평양함대 부사령관 흐멜리노프 중장은 오전 9시30분쯤 판테레예프호 함상 기자회견에서 “태평양함대사령부는 KAL기 희생자 유족에게 사과의 뜻을 표명하며 앞으로 이 같은 비극적 사건은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러시아 방문단은 특히 9월 1일 아침 함상에서 KAL기 희생자 추도 조기를 게양하고 묵념을 올렸다. 우리 언론은 이 사실을 일제히 보도했다.
 
 
  ‘브레드 앤 솔트’ 세리머니
 
러시아 항구를 최초로 방문한 광주함과 마산함이 블라디보스토크의 러시아 태평양함대사령부 앞 제33부두에 정박한 모습. 역사적인 기록사진이다. 사진=윤종구 제독
  1993년 9월 22일은 한국 해군에 역사적인 날로 기록될 만하다. 9월 20일 오전 진해를 떠나 22일 러시아 태평양함대의 모항인 블라디보스토크에 태극기를 휘날리며 한국형 호위함 2척이 당당히 입항했기 때문이다. 우리 해군 방문단은 1500t급 전남함과 울산함 2척에 승조원 285명과 군악대, 의장대, 참관요원 117명 등 모두 402명으로 구성돼 있었다.
 
  윤 제독은 우리 함정의 블라디보스토크 방문 이틀 전 북·중·러 국경인 러시아 프리모르스키 지방의 하산을 택시를 대절해 왕복 12시간 비포장도로를 달려서 다녀온 기억도 생생하다고 했다. 나진·하산프로젝트의 핵심인 남·북·러 3각 복합물류사업은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큰 관심을 기울이는 사업이다. 유연탄을 러시아 하산과 북한 나진항을 잇는 54km 구간 철도로 운송한 뒤 나진항에서 화물선에 옮겨 실어 반출하는 사업이다.
 
  윤종구 제독은 “러시아 태평양함대 소속 미사일 고속정을 타고 이수용(李秀勇, 해사 20기, 해군참모총장 역임) 방문분대사령관이 탄 전남함을 안내하는 임무를 수행한 것도 기억에 남는 일”이라고 했다. 윤 제독은 “블라디보스토크항 13마일 전방 상봉점에서 한국 해군함정을 선도하기 위해 9월 21일 저녁 태평양함대사령부 정문 앞 부두에서 러시아 미사일 고속정에 탔다. 나는 러시아 해군 전투함에 승조한 첫 한국 해군장교였다”고 자랑스럽게 회상했다.
 
1994년 11월 8일 흑해연안 러 흑해함대기지 노보로시스크항에 입항한 한국 해군. 해사 49기생 순항훈련분대 사령관 한상기 제독(준장, 해사 23기)이 러 전통행사인 브레드 앤 솔트(bread and salt) 의식에서 빵을 뜯어 소금에 찍어 한입 먹고 있다. 사진=윤종구 제독
  새벽 3시30분경, 동해 북부해상 랑데부 포인트에 도착, 러시아 고속정 전투정보실에서 레이더를 들여다보니 한국함정들이 2개의 점(點)으로 나타났다. 윤 대령은 한국함정 방문단장 이수용 제독에게 “Korea Navy ship, this is Russia Navy ship, Captain Yoon speaking…”이라며 교신을 열었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새벽 5시 러시아함정과 한국함정 방문단이 해상에서 항적(航笛)을 울리며 수인사를 나눴고, 윤 대령은 사다리를 놓고 기함인 전남함에 옮겨 탔다. 러시아 미사일 고속정은 500m 앞에서 한국함정의 길잡이를 맡았다. 윤 제독은 “그날 새벽은 9월 말임에도 덜덜 떨릴 정도로 추웠다”며 “기함에 올라가니 해사 선배인 이수용제독이 반갑게 맞으며 고생했다는 말과 함께 뜨거운 커피 한 잔을 권했는데, 그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전남함과 울산함은 9월 22일 9시 러시아 해군의 환영을 받으며 블라디보스토크 러시아 태평양함대사령부 33번 부두에 입항했다. 김석규(金奭圭) 주러시아 대사가 승함해 방명록에 기항(寄港) 사실을 적었고, 오전 10시25분 러시아 군악대의 연주 속에 이수용 제독이 하함하면서 공식 환영식이 시작됐다.
 
  러시아 함정방문 행사의 백미는 ‘브레드 앤 솔트(bread and salt)’ 의식이다. 전통의상을 차려입은 러시아 미녀들이 방문한 손님에게 빵과 소금을 대접한다. 윤 제독은 “러시아인들은 흘레브(빵)와 솔(소금)을 생존의 필수 식품으로 여겨 결혼 지참물품으로 가져간다”며 “이수용 제독이 둥그런 빵을 떼어 소금에 찍어 입에 넣자 러 해군들과 고려인 동포들의 환호가 터졌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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