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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결정적 순간

최초 100회 출격 기록한 김두만 전 공군참모총장

“T-6 훈련기로 문산철교 폭파 출격… 실속하는 바람에 죽을 고비 넘겨”

글 :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gomsi@chosun.com

사진 : 조준우  월간조선 객원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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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전쟁 당일, 미군 야크기의 여의도비행장 공습에 T-6 훈련기 9대 살아남아
⊙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에 ‘신념의 조인’ 헤스 대령과 동반출격
⊙ 승호리철교, 미 공군은 500회 출격으로도 못 끊어… 저고도 폭격으로 14소티 만에 폭파

김두만
1927년생. 육군항공사관학교 졸업 / 제10전투비행단장, 주미대사관 공군무관, 공군작전사령관,
공군사관학교 교장, 1970년 제11대 공군참모총장(공군대장) 역임. 1971년 공군 대장 예편 /
을지무공훈장, 중국 운마훈장, 미 공로훈장, 충무무공훈장 수훈
  김두만(金斗萬) 전 공군참모총장(예비역 대장)은 6·25 때 공군 최초로 100회 출격한 ‘전설’이다. 김 전 총장은 작년 5월 23일 최초 국산 전투기 FA-50에 탑승해 후배 조종사와 함께 하늘을 날았다. 그는 충북 청주의 항공우주의료원을 방문해 조종사들도 부담스러워하는 항공생리훈련을 거뜬히 수료했다.
 
  김 전 총장은 1927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나 1949년 학사 5기로 임관했다. 그는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미군에게서 인수한 F-51D기(무스탕)를 몰고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 김두만 전 총장이 1952년 1월 11일 F-51D 전투기로 한국 공군 조종사로는 최초로 100회 출격의 기록을 세웠다.
 
  그때 그는 “제일 침착할 때가 출격 때입니다. 조종복을 입고 조종석에 앉으면 그때부터는 무념무상(無念無想)입니다. 오직 자기가 할 일은 그것뿐”이라는 말을 남겼다. 이후 김 전 총장은 1958년 10전투비행단장, 1963년 공군작전사령관에 이어 1970년 공군 최고의 수장인 11대 참모총장에 올랐다.
 
 
  김정렬 공군총장 권유로 공군 입대
 
  — 언제 조종사가 되기로 결심했습니까.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작은아버지 손에 이끌려 일본 도쿄로 갔어요. 소학교 시절, 학교 상공을 선회 비행하는 경비행기 조종사의 머플러가 멋있어 보여 조종사의 꿈을 키웠습니다.”
 
  김두만은 반도인(조선인)이라는 차별을 뚫고 1943년 9월 일본 육군항공대 소년비행학교에 입교한다. 전쟁 막바지에 달한 제국주의 일본은 조종사난으로 조선인 학생도 선발했다. 김두만은 6개월 동안 비행기 타는 데 필요한 지상교육을 받고 이듬해 3월부터 비행기를 타기 시작했다.
 
  1945년 7월 중순쯤, 김두만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비행훈련을 받고 있을 때, 일본군 최고 지휘부는 동남아 각지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조종학생들을 싱가포르로 불러들였다. 조종학생들에게는 ‘특공대’ 임무 명령이 내려졌다고 한다.
 
  — 어떤 임무였나요.
 
  “쿠알라룸푸르로 돌아가 나카지마 97식 전투기로 급강하, 초저공 침투비행을 하면서 폭격훈련을 시킨 것을 보면, 미 전함에 가미카제식 공격을 가하라는 것 같았어요. 8월 초 갑자기 일본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고 수송기로 중간 기착지인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이동했다가 거기서 해방을 맞았습니다.”
 
  김두만 전 총장은 종전 후 베트남으로 옮겨 포로생활을 하다 1946년 4월 풀려나 고국으로 돌아왔다. 함께 귀국한 40~50명의 일본군 출신 한국인 가운데 김정렬(金貞烈) 초대 공군참모총장도 있었다. 그는 “김 장군이 귀국선 안에서 ‘독립됐으니 곧 군에 비행부대가 생길 때 함께 모이자’라고 했다”고 회상했다.
 
  김두만은 고향인 의령에 내려갔다가 안암동에 사는 의사 매부를 돕기 위해 상경했다. 김 전 총장은 “김정렬 장군의 돈암동 집이 컸는데 항공인들이 모이는 ‘사랑방’ 역할을 했다”며 “1948년 4월 105명과 함께 하사관학교에 입교했고, 1949년 4월 소위로 임관해 L-4, L-5 연락기를 타고 정찰임무를 수행했다”고 했다.
 
 
  국민성금으로 캐나다에서 T-6 훈련기 10대 구입
 
FA-50 전투기에 탑승해 하늘로 비상한 김두만 전 총장(후방석)이 엄지를 치켜들며 FA-50의 성능에 만족감을 표현하고 있다.
  김 전 총장은 “한국에는 공군이 필요 없다는 인식을 가진 미 군정청의 반대와 한국군 내부의 반대로 공군의 독립은 한국전이 발발하기 약 9개월 전인 1949년 10월 1일이 돼서야 이뤄졌다”고 했다. 1949년 10월 1일 육군으로부터 독립 당시 보유한 전력은 고작 항공기 20대(L-4/L-5 각 10대)였다.
 
  전쟁 직후 공군이 보유한 항공기는 L-4 8대, L-5 4대, T-6 항공기 10대를 포함한 총 22대였으며 병력은 장교 242명을 포함 총 1897명이었다. 당시 전투기 및 폭격기 197대와 지원기 29대 등 총 226대의 항공기와 병력 2800여 명을 보유한 북한 공군과는 전투가 불가능한 전력 불균형 상태를 드러냈다.
 
  김 전 총장은 “공군은 독립 이후 북한 공군력 증강을 우려해 미국에 T-6 택산 훈련기 판매를 요청했지만 긴장을 조성한다며 퇴짜를 맞았다”면서 “1950년 5월 국민성금 36만 달러로 캐나다산 T-6 10대만을 도입한 상태에서 6·25전쟁을 맞았다”고 했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대한민국 최초의 금속제 T-6 훈련기를 ‘건국기’라고 명명했다. 캐나다가 파견한 교관 한 명이 10명의 조종사 요원들에게 T-6 훈련기 교육을 시키는 도중에 전쟁이 터졌다.
 
김두만 전 총장이 FA-50 전투기에 탑승해 엄지를 들며 만족감을 표현하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공군 제공
  김 전 총장은 “맥아더 사령부는 한국군에 F-51 무스탕 전투기 10대를 제공하기로 했고, 10명의 선배 조종사들이 전투기 인수를 위해 후쿠오카시 이타즈케(板付)로 떠났다”며 “전쟁 발발 일주일이 지난 시점인 1951년 7월 2일 F-51 10대를 도입, 보유하게 됨으로써 한국 공군 사상 최초로 공중 전투력을 보유하게 됐다”고 했다.
 
  — 6·25 발발 당일엔 어디에 계셨습니까.
 
  “동료들과 영화를 보려고 노량진에서 전차(電車)를 타고 한강대교 북단을 지나고 있었어요. 귀에 익지 않은 항공기 소음과 함께 전투기 2대가 김포 방면으로 날아가는 게 보였죠. 헌병들이 장병들은 복귀하라며 사이렌을 울렸습니다. 용케 여의도기지로 가던 김영환 장군의 스리쿼터를 잡아타고 기지로 복귀했어요. 북한의 IL 10형 및 YAK 9형의 공습으로 풀밭 활주로에 웅덩이가 파지는 등 정신이 없었어요. L-4/5를 타고 문산쪽 정찰비행을 했더니 우리 군의 화력이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고요, 절망적인 상황에서 개전 첫날이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6월 26일, 북한 야크기의 공습은 김두만 중위에게 T-6 연습기를 탈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육군항공대 시절, 미군으로부터 인수한 L-4와 L-5 연락기 20대 가운데 4대가 집단 월북한 데 이어, 국민성금을 통해 캐나다에서 구입한 T-6 훈련기 10대 중 1대를 이명호 소위(학병 출신)가 1950년 5월 전단 살포 임무 수행 중 몰고 월북한다.
 
  김 전 총장은 “월북 사건이 나자 공군 지휘부는 여의도 비행장의 L-4/L-5 연락기와 T-6 훈련기가 지상에 착륙하면 연료를 모두 빼고 연료주입구를 봉인한 채 격납고에 넣어 놓고 경비를 섰다”면서 “그 덕분에 북한의 야크기 공격에 연쇄폭발을 일으키지 않고 9대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했다.
 
 
  첫 출격 임무는 문산철교 폭파
 
6·25전쟁 직후 한국 공군 조종사들이 출격 직전 신고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공군 제공
  5월 26일 저녁, 김정렬 장군(준장)이 여의도비행장을 방문해 김두만 중위를 불렀다.
 
  “김 중위, T-6를 전투에 투입해야겠는데 탈 자신이 있는가?”
 
  “명령만 하시면 타겠습니다. 천으로 만든 L-5 연락기 타다가 죽을 생각을 하니 억울하던 차에 T-6를 타다 죽는다면 여한이 없겠습니다.”
 
  “내일 아침부터 당장 타라.”
 
  김두만 중위는 이튿날 정비사와 함께 여의도공항을 이륙해 수원비행장에서 이착륙훈련과 공중기동훈련을 했다. ‘셀프 독학’이었다. 여의도에 착륙하니 초대 공군작전참모부장(공군 참모차장) 박범집 대령이 김 중위를 불렀다. 박 대령은 T-6 조종 가능 여부를 묻고는 “내일(6월 27일) 아침 10시에 폭탄을 달고 문산철교를 폭격하라”고 했다. 정비사들이 영등포 육군조병창에서 30파운드(15kg)짜리 폭탄 270발과 수류탄을 가져왔고 T-6에 투하장치를 장착해 10발의 폭탄을 달았다.
 
  — 첫 출격의 전과는 어땠습니까.
 
  “문산철교를 폭파하는 날, 날씨가 좋지 않았어요. 1500피트 상공에서 다이빙 바밍을 하려다가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항공기가 균형을 잃고 회전을 하며 곤두박질쳤습니다. 삐~ 소리가 나면서 항공기는 양력을 잃었고 항공기가 통제불능 상태에 빠졌습니다. 조종간을 당기자, 기수가 구름 속에서 빠져나오며 땅이 확 솟아올라 왔어요. 언제 폭탄 투하 버튼을 눌렀는지 모르겠지만 폭탄이 분리돼 항공기와 함께 나선을 그리며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아이쿠, 나도 모르게 조종간을 당기자 T-6는 하늘로 치솟았고, 폭탄은 땅에 떨어져 폭발했습니다. 열린 캐노피로 모래와 자갈, 나무파편이 튀어 들어왔어요. 어렵사리 기체를 안정시키자 고도계가 불과 지상에서 200피트(약 60m)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김 전 총장은 “폭탄이 항공기에 그대로 붙어 있었더라면 낙하속도가 빨라져 항공기를 복원시키기 전에 추락하고 말았을 것”이라며 “폭탄의 위력이 15kg에 불과했기에 망정이지 150kg짜리였다면 후폭풍의 위력으로 항공기도 휴지조각처럼 찢겼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김정렬 총장께 보고를 했더니, 항공역사상 ‘스핀(나선비행) 바밍’을 한 사람은 자네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며 “후방 좌석에 탔던 정비사(윤건섭)는 ‘하느님의 도움으로 살게 된 것’이라며 부대교회에서 간증을 했다”고 회고했다.
 
  6월 27일 김두만 중위가 의정부와 미아리고개 지역을 정찰하며 폭격을 할 때 이미 인민군들은 미아리고개를 넘고 있었다. 공군은 하는 수 없이 수원비행장으로 철수했다.
 
 
  헤스 대령과 20여 회 동반출격
 
6·25전쟁 당시 한국 공군 조종사들을 비행교육 중인 딘 헤스 대령(우측 2번째)의 모습. 딘 헤스 대령은 바우트 원(BOUT-1) 부대장으로서 F-51D 전투기 훈련과 전투조종사 양성을 직접 지휘했다.
  1950년 6월 26일 후쿠오카 이타즈케로 F-51 전투기를 인수하러 간 10인은 그곳에서 훈련을 받고 7월 2일 대구로 오자마자 이튿날부터 출격한다. 바로 그날 6·25전쟁 당시 우리 군 최초로 전투기 편대를 지휘한 에이스 이근석(李根晳) 대령(소년비행병 2기, 장군 추서)이 시흥지구에서 적 전차를 공격하다 대공포를 맞고 적 전차로 돌진해 전사했다.
 
  F-51 무스탕을 인수하러 간 10인의 리더가 전사한 것이다. F-51은 속도도 빠르고 까다로운 비행기여서 일주일 적응훈련을 한 다음 전투에 투입하기에는 조종사들의 경험이 너무 적었다. 김 전 총장은 “김정렬 총장은 ‘전투훈련도 못한 채 출격해 아까운 조종사들만 희생시킨다’며 훈련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했다.
 
  당시 미국은 한국의 요청에 따라 F-51 전투기 10대를 우리 공군에 인도하면서 딘 헤스(Dean E. Hess, 1917~2015) 소령을 군사고문단장으로 파견한다. 헤스 대령은 자신의 F-51D 무스탕 18번기에 ‘신념(信念)의 조인(鳥人)’이라는 글귀를 새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헤스 대령은 이 임무를 수행한 제6146 기지부대의 부대장에 임명됐고 그는 ‘바우트 원’(Bout One)이라는 이름의 한국 공군 건설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헤스 중령이 1·4 후퇴 당시 서울의 고아 1000여 명을 제주도로 후송하는 등 한국 근무기간 동안 세운 공적을 치하하며 은성무공훈장과 대한민국 공군 조종사 휘장을 수여했다. 사진=공군 제공
  김두만 전 총장은 “헤스 대령과 미 공군 조종사들이 편대장과 분대장을 맡고, 한국 공군 조종사들이 2번기와 4번기로써 미군기의 요기(僚機) 역할을 했다”며 “나는 헤스 대령의 2번기로 20여 차례 작전에 따라다녔다”고 했다.
 
  — 언제부터 F-51D 머스탱을 조종하기 시작했습니까.
 
  “전세가 급박해 F-51을 탈 기회를 쉽사리 잡지 못하다가 1950년 10월 초하루, 여의도비행장에서 미 공군 조종사들과 함께 F-51을 탔습니다. 한 시간 정도 공중기동을 해 보니 2차 세계대전 최고의 전투기답게 묵직하고 믿음이 갔습니다. 이튿날 신안주(新安州) 지역의 적 보급로 차단작전에 곧바로 출격했습니다. 북진하면서 미군들과 평양 미림비행장까지 올라갔다가, 중공군이 몰려오는 바람에 출격을 하지 못하고 1951년 11월 초 퇴각했습니다.”
 
  김두만 당시 소령은 1950년 12월 교관조종사로 선발돼 제주도에서 미군조종사와 함께 F-51 조종사를 본격 양성했다. 이때 양성된 조종사들은 1951년 3월 중순부터 미군과 합동으로 출격하게 된다.
 
 
  “100회 출격인 줄도 몰랐다”
 
1952년 1월 11일 한국 공군으로는 처음으로 100회 출격을 달성하고 귀환한 김두만(가운데 위) 당시 소령을 동료들이 축하해 주고 있다. 사진=공군 제공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이근석 연구원에 따르면 공군은 개전 초기 정찰용 항공기에서 손으로 폭탄을 투하하는 항공전 사상 유례가 없는 열악한 작전을 구사했으나, 이후 4단계를 거쳐 전투능력을 발전시킨다.
 
  첫 번째 단계는 1950년 6월 25일부터 1951년 3월 31일까지 미군 전투기의 요기(僚機)로서 전투에 참여한 제1작전기다. 두 번째 단계는 1951년 4월 1일부터 9월 18일까지 제주기지로 이동해 F-51에 대한 본격적인 훈련을 받은 이후 백구부대 작전과 1차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을 통해 단독출격 능력을 키우고 미 공군의 능력전투준비검열(ORI)을 통해 단독출격을 허가받은 제2작전기다.
 
  세 번째 단계는 1951년 10월 11일부터 1952년 10월 27일까지 단독출격을 위해 강릉기지로 10전투비행전대를 전개해 동부 및 중·서부지역에 대한 항공차단작전을 중점적으로 실시했다. 네 번째는 1952년 10월 28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한국 공군과 육군 간 공지합동작전을 수행하면서 후방차단작전을 실시한 시기다.
 
  김 전 총장은 “김정렬 총장은 1951년 초 헤스 대령과 숙의한 끝에 합동출격을 그만두고 한국 공군의 단독출격으로 결론을 냈다”며 “미 극동공군사령부 요원들이 한국 공군의 지리산 공비토벌, 해주 폭격 등 중장거리 전투능력을 평가한 후 유엔공군 산하부대로서 출격해도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김두만 전 총장은 “전투기와 조종사가 증가함에 따라 6·25전쟁 발발 시 L형 항공기와 T-6로 이뤄진 공군비행단에 F-51 전투기가 도입되자 L형 항공기를 분리해 1950년 7월 6일 정찰비행대를, 1951년 8월에는 사천에 ‘제1전투비행단(초대 단장 장덕창)’을 창설했다”면서 “한국공군 사상 처음으로 부대 명칭에 ‘전투’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비로소 싸울 수 있는 공군의 면모를 갖췄다”고 했다.
 
  — F-51 무스탕 전투기를 타고 우리 공군 최초로 100회 출격을 기록했습니다.
 
  “1950년 10월 1일 첫 무스탕 전투기 출격 이후 약 15개월 만인 1952년 1월 11일 금강산 일대의 북한군 보급로를 공습하고 강릉기지로 돌아오니 동료가 모여 축하를 해 주더군요. 100회 출격인 줄도 몰랐습니다.”
 
 
  북한 후방보급의 요충지 승호리철교
 
김두만 전 총장이 주미 무관 시절, 김종필 당시 중정부장이 미 에드워드공군기지를 방문, F-5 전투기에 시승했다. 사진=김두만 전 총장 제공
  김두만 전 총장은 공군이 6·25전쟁 기간 동안 가장 큰 전과로 꼽는 승호리철교 폭파작전을 이끌었다. 그는 “1951년 12월 38도선 인근에서 전선이 고착됐고 지상에서는 연대급 이하의 전초진지 쟁탈전이 반복됐다”면서 “유엔군 지도부는 적의 증원을 차단하기 위해 전 병참선에 대한 차단작전을 공군에 주문했다”고 했다.
 
  — 승호리철교는 전략적으로 어떤 가치가 있었나요.
 
  “북한과 중공군은 중국으로부터 유입되는 많은 군사물자와 장비를 경의선과 만포선을 통해 평양으로 수송했고 이를 다시 평양에서 중동부 전선으로 보급하고 있었습니다. 승호리철교는 평양 동부 10km 지점 대동강 지류인 남강에 설치된 철교로, 중국으로부터 평양까지 수송된 보급물자를 중동부 전선으로 수송하는 북한군 후방보급로의 요충지였습니다.”
 
  미 5공군은 이미 기존 승호리철교를 폭파·차단했으나 북한은 기존 위치에서 하류 방향으로 북쪽 200m 지점을 우회해 새 철교를 가설한 후 주위에 밀집된 대공방어망을 구축했다. 10개의 교각은 침목을 우물정(井) 자 형으로 쌓고 그 공간에는 모래주머니를 채워 폭격이나 기총에 대해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건설했다. 미 5공군은 이 철교를 폭파하려 미 전폭기를 약 500소티(sortie) 이상 출격시켰으나 실패하자 임무를 한국 공군에 이양했다. 임무를 부여받은 공군 10전투비행전대장 김신(金信, 2016년 작고) 대령(6대 공군참모총장)은 공군 최초의 100회 출격 달성자인 김두만 소령에게 임무를 부여했다.
 
  1952년 1월 12일 김두만 소령이 100회 출격을 달성한 이튿날이었다. 아침 7시40분 편대장 김두만 소령의 지휘 아래 2번기 장성태 대위, 3번기 김금성 대위, 4번기 이기협 대위, 5번기 전봉희 대위가 탑승한 F-51 전투기 5기 편대가 강릉기지를 이륙했다. 김두만 전 총장의 증언이다.
 
  “F-51 편대는 편대장의 지휘 아래 표적상공에 도착했고 우선 로켓탄과 기총으로 적 대공포진지를 무력화한 후 500파운드 폭탄 10발을 투하했으나 폭탄이 교각 사이의 모래바닥과 물 속에 떨어져 폭파에 실패했습니다. 대신, 2차 폭격 목표인 황해도 이천의 교량만 부수고 돌아왔어요.”
 
  “첫날 임무에 실패하고 김신 대령과 숙의 끝에 8000피트 상공에서 강하해 3000피트에서 폭탄을 투하하는 미군 전술로는 철교폭파가 불가능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4000피트 상공에서 강하해 1500피트에서 폭탄을 투하하는 저고도 폭격 방안을 구상했어요. 조종사에게는 적 보병의 따발총 세례를 무릅써야 하는 위험천만한 공격방법이었습니다.”
 
  김두만 소령은 1952년 1월 15일 “100회 출격도 했으니 사천으로 내려가 후배 조종사를 양성하라”는 참모본부의 인사명령을 받고 대구로 내려갔고 철교폭파는 후배들이 담당했다. 그날 오전 8시25분 제1편대장 윤응렬 대위와 제2편대장 옥만호 대위가 이끄는 6대의 F-51 전폭기가 적의 대공포화를 뚫고 정확하게 폭탄과 로켓탄을 표적에 투하해 철교폭파에 성공했다. 승호리철교가 우리 공군이 출격한 지 14소티 만에 파괴되는 순간이었다.
 
  공군은 6·25전쟁에서 출격을 통해 적군 889명을 사살하고 건물 1770개 동, 보급품집적소 1203개소, 철교 및 교량 124개, 터널 108개, 포진지 521개, 벙커 521개소 등의 표적에 대해 파괴 또는 손상을 입혔다. 우리 공군도 F-51 항공기를 포함한 총 117대 항공기와, 조종사 39명을 잃었다.
 
  김 전 총장은 “전투기 조종사일 때나, 비행단장일 때나, 참모총장일 때나 최고가 되는 것이 목표였다”며 “공군작전사령관 시절에도 후배 조종사들과 함께 전투기를 타기 위해 금주(禁酒)하는 바람에 오산 일대의 술집 마담들의 공적(公敵)이 됐다”며 껄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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