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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결정적 순간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미군의 첫 지상전

전술적으로는 패배였지만 전략적으로는 승리

글 : 민병돈  전 육군사관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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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대장은 부상, 연대장은 사망, 사단장은 포로가 됐지만…
⊙ 남침 6일 만에 미군의 부산 도착 소식은 국민과 한국군에게 용기를 줘
⊙ 2주간에 걸친 성공적인 지연전으로 한국군과 UN군의 반격 토대를 마련

민병돈
1935년생. 휘문고·육사·국방대학원 졸업 / 육사 전임강사, 고려대 강사 (독어독문학),
제20기계화보병사단장, 특전사령관, 육사 교장 (중장), 경민대 석좌교수.
1950년 6월28일 서울에 들어온 북한군 탱크. 미 스미스부대는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해 유엔군이 상륙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1940년대 후반의 미국. 한 평범한 가정의 가장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가족 생계가 막막해졌다. 직장생활 경험도 없는 미망인이 시작한 ‘막일’로는 아들 형제를 키우며 살아가기가 힘겨웠다. 일찍 철이 든 두 아들은 이런 사정을 알고 고민하다 입대하면 군대에서 봉급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형제가 의논한 끝에 어머니를 위해 군에 입대했다.
 
  14살 버질 월포드(Virgil Wolford)와 16살 랜섬 월포드(Ransome Wolford) 형제는 육군 사병으로 지원했는데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년을 기다린 후에야 형제는 육군에 입대할 수 있었고 훈련을 마친 후 일본에 주둔하는 제24보병사단에 배치됐다.
 
  당시 일본은 전쟁에 참패하며 대도시들은 미군 폭격으로 초토화하고, 산업도 황폐화하여 굶주림 속에 죽어 가는 사람들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아 전체가 지옥으로 변해 있는 형국이었다. 이 ‘지옥’이 미(美) 주둔군에게는 ‘낙원’이 된 것이다.
 
  4년간 태평양과 오키나와에서 처절한 지옥고(苦)를 치른 뒤 일본 본토 주둔군이 된 미군은 위풍당당한 점령군으로 나타나 겁에 질리고 배고파 죽을 지경인 일본 국민의 눈앞에서 막강한 달러화(貨)와 풍족한 물자를 가지고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힘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효자 버질 월포드와 랜섬 월포드 형제가 일본에 도착한 것이다.
 
  형제는 이국의 풍경과 생활환경에 어리둥절해하며 병영생활에 적응해 가고 있었다. 그 당시 미군 장병들의 생활은 청교도 정신이 충만한 미국 사회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초호화판이었다. 미군은 정신이 풀어질 대로 풀어져 ‘역전의 용사’다운 모습은 사라지고 ‘군복 입은 관광객’이 되어 있었다.
 
  어느 날 월포드 형제는 점심식사하던 중 그날, 즉 1950년 6월 25일 새벽 일본에서 멀지 않은 코리아라는 나라에서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그들은 이 뉴스를 그들과는 관계없는 남의 나라 이야기로 무심히 흘려보냈다. 이 전쟁이 그들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 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이튿날 부대 분위기가 뒤숭숭하게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미국이 이 전쟁에 참전할 것이며 이 부대도 곧 그 전장에 투입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이 현실로 바뀌면서 부대는 출동준비 명령을 받았다. 그때부터 2~3일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가운데 그들이 소속된 보병대대는 비행장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미군의 신속한 참전
 
6·25 전쟁 발발 6일 만에 부산에 도착한 미군은 1950년 7월 4일부터 오산 방어 전선에 투입됐다.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며칠 전 본국으로부터 지상군 투입을 지시받은 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는 제8군 사령관 워커(Walton Walker) 중장에게 우선 제24보병사단을 선발대로 투입할 것을 명령했다. 이어 군사령관의 명령을 받은 제24사단장 딘(William F. Dean) 소장은 선박으로 한국 부산을 향해 이동할 사단의 본대에서 비교적 군기가 서 있는 제21연대의 제1대대에 구경 105mm 곡사포 1개 포대(중대, 포 6문)를 배속하여 대대급 특수임무부대(Task Force)를 편성한 후 대대장 스미스(Charles B. Smith) 중령 지휘하에 7월 1일 부산 수영비행장으로 공중 이동하도록 조치했다.
 
  부산에 도착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Task Force Smith)는 즉시 북상하여 그 이튿날인 7월 2일 아침 8시에 대전에 도착했다. 이는 그 당시 한국의 열악한 도로사정으로 볼 때 대단히 신속한 기동이었다.
 
  7월 4일 오후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증강된 대대규모)가 평택에 도착한 후 대대장 스미스 중령은 지원 포병대대장 페리(Millero Perry) 중령과 함께 예하 소총 중대장 및 포대장들을 대동하고 더 북쪽으로 진출하여 오산을 지나 그 북방의 죽미령(竹美嶺) 일대를 정찰한 후 그곳 두 개의 고지를 방어진지로 선정했다. 남북으로 관통하는 국도의 좌우(동서)에 위치한 표고 100m와 90m의 야산이지만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대에 배속된 구경 105mm 곡사포대는 그 고지들의 1800m 후방에 진지를 정했다.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야간 행군으로 그 이튿날인 5일 새벽 3시에 대대장이 선정한 진지에 도착하여 장병들이 어둠속에서 비를 맞으며 각자 지정된 위치에 호를 파기 시작했다. 그 작업을 버질과 랜섬 월포드 형제도 함께 했다. 작업이 끝난 새벽 5시에 둘이 함께 호 속에 들어가 자리 잡고 계속해서 내리는 비를 맞으며 춥고 배고프고 피곤한 몸으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경험이 일천한 이들 형제가 함께 같은 호 속에 배치된 것은 분대장의 배려 덕분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점령지 일본에서 일본인들의 ‘극진한 서비스’를 받으면서 극락에서나 누릴 법한 호강을 하며 지내던 귀하신 몸들이 지금은 낯선 코리아의 오산 북방 이름 모를 고지에서 ‘지옥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 중이다.
 
  이른 아침,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미리미리 무엇이든 먹어 두라”는 지휘자의 지시에 따라 대원들은 배낭에서 시레이션(C Ration·휴대식량)을 꺼내 비를 맞아 가며 덜덜 떨면서 젖은 비스킷과 통조림 고기로 고픈 배를 채웠다. 그러는 사이 밤새 멀리서 들려오던 포(砲)소리가 이제 가까운 데서 나는 폭음으로 증폭되어 들려왔다.
 
  아침에 비가 그쳐 가고 있는데 7시35분 “수원 남쪽에 적 탱크 8대가 남하하고 있다”는 상황이 전파됐다. 북쪽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장병들의 눈에는 아직도 적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처음으로 직면하게 된 실전상황 앞에 장병들의 긴장은 더해만 가고 기분 나쁜 침묵이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었다.
 
 
  전투의 시작
 
총탄에 구멍 난 헬멧을 보고 있는 미군.
  “꽝, 꽝”, 천지가 진동하는 폭음이 갑자기 장병들 등 뒤쪽에서 들려오자 모두가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1950년 7월 5일 아침 8시16분, 6·25 참전 미 지상군의 야포가 적을 향해 초탄을 발사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한동안의 시간이 지난 후 보병대대의 박격포들도 사격하기 시작했다. 고지에서 바라보니 적 부대가 마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분산도 하지 않은 채 종대 대형으로 탱크들을 앞세우고 유유히 다가오고 있었다.
 
  적이 아군 방어진지에 접근하자 보병 대전차화기인 구경 75mm 무반동총(포)과 구경 2.36인치 로켓포들로 적 탱크들을 집중 사격하여 명중했지만 적의 소련제 T-34탱크를 파괴하지는 못했다. 이렇게 되면 아군은 사기가 떨어지고 적은 사기가 오르게 되어 있다. 적이 고지의 방어부대 소총사거리 안에 이르자 참호 속의 장병들은 소총, 기관총 등 소화기 사격으로 맞섰다. 이때부터 쌍방 보병들 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미군들의 피해가 속출하는 가운데도 버질과 랜섬(월포드) 형제 역시 흥분하여 적을 향해 총을 쏘고 또 쏘았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러는 가운데 적과의 거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겁에 질려 몸을 움츠린 소년병 형제의 몸은 점점 호 속으로 가라앉았다. 잠시 후 이 호에서는 더 이상 총소리가 나지 않았다. 과부가 돼 어렵게 살아가는 어머니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이 될까 하여 군에 입대한, 이 갸륵한 소년병 형제가 여기서 이렇게 생을 마감한 것이다.
 
  대대장 스미스 중령과 예하 중대장들의 용감하기 이를 데 없는 전투지휘에 장병들은 흔들림 없이 적의 치열한 공격을 막아 내고 있었다. 열흘 전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호강하던 ‘군복 입은 관광객’의 모습에서 지금 이곳에서는 강한 전사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는 것이다. 유능한 지휘관의 리더십은 참으로 불가사의하고도 위대하다.
 
  예상 밖으로 강한 저항에 직면한 적 제4사단은 포병의 화력지원을 받는 2개 연대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를 포위공격하고 탱크들은 방어진지 측방으로 우회하여 진지 후방의 곡사포대를 향해 돌진해 들어왔다. 이에 포대는 공격해 오는 적 탱크들을 곡사포로 직접 조준사격하여 선두의 적 탱크 2대를 파괴했다. 안타깝게도 더 이상 적 탱크를 쏠 수 없었다. 포대가 가진 대(對)전차고폭탄(HEAT)이 단지 6발뿐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포대는 적 탱크에게 유린당하고 말았다.
 
  고지에서는 지금 쌍방 보병들 사이에 공방전이 한창이다. 스미스부대의 고전이다. 이 부대가 포병 1개 곡사포대(포 6문)로 증강되었다고는 하지만 대대 병력은 편제상의 정원에 반(半) 정도밖에 되지 않는 406명이었다. 이 보병406명을 표고 100m와 90m의 두 고지에 나누어 배치하여 기세등등한 적 2개 연대의 공격을 막아 내느라 악전고투하고 있는 중이다.
 
  날씨마저 구름이 끼어 공군의 근접항공지원(C.A.S)도 받지 못하고 대대에 배속된 105mm 곡사포대의 화력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다. 적의 포격으로 포대와의 사이에 전화선이 끊어지고 무전기마저 파손되어 보병대대와 포대 사이에 교신이 어렵게 된 데다 이어서 적 탱크가 포 진지에 돌진하여 포대를 유린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아침부터 지금까지 4시간 동안 버티며 힘겹게 고지를 확보하고 있는데 적은 포위망을 압축해 오고 있다.
 
 
  로켓포를 메고 직접 전투에 참여했다가 포로가 된 사단장
 
미군 제24사단의 방위계획에서 가장 중요했던 평택·천안 방어선이 무너지고 대전까지 적에게 점령됐다. 이 전투에서 사단장 딘(Dean) 소장(가운데)은 적의 포로가 됐는데 그는 전투 중 로켓포를 직접 어깨에 메고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그동안 대대는 전사자와 부상자가 속출하여 병력이 많이 감소했다. 스미스 중령은 지금의 상황에서 중과부적임을 알면서도 부대가 전멸을 당하면서까지 이 고지를 지킬 필요는 없다고 판단하여 철수할 것을 생각하고 있다. 자기 자신도 부상한 몸으로 효과적인 전투지휘를 계속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이번 방어전에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대대)는 배속받은 포대 134명을 포함한 540명 병력 중 3분의 1인 181명이 전사 또는 실종하고 그 밖에 대대장 스미스 중령을 포함한 대다수의 병력이 부상했으며 대대의 구경 4.2인치 박격포 2문과 75mm 무반동총(포) 2정 등 중화기를 포함한 각종 장비를 잃었고 배속된 포대도 야포와 트럭 등 대부분의 무기 및 장비를 잃었다.
 
  마침내 그는 적의 공격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근접 항공지원과 포병 화력지원도 받지 못하면서 상당한 피해를 각오하고 철수를 단행하여 평택을 지나 안성에서 제34연대 제3대대와 합류한 후 다음 날(6일) 천안으로 후퇴했다. 7일 천안에서 사단장 딘 소장은 평택지역에서 후퇴해 온 제 34연대장 러블리스(J. B. Loveless) 대령을 힐책, 해임하고 새로 과감하고 유능한 마틴(R. R. Martin) 대령을 연대장으로 임명하고는 그에게 기대를 걸었다.
 
  8일 아침 8시 천안 방어전에서 신임 연대장 마틴 대령은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직접 2.36인치 로켓포로 적 탱크를 쏘았으나 오히려 적 탱크의 반격으로 장렬히 전사했다. 사단은 5일 오산지역 방어전의 시작으로부터 성공적인 지연전으로 한국방어를 위한 시간을 벌어 주었지만 19일 대전지역 방어전에서 사단이 적의 포위공격을 받아 고전할 때 사단장이 직접 새로 보급된 신형 구경 3.5인치 로켓포를 메고 적 탱크를 쏘아 파괴하는 모습을 부대원들 앞에서 보여주며 독전했지만 결국 사단은 와해되고 그 자신도 측근들로부터 분리되어 홀로 사흘을 굶어 가며 산야를 헤매다가 적에게 포로가 되고 말았다.
 
  6·25 참전 미군 선두부대 제24보병사단이 2주간에 걸친 지상전으로 적의 상대적 우세 앞에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되어 ‘전술적 패배’를 당하기는 했지만 성공적인 지연전으로 한국군과 UN군의 반격에 토대를 마련한 ‘전략적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이 부대가 북한의 남침 6일 만에 한국땅 부산에 도착했다는 소식은 그 즉시 언론보도를 통해 퍼져 나가 실의에 빠진 한국 국민과 당황했던 한국군에게 용기를 주었고 북한과 그 배후 소련 및 중공(중화인민공화국) 수뇌부에, “북한이 남침해도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들의 판단이 오판이었음을 알게 해 주었다.
 
  이는 마오쩌둥(毛澤東)의 중국공산군이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승리하여 장제스(蔣介石)의 국부군(國府軍)을 몰아내고 1949년 10월 1일 중국대륙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함에 따라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한반도의 적화(赤化)는 곧 일본의 적화로 이어질 수 있고 그것이 미국의 가상 적국인 소련과 중공의 태평양 진출로 이어져 미국의 안보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위기의식에 기인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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