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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 Insight

완전히 달라진, 한국전에 대한 세계사적 인식

“제3차 세계대전[冷戰]의 승리를 가져온 위대한 항전”

글 :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mongo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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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에 대한 자학적 역사관을 버리고, 이승만과 트루먼 동상을 광화문에 세워야 한다!

⊙ “저한테 고맙다고 하지 마세요. 나를 키워 준 이는 바로 당신들입니다” (글로스터대대 출신 참전자)
⊙ “한국의 전후 발전은 마셜 플랜, 일본 근대화보다 더한 성공”(핼버스탐 기자)
⊙ “50년 전 한국의 능선을 지켜 낸 용감한 병사들 덕분에 멋지고 행복한 젊은이들이 베를린 장벽 위에
    올라가 (공산권의 붕괴를) 자축할 수 있었다”(클린턴 대통령)
⊙ “한국전 덕분에 일본 경제부흥, 독일 재무장, NATO 강화, 한미동맹, 미군 배증 등으로 대소 포위망
    완성”(미 국방부)
⊙ 압도적 병력에 의한 기습을 받고도 절망적 상황을 이겨낸 이승만 대통령과 국군은 세계의 문명을
    지켜낸 위대한 영웅
⊙ 한국전의 패자는 스탈린·모택동·김일성, 승자는 이승만·트루먼
⊙ 이제 필요한 것은 북한 독재자 김정은의 피
한국전쟁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사진은 1950년 6월 28일 중앙청을 거쳐 남대문을 향해 달리고 있는 인민군 탱크(위)와 이듬해 유엔군의 북한 원산지역 폭격 모습.
  수년 전 CNN을 보는데 뉴스 자막에 ‘핼버스탐 기자, 자동차 사고로 사망’이란 뉴스가 나오는 걸 보고 놀랐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버클리의 캘리포니아 대학 언론학 전공 학생이 모는 차를 타고 가다가 충돌한 차 속에서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향년 73세였다.
 
  핼버스탐 기자가 교통사고로 죽기 전에 원고를 완성한 유작(遺作)은 《가장 추운 겨울(The Coldest Winter)》이다. 한국전을 다룬 책이다. 미국의 월남전 개입을 비판적으로 다뤘던 그는 한국전(戰)에 참여한 미군과 한국군의 역할을 매우 호의적으로 그렸다. 그는 한국전 참전 미군들이 좌절하고 실망해 자신의 과거를 당당히 밝히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고 썼다. 전쟁이 무승부로 끝났기 때문이었다. 한국전 참전은 자랑스런 과거가 아니라 ‘부끄러운 과거’로 치부되기도 했었다. 그래서 미국 언론은 한국전을 ‘잊혀진 전쟁’이라고 불렀다. 냉전(冷戰)에서 서방세계가 이긴 후 한국전의 역사적 평가가 긍정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한국전 참전용사들도 자신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가장 큰 원인은 한국의 발전이었다.
 
 
  “한국의 발전은 마셜 플랜보다 더한 성공”
 
데이비드 핼버스탐(David Halberstam) 기자. 그는 자신의 유작(遺作) 《가장 추운 겨울(The Coldest Winter)》에서 한국의 전후(戰後) 발전에 대해 최상급의 찬사를 보냈다.
  월남과 미국 지도부를 혹독하게 비판해 반전(反戰)기자로 분류되기도 하였던 핼버스탐은 《가장 추운 겨울》의 결론 부분에서 한국의 전후(戰後) 발전에 대해 최상급의 찬사를 보냈다. 그는 한국의 발전은 마셜 플랜에 의한 유럽의 부흥보다 더한 성공이라고 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피폐해진 유럽을 재건하기 위한 미국의 경제원조는 독일, 프랑스 등 이미 산업적 전통의 기반이 있는 나라에 준 것이었다. 한국은 정치적·문화적·산업적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더구나 전란(戰亂)으로 폐허가 된 가운데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하였기에 더욱 빛난다는 것이다.
 
  그는 개화기에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한국인의 잠재력을 간파한 점에 주목했다. 교육에 대한 유교적 존중심, 잘살아 보려는 열망, 제한된 조건을 최대한 활용하는 능력, 그리고 일본인에 못지않은 근로 윤리. 하지만 이런 잠재력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제약으로 구현될 수가 없었다. 해방과 전쟁으로 미국이 한반도에 등장함으로써 이 숙명이 깨진다.
 
  한국을 괴롭혔던 주변 국가와 미국은 달랐다. 가장 크게 다른 점은 한국에 대한 무지(無知)였다. 오히려 이 점이 도움이 되었다고 핼버스탐은 평한다. 미국은 한국 땅에서 기꺼이 자국(自國)의 아들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지만 정복자(征服者)로 온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지도하에서 한국은 처음엔 군사적으로, 다음엔 기술적으로, 그 다음엔 산업적으로 근대화하기 시작하다가 민주화까지 이루었다.
 
  핼버스탐은 한국전을 계기로 커진 한국군(軍) 장교단이 이런 놀라운 속도감으로 전개된, 혁명과 진화가 혼합된 한국형 근대화의 주체세력이었음을 높게 평가한다. 미국의 웨스트포인트를 본뜬 한국의 사관학교 교육이 젊은이들을 모아 능력 위주로 가르치고, 사회적 제약을 돌파할 수 있는 개혁 세력으로 키워 냈다는 것이다. 그는 장교단이 새롭고 현대화한 사회를 만들어 낸 요람이었다고 했다.
 
  그는 “1960, 70년대 한국의 발전은 역경을 극복하는 데 있어서 위대한 교훈을 남긴 경이로운 인간 드라마”라고 표현했다. 한국 현대사의 발전 속도는 너무나 빨라 위대한 지도자 이승만(李承晩)까지 퇴장시켰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李) 박사를 존경하지만 역사가 그를 무너뜨린 것이다. 그런 사태 발전을 지켜본 나는 너무 가슴이 아팠다.”
 
  핼버스탐은 한국의 민주화에 끼친 미국의 영향 중 하나를 이렇게 소개했다.
 
  “미국에 유학 간 한국 학생들은 충성스러운 시민이 되는 것과 자유를 누리는 것은 모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국에 충성하면서도 정부를 비판할 수 있다는 점을 배운 것이다.”
 
  19세기에 조선에 온 선교사들이 감지(感知)할 수 있었던 한국인의 장점들 즉, 어려운 일을 해 내는 능력, 엄청난 규율, 그리고 교육에 대한 열정이 거국적(擧國的) 차원에서 폭발하면서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화는 아무도 막을 수 없는 대세(大勢)가 되었다는 것이다.
 
 
  영연방 글로스터대대 출신들의 감동
 
한국전 참전 호주 군인은 “전쟁 때는 아이들이 모두 말이 없고 겁에 질려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가 떠들고, 유쾌하며, 행복해 보인다”고 했다.
  서울에서 활동하면서 영국의 《더타임스》 등 여러 언론기관에 기사를 쓰는 앤드루 새먼 기자는 영연방(英聯邦) 글로스터대대(大隊)의 결사항전(決死抗戰)을 다룬 《마지막 한 발까지》라는 책을 썼다. 그는, 1951년 4월 하순 중공군의 대공세로 포위당한 영연방 군(軍)의 영웅적 전투(설마리 전투)를 취재하며 여러 생존 참전자들을 만났다. 상당수는 전란 중의 한국에 대한 끔찍한 기억 때문에 “그런 나라는 생각하기도 싫다”는 반응을 보였다. “우리의 희생은 헛된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을 다시 찾은 참전자들은 달라졌다.
 
  책의 한 대목이다.
 
  〈그들은 새롭고, 용감한 나라 한국을 발견한 것이다. 유엔군이 흘린 피값은 미국의 돈으로 보증되고 한국인의 땀으로 상환되었다. 미국으로부터 무역과 기술이전에 특혜를 받은 데다가 권위적 정부가 들어서고, 유일한 자원이자 발전의 지렛대인 사람에 투자함으로써 한국은 세계 13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올림픽을 열기 전해엔 국민들이 들고일어나 민주화까지 이뤘다. 오늘의 한국이 누리는 생활수준과 개인의 자유는 유럽의 중급 정도가 된다.〉
 
  2001년 글로스터대대 전투 50주년을 맞아 한국을 방문한 참전자 일행은 전쟁기념관을 찾았다가 깜짝 놀랐다. 의장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부시 대통령 환영 행사에 잘못 온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했다고 한다. 한 참전자는 “한국이 이런 나라가 되다니, 하느님, 맙소사 믿을 수 없습니다”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허리띠가 고장 나서 상점에 들어갔더니 주인은 새 허리띠를 주면서 돈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당신은 우리의 자유를 위하여 싸웠잖아요. 작은 선물입니다.”
 
  새먼 기자는 ‘zero to hero’란 표현을 쓰면서 한국처럼 전란의 잿더미 속에서, 그야말로 제로 상태에서 일어나 영웅적 나라를 만든 것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국가적 성공 사례라고 주장했다. 헨리 울프스라는 영국군 참전자는 이 책(《마지막 한 발까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남북한 생활수준의 차이를 본다면 자유가 공짜가 아니란 말이 맞다. 반세기가 흘러서 뒤돌아보니 ‘잊혀진 전쟁’은 정의로운 전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존 프레스턴 벨 씨는 저자(著者)와의 인터뷰에서 오히려 한국인들에게 감사했다.
 
  “주는 것(giving)과 사랑하는 것(loving)의 공통점이 뭘까요? 차이가 없습니다. 같은 거예요. 50년 전 나는 내 생명의 1년을 주었습니다. 하마터면 (생명을) 잃을 뻔했지요. 나는 한국인들이 내가 준 그 작은 것으로 무엇을 하였는지 모르고 지냈습니다. 내가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그들의 감사를 받고는, 그리고 그들이 만든 완전히 새롭고 멋진, 유쾌한, 평등하고, 야심만만하며, 번영하는 새 나라를 만든 그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저한테 고맙다고 하지 마세요. 내 인생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어 준 이는 당신들입니다. 나를 (가치 있는 인간으로) 키워 준 이는 바로 당신들입니다.’”
 
  새먼 기자는 이 감동적인 문장으로 자신의 저서를 끝냈다.
 
 
  클린턴, “한국전은 우리가 이긴 전쟁”
 
2013년 7월 27일 한국전 60주년 기념행사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한국전은 무승부가 아니고 이긴 전쟁이며, 특히 동서 냉전의 승리는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도 비슷한 역사관을 피력했다.
  2013년 7월 27일 워싱턴의 한국전(韓國戰) 기념물 앞에서 열린 휴전 60주년 행사에서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기념사를 통해 “한국전은 무승부가 아니고 이긴 전쟁이며, 특히 동서 냉전의 승리는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한국전은 이긴 전쟁입니다. 가난과 압제 속의 북한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5000만명의 한국인들은 활력(活力) 있는 민주제도를 갖고,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경제대국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으니 한국전은 이긴 것이고 우리의 자랑스런 유산(遺産)입니다.”
 
  2000년 6월 25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국전 50주년 기념식에서도 당시 클린턴 대통령은 비슷한 역사관을 피력했다.
 
  “포성(砲聲)이 멈추었을 때 상당수 사람들은 한국에 간 우리 군대가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한 일이 무엇인가,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전쟁은 38도선에서 시작되어 38도선에서 끝났으니까요. 나는 오늘 감히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역사라는 긴 렌즈를 통해 뒤돌아보면, 미국이 한국에서 버티어 낸 덕분에 냉전에서 우리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50년 전 한국의 능선(稜線)을 지켜 낸 용감한 병사들 덕분에 10년 전 멋지고 행복한 젊은이들이 베를린 장벽 위에 올라가 (공산권의 붕괴를) 자축(自祝)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은 결코 역사를 과대 해석하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한국전(韓國戰) 계기로 대소(對蘇) 포위망 완성
 
미국 국방부가 발간한 《전쟁의 시련(1950~53)-The Test of War, History of the Office of the Secretary of Defense》. 이 책에는 미국이 한국전을 냉전 승리의 시작으로 보는 이유가 담겨 있다.
  미국 정부는 왜 한국전을 냉전 승리의 시작으로 보는가? 미 국방부 장관실 공간사(公刊史)인 《전쟁의 시련(1950~53)-The Test of War, History of the Office of the Secretary of Defense》은 결론 부분에서 한국전이 세계사의 흐름에 끼친 영향을 이렇게 요약했다.
 
  〈한국전은 20세기 후반의 세계정세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제2차 세계대전만큼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할 만하다. 세계를 두 무장(武裝) 진영으로 나눈 점, 미국과 소련 사이의 정치적 군사적 대결, 두 강대국 사이의 전쟁을 막는 데 있어 핵무기에 대한 의존의 증대, 유럽과 동아시아에서 미군의 장기 주둔, 거대해진 미국의 군산(軍産)복합체-이런 현상들은 한국전에 의해 만들어졌거나 강화되었다. 전쟁기간(1950~53) 미국은 소련과 공산주의를 막기 위한 지도자의 역할을 완벽히 떠맡게 되었다. 미국은 유럽의 NATO 맹방(盟邦)들을 지키는 데 최고의 우선순위를 뒀다. 한국전은, 늘어가는 소련의 핵무기 재고(在庫)에 대응해 미국이 핵무기 제조와 운반 수단(폭격기, 미사일, 잠수함)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했다. 평화 시(時)에도 외국과 군사동맹(NATO)을 유지한다는 것은 미국 역사상 가장 이례적인 외교 정책이었다. 아시아에서 일어난 한국전쟁이 유럽에 대한 소련의 위협을 증폭시켜 NATO 회원국들로 하여금 통합 지휘체제를 구성하고 더 많은 군사력과 자원을 이 동맹에 제공하도록 만든 것은 일종의 패러독스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스탈린이 사주한 김일성의 남침과 중공군의 개입을 역이용, 소련을 봉쇄하는 전략을 완성하고 본격적으로 군비경쟁을 시작한다.
 
  〈일본과 평화협정을 맺은 이후 미국은 일본,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그리고 한국과 상호방위 조약을 맺게 되었다.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지상군(地上軍)에 가장 많은 병력을 제공한 서독과는 달리 일본은 헌법의 제약으로 소규모 자위대만 보유, 방위비를 절약하고 미국에 의존하게 되었는데 이 덕분에 장기적으로 경제적 이익을 보았다. 일본이 산업 대국으로 부상(浮上)하게 된 것은 일본이 한국전 때 한반도에서 싸우는 한미(韓美) 군대에 대한 보급 및 정비 기지로 이용된 덕분이다. 한국전은 NATO와 다른 나라에 대한 미국의 군사 원조를 세 배나 늘리게 했다. 한국전은 미국이 범(汎)세계적 규모의 동맹과 군사원조 정책을 완성하고 지속되게 하였다. 이에 따라서 미국 국방부는 정책 수립의 주요 참여자가 되었으며 세계인들은 펜타곤을 미국 군사력의 상징으로 여기게 되었다. 1953~54년 미국 방위비(원자력 에너지 및 기타 非국방부 예산 포함)는 연방예산의 3분의 2를 차지하게 되었고, 병력은 두 배로 늘었으며,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에 대한 관심으로 국민들은 무기한에 걸쳐 평화 시에도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게 뒷받침하였다.〉
 
  요약하면, 한국전을 계기로 미국은 일본의 경제부흥, 서독의 재무장, NATO 강화, 한미동맹, 미군 배증(倍增), 해외주둔 강화 노선으로 대소(對蘇) 봉쇄망을 완성, 그 40년 뒤 소련을 무너지게 만들었다는 이야기이다. 냉전 승리의 시작이 한국전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승만과 트루먼 동상을 광화문에 세워야 할 이유
 
한국전 당시 미군의 특별자금 구매액의 약 10%는 일본이 생산하는 무기, 탄약, 장비를 사는 데 쓰였다. 이는 일본 무기 산업의 부활을 촉진했다. 한국전 당시 탄약을 생산하는 일본 근로자들.
  그렇다면 6월 25일의 재해석이 필요하다. 남침과 동족상잔의 강조에서 벗어나 이제는 세계사적 관점에 서서 승리의 날로 기념하면서 아직도 끝나지 않은 한반도 냉전을 자유통일로 종식시킬 것을 다짐하여야 맞지 않을까?
 
  그렇게 해석해야 피의 대가(代價)를 제대로 계산할 수 있다. 한국전에서 목숨을 바친 한국군, 미군 등 유엔군은 45년간(1946~1991년) 지속된 냉전에서 자유진영이 승리, 수많은 인류가 자유와 번영을 누리도록 하는 데 고귀한 피를 흘린 셈이다. 이 한국전을 지도한 이승만과 트루먼은 냉전(冷戰) 승리를 예약한 영웅이고 인류(人類)의 은인(恩人)이다. 특히 압도적 병력에 의한 기습을 받고도 절망적 상황에서 버티어 낸 이 대통령과 국군은 세계의 문명을 지켜 낸 위대한 인간들이다. 이는 이승만과 트루먼 동상을 광화문광장(또는 용산 전쟁기념관)에 세워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국민 교육을 위해 영웅을 만들어 내는 판인데, 있는 영웅도 짓이기는 못난 국민이 되어서야 쓰겠는가?
 
  한국전이 냉전 승리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은 정치인과 기자들뿐 아니라 한국 학자들을 제외한 세계의 거의 모든 학자가 동의하는 정설(定說)이 되었다. 헨리 키신저(닉슨 정부 때 안보보좌관을 지낸 美中 화해의 주역)는 《외교》라는 저서(著書)에서 이렇게 썼다.
 
  〈(공산주의자들이) 도전하였을 때 미국 정부는 기존의 전략을 폐기하고 맞서기로 결정하는 용기를 보였다. 한국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점령되면 아시아에서 미국의 입장, 특히 일본과의 중대한 관계가 약화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세계의 지도국이 되기 위한 첫 번째 시험에서 합격했다.〉
 
  카터 대통령 때 안보보좌관을 지낸 전략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큰 장기판》이란 책에서 냉전에서 자유진영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를 지정학적(地政學的)으로 설명했다. 소련과 중공을 중심으로 한 공산진영이 유라시아 대륙의 중앙부를 차지했지만 미국을 위시한 자유진영은 그 양단(兩端), 즉 서유럽과 극동에 교두보를 구축하고, 1949년 소련에 의한 베를린 봉쇄와 1950년 북한군의 38선 돌파를 무력화(無力化)시키는 데 성공했다. 한국전에서 미국과 소련은 핵무기 때문에 제한전을 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결국 비(非)군사적 분야에서 결판을 지어야 했다.
 
  〈정치적 활력, 이념적 융통성, 경제적 역동성, 그리고 문화적 매력이 결정적 요인이었다. 미국이 이끈 연합세력은 단결을 유지했지만 소련·중공 진영은 분열했다. 민주진영은 유연성이 있는 데 반해 공산진영은 서열적이고 독단적이어서 오히려 부서지기 쉽다는 점을 입증했다. 소련은 문화적으로 위성국가들로부터 경멸을 받았지만 미국은 우방국들로부터 존경과 찬사를 받았다.〉
 
  한반도에서 소련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막은 한국인들은 휴전하의 경제·정치·문화 경쟁에서 북한에 이겼고, 이것은 자유진영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었다. 공산진영을 동(東)과 서(西)에서 감제하는 초소 및 자유진영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쇼윈도 역할을 한 곳이 베를린과 서울이었다. 냉전시대 서독과 한국을 지켜낸 아데나워와 이승만은 세계사적 차원의 반공지도자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아데나워, 한국전을 이용하다
 
한국전의 영웅으로 꼽히는 딘 애치슨 미 국무장관, 리지웨이 8군사령관, 백선엽 장군, 김종오 장군(왼쪽부터).
  한국전쟁으로 미군 병력이 한반도에 집중되면서 유럽은 막강한 소련군의 위협에 노출되었다. 독일의 재무장을 두려워하던 프랑스 등 서유럽 국가들도 생각을 달리했다. 이 상황을 이용한 이가 아데나워였다.
 
  그해 8월 17일 아데나워는 서독지역을 점령 관리하고 있던 연합국(美英佛)의 고등판무관(高等辦務官)들에게 서유럽의 방어력 강화를 요청함과 동시에 서독의 경찰력으로서 15만명의 방위대 창설을 신청했다. 8월 29일엔 뉴욕에서 열릴 예정인 미·영·프랑스 외무장관 회담에 즈음해 두 장의 각서를 작성, 제출했다. 요지는 국제적인 서유럽군이 창설된다면 서독은 군대를 제공할 용의가 있으며 그런 공헌의 대가(代價)로서 서독에 평등한 권리를 주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서독에선 재무장에 반대하는 여론과 운동이 격화되어 아데나워의 지지율은 한때 24%까지 떨어졌다. 지방선거에서 집권 기독교민주당은 잇따라 패배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당당하게 맞섰다. 그는 “스스로 안보를 책임지려 하지 않고 미국의 부모들에게 자식들을 희생시켜 달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주권회복을 위해서도 재무장은 불가피하다”고 했다. 아데나워는 국방부 설립을 위한 준비기구를 발족시키고 노동조합의 협조를 얻는 한편 주권(主權) 회복을 위한 연합군과의 협상을 진행시켜 반대론을 눌렀다. 1952년 5월 ‘서방 측 3개국과 독일연방공화국의 관계에 대한 조약’이 조인됨으로써 서독은 주권을 회복, 국제사회에 복귀하고 NATO의 일원으로서 냉전 시대 서방세계 방어의 한 기둥이 됐다.
 
 
  누가 승전의 영웅인가?
 
한국전의 패자는 전쟁을 일으킨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이고 진정한 승자는 이승만 대통령(왼쪽)과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다.
  한국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냉전)의 승리를 가능하게 하였다면 그 역사 속에 영웅이 있어야 할 것이다. 미국 등 해외 학자들은 미군 파병을 결단한 트루먼 대통령, 그를 외교 전략적으로 보좌한 딘 애치슨 국무장관, 서울을 점령하고 남진하는 중공군을 저지, 반격에 성공한 리지웨이 8군사령관 등을 영웅으로 꼽는다. 맥아더의 인천상륙 작전은 높게 평가되지만 중공군의 개입에 대한 어이없는 오판(誤判)과 문민(文民) 대통령에 대한 항명(抗命)과 해임으로 종합적 평가는 그리 높지 않다(한국은 예외). 한국군 장군으로는 다부동 전투의 영웅 백선엽(白善燁), 춘천을 3일간 방어하여 적(敵)의 전략을 흩뜨려 버린 김종오(金鍾五) 6사단장이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
 
  누구보다도 한국전의 흐름을 주도한 두 최고 지도자는 이승만과 트루먼 대통령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상대적으로 낮은 이유는 좌익들의 선동과 전쟁 중 피해를 본 이들의 반감, 그리고 전쟁의 본질에 대한 학자들의 무지(無知) 등이 결합된 때문이다.
 
  한국군과 이승만은 북한 김일성의 기습을 받고도 중과부적(衆寡不敵) 상태를 무릅쓰고 총력전에 의한 결사항전을 이어 나갔다. 한국군은 후퇴는 했지만 항복하진 않았다. 부대 단위의 항복이 없었다(반면 북진 때 북한군은 조직이 와해되었다). 75세의 이승만 대통령은 남침 며칠간은 거의 잠을 자지 않았다. 초인적 집중력으로 전쟁 지도를 했다.
 
  그는 6월 25일 오전 10시, 남침상황을 보고 받은 직후, 곧바로 하와이에 머물던 구축함 3척에 대한 신속한 귀국지시(11:00 경)를 시작으로 무초 대사와 회동(11:35), 주미대사관에 전화(미국지원 요청, 13:00), 긴급국무회의(14:00), 미국에 무기와 탄약지원 요청(오후), 미 극동군 사령부에 전투기 지원 요청(오후), 무초 대사와 회동(22:00이후),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군사경력자회의 지시(22:00이후) 등의 조치를 취했다. 다음 날에는 새벽부터 맥아더 장군실에 전화(03:00), 무초대사에게 전화(04:30), 내무부 치안국 방문(아침), 대통령 지시로 군사경력자회의 개최(10:00), 국회 본회의 참석(11:00~13:00), 육군본부와 치안국 상황실 방문(14:00), 서울 시경국장 피란 건의 접수(21:00), 27일엔 주미대사관에 전화(01:00이후), 맥아더에게 전화(주미대사관 전화 이후), 신성모와 조병옥 등으로부터 피란 건의 접수(02:00), 경찰의 청량리 적(敵) 전차 진입 보고에 따라 경무대 출발(03:00), 서울역 출발(04:00) 등의 행적을 보였다. 미국에 지원을 요청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고 총력전 태세를 갖추는 등 전쟁 지도의 방향을 정확하게 잡았다.
 
 
  “종말에선 선이 악을 이긴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한 1954년 8월, 당시 은퇴 후 고향인 미주리주(州) 인디펜던스 자택에서 살고 있던 트루먼 전 대통령을 방문해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다. 이 사진은 6·25 남침 전쟁 때 한국의 공산화를 저지한 두 자유투사의 만남을 담은 유일한 사진이다. 사진=Harry.S.Truman Library and Museum
  이승만은 6월 25일 오전에 경무대를 방문한, 무초 대사에게 “즉 필요하다면 모든 남녀와 어린이까지 막대기와 돌을 가지고라도 나와서 싸우라고 호소하겠다”고 했다. 〈전쟁기간 한국은 군과 경찰뿐만 아니라 여군, 학도의용군, 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소년병, 유격대, 노무자 등 전(全) 국민이 북한 공산주의와 맞서 싸웠다. 특히 대한민국이 가장 위기를 맞았던 낙동강 전선에서 더욱 그랬다.〉(남정옥 박사)
 
  기습을 받은 한국군과 이승만 대통령이 1940년의 프랑스군처럼 항전(抗戰) 의지를 포기하고 무너졌더라면 미군이 한국에 오기 전에 전쟁은 끝났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은 트루먼과 함께 세계사를 좋은 방향으로 바꾼 한국전의 두 영웅이다.
 
  이승만이 서둘러 서울을 떠난 점은 그가 포로가 되면 한국군의 저항이 불가능해진다는 점을 고려하였을 때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후퇴하는 군과 민간인들이 도강(渡江)하기 전에 한강 다리를 폭파한 것은 군의 실책이었지 대통령이 책임질 수 없는, 전쟁에선 흔히 있는 실수일 뿐이다.
 
  한국전에서 한미 군이 버틴 덕분에 국제적으론 대만은 독립을 유지했고, 일본은 경제부흥을, 서독은 재무장을 해 미국 측에 서게 됐다. 아울러 NATO가 강화되면서 미국은 국방비를 세 배로 늘리고 자유진영을 결속시켜 대소 포위망을 완성, 40년 뒤 소련을 무너뜨렸다.
 
  한국 안에서도 혁명적 변화가 일어났다. 반공자유민주주의 체제가 확립되고, 국군이 막강해지면서 장교단이 근대화의 주체세력으로 등장하고, 대기업이 일어났으며, 자본가 기업인 과학자 기술자가 역사의 중심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김일성의 남침이 없었더라면 박정희(朴正熙)는 불만 많은 민간인으로서 생애를 마쳤을 것이다. 박정희를 경제발전의 지도자로 불러들인 것이 김일성이었다. 그 박정희가 체제경쟁에서 김일성을 코너로 몰았으니 이 또한 악에 대한 신비한 응징이 아닌가?
 
  트루먼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클라크 클리포드 전 국방장관은 미군 파병을 이렇게 정의하였다.
 
  〈나는 제국을 보존한다는 목표가 아니라 이상(理想)을 지키기 위해 지구의 반 바퀴나 떨어진 곳의 전쟁에 참여할 나라가 (미국 말고는) 지구상에 달리 없다고 생각한다.〉
 
  트루먼은 한국전 참전 결단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결정보다 더 어려웠다고 고백했다. 트루먼의 파병 결정에 대해 여러 가지 학문적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가장 근본에 깔려 있었던 것은 그의 선한 마음일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8월 15일 건국 선포일 연설의 첫마디로, “우리는 민주주의를 믿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민주주의가 더디지만 종말에 가서는 선이 악을 이긴다는 이치를 믿어야 할 것입니다”고 강조했다. 한국은 비열한 기습 남침에 민주주의적으로 싸워서 이긴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7월 19일 트루먼에게 보낸 편지에서 〈위대한 귀국(貴國)의 병사들은 미국인으로서 살다가 죽었습니다만, 세계 시민으로서 그들의 생명을 바쳤습니다〉고 했다. 그는 이어서 〈공산파쇼 집단(Comminazis)에 의해 자유 국가의 독립이 유린되는 것을 방치한다는 것은 모든 나라들, 심지어는 미국 자신까지도 공격받는 길을 터 주는 길이 됨을 알고 나라 사랑의 한계를 초월하면서까지 목숨을 바쳤던 것입니다〉면서 〈본인은 우리의 대의(大義)가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리라는 데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습니다. 본인은 정당성(right)과 강력함(might)이 우리 편이란 사실을 잘 압니다〉라고 예언했다. 이 대통령은 한국전을 선과 악의 대결로 보고, 〈이 전쟁은 남북한 대결이 아니라 소수의 공산주의자와 절대다수 한민족(韓民族)의 대결이다〉고 정의했다.
 
  한국전 관련 외교 문서를 읽다가 보면 공산진영 지도자들은 술수만 논하는데 자유진영 지도자들은 대의(大義)를 항상 따지는 것이 대조적이다. 세계사의 큰 흐름 속에서 한국전을 놓고 넓게 들여다보면 김정은의 멸망은 그 누구도 멈출 수 없는 대세(大勢)임을 실감하게 된다. 단, 조건이 있다. 한국인들이 풍요에 취해 국가적 자살을 하지 않는 경우에 한해서이다. 제퍼슨은 “민주주의는 애국자와 독재자의 피를 마시면서 크는 나무다”라고 했다. 한국전에서 흘린 애국자의 피는 충분하고도 남아 세계의 자유와 평화에 밑거름이 되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북한 독재자의 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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